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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창조를 위한 고통의 시대

감시의 세계에서 되새기는 마틴 루서 킹의 연설

 

 

아리엘 도르프만 Ariel Dorfman

설가, 미국 듀크대학 교수. 아르헨띠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유년기를 보낸 후 칠레에 정착해 집필활동을 시작했으며, 삐노체뜨의 쿠데타로 말미암아 미국으로 망명했다. 국내 번역 출간된 저서로 장편소설 『체 게바라의 빙산』 『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 소설집 『우리 집에 불났어』, 시집 『싼띠아고에서의 마지막 왈츠』, 희곡집 『죽음과 소녀』,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 등이 있다.

 

 

19638월의 무더운 여름날, 링컨기념관 계단에서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이 그 유명한 연설을 한 이래 너무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백악관에 흑인 가족이 들어가 살게 되었고, 공식적인 인종분리정책은 옛말이 되었다. 더는 네이팜 탄이 베트남 사람들의 머리나 지붕 위로 떨어지지 않으며, 베트남의 대통령이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얼마 전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50년 전에는 의료보장제도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던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보장하기 위한 보건법이 이제 통과되었다. 당시에는 동성애자들이 어디서나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고 살았지만—스톤월 폭동1)은 연설 6년 후의 일이었다—이제는 연방대법원이 동성 부부에게 연방정부가 보장하는 복지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바로 한해 전인 1962년,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은 획기적인 생태학의 고전 『침묵의 봄』(Silent Spring)을 출간했는데, 당시로서는 고독한 성과였다. 오늘날에는 지구의 사멸을 막으려는 활발한 운동이 미국을 비롯한 지구 전역에서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다.

1963년에는 핵의 파괴력이 매 순간 인류를 위협했으나, 지금은 새로운 국가들로 핵무기가 확산되고 있음에도 내일 당장 일만개의 히로시마가 인류에게 쏟아져내리리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별로 변한 게 없기도 하다.

지난주, 워싱턴 행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높이 들린 플래카드들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외국 땅에서 벌이고 있는 무인항공기 전쟁의 종식을 요구하는 외침, 일자리와 동등한 대우에 대한 요구, 대량 투옥, 낙태권 제한, 교육비 삭감, 미국 내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 그리고 이민자가 당하는 착취와 박해에 대한 항의, 미국의 주마다 확산되고 있는 유권자 억압법에 대한 경고. 수많은 트레이본 마틴(Trayvon Martin)2)의 사진 위로 떠올라 대기를 가득 채운, 총기폭력을 비난하고 은행에 대한 과세를 요구하는 구호. 더불어, 확보할 수 있는 모든 영역을 점거하고 국가를 민중에게 돌리도록 우리 모두를 독려하는 도전의 함성.

그렇다.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사실 별로 변한 게 없다.

내 삶도 그렇다.

 

암살의 순간에 듣게 된 연설

나는 지난주의 행진에 참여하지 못했다. 개인사정이 허락했더라면 물론 동참했을 것이다. 아내 앙헬리까와 자동차에 올라타서 노스 캐롤라이나 주 더럼(Durham) 시에 있는 우리집에서 네시간 정도만 운전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였다.

50년 전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멀리 칠레에 살고 있었고, 워싱턴에서 그런 행진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몰랐다. 당시 나는 스물한살이었고, 내 세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위한 투쟁에 얽혀 있었다. 내 삶에 아주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될 킹의 연설을 나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5년 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그 말, 승리에 대한 정서적 확신으로 가득 찬, 감미로운 바리톤의 음성으로 울려퍼지던 그 주문(呪文)을 처음으로 듣게 된 순간의 장소, 날짜, 심지어 시간까지도 나는 무서우리만치 또렷이 기억한다. 196844일, 마틴 루서 킹이 암살당하던 바로 그날이었으므로 나는 그 일을 분명히 기억할 수 있다. 그날 이후, 그의 꿈과 그의 죽음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강렬히 자리잡았고, 거의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나는 지금도 캘리포니아의 대학촌, 버클리의 언덕배기에 위치한 거실에서 앙헬리까와 한살배기 아들 로드리고와 함께 앉아 있던 당시의 정황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는 우리가 칠레를 떠나 버클리에 도착한 지 한주도 채 못되었을 때였다. 우리가 살 아파트가 준비되는 동안 한 미국인 가족이 너그럽게 임시숙소를 제공했는데, 그 집 주인이 마침 텔레비전을 켰던 것이다. 우리 모두 엄숙하게 야간뉴스를 시청했는데, 아마도 유명한 CBS 앵커 월터 크론카이트(Walter Cronkite)가 진행한 뉴스가 아니었나 싶다. 바로 거기서 멤피스 호텔에서의 마틴 루서 킹 암살 소식이 전해졌고, 미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동에 관한 첫 보도에 이어 마침내 킹의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의 긴 발췌화면이 나왔다.

마틴 루서 킹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가 이 세상을 하직함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잃게 되었는지 그때야 비로소 나는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바로 내 눈앞에서 그는 우리의 전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종종 그의 연설로 되돌아가서, 거기 담긴 산더미 같은 의미들로부터 내가 매번 발 딛고 올라서서 세상을 이해할 새로운 바위를 캐내곤 했다.

하지만 킹의 연설에 대한 나의 즉각적인 반응은, 그의 웅변에 대한 경이감을 제외하곤, 영감을 얻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당혹스러웠고 약간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이 평화의 사도가 살해당한 일은 결국 끈기있게 그의 유산을 지키려는 맹세가 아니라 흑인 슬럼가의 맹렬한 폭동으로 이어졌다. 선거권을 박탈당한 흑인들은 자신에게 감금과 궁핍의 상징인 게토를 불사름으로써 죽은 지도자의 원수를 갚고 있었다. 킹이 옹호한 비폭력이 쓸모없다는 것, 이 세상의 불평등을 끝장낼 유일한 방법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것, 그리고 힘 있는 자들을 주목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무서워 떨게 만드는 것임을 선언하기 위해 불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킹의 암살은 60년대 후반의 나를, 그리고 그토록 많은 활동가들을 이미 괴롭히고 있던 질문을 잔인하리만치 정면으로 제기했다. 근본적인 변화를 이룰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 말이다. 과연 우리는 마틴 루서 킹이 그리던 대로 원한과 증오의 잔을 마시지 않고, 우리의 적이 우리를 대했던 것과 다른 방식의 반란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정의의 궁전과 형제애의 밝은 날에 이르는 길에는 필연적으로 폭력의 들판이 펼쳐져 있는 것인가? 진정 폭력은 혁명의 피할 수 없는 산파인가?

 

마틴 루서 킹과 혁명적 칠레의 꿈

이런 질문은 내가 칠레로 돌아가자마자 답해야 했던 것이다. 모호한 이론적 고찰을 통해서가 아니라, 창조되고 있는 역사의 일상적 현실에 몸담고서 대답해야 할 질문이었다. 그 현실이란 쌀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칠레가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사회주의 건설을 시도한 최초의 나라가 된 1970년 이후의 사태들이다. 수십년에 걸친 투쟁과 사유로 다듬어진 아옌데의 사회개혁 비전은 판이하게 다른 정치적문화적 전통에서 나왔음에도 킹의 것과 유사했다.

예컨대 아옌데는 전혀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며, 물리적인 힘이 영적인 힘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킹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그는 사회적 조직화에서 나오는 힘을 믿었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피델 까스뜨로(Fidel Castro)와 체 게바라(Che Guevara)가 제안한 무장투쟁에 매료되어 있을 때, 우리시대의 두가지 과제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한 점은 아옌데만의 독보적인 업적이었다. 곧, 지구상의 빼앗긴 자들이 민주주의와 시민적 자유의 확대를 추구하는 일, 그리고 그에 병행하여 사회적 정의와 경제적 권익증대를 추구하는 두가지 과제였다.

불행히도 아옌데의 운명은 킹의 운명을 반복했다. 멤피스에서 킹이 죽은 지 5년 후, 칠레 싼띠아고의 대통령궁에서 아옌데는 워싱턴의 지지를 등에 업고 그의 민주정부에 반대하여 일어난 군사 쿠데타 한복판에서 죽음을 택했다.

그렇다. 킹의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가 나온 지 10년이 지난 1973911일의 첫번째 911 사건에서 아옌데는 자신의 꿈을 수호하며 죽기로 했다. 마지막 연설에서 아옌데는 ‘머지않아’(más temprano que tardes) 칠레의 자유로운 남녀들이 더 나은 사회를 향하여 ‘가로수가 늘어선 큰길’(las amplias alamedas)을 걸을 날이 올 것이라고 단언했다.

내가 처음으로 마틴 루서 킹과 진지하게 교감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참혹한 패배의 직접적인 여파 속에서였다. 그때 우리는 칠레의 권력자들이, 우리 자신은 그들에게 행사하기를 원치 않았던 공포정치로 우리를 위압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리의 비폭력이 처형과 고문, 실종으로 되돌아오던 바로 그때, 그 군사 쿠데타 이후에야 비로소 링컨기념관에서의 킹의 연설이 내게로 돌아와 머릿속을 떠나지 않게 되었다.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칠레를 떠나 오랜 세월 지속된 망명길에 접어들고야 그의 목소리와 메시지가 한마디 한마디 내 삶 속에 완전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폭력이 정당화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우구스또 삐노체뜨(Augusto Pinochet)가 이끄는 칠레 군사정부에 저항할 때였을 것이다. 삐노체뜨와 그의 장성들은 합헌정부를 무너뜨리고 많은 시민을 살해, 고문, 투옥, 박해했는데, 이들 시민의 급진적 죄상이란 정의의 강물이 흐르게 하기 위해 반대자들을 학살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마음속에 그린 일이었다.

 

미시시피와 발빠라이소의 개들

하지만 아주 현명하게, 거의 본능적으로 칠레의 저항세력은 다른 길을 택했다. 천천히, 확고하게, 또 위태롭게, 아무리 작은 곳이라도 가능한 모든 공적 영역을 장악하며 독재권력을 나라 안팎에서 고립시켜갔고, 시민불복종 운동을 통해 칠레를 통치할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갔다. 이런 방식은 미국 민권운동이 주창한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정말이지 칠레를 독재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걸린 그 17년의 세월보다 내가 마틴 루서 킹을 더 가깝게 느껴본 적은 없다.

1963년 워싱턴으로 몰려든 투사들에게 신념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던 킹의 말이 내 가슴속에 메아리치며 비통한 마음을 위로했다. “여기 나온 여러분 중에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겪은 분들이 있다는 것을 저는 모르지 않습니다. 좁은 감방에서 이제 막 나오신 분들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할 때, 그는 나에게, 또 우리 모두에게 예언자처럼 말하고 있었다.

“자유를 추구한다는 이유만으로 폭풍처럼 몰아치는 박해와 경찰의 만행에 시달려야 하는 곳에서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창조를 위한 고통’의 베테랑이십니다”라고 천둥처럼 고함칠 때, 그는 우리에게, 또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첫번째 항의시위에 나서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 다음 시위에 나서는 일이고, 다시 그다음 시위에 나서는 일, 즉 자그마한 매일의 행동에 참여하는 일이며, 그 작은 행동들이 모여서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결과를 이룩할 수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앨라배마와 미시시피의 보안관과 개들이 싼띠아고와 발빠라이소(Valparaiso)의 거리에서도 살아 날뛰었듯이, 무방비 상태의 남녀와 어린이로 하여금 깔아뭉개지고 구타당하고 폭격당하고 짓밟히면서도 자신이 가진 유일한 무기, 그들의 육체가 견뎌내는 고통과 그 어떤 것도 그들을 돌아서게 만들 수 없다는 확신이라는 유일한 무기를 들고 억압자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말도록 격려하던 정신 역시 살아 움직였다.

미국의 흑인처럼, 칠레에서 우리는 빼앗긴 도시의 거리에 서서 노래했다. 흑인 영가(靈)는 아니지만, 어느 땅이든 그곳 나름의 노래가 있다. 칠레에서 우리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에서 따온 「환희의 송가」를 거듭 불렀다.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되는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노래했다.

우리는 왜 노래했던가? 물론 용기를 얻기 위함이었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칠레에서 우리가 노래를 부르며 물대포와 최루가스와 곤봉에 맞선 것은 다른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대중매체를 명민하게 이용할 줄 알았던 마틴 루서 킹의 선례를 따랐다. 결국 경찰국가와 그 국민 간의 어울리지 않는 대치의 광경은 사진으로 찍히고 영화로 만들어져 다른 사람들의 시야로 옮겨졌다. 미국 남부 깊숙한 곳에서 벌어진 사건의 관객은 다수의 미국인이었다. 반면, 몇해 뒤 더 남쪽 깊숙이 칠레에서 벌어진 투쟁에서 공포정치의 대행자가 평화를 사랑하는 남녀들을 찍어누르는 일상적인 광경은 국내외 세력 모두를 겨냥하여 보도되었는데, 삐노체뜨와 그의 대외의존적인 제3세계 독재정권은 이들 국제세력의 후원에 생존을 의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전술은 효력을 발휘했다. 우리 이전에 간디와 킹이 그랬듯이, 우리의 적이 여론에 휘둘리고 창피당할 수 있음을, 그리고 결국 어쩔 수 없이 권력을 내놓게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미국 남부에서 인종분리정책이 패배한 것이 이런 식이었다. 그리고 1988년의 국민투표에서 칠레 국민이 삐노체뜨에게 패배를 안겨준 것도 이런 식이었으며 이 국민투표는 1990년 칠레의 민주화로 이어졌다. 이것이 바로 전세계 폭군들의 몰락사이고, 버마의 거리에서 ‘아랍의 봄’ 도시들에 이르기까지 지금 그 어느때보다 더 많이 들려오는 이야기이다.

 

감시의 시대에 만나는 킹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가? 45년 전 킹이 죽던 날 처음 들었던 그의 연설로 돌아가면, 거기에 나를 위한,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한 메시지가 아직도 담겨 있을까?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다시 들어야 할 무언가가 그 연설 속에 있을까?

만약 마틴 루서 킹이 살아 돌아와 자신의 죽음 이후 변한 조국의 모습을 성찰한다면, 그는 무어라 말할까? 2011911일, 뉴욕과 워싱턴을 덮친 공포와 살육이 어떻게 자기 나라 국민을 두려움과 복수심에 가득 찬 사람들로 만들어놓았는지, 어떻게 더이상 꿈꾸기를 포기하고 안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유를 제한당하는 국민으로 바꾸어놓았는지를 본다면 어떨까? 안보에 대한 집착 때문에 비대해진 첩보활동과 군산복합체가 터무니없이 날뛰게 된 현실을 본다면 그는 뭐라고 할까?

자국민의 그런 두려움을 조종하여 타국을 그 나라 사람들의 의지에 반해 침략하고 점령하는 일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지켜본다면 그는 뭐라고 할까? 그가 투표소로 데려가기 위해 열심히 싸웠던 바로 그 시민들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최근의 법률에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부유한 자는 번창하고 가난한 자는 점점 더 무시와 경멸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보면서 얼마나 큰 슬픔으로 그의 심장이 옥죄어들까? 간섭하고 중재하고 결정을 내리는 돈의 힘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의 1퍼센트와 그 나머지 사이에 깊어지는 간극의 심연을 바라보면서 그는 어떤 비애를 느낄까?

자신이 피해 당사자였던 정부의 감시가 이제는 너무 일상적으로 만연한 나머지 전화가 있거나 이메일을 사용하는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잠재적 감시대상이 되는 현실을 그는 어떤 말로 질타할까? 미국 내외에서 이러한 정책과 기구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분연히 일어나 목소리를 높이고, 앞으로 나아가며, 결코 절망의 계곡에서 뒹굴지 말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렇게 믿는다. 이제는 꽤 먼 과거가 된 그날 그가 에이브러험 링컨 동상의 그림자를 딛고 했던 연설의 몇마디를 되풀이하리라고 말이다. 추측건대 그는 미국의 잠재력을 다시 한번 긍정할 것이다. 분명 그는 자신의 꿈이 미국의 꿈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또한 미국의 꿈은 지금 이 순간의 난항과 좌절에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지적할 것이다. 그의 국민이 떨쳐 일어나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진리가 옳다고 확신한다”라는 말로 요약되는 건국이념의 참된 의미를 실현하며 살아갈 능력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 대한 그의 믿음이 과거나 현재나 변함없이 옳은 것이기를 희망하자. 그를 위해, 또 우리를 위해, 미국에 대한 그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우리시대의 자유와 정의를 위해 함께 일어서라고 죽음과 공포 저 너머로부터 그들과 나라 안팎의 우리 모두에게 요청하는 그의 맹렬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에 50년 후의 그의 동포들이 다시 한번 귀 기울이기를 희망하고 또 기원하자.

번역 | 이종임(李鍾姙)영문학 박사, 풀브라이트 공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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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진보 성향의 미국 온라인저널 탐디스패치(www.tomdispatch.com)에 2013년 8월 27일 게재된 칼럼으로, 원제는 “A Time for Creative Suffering: Martin Luther Kings Words in a Surveillance World”이다. 각주는 모두 옮긴이의 것이다. Ⓒ Ariel Dorfman / 한국어판 Ⓒ 창비 2013

1) 1969년 뉴욕의 술집 스톤월 인(Stonewall Inn)에서 경찰이 동성애자들을 폭력적으로 단속한 데 항의하며 일어난 사건.

2) 2012년 미국에서 백인 자경단원 조지 짐머먼(George Zimmerman)에게 검문 중 살해당한 흑인 소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