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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 정이현 장편소설 『안녕, 내 모든 것』

 

상실, 혹은 노스탤지어의 귀환

 

 

정여울

문학평론가. 저서로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마음의 서재』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잘 있지 말아요』 등이 있음.

 

정이현 鄭梨賢

소설가.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 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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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곳

 

난 언제나 너에게 말을 하지 못하고

그대 눈빛이 마주칠 땐 고개 돌리며 다른 얘길 하네

내 마음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나의 이 아픈 가슴을 너는 아는지

나의 진실을 이해하는지

—서태지와 아이들 「내 모든 것」 중에서

 

우리는 어떤 소설을 읽을 때 ‘이건 내 이야기 같아’라는 연대감을 느낄까. 물론 주인공과 비슷한 체험을 공유했을 때일 수도 있지만, 내 경우는 체험의 내용이 아니라 내면의 정서를 닮았을 때 더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안녕, 내 모든 것』(창비 2013)은 내 경험과 비슷하지는 않지만 그때 그 시절 내가 느낀 쓸쓸함과 상실감을 닮은 소설이기에 주인공과 친밀감을 나눌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소설의 인물들과 많이 다르다. 세미처럼 감정을 노련하게 절제하지도 못하고, 지혜처럼 모든 것을 일일이 기억하지도 못한다. 준모처럼 사랑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지혜처럼 자신의 운명에 대해 하릴없이 투덜거렸고, 세미처럼 어떤 어른에게서도 마음의 안식처를 찾지 못했으며, 준모처럼 망설이고 더듬거리다가 끝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담긴 문장을 털어놓지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을 파고드는 외로움은 응급상황이 아니라 공기처럼 가족처럼 익숙해져야 할 생의 전제조건임을 아프게 가르쳐준 것. 그것이 나의 90년대였다. 그때를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사람과 공간은 이제 내 곁에 없지만 여전히 90년대는 내 모든 것이 발아한 꿈의 인큐베이터다. 정이현 작가와 나는 각자의 ‘내 모든 것’이 담겨 있는 90년대에 대해 흠뻑 수다를 떨고 싶었다. 우리의 인터뷰는 90년대라는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술단지를 놓고 벌이는 정겨운 뒤풀이였다.

 

1990년대와의 끝나지 않는 작별인사

 

정여울 『안녕, 내 모든 것』을 출간하신 지 넉달 조금 넘었네요. 그동안 출간기념 강연이나 인터뷰를 진행하시면서 이 소설의 의미가 더 각별히 느껴지셨을 것 같습니다. 『안녕, 내 모든 것』은 이전의 다른 소설들에 비해 굉장히 허심탄회한 느낌, 작가가 스스로를 더욱 자유롭게 드러낸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십대들의 이야기니까 시간상으로는 좀 거리가 있지만 마음속 깊이 오랫동안 숨겨둔 얘기들을 이제는 편안하게 꺼내놓는 듯해서 독자 입장에선 기존 소설보다 훨씬 친밀하게 느껴졌습니다.

정이현 네.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는 맞습니다. 구체적으로 형태가 잡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언젠가는 1990년대를 ‘나만의 방식’으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소설가가 되기 전부터 있었고, 그 욕망이 이 소설의 모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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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문학평론가. 저서로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마음의 서재』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잘 있지 말아요』 등이 있음.

정여울 ‘안녕, 내 모든 것’이라는 제목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데요. 작가는 무엇을 ‘내 모든 것’이라고 지칭하는 걸까, 그럼 나만의 ‘내 모든 것’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되지요. 또 “안녕” 하면서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반대로 무언가에게 “안녕” 하며 떠나보낸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안녕이라는 단어 자체에 정반대의 두가지 의미가 스며 있으니까요.

정이현 『창작과비평』에 처음 연재했을 때는 ‘내 모든 것’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그 원래의 제목 자체가 이 이야기의 단초, 최초의 실마리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내 모든 것」은 1992년 발매된 ‘서태지와 아이들’ 1집 테이프 앨범 B면 첫번째 곡이기도 해요.

정여울 아, 이제 ‘내 모든 것’의 의미가 좀더 잘 전달되는 것 같네요. 사실 저 같은 경우는 십대의 어떤 짧은 시절이 ‘내 모든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만큼 십대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거든요. 서태지 1집의 곡 이름이라고 하시니까 이 책의 90년대적 정서와 어우러져서 소설의 제목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이 더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정이현 A면의 첫번째 곡이 「난 알아요」고 B면의 첫번째 곡이 「내 모든 것」이거든요. 「난 알아요」와 「내 모든 것」. 이 두 제목이 상징적으로 90년대의 어떤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해요. 서태지가 저와 1972년생 동갑이어서 더 남다른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지만, 시시한 스무살이던 제게 돈암동, 강남역, 명동 등등 어디든 울려퍼지던 서태지의 노래는 큰 충격이었어요. 제 청춘에서 아주 중요한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각인되어 있죠. 「내 모든 것」은, 있었던 것 같기도 없었던 것 같기도 한 노래랄까요. 「난 알아요」와 「내 모든 것」에는 둘 다 ‘나’라는 일인칭이 들어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저는 그 점이 90년대가 새로울 수 있었던, 그 이전 시기와 구별되는 아주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모두’의 모든 것이 아닌 ‘나의’ 모든 것이라는 명명이 말이죠. 우리가 ‘알아요’라고 할 때는 당연히 ‘상식’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죠. 일반적으로 두루 아는 것. 그러나 서태지는 콕 집어 선언하지요. ‘나는 안다’라고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아요.’ ‘나는 그걸 알아요.’ ‘그걸 내가 아는 게 중요해요.’ 이런 의미죠. ‘내 모든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 소녀가 아무리 별볼일 없이 평범한 이웃집 소녀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나에게는 소중하잖아요. ‘나의 모든 것’이니까. 90년대는 이런 ‘나’들의 감수성이 처음으로 발견되기 시작한 시기, 개발된 시기라고 생각해왔어요. 그렇다면 내가 쓰는 90년대의 이야기는 ‘내 모든 것’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야 하지 않을까 했어요. 나중에 단행본으로 묶으면서 제목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하게 되었는데, 한국어의 ‘안녕’에 담긴 이중적인 뉘앙스가 ‘내 모든 것’ 앞에 붙으니까, 전체를 아우를 제목으로 괜찮겠다 싶더라고요.

정여울 제목의 탄생 자체가 많은 것을 얘기하고 있네요. 이야기가 시작될 때는 ‘내 모든 것’이 담긴 십대, 그리고 90년대를 향해 ‘안녕’이라고 반갑게 인사하고, 이 이야기가 끝날 때쯤엔 그 모든 것을 향해 ‘안녕’이라고 작별인사를 하는 듯합니다. 안녕이라는 말을 우리가 늘 쓰지만, 가만히 곱씹어보면서 천천히 ‘안, 녕’ 하고 되뇌어보면, 어쩐지 아련하면서도 뉘엿뉘엿 해가 지는 듯한 구슬픈 어감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정이현 鄭梨賢 소설가.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 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이 있음.

정이현 鄭梨賢 소설가.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 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이 있음.

정이현 한국어에서 ‘안녕’은 두루뭉술해요. 이별할 것 같기도 하다가 다시 만날 것도 같고, 맺고 끊고가 불확실한, 한국적인 정서의 어떤 미묘한 특징을 담고 있기도 하고, 우리가 지금은 헤어지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나자는 포즈 같은 것이 들어 있기도 하고, 또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면서도 이건 어차피 영원하지 않을 거다, 언젠가는 헤어질 거라는 체념의 정서를 담고 있기도 하고요.

정여울 지금까지 정이현 작가의 소설 제목들이 세련되고 절제된 느낌이었다면 이번 제목은 정답고 친밀한 편인데요. 아마 90년대에 대해 느끼는 대중의 노스탤지어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드라마나 영화, 대중음악 전반에서 90년대를 향한 집단적인 노스탤지어를 상품화하는 것을 보면, 변화와 속도가 생명인 대중문화 현장에서도 ‘너무 빨리 변해가는 세상’에 대한 미묘한 불안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집단적 노스탤지어의 심리 속에는 변화에 대한 불안, 새로운 것에 대한 공포가 내재한 듯싶어요. 불안은 글 쓰는 사람들의 존재조건인 것 같기도 하구요. 너무 빨리 변화하는 세상을 향해 남들보다 더 심각한 불안을 느끼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이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정이현 그 불안이 단지 작가의 조건을 넘어서 인간의 조건과 한계인 것도 같아요. 예전의 저에게 불안이란 크게 두가지였지요. 가까운 불안과 막연한 불안. 지금 당장 느끼는 구체적인 일들에 대한 불안과 막연히 먼 미래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 그런데 지금은 그걸 넘어서 더 깊은 의미에서 근본적인 불안을 느껴요. 과거의 불안이 ‘나’에 대한 불안, 나에게 벌어지는 어떤 상황을 내가 통제할 수 없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면 지금은 인생과 인간에 대해 ‘아, 이건 내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거구나’라고 깨닫게 된 후 느끼는 감정이랄까요. 예전에는 내가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고 곧 해소될 수 있는 게 불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즈음 느끼는 불안감은 내가 어떻게 한다고 없애버리거나 떨쳐버릴 수 있는 성질이 아닌 것 같아요. 이 세계에 존재하는 한 숙명처럼 가지고 가야 하는 거죠.

정여울 그 해결되지 않는 존재의 불안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고 그 자체를 생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성숙의 징표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문제는 그걸 받아들이는 게 정말 어렵다는 것이죠. 어쩌면 행복이나 안정, 평화 같은 것도 우리 마음의 항시적인 불안상태를 숨기기 위한 존재의 가면일 수도 있겠죠. 살아 있는 한 완전한 평화는 불가능하니까요. 그런데 지금 대중문화를 수년 동안 강타하는 90년대를 향한 노스탤지어는 좀더 사회적인 맥락에서 느끼는 집단적 불안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한때 ‘내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공간들이 너무 빨리,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많잖아요. 얼마 전에 대학 때 자주 다니던 까페와 술집을 우연히 확인할 기회가 있었는데, 남아 있는 건 거의 없더라고요. 그렇게 많은 까페와 술집이 이제는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남아 있다 하더라도 예전의 그 분위기는 찾을 수가 없었어요. 예상은 했지만 엄청난 상실감을 느꼈죠. 저와 친구들이 함께 보냈던 그 수많은 시간마저 송두리째 사라진 것 같은 아픔이었어요. 90년대를 향한 집단적 노스탤지어도 아마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사랑했던 그 공간’을 향한 뒤늦은 보상심리도 있을 것이고, 점점 사라져가는 인간적 유대감과 친밀감을 향한 집단적 향수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낯익은 장소, 낯익은 사람, 낯익은 분위기가 사라져가는 도시의 생활패턴 속에서 현대인은 오히려 다소 촌스럽고, 미숙하고, 세련되지 못한 과거의 시간을 향해 서글픈 향수를 갖게 되니까요.

 

학교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거리의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며칠 후 온 도시를 강타했다. 고모와 함께 오렌지주스를 마셨던 그곳이었다. 뉴스가 학교에 전해졌을 때는 정규수업이 끝나고 저녁 자율학습이 막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교정에 두개뿐인 공중전화 부스에 줄이 수십 미터 늘어섰고 자율학습은 취소되었다. 옥상에 올라가 바라보니 정말로 멀리서 거대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안녕, 내 모든 것』 164면.

 

90년대, 그 상실과 불안의 시간을 더듬는다는 것

 

정여울 최근에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을 비롯해서 문화계 전반에서 ‘90년대를 다시 읽는다’는 분위기가 활발해진 것 같습니다. 90년대는 상대적으로 매우 가까운 시기임에도 벌써부터 집단적인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되어버렸는데요. 『안녕, 내 모든 것』에서도 90년대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90년대는 작가님께 어떤 의미로 거듭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때 그 시절 생각했던 90년대’와 ‘지금 다시 생각하는 90년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안녕, 내 모든 것』의 주인공들에게는 90년대가 어떤 의미일까요?

정이현 우리가 90년대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 일반적으로 ‘90년대는 어땠다’ 하는 여러가지 담론이 있잖아요. 제 소설의 인물들은 그런 대표성을 띠는 인물들이 아니기를 바랐어요. 이 소설의 주인공은 말하자면 90년대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 소설을 ‘강남의 10대 이야기’로 읽으시는 독자들이 적잖아서 좀 놀라기도 했는데요. ‘강남의 아이들’을 그리자는 건 사실 중요한 의도는 아니었어요. 변두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중심에서도 비껴난 곳에서, 결코 중심일 수 없는 나이 십대 후반을 통과하고 있는 인물들을 설정한 거지요. 이 작품의 중심무대가 ‘반포’라는 구체적인 공간이기는 하지만, 대도시의 콘크리트 아파트촌을 배경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90년대의 반포는 지금의 휘황찬란한 주상복합아파트가 올라가기 전에, 주로 낡고 낮은 주공아파트가 듬성듬성 모여 있던 곳이었거든요. 한동네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마치 원주민처럼 존재하고요. 변두리가 아니지만 변두리이고, 누구도 고향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실제로는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요. 그런 공간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을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밖에서 보기엔 저런 삭막한 아파트에서 자라는 애들은 어떨까, 어디 뛰어놀 공간이나 있을까 불쌍해할 수도 있지만, 꼬불꼬불한 골목길이나 시장통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은 숨을 쉬고 상처받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성장해요.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숨어 있는 ‘우리’만 아는 은밀한 공간—아파트 지하실, 옥상 물탱크 옆, 놀이터의 미끄럼틀, 아파트 상가의 비상구 같은 곳을 틈새 삼아서요. 그렇게, 아스팔트의 좁은 비상구 안에 숨어드는 90년대 아이들을 불러오고 싶었어요. 90년대라는 지난 시간에, 우리가 어떤 제의(祭儀)를 겪고 통과해왔는지를 쓰고 싶기도 했고요. 이 아이들은 성인식을 고별식으로 치른 아이들이거든요. 제 궁금증은, 이십년이 흐른 지금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그 성인식이자 고별식이었던 특별한 제의를 기억하고 있을까였어요. 그러니 이 소설은 어쩌면 90년대의 이야기라기보다는 90년대를 기억하(려)는 2010년대의 이야기라고 할까요?

정여울 90년대 자체의 이야기라기보다는 2010년대의 시선으로 회상하는 90년대의 이야기라는 점이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아마 2020년대, 2030년대에 90년대를 바라본다면 또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겠지요. 최근 대중문화에서 일어나고 있는 90년대를 향한 회고의 열풍에도 2010년대의 시선, 즉 ‘우리시대의 결핍, 우리시대의 불안’을 투사하여 ‘그래도 90년대에는 안 그랬는데, 그땐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하는 시선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90년대를 직접 경험한 세대에게 그립고 낡은 어떤 것이 200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게는 새롭고 낯선 것이거든요. 아마 그 ‘구세대의 낯익음’과 ‘신세대의 낯섦’이 만나는 지점에서 90년대식 노스탤지어가 문화적 폭발력을 지니게 된 것 같은데요. 90년대는 일종의 집단적 회상의 매개체로서, 90년대 자체가 세대간의 소통이나 공감의 대상이 될 듯해요.

정이현 『안녕, 내 모든 것』 관련 인터뷰를 하면서 90년대를 다룬 이즈음의 대중문화 텍스트들, 「응답하라 1997」이나 영화 「건축학개론」 얘기를 많이 물어보시더라고요. 저는 이 작품을 쓰고 나서 한참 후에야 보게 되었는데요. 누구에게나 과거는 개인의 과거일 테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리는 그들의 90년대는 나의 90년대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요즈음 방영되는 「응답하라 1994」도 드라마로는 흥미롭게 웃으면서 보면서도 계속 불편한 부분이 있는데 그게 뭘까 고민하다가 얼마 전에 답을 찾았습니다. 2010년대인 현재의 관점에서 90년대를 회고하는데, 그 2010년대의 삶이 이미 견고하게 결정되어 있는 거예요. 90년대에 미숙한 주체이던 인물들이 이십년 뒤 미래(현재)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에 성공해 멀쩡한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성공한 어른’이 되어 있는 거지요. 심지어 스무살 때의 친구들과 20년이 흐른 지금도 너무 친해!(웃음) 20년이란 시간 동안, 그 스무살 인간관계의 자장 안에서 그대로 살아왔다는 건가? 저의 1994년과 2013년 사이, 지난 파란만장한 20년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쓸쓸해졌어요. 저의 90년대는 정말 지리멸렬했거든요. 지리멸렬한 일상, 지리멸렬한 감성. 대학은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상상했던 그런 곳이 아니었어요. 대학생이 된 나는 당연히 넓디넓은 광장 한복판에 서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90년대가 되어 대학이란 곳에 가보니 세상이 달라졌다는 거예요. 여자대학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는데, 비슷한 아이들 끼리끼리 몇명씩 몰려다니면서 그냥 지리멸렬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각종 ‘방’들이 많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어요. 노래방, 비디오방, 피씨방으로 삼삼오오, 혹은 혼자 숨어들어갔지요. 누에고치처럼 깜깜하고 밀폐된 공간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을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던 기억이 나요. 타인과,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으로 ‘연애’가 권장되는 시대였지요. 다 같이 광장에 모여 있었다면, 모르겠어요, 조금 덜 외로웠을 수도 있겠죠?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왜 ‘나’인지를 고민해야 했고, 내가 얼마나 개별적이며 보잘것없고 하찮은 존재인지를 자주 깨달아야 했어요. 스스로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바로 90년대예요. 90년대의 무수하고 외로웠던 ‘나’들이 끄적끄적 무언가, 음악이나 영화 같은 것을 만들기 시작했던 시대이기도 하죠.

정여울 90년대가 2010년대 대중문화의 시선으로 상품화되면서, 각자의 공간에서 느꼈던 90년대의 수많은 차이들이 지워져버리는 효과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90년대를 상품화하는 데 성공한 문화컨텐츠를 보면서, ‘나의 90년대’를 오히려 더 아프게 잃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 시간을 누가 빼앗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보냈던 저마다의 형형색색의 시간이 ‘그땐 다들 그랬지’로 동일화되어버릴까봐 두렵기도 했어요. 오히려 그렇게 대중문화 컨텐츠로 변형될 수 없는, 재미있게 묘사하기에는 너무도 은밀하고 고통스러운 어떤 정형화되지 않은 시간이 더 아프게 되살아오는 듯한 느낌이었죠.

정이현 90년대의 연애를 다룬 대중서사들을 보면서 ‘그렇지, 저렇게 나도 누군가를 좋아했었지’라고 추억에 잠기곤 하죠. 누구나 그랬던 건 아닌데 마치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더라고요. 남의 기억을 내 기억처럼 만들면서 90년대 전체를 확 덮는 건 위험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맞아, 그땐 그랬지’가 때론 위험하잖아요. 단 하나의 색깔로 90년대를 색칠하는 느낌이었어요. 저의 90년대는 무슨 색이었을까. 총천연색은 아니었고, 칙칙한 회색만도 아니었고, 파스텔톤이 옅게 스민 무채색쯤 되었었나봐요. 아쉽고 쓸쓸했어요. 그러고 보니 그와는 조금 다르게 『안녕, 내 모든 것』의 표지는 참 산뜻하네요.

정여울 제가 기억하는 90년대는 얼룩진 창문 너머에 콘크리트벽으로 가득한 세상이 있고 그 벽을 쓸쓸하게 내다보는 듯한, 뭔가 아련하면서도 처연한 느낌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느낌이 싫지 않았어요. 저에게는 무척 소중하고, 정말 이 소설의 제목처럼 ‘내 모든 것’은 여전히 90년대에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저 또한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바꾼 측면이 있는데, 90년대의 저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서툴고 거칠었지만, 그냥 저 자신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아프지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거겠죠. 그런 면에서 저는 준모가 정말 마음에 와닿았어요. 준모는 남자주인공이지만, 제가 지금까지 읽은 작가님 소설의 주인공 중에서 가장 저와 닮은 면이 많은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말은 절대 못하고, 그렇지만 그 마음을 결코 철회할 수 없고, 남들보다 항상 한발 느리고, 그러면서도 그런 티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고. 이런 준모가 참 친근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준모의 삶 자체가 가질 수 없는 대상을 향한 끝없는 짝사랑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 같더군요.

정이현 제가 짝사랑을 좀 알아서요.(웃음) 준모는 저도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예요. 그동안의 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자인물들이 다 변변찮더라고요. 누군가는 변변찮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다고도 하는데. 그 변변찮음 속에 공통으로 어떤 소년성이 있어요. 준모 캐릭터의 원형은 『너는 모른다』의 혜성인 것 같기도 해요. 준모도 그 연장선상에서, 정여울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런 면을 가진 아이죠. 전 사실 준모한테 미안한 마음이 커요. 작가들은 어떤 소설을 다 쓰고 나서 ‘주인공을 좀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었는데 내 욕심 때문에 그러지 못한 것 같아’ 하고 후회하기도 하거든요. 준모가 이 소설에서 그런 인물이에요. 극복할 수 없는 결함을 생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존재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지요.

 

그 시절, 결코 행복할 수 없었던 사람들

 

정여울 유독 준모에게 애착이 갔던 이유는 준모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 때문인 것 같습니다. 준모가 단지 뚜렛증후군을 앓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 마음 아팠어요. 준모는 세미를 좋아하는데 세미에게 직접 말할 수는 없죠. 준모가 호출기를 사러 가는 장면이 있잖아요. 기다리는 연락은 오직 세미의 연락뿐이고, 그렇다고 세미가 연락을 한다는 보장도 없는데요. 사실 세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요. 그럼에도 정말 가장 낮은 가능성을 향해서 눈먼 질주를 감행하는 준모가 사랑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짠한 준모를 왜 행복하게 해주지 않으셨나요?(웃음)

정이현 준모는 상징적인 인물인 것 같아요. 이 소설에서 준모가 일인칭으로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거길 쓰면서 깨달았어요. 소설가란 이름을 가지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후 십년 만에요. 생각해보니 저는 한번도 사랑에 대해서 제대로 써본 적이 없더라고요. 제가 지금까지 썼던 사랑은 ‘사랑’인 거예요. 작은따옴표 안의 사랑, 결혼을 위한 로맨스로서의 사랑. 무언가 조건과 함께 움직이는 감정으로서의 사랑이었던 거죠. 세속에서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명명하는데 난 그걸 해부해보고 싶어, 이런 욕망만 있었던 거예요. 등단작 「낭만적 사랑과 사회」 때부터 『사랑의 기초』라는 연애소설을 표방한 소설을 쓸 때까지도 사랑에 빠진 인물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파헤치는 데 몰두했지, 그 감정 자체에는 집중해본 적이 없어요. 준모는 제 소설에서 처음으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준 인물입니다.

정여울 정말 그렇네요. 그동안 정이현 소설이 ‘쿨하다’고 평가받은 대표적인 이유가 인물들의 도저히 교정 불가능한 자기중심주의였던 것 같아요. 사랑보다 자기를 생각하는 사람들, 타인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 그게 현대인의 솔직한 모습임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캐릭터가 대부분이었다면, 준모는 정말 다르지요. ‘내가 널 사랑해, 그러니까 너도 나를 봐줘’가 아니라, ‘내가 널 사랑하긴 하지만, 넌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도 있지, 그래도 괜찮아’라는 감성을 지닌 건 오직 준모뿐이네요. 그래서 더 제가 독자로서 준모에게 끌렸나봅니다.

정이현 그동안 제 인물들의 사랑은 이를테면 이기적인 사랑이었어요. 자신의 내면적인 어려움이나 여러가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도 하고요. 그들에게 사랑이란 늘 교환가치를 지닌 어떤 것이었어요. 그러나 준모는 처음으로 순수하게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빠지지요. 그래서 더 준모에게 미안하고,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준모는 원하는 바를 가질 수 없죠. 그런 사랑은 현실에서 필패하니까. 그렇지만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해서 그의 감정이 아무것도 아닌가 하면 그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타인에게 그런 감정을 품었던 건 정말 소중한 거잖아요. 마지막에 세미의 할머니를 준모와 지혜가 함께 어른들 몰래 묻어야 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 지혜나 세미한테는 나름대로 자기만의 이유가 있는데, 준모는 그게 아니었어요. 준모가 그 힘겨운 성인식을 거친 이유는 세미를 사랑하기 때문이거든요. 제 소설에서 준모는 처음으로 타인을 위해 순수하게 희생을 한 인물이기도 해요. 세미는 여러가지 계산 끝에 할머니를 몰래 묻기로 결정하고, 지혜의 경우에는 술 먹고 정말 ‘어쩌다보니’ 그렇게 돼버린 거예요. 사실 지혜는 저를 닮은,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에요. 90년대를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어쩌다보니’로 살아온 거고, 그걸 길게 후회하면서 그 이후로 친구들 중에선 처음으로 각성을 하고 다르게 살려고 애쓰지요.

정여울 지혜가 작가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 소설이 좀더 잘 이해되는 것 같네요. 세미가 세련되게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자신에게 필요한 일’을 훌륭하게 처리해내는 모습은 사실 기존의 인물들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고, 지혜는 힘든 상황에도 어렵게 균형감각을 찾으려고 애쓰는 현실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인물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준모의 수많은 머뭇거림, 망설임은 매혹적이면서도 가슴 아픈 장면인 것 같습니다. 저는 준모가 뚜렛증후군 때문에 자꾸만 생각과 다르게 심한 욕설을 내뱉는 대목도 오히려 ‘타인을 향한 욕설’이라기보다는 ‘전 정말 아파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절규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더 마음이 쓰렸던 것 같아요.

정이현 준모의 머뭇거림, 어쩔 줄 모름을 저는 이해해요. 저는 어렸을 때 경미한 ‘틱’을 앓았던 적이 있어요. 틱은 굉장히 불안한 순간, 주변의 억압적인 분위기를 못 견디는 순간에 나와요. 아주 불안한 순간에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더 활기차게 행동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무튼 거의 모든 인간은 의지로 그걸 억누르고 감추죠. 그런데 준모는 굉장히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영혼이기 때문에 그걸 숨기지 못하고 밖으로 표출하고 마는 약한 사람이죠.

정여울 틱을 앓았던 시기가 언제쯤이었나요?

정이현 열살쯤? 사춘기 전, 초등학교 때였어요. 아직도 상황이 너무 강렬하게 기억나서 가끔은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내가 상상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처음 증상은 눈을 심하게 깜빡거리는 거였어요.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면 더 자주 깜빡거리게 되더라고요. 엄마는 무척 예민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이셔서 그만하라고 하면 저는 긴장하니까 더 심해지는 악순환이죠. 그러다 ‘음음’ 하는 낮은 헛기침도 하기 시작했어요. 조용한 수업시간에 제가 혼자 ‘음음’ 하고 있으면 애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도 같고 그걸 의식하는 순간에 오히려 계속하게 되는 거예요. 사실 준모가 병원에 가는 부분은 제가 겪었던 에피소드를 확장한 건데요. 저도 그 이후 서울대병원으로 추정되는 병원에 간 거예요. 80년대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 정도를 가지고 병원에 데려갈 맘을 먹었을까, 내가 정말 평균과 표준에 집착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정여울 사실 좀 놀라운데요. 정이현 작가님의 글을 보면 퍽 견고하고 안정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그런 트라우마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이 이야기를 들으니 준모의 상처가 더 깊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정이현 지금도 틱이나 뚜렛증후군을 앓고 있는 분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아요. 사실 피해를 주는 게 아니잖아요. 내 불안을 내가 못 견딜 뿐인데 세상은 그걸 환자라고 명명하는 거예요. 저의 가까운 지인도 고등학교 때 같은 반에 그런 친구가 있었대요. 그 친구는 수업시간에도 계속 혼자서 욕을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 아이를 그냥 없는 사람으로 치부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궁금했어요. 지금 그 사람은 뭘 하고 있을까, 아직도 뚜렛증후군을 앓고 있을까. 사실 지혜와 세미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뚜렷이 그려지는 인물이지요. 그에 반해 준모는 멀리 있는 물음표로 남기고 싶었어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알 수 없는 상태로.

 

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시간과의 작별, 그리고 또다른 시작

 

정여울 저는 『안녕, 내 모든 것』의 이야기가 선생님의 작품 「삼풍백화점」 등에 나오는 90년대 인물들의 전사(前事)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는데요. 기존 소설에서는 90년대에 이십대를 보낸 인물이 이따금 등장했다면, 이 소설은 십대 청소년들에게 포커스를 맞추셨는데요. 특별히 십대를 선택하신 계기가 있을까요?

정이현 IMF 이전의 90년대가 저에게는 특히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그 시기의 사회적 분위기와, 역동적이고 무언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실체는 잡을 수 없는 십대의 에너지가 저에게는 맞물려 있어요. 슬리퍼 끌고 빠삐코 먹으면서 야간자율학습 하러 들어오는 그 느낌이 제 십대 후반의 정서거든요. 가장 에너지 넘치고 역동적이지만 사실은 무기력한 시절의 느낌. 언젠가는 폭발하고 말 것 같은 숨은 활기가 느껴지지만 미래를 향한 불안감으로 점철돼 있던 시기가 IMF 직전의 느낌이었지요. 이런 십대 주인공들이 삼풍백화점 같은 사건을 전면이 아닌 측면에서 경험했으면 했어요. 「삼풍백화점」에서 주인공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기 한시간 전에 기사회생으로 빠져나오는 인물이지만, 세미는 무너진 백화점으로부터 날아온 분진을 필사적으로 닦는 사람이에요. 제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해요. 어떻게 하면 이 분진을 제대로 잘 닦아낼까 하면서, 자기 앞에 주어진 일이니까 그냥 닦는 모습이요. 그렇게 세상에선 그저 하나의 먼지에 불과할지도 모를 아이들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정여울 분진 같은 십대, 먼지 같은 존재를 향한 안부인사가 아닐까요. 당신도 나처럼, 먼지처럼 작은 존재이지만 결코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그런 존재구나 하는, 동시대의 슬픔을 함께 안고 따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안부인사 같은 느낌인데요. 이제 『안녕, 내 모든 것』이 품고 있는 서늘하면서도 쓸쓸한 정서의 깊이로 좀더 가까이 다다른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는 아무래도 세미의 할머니를 준모와 지혜가 함께 몰래 묻어버리는 장면이 될 텐데요. 이 장면이 상당히 상징적이면서도 충격적이지요. 이것이 90년대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도 연관이 있겠지요?

정이현 무언가를 묻어버림으로써 그 시절을 극복해내는 통과의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 엄청난 통과의례를 겪으면 그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지요. 작가에게는 누가 뭐래도 포기할 수 없는 어떤 장면이 있는데요, 저에게는 할머니를 셋이서 묻는 장면이 그랬어요. 세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세대는 자기 손에 피를 묻히면서 스스로 뭔가 이뤘다고 생각하는 이들인데, 그 세대는 필연적으로 땅에 묻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의 손주세대, 즉 우리는 땅을 파고 그들의 흔적을 묻음으로써 그 시대의 유산과 어떤 의미로든 단절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요.

정여울 저는 지혜의 역할이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것 같아요. 지혜는 모든 것을 너무 자세히 기억하는 성격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또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비상한 기억력이나 판단력보다는 ‘얼떨결에’ 중요한 결정을 해버리기도 하는데요.

정이현 지혜는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불만도 많지만, 사실 부모가 기획하는 인생의 패턴대로 겉으로는 순응하지요. 저는 지혜가 ‘술김에’ 세미의 제안을 받아들여 세미 할머니를 같이 묻는 것으로 그렸는데, 바로 그 ‘술김에’가 포인트인 것 같아요.(웃음) 술을 깨보니까 ‘내 손으로 이런 짓을 하다니’ 놀랍기 그지없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되어버린 거잖아요. 사실 저도 아주 중요한 결정을 ‘술김에’ 한 적이 많아요.(웃음) 제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어떤 일들은 술김에 이루어졌는데 술 깨어보니 나는 그걸 하기로 했고, 더이상 바꿀 수가 없게 되었고, 그래, 그렇다면 어쨌거나 그 결정에 따르자, 이런 패턴이었던 것 같아요.

정여울 술이라는 게 스스로를 부정하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잘 표현할 수 없었던 어떤 용기나 호기를 끌어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완전히 나와 다른 페르소나를 연기한다기보다는, 무의식에 잠자고 있던 또다른 나, 어쩌면 평소의 나보다 더 나다운 나를 끌어내곤 하죠. 지혜는 그런 면에서 독자에게 아주 친근하게 다가와요.(웃음)

정이현 그런데 뒷감당이 잘 안되는 거죠.(웃음) 하지만 그 시절의 뒷감당을 끝내, 가장 오래 자기 손으로 하려고 드는 이도 결국 지혜예요. 술 때문이든 무엇 때문이든, 어떤 상황이 저질러지고, 그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 처음으로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인물, 그게 바로 지혜지요. 어쩌면 그래서 이 후일담의 진정한 주인공은 지혜라고 할 수 있어요. 90년대를 통과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진정으로 깨닫게 되는 인물이니까요. 준모나 세미는 관습이나 짜여진 플롯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나서 살 수 있었던 인물이잖아요. 준모나 세미가 어쩔 수 없이라도 어쨌든 좀더 제도 바깥을 보며 살 수 있었던 반면 지혜는 그럴 수 없었던 전형적인 가정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 일은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지혜한테 더 큰 사건이었어요. 더 치명적인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지혜는 스스로에 대해서 더 많이 뒤돌아보고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됐을 것 같아요. 실제로 겪은 사건과 그것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 사이의 간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걸 고민하는 사람이요. 완전한 제도권이 아닌 그 테두리에서 스스로의 밥을 스스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됐는데, 저는 그게 ‘어른’인 것 같아요. 산다는 건 하루하루 자기가 ‘닳아가는’ 것임을 그냥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 닳아가줄게’ 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요.

정여울 그런 면에서 지혜가 가장 어른스러운 인물이군요. 세미와 준모의 상처를 동시에 공감할 수 있는 미적 거리를 획득한 것도 결국 지혜구요.

정이현 그렇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세미와 지혜의 위치가 역전되는 거죠. 십대 때는 세미가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지만, 이제는 지혜가 가장 어른스럽게 살아가는 인물이고, 그래서 지혜가 세미한테 ‘네 삶은 요즘 어떠니’라고 물어본 순간 처음으로 둘의 위치가 역전되는 거죠. 세미는 자기 손으로 할머니의 시신을 몰래 묻었지만 할머니가 남기고 간 유산과 혜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됐을 것 같아요.

정여울 「작가의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증언되지 않았던 시대가 있다. 열여덟살, (…) 어느 저녁 문제집에 시선을 처박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사방이 희뿌옜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실내는 지독히 고요했다. 바닥에 볼펜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시하기만 한 한순간이었다. 바로 이 순간을, 언젠가 내 손으로 기록하게 되겠구나! 그것이 나의 운명에 대한 첫 예감이었다.” 이 대목이 무척 흥미로웠는데요. ‘증언되지 않았던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결정적인 예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했습니다. 그 순간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사이에 이제 적절한 ‘미적 거리’가 생겼다는 고백으로도 느껴졌어요.

정이현 소설을 다 쓰고 나서 가장 밑바닥부터 다시 생각해보았어요. 이 소설이 정말로 어디서 왔을지를요.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자율학습 하다 고개를 딱 들었는데 모두가 똑같은 자세로 다들 이어폰을 끼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거예요. 소름이 쫙 끼치더군요. 이렇게 똑같은 자세로, 우린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런데 그 획일성보다 더 무서운 건 ‘이건 우리 일상의 한순간에 지나지 않겠구나, 아무도 이 순간을 기억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어요. 소름끼치게 무섭더라고요. 그때 제가 치기 어린 마음이었지만 결심한 게 있어요. ‘모두가 다 이 순간을 잊는 때가 와도, 나는 이 시간을 꼭 증언할 거야, 두고 봐, 내 손으로 꼭 써줄 거야’ 하고요. 그때는 사실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은 없었어요. 증언하고 기록하는 건 저널리스트인 줄 알아서 막연히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지요. 그런데 이제야 그때 그 시절을 향한 미적 거리가 생긴 것 같아요. 아무리 절절한 자기 이야기가 있어도 그로부터 적절한 거리가 확보되지 않으면, 좋은 이야기를 쓸 수 없거든요. 너무 멀어져도 안되고요. 저는 지금이 적당한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했어요. 더 지나가면 정말 잊겠다, 못 쓸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정여울 이제 후련하세요?

정이현 다시 돌아보진 않을 것 같아요.

정여울 이 작품이 작가님의 지금까지의 작품활동에서 어떤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이현 그랬으면 좋겠어요. 다음 장편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결별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물론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SF를 써야 하는 거 아닐까요?(웃음)

정여울 왠지 좀더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아주 현재적인 작품을 쓰실 것 같은데요?

정이현 그럴지도 모르지요.

 

“제 소설에서 준모는 처음으로 타인을 위해 순수하게 희생을 한 인물이에요.” 이 문장을 털어놓을 때 작가의 맑은 두 눈은 유난히 반짝거렸다. 정말 그랬다. 『달콤한 나의 도시』의 은수도, 『낭만적 사랑과 사회』나 『너는 모른다』의 수많은 인물도, 타인을 위해 자기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빈틈없는 자기본위의 정신이 정이현 특유의 도시적 감수성을 특징짓는 결정적 요소였는지도 모른다. 준모는 정이현 소설의 여느 인물처럼 원하는 목적을 향해 전력질주하지 않는다. 자신보다 옆 사람을 챙기고, 돌아서서 자신의 발걸음이 남긴 무늬를 성찰할 줄 안다. 준모는 유혹의 전략이나 남녀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온몸으로 부질없는 사랑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던져버린다. 그것은 무모함이 아니라 순정일 것이다. 어쩌면 90년대를 향한 집단적 노스탤지어의 뿌리에는 이런 꾸밈없고 꼬임없는 순정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안녕, 내 모든 것』에서 진정으로 성숙한 화자는 지혜다. 그녀 인생의 동력은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얼떨결에 저질러져버린 삶’의 그림자를 성찰하고 조용히 일상을 견뎌내는 성실함이다. 우리의 노스탤지어가 잃어버린 시간을 향한 헛된 그리움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눈 돌리지 않는 더 짙은 성실함, 더 뜨거운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