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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 신경림 시집 『사진관집 이층』
막힌 혈을 뚫는 신명의 촉
강정 姜正
시인. 시집 『처형극장』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키스』 『활』이, 산문집 『나쁜 취향』 『콤마, 씨』 등이 있음.
신경림 申庚林
시인. 시집 『농무』 『새재』 『달 넘세』 『가난한 사랑노래』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이, 장시집 『남한강』이 있음.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보라.
그리고 그것을 누구든 볼 수 있게 하라.
—쿠로사와 아끼라(黒澤明)
1
얼마 전부터 길을 다니며 사람들 얼굴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늘 다니던 길이더라도 생면부지의 얼굴이 익숙한 이보다 더 많다는 건 새삼 놀라운 일. 거리라는 게 그렇다. 내가 그 길을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의식조차 망각한 어느 순간, 돌연 모든 게 최초의 체험처럼 여겨지게 된다. 지금 바로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사람의 얼굴을 재빠르게 곁눈질해본다. 남자든 여자든 젊은이든 늙은이든 상관없다. 목표(?)가 포착되는 데 별다른 작위요소는 없다. 단지 하나의 우발 상황이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모종의 심리상태나 동기에 대해선 스스로에게도 답하지 못한다. 다만, 동공의 조리개가 불에 덴 듯 파다닥 움직이면서 뇌하수체에 기묘한 가역반응이 일어나는 걸 육체적으로 깨달을 뿐이다.
같은 시간 같은 거리를 거닌다는 수천만분의 일 이상의 우연. 이런 건 왠지 불가항력이란 느낌이다. 공기마저 짐짓 수상해진다. 나는 당연히 저 사람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알지 못하는 그(녀)의 알려지지 않은 삶에 대해서 내 멋대로 크로키하기 시작한다. 무관한 이의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내려는 이 없던 충동은 무슨 병증의 작란인가. 제아무리 그럴듯한 가설을 만들어 그(녀)를 그려낸다 한들 그 사람이 그 자신일 리 만무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 없던 공간이 생긴 듯해 마음의 밑자리가 점강법으로 밝아진다. 나 자신에게 묶여 있던 누군가가 오래 갇혀 있던 문을 열고 탈출하는 기분이랄까. 아니, 완전히 모든 걸 내려놓고 나가진(어디서?) 못하더라도 슬며시 바깥을 내다보려 창문이라도 하나 열어놓은 느낌이랄까. 낯선 사람의 얼굴을 보는 일이 왠지 나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내 뒷모습을 확인하는 일 같아진다. 내 걸음걸이가 저러했던가. 내 목소리의 반향이 이토록 먹먹할 정도로 스스로에게 낯선 물성을 지녔던가. 일순, 모든 게 수수께끼가 된다. 답이 풀린다고 속 시원해지는 게 아니라, 끝까지 질문해대는 것으로 더 큰 도전영역이 생기는 무슨 게임판 안에 들어온 것 같다. 그리고 그 시발이 그저 어느 평범해 보일 뿐인, 낯선 사람이다. 문득 뒤가 서늘해지는 기분. 잃어버린 그림자가 별안간 형체와 모양의 디테일들을 갖춘 채 내 앞에 나타나 내 이름을 묻게 될 것만 같은 나날의 연속. 그럴 무렵, 한 시인을 ‘실물’로 만났다.
2
시인 신경림. 처음 마주한 그는 범부의 얼굴이었다,라고 일단 쓴다. 이 허두는 아무런 작의도 없다. 그저 그랬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걸 쓰는 게 왠지 버겁다. 뭐라 써도 ‘그’를 ‘그’인 그대로 지칭하지 못할 것 같은 까닭이다. 어쩌면 그게 진짜 ‘범부’의 힘이고 면모인지 모른다. 그에 대해 지난 수십년의 한국문학사가 뭐라고 써댔는지는 내가 참조할 바 아니다. 솔직히 말해 그의 시를 이토록 통시적으로, 꼼꼼하게 읽은 것도 처음이다. 나는 다만 내 아버지보다도 연장인, 어느 살아 있는 사람을 대면한 것뿐이다. 그의 시를 읽고, 스스로도 시를 쓰는 입장에서.
‘어떤 허위나 겉멋 따위 일체 배제된 밋밋함과 순연함’이라 수식할까. 허나 그 말 자체가 외려 ‘겉멋’이고 ‘허위’로 치장된 것 같아 문득 머릿속 단어를 다시 헤아리게 만드는 얼굴을 그는 지니고 있다. 쓰고 보니 이 문장 자체가 굉장히 작위적이다. 그러니 동시에, 내가 그동안 숱하게 남발했던 문장들이 이런 배배 꼬인 체계 안에서 반복 운용된 허위의 부메랑은 아니었을까 하는 자괴가 뒤따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게임판1)은 발가벗으려 할수록 그 안에 더 많은 옷이 드러나는 걸 기본원리 삼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고로, 긴장감이 고조될수록 피부가 겹으로 두터워지면서 본래 없던 옷을 하나 더 껴입게 되는 것 같다. 하여 명명하자면, 이건 이른바 ‘전면 무장해제 놀이.’ 턱없이 진지해지거나 비감해지거나 우울해지는 쪽이 진다. 아니, 이 게임은 애초에 승부를 가리기 위한 게 아니다. 어느 한쪽에서 이기려 들거나 초조해지거나 하면 게임 자체가 성립 안된다. 여긴 흑백도 좌우도 없다. 삶 자체의 본래적 고뇌마저 퇴색게 하는 지엽적 편가름으로서의 분투 따윈 게임을 즐길 줄 모르는 바보들의 헛수작에 불과하다. 굳이 솔직해지려고 노력할 필요도, 뭔가 격식과 예의를 갖춰 스스로를 위장(정격화된 예의란 타인에 대한 예우보다 자신을 보위하려는 테크닉일 때가 더 많지 않던가)할 이유도 없다. 나와 마주앉아 있는 시인 또한 그렇게 생각할까. 아닐지도 모르지. 그렇더라도, 어쨌거나 그는 말하고 나는 듣는다. 또는, 나는 질문하고 그는 대답한다. 먼저, 대뜸 죽음에 관한 것.
“나이 먹으니 죽음에 대한 생각을 안할 수가 없어. 내가 시를 써서가 아니라 그건 보통 이들과 같아. 죽음은 당연한 거야. 겁도 나고 그러니까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려 하기도 하고. 두려움도 당연한 거지. 그래도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려고 해. 그래서 그런지 그런 꿈을 꿀 때가 많아, 요즘. 죽음도 삶의 일부분인 거야. 삶의 연장인 거지 뭐. 인간이 살면서 역사에 기여하고 사회를 변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리고 나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지만, 사실 한사람 한사람의 삶이 더 중요하지 역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우리나라는 일제시대 때부터 해서 6・25, 4・19, 5・16, 5・18 다 겪으며 희생당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 버려진 삶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게 중요해요. 하지만 시 쓰면서 일부러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야. 시를 쓰다보면 막연하게나마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는 거지. 그렇게 희생당한 사람들 중에서 나하고 이런저런 관련이 있던 사람들이 참 많아. 그런데 나는 팔십 다 되도록 살아 있고 그들은 먼저 가고 그런 걸 생각하면 세상이 슬프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 그런 생각에 골몰하다보면 내 주변 사람들만의 범주를 넘어 확대가 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거지. 시 쓰는 게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건드리게 되는 일이거든. 비단 정치적인 문제뿐 아니라 삶 전체에 대해서…… 그런데 정치하는 인간들뿐 아니라 지식인을 비롯한 소위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다 사기꾼이란 생각이 들어. 그런 사람들의 입장을 바탕으로 해서 잘 먹고 잘 살고 편하게 살고 하는 원칙들이 생겨난 거니까. 중요하게 점검해야 할 문제들은 딴 데 떠넘기면서 자기들끼리 누릴 거 다 누리고…… 나 자신도 어쩌면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일 수 있지.”
느리고 약간 낮게, 다소 어눌한 듯 분명하게 얘기하는 어조다. 감정의 지분댐이나 정연한 논리로 말발을 세우려는 혈기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야금야금 생수 들이켜듯 무던하게 던지는 이웃 어른의 말본새. 얼핏 무슨 나물 냄새 같은 게 배어 있다는 착각이 든다. 작고 동그랗고 주름이 많은, 어딘가 태생적으로 개궂어 보이는 그의 얼굴은 사실, 아직 죽음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실제 나이를 염두에 둔 편견의 반작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은 나이가 가져다주는 장물도 훈장도 아니고, 삶의 반대편에서 선고되는 징벌은 더욱 아닐 것이다. 더 늙었다고 해서 더 빨리 죽음을 맞이한다는 법은 없다. 죽음은 시간 흐름에 의한 순열인 듯싶으면서도 통상의 시간관념을 거스르며 불현듯 정체를 드러내는, 그의 말마따나 “삶의 일부분”으로서의 사건인 경우가 많다. 그는 실제로 주변인의 죽음을 많이 겪었다. 그의 부모뿐 아니라, 친구, 가족 등등. 더욱이 그는 이미 사십년 전, 부인과 사별했다. 과문한 나는 이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 사실을 알고, 나라면 어땠을까 하고 잠깐 자문한 적이 있다. 그가 부인과 헤어진 때가 딱 지금 내 나이 무렵이었으니 더 그랬을 것이다. 내겐 아내가 있어본 적 없지만, 딱히 그래서가 아니더라도 잘 실감이 안 간다. 장담은 못해도, 나의 부모도 형제도 아직 죽음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 연유로 나는 죽음에 대해선 여전히 일자무식이라 해도 과언 아니다. 그러나 죽음에 관한 한, 그 무엇도 산 사람이 확언하거나 증명하긴 힘들다. 죽음과 연관된 꿈을 자주 꾼다고 그는 말했거니와, 꿈속에서라면 나도 죽음에 대해서 할 말이 꽤 있을 것이다. 그를 만나러 가기 전날 밤에도 나는 내가 바닷속에 잠겨 죽어가는 꿈을 꾸었으니까. 그것은 삶의 작용일까 죽음의 무애한 희롱일까.
이 지번에서 아버지는 마지막 일곱해를 사셨다.
아들도 몰라보고 어데서 온 누구냐고 시도 때도 없이 물어쌓는
망령 난 구십 노모를 미워하면서,
가난한 아들한테서 나오는 몇푼 용돈을 미워하면서,
절뚝절뚝 산동네 아래 구멍가게까지 걸어내려가
주머니에 사 넣은 한갑 담배를 미워하면서,
술 취한 아들이 밤늦게 사들고 들어와
심통과 함께 들이미는 군밤을 미워하면서,
너무 반가워, 그것도 너무 반가워
말보다 먼저 나가는 야윈 손을 미워하면서,
(…)
죽어서도 떠나지 못할 산동네를 미워하면서,
산동네를 환하게 비출 달빛을 미워하면서,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이 지번에서 아버지는 지금도 살고 계신다.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부분
시인이 6년 만에 낸 시집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의 1부에 실려 있는 시다. 더 덧붙이고 사족 달 것 없이 액면 그대로 이해되고 명확하게 ‘그림’이 그려지는 작품이다. 이 시뿐 아니라, 시집의 1부엔 그의 어머니, 아내 등 그가 먼저 떠나보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로 담겨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단지 사실 나열이나 아직 살아 있는 자의 위치에서 과거를 곱씹는 소회에 그쳤다면 자못 밋밋하고 덤덤한, 그저 흔히 있을 법한 회고에 불과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읽어도 문제될 건 없다. 시인이 그런 마음으로 썼다 해도 마찬가지다. 한편의 시는 시인에게서 놓여나는 순간, 그 자체로 하나의 생물이 된다. 모든 걸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자는 맹랑한 소리가 아니다. 시는 그것이 씌어지는 순간 이후론 시인 스스로도 가늠하지 못할 고유의 에너지와 자장을 갖게 된다. 씌어져 있는 언어의 영역 안에서만 시가 운위될 때, 그 시는 단순 표어나 감성의 표피만을 두루뭉수리로 문지르다가 증발하는 물파스 같은 게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시가 무슨 외과수술용 집기나 내시경 같은 게 되어야 한다는 소리 또한 아니다. 시가 ‘무엇’이 되고자 할 때, 또는 시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할 때, 시는 기이하게도 그 자체의 생명을 잃는다. 그렇다면 시는 왜 쓰는 것일까. 아울러, 앞서 신경림의 시들이 “액면 그대로 이해되고 명확하게 ‘그림’이 그려”진다고 혼자 떠벌였는데, 그 이해가 정말 완전한 ‘이해’이고 그 명확함이 정말 사실 그대로의 ‘명확’일까. 이 요원한 자문에 대한 억지대답을 궁구하기 전에, 시인의 육성을 다시 곱씹어본다.
“사실 그래…… 시인이라는 것은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지도층과는 생각이라도 다르게 가져야 하지 않나 싶어. 사는 거야 각자의 방식대로 살게 되는 거고, 이런저런 잘못도 저지를 수 있는 거지만 말야. 정치하는 놈들, 여야를 떠나서 다 사기꾼들이고 지식인이라는 것들도 마찬가지야. 시라는 게 그렇잖아? 지식이어서도 안되고 뭐 옳은 소리만 떠들어대는 것이어서도 안돼. 시가 누구를 가르치고 끌고 가려 해서도 안되는 거고. 시가 변혁운동을 이끌고 가야 한다 뭐 이러면서 외치기만 하다보면 결국 문학적으론 패배자가 되지. 나도 그런 시기가 있었지. 내가 시 쓰는 게 가장 힘들었던 때가 시가 무슨 변혁운동에 기여해야 한다고 외쳐댈 때였어. 문학 자체, 그러니까 시를 중심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은 패배자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 많이 힘들었지. 80년대 같은 때 말야. 시가 역사에 기여해야 하고 변혁운동에 복무해야 한다, 뭐 그러던 시기. 특히 창비 계열 문학가들이 그랬고, 나도 그렇게 말하고 다니긴 했지. 헌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론 ‘아, 이건 사기다. 시가 왜 이렇게 재미없어지나’ 뭐 이런 생각했어.(웃음) 그리고 그러면서 시를 써보니까 시가 도대체 신명이 안 나. 변혁운동에 복무하려면 뭣하러 시를 써? 나가서 싸우면 되지. 그러다가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면서 시가 조금씩 나아지더라고. 시는 무엇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쓰는 것이다, 뭐 이러고 나니까. 그냥 쓰는 거여. 뭘 의식하고 쓰면 신이 나겄어?”
말하는 그도, 듣는 나도 뭔가 ‘신명’이 돋는 말이다. 그는 정말 이 말을 하면서 새삼 ‘당신도 그렇지?’ 하며 동조를 구하는 듯한 눈빛을 내게 보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명. 어떤 단어들은 느닷없이 생활 주변에 스며들어 신묘한 주술처럼 부지불식 머리 위를 맴돌기도 하는데, 내겐 ‘신명’이란 말이 그랬다. ‘신명’은 대개 육체적인 깨어남을 일컫는다. 글을 쓰는 이가 책상에 앉아 머리통을 싸매고 원고와 씨름하는 것도 단순 두뇌노동이라기보다 온몸에 맺혀 있는 혈(穴)들을 뚫어내는 일이라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따라서 글이 써지지 않을 땐 몸을 움직여 근육 여기저기에 틀어박힌 생각의 옹이들을 털어내는 게 중요하다. 체질과 성향에 따라 방법은 다르겠지만, 막힌 곳을 뚫고 나가는 지구력은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힘 더하기 그 힘에서 빠져나와 생각의 큰 틀을 멀찍이 관망하는 이완을 병행할 때 비로소 탄탄해진다. 이건 무슨 격투의 원리와도 비슷하다. 마구 돌격하는 것으로 상대의 혈을 잠식하려는 행위는 거울 속에 머리를 들이밀어 그 속에 담긴 자기 얼굴을 만지겠다고 하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제대로 힘이 실린 몸은 결코 무겁지 않다. 보란 듯 방점을 찍어 똑바로 쳐다보라고 쓴 글씨는 의도만 돌덩이처럼 확연할 뿐, 그 어떤 여운이나 매혹도 느껴지지 않는다(이것은 사랑의 원리와 유사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신명은 그 자신의 고유한 에너지를 반등시켜 스스로에게서조차 놓여나는 탄력을 확보함으로써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늘 보던 익숙한 풍경들 속에서 여러 색깔의 정서와 숨겨진 뜻을 제 것인 양 받아들이는 여유도 생겨날 수 있다. 그런데 그 여유는 마냥 편안한 것만은 아니다. 영혼의 혼탁이 닦여진 거울엔 외려 미처 살펴보지 못한 누군가의 아픔이 있다. 몸 바깥의 생면부지 통증이 몸 안을 건드리는 상태. 이것 역시 ‘신명’의 한 양상임에 분명하긴 하다.
3
그 여자가 하는 소리는 늘 같다.
내 아들을 살려내라 내 아들을 살려내라.
움막집이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구멍가게 자리에 대형 마트가 들어섰는데도
그 여자의 목소리도 옷매무새도 같다.
(…)
세상이 달라졌어요 할머니 세상이.
이렇게 하려던 내 말은 그러나 늘 목에서 걸린다.
어쩌면 지금 저 소리는 바로
내가 내고 있는 소리가 아닐까.
세상이 두렵고 내가 두려워
속으로만 내고 있는 소리가 아닐까.
—「봄비를 맞으며」 부분
바깥을 보게 만드는 힘. 뭐 그런 것에 골몰하게 되는 상황이란 묘하게 역설적이다. 자신의 아픔이나 고민 속에 파묻혀 있다가 그 파묻혀 있음에 진저리치면서 고개 돌려 밖을 내다보니 자신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아픔을 타인에게서 목격하게 되더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럴 땐 단순 동조가 아니라, 아픔 자체의 밀도가 증폭되면서 그것이 정말 나의 것인 양 온몸으로, 실제로 앓게 된다. 헌데 그 앓음은 묘하게 에로틱하다. 하나에서 둘이 되었다는, 그리하여 그 힘이 몇배 더 증폭되었다는 물리의 기본 원리가 작용해서일 수 있다(이 역시 사랑의 원리와 닮아 있지 않은가). 때로 세상을 크게 뒤흔드는 저항과 반동의 힘 또한 이런 원리에 기반한다고 본다. 그것 역시 일종의 ‘신명’이다. 전도유망한 남미의 의대생이 모터싸이클을 타고 휘젓고 다닌 세상의 그늘을 통해 희대의 혁명가로 거듭나는 과정에도 필시 그러한 신명의 원리가 작용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의 안위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세계의 대의명분에 투신하기 위해 청년 에르네스또가 총을 들었다고는, 나는 믿지 않는다. 혁명은 그의 삶의 유일무이한 호사고 원칙이고 목표이고 무엇보다 최선의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그 개인의 슬픔, 아픔, 환희, 절망 등이 모두 버무려져 있었을 것이다. 구두수선공이 구두를 매만지는 것으로 스스로를 완성하듯, 그는 총을 통해 스스로의 정의를 지키려 했다. 자신이 체감한, 그리하여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열고 받아들인 어느 신명스런 기운 아래서.
(이야기가 돌연 삼천포를 넘어 남미까지 넘어갔군. 신명이란 게 이렇다. 한번 치달으면 시간도 국경도 훌쩍 건너뛰어 저 혼자 ‘오버’하게 된다. 어서, 재빨리, 귀환하자. 어느 늙은 여자가 추루한 행색으로 비감하게 서 있는 남한의 어느 거리로.)
어떤 맺힘 많은 소리는 밖으로 터져나오지 않고 “속으로만 내고 있는” 신음 같을 때가 있다. 그런데 위의 시에서 “여자”가 외쳐대는 소리는 밖으로 터져나오되, 듣는 귀가 닫혀 있는 먹통 상태다. 그걸 듣고 어느 초로의 남자가 제 안에 갇힌 소리를 체감한다. 저게 혹시 “내가 내고 있는 소리가 아닐까” 하며. 대신, “세상이 달라졌어요 할머니”라고 분별과 연민을 담아 충고하려던 말은 목에 걸려 나오지 않는다. 그 “달라진 옛날의 그 길에 시적시적 봄비가 내린다.”(같은 시) 듣지 못(안)하는 소리를 내뱉는 여자와 터져나오지 않는 소리를 안으로 삼키는 남자. 길은 “옛날의 그 길”이되, 그 위로 내리는 비는 한번 지나면 다시 만나지 못할 오늘의 “봄비”다. 이 상황에서 비는 평범한 자연현상을 넘어 이 시가 가지고 있는 기본 정서의 매개가 되기도 하고, 전체 풍경 안에 배어 있는 정한을 물리화하는 오브제가 되기도 한다. 이건 물론 지극히 교과서적인 해석이다. 그 자체 큰 무리가 없다 해도, 이 시가 내포하고 있는 정서적 울림을 단순한 문학기법으로 정석화하면 시가 씌어진 배후의 영묘한 ‘신끼’를 헤아리긴 어려워진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것은 결코 언어로 확증되거나 분해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시에서 드러난 정황에 대한 육체적인 실감이다.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 아팠고 그 아픔이 또다른 이의 심혈을 자극했으며 하늘에선 비가 내렸다. 다시 일반화해서 정렬하자면, 이 세상을 사는 ‘누군가들’의 쓸쓸하고도 험난한 일상 속에 저 세상에서 채 이승과 하직하지 못한 누군가의 눈물로 의역될 만한 봄비가 흩날렸다는 정황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그 풍경엔 그 어떤 현실적 해갈이나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어느 한 죽음과 결부된 살아 있는 사람들의 고통이 나지막이 고여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씁쓸한 고통이 빗물에 번져 읽는 이의 동공을 흐릿한 습기로 멍울지게 한다. 이것은 시가 기본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공감의 일차적(또는 고전적) 원리이고, 그런 점에서 모종의 상투성을 시비 걸며 문학적 참신성 따위의 객설을 늘어놓게 만들 소지도 있지만, 시가 가진 언어의 결이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때로 죽은 이의 사진을 불현듯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억장이 무너질 때가 있듯, 한편의 시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은 모종의 판단정지 상태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 앞에서 순연하게 몸이 젖어 지금 내리는 빗소리를 누군가의 피맺힌 울음으로 듣는 일. ‘신명’이란 흔한 쓰임새 그대로 어떤 즐거운 상태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자신을 내려놓고 뭔가에 무연하게 무너져내릴 줄 아는 힘도 분명 ‘신명’의 작용이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는 자가 어찌 웃음의 통렬한 해갈을 실감하겠는가.
4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던 그 집에서 우리는 저녁때까지 술을 마셨다.
중년의 여주인은 우리말을 못 알아들었지만 안주를 장만하며 술잔을 채우며 연신 ‘하이하이’다.
외국 손님은 처음이란다.
동네 사람들 몇이 들어와 인사를 하고 낯선 이방인들 술마시는 모습이 신기해서 지켜본다.
카운터에 성모마리아상이 놓여 있다.
2
화면이 보여주는 쓰나미가 휩쓸고 간 바다 마을이 바로 그 동네다.
어, 어 하는 사이 양철지붕들이 종이딱지처럼 물에 뜨고
집들이 성냥갑보다 더 가볍게 둥둥 물살 위를 떠다닌다.
사람들은 흡사 장난꾼 아이가 쏘아대는 물대포 앞에 놓인 개미떼다.
필사적으로 육지를 향해 달리던 차들이 헛되이 물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마을은 순식간에 폐허가 된다.
(…)
3
하느님은 카운터에 놓여 있던 성모마리아상만은 거두시었을까.
—「카운터에 놓여 있는 성모마리아상만은」 부분
세상에 내리는 비는 그야말로 흔해빠진 우연 같지만, 비라는 게 어떨 땐 그냥 내리지 않는다. 외려, 너무 정확하게 때를 맞춰 산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도 하고, 위무의 한잔 술을 부추기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그 어떤 암시나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앗아가버리기도 한다. 그게 단순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헤아려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면 그건 자연이 아니다. 인간의 자의로 좌우되는 자연이라면 그건 자연뿐 아니라 인간도 무시당할 만한 일이다. 자연은 인간의 판단으로 가늠할 수 있는 일목요연한 체계가 없어서 더 황홀하고 무서울 따름이다. 어쩌면 시는 자연에의 촉(觸)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짚을 수 없고, 언제나 때늦을 수밖에 없으나, 바로 그러한 한계 때문에 예민하게 곤두선 불안과 기대의 더듬이 같은 것. 다시, 시인의 육성.
“일본 어느 조그만 바닷가 마을에, 뭘 조사하고 알아보고 해서 간 게 아니고 그냥 갔었던 적 있어. 거기 술집 가서 술을 먹었어. 마을 분위기가 좋고 술집 분위기도 좋고 해서 그냥 간 거지. 밤까지 마시고 그 다음날 서울로 돌아왔는데, 우리가 돌아온 그 다음다음 날 거기에 쓰나미가 덮친 거야. 티브이를 보니까 우리가 갔던 바로 그 마을이 분명해. 그래서 그 마을 생각이 나서 시를 썼는데, 그러고 나서 육칠개월 뒤에 확인해봤더니 허허, 그 마을이 아니더라구. 그런데 쓸 땐 그 마을이라고 확신하고 쓴 거지. 여하간 그 비슷하게 생긴 마을이 쓰나미에 많이 휩쓸려 갔으니까. 일종의 망상이지. 머릿속으로 단정하고 있다가 아 저 마을이네, 하고 혼자 확신을 하게 된 거였거든. 허허.”
이 약간은 어이없는 착오는 ‘허허’2) 소리로 묻어버리기엔 사뭇 여운이 많다. 앞서 “예민하게 곤두선 불안과 기대의 더듬이”라 일렀던 바, 시인이라면 대체로 특정 장소와 심리적 결이 맞불을 일으켜 전혀 의외의 것들을 예감하거나 감득하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그 예감은 현실의 실제 정황들을 뒤섞거나 왜곡해 실제보다 더 큰 세상의 영역을 환기시키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건 시가 가지고 있는 독자적이고도 품 넓은 현실 감응력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이 티브이를 통해 지켜본 쓰나미 현장은, 설령 그곳이 그가 다녀온 ‘바로 그 장소’가 아니더라도, 그가 체감하는 심리적 파동 안에선 별반 다르지 않은 장소로 환기되어 그 순간의 물리적 정한으로 되새김질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오류지만, 그러나 일차원적인 사실 정합 여부를 떠나 세계의 보다 큰 얼개를 멀찍이 판독하게 한다는 점에서 (시적 의미에서) 긍정적 오류다. 요컨대, 그는 티브이를 보면서 가슴이 섬뜩해지며 뭔가 아픔이 느껴졌던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든 타인의 죽음이든 불과 며칠 동안의 삶 사이에 언제든 죽음이 끼어들 수 있다는 자각. 바다 건너 마을에서 잠깐이나마 연을 맺었던 불가해한 우연의 끈이 자신과 그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다리로 끊어지면서 되레 더 끈끈한 동질감을 갖게 해줬다는 서늘한 여운. 그 잔인하고도 풍성한 자연의 환유체계를 일설로 풀어내는 걸 업으로 삼은 자의 섬세한 해찰이 거기에 숨어 있었는지 모른다. 이어지는 그의 육성은 이러하다.
“그런데 나중에 일본의 무슨 보고서를 보니까 쓰나미 덕에 수지맞은 놈들은 다 엉터리 같은 놈들이더라구. 뭐 누구를 구했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면서. 한국에서 정치하는 놈들이랑 똑같은 놈들이지 뭐. 돈푼이나 갖다주면서 얼굴 내밀고 사진 찍고 그러는 놈들. 그런 놈들 꼴 보기 싫고 그런 건데, 어떻게 세상이라는 게 다 그런 놈들만 설쳐대고 있는 거여. 근데 이게 오늘내일 얘기가 아니고 뭐 천년 전에서부터 이래왔던 것 같어. 뭐 그래서 허무적인 생각이 드는 게 이건 뭐 어쩔 수 없다 싶으니까 그런 거겠지. 사회주의가 되면 세상이 뭐 엄청나게 달라지고 소위 개조된 인간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꿈꿨던 적도 있긴 했어. 가령 중국의 문화혁명 같은 것도 그런 거 아녀. 하지만 그것도 결국 실패했잖어. 그러다보니 허무주의가 깊어져. 그래도 이 세상에 태어나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는 거여. 노력하는 만큼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겠냐 하는 거지. 그래서 내 시에도 허무주의적인 부분들이 많이 있을 거야. 사는 것도 많은 것들을 놓아버리게 되고. 그래도 포기할 것 포기하고 놓아버릴 것 놓아버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 만한 것들은 있다고 생각해. 포기한 것들 속에서도 살아갈 만한 가치 있는 것들을 찾는 거지.”
이야기는 다시 이렇듯, 지금 발 딛고 있는 삶의 필연적 문제들을 되짚는 것으로 돌아온다. ‘허허’와 ‘헤헤’ 사이에서 공명하는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면서. 묘비명 따위 생각해본 적 없다고, 자신이 누구에게 뭘 가르치고 그럴 수 있는 인생을 산 게 아니라고, “나한테 도대체 뭘 배울 게 있겠어?” 하며 천진과 무구가 양쪽으로 실룩거리는 특유의 눈웃음으로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면서.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북한산 아래 거대한 눈보라로 확산해가는 지상의 어느 일월 중순. 나는 얼굴 자체가 한권의 웅숭깊은 책으로 현신(現身)한 한사람의 영혼을 머릿속에 스캔한 것이다.
그날 이후, 자꾸만 길 가는 노인들의 얼굴을 힐끔거리게 되는 습관은 평소 잘 안 보던 책들을 들추게 된 것과 묘하게 일치한다. 누구라도 볼 수 있는 것을 아무도 말할 수 없는 말로 혼자 되뇌고 싶다는 이상한 고집을 강하게 되새기며.3)
이 글의 마침표를 찍는 지금, 서울엔 또 많은 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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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릉의 아파트에서 신경림 시인과 마주앉아 있으면서 어릴 적 어른들과 두던 장기판이 무시로 떠올랐던 까닭일까. 그 상황을 뒤늦게 ‘복기’하려 드니 자꾸 모든 게 동네 어귀에서 여흥 삼아 즐기던 무고하고 순연한 게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이기든 지든 물적 심적 부담 따위 존재하지 않는, 그저 흘러가는 바람 속에서 희희낙락 노닥거린 다음 집으로 돌아가 아랫목에서 군고구마나 까먹으면 끝인 그런 게임. 그런 놀이를 잃어버린 이후, 삶은 지옥이 되었던 것 같다.
2) 여기서 조금 뜬금없지만, 시인의 웃음소리를 잠깐 돌이켜본다. 앞서 그의 얼굴이 개궂어 보인다 말했거니와, 말끝마다 간간히 배어나오는 그의 웃음은 범상한 듯 묘한 울림이 있다. 그 소리를 위에선 ‘허허’로 표기했지만, 실제로 들으면 ‘허허’와 ‘헤헤’ 사이에서 전후좌우로 힐끗거리는 듯한 독특한 음가가 공명한다. ‘헤헤’라 표기하지 않은 건 지긋한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경망스레 여겨질까 저어한 탓이거늘, 분명히 그 웃음소리에서 속 빈 경망 따윈 느껴지진 않는다. 그렇다고 ‘허허’가 완전한 모사라고는 할 수 없다. ‘허허’는 경망과는 또 다르게 속 빈 느낌이지 않은가. 허탈이나 체념 따위로 명명될 정서적 동기를 가질 터인데, 그에게서 생에 대한 근원적인 박탈감이나 허망함이 크게 느껴지진 않는다. 설령, 그가 대면하는 내내 스스로 ‘허무주의자’라 자인하는 발언을 수차례 했다 쳐도 그 ‘허무’가 무슨 고개 숙인 낭인의 텅 빈 바랑 같은 공소감에 휩싸여 있는 건 아니다. 다만, ‘허허’라 쓰고 거기에 공의 탄력을 고조시키는 공기흡입기 같은 걸 주입하면 그 웃음이 전달되려나. 그래서인지 시집 2부에 주로 배치된, 유폐의식과 은둔심리, 죽음에의 희원 등이 담긴 시들에서도 삶에 대한 모종의 부정적 인식을 들춰내긴 힘들어 보인다. 그 시들은 생의 필연적인 어둠과 소멸에의 자각을 얘기하되, 더 큰 자연, 더 큰 우주, 그리하여 더 큰 현세의 그늘을 아우르려는 것일 뿐 이생과 미리 담쌓고 암흑 속 별의 꼬리나 스토킹하겠다는 작의를 드러내진 않는다. 그는 하늘의 별을 보면서도 다만 ‘허허’(혹은 ‘헤헤’)거리는 듯싶다. 그 웃음이 좀더 해맑아지면 가령 이런 풍경이 그의 눈 속에 비치곤 한다. “밤새 하늘을 지키느라 지친 별들이/눈을 비비며 은하를 타고 달려내려온다./순간 자잘한 꽃들도 자리를 박차고 함성과 함께 뛰쳐나와/마침내 초원에서는 화려한 윤무가 펼쳐진다.”(「윤무」 부분)
3) 신경림 시인이 최근 젊은 시인의 시에 대해 언급한 육성을 사족 삼아 덧붙인다.
“요즘 젊은 시인들이 강정이나 용산 참사, 쌍용차 문제 등 현실문제에 대해 참여하고 발언하는 건 나쁘지 않다고 봐. 언어가 현실하고 분리되어 있을 순 없는 거거든.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봐. 하지만 그걸 단세포적이고 피상적으로 생각해선 안돼. 가령 철도파업 문제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거든. 어느 쪽은 나쁘고 어느 쪽은 옳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사고하는 건 좋지 않아. 그리고 요즘 현실발언하는 시들이 참 재미없더라고. 그게 왜 재미없어지는가라는 걸 생각해야 돼. 어느 진영에서 요구하는 논리를 그대로 받아쓰고 있으니까 그래. 진영의 논리란 그게 어느 쪽이든 절대 옳을 리가 없어. 그리고 요즘은 70,80년대 독재시절과는 많은 게 너무 다르거든.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얘기할 만큼 전선이란 게 분명하지가 않아. 그러니 현실참여라는 게 어느 쪽에 가담을 해서 뭘 해라 하는 게 될 수 없어. 더 깊이있는 사고를 해야 해. 편 가르면 안돼. 자기와 생각이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해. 문학도 자기와 생각이 다르게 문학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 나이 많은 사람들도 젊은 시인들의 난해한 시도 읽어보고 왜 난해한가 생각도 해보고 난해시인들은 전통적인 시라든가 그밖의 여러 시들에 대해서 깊이있는 이해가 필요해. 정치문제든 뭐든 자기 생각만 주장하게 되는 게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만들어놓은 오류 같아. 맨날 편 나눠서 싸움질이나 해대니 거기에 옳고 그른 게 어디 있겠어? 좌우를 떠나서 상대방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 바로 그게 보수주의자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