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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장하석 『온도계의 철학』, 동아시아 2013

‘다른’ 과학의 가능성을 묻는다

 

 

강양구 姜亮求

프레시안 학술・과학 담당기자 tyio@pressian.com

 

 

좋은 책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저마다 여러 답변을 내놓겠지만, 나는 두가지를 꼽고 싶다. 하나는 다른 이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책. 또다른 하나는 읽는 이마다 자기 관심사에 따라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책. 장하석(張夏碩)의 『온도계의 철학』(Inventing Temperature: Measurement and Scientific Progress, 오철우 옮김)은 바로 이런 기준에 맞춤한 좋은 책이다.

이 책은 21세기 과학기술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초등학생도 물이 100도씨에서 끓는다는 ‘상식’은 안다. 왜냐하면 물이 끓을 때 온도계가 100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이 끓을 때 가리키는 그 온도계의 숫자 ‘100’은 어떻게 결정된 것일까? 얼핏 생각하면 세상 모든 온도계의 기준이 되는 ‘절대’온도계가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문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 절대온도계가 정확하다는 사실은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더 나아가 최초로 온도계를 만든 사람은 온도를 재는 물질(수은 등)이 눈금을 매길 수 있을 정도로 일정하게 팽창한다는 것을 어떻게 간파했을까?

『온도계의 철학』은 바로 이런 질문에 답하며 우리가 지금 당연한 과학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온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추적한다. 그런 점에서 원제인 ‘Inventing Temperature’는 책의 내용을 두 단어로 요약한 훌륭한 제목이다. (솔직히 한국어판의 제목을 보고서 놀랐다!) 지은이는 이렇게 온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수백년간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과학자들의 텍스트를 들춰내는 학문적 집요함을 보여준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과학사에 한 획을 그은 업적으로 칭송받을 만하다. 특히 한국사회를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학자든 기자든 자신의 관심분야를 놓고서 이런 집요함을 보여준 사례가 얼마나 있었던가.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온도계의 철학』은 꼭 과학사나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읽는 이마다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서 전혀 다른 독해가 가능한 책이다. 예를 들어, 과학의 역할이 자연을 모사(模寫)하거나 근사적으로 재현하는 데 있다고 여기는 과학자라면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이 갑론을박을 벌이며 온도 개념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반면에 현역기자로서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비판적으로 탐구해온 평자는 이 책을 읽으며 두가지 문제와 씨름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이다. 한국사회에서 어떤 학자가 저자와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학문인생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시기의 시간을 바칠까? 과학기술은 물론이고 인문학마저도 ‘쓸모’가 있는지, 정확히 말하면 돈벌이에 도움이 되는지부터 따지는 이 사회에서 그런 시도는 철없는 열정 혹은 넋 나간 행동으로 간주될 것이다. 과학기술 영역으로만 맥락을 좁혀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한국에서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구호 아래 과학자들이 최신의 조류를 좇는 일을 정부가 앞장서 선동한다. 하지만 이렇게 최신의 조류만 좇는 상황에서 과연 ‘창조’의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잘해야 선진국이 해놓은 것을 모방해 뒤치다꺼리를 하는 식일 테고, 그나마 그것마저도 유행이 지나면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게 뻔하다.

 

『온도계의 철학』은 기본적인 것에 의문을 품는 일이야말로 정말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저자는 영국에서 2004년에 출간한 이 책에 이어서 2012년에 Is Water H2O?를 펴냈다. 실로 절묘한 선택이다. 21세기 첨단과학의 핵심에 놓인 생명현상을 이해하려면 물(H2O)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최근에는 ‘전지(電池)’를 파고들고 있다. 모바일에 기반을 둔 일상생활을 가능케 한 한가운데 전지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그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또다른 고민은 『온도계의 철학』에서 저자가 제기한 ‘상보적 과학’(complementary science)을 둘러싼 것이다. 상보적 과학은 이 책과 후속작업(물, 전지)에서 보여지듯이, 정통의 과학지식이 확립되는 논쟁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전문가적 과학에서 배제된”(27면) 것들에 주목한다. 그는 이런 상보적 과학이 “전문가 과학이 발전해온 지배적 전통에서 벗어난 과학 연구의 (또다른) 전통을 창조할 수 있으며” “그중 성공적인 일부는 (전문가 과학이 지배해온) 우리 과학지식의 성격에 결정적인 변형을 촉구할 수 있다”(481~82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런 상보적 과학의 아이디어를 좀더 확장할 수는 없을까? 온도, 물, 전지 등은 이미 ‘만들어진’(made) 과학이다. 반면에 우리 옆에는 생명과학, 나노기술, 로봇공학 등 지금 ‘만들어지는’(making) 과학이 있다. 이 만들어지는 과학은 우리 삶에 미치는 충격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큼에도 그것을 둘러싼 논쟁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다. 심지어 정부나 기업이 의제를 설정하면 연구를 직접 수행하는 과학자조차 군말 없이 따르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것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성찰하고 공론화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당장 다음과 같은 질문은 제대로 제기조차 되지 않고 있다. 과학자 공동체가 지금 어떤 특정한 연구에 관심을 쏟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그 연구를 통해서 혜택을 보는 이는 누구인가? 전문가들이 은폐하거나 혹은 포착하지 못한 연구의 부작용은 없는가? 그 연구가 채택되는 과정에서 고의로 혹은 우연히 배제된 연구는 없는가? 나는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이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운이 좋다면 인류에게 꼭 필요한 ‘다른’ 과학의 가능성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의도하진 않았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바로 ‘과거의 과학’을 말하는 『온도계의 철학』이 ‘미래의 과학’에 전하는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