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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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경 徐大炅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시와세계』로 등단.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가 있음. foodrobber@naver.com

 

 

 

나의 무지는 푸르다

 

 

나는 결국 이 길 위로 돌아와 있다, 이 길은 무엇인가, 나는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본다, 아무도 없다, 오직 싸늘한 푸른빛에 잠긴 텅 빈 길만이, 저 너머로 끝없이 뻗어가는 소름끼치는 푸름만이 내 앞에 있다, 무엇이 나를 이 길 위로 옮겨다놓는지 알 수 없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아이였을 때부터, 아버지의 매질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열세명의 아버지의 매질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일년에 한두번, 그러다가 한달에 한두번, 언제부턴가 하루에도 몇번씩, 나는 이 길 위로 돌아와 있다, 지금은 하루의 대부분, 아니 일년의 대부분, 그런 것 같다, 그러는 사이 세월이 흘렀고, 나는 이제 서서히 머리가 벗겨지는 나이가 되었다, 집에서 아내가 집어주는 사과 조각을 씹으면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 또는 직장에서 서류를 검토하다가, 누군가와 명함을 교환하고 악수하다가… 돌연 섬광이 터지고, 나는 의식을 잃는다, 의식을 잃고, 다시 깨어나 눈을 뜨면, 내 앞엔 소용돌이치는 푸른 길이, 소름끼치는 낯익은 길이, 푸른빛의 무지가, 무한한 공허가 놓여 있다, 아니 내게 직장이 있었던가? 아내가 있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자식도 있을지 모른다, 알 게 뭔가, 더이상 이 길 이전의 삶과, 이 길 위의 삶이 구분되지 않는다, 나는 이른바,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 치매를 앓고 있는지 모른다, 평생의 과업처럼, 필생의 사업처럼, 그러나 지금 나의 말쑥한 옷차림과 내가 들고 있는 검은 가죽가방을 보건대, 이 길 이전의 나의 생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아마도 푸른 공기에 짓눌린 이 텅 빈 길을 한참 걸어올라가 버스정류장에서 보란 듯이 버스를 탈 것이고, 지하철을 갈아탈 것이고, 다시 예전의 삶으로 복귀하게 될 것이다,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예전의 삶이란 무엇인가, 돌아간 내게 그동안 어디에 있었느냐고, 어디에 갔었느냐고 물어온 사람은 없었다, 그런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한다,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나에 대한 기억을 빠르게 잃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아니 서서히, 아니 규칙적인 속도로, 아니 치매 환자처럼, 아니 정신분석가처럼, 아니 병든 개처럼, 그런데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기억은 나의 기억이 확실한가? 나는 어디로 돌아갔던가, 집으로? 학교로? 학교라니? 가방 속에 든 물건들을 보건대 나는 교수인지도 모른다, 몇권의 책, 비트겐슈타인, 프레게, 프레게? 그러나 또 내 가방 안엔, 휘발유가 담긴 작은 통, 담뱃갑, 먹다 남은 빵 봉지, 죽은 쥐, 스패너, 깨진 사기그릇, 더러운 헝겊 따위가 들어 있다, 나는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앞을 본다, 아무도 없다, 푸른 공기에 짓눌린 텅 빈 길만이 무한히 지속한다, 아니 단속적으로, 아니 동시적으로, 아니 악령처럼, 아니 신성처럼, 아니 심연처럼, 아니 구두처럼, 아니 악어처럼, 나는 더이상 묻지 않는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나는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어디로? 나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나의 의식은 지워져가는 누군가의 삶의 흔적을 더듬고 있고, 동시에 필사적으로 망각하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억나는 것은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었다는 것, 지금처럼, 누군가, 그런 것 같다, 나는 가방에서 담뱃갑을 꺼내어 담배 한개비를 입에 문다, 무언가 희미한 기억이 떠오른다, 문득, 아니 예상대로, 예상 밖으로, 아니 필연적으로, 아니 환영처럼, 아니 악몽처럼, 정류장, 마을버스, 이것은 무엇인가? 섬광이 터진다, 기억의 섬광, 그런 것 같다, 도로 위의 태양, 빗방울, 허공에서 들려오는 삶의 웃음소리…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중얼거린다, 비가 내리는군요, 어제도 비가 내렸습니다, 누군가, 섬광 속에서, 그러나 나는 예전에도 이 섬광을 여러번 보았지, 그런 것 같다, 또다시 섬광이 터지고, 푸른 길이 창백해지고, 나는 본다, 가로수, 여름, 행인들, 차들의 경적소리, 섬광 속에서 나를 흘깃 돌아보며 버스에 오르는 한 사내를 본다, 망각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그런 것 같다, 나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손을 치켜든다, 아니 손을 치켜드는 시늉을 한다, 나는 연기한다, 나의 고통, 나의 삶, 나는 정류장 플라스틱 의자에 앉는다, 아니 앉는 시늉을 한다, 정류장 차양 끝에 망각의 물방울이 맺혀 있다, 물방울을 본다, 보는 시늉을 한다, 물방울이 떨어지고, 다시 물방울이 고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끄덕이는 척한다, 누군가 낄낄거리며 나의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런 것 같다, 나는 본다, 보는 시늉을 한다, 물방울 속에서, 망각의 섬광 속에서, 검은 가방을 들고, 도망치듯 걸어가는 한 사내의 뒷모습을

 

 

 

굴뚝의 기사

 

 

연통이 막힌 곳에 그가 있다. 내가 긴 꼬챙이를 들어 연통을 두드리면 그는 날 내버려둬! 고함을 지른다. 그는 소년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몹시 늙었다. 그는 네발을 능숙하게 움직여 연통 속을 기어오르고 일렬로 늘어선 형광등이 유령처럼 황량한 빛을 발하는 공장 천장을 소리 없이 가로지른다. 제발 저 빌어먹을 놈을 쫓아내. K가 말한다. 귀신인데 무슨 수로. 용접기 불꽃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P가 중얼거린다. 저놈이 또 내 저녁을 훔쳐갔어. J가 말한다.

 

소년은 내가 이곳에서 일하기 전부터 존재했다. 그는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휴식시간에 야간작업반 동료들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면 기계에서 나오는 녹색 섬광으로 물든 유리창 위로 낡은 잿빛 망토를 어깨에 걸친 앙상한 아이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치곤 했다. 기계가 멈춘다고. K는 말했다. 저 쥐새끼를 잡아야 해. 굴뚝의 기사. 나는 속으로 속삭였다. 꿈속에서도 소년은 웅크리고 있었다. 동료들 모두가 소년의 꿈을 꾸었다. 우리는 그를 사랑했다. 연통을 느리게 순환하는 증기의 흐름 속에서 소년의 맑은 눈동자가 깜박였다.

 

기계가 멈춘다니까. K는 선반을 두드리며 반복한다. K의 웃음소리. 소년은 굴뚝 속을 기어오르고 있다. 유리창에 부딪는 자정의 진눈깨비. 나는 눈을 감은 채 소년의 망토가 펄럭이는 소리를 듣는다. 타오르는 검은 불. 소년은 기어오르고 있다. 검은 연기의 비명 속에서, 어둡게 반짝이는 잿빛 박차(拍車)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