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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종옥 金鍾沃

1973년 서울 출생. 2012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pstay@live.com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

 

 

어느날 나는 그녀의 전화를 받고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차를 출발시켰다. 나는 길을 찾는 데 영 젬병이어서, 웬만하면 내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가기 전에는 충분히 길을 조사하고는 했다. 인터넷으로 지도를 확인하고 구간마다 잘라서 A4용지로 여러장을 출력한다. 사실 네비게이션을 달면 그런 수고를 피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것은 내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얼마나 자주 가겠느냐 싶은 생각이 매번 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결코 원하지 않는 일 중 하나다. 그러나 그날은 이상하게도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전화 목소리, 전화 설명만을 듣고는 “알았어, 지금 출발할게”라고 대답한다. 그녀가 다급하게 날 찾았기 때문일까? 경황이 없어서? 아니, 정반대다. 오히려 아무 급할 것이 없어서, 가다 길을 헤맨다 해도, 그저 조금 돌아가는 것일 뿐이어서, 나는 아무 준비 없이 차에 올랐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길을 헤맸다. 그곳은 서울의 남쪽에 있는 도시였다. 분당은 아니었고, 인천 가는 길과도 달랐다. 분명히 그녀는 지명을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기억이 희미하다. 그녀가 왜 그곳에 갔는지, 또 그게 그녀와 한번 헤어지고 나서인지, 그러니까 두번째 만나기 시작하면서 있었던 일인지 어떤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리 느긋하게 맘을 먹고 헤매기로 작정했다 해도, 막상 길 위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지면 그 모든 마음의 준비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마음이 급해지고, 왜 미리 알아보지 않았는지 자책하고, 전화통화를 하면서 그녀의 설명이 불충분한 것 같아 목소리가 커진다. 그녀는 아까부터 어떤 터널에 대해서 얘기했다. 터널을 통과하면 돼. 나는 그게 몇 차선인지 묻는다. 터널 이름이나 표지판이나, 아니면 다른 구분할 만한 표식 같은 것이 있는지. 그러나 그녀는 그저 늦어도 괜찮다는 말만 반복한다. 아, 그러고 보면 그녀는 어느 가정집에 있었던 것 같다.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 집에. 전화기 너머로 티브이 소리나, 사람들의 목소리. 특히 어린아이 목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나도 나 자신에게 말한다. 괜찮아. 그렇게 멀리 돌아가는 건 아니야. 그러다, 거의 기적처럼, 도로 전방에 터널이 보인다. 진작부터 차들의 속도는 많이 줄어 있어서, 터널이 보이고 나서도 한참을 도로 위에 서 있었다. 나는 마음 깊이 안도한다. 창문을 열었더니, 생각보다 바깥 공기는 따뜻했다. 터널의 입구에서 나는 다시 창을 올렸고, 터널을 통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은 과천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근거는 전혀 없다. 과천이 아닐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해서, 아닐 가능성이 더 높은 것 같다. 만일 과천이었다면, 나는 좀더 분명히 그 사실을 기억했을 테니까. 이를테면 그날 그녀를 만나서 나는 어떻게든 과천에 대해 언급했을 것이다. 과천에 얽힌 몇가지 에피소드. 그것은 내 중학생 시절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하지만 나는 그날 그녀에게, 그 도시, 어느 주말에 어렵게 찾아간 그 도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만나서, 그녀를 태우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뿐이다. 그날의 일로 또 기억나는 건, 내가 어느 연립주택 단지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우면서 사방을 찬찬히 둘러봤던 게 기억난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동네였다.

그곳이 과천이 아니라면 어디였을까? 평촌? 안양? 산본? 안산?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 오래전의 일이고, 서울의 남쪽에는 너무나 많은 도시가 있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벌써 십년이나 지난 일이다. 그때 나는 서른살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스물아홉이었고, 헤어졌을 때 서른이었다. 그녀는 서른이었고, 서른여섯이었다. 내가 지금 잘못 말한 게 아니다. 그녀가 무슨 마법을 부린 것도 아니다. 그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나이를 속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가 서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보다 다섯살이 더 많았다. 사실 우린 고작 해야 약 6개월 정도를 만났을 뿐이다. 그런데 진짜 마법은,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돌이켜봤을 때, 정말로 내가 그녀의 서른부터 서른여섯까지 그녀를 만나왔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그녀와 있었던 시간이 5년처럼 길게 느껴진다는 게 아니다. 5년이 6개월처럼 짧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5년이나 6개월이나, 지나고 나면 대체 그 시간들이 어디로 갔나, 그게 무엇이었나, 그런 생각이 든다. 기억해보면 그녀도 그 비슷한 말을 했다.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어. 요즘의 나도 그렇다. 요즘 나는 자주 그녀를 생각한다. 마치 내 인생의 마지막 여자인 것처럼. 하지만 물론 그녀는 마지막 여자가 아니다. 마지막 여자는 내가 서른넷이었을 때 만나서, 서른다섯에 헤어졌다. 그러니까 그게 5년 전의 일이다. 나는 그 5년이 마치 6개월처럼 느껴진다. 5년 전에는 이런 5년 후의 나를, 정확히 말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나는 그녀가 내 마지막 여자가 될 줄은 몰랐다. 당시 나는 막 직장을 그만두고 나왔는데, 그후로 5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런 번듯한 직장을 다시 구하지 못하리라는 사실도 몰랐다. 나이가 마흔인데, 직장도 없고, 여자도 없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요즘 나는 완전히 좆 됐다.

요즘 나는 잠을 잘 잘 수가 없다. 원래부터 불규칙한 생활 패턴 때문에 새벽 늦게까지 깨어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해가 떠오르기 전에는 잠을 이루고는 했다. 적어도 새벽 네시를 확인한 후로 새벽 다섯시를 보는 경우는 드물었다. 새벽 네시를 확인할 때마다 나는 무척 절망스런 심경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네시가 문제가 아니다. 그때라도 졸음이 오면 다행이었다. 희뿌옇게 밝아지는 창을 보는 기분은 참담하다. 아주 돌아버릴 지경이다. 더 웃긴 건, 내 방 창이 완벽히 동향이라는 점이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내 방 전체는 샛노란 색으로 물들어버린다. 너무 노래서 처음에는 무슨 일이라도 났나 싶어 창 바깥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 빛 속에 있으면, 그 한점 그림자도 없는 압도적인 노란빛에 휩싸여 있으면, 때로 장엄한 기분에 빠지기도 한다.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이 된다. 나는 이 사실을 이 집에 살기 시작하고 나서 1년 동안은 몰랐다. 그 시간에 깨어 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잠을 잘 이루지 못할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최근 들어 심해진 건, 아무래도 한달 전쯤에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나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아침부터 아버지가 전화를 할 이유가 없었다. 휴대폰 액정에 아버지 전화번호가 떴을 때부터 나는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느꼈다. 전화를 받자마자 아버지는 김이사와 통화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러고 나서 최대한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버지, 김이사님은 작년에 돌아가셨잖아요.” 그러자 아버지는 뭐라고 대답했던가?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방 안이 노란빛에 휩싸여 있다는 걸 발견했고, 깨어 있다는 걸 분명히 알았지만, 마치 꿈속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일차적 걱정은 물론 아버지가 치매가 아닐까 하는 거였다. 그러나 곧이어 더 큰 걱정, 정말 우스운 걱정은 만일 아버지가 치매라면 나는 이제 어떡하나,라는 것이었다. 몇년간 줄곧 아버지가 내 생활비를 대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 내 몫의 유산이 얼마쯤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치매라고 해서 금방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더 큰 문제가 아닌가? 대체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얼마 전 밤이었는데, 동네에서 어떤 여자가 내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길 건너편에 있었고, 나는 멈춰 서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내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누군지 몰랐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그녀가 인사를 한 건지, 또 그게 정확히 나를 향한 건지도 분명치 않았다. 나도 엉겁결에 고개를 약간 숙였는데, 어쨌든 그녀는 계속 가던 길을 걸어갔다. 나도 계속 통화를 했다. 전화를 끊었을 때 이미 그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제야 내 머리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였을까? 아주 젊은 여자는 아니었다. 삼십대 초중반쯤? 자주 가던 가게에서 봤나? 빵집이나 분식집, 슈퍼마켓. 아니면 헬스장에서 봤을 수도 있다. 몸이 대책 없이 불어서 동네 헬스장을 끊었다. 그곳 트레이너 중 한명일 수 있다. 나는 괜히 가슴이 뛰었다. 여자 트레이너는 한명뿐이었는데, 얼굴은 별로였지만 몸이 정말 끝내줬다. 항상 그런 몸이 아주 잘 드러나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하체, 골반과 엉덩이 그리고 허벅지와 다리의 굴곡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레깅스를 입었다. 나는 운동 중에 자주 그 모습을 힐끗힐끗 쳐다보고는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보이지 않았고, 나도 허리가 안 좋아져서 더이상 헬스장에 나가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은 살이 더 쪄버렸다. 그것도 내 잠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거울 앞에 서면,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이 처참히 무너져내린 내 몸에 저절로 욕이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훨씬 젊었고, 키도 더 컸다. 그리고 정말이지 몸이 끝내줬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내가 다시 고등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다. 다만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멈추기가 어렵다. 옛일을 떠올리는 것 말이다. 그녀도 그랬다.

그녀와 헤어졌을 때, 그러니까 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녀는 서른여섯살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마흔이다. 그렇게 치면 네살 어리다는 점에서 그 시절 그녀가 조금 더 나은 편일까? 내가 서른여섯이었을 때, 나는 그다지 옛날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다. 물론 그때도 조금 위축되어 있긴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낙천적인 인간이었다. 일단 계속 살아야 한다. 계속 숨을 쉬어야 한다. 그러면 어느날, 파도가 무엇을 가져다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이것은 내가 사람들에게 자주 말하고 다니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대사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무인도에 갇혔다가 십몇년 후에 극적으로 탈출한다. 여전히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바로 이런 태도가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 나는 무인도에 혼자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계속 걸었고,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어느새 그녀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 무리지어 있는 여학생들을 보았다. 밤에 교복을 입고 거리에 나와 있는 여학생들. 저들은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일까?

그즈음에 나는 과천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들었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요즘에는 사방에서 뉴스를 볼 수 있다. 버스를 타도 운전석 뒤편으로 모니터가 달려 있고, 뉴스가 나온다. 물론 뉴스보다 광고가 더 많이 나오는 것 같지만. 어쨌든 요지는 과천의 집값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천에 있는 정부종합청사에서 몇몇 핵심적인 부처가 새로 건설된 세종시로 이사 가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원인과 결과가 명확했다. 그런데 애초에 왜, 그리고 언제 정부종합청사란 게 과천에 들어간 걸까? 그렇다면 앞으로 과천은 어떻게 되는 걸까? 과천은 얼마나 넓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나? 이런저런 궁금증이 연이어 생겨났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분명히 그녀 나이 서른여섯이었을 때지만, 그로부터 4년쯤—어쩌면 5년이었을지도 모르겠다—지났을 때, 그러니까 그녀의 마흔이나, 마흔하나 때쯤 나는 그녀로부터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오랜만이야. 반갑다. 나는 여전히 여기 그대로 있는데……’ 나는 답을 보냈다. ‘여전히 거기에 그대로 있으면 안되잖아.’ 아마 당신들은 그녀가 말한 ‘여기’가 어딘지 모를 것이다. 아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알게 된다면 그녀의 저 말이 얼마나 슬픈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나? 나도 물론 그런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 당시 내게는 다른 여자친구가 있었고, 그녀와의 데이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저렇게 답을 보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새로운 여자친구는 직장에서 만났다. 아버지 지인의 소개로 대형 유통업체에 들어가 3년쯤 되었을 때였다. 처음 일년간은 좀 힘들었다. 내 전공과는 전혀 무관했고, 같은 직급에서 나이도 가장 많았다. 내가 그곳에서 계속 버텼던 건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웬만하면 아주 단순한 일, 누군가로부터 지시를 받고,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면 좋겠다. 그러니까 나는 그 일을 그렇게 오래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3년쯤 되자, 일도 고되고 사실 장래도 밝지 않아 주변의 많은 사람들, 동료뿐 아니라 상급자들도 하나둘 떠나버리고, 어쩌다 과장까지 진급하게 되었다. 내가 관리해야 할 사람들이 많아졌다. 직영 직원뿐 아니라, 업체 직원들, 또 그 아래에 거의 일주일마다 갈아치워지는 행사직원들까지. 그녀는, 그러니까 나의 새 여자친구는, 업체에 고용된 행사직원이었다. 유제품 코너를 담당했고, 예쁘기로 유명했다(혼동을 줄이기 위해 그녀 이름을 ‘지은’이라 하겠다).

여럿이 모인 술자리에서 지은은 내 옆에 앉았다. 그날 나는 말이 좀 많았고, 사람들도 내 말에 많이 웃었다. 다시 대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슨 신입생 환영회나 MT 자리 같았다. 2차에서도 그녀는 내 옆에 있었다. 어떻게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술이 많이 취했고, 허리를 펴고 등 뒤로 바닥에 손을 짚는데 뭔가 따뜻한 것이 닿았다. 보니까 그녀의 손이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손을 뺐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어느새 그녀의 손을 내가 꽉 잡고 있는 것이었다. 테이블 밑으로 한손을 잡고 다른 손만으로 술잔을 들거나, 안주를 집어먹느라 좀 고생했다. 지은은 나보다 여덟살이 어렸다. 그러니까 아직 이십대였고, 삼십대가 되기에도 여유가 있었다. 그녀는 아르바이트였지만 생계형은 아니었다. 어머니, 언니와 함께 사는 그녀의 집은 강남 쪽에 있었다. 유명 대학은 아니지만 어쨌든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왔고 이 일을 하기 전에는 광고회사에서 인턴도 했다. 다만 전공을 살린 본격적인 취업에는 그다지 뜻이 없었다. 아르바이트 광고를 휙휙 넘겨 보다가 집이랑 가까워서 면접을 봤다고 한다. 그녀의 매력도 이런 데 있었다. 구김살이 없다고 할까? 마치 아직 일이학년인 여대생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때껏 그렇게 신경증적인 요소가 거의 없는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타고난 건강체질로 몸도 튼튼했고, 힘도 셌다. 함께 일하는 남자들처럼 무거운 박스를 두개씩 포개 들고 옮길 수도 있었다. 언젠가 출근하는 길에, 그녀 뒤에서 걸었던 적이 있다. 그녀는 흰 티셔츠에 짧은 청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가방을 가로 메고 한손에는 남방을 들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뒷모습이란, 그리고 그 생기 넘치는 걸음걸이란. 나는 전철역에서 매장까지의 거리가 그렇게 짧다는 데 화가 났다. 물론 평소에는 반대로, 길다는 데에 짜증이 났지만. 그녀와 사랑을 나눌 때, 그러니까 그 일을 할 때도, 때때로 나는 그냥 누워만 있어도 됐다. 그녀가 모든 걸 알아서 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뭣 때문인지 눈살을 찌푸릴 때도 있지만 대개 천진난만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몸을 움직이는 그녀를 올려다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처럼 느껴진 건 당연했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 부끄럽게도 나는 요즘도 가끔씩 그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려보고는 한다. 침대에 누워서. 눈을 뜨고, 그 장면을 다시 보기 위해 애쓴다. 그러면 대체 그게 어디에 비쳐지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자위행위를 한다. 때론 그녀, 십년 전에 헤어지고 사오년이 지난 후 여전히 ‘여기’에 있다고 내게 메시지를 보냈던 ‘그녀’를 떠올릴 때도 있다(편의를 위해 그녀는 ‘희수’라고 부르겠다). 물론 그 이전에 만났던 여자들, 나와 사랑을 나눴던, 어떤 여자라도 떠올릴 때가 있다. 그때는 몰랐다. 아니,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내가 군대를 다녀와 곧바로 사귀었던 여자가 있었다. 어느날 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고, 어디로 나올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였다. 나는 전날 밤 발표 때문에 밤을 꼴딱 새우고 학교를 갔다 온 뒤 곧바로 침대로 뛰어들었다. 그녀가 나의 잠을 깨운 셈이었다. 나는 나가지 못하겠다고 했다. 다시 전화가 왔고, 그녀 혀는 좀 꼬부라져 있었다. 내가 필요하다고 했다. 할 얘기가 있다고. 만일 그녀가 혼자였다면 나갔을까? 사실 따져보면 친구와 함께였다 해도 내가 갔다면 그 친구를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면 그 밤을 그녀와 함께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전혀 머리에 스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너무 피곤했다. 그다음에는 그 친구가 전화를 했다. 그녀가 아주 힘든 일이 있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나는 그녀와 헤어졌다. 나는 좀 짜증이 났고 그녀의 그런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받아들였다. 알겠다. 하지만 나는 너무 피곤했다, 너도 알지 않나? 그러고 나서 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일주일이나 이주일 뒤 그녀가 다시 내게 전화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화를 냈다. 이다음에 있었던 일까지 시시콜콜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후에 때때로 내가 그날 밤 그녀를 만나러 나가야 했다고 후회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그녀와 마지막 밤을 보낼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녀와 과천에 간 적이 있다. 그녀와 과천에 있는 동물원에 갔다. 사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때였는데 그녀가 동물원에 가고 싶다고 했다. 예전부터 남자친구를 사귀면 동물원에 가는 게 소원이었다고. 우리는 지하철역에서 만났다. 그녀는 도시락을 싸왔다. 동물들을 구경하고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도시락을 까먹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을 보았다. 별의별 것이 다 기억난다. 후에 우리는 좀 멀리 떨어져 지낸 기간이 있었는데, 그동안 그녀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집안에서 말이다. 그녀가 그때껏 누려왔던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편지에서 그래도 내가 있어서 위안이 된다고 썼다. 자기가 소원했던 세가지 일 중에 내가 한가지를 해줘서 고맙다고 썼다. 그게 뭔가? 바로 동물원에 가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날 그녀를 만나러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그곳은 택시를 타면 십분도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과천. 다시 과천에 대한 얘기로 돌아왔다. 물론 과천에는 동물원이 있다. 놀이공원도 있다. 케이블카니 코끼리열차니 하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다른 것이다. 과천에 있는 그 놀이공원의 이름은 서울랜드다. 예전 중고등학생 시절에 TV광고를 본 기억도 있다. 광고 마지막에 CM송으로 ‘과천 서울랜드’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멜로디까지 기억난다. 그런데 과천에 있는데 왜 ‘서울’랜드일까? 때로 이런 것들이 궁금할 때가 있다.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동네의 이름은 반포였다. 반포는 무슨 뜻일까? 알아보니 거기엔 옛날에 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한자어로 ‘포()’가 그런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루터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내가 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신들 중 아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한강변에 위치한 그곳은 아파트 건물들이 빼곡히 늘어선 대규모 아파트 단지였다. 흔히 말하는 대단지 아파트들이 커다란 지구를 이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따지면, 예전에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한강 이남에 최초로 조성된 대규모 아파트 단지라고 한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강남’의 시작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압구정동이나 잠실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지금처럼 부자들만 사는 동네는 아니었다. 좁은 평수의 서민 주공아파트 단지도 있었고, 주택금융을 이용해 계약금만 걸고 몇십년에 걸쳐 부금을 부어 들어온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 가족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어쩌면 그중에서도 하위에 속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동네가 발전해감에 따라,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는 고도성장기와 함께, 우리 집안의 사정도 점차 나아졌다. 아니, 그보다 더 빠른 편이었다고 할까? 젊었을 적 아버지는 아주 야심 찬 젊은이였다. 버스도 들어가지 않는 시골 촌구석에서 혈혈단신으로 상경해 조그만 공장에서 심부름꾼 비슷한 일로 시작해 기술을 배우고, 관리직과 공장장을 거쳐, 회사가 성장하면서 본사로 차출되어 임원직에까지 올랐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쯤, 아버지는 회사를 나와 직접 공장을 차렸다. 그리고 백만불이니 오백만불이니 하는 수출공로상을 받으러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과 악수도 했다. 그 사진은 아직도 아버지 침대 머리맡 벽에 걸려 있다. 물론 지금은 은퇴를 하셨다. 원하지 않은 은퇴였다. 그 과정에서 안 좋은 꼴을 많이 봤다. 돈도 많이 잃었고, 사람도 많이 잃었다. 언젠가 아버지와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젊었을 적 자신이 했던 실수와 잘못했던 선택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단순히 좋은 기회를 놓친 적도 있었고, 반대로 해서는 안될 짓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다 그랬다. 이건 내 생각이다. 아버지는 그냥 웃으셨다. 그 순간에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아버지가 한 실수 중 가장 큰 것이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것이, 바로 당신의 앞에 앉아 있는 것 아닐까. 모르겠다. 내가 뭘 잘못했나? 이건 그냥 내 인생인데.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겠다. 항상 그 이상이란 게 있다. 그러니까 그건 아버지의 인생이기도 했다.

내가 반포를 완전히 떠난 것은 군에서 제대한 때였으니까 대략 17,8년 전의 일이다. 흔한 말처럼 긴 여행에서 돌아오니 집이 없어진 셈이다. 그후로 단 한번도 그곳을 찾지 않은 건 아니지만—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연고가 없으니 먼발치에서, 이를테면 반포대교를 건너면서 바라보거나, 그 동네 한가운데를 가르는 도로를 지나면서 힐끗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그것도 어쩌다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딱 한번 그 안쪽까지 들어간 적이 있었다. 주소지와 관련하여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나는 그곳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일을 마치고서 일부러 차를 몰고 내가 살던 아파트 건물 앞까지 갔다가 거기에 맞붙어 있는 놀이터 앞에 주차하고 창을 내린 후에 담배를 한대 피웠다. 내가 막연히 기억한 그대로의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결국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인정했다. 담배 한대 피울 시간, 그게 전부였다. 그로부터 몇년 후에 나는 그곳이 완전히 밀리고, 그러니까 바닥까지 다 파헤쳐져서 재개발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나는 그 동네에 있었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낯선 곳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전혀 달랐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곳이 바로 반포라는 사실을 알았다. 재개발돼서 완전히 새로워진 모습이 아니라, 그냥 다른 곳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그 동네였다. 꿈이니까, 말이 되는 일이다. 여기가 어디지? 반포야. 반포. 한때는 나루터가 있던 곳이지. 이상하게 가슴이 아팠다. 길가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꿈속에서 그건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뭔가를 찾고 있었지만, 그게 물건인지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오래전 꿈은 아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우연히 버스를 타고 그 동네를 지나치게 되었다. 그리고 새삼스레, 내가 살던 아파트를 밀어버리고 새롭게 올라선, 3,40층쯤 되는 고급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았다. 해가 질 무렵이어서 하늘은 아직 환했지만 높은 창에는 드문드문 불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그 불빛들을 오래 바라봤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내내, 내가 다시는 예전에 살았던 그 아파트 단지, 그 풍경들을 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절절하게 가슴이 사무쳤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심정이 떨쳐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꿈속의 일이 떠올랐고, 어떤 이름에 대한 생각도 떠올랐다. 정확히 말해, 과천과 그곳에 있는 놀이공원 서울랜드에 관한 생각이었다. 분명히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왜 과천에 있는데 그 공원의 이름은 서울랜드일까? 그때 내가 떠올린 대답은 그것이 과천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즉 그곳이 서울이 아니기 때문에 서울랜드라고 이름을 붙인 거라고. 물론 이것은 전혀 말도 안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생각이 너무 맘에 들었고,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그런 이유로 지명을 붙인다면, 아무도 자신이 가려는 곳에 갈 수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나는 희수에게 계속 거기에 있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전에 그녀가 먼저 자신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계산해보면 그녀 나이 마흔살 때의 일이다. 지금의 나와 똑같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으면 안되잖아. 정확히 나는 이렇게 답을 보냈다. 하지만 대체 왜 그녀는 헤어진 지 사오년이 지난 후에 그런 메시지를 내게 보냈는지 알 수가 없다. 나보고 어떡하란 말인가?

그녀와 헤어졌을 때 나는 무척 가슴이 아팠다. 솔직히 말하자. 나는 거의 정신이 없었다. 괜찮다가도 갑자기 땅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대체로 나는 이별에 강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이별의 전문가라고나 할까? 사귀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이별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결국에는 헤어지게 되어 있다. 어쩌면 그건 그녀가 나를 두번이나 엿 먹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 남자가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느날 밤에 그녀가 내게 문자를 보냈다. 사귀는 동안에 말이다. 늦은 시간이었는지 나는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었고, 문자 소리를 들었다. 비몽사몽 중에 문자를 확인했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야 할 것 같아. 아무런 조짐도 없었다. 조짐은커녕 가장 좋았던 즈음이었다. 막 불타오르는 때였다. 이미 두어번 같이 밤을 보냈지만, 전혀 볼 장 다 본 느낌은 없었다. 그러니 나의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문자는 계속 이어졌다. 계속 문자가 왔음을 알리는 딩동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저 가만히 문자를 보기만 했다.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은 채. 그녀는 먼저 자신이 나이를 속였음을 고백했다. 그다음에 자신에게 남자가 있었음을 고백했다. 하지만 나를 만나기 얼마 전에, 거의 바로 직전에 헤어졌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그 남자가 자기를 찾아왔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그 남자에게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못 보낼 것 같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마치 그 남자가 아주 불쌍해서 그런다는 투였다.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러니까 그 이후에 이어진 문자 내용을 종합해보면 불쌍한 건 그녀였다. 두말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나이 서른여섯이나 먹은 여자가, 꽤 괜찮은 4년제 대학을 나온 여자가 이렇게 멍청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남자는 유부남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혼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언제? 그녀는 그 남자를 약 5년 동안 만나왔다. 처음부터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건 아니다. 1년 정도 지나서 알게 됐다. 이게 다 그녀가 내게 해준 말이다. 그때부터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그게 벌써 4년이나 되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4년 내내, 그 남자는 이혼하겠다고, 이혼해서 너와 결혼하겠다는 약속을 거듭했다. 그러는 새에, 그녀는 서른살에서 서른다섯이 되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딸은—딸도 있었다!—유치원생에서 초등학생이 되었다.

더이상 문자가 오지 않자 나는 그녀에게 전화했다.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자고 있었다고 말했다. 응. 그랬구나. 그녀가 대답했다. 그다음은 내가 말할 차례였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다 웃음이 나왔다. 정말 그랬다. 그러자 그녀도 따라 웃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다음날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다음날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저녁때까지 말이다. 나는 누군가와 술을 마셨다. 멀쩡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침내 그녀와 연락이 닿아 택시를 타고 그녀 있는 데로 가면서, 나는 내가 엉망으로 취했음을 느꼈다. 아마 꽤 늦은 시각이었던 것 같다. 나는 어느 거리에 있었는데,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간판 불빛만 보도를 밝히고 있었다. 나는 어느 가게 입구 턱에 그대로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그녀가 저기서 걸어오는 걸 꼼짝 않고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으니까 멋진데.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가까운 모텔을 찾아 들어갔다. 마치 이 도시에는 우리가 갈 데가 아무 데도 없는 것처럼,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스런 발걸음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는 섹스를 했다. 그녀와의 섹스는 이전에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인 양 항상 만족스러웠지만, 그날은 특히 더 좋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좋아? 좋아, 하고 나는 대답했다.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아. 마치 무슨 일인가로 상심한 나를 달래주는 것 같은 섹스였다. 만일 그랬다면 나는 충분히 보상받은 셈이었다. 다음날 아침 그녀가 일찌감치 일어나 급하게 옷을 차려입는 걸 보고 내가 왜 벌써 나가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가 그 남자가 자기 집 앞에 있다고 말하고는 모텔을 나가버리고 나서도, 나는 충분히 보상받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런 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지만,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렸을 적 읽었던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어떤 이야기처럼. 열지 말라는 마지막 방 문만 열지 않으면, 나머지 방들의 금은보화와 여자와 술과 고기를 맘껏 즐길 수 있었던 어떤 남자의 이야기처럼. 그 얘기 속의 남자는 그 방문을 열고 만다. 나는 열지 않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에는 희수가 그 남자를 떠나서 이제 나한테 오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던가? 하지만 꼭 마지막 방 문이 열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건 분명히 기억난다. 아니면, 이제 이렇게 모든 일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그렇게 느꼈다고 잘못 기억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녀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서른인데. 나는 보상을 바랐지, 벌을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뭐가 보상이고, 뭐가 벌일까? 희수가 그 남자에게 바란 건 보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벌만 받고 있다. 그래도 그녀는 끝내 그 남자를 떠나지 못했다. 나한테 오겠다고? 물론 내가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못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정말 변명이 아닌데, 그랬더라도 그녀는 그 남자를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받고 있는 벌이, 그녀에게는 보상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벌이 끝나면, 그 벌로 인한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후에 따르는 보상은 그보다 몇십배 몇백배 달콤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이 어리석은가? 모르겠다. 나도 다른 판단이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당신들도 알다시피 어떤 판단을 내리기에 인생은 너무나 복잡하고, 결정의 시간은 너무 부족하다. 아니, 대체 인생이란 게, 우리가 뭔가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우리 앞에 놓여 있기라도 한 걸까? 그게 보이기라도 하나? 우리는 그저 어떤 판단, 마치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판단 속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은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녀가 나를 버린 판단 말이다. 그녀는 헤어지자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날부터 그냥 나의 모든 연락을 씹었다. 이별의 전문가인 나로서도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집도 알고 있었고, 직장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쿨해서가 아니다. 나는 자신이 없었고, 두렵기도 했다. 그때 나는 실직 상태에 있었다. 그녀는 약 반년 전에 마트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대학 때 은사의 소개로 드라마 제작사에 입사했다. 처음에는 헤매기도 하고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의기소침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용기를 북돋아줬다. 너라면 잘할 수 있어. 그런 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잘 적응하는 것 같았다. 회식에도 참석하고 MT 같은 데도 따라다녔다. 그곳 PD와 작가들은 좋은 대학 출신이었다. 젊기도 했다. 내가 두려웠던 건 끝을 보는 거였다. 그녀가 직접 그 이유를 설명하는 거였다. 내게는 그냥 사랑이 끝났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적당했다. 그냥 내가 싫어졌을 뿐이다. 거기에 다른 이유는 없어야 했다. 사랑이 시작되는 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 끝나는 데도 이유가 없다. 그건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곳에서 결정되는 일이어야 했다.

지은과 헤어지기 전에 있었던 일이 기억난다. 그날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앉아 있었다. 나는 그 거리에 대해 생각했고, 또 그건 아무 의미 없는 거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는 뜻이다. 모든 얘기를 마쳤을 때, 그녀도 나도 시간이 평소보다 1.3배 정도 빨리 갔다고 느꼈다. 그 시간의 3분의 1 정도는 쓸데없는 얘기를 했고 3분의 1 정도는 오해에 기반을 둔 말들을 했고 3분의 1 정도는 뭔가를 두려워하면서 정작 그게 무엇인지 모를 말들을 했다. 어렵고 어리석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결과적으로 괜찮았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마 우리가 헤어진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한 일 때문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 때문일 거라고.

이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내가 그 당시 그녀에게 어떤 실수를 저질렀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다른 여자와 얽힌 일이었는데, 정말 나는 그녀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물론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실수이거나 오해이거나. 아무튼 그래서 그녀는 나한테 지독히도 실망한 것이다. 나는 그게 오해가 아니더라도 그녀가 그 일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주 흔하다. 사람들은 다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십몇년 동안 똑같은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내가 한 말은 그 반대의 생각, 그러니까 사람들의 다 똑같은 생각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 일은 이전에 일어난 다른 일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치면 무슨 일이든 다 똑같다. 이를테면 이미 일어난 어떤 일이 그다음에 일어난 다른 일의 원인이 되었다면, 앞서 이미 일어난 일은 그전에 이미 일어난 일의 결과일 테니까. 모든 게 그렇게 연결되어 있는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고 지은에게 말했다. 그럼 일들은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는가? 아니다. 여기에 내 말의 요지가 있다. 즉 어떤 일들은, 그전에 일어난 다른 일의 결과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은 일의 결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일은, 어떤 하지 않은 일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무언가 일어나기 위해선,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아야 된다.

 

지은은 어렸을 적 과천에서 살았다고 했다. 어느날 우리는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가 살았던 동네로 차를 몰고 갔다. 그녀도 나도 아직 마트에서 일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비번일을 맞춰 놀러다니던 때였다. 나는 그날 그녀가 입었던 옷까지 선명하게 기억난다. 바싹 말린 나뭇잎 같은 재질의 원피스로 가을 산처럼 울긋불긋한 색깔의 무늬로 덮여 있었다. 나는 그 촉감이 너무 좋았다. 물론 그 안에 있는 맨살의 촉감보다는 덜했지만. 이런 기억이 떠오르면 내 가슴은 터질 것처럼 아파온다.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어느 건물, 어느 아파트 동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어느 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녀가 가리킨 창은 아파트 후면에 난 것이었다. 그 앞으로는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그것이 끝나는 지점에 좁은 보도가 맞닿아 있었다. 그다음에는 이면도로와 또 잔디밭과 등나무 벤치가 있는 공원 비슷한 공간이 있었다. 우리는 그쯤에 서 있었다. 나는 금방 그곳이, 그 아파트 단지가 내가 살았던 동네의 그것과 매우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5층짜리 건물, 잔디밭, 나무, 울타리나 벤치가 놓인 공간. 건물 자체도 흡사했다. 회색으로 칠해진 것도 똑같았고, 입구 모양도 그랬다. 지금은 없어진 곳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저기가 내가 살았던 집이에요. 저게 언니 방 창이었죠.” 그녀는 그 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마치 아직도 언니가 그 방에 있어서 금방이라도 그 창에 얼굴을 내비칠 것처럼. 그러더니 자기가 중학생 때 있었던 일을 얘기해줬다. 어느날 인근 학교의 남학생이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까지 그녀를 따라왔다. 집이 알려지는 게 싫어서 어떡할지 곤란해하고 있는데 언니가 바로 저 창에서 그 모습을 보고 바로 뛰쳐나와 그 남학생을 혼내줬다는 것이다. 그녀의 얘기를 듣다가 나는 불쑥 끼어들었다. “그게 나였을지도 모르겠군.” “뭐예요?” “나도 그랬거든. 나도 중학생 때 어떤 여학생 집 앞까지 따라간 적 있어.” “정말?” 정말이었다. 그녀는 국민학교 동창이었는데, 어찌어찌해서 중학교에서 다시 보게 되었고, 한동안 미친 듯이 열을 올렸다.

“그게 첫사랑이에요?” 지은이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라고 할 만한 게 못 됐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줄기차게 거부했으니까. 그러다 다른 여자가 떠올랐다. 그녀는 내가 고등학교 때 만난 여자였다. 당시 날라리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중학교 때 알게 된 친구로 고등학교는 달랐다. 그 친구가 소개해준 여자였다. 소개해주는 날 우리가—그러니까 그 친구와 그의 여자친구와 그녀와 나, 이렇게 넷이—어디에 간 줄 아는가? 맞다. 바로 과천 서울랜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에 들어가서 뭘 하고 놀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심지어 우리가 들어갔는지 어쨌는지도 모르겠다. 놀이공원이 문을 닫은 날이었나? 내가 기억하는 건, 그곳에 도착해서—아마도 전철을 타고 갔을 텐데—보았던 넓은 주차장이다. 차가 거의 없었다. 바닥에 그려진 하얀 주차구획선만 마치 무슨 고대 유적지처럼, 그러니까 ‘미스터리 써클’이거나 아니면 발굴현장에서 뭔가를 표시하기 위해 그어놓은 선처럼, 똑같은 모양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던 게 기억난다. 그런 걸 보면 그날은 분명히 평일이었고, 우리 모두는 학교를 땡땡이 치고 몰래 갔는지도 모른다. 고등학생 때 나는 친구와 달리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가끔 그런 일탈을 꿈꿨던 것 같다. 그냥 그러고 싶은 순간이 있지 않나? 하지만 그래서 찾아간 곳이 그렇게 텅 비어 있다니. 그래도 그 여자와는 그후에도 몇번인가 만났고, 마침내 같이 여관에 들어갔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어머니 외 여자의 가슴을 봤다. 보는 것만으로도 쌀 것 같았다. 하지만 하지는 못했다. 그러려고 밤새 엎치락뒤치락했지만, 못했다.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다. 물론 그녀가 적극적으로 원했다면 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녀가 뭘 원하는지 몰랐다. 그녀는 분명히 싫다고 했고, 안된다고 했다. 그게 전부다. 그날 이후에도 우리는 연락을 이어갔지만 곧 흐지부지됐고, 나는 고3이 되었다. 날라리 친구는 학교를 자퇴했다. 그녀의 소식은 그후에 듣지 못했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제 그녀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건, 맞다, 그녀의 가슴뿐이다.

우리는 좀더 둘러보고 그 아파트 단지를 나왔다. 갑자기 지은이 몇발짝 앞으로 나아가더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따라오지 마요.” “응?” “쫓아오지 말라고.” 나는 웃었다. “아니. 나는 평생 쫓아다닐 건데.”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은과 마지막으로 통화한 날, 그녀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날, 나는 혼자 영화를 보러 가고 있었다.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지만, 그녀가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녀는 낮에 때때로 내게 전화해서 뭐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안해. 그냥 집에 있지,라고 대답했다. 그런 전화를 끊고 나면, 마치 나 자신의 일부가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차를 몰고 가고 있었는데, 그녀는 영화 잘 보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용산에 있는 극장이었다. 극장 근처까지 왔는데 평일인데도 차가 밀렸다. 조금 이따 나는 왜 차가 밀리는지 알았다. 뭔가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차의 속도를 줄였다. 나는 그들이 보는 걸 따라 보았지만, 대체 뭘 보고 있는지 몰랐다. 그냥 사람들이 몰려 있을 뿐이었다. 과천을 떠나면서, 그날 지은은 자기는 과천이 좋다고 말했다. 동네도 깨끗하고 조용하고 공기도 맑다. 나중에 꼭 다시 과천에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살지 뭐. 그러자 그녀가 웃었다.

 

기다리는 버스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나는 배차시간을 알아보기 위해 기둥처럼 서 있는 버스 안내판을 향해 다가가 들여다보았다. 여러 노선의 버스가 위에서부터 차례로 적혀 있었고, 그 노선마다 타원 모양의 검은 선을 따라 수십개의 지명이 달려 있었다. 나는 무심코 그중에 과천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아니, 어쩌면 다른 이름, 이를테면 희수나 지은, 아니면 남자친구와 동물원에 가는 게 소원이었던 여자, 내게 처음으로 가슴을 보여줬던 여자, 내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어떤 여자의 이름이라도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때 버스가 왔지만 내가 기다리는 버스는 아니었다. 나는 아까의 여학생들이 그 버스에 올라타는 걸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들이, 바로 그녀들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미친 생각이지만, 그녀들도 분명히 한때는 저런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버스에 올라탄 적이 있지 않겠는가? 나는 마치 버스를 타고 가다 문득 잠이 들어서 회차 지점을 돌아 다시 처음 그 자리로, 아니 그보다 더 멀리 이미 내가 지나온 시간들, 심지어는 내가 지나오지 않았던 시간까지 되돌아온 게 아닐까?

나는 여전히 나의 미래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물론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 나는 괜찮을 것이다. 나는 그저 아버지가 건강히 오래오래 사시길 바랄 뿐이다.

나는 지은이 나와 헤어지고 얼마 후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가 소식을 알려준 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았느냐고? 그런 건 묻지 말아달라. 쪽팔리게. 1년쯤 지났을 때의 일이다. 사진 속 그녀는 여전히 예뻤다. 집도 깨끗했고, 가구도 훌륭했다. 세차 장면을 찍은 것도 있었는데 배경으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도 훌륭했다. 어느 동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그곳이 최근에 지은 아파트라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굉장히 훌륭하게 결혼생활을 해나갈 거라는 사실을 믿었다. 어쨌든 몸도 튼튼하고 타고난 싹싹함이 있는 여자였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희수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고 메시지를 보낸 건, 그녀가 마흔, 또는 마흔한살 때의 일이다. 그러고 5년이 지났다. 아이고, 이제 그녀는 마흔다섯, 여섯이다. 그녀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다. 나는 그녀가 그 남자를 떠나길 바랐지만, 또 어쩌면 기적적으로 그 남자와 결혼했을 수도 있다. 그게 가장 최선인 것 같다. 그 남자는 능력도 있고, 부자였으니까. 그 나이에 그런 남자를 어떻게 새로 만나겠는가? 희수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 우리는 지하에 있는 고깃집에서 술을 마셨다. 마지막 날이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그날 우리는 서로 언성을 좀 높였는데, 특히 내가 그랬던 것 같다. 심지어 욕까지 했다. 미쳤군. 미쳤어. 그녀는 무슨 말을 했던가? 빚이 좀 있다고 했다. 누구한테? 그 사람이 돈도 주냐? 네가 거지야? 씨발.

다른 여자들의 소식은 전혀 모른다. 가끔 궁금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게 많다. 예를 들어, 언젠가 내가 지은에게 했던 말. ‘우리가 하지 않은 일’ 같은 것 말이다.

그날 나는 지은에게, 만일 우리가 헤어진다면 서로에게 한 일 때문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 때문일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희수하고도 헤어졌다. 내가 그러한 일들을 후회하는가? 그러지 않았다면, 아아,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까? 정말로 나는 상상한다. 요즘 들어 매일 밤 그랬던 것 같다. 지금 내 옆에 그녀(누구?)가 누워 있다면…… 나는 거의 그럴 수 있었을 거라고도 생각한다. 내가 단지 다르게 했다면,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그럴 수 없었을 거라는 것도 안다. 단지 그 일이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아니다. 그 모든 게 결과인 것이다. 그 결과로서의 나이기 때문이다. 결과로서의 희수고, 결과로서의 지은이다. 하지만 그날 내가 말한 대로 실제로 어떤 일들이, 어떤 하지 않은 일 때문에 일어난다면. 지금의 내가, 내가 한 일들의 결과가 아니라, 하지 않은 일의 결과라면. 우리는 뭘 후회해야 할까?

우리는 하지 않은 일을 후회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우리는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이 뭔지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것을 생각할 때, 그 무한한 일들을 떠올려볼 때, 나는 이상한 안도감을 느낀다. 마치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올려다볼 때처럼. 아무도 저 별들 사이에서 길을 잃을 수는 없다. 아예 길이란 게 없으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과천에 대해 얘기하겠다. 이건 여자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얘기다. 내가 중학생 때 있었던 일이다. 1학년 때인지 2학년 때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학기초였다는 점이다. 한반이 된 우리는 서로를 잘 몰랐고, 그래서 알기 위해 노력했다. 그 시절에는 친구를 만든다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노력할 필요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얻어졌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날, 아마 앞자리에 앉은 녀석이었던 것 같은데, 이번 주 토요일에 자기 집에 놀러가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나뿐 아니라 주위의 다른 친구들도 함께 말이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는가? 근데 그렇게 놀러간 집이 으리으리했다. 알고 봤더니 그 친구 집이 엄청난 부자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뭐 하시는데? 물론 그 친구는 잘 몰랐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보면 건설 관계 일이었던 것 같다. 사우디아라비아니 어디니, 어렸을 때부터 외국을 돌아다녔다. 근데 그곳은 정확히 말하면 집이 아니라 별장이었다. 그러니까 주말마다 놀러가는 그런 데 말이다. 외국영화에서나 보았던 그런 집이었다. 이층집이었는데, 지하층도 있었다. 지하에는 방음시설이 갖춰진 영화감상실 같은 방도 있었다. 영사막이 있고 빔 프로젝트 같은 게 천장에 달려 있었다. 무슨 버튼을 누르자 천장으로부터 영사막이 자동으로 내려왔다. 재생기에는 비디오테이프가 아니라 LP판처럼 생긴 레이저 디스크라는 게 들어갔다. 마당은 2단으로 되어 있었는데, 한 귀퉁이에 농구장이 있었고 정식 농구 바스켓이 놓여 있었다. 물론 그때껏 그런 집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따져보면 그후에도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려는 건 그 집에 대해서가 아니다. 그날 우리를 태우러 온 자동차에 관한 것이다. 아니, 정확히 그 차에 관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게 무슨 차종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굉장히 커다란—어렸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겠지만—운전사까지 딸린 검은색 세단이었다. 장갑도 끼고 있었나? 그건 모르겠다. 그런 차가 교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상상력을 더해보자면 분명히 그 운전사는 먼지떨이 같은 걸로 차를 닦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문을 열어줬다. 친구는 앞에 타고 나머지 우리는 뒷자리에 탔다. 이름 모를 과일향 같은 게 났다. 묵직한 문을 닫자, 감쪽같이 바깥의 소음이 차단되었다. 토요일이었으니까 전교생이 우르르 교문을 빠져나오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멈춰섰다. 그들도 그런 차를 본 적이 없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쯤이었던 걸 상기해달라. 나는 차 안에서 그런 바깥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주 고급스러운 침묵만이 차 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뚫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의 기분이란. 뭐가 뭔지 몰랐지만, 아니, 이건 내 차도 아니고, 우리 집 차도 아니었지만, 나 자신이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움직이기 시작했는데도 전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소음도 없고, 진동도 없고, 마치 다른 세계의 법칙을 적용받는 것 같았다. 그렇게 차는 어딘가로 우리를 태우고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앞자리의 친구에게 물었다. 근데 씨발, 우리 어디로 가는 거냐? 그러자 그 친구가 대답했다. 과천.

나는 지금 그 차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