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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통일대박론과 분단체제 변혁의 길
김창수 金昌洙
코리아연구원 연구실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실장, 청와대 NSC 정책조정실 국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전문위원 역임. 저서로 『천안함 외교의 침몰』(공저) 등이 있음. changsoo@outlook.com
통일대박론과 진보의 의제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은 2014년 새해가 밝자마자 ‘통일대박’론을 제시했다. 그뒤로 통일대박론은 각종 국내 이슈를 잠식하면서 국정운영을 상징하는 브랜드로 급속하게 떠올랐다.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박대통령은 그 기세를 살려 각종 정상회담과 국제회의에서 한반도 통일은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대박이 될 것이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진보세력은 그동안 평화 정착을 통해 통일로 가는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주창하고 준비해왔다. 이에 비해 박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은 준비와 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만 가지고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한다고 비판받았다. 또 201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당시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와 ‘복지’ 의제를 내걸었다가 선거 후 버렸던 데 대한 데자뷔 때문인지 6·4지방선거용 아니냐는 의심도 제기되었다. 이런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박대통령은 대통령이 위원장을 맡고 정부부처와 청와대, 민간 전문가가 참여하는 ‘통일준비위원회’ 구성을 발표했다. 거침없는 속도전이었다. 통일준비위원회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쿠데타나 계엄상황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정부 고위직으로 구성되는 조직이다.1) 박대통령의 통일드라이브는 3월말 독일 드레스덴에서 한 연설에 포함된 대북 제안으로 이어졌다.
통일대박론은 여러 한계를 지적받았지만 통일에 대한 여론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긍정적인 효과도 거두었다. 통일에 드는 비용뿐 아니라 통일이 주는 편익이라는 더 큰 매력이 있음을 알리기도 했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위축되었던 통일논의가 활성화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북한도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연초부터 남북관계 개선의 뜻을 내비치면서 남북고위급 접촉과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되기도 했다.
이러한 통일드라이브가 종북몰이에 나서거나 남북대결을 부추기는 것보다 바람직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통일대박론은 이런 기대를 저버리고 삼일천하나 용두사미로 끝날지 모를 운명에 봉착했다. 통일대박론→통일준비위원회→드레스덴 제안으로 거침없이 내달리던 통일드라이브는 결국 한미 합동군사훈련, 미국의 아시아 회귀정책(Pivot to Asia), 드레스덴 구상에 대한 북한의 반발, 세월호 참사라는 구조적·상황적 제약에 갇혀버렸다.2)
박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은 상대 당파의 정책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오프싸이드 플레이’(off-side play)를 흉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3) 하지만 분단체제는 보수세력의 오프싸이드 플레이에 구조적인 제약을 가한다.4) 드레스덴 연설 직전에 열린 헤이그 핵안보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갈등하는 한일 정상을 초청하여 3국 정상회담(3.26)을 개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중국 견제에 드는 미국의 비용을 줄이는 가장 효율적인 방안으로 한·미·일 협력관계 강화를 선택했다. 한반도의 긴장상태는 이에 대한 필요조건처럼 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헤이그 한·미·일 정상회담 이후 대북 강경정책을 쏟아내는 이유이다. 미국의 이런 정책은 동북아 상황을 숨막히게 만들고 있다. 필자는 드레스덴 선언이 이런 “숨막히는 위기 상황에서 평화와 안정을 위한 숨구멍이 돼야” 하고 이를 위해 “지난 2월에 있었던 남북고위급 접촉을 재개해 드레스덴 제안을 북한에 설명하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디딤돌을 만들기 바란다”라고 밝힌 바 있다.5)
하지만 드레스덴 연설을 전후해서 남북 사이에는 아무런 접촉이 없었다. 소통 부족은 남북간뿐 아니라 한미 사이에도 마찬가지였다. 통일대박론과 드레스덴 연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서울을 방문(4.25~26)한 자리에서 북핵 폐기에 대한 유인책 없이 강경책만 쏟아냈다. 북한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성명에서 한미 정상회담 결과를 맹비난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체제대결 망상”만 하고 있으므로 “북남관계에서 그 무엇도 기대할 것이 없다”라고 주장했다.6) 북한은 국방위원회와 외무성 성명을 잇따라 내고 미국에 대해서도 강력히 반발하면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라는 카드를 사용할 뜻을 내비쳤다. 이러한 긴장의 악순환은 앞으로 통일대박론과 드레스덴 연설을 좌초시키기에 충분하다. 통일대박론이 오바마정부의 정책과 조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령 조율을 시도하더라도 미국의 아시아 회귀정책 때문에 쉽게 풀릴 수도 없다.7) 이것이 바로 통일대박론이 진보진영의 의제 속으로 과감하게 파고들 수 없는 구조적 제약이다.
드레스덴 연설의 네가지 한계
박근혜 대통령은 드레스덴 연설에서 아버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독일 방문과 자신의 방문을 비교해서 통일대박론의 동기를 우회적으로 피력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50년 전 독일 방문을 통해 독일의 경제기적을 학습했다면 자신은 독일통일을 학습하겠다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저는 라인강의 기적이 한강의 기적으로 이어졌듯이, 독일통일도 한반도의 통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은 메르켈(A. Merkel) 총리에게 “올해가 베를린장벽 붕괴 25주년이 되는 해인데, 이번 방문에서 통일독일의 모습을 보면서 통일한국의 비전을 세워보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이런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통일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공존의 지혜가 담긴 메르켈 총리의 발언에 대고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식 흡수통일을 모델로 하겠다고 화답한 모양새가 되었다. 통일대박론이나 드레스덴 연설의 배경에 독일식 흡수통일 구상이 자리잡고 있다는 의혹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독일식 흡수통일을 추구하는 듯한 박대통령의 발언은 드레스덴 연설을 실현할 다른 당사자인 북한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그 실현 가능성을 낮추는 데 일조했다. 북한의 조평통은 “박근혜가 우리 나라를 도이췰란드로 착각하고 체제통일을 부르짖는 것 같은데 그것은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망상이다”라며 드레스덴 구상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했다.8)
통일대박론을 구체화한 박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은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평화적 통일과정을 제시하지 못했다. 통일대박론은 이후 통일준비위원회, 드레스덴 연설 등으로 진화하면서도 여전히 평화적 과정에 의한 통일에 대해서는 명확한 언급이 없다. 한국정부의 공식 통일방안은 ‘화해협력-남북연합-통일’이라는 3단계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국민 또한 대체적으로 급속한 통일보다는 평화적 방법에 의한 점진적 통일을 희망하고 있다.9) 대통령이 통일대박을 말하면서9) 평화적 과정에 의한 통일을 밝히지 않는 것은 모순적인 태도다. 평화적 과정으로 진행되는 교류와 협력이 대박이지 이를 거치지 않은 일방적인 흡수통일은 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10)
둘째, 평화체제에 대한 비전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추상도가 높고 모호해서 해석의 여지가 많았다. 드레스덴 연설에서 인도주의, 경제협력, 사회문화교류 활성화라는 3대 제안을 가지고 남북관계를 풀어나가겠다는 의도를 드러냈지만 여전히 북핵문제와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해법과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북핵문제에 대한 접근에서는 오히려 이명박정부의 ‘비핵·개방·3000’을 연상케 할 정도다. 문제 해결의 능동적인 의지는 보이지 않고 북한에 핵 포기를 촉구하는 데 머무르고 있다. 또 동북아 다자안보체제를 말하고 있지만 한반도 평화체제는 여전히 금기어다.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 없이 북핵 폐기와 동북아 다자안보체제를 말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다.
셋째, 북한의 정책 변화에 대해 국내정치적 성과 중심으로 평가한다. 정부의 통일대박론에 당초 북한은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북한의 남북대화 개선 발언을 놓고 정부가 진정성에 의문을 던졌을 때도 북한은 과거처럼 이를 맞받아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의도를 적극 해명했다. 이산가족 상봉에 대해서도 실무적으로 차질이 발생했으나 김정은(金正恩) 제1위원장이 직접 나서서 특명을 내렸다. 이에 대해 박근혜정부는 자신의 원칙적인 자세가 북한의 태도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보고 있다.11)
이처럼 대북정책이나 대외정책에서 단기적인 성과를 과시하는 데 급급한 성과 위주의 인식은 역으로 이산가족 상봉 이후 최근 악화된 남북관계를 설명할 수 없게 만든다. 북한도 분단체제의 구성원으로서 박근혜정부의 정책과 성격을 분석하면서 맞춤형 대남정책을 펼치고 있다. ‘흔들리는 분단체제’ 속에서 북한정권 역시 체제 유지를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박근혜정부는 지나치게 소홀히 여긴다.
넷째, 역대정부의 정책을 계승할 의지가 부족하다. 드레스덴 연설에는 ‘통일 이후 세계에 기여’ ‘새로운 한반도’ ‘드레스덴 통일독트린’ 같은 거창한 구호는 있지만 정작 남북관계를 정상화해갈 설득력있는 수단은 보이지 않는다. 박대통령은 드레스덴 연설에서 군사 장벽, 불신 장벽, 고립과 단절의 장벽이라는 세가지 장벽이 남북 사이에 놓여 있다고 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한 수단은 그 현실인식에 비해 충분하지 못하다. 박근혜정부가 대북정책의 수단에 약한 이유는 과거정부의 정책을 계승하지 않기 때문이다.12)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통일대박론도 6·15선언과 10·4선언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은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제4항)라고 약속했다. 2007년의 10·4공동선언 또한 신뢰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프로세스로 경제협력을 비롯한 각 분야에서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는 데 합의했다. 결국 드레스덴에서 발표된 3대 대북제안도 이 10·4선언의 틀 속에 있는 셈이다.13)
분단체제 재안정화를 시도하는 보수세력
1987년 6월항쟁으로 형성된 ‘87년체제’는 “분단체제를 침식하고 불안정화하는 동시에 그것의 발전방향 선택과 조정이 분단체제에 의해서 심각하게 제약되는” 체제라고 규정된다.14) 박정희·전두환(全斗煥) 체제에서 억압받던 통일운동도 6월항쟁 이듬해인 1988년부터 다시 분출되기 시작했다. 6월항쟁 이후 통일운동이 지속성을 가졌던 것은 87년체제를 뒷받침하는 민주주의 역량 때문이었다.15) 백낙청(白樂晴)은 “1987년을 기점으로 분단체제가 고착단계에서 동요단계로 접어들었다”라고 하면서 이를 ‘흔들리는 분단체제’라고 이름짓고,16) “분단체제가 굳건히 유지되던 상황에 맞춘 체제운영 및 발전 모형이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된 데 따른 한층 본질적인 위기”라고 이를 설명했다.17)
흔들리는 분단체제를 재안정화하려는 보수세력의 시도는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본격화됐다. 정부의 대북정책에 ‘퍼주기’라느니 ‘끌려다니기’라는 둥 정략적 비판이 계속됐고, 반대세력에 종북의 올가미를 씌우는 행태가 매카시(J. R. McCarthy) 광풍처럼 민주주의를 위협했다. 북한 핵문제가 장기화하자 북한에 의한 위협을 일상화하고 대북 불신정서를 키웠다. 북한의 정책이 남한사회의 진보적 발전과 어긋난다는 판단도 늘어났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란이나 통합진보당 사태도 통일문제에 대한 피로감이 짙어지는 요인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고착된 분단체제가 불안정해지면서 발생한 것이다. 이는 김종엽이 제기한 “분단체제 동요기에는 평화의 가능성 및 사례와 긴장의 가능성 및 사례가 동시에 증대되고 양자가 복잡하게 얽히는 과정을 경험하게”18) 된다는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러한 상황은 분단 이후 통일논의를 주도해온 진보세력이 이명박정부 출범과 민주주의의 위축 이후 통일논의를 이끌어갈 힘을 소진했다는 내부적 문제에서 비롯한다고 할 수 있다. 분단체제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진보적 노력과 분단체제를 재안정화하려는 수구적 시도가 충돌하는 가운데 진보진영의 역량이 소진하면서, 분단체제는 흔들리는데 통일운동은 약화되는 역설적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6월항쟁 이후 재활성화된 통일운동 내부의 한계와 진보진영의 분단체제에 대한 불확실한 인식의 결과이다. 백낙청은 일찍이 진보진영 내부의 세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첫째는 분단체제가 개입되지 않은 사회나 사회이론을 표준으로 하여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담당세력을 설정하려는 태도, 둘째는 북한사회의 성취나 문제점을 분단체제와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는 태도, 셋째는 한국사회에 대해 분단체제가 강요하는 예속성에만 주목하고 자율성의 상대적 증대 가능성을 간과하는 태도이다.19) 통일운동은 90년대 이후 발전해갔지만 진보진영은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했고, 일상에서 다양하게 제기되는 개별 의제들을 통일문제와 결합해 분단체제 극복운동으로 발전시켜갈 역량도 없었기에 수구세력의 분단체제 재안정화 전략 앞에 진보진영의 대응은 점차 무기력해졌다.
이런 상황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이 ‘일종의 오프싸이드 플레이’가 되어 진보정책 깊숙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통일대박론이 과감하게 추진되기를 기대할 수 없는 이유는 “보수파의 핵심 이익이 분단체제의 유지 없이 지켜지기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20) 더구나 미국의 아시아 회귀정책이 통일대박론에 대해 립서비스만 할 뿐 실질적으로는 분단체제 유지를 필요로 한다는 구조적 제약도 존재한다.
시민참여, 통일개념의 전환에서 출발
통일대박론은 분단체제의 불안정성을 반영한다.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을 이어간다면 분단체제의 불안정성이 초래하는 모순이 더욱 심화될 것이기에 이와 차별화하겠다는 판단에서 출발한 것이다. 분단체제는 남북의 적대적 상호의존을 본질로 하지만 “통일에 대한 염원조차 체제유지에 교묘하게 활용할 수 있는 유연한 대응력을 지닌 것”21)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김정은체제가 남북관계 개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박근혜정부에 매우 유리한 대북정책 추진 환경이다. 그러나 자신의 통일드라이브가 가지는 구조적 제약 때문에 호혜적 남북관계로 전환하는 것은 불확실하다. 상대적으로 취약해진 진보진영의 정책에 진입을 시도했지만 한계는 여전하다.
통일대박론의 의의와 한계를 분단체제론적인 시각에서 살펴본다면 통일대박론으로 물꼬가 트인 통일논의를 진보진영이 활성화하는 방향을 잡을 수 있다. 통일논의 활성화의 출발은 통일의 개념을 다시 설정하는 것이다. 백낙청은 이에 관해 “단일형 국민국가로의 ‘완전한 통일’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 사이 어느 지점에서 남북간의 통합작업이 일차적인 완성에 이르렀음을 쌍방이 확인했을 때 ‘1단계 통일’이 이룩되는 것이라는 새로운 발상이 필요”22)하다고 제기했다. 이후 그는 남북연합을 1단계 통일로 해야 하며, 화해협력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남북연합이 아니라 적극적인 목표로서 남북연합을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또 남북연합이 되어야 “북측 정권으로서는 비핵화 결단을 내리고 자체 개혁의 모험을 감행할—비록 완전히 안심되지는 않더라도—그나마의 여건이 충족되는 것”이기 때문에 남북연합이 비핵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남북연합의 의미를 강조한다.23) 정현곤(鄭鉉坤) 역시 한반도식 남북연합을 주장한다. “한반도식 남북연합은 2국가를 중시하며 사회체제 문제에 대해서는 유연하게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류협력을 활성화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도 남북연합에 입각한 통일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북연합에 의해 보장되지 않는 교류협력과 평화체제 구축 시도는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24)
이같은 통일 개념의 재정립을 위해 기본적으로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통일은 남북이 하나가 되는 것인가? 흔히 그렇게 답하기 쉽겠지만 한반도의 고유한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 됨’보다는 다름을 존중하고 공존을 제도화하며 이 제도의 발전과정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즉 남북한의 ‘평화 공존’을 통일과정의 출발로 보자는 것이다. 평화 공존은 통일은 아니지만 남북한이 군사적 위협을 받지 않고 교류협력을 통해 경제공동체를 만드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통일과정의 초기 모습이고, 또 ‘사실상의 통일’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사실상의 통일’이 남북관계에서 교류와 협력이 활성화되는 것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 개념이라면, 한발 더 나아가 공존의 개념에 기초해서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제도화한 것이 바로 남북연합이다. 남북연합이 우리가 추구하는 ‘1단계 통일’인 것이다.
10·4공동선언에서 약속한 남북의 각종 당국간 대화, 즉 정상회담의 정례화를 비롯해 총리와 국방장관, 경제장관, 사회문화장관, 국회의 회담이 이루어지고 민간 차원의 민족공동행사 등이 성사된다면 남북연합으로의 초기 진입이 가능하다. 남북연합은 1단계 통일이지만 완성태가 아니기 때문에 남북연합 자체도 발전하는 과정을 가진다. 초기의 진입기, 중기의 발전기를 지나 중앙정부의 권한이 연방제 수준으로 나아가는 성숙기를 거치며 자연스럽게 정착될 것이다. 남북연합은 교과서적으로는 두개의 국가이지만 정상회담을 비롯한 각종 장치가 결합된다면 두 체제의 발전과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강력한 플랫폼이 될 것이다.
역대 정부가 계승해온 통일방안인 ‘민족공동체통일방안’25)에 기초해 볼 때 우리가 현 시점에서 합의하고 상상할 수 있는 통일의 모습엔 세가지가 있다. 첫째 남북연합, 둘째 남북연합의 다음 단계, 셋째 북한의 급변상황에 따른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대비이다.
남북연합 자체가 초기의 느슨한 상태에서 연방제에 가까운 높은 수준으로 중앙정부의 결합력이 점차 발전해가는 과정이듯이 남북연합의 다음 단계도 높은 수준의 남북연합이 연속적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남북연합 그 다음 단계는 남북연합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남북 변혁의 결과로 맞이하게 되는 통일단계이겠지만 이는 단계라고 구분하기도 모호한 연속적인 과정인 것이다. 6·15공동선언이나 10·4선언에서는 남북연합 이후 단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남북연합 자체도 발전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 종국의 모습이 어떨지 예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남북연합 다음에 오는 최종단계의 통일을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남북연합을 1단계 통일로 설정하자고 주창한 백낙청은 “통일의 최종 모습을 미리부터 정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남한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현행 헌법에 충실하고, 북한도 일단은 그쪽 체제를 유지하면서 변화하게 해주는 느슨한 결합을 추진하자는 것이지요. ‘혼합체제’건 자유민주주의건 처음부터 통일의 전제조건으로 삼음으로써 교류협력조차 못하게 하지 말자는 겁니다”라고 제안한다.26) 1단계 통일인 남북연합의 발전 결과가 그 최종단계로서의 통일상을 그리는 데 도움을 주겠지만, 일단 그 모습은 우리가 꿈꾸는 미래,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실현된 사회일 것이다. 누구나 그 미래를 꿈꿀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그 미래에 실현할 수 있다. 그 미래발전상에 따른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분단체제 변혁운동이다. 통일의 최종단계는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미래사회의 설계도인 셈이다.
셋째로는 북한의 변화와 심각한 불안정화에 대한 대비이다. 북한의 불안정화는 분단체제의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의 준비는 아니더라도 위기관리를 위해 정부 차원에서 종합적 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북한에서 발생할지 모를 어떤 상황에 대처하고 한반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남북연합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남북연합을 통해 분단체제를 변혁하는 목적의식적 활동이 시민참여의 방향이라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도달한다. 사회 제반 영역에서 제기되는 시민사회의 의제와 통일문제를 결합하고 통일운동의 일상화·생활화를 통해 분단의 잔해를 해소하는 것이 시민참여다. 그러므로 시민참여가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이끌 수밖에 없고, 거꾸로 ‘과정으로서의 통일’은 시민의 역할을 필요로 한다. 시민참여 전략은 시민사회의 개혁의제를 ‘과정으로서의 통일’과 결합하면서 남북연합으로의 진입을 통해 남북 두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이 통일준비이고, 또한 남한사회의 개혁의제를 완성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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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매머드급 기구는 애초 4월중 출범 예정이었으나 조직의 위상과 구성을 확정하지 못하다가 세월호 침몰사건 이후 출범시기를 못박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 드레스덴 선언 이후 한미 해병대의 합동훈련인 쌍룡훈련이 평양 점령을 목적으로 해서 사상 최대규모로 진행되었고, 오바마(B. Obama) 미국 대통령은 아시아 회귀정책을 추진하면서 북핵에 대한 강경대응을 명분으로 한·미·일 삼각 군사협력을 시도했다. 북한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에 편승한 박근혜정부의 태도와 드레스덴 선언을 거세게 비난했다. 이처럼 대북정책의 추진 환경이 악화된 상태에서 벌어진 세월호 침몰사건은 드레스덴 선언의 국내적 추진력마저 약화시켰다.
3) 김종엽(金鍾曄)은 분단체제하에서는 보수파가 민주파의 정책을 민주파보다 더 과감하게 채택하는 오프싸이드 플레이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보수파의 오프싸이드 전략과 분단체제」, 『창비주간논평』 2011.5.25. http://weekly.changbi.com/537). 그는 이 글에서 “‘오프싸이드 플레이’가 정치사에서 흔하지는 않지만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비스마르크의 복지정책, 드골의 알제리 포기(…) 닉슨의 중국과의 데땅뜨, 시온주의자 베긴의 이집트와의 평화협정, 고르바초프의 뻬레스뜨로이까를 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그 사례를 소개한다.
4) 오프싸이드란 축구경기의 공격자 반칙 중 하나다. 공격수가 상대편의 최후방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반칙은 아니다. 그 위치에서 공을 받으면 그때 비로소 반칙이 된다. 각주 3번에서 인용한 바같이 김종엽은 보수파가 민주파의 정책을 더 과감하게 채택하는 것을 ‘오프싸이드 플레이’라고 한다. 이는 오프싸이드 반칙으로 이어지기 이전의 상태다. 필자가 이를 인용한 것은 보수가 진보의 아젠다를 취하는 경우가 빈번해져서 이것이 상대 진영 깊숙이 들어온 오프싸이드 플레이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 오프싸이드 위치에 있다고 해서 항상 반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므로 오프싸이드 위치에서도 득점을 올릴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할 필요도 있다.
5) 졸고 「드레스덴 연설, 동북아 신질서 위에 낸 숨구멍」 서울신문 2014.4.4.
6) 북한은 조평통 대변인 성명(2014.4.27)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험한 비난을 쏟아놓았다. 이것이 과연 국가기관의 성명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성명 전문은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041.
7) 미국의 아시아 회귀정책이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과 조율되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서는 졸고 「아시아로 온 미국의 속내는」, 『창비주간논평』 2014.4.30(http://weekly.changbi.com/823) 참고.
8) 북한의 조평통은 2014년 4월 23일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을 10개항에 걸쳐 조목조목 비판하는 ‘박근혜에게 보내는 공개 질문장’을 발표했다. 전문은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6993
9) 조선일보 연중 연속기획 ‘통일이 미래다’(2014.1.1.~)의 기조는 ‘1시장 2지역론’이다. 조선일보가 1시장 2지역론을 내세운 것은 한국자본주의의 위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성장률 둔화속도가 빨라지면서 위기의식이 심화되었는데 이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신성장동력으로서 ‘통일’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며 ‘한반도의 통일은 우리 경제가 실제로 대도약할 수 있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양측의 동기가 유사한데, 사실 이는 몇년 동안 ‘평화가 밥이다’라면서 남북관계를 통해 신성장동력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진보의 담론과도 매우 비슷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이 조선일보의 1시장 2지역론과 다른 것은 2지역이 유지되는 상태를 관리하는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선일보가 1시장 2지역론을 내세운 것은 북한의 급격한 변화가 신성장동력 창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 때문이다.
10) 김창환은 “남북관계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대 비극이 전쟁이라면 그 다음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은 갑작스런 통일이다”라고 말한다. 「한반도 위기와 통일개념 재정립의 필요성」, 코리아연구원 엮음 『통일, Re-Start』, 타임북스 2014.
11) 이러한 인식은 대일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청와대는 제3차 핵안보정상회의에서 한·미·일 정상회담을 갖기로 한 데 대해 “그간 우리의 원칙에 입각한 외교적 노력과 일본 측의 어느정도 자세 변화가 이번 핵안보정상회의를 계기로 한·미·일 정상회담을 가능하게 했다”라고 평가했다. 뉴시스 2014.3.21.
12) 독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사민당의 브란트(W. Brandt) 총리가 제안한 것을 정권이 바뀌어도 20여년 동안 꾸준히 추진하여 마침내 기민당의 콜(H. Kohl) 총리 시절에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후 독일은 단기적으로는 통일후유증을 앓았지만 오늘날은 세계 경제위기 속에서도 유럽에서 ‘나 홀로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13) 김보근 「10·4선언 무시한 드레스덴 선언」, 한겨레 2014.3.30.
14) 김종엽 「분단체제와 87년체제의 교차로에서」, 『창작과비평』 2013년 가을호 470면.
15) 4·19혁명 이후인 1961년부터 시작된 혁신계와 대학생들의 통일운동이 지속성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전두환 시대를 거치면서 1987년까지 분단체제 고착기였다는 사실과 87년 이후는 분단체제가 흔들리는 시기였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분단체제를 흔든 가장 큰 요인은 6월항쟁 이후 형성된 민주화 역량이다.
16) 백낙청 「분단체제와 참여정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 47면.
17) 백낙청 「책머리에」, 『흔들리는 분단체제』, 창작과비평사 1998, 5면.
18) 김종엽, 앞의 글 471면.
19) 백낙청 「통일운동과 문학」, 『창작과비평』 1989년 봄호 88~90면.
20) 김종엽 「보수파의 오프싸이드 전략과 분단체제」.
21) 백낙청 「한반도의 통일시대와 한일관계」,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 39면.
22) 백낙청 「6·15시대의 한반도와 동북아평화」, 같은 책 20~21면.
23) 백낙청 「‘2103년체제’를 준비하자」, 『2013년체제 만들기』, 창비 2012, 21면. 교과서적으로 볼 때 두개의 상이한 국가나 세력의 결합방식으로서 ‘연합’(confederation)과 ‘연방’(federation)을 제시할 수 있다. 연합은 두개의 주권국가가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결합하는 것으로서 연방보다 결합력이 느슨하고 중앙정부의 권한이 약하다. 남북연합은 하나의 단일국가가 아니므로 ‘하나의 단일국가를 건설’하는 것만 통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남북연합은 통일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발상을 바꾸어서 남북연합을 1단계 통일로 설정하면서 이후 탄력적으로 발전하는 한반도 통일과정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긴 과정을 필요로 하는 한반도식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24) 정현곤 「한반도체제와 통일운동시론: 성찰과 모색」, 늦봄 문익환 목사 20주기-4·2공동성명 25주년 기념 심포지움 ‘Restart 통일운동: 통일담론과 전략’(2014.4.2) 자료집 32~37면.
25) 정부의 통일방안은 1989년 만들어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 기초하여 1994년에 다듬어진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다.
26) 「직격 인터뷰: 송호근 묻고 백낙청 답하다」, 중앙일보 2014.4.9(온라인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