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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명호 『연암 문학의 심층 탐구』, 돌베개 2013

‘연암’이라는 운명

 

 

류준필 柳浚弼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교수 kk0047@empas.com

 

 

164-촌평-류준필_fmt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들에게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은 독성이 아주 짙은 매혹의 대상이다. 한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가기 힘든 함정 같고, 겨우 거리를 두었다고 안도하다가 이내 다시 붙들린다. 평생토록 소동파(蘇東坡)를 앞에다 두고 다가섬과 멀어짐을 반복했던 명대(明代)의 왕세정(王世貞)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연암 연구가 무척이나 많이 쏟아지는 건 충분히 이해가 되는 현상이다.

오오에 켄자부로오(大江健三郎)는, 학자가 되고 싶었던 자신이 작가의 길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학자의 길을 가는 선배와 벗들의 능력을 신뢰했기 때문이라 했다. ‘내가 기댈 수 있고 기댈 만하며 기대어도 좋다’는 마음. 작품을 집필하는 작가 오오에의 책상 왼편엔 늘 학자들의 저술이 놓여 있었다. 『논어집주(論語集註)』 같은 경전 주석서의 첫머리를 으레 “정자(程子)께서 말씀하시기를()”로 시작할 수 있었던 주자(朱子)도 얼마나 안도하는 마음이었을까.

이같은 준신(遵信)의 마음을 오롯이 작동시킬 수 있는 스승이나 선배가 있다는 것은 보통의 시절인연이 아닐 것이다. 평자에게 『연암 문학의 심층 탐구』의 저자 김명호(金明昊) 교수는 그런 마음을 들게 하는 선배 학자이다. 저자는 『열하일기연구』(창작과비평사 1990)에서부터 연암의 드넓은 세계를 명징하게 보여주고, 난해한 『연암집』(돌베개 2007)을 번역(신호열 공역)해 학문적 접근이 훨씬 용이하게 만들어주었다. 내가 아는 연암이 있다면 거의 대부분 저자로부터 배운 것이다(제대로 배웠는지 여부는 당연히 다른 문제다).

『연암 문학의 심층 탐구』는 연암과 관련하여 저자가 세번째로 간행한 저서다. 2009년 단국대 연민문고 해제 작업에의 참여가 직접적 계기가 되어(6, 231면), 그간 저자 자신이 미루어왔거나 미해결로 남겨둔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성과로 이루어져 있다. 총 4부 구성의 이 책에서 3부와 4부는 많은 이본(異本)이 현존하는 『연암집』의 텍스트 연구이다. 이미 『열하일기연구』 저술과 『연암집』 번역을 통해 이본 연구 및 교감(校勘) 작업을 꾸준히 수행해온 저자는, 새로이 발굴된 자료를 다시 섭렵하고 다른 연구의 성과도 참조하면서 『연암집』 텍스트에 대한 문헌학적 분석을 정치(精緻)하게 시도했다.

먼저 3부에서는 그간 목록으로만 알려진 『열하일기』의 ‘보유(補遺)6편(실은 「금료소초(金蓼小抄)」를 제외한 5편)의 성격을 검토하고 그 의의를 추론한다. 이어 4부에서는 『열하일기』 이본을 ‘초고본 계열’에서 ‘『연암집』 별집 계열’까지 모두 네 계열로 나누고(233면) 그 관계양상을 분석함으로써, 제목·체제의 변모와 본문의 개작·수정·삭제 양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근자에 제기된, 일본 동양문고(東洋文庫) 소장본이 『열하일기』의 정본이라는 주장(230, 272면)에 대해 엄격하면서도 신중한 반론을 제기한다. 이러한 학문적 엄정함과는 별도로, 1932년 신활자본 간행 조력자가 “친일파”(225~26면)임을 표나게 강조하고, 마에마 쿄오사꾸(前間恭作) 등 일본인 학자들의 성과를 준신하는 태도를 경계하는 듯한 대목(272~78면)에서 저자의 학문적 자존감을 엿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저자가 보여준 이런 성과들은 ‘몸’으로 쓴 결과다. 이것은 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바로 『연암집』의 정본화 작업이라는 목표다. 이것은 또한 『열하일기』를 포함하여 『연암집』의 정본화 작업이 완수되고 그에 기반한 훌륭한 번역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315면)의 소산이다. 이를 바탕으로 문예와 사상의 해명으로 나아가야 후퇴 없는 학문적 축적이 가능할 것이다. 신념이 열정을 품어 학문적 결실을 낳는 학계의 드문 사례를 저자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1~2부는 정본화 작업 같은 텍스트 연구에 기반하여 연암문학의 문예성과 사상성을 해명하고자 한 일종의 ‘범례(凡例)’ 제시이다. 1부는 『연암집』에 수록되지 않은 일시(逸詩)를 종합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연암의 면모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저자는 특히 작품 분석뿐 아니라 번역·주해 작업에도 공을 들였다. 2부 ‘연암의 실학사상에 미친 서학의 영향’은 4부에서 『열하일기』 ‘초고본 계열 이본’의 대조작업을 통해 “서학과 관련한 내용이 대거 삭제”(270면)된 양상을 확인한 데서 비롯된 성과다. 이 부분은 실학의 역사적 의의를 재정립하는 과제와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저자에게 실학이란, “서학을 사상적 촉매로 하여 유학을 갱신하려 했던 학술운동으로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세계사적 추세에 직면하여 유학을 근대사상으로 개혁하고자 한 시도”(113면)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연암은 “서도(西道)와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사상적 혁신을 추구”(116면)한 존재로 재평가된다.

저자에 따르면 연암은 마떼오 리치(Matteo Ricci)의 『교우론(交友論)』을 수용하되 주자학적 기반 위에서 극복을 추구했고, 그러한 수용 및 극복은 신분·화이(華夷)의 차별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명대 양명학파의 우정론보다 진전된 의의가 있다. 또 저자는 ‘호곡장론(好哭場論)’과 「상기(象記)」를 중심으로 연암이 『천주실의(天主實義)』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내포된 염세주의와 창조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양상을 분석하는 한편, ‘도강논도(渡江論道)’ 대목의 분석을 통해 『기하원본(幾何原本)』의 수용양상과 유학적 입장에서 ‘경계의 철학’을 심화·확대하는 과정을 자세히 논구한다(117~74면). 이를 통해 연암 실학과 서학의 관련성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 것이다.

저자는 연암이 “학문적 첫사랑”인 줄 알았지만 이제는 수락해야 할 “운명”임을 깨닫는다고 말한다(9면). 그 운명 덕택에 조만간 우리 학계가 받을 빛나는 선물이, 저자가 수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연암 평전』이다. 기실 『연암 문학의 심층 탐구』는 실증(주의)적 정신이 보여주는 엄정한 아름다움으로 일관되어 있어, ‘작가(문인)로서의 연암’이 다채롭게 보이지는 않았다. 이런 이유로 『연암 평전』의 완성이 더욱 기다려진다.

가령 서학 관련 구절 등 연암의 글에서 삭제된 부분의 유무가 정말 연암 문장의 전체 의미에 변모를 가져오는지 의문이 든다. ‘글을 글로서 읽는다’는 입장에서라면 논의의 초점이 달라질 수 있다. ‘호곡장론’에서 신생아의 울음소리에는 기독교적 영향의 흔적보다 요동 벌판의 드넓은 경계가 우선적으로 보이고, 여기에 주목하면 인질로 붙잡힌 소현세자를 거론하며 연암이 떠올렸던 통곡의 울음소리도 같이 들린다. 「만조숙인(輓趙淑人)」에서도 관건이 되는 시적 장치는 연암 부부의 대화이고, 이것은 연암 부인의 ‘목소리’가 직접 들리게 하는 효과를 낸다. 그러다보니 ‘문학적’ 실증정신은 어떤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소설 「셰익스피어의 기억」(La Memoria de Shakespeare)에는, 셰익스피어의 평전을 쓰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얻게 되는 학자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기억을 다른 이에게 양도하고 평전도 포기한다. 셰익스피어의 기억은 셰익스피어만의 기억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기억까지를 포함해서 자기 기억의 형태로 ‘기억’하는 집합체였다. 연암의 문학 또한 셰익스피어의 기억과 비슷하지 않을까. 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실증정신의 장엄함과, 한 방향으로의 귀결에 자주 저항하곤 하는 ‘문학’(좋은 작품일수록 그렇다)의 조우는 설레며 기다리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말씀을 하면 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이고, 반대로 말씀을 아끼면 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어쩌면 그 이유를 묻고 찾는 데서부터 연암 문학의 또다른 ‘심층’과의 조우가 시작되리라는 것이 저자의 암시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