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톰 하트만 『기업은 어떻게 인간이 되었는가』, 어마마마 2014
법인 뒤에 사람이 있다
박경신 朴景信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kyungsinpark@korea.ac.kr
『기업은 어떻게 인간이 되었는가』(Unequal Protection: How Corporations Became “People” And How You Can Fight Back, 한국어판 이시은 옮김)는 발상이 매우 좋은 책이다. 저자 톰 하트만(Thom Hartmann)은 기업의 경제활동이 경제적 불평등의 원천으로 비치는 마당에, 기업에 헌법상 기본권을 인정하여 기업에 대한 규제를 어렵게 만든 미국연방대법원에 대한 분노를 쏟아낸다.
그러나 영리법인을 헌법상 기본권의 주체로 인정하는 법리는 그다지 새롭거나 놀라운 현상은 아니다. ‘법인(法人)’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상 그것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든 비영리를 목적으로 하든 규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규제에 대한 헌법적 한계를 원천적으로 부인하지 않는 이상 법인도 헌법상 기본권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죄추정의 원칙이 법인에 대한 형사재판에 있어서만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
실질적으로도, 사람들은 법인을 통해 자신의 활동범위를 확장하고 더 많은 사람과 협업할 수 있게 되었다. 법인이 이렇게 사람들의 활동을 매개하는 이상 법인에 대한 규제는 곧 사람들의 활동에 대한 규제가 된다. 그렇다면 법인의 활동 ‘X’에 대한 규제는 자연인이 ‘법인을 통해 X를 할 권리에 대한 제한’이 된다. 그러므로 자연인에게 기본권주체성을 인정하는 것은 간접적으로나마 법인에 대해 기본권주체성을 인정하는 일이 된다. 예를 들어 법인이 언론사인 경우를 생각해보자.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표현의 자유’ 판례인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 대 썰리번(L. B. Sullivan) 사건1)에서 연방대법원은 『뉴욕타임즈』라는 법인의 표현의 자유에 손을 들어주었다. 단, 법인이 기본권의 주체라고 해서 자연인과 동일한 범위의 기본권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법인과 자연인 사이에는 규제의 목적에 비추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이에 따른 차별도 불가피하다. 책임 소재를 분명히하기 위해 법인이 자신으로부터 소장을 송달받을 사람을 주정부에 등록하도록 하는 규제가 그 예다. 지금까지는 법상식이다.
『기업은 어떻게 인간이 되었는가』가 미국에서 많이 판매된 이유는 이 책이 출간된 2010년 미국연방대법원의 ‘시민연합’(Citizens United) 판결2) 때문이다. 이 판결은 법인을 표현의 자유에 있어서 자연인과 같은 기본권의 주체로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에서 밝혔듯이 법인의 기본권주체성에 대한 간접적 인정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문제는 법인과 자연인의 차이에 따라 합리적으로 가해진 차별마저도 금지된 것이다.
미국에서 1971년 제정된 연방선거운동법 441조 b항(2003년 초당적 선거운동개혁법 203조에 의해 수정)은, 법인이 자연인과 달리 선거 전 60일 이내(예선은 30일 이내)에 특정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지상파, 유선 또는 위성 방송광고의 비용을 지출하는 것을 금지했다. 입법취지를 볼 때 우리나라로 따지면 선거과열을 막겠다는 공직선거법의 ‘사전선거운동’ 금지 조항과 모든 기업 및 단체의 정치자금 기부를 전면적으로 금지한 정치자금법의 교집합 정도로 보면 된다. 즉 영리법인에게 방송광고와 같은 위력적인 선거개입을 투표일 직전에 허용하면 법인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선거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 공정성을 해칠 수 있다. 또한 법인은 그 설립취지가 영리의 추구이기 때문에 정치적 표현으로서의 유효성이 떨어지고, 법인의 주주, 직원, 채권자 들이 법인 이사들이 결정한 정치적 표현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어 이사진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손상되기 때문에 그러한 금지조항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조항에 대해 위헌판정을 내렸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전통적으로 사설(社說)을 통해 정치개입을 해온 언론사나 시민운동을 하는 비영리법인 등의 경우 위와 같은 영리법인과 다른 성격이 있어 예외로 두어야 하는데 그 예외를 헌법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사법적으로 예외를 인정하면 되는 일임에도 이 가능성에 대해 눈감은 것은 대법원의 친기업적 성향을 보여준 것이라고 꼬집는다. 평자도 이 판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핵심은 법인격의 기본권주체성 문제가 아니라 법인과 자연인의 차이에 따른 합리적인 차별 여부다. 즉 선거법의 취지에 따르면 법인은 차별되는 것이 당연했다. 왜 그럴까.
실제로 『기업은 어떻게 인간이 되었는가』의 미덕은 법인을 통한 자본축적으로 발생한 불평등의 문제, 독점의 문제를 미국사회의 여러 분야별로 충실하게 소개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미국의 대부분 언론사를 3개 기업이 소유한 현실을 비판한다. 하지만 이 언론사들이 3명의 자연인에 의해 소유되고 있다면 더 좋을까? 아마도 저자는 답할 것이다. 법인이라는 제도가 없었다면 그같은 집중과 과점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기서 평자의 의견을 제시해보겠다. 주식회사 제도는 근대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로 꼽힌다. 주식회사는 전에는 불가능했던 규모의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했다. 미국 시골의 한 농부가 가진 쌈짓돈도 지구 반대쪽 두바이의 세계최고층 건물을 건설하는 데 투자된다.
하지만 이 제도는 기업의 ‘선행’을 구조적으로 어렵게 만드는데, 바로 주식회사가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할 의무를 법제화했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 상법을 포함해 대부분 나라의 법은 회사 경영진에게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fiduciary duty)를 부과했는데 그 내용은 회사의 최선의 이익을 수호해야 하는 것이다. 보통 이것은 다시 이윤을 극대화할 의무로 풀이되어 결국 주주의 이익과 등치된다.
그런데 과연 주주들은 자신이 투자한 회사가 이윤극대화를 위해 제3세계 어린이의 노동을 착취하는 공장으로부터 납품받기를 원할까? 실제 주주들에게 물어보면 모두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주식회사 제도는 이윤만을 좇는 추상적인 존재로서의 주주를 상정하고, 경영진이 이 상상의 주주에게 봉사할 것을 요구한다. 납품단가를 낮추어 하청업체 마진을 줄이는 행위는 하청업체 노동자에 대한 착취강도를 높여 양극화나 비정규직 문제를 심화시킬 수 있다. 주식회사 제도는 이 행위가 실제 주주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항상 옳은 것이라고 승인해준다.
저자처럼 법인보호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사법부에 돌린다면 평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렇게 할 것이다. 시민연합 판결도 이런 성격을 가진 법인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일이 이윤창출 욕구에 의해 오염될 것은 물론 주주들의 의사도 대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했어야 했다. 경영진의 과도한 이익추구가 빚은 사회파괴, 환경파괴가 주주들의 장기적인 이익에 해가 된다며 영민한 이들이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해도 이를 기각하는 미국 사법부. 심지어는 주주의 이익에 해가 되는, 재벌의 ‘경영권 상속용 전환사채 발행’도 인정하는 우리나라 법원. 아이러니하게도 평자에게 이 책의 교훈은 ‘법인 뒤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캐나다 일부 법원에서 회사의 최선의 이익에 주주뿐 아니라 노동자를 비롯한 이해관계자(stakeholder)의 이익을 포함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오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1960년 『뉴욕타임즈』에 실린 마틴 루서 킹 주니어 후원광고에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허위 기술이 포함되었다며 시의원 설리번이 『뉴욕타임즈』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건. 1964년 연방대법원은 이 사건에 명예훼손법을 적용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2008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과정에서 보수성향 시민단체 ‘시민연합’이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비판하는 다큐영화를 제작해 케이블TV에서 방영하려 하자 연방선거관리위원회가 ‘초당적 선거운동개혁법’을 위반한다며 방영을 금지했다. 하지만 법정공방 끝에 2010년 연방대법원은 기업이나 노동조합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비난하는 TV광고나 선거운동을 못하도록 금지한 것은 헌법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에 어긋난다며 이러한 활동을 허용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
1) 1960년 『뉴욕타임즈』에 실린 마틴 루서 킹 주니어 후원광고에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허위 기술이 포함되었다며 시의원 설리번이 『뉴욕타임즈』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건.
1964년 연방대법원은 이 사건에 명예훼손법을 적용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2) 2008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과정에서 보수성향 시민단체 ‘시민연합’이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비판하는 다큐영화를 제작해 케이블TV에서 방영하려 하자 연방선거관리위원회가 ‘초당적 선거운동개혁법’을 위반한다며 방영을 금지했다. 하지만 법정공방 끝에 2010년 연방대법원은 기업이나 노동조합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비난하는 TV광고나 선거운동을 못하도록 금지한 것은 헌법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에 어긋난다며 이러한 활동을 허용한다는 판결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