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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게리 워스키 『과학……좌파』, 이매진 2014
‘과학의 아편’과 작별을 고하라!
강양구 姜亮求
프레시안 학술·과학 담당기자 tyio@pressian.com
‘통섭’ ‘융합’ 같은 말들이 유행을 하면서 덩달아 주목을 받은 책이 몇권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책이 바로 스노우(C. P. Snow)의 1959년 강연을 책으로 펴낸 『두 문화』(The Two Cultures)다. 그런데 ‘두 문화’가 마치 유행어처럼 쓰이는 상황에서, 정작 이 책을 꼼꼼히 읽어본 이들은 몇이나 되는지 궁금하다. 왜냐하면 이 책의 핵심 주장은 통섭이나 융합과 상당히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두 문화』는 그 자신이 과학자였고 또 영향력있는 과학기술 관료이기도 했던 스노우가 상대편, 그러니까 인문학을 비롯한 이른바 ‘문과’ 지식인을 공격한 책이다. 스노우는 두 문화의 벽을 허물자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 내용은 ‘과학’도 모르면서 지식인 행세하는 문과 지식인을 조롱하고 질타하는 것이다.
이런 자신만만한 목소리에는 스노우가 활동한 1950년대에 만연했던 과학기술 낙관론이 강하게 깔려 있다. 스노우가 그렇듯이, 당시의 과학기술자와 과학기술에 경도된 지식인 중에는 빈곤을 비롯해 인류가 당면한 여러가지 문제를 과학기술이 도깨비방망이처럼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20세기를 ‘대량살육의 시대’로 만든 중심에 과학기술이 존재했음을 알고 있는 지금, 이런 과학기술 낙관론은 어처구니가 없다. 하지만 그때는 좌우를 막론하고, 아니 훨씬 많은 좌파 지식인이 바로 이런 과학기술 낙관론에 홀려서 스노우처럼 생각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과학기술에 딴죽을 거는 이들이야말로 변화의 발목을 잡는 ‘반동’이었다.
게리 워스키(Gary Werskey)가 쓴 『과학……좌파』(김명진 옮김)의 앞부분은 이런 과학기술 낙관론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참담한 실패로 끝났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과학기술자가 중심이 되어서 과학기술로 세상을 개조해보려 했던 좌파 과학자의 ‘섬뜩한’ 열정을 돌아보는 일은 진보를 뿌리째 재구성해야 할 오늘의 시점에서도 참으로 적절하다.
이 책은 과학기술 낙관론으로 무장한 좌파의 본보기로, 버널(J. D. Bernal)을 주축으로 한 1930년대 영국 좌파 과학자 그룹의 궤적을 추적한다. 이 그룹에는 버널뿐 아니라 존 홀데인(J. Haldane), 조지프 니덤(J. Needham), 패트릭 블래킷(P. Blackett) 등 과학뿐 아니라 ‘두 문화’의 영역을 넘나들며 빛나는 업적을 남긴 천재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이 천재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두가지 열정이었다. 하나는 “과학이 인류의 복지 증진을 위해”(44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과학이 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사회경제체제가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라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기에, 그 사회주의는 꿈속이 아니라 현실에 있었다.
정부가 앞장서 과학자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은 소련의 모습은 이들의 확신을 맹신으로 바꿔놓았다. 전세계가 대공황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그래서 과학자 역시 찬밥신세를 면치 못할 때) ‘사회주의 모국’만은 과학과 과학자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1939년 버널이 발표한 「과학의 사회적 기능」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버널은 (…) 과학을 기술과 사회 변혁의 원동력으로 파악했다. 모든 진보는 과학과 과학적 방법의 응용에서 유래했다. 일단 과학 분야에 자금을 지원하고 조직과 인력이 적절히 충원된다면, 다른 모든 것들이 뒤따라올 예정이었다. 이런 전망은 과학 노동자(와 과학적 소양을 갖춘 기술관료)들을 과학적 사회주의의 전진을 계획하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사회의 핵심이자 권력 중심에 데려다놓았다.”(69~70면)
이들의 이런 열정은 엉뚱한 방향에서 현실이 되었다. 마침 시작된 2차대전은 이들의 바람대로 정부가 앞장서 과학을 지원하게끔 만들었다. 이들은 ‘부역자’ 수준은 아니더라도, 대부분 전쟁에 두드러지게 기여했다. 그리고 자신의 과학적 낙관론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어떤 괴물을 낳았는지를 지켜보았다.
전쟁 후의 상황은 더욱 역설적이다. 버널을 비롯한 이들의 비전(‘과학이 세상을 구원하리라!’)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전후(戰後)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실현되었다. 그들의 “버널주의는 자본주의와 함께 성공을 구가했다.”(101면) 그리고 과학자는 정부 그리고 나중에는 기업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흥미롭게도 이들 중 일부는 이런 실패를 어느정도 예견했다. 예를 들어, 버널과 세계관을 공유했던(하지만 ‘타자’를 향해 훨씬 더 개방되어 있었던) 니덤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인간사회의 복잡하고 “신비로운”(78면) 상호작용을 과학의 이름으로 간단히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이렇게 회의했다. “우리는 종교의 아편을 과학의 아편으로 대체해야 하는가?”(79면)
‘과학좌파’의 이런 참담한 실패기를 염두에 두면, 최근 국내 일부 좌파의 모습은 참으로 기이하다. 좌파연하는 과학자 몇몇(?)이 버널을 입에 올리고, 그것도 모자라 이런 주장을 ‘진보의 혁신’을 말하는 일부 좌파가 앞장서 수용하는 모습이라니! ‘좌파’ 과학자가 하도 드물다보니, 좌파행세 하는 과학자 말은 무조건 귀담아들어야 한다는 강박증이라도 생긴 것일까?
다행히 『과학……좌파』는 뒷부분에서 앞세대 과학좌파의 실패를 비판적으로 극복한 후세대 과학좌파의 활약상을 소개한다. ‘급진과학운동’으로 불린 이들은 권력에 공모한 현대과학기술의 본질과 과학자 자신의 정체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그것을 근본부터 바꿔보려는 새로운 상상력에 기반한 새로운 실천을 준비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과학기술자가 급진과학운동과 유사한 문제의식의 과학좌파 운동에 동참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솔직히 말하면, 앞으로도 그 전망은 밝지 않다. 국가와 자본이 추동하는 거대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어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게 바로 오늘날 과학기술자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과학좌파 운동은 어디에서 나올까? 나는 그것이 과학 안이 아니라 과학 밖에서 등장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좌우를 막론하고 “과학의 아편”에 중독된 ‘버널의 후예’와 과감하게 단절함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과학……좌파』는 바로 그 출발점이 될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