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특집 | 세월호 이후 한국사회 무엇을 바꿀까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한
‘운동권 문화’와 운동하는 삶의 문화
유정길 柳淨拮
지혜공유협동조합 이사장. 정토회 에코붓다, 전국귀농운동본부, 한살림, 모심과살림연구소 이사. 저서 『생태사회와 녹색불교』 공저 『세계 어디에도 내 집이 있다』 『몸-마음 에콜로지』 『녹색당과 녹색정치』 등이 있음. ecogil21@naver.com
들어가며
1970~80년대 민중운동과 90년대 시민사회운동은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세력 중 하나였다. 그러나 2000년대를 거치고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운동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게 약화되었다. 최근 몇년간 4대강 개발, 용산참사, 한진중공업 파업, 쌍용자동차 해고,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밀양 송전탑 건설, 고리원전 재가동, 세월호참사 등 대형 사안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과거였다면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이 들고일어나고 사회단체들도 격렬한 집회를 통해 여론을 모으며, 언론이 그 이슈를 받아 뉴스를 만들고, 종교단체들이 권위를 갖고 마무리로 힘을 실어 결국 사회의 무게중심을 변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운동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축소되었으며, 편향된 언론은 사회의 균형자 역할을 하지 못하고, 뉴라이트나 어버이연합 등 보수운동이 조직화되는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운동권’이 누구인지, ‘운동권 문화’라는 것은 무엇일지 자문해본다. 우리가 느끼는 현실은 때로 희망적으로, 때로는 비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우리의 관념과는 무관하게 저만치에서 유장하게 흘러갈 뿐이다. 희망과 비관은 생각이다. 우리 관념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운동가1)는 현실을 탓할 것이 아니라, 풍부하게 변화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변화하는 현실을 과거의 잣대로 판단한다면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관념에 현실을 억지로 꿰맞추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지금 운동가들의 생각은 많이 변했다. 그러나 아직도 관성적으로 남아 있는 의식 중 일부를 이 글에서 언급하려고 한다. 그리고 ‘운동권’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운동하는 삶의 문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한다. ‘운동권’이라는 집단적 경계를 넘어 보통의 시민이 일상 속에서 더 많은 의미있는 일을 해나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변화를 기획하는 운동가들이 운동에 대한 관점을 전환하고 넓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 모든 사람은 결국 자기 이야기를 하게 되어 있다. 이 글도 주관적 경험과 사색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편협한 것에 그칠지 모른다. 그러나 나름대로 일관되게 ‘우리가 꿈꾸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운동적 문화를 만들어야 할까’라는 관점을 견지하고자 한다.
오늘날 조직화된 세력과 집단으로서의 ‘운동권’은 약화된 듯 보인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볼 때 조직화되지는 않았지만 ‘운동적 삶’을 사는 사람들, 운동적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많아졌다고 확신한다. 앞으로 한국 사회운동이 더욱 깊고 넓어져 새롭게 진화하기를 바라는 이로서 조심스럽지만 많은 비판과 토론을 기대하며 이 글을 쓴다.
‘비키니 시위사건’과 이분법의 사고실험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2012년 총선을 전후로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가 큰 인기를 끌면서 정치적 파장을 주었다. 그러던 중 나꼼수의 명성에 오점이 될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비키니 시위사건’이다. 구속된 나꼼수 멤버 정봉주(鄭鳳柱) 전 의원을 응원하기 위해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1인시위 사진을 보내달라는 나꼼수의 요청에, 한 여성이 나꼼수의 또다른 멤버인 주진우(朱眞旴) 기자의 트위터에 자신의 비키니 사진을 올린 것이다. 이에 대해 주진우 기자가 “가슴 응원사진 대박이다. 코피 조심하라”라고 쓴 글을 두고, ‘삼국까페’2)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여성을 성적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한낱 눈요깃거리로 삼고, 남성의 정치적 활동의 사기 진작을 위한 대상 정도로 전락시킨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시대를 함께 고민하는 동지적-동반자적 관계라고 생각해왔”지만 이러한 “‘반쪽 진보’를 거부하며, 나꼼수에게 가졌던 무한한 애정과 믿음, 동지의식을 내려놓는다”3)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아마도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이들은 나꼼수가 자신과 같이 반(反)MB의 입장에다 페미니스트라고 기대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나꼼수와 그 지지자 일부가 자신들과 동일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불편한 사실을 확인했다. 나꼼수 방송이 진행될수록 그들이 정치적으로는 진보의 측면이 있다고 해도 성평등에 대해서는 마초적 보수주의자라고 느끼던 차에 결정적으로 이 사건을 통해 결국 지지를 철회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자, 그러면 상상력을 발휘해 가정을 해보자. 만일 나꼼수가 게이나 레즈비언 등 성적 소수자를 불편하게 하는 견해와 입장을 드러냈다면 이들로부터도 ‘지지를 철회한다’고 배척당하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는다. 다문화의 시각으로 본다면 어떨까. 또한 복지문제에도 보수적 담론이 있고 진보적 담론이 있다. 환경문제에 관해서도 개발주의와 보전주의의 시각이 있다. 이처럼 특정한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지지가 철회될 가능성은 잠재해 있다.
물론 삼국까페가 성명서에서도 밝혔듯 이들의 지지철회 입장은 나꼼수를 그들이 적대시하는 세력과 동일시하거나 전면적으로 배제한다는 뜻은 아닌 것으로 이해한다. ‘지지를 철회한다’는 말이 ‘지지하지 않는다’와 동일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운동의 문화는 이런 정도의 입장을 부정, 반대의 의미로 받아들여왔다. 나꼼수가 성차별주의적, 반생태주의적이라고 해서 그들의 모든 발언이 잘못됐다며 지지를 철회할 필요가 있는가? 나꼼수 역시 반드시 모두의 지지를 기대할 필요가 있을까? 총제적이고 완전한 진보성을 드러내야만 지지받을 수 있는 것인가? 부분적으로 옳으면 안되는가?
사고실험을 한번 해보자. 여기 1만명의 사람이 있다. 편의상 그중 진보와 보수를 반반씩이라 할 때, 진보주의자가 나꼼수를 자기 편이라고 규정한다면 나꼼수의 지지자는 5천명이다. 그런데 이 5천명 중 페미니스트들은 마초주의자, 반여성적 인사를 가려 내 편이 아니며 지지를 내려놓겠다고 말한다. 그 인원이 또 반이라고 한다면 2500명이 된다. 이에 더해 성적 소수자의 인권을 주장하는 성평등주의자의 입장에서 변별하려 한다면 2500명의 반인 1250명이 떨어져나갈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복지문제를 기준으로 반으로 가르면 625명, 다시 생태주의자로 나누면 312명만이 오롯이 나꼼수와 같은 생각을 갖는, 비난할 수 없는 ‘가장 옳은 진보’가 된다. 처음 5천명은 같은 편인 줄 알았다가 복지문제가 논쟁이 될 때, 성적 소수자 문제가 불거질 때, 환경문제가 나타날 때 지지를 철회할 잠재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전방위적으로 순수한 혈통(?)의 진보로 간주된 312명에 대한 검증도 끝난 게 아니다. 새로운 기준과 프레임이 발견된다면 다시 이편과 저편으로 구분될 것이다. 결국 다시 적으로, 보수로 아우팅(outing)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무엇이 진보인가? 순결무구한 완결적 진보라는 것이 가능할까?
내가 제기하는 논점은 삼국까페의 여성운동가를 향해 있는 게 아님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나를 비롯하여 운동하는 모든 사람의 의식문화를 돌아보기 위한 것이다. 반MB면 모두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쳐준 것이 바로 비키니 사건이다. 더 깊이 들어가 따지다보면 결국 내 편, 우리 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궁극에는 자신만 남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상대를 배제하고 배제한 나는 어떨까, 나도 결국 누군가의 기준에 의해 ‘적’으로, ‘너희’로 아우팅이 되어 비난과 경계의 대상이 된다. 비판은 하되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문화는 그것이 그리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정서적으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30%가 일치하는 사람을 100%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동일시하기도 하고 반대로 30%의 견해가 다르면 100% 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세상에 전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부분적으로 옳고 부분적으로 틀릴 뿐이다. 이분법적 논리의 궁극은 결국 이러한 오류와 어리석음에 도달한다. 이러한 고정관념으로 과연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새로운 운동을 향해 넘어야 할 장애물
2001년부터 5년간 아프가니스탄에서 난민지원과 마을개발사업을 할 때 만난 한 개신교 단체의 대표는 나와 내 일행을 보자마자 대뜸 특유의 어조로 “예수 믿습니까”라고 물어와 주변을 당황시켰다. 이해한다. 예수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정의이자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식의 제안과 접근이 상대방을 위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유일한 진리이자, 진정한 행복이고 구원의 길이다. 그래서 이들은 NGO 지원활동을 통해 현지인과 가까워진 뒤 그들이 ‘잘못된 신념’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영접하게 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임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때로는 물리력을 써서라도 신을 영접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나를 비롯한 ‘운동권’은 이른바 ‘의식화’라고 하여 대학이나 야학과 노동현장에서 학습을 통해 조직을 확대하려 노력했다. 나는 당시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역사적 유물론 등의 철학을 공부하면서 희뿌옇던 세상이 일목요연한 줄기로 선명하게 정리되는 큰 깨달음의 경험을 했다. 이 이념의 도구 하나면 과거의 모든 역사가 해석되고 정세가 분석되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토대와 상부구조, 지배세력과 민중세력으로 현실이 선명히 규명되는 무기를 갖게 된 것이다. 이후부터 나는 모든 상황에 이 도구를 들이댔고, 이를 기반으로 적과 아(我)를 명확히 구분하고 적을 향한 적개심과 분노를 조직화해 그것을 운동의 에너지로 삼았다. 지금 생각하면 단순 경박하기 그지없지만 그 관념적 우월성은 행동의 오만함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내 편에 선 사람은 진리이자 정의며, 나머지는 비진리이자 부정의라는 신념이 있었다. 신념이 분명하기 때문에 일생을 투여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그래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적이거나 의식화의 대상, 아니면 전술·전략적인 제휴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돌아보건대 이러한 인식은 앞서 말한 배타적 개신교인처럼 ‘진보천당 보수지옥’ ‘좌파천당 우파지옥’을 설파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진리에 대한 그들의 배타적 독점의식과 닮아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당시의 운동권에게 1990년 전후의 사회주의 붕괴는 충격이었고 이때까지 신봉했던 진리의 확신에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목숨도 바칠 수 있다는 신념이 깨지자 많은 운동가들은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조직적 퇴각을 하지 못한데다 상당수가 자신의 고민을 유보하는 방편으로 대학원 등으로, 혹은 보통 시민의 생활세계로 흩어지게 됐다. 거대담론을 논하고 기득권을 버리며 삶을 투신해온 자에게 혁명이 아닌 개혁을 추구하는 시민운동은 작고 시원치 않아 보여 이에 대한 참여마저 소극적이 되기도 했다.
이분법적 사유에는 ‘하나가 다른 것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지배하려는 폭력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데리다( J. Derrida)의 말처럼, 진보/보수 같은 이항대립적 용어는 흔히 자기 논리의 우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다. 계급적 관점, 민족적 당파성만 견지하면 진보로 간주한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심지어 지금의 사회운동까지 도도한 대세를 이루고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진보세력 안에서는 서로를 모두 ‘우리 편’, 곧 ‘아군’이며 곧 ‘좋은 사람’으로 규정한다. 반대로 보수는 ‘적’으로 몰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나쁜 사람’으로 동일화한다. 진보주의자는 다 좋은 사람인가? 진보적 입장은 모든 정책이나 방법이 언제나 정의롭고 옳고 지지되어야 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진보라 할지라도 이념적 극단성을 갖는 사람도 있고, 현실적 균형을 고려하는 중도적 실천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으며, 지켜야 할 가치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는 건강한 보수가 있고, 그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그룹의 이익만을 지키려는 수구세력이 있다. 이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러나 개인이나 집단의 정치사회적 욕구와 의지가 강할수록, 사회가 극단적이고 험악할수록 다양성에 대한 이해는 희박해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성이 떨어지며 적개심과 배타성이 강화된다.
오랫동안 노동계급의 이해는 진보를 가늠하는 주된 기준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노동문제에 진보적이지만 전형적인 가부장적·반여성적 인식을 지니거나 반환경적인 ‘생태맹(盲)’에 머물러 있다면 이 사람이 과연 통합적 진보, 보편적 정의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계급적 당파성이나 민족적 이해는 의미있는 기준이지만, 지금은 그저 ‘부분적인 의미를 갖는 진보’일 뿐이다. 두세가지 기준만으로 ‘통합적인 진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한편으로 누군가 자신이 전방위적으로 통합적인 진보임을 자신할 수 있을까? 자기만이 배타적으로 정의롭고 정당하며 다른 사람이 틀리다는 생각은, 그동안 사회정의를 주장해온 사람일수록, 또 운동을 하면서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은 사람일수록 강하다. 하나의 기준에 의해 나누고 가르는 것은 의식의 게으름이며 사색의 결핍이다. 과거의 고정관념으로 변별하기에 지금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아수라(阿修羅)’는 분쟁과 싸움을 일삼는 신(神)으로 분노의 ‘진심(瞋心)’을 상징한다. 분노하는 순간에 스스로 절대적이고 완벽하게 선하고 정의롭다고 믿는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야 옳다고 생각한 나머지 전쟁을 서슴지 않는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기 때문에 그 폭력은 더욱 잔혹하다. 이렇듯 나만이 배타적으로 옳다는 진리에 대한 독점의식은 바로 폭력의 시작이다. 종교를 위해 전쟁과 살육을 불사한 유럽의 남미 선교사들이나 팔레스타인을 폭격하고 있는 이스라엘처럼 신념에 대한 강한 자기정당성은 물리적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나처럼 만드는 것’이 상대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다윈(C. R. Darwin)의 생존과 진화에 대한 자연선택설을 확대해석해 인간사회도 생존경쟁,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으로 돌아간다고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등의 사회학자들이 주장한 사회진화론은 오늘날 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산업사회의 중요한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경쟁과 갈등, 대립이 극단화된 시기일수록 사람들은 네 편과 내 편의 흑백논리를 강요받는다. 그러나 끄로뽀뜨낀(P. A. Kropotkin)은 상호부조론에서, 자연은 부분적으로 경쟁의 측면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상호보완·의존의 측면이 더욱 규정적이라고 주장한다. 경쟁하는 종보다는 협력·협동하는 종이 진화과정에서 더 많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현실세계에 100%의 백(白)과 100%의 흑(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흰색에 가까운 옅은 회색에서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까지 명도 차이가 있을 뿐 모두 회색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차원에서라면 ‘중도’를 강조한다 해도 역시 무채색의 프레임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무채색이 아니고 유채색의 세계, 컬러의 세계이며 무지개세계이다. 다양성의 차원에서 보면 어느 하나를 기준으로 ‘절대적으로’ 옳다 그르다를 규정할 수 없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인식해서 안되는 것이다. 다양한 꽃들이 모여 아름다운 화엄(華嚴)의 꽃밭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는 다양성의 세계, 다원주의 가치를 중요하게 바라보지 않으면 안되는 세계이다.
이분법적 가치는 ‘전부 아니면 무’(all or nothing)의 관념이다. 80%의 선한 가치가 있다고 해도 20%의 문제가 발견되면, 그 20%를 전면화하여 배제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다양성의 인식에서 그 20%는 20%일 뿐이다. ‘부분’만을 문제삼을 뿐이다. 부분적인 다름이나 오류를 그의 전체로 단정하여 배제하지 않는다.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을 때 훨씬 다양한 비판과 논쟁, 토론이 가능해진다. 이분법적 사고, 진영논리를 이토록 길게 논의하는 것은 이분법이 상황을 선명하게 하는 데 유용한 방편임은 인정하더라도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가장 심대한 장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위해 싸우는 방법
사랑하는 이가 타인에게 상처를 받거나 억울하게 죽게 된다면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분노하게 된다. 분노한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격적 갈등에서 유발되는 개인적 분노는 정당하다고 할 수 없지만, 공공성을 토대로 한 사회적 분노는 실천의 큰 동력이 된다. 불의한 현실에 분노하지 않고 무관심한 사람은 냉소주의자이거나 이기주의자이다. 몇년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의 책 제목 ‘분노하라’라는 말처럼 분노는 저항의 에너지이다. 부정과 부패, 부정의에 분노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분노만으로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이룰 수 있을까? 대체로 분노는 더 큰 분노로 확대되어 휘둘리게 된다. 분노에 휩싸이게 되면 사고의 시야가 좁아짐으로써, 넓고 풍부하게 헤아리면서 일의 과정을 찬찬히 만들어나가는 지혜를 가질 수 없다. 욕망〔貪〕은 분노〔瞋〕를, 분노는 어리석음〔癡〕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분노를 타고 넘어 승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때 적에 대한 분노와 불타는 적개심이 운동의 동력이라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분노와 적대감은 체제에 대한 ‘저항의 에너지’인 동시에 ‘파괴의 에너지’이다. 새로운 사회를 위한 ‘건설과 창조의 에너지’가 될 수 없다. 분노의 힘으로 상대를 제압했다고 해도 그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던 사람과 같은 괴물로 변해가는 혁명가들을 많이 봐왔다. ‘미워하면 닮게 되어 있다’는 원리처럼 증오는 결국 증오하는 상대에 포섭되게 한다. 적개심과 분노만으로는 길고 긴 과정인 운동을 오랫동안 지속해갈 수 없다. 승화되지 않은 분노는 ‘술만 먹게 할’ 뿐이다. 분노는 상대를 파괴하지만 자신도 피폐하게 만들며, 미래사회의 책임있는 주체로서 신뢰받기 어렵게 만든다. 폭력적 방식으로 비폭력사회를 만들 수 없듯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사회의 가치는 분노의 에너지만으로 구현될 수 없으며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운동으로 넓혀질 수도 없다. 분노하되 그에 휩쓸리지 않고 그것을 포월(包越)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로 승화시켜야 한다.
투쟁은 적을 명확히 규정하고 전선을 만든다. 적을 타도하기 위해 적개심을 고취하고 동시에 그것을 통해 내부의 결속을 다진다. 투쟁의 목표에 따라 규정된 적을 투쟁을 통한 물리력으로 제압하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얻어진 승리가 완벽한 승리일까? 상대의 저항의지까지 포기시키지 않으면 내가 약해지거나 상대가 강해질 경우 싸움은 다시 시작된다. 그렇게 해서 이번엔 내가 패배한다면 자신 또한 보복을 시도할 것이다. 이렇게 싸움은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이 분쟁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한 대안적인 투쟁방식은 무엇일까?
전략적 목표는 서로 다투는 이해보다 한층 높은 차원에서 설정되어야 한다. 이때 대안적 투쟁방식은 나와 적이 동일한 평면에서 겨루는 것이 아니라, 적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적을 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전략이론의 이상(理想)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에게 저항의지를 생성시키지 않아야 한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적을 규정하지 않는 것’이다. 적을 규정함으로써 자기 세력의 연대를 꾀해서도 안된다. 즉 새로운 대안운동은 전선을 만들지 않는 것이며, 투쟁보다 연대(여기서 연대란 흔히 생각하는 단체 간의 연대가 아니라 대립이나 투쟁의 반대개념을 의미한다)에 집중하는 것이며, 대립보다 일치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상대와의 투쟁에 전념하고 승부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를 확장하는 데 전념하는 것이다. 나아가 적을 구원(?)하겠다는 생각, 그들마저도 살리도록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승리는 연대의 부산물로 만들어야 한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냉혹한 자본의 논리다.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운동은 수단과 목표를 통일시키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목표뿐 아니라 수단도 정당해야 한다. 목표와 성과만을 좇는 운동은 속도에 집착하게 된다. 속도가 빨라지면 과정이 손상되며 상처받는 사람이 발생한다. 등산에서 정상에 올라가는 데 집착하는 사람은 산길에 나 있는 들풀의 아름다움을 볼 겨를이 없다. 서두르는 사람에게는 계곡과 산천의 아름다움을 즐길 틈이 없다.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정을 중요시하는 것이 긴 호흡의 운동을 전개하는 사람에게 필수적인 마음자세이다. 인내와 인고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운동적 삶이 자신에게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운동가와 운동적 삶의 문화
‘운동적 삶’을 산다고 전부 운동가라는 이름이 붙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모든 운동가가 ‘운동적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운동가는 아니지만 운동적 삶을 사는 사람을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십여년 전 만난 한 할아버지는 정년퇴임 후에 자신의 노후를 자식에게 의존하거나 경로당을 다니며 소일하지 않고, 1993년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부천의 아파트단지에서 쓰레기 분리수거를 시작했다. 처음 아파트 한개 동의 분리수거 체계를 완전히 자리잡게 하는 데 약 다섯달이 걸렸다. 이후 단지 전체를 다니며 반상회에 사람들을 모이게 해 분리수거의 중요성과 방법을 설명하고 손수 이곳저곳 청소를 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하시니까 젊은 주부들이 마지못해 동참했다가 나중에는 불과 2년 반만에 전체 단지를 분리수거가 완벽히 이루어지는 지역으로 만들어놓았다. 재활용쓰레기를 팔아서 올린 연간 2억원 정도의 수익은 아파트단지의 공공시설과 어린이시설을 짓는 데 사용하게 되었다. 속칭 운동가라고 부를 순 없을지 모르지만 이런 분이야말로 운동적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시민운동은 국가를 개혁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래서 감시하고 저항하면서도 대안적 정책을 제안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각 분야의 전문가로 이루어진 정책팀이 전면에서 활동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걸출한 학자가 두각을 드러냈다. 이들은 정권이 바뀔 때 등용되어 정계로, 관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때 몇몇 운동가는 시민단체가 그런 학자들에게 성취의 토대가 되었을 뿐 자신은 ‘뒤치다꺼리’만 한다는 자조 섞인 심경을 토로하곤 했다. 운동가는 대체로 신념이 강한 사람이다. 그래서 활동과정에서 의견조율이 쉽지 않고 나아가 감정적 갈등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시민단체 내부에서 ‘전두환이 미워서 일을 못하는 게 아니라 네가 미워서 일을 못하겠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온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활동의 주체라고 생각하면 곧 주변의 모든 사람이 내 일을 도와주는 은인이 된다. 누군가를 질시한다는 것은 그를 부러워한다는 것이고, 부러워하는 것은 곧 자신이 그렇게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현실정치에 필요한 사람은 그곳으로 가야 하고 실제로 거기서 잘할 사람은 보내는 것이 맞다. 그것은 좋은 일로, 시비할 필요가 없다. 내가 주체라면 아무리 애를 먹이는 동료 실무자라도 없는 편보다 낫고 그 또한 좋은 마음을 내서 일하는 고마운 사람인 것이다. 사람이 일을 만들지만 일이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일을 통해 서로 살리고 키워 출중한 활동가로 성장하도록 도와야 한다.
엄혹한 독재시대에는 질곡의 일점을 돌파하는 지사(志士)를 필요로 했다. 고뇌에 찬 남다른 결단으로 자신의 삶을 초개같이 던져 깃발 들고 앞서는 사람이 중요했다. 과거 많은 학생운동가들이 시위를 주도하다 제적을 당하고 감옥에 갔다. 이렇게 학교에서 ‘잘리는’ 것은 학생운동 문화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학벌이 공장취업에 방해가 된 이유도 있었지만, 대졸자로서 선택 가능한 기득권을 일절 꿈꾸지 않게 하여 현장과 운동에 몰입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다. 활동이 힘들고 어려울 때 학벌이라는 기득권은 선택의 집중을 흔들고 유혹하는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다른 결단과 제적, 투옥의 경험은 이후 보상의식을 갖게 하거나 또 하나의 선민의식과 훈장이 되어 자신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정적 효과를 낳기도 했다.
운동가라는 용어는 남다른 결의를 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자신이 남다른 삶을 산다는 선민의식이 강할수록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게 된다. 운동가는 다른 사람이 운동가라는 이름을 붙여줄지언정, 운동가라고 자처할 것은 아니다. 나아가 스스로 운동을 한다는 생각마저 갖지 않는 것이 좋다. 활동이 그저 자신의 생활이 되어야 하며 스스로의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활동을 하면서 행복하지 않으면 오래 일할 수 없다. 내가 행복해야 남도 이 일에 동참시킬 수 있다. 스스로도 애써 참고 견디는 일이라면 누가 함께하겠는가. ‘욕구와 당위의 통일’, 즉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일을 일치시킨다면 자발성이 극대화되어 자신에게 행복과 즐거움이 된다.
이제 운동가라 해서 과거처럼 제적이나 투옥을 당하는 시대가 아니다. 여전히 정치는 중요하지만 운동의 목표를 정치권력의 변혁만으로 삼아선 안된다. 거대담론에 익숙한 사람은 지역에서 이름없이 자원활동을 하거나 작은 사안에 대해 꾸준히 활동하는 일은 성에 차지 않아 한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십여년 전에는 텃밭을 가꾸고 마을을 만들며 동네의 문화를 일구는 일은 운동이라 여기지 않았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동이 정치적 변화만이 아니라 일상세계를 바꾸어가는 것이라고 본다면 회사원이나 주부라 할지라도 할 수 있는 운동이 많고 해야 할 일도 많다. 시대적으로 중심이 되는 이슈와 주변적 이슈는 나눌 수 있지만, 중심적인 일과 주변적인 일은 없다. 모든 것이 중앙이며 모두가 가장자리이다.
진보의 진화, 우리가 원하는 대안적 삶
서구 산업사회의 자유주의는 생산과 소비를 고도화하는 경제성장만으로 발전을 평가했고, 사회주의 또한 자본주의 노자(勞資) 간의 모순을 극복해야 더 많은 생산력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미국적 생활양식이나 북유럽 복지국가를 모델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두 체제는 결국 생산력주의, 즉 물질의 생산과 소비, 풍요를 지향하는 성장주의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자본주의가 주장해온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사회, 그리고 사회주의가 진보라고 생각해온 생산력주의 모두 지금의 위기를 초래한 지속 불가능한 발전 패러다임이다. 독일의 녹색당 이론가 루돌프 바로(Rudolf Bahro)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오늘날 지구적 위기와 인류의 절멸을 초래하게 만든 쌍둥이라고 비판했다. 지금의 위기 앞에서 사회주의를 포함해 과거의 발전·진보 패러다임은 더이상 위기를 해결할 충분한 내용이 되지 못한다. 더 큰 진보가 필요하다.
오늘날에도 좌우파를 막론하고 주류는 여전히 생산력주의자며 성장주의자다. 그들은 모두 ‘자원무한주의’를 신봉해왔다. 자원을 무한하다고 여기고 약탈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얻어진 물질의 풍요를 진보라고 생각해온 이들은 이 위기의 원인제공자다. 녹색주의나 생태주의, 생명평화 운동가들은 인권과 평등, 자유와 정의 등 기존 진보의 가치를 공유하며 함께 활동해왔지만, 이들이 기존의 진보주의자와 타협할 수 없어하는 대목이 바로 이 생산력주의이다. 녹색주의자는 기존의 진보와 생산력주의라는 대목에서 명확히 갈라선다. 그리고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시간관이나 직선적인 발전보다 순환적 사회를 지향한다. 또한 오늘날 민주주의가 동시대인들의 합의라는 현세대주의에도 반대한다. 미래세대와 생명까지 자연과 자원에 대한 결정권에 동참하는 방향으로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속 가능한 발전으로 이행해야 하는 절박성은 우리에게 발전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규정하길 강제한다. 이제 국민총생산(GNP)이나 국내총생산(GDP)을 중시한 생산 중심 사회가 아니라, 부탄의 국왕이 제안해서 OECD 국가를 중심으로 점점 주목받고 있는 국민총행복(GNH: Gross National Happiness) 같은 새로운 평가기준을 마련하는 일이 필요하다. 과거의 지향이 물질적인 풍요였다면 이제 지속 가능한 사회에서의 패러다임은 ‘자발적인 청빈, 주체적인 가난’을 지향하며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이다.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인권과 평등, 정의라는 근대적 가치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지속 가능한 사회를 지향하며 근대적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대안적 가치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시민사회운동의 사회적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고 정부에 맞서는 힘도 약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저항운동 중심의 단견이다. 오히려 대안운동으로서 귀농·귀촌운동, 생협운동, 지역운동, 마을운동, 공동체운동, 대안교육운동, 도시텃밭운동 등은 다른 형태로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이들 대안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스스로 운동가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쓰지도 않으며 실제로 그들의 삶을 보면 운동인지 생활인지의 구분도 그다지 의미가 없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위해서는 적개심과 분노라는 네거티브 에너지보다 행복, 비전, 가치, 희망이라는 포지티브 에너지가 주된 동력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대안과 희망을 조직하는 운동을 기조로 하면서 그 속에서 비판과 저항운동이 구사되어야 한다. 그래야 오래, 행복하게 활동할 수 있다. 그래야 나와 남, 사회를 동시에 구원(?)할 수 있다.
다시 강조하건대 중앙정치의 변화는 대단히 중요하다. 사회적 영향력도 클 뿐 아니라 변화가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중앙정치에 집중한 나머지 풀뿌리 공동체나 지역에 대한 관심은 소홀했다. 과거 노동현장에 모든 운동가가 앞다투어 들어갔던 시절이 있다. 현장은 중요하다. 현장에 기초하지 않으면 관념화되거나 추상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운동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변화의 근본이 되는 현장의 에너지가 중요하다. 과거 러시아의 젊은 지식인들이 농촌의 공동체 ‘미르’(mir)에 들어갔던 브나로드 운동처럼, 이제 지역정치가 현장이고 풀뿌리 공동체가 현장이라는 생각으로, 농(農)적 가치를 강화하는 현장운동의 균형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는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모토로 알려진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의 가치를 동시에 구현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