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대화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세월호를 넘어서는 청년들

 

 

김성환 金性桓

1983년생. 사회운동가. 사회혁신그룹 ‘더넥스트’(The Next) 디렉터.

 

박가분

1987년생. 고려대 경제학과 석사과정. 저서로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 『일베의 사상』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이 있음.

 

박주용 朴珠龍

1985년생. 창비 계간지출판부 편집자.

 

조세영 趙世英

1979년생.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 「자, 이제 댄스타임」 연출.

 

 

ⓒ 송곳

ⓒ 송곳

 

박주용(사회) 세월호참사가 벌어진 지 100일째 되는 날을 오늘 현재 사흘 앞두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 사회에 준 충격은 대단히 컸고, 여러 화두와 고민거리를 남겼습니다. 특히 고등학생들이 대규모로 희생되면서 추모의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우리의 기성체제가 얼마나 허술한지, 통제받는 젊은 세대에게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세월호 선내에서 들려온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의 허망함과 잔혹함에 대한 반발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구호가 새롭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꼭 세월호 때문이 아니더라도 실제로 요즘 청년 중에는 기성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을 상상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삶의 방식이 일정한 한계에 달했다는 방증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그러한 청년 가운데 세분을 모셔 말씀을 나눌까 합니다. 먼저, 김성환씨는 현재 청년운동단체 ‘더넥스트’ 디렉터로 활동 중인 시민운동가입니다. 박가분씨는 개인 블로그 ‘붉은서재’를 통해 문필활동을 시작한 이후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인간사랑 2010), 『일베의 사상』(오월의봄 2013),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자음과모음 2014) 등의 저서를 낸 바 있고 현재 대학원에 재학중입니다. 조세영씨는 10년 넘게 영화계에 종사하면서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2009), 「자, 이제 댄스타임」(2014) 등 주로 여성문제를 다룬 다큐를 발표한 영화감독입니다. 제가 더 자세히 소개할 것 없이 각자 현재의 활동내용과 함께 흔치 않은 길을 걷기로 한 배경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스펙, 방황, ‘덕질’의 젊은 날

 

金性桓 1983년생. 사회운동가. 사회혁신그룹 ‘더넥스트’(The Next) 디렉터.

金性桓

김성환 우선 제가 몸담은 더넥스트는 청년단체가 아니라 사회혁신그룹을 표방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청년세대라는 호칭에는 중요한 의미도 있지만 한편으로 약점도 있죠. 더넥스트가 20대 후반 30대 초의 청년 중심으로 활동하긴 하지만, 저희가 담고자 하는 내용은 청년의 세대담론이 아니라 이 사회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근본적으로 묻고 대안을 만들어가는 겁니다. 한마디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사람, 정책, 그리고 새로운 방법론을 준비하자는 목표로 활동하는 사회혁신그룹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원래 대학시절 취업 관련 활동에 몰두하면서 살았어요. 그래서 스펙도 상당히 다양해요.(웃음) 공모전에서 장관 대상도 받았고, 여러 기관에서 기자활동을 하거나, 자격증 따는 데도 열심이었죠. 그러다 우연찮게 한국청년연합(KYC)에서 주최하는 ‘체인지 리더’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어요. 20대가 나서서 사회를 바꿔보자는 취지로 토론하고 정책제안도 하는 프로그램인데, 우승하면 뉴욕에 인턴으로 보내준다기에 그것만 보고 지원했죠. 저는 시민단체가 뭔지도 몰랐고, 촛불집회 당시에도 거기 나갈 시간에 취업준비나 하라고 욕하면서 살았는데, 프로그램 첫째날 우석훈(禹晳熏) 박사 강의가 있었어요. 『88만원 세대』(레디앙 2007)가 막 뜨던 때였는데, 그날 하셨던 얘기가, 스펙 쌓고 취업 준비하는 학생들한테 짱돌 들고 바리케이드 치고 데모하라는 거였죠. 그 말을 듣고 ‘좀 이상한 집단 같다’ ‘빨갱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12일 일정 도중에 짐 싸서 도망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제 이야기를 들은 한 친구가 어차피 참가비 17만원이 환불 안되니 그냥 있다가 오라고, 그래도 어르신들인데 좋은 말씀 하시지 않겠느냐고 하는 바람에 남아 있었어요. 한달 동안 강의를 듣고 두달은 프로젝트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강의나 좀 듣다가 기회 되면 뉴욕에 한번 가보자는 나름의 욕망을 갖고 뛰어들었던 것이 지금까지 6년째 활동을 이어오게 됐네요. 기존에 취업을 위해 준비했던 스펙은 덕분에 다 물거품이 됐죠.(웃음)

 

朴珠龍 1985년생. 창비 계간지출판 부 편집자.

朴珠龍

박주용 6년간의 시민운동의 계기가 스펙을 위해 찾았던 강연이었다니 재미있는 사연이네요. 대다수의 청년이 취업에 몰두하는 요즘 같은 분위기에선 그런 개인적 경험이 활동하시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현재는 더넥스트의 디렉터로 계신데, 어떤 역할을 하시는 건가요?

 

김성환 저희가 더넥스트를 시작할 때의 고민 중 하나가 어떻게 하면 참여자들이 대표성을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였어요. 보통 이런 조직은 대표와 사무국, 운영위원으로 구성되는 구조를 갖고 있잖아요. 운영위원들은 회의에 참석해서 사무국에서 어느정도 정리한 안에 가부만 결정하는 게 일반적이에요. 그러다보니 엄밀한 의미의 시민참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해서, 따로 대표를 두지 않고 운영위원들이 대표성을 획득하는 동시에 실제로 활동을 이어가는 구조를 만들자고 결정했어요. 그 속에서 디렉터는 기능적 차원에서 실무를 지원하는 역할이에요. 운영위원들이 실제 자기가 원하는 미션을 사회 속에서 실현해가는 과정을 돕는 정도죠. 단체를 대표하는 직함이라기보다는 이들의 선한 욕망을 연결하고, 협업을 이끌어내는 매개자 역할로 보시면 됩니다.

 

趙世英 1979년생.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버라이어티 생존토크 쇼」 「자, 이제 댄스타임」 연출

趙世英

조세영 저는 스펙 같은 데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학교를 잘 안 나가서 학업도 엉망이었고 문제의식도 없이 살았어요. 저는 이른바 ‘MTV 세대’인데, MTV에서 나오는 뮤직비디오 보는 거 좋아하고 그러다가 대학에 가선 영화동아리 활동을 하게 됐어요. 거의 동아리방에서 잠만 잤죠. 그러다가 4학년이 되고 졸업을 앞둘 무렵, 직장은 나와는 안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단한 고민을 한 건 아니고, 취업한 선배들이 정장을 입고 다니는데 그런 옷을 입고 다닐 자신이 없더라고요.(웃음) 그 와중에 다큐멘터리 제작하는 학교 선배가 조연출을 구하는데 제가 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시작했어요.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구로구청에서 벌어진 부정투표 사건을 다룬 작품이었어요. 제가 2001년부터 참여했는데, 사실 그때 독립다큐멘터리계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학을 뗐어요. 독립다큐멘터리가 80년대부터 액티비즘(정치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실천의식으로서의 영화운동)과 함께 성장을 했단 말이에요. 요즘엔 많이 다변화하긴 했지만 당시에는 그런 색깔이 굉장히 강했기 때문에 들어가서 너무 놀란 거예요. 다들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술 많이 먹는데 술자리 얘기는 왜 그렇게 재미가 없는지.(웃음) 그래서 여기 있으면 나도 이렇게 되는 건가, 이건 아닌 것 같아 하던 차에 마침 재정문제 때문에 작업이 엎어져서 차라리 잘됐다며 나왔죠. 그러고는 충무로 편집실에 입사했어요. 1년 남짓 다녔는데 그때 영화판의 도제식 시스템을 경험했어요. 당시에는 그게 비인간적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다시 그만두고 나와 방황했는데, 보증금 100만원이 없어서 헤매고 있을 때 마침 같이 작업했던 다큐 감독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테니까 오겠느냐는 연락을 받고 갔던 것이 지금까지 쭉 오게 된 거죠. 그 이후에 「쇼킹패밀리」라는 작품을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경순 감독과 같이 작업했는데, 여성과 관련된 얘기가 많다보니 여성단체나 그쪽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고 여성문제에 대한 고민도 생겼죠.

 

박주용 최근에 개봉한 「자, 이제 댄스타임」은 낙태 문제를 실제 당사자와 인터뷰하면서 다루는 작품인데요. 이전 작품인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도 성폭력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그럼 다큐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턴가요? 보통 페미니스트라면 이론을 먼저 접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조세영 어쩌면 제가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는 건 이른바 운동권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학교 다닐 때는 운동권이나 페미니스트에 썩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 이야기가 딴세상 말처럼 들리기도 했어요. 그런데 다큐 작업하면서, 또 스스로 살아가면서 깨우쳤다고 할까요. 누군가 힘들어하는 걸 보면 ‘이 사람이 왜 힘들어야 되지?’ 하는 고민이 드는 거예요.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세상을 보는 프레임이 생긴 건데, 저는 그게 누군가 여성이기 때문에 겪고 있는 문제들로 보이면서 시작된 거죠.

 

박주용 「자, 이제 댄스타임」을 보면서 인터뷰이 한명 한명의 이야기를 통해 낙태 문제 전반을 보는 감수성을 생생하게 제시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누군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지점에서 출발했다는 말씀을 들으니 좀더 잘 이해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박가분씨가 말씀해주시죠.

 

박 가 분 1987년생. 고려대 경제학과 석사과정. 저서로 『부르주아 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 『일베 의 사상』 『가라타니 고진이라 는 고유명』이 있음.

박 가 분

박가분 저는 사실 글을 쓰게 된 극적인 계기는 없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사회사상이나 철학에 관심이 있어서 혼자 ‘덕질’(일본어 ‘오따꾸’와 행위를 뜻하는 접미사 ‘질’의 합성어편집자) 한다는 느낌으로 블로그를 운영해왔어요.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08년에 군대에 갔는데 그때도 어찌된 영문인지 보안점검 같은 것에 걸리지 않고 계속 블로그에 글을 쓸 수 있었어요. 계속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날 고맙게도 제의가 와서 단행본을 출간하게 됐어요. 첫 책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는 단일한 주제 없이 페미니즘, 정치철학, 경제학 등 이것저것 제가 보고 느낀 의문점 위주로 쓴 글을 묶은 겁니다. 제목은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 담론에 나름의 불만을 가지고 지었어요. 인문정신의 위기나 성찰의 부재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말들이 공허하게 느껴졌어요. 저도 이른바 88만원세대에 속하잖아요. 인문학에 관심 갖고 책을 쓴다는 것도 이후에 이쪽으로 커리어를 쌓아야겠다는 것보다는 정말 좋아서 취미생활에 가깝게 한 건데, 그런 자의식 한편으로, 인문학도로서 경제적 문제라든가 밥벌이 같은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 ‘인문학 담론’에 대한 반감이 동시에 있었어요.

말씀 들어보니까 두분 다 영역이 명확한데 저는 중구난방이에요. 제대한 이후로는 사회운동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어요. 대부분 처음에는 운동권을 경계시하는데, 저는 사실 고등학교 때 68혁명 같은 사건을 책에서 접하고 동경했기 때문에 대학 가면 당연히 짱돌 던지고 바리케이드 치고 화염병 던지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까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2006년에 ‘고려대 출교사태’가 있었어요. 학생들이 학내 문제로 본관을 점거했는데 교수들을 감금했다는 명목으로 재입학도 불가한 출교조치가 떨어졌어요. 소송 끝에 결국 학교가 졌지만요. 저도 현장에 있었던 ‘패륜아’ 중 한명이었는데, 저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현장에 없던 사람도 감금을 모의했다고 출교를 당했어요. 사실은 교수 감금이나 본관 점거가 문제가 아니라 원래부터 학생운동에 열심이던 사람들을 골라서 7, 8명을 출교시켰어요. 인터넷에서 그 학생들을 엄청나게 욕하는 반응을 보면서 상처를 많이 입었죠.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는데 점점 악다구니 비슷하게 된 것 같아요. 군대의 인트라넷 커뮤니티에서 만난 친구들과 제대 후에 같이 살며 공부하고 운동도 하자는 시도도 했는데 지지부진해졌고, 학내에서 자치 생활도서관을 운영하면서 강연회나 진보적인 인사 인터뷰 등을 하기도 했어요. 진보신당 청년학생위원회 활동을 한동안 열심히 하다가 또 마음에 안 들어 그만두기도 했고요. 무언가를 시작했다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그만두는 식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좋은 태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정당활동을 할 때는 계속 경계에 서 있는 느낌이었어요. 인터넷 등에서 떠도는 운동권에 대한 반감, 혐오 같은 것들이 2006년에는 제게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갈수록 그게 이해가 되는 거예요. 진보나 좌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양면성, 이중성에 환멸을 많이 느꼈고, 그렇게 운동을 그만두면서 쓴 책이 『일베의 사상』입니다. 주된 논지는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가 촛불시위의 쌍생아고, 촛불시위가 한계에 봉착해 더이상 무언가를 바꾸는 기제가 될 수 없게 되면서 거기에 이념 없는 카니발만 남게 되었고, 그게 바로 일베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활동 중에 까딱하면 저 역시 저렇게 될 수 있겠다는 위기의식이 있었어요. 그래서 운동을 그만두고 두문분출할 때 이 책을 썼습니다. 여담이지만, 책을 출간하고 나서 일베로부터의 테러를 걱정해주신 분들이 많았는데요. 기대(?)했던 만큼의 반응은 없었고 다만 출판사 블로그에 몰려와서 저에 대해 ‘하프(half) 홍어’라고 놀리더라고요. 이유를 알아보니 책날개에 부모님이 각각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이라는 점을 소개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웃음)

 

 

세월호가 한국사회에 던진 메시지

 

박주용 요약을 해보자면 스펙, 방황, 그리고 ‘덕질’이 세분 각자가 활동을 시작한 중요한 계기군요.(웃음) 처음부터 이런 인생을 살 계획을 하지는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고, 맥락은 서로 다르지만 운동권이나 진보진영에 대한 반감 또는 실망도 공통적으로 언급하셨습니다. 아직 다들 젊은 나이니 당연하겠지만 여전히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고 바꿔나가는 과정에 있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가장 먼저 세월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전국적인 추모 분위기 속에서 6·4지방선거가 치러졌고, 최근에는 ‘세월호특별법’ 입법이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여당 일각에서는 안전사고 중에 발생한 사고를 왜 국가가 책임져야 하느냐는 반응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청해진해운 실소유주라고 하는 유병언(兪炳彦)과 그 일가를 잡기 위해 온 수사인력을 동원했고 언론의 초점도 온통 거기에 맞춰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도 숨지기 직전 학생들이 남긴 동영상이 광화문 한복판에서 재생되고 있는데요. 세월호사건이 세분에게 준 메시지는 무엇인지, 우리 사회가 세월호를 대하는 방식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조세영 감독께 먼저 말씀 부탁드리죠.

 

조세영 저는 TV를 안 봐요. 인터넷 포털 메인뉴스 같은 것도 사실 다 안 봅니다. 특히나 큰 이슈가 되는 것들에는 부러 귀를 닫으려는 면이 있어요. 뉴스를 보다보면 너무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져서, 그리고 사람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커져서요. 무슨 일이 있었다고 보도하고 그것에 대해서 떠들고 그다음 뉴스로 넘어가고, 또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넘어가고. 분노 아니면 슬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아예 그런 걸 보지 않는 나를 발견했어요. 세월호에 대해서도 어느정도는 알고 있는데, 진상을 규명한다면서 깊이 들어가는 얘기에는 의도적으로 닫았어요. 최근에 하는 생각인데, 뭔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느꼈을 때 그에 대한 분노는 긍정적인 것이라고 봐요.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이 있는 건 좋은 일이죠. 뭔가 함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들고요. 그런데 분노감에도 단계가 있다면, 1단계로 불의에 대해 분노한다, 그리고 2단계는 그 분노가 어딘가를 향한다가 될 텐데, 그 과정이 어느 순간 특정한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결론짓는 패턴을 보이는 거예요. 문제를 공감하는데 그래서 막상 내 것으로 가져오면 복잡해지니까 그러는 거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유병언 일가를 향한 분노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지금 제가 여기에 관심을 가지면 또 그냥 휩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쩌면 몇년 뒤에 찾아볼 수는 있겠지만요.

얼마 전에 우연히 안산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 지역에 급격하게 경찰의 순찰이 늘었다는 거예요. 이게 우리 사회의 대처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 위치에서 잘 기억해두고 있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기억을 한다면 기억하고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기억은 기억을 토대로 다음을 만들어내는 거죠. ‘잊지 않을게’라고 하는데, 저는 자기 위치에서 정말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박가분 저도 반응이 비슷했어요. 사건발생 속보를 처음 보고 나서 일부러 일주일 동안 아예 뉴스를 안 봤거든요. 저는 주로 포털 순위권 뉴스를 찾아보는데 이번엔 그조차 하지 않았어요. 두려웠어요. 저 역시 분명히 화가 날 거라고 예상되는데 거기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제가 아니게 돼버리는 느낌이 두려웠던 건데, 2008년 촛불시위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운동이라는 건 결국 사람들의 분노를 승화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분노가 승화되지 않고 그대로 방출되거나, 기대를 끓어오르게 하다가 급격하게 실망을 안길 때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튈지 두려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베라는 괴물이 태어났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무튼 그러다가 ‘가만히 있으라’ 침묵시위가 시작된 뒤에야 관심있게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그 장면을 보고서 바뀐 생각은 세월호사건에 대한 움직임이 지난번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현상의 연장선상일 수 있겠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안녕들 하십니까’를 보면서 2008년 촛불시위와 달라진 문법을 느꼈거든요. 대중이 무의식적으로나마 특정인에게 비난을 전가하는 방식으로는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 깨달았다고 봤어요. 물론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에 대한 비난도 있었지만 문제의 본질은 철도민영화였고 동시에 사람들이 자기 이름과 얼굴을 걸고 벽보를 쓰는 것 자체가 촛불시위에 참여하는 것과는 달랐다고 봅니다.

저는 촛불시위의 상징이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 디스토피아 사회를 배경으로 신분을 숨기고 전체주의정권에 대항하는 반체제 운동가를 다룬 영국의 그래픽노블. 동명의 각색영화가 2006년 개봉돼 화제를 모음편집자)의 주인공이 쓴 가면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모두지만 그 누구도 아니다’라는 거죠. 철저하게 익명성 속에 녹아들어가서 해방감을 느꼈던 건데, 반면에 벽보를 써서 주변 또래집단으로부터 지지를 구하는 것은 이와 다른 것이고, 그만큼 중요한 경험이에요. 그 분위기가 ‘가만히 있으라’ 시위에서도 이어진 것이고요. 언론에서 유병언 일가를 선정적으로 많이 보도했지만 사람들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직감했다는 거죠. 우리나라 시스템 전체가 구조적으로 부패해 있다는 게 폭로된 사건이고, 단순히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어느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지금 특별법으로 이어져온 건데, 처음에 제안된 특별법의 주요 내용은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자체적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지고 조사하겠다는 거였죠. 그것 역시 예전보다 대중의 움직임이 좀더 성숙했음을 보여준다고 느꼈어요. 누군가를 향해 책임지라고 외쳤지만 정치인의 사퇴나 탄핵 이상으로 요구가 나아가지 못했던 촛불시위와는 달리, 특별법에서 볼 수 있는 건 진상조사와 문제해결에 관한 구체적인 대안 제시입니다. 지금의 의회정치나 사법시스템 안에서는 문제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걸 유가족과 시민들이 느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하고요. 그런 면에서도 저는 특별법을 관철시키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단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바꾸고, 법에 호소를 하는 것 이상의, 그와는 전혀 다른 방법이 있음을 사람들한테 보여주는 게 이 흐름을 이어나가는 관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세영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경순 연출, 2003)라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2000.10.17~2004.6.30)를 다룬 다큐가 있어요. 거기서 재미있었던 게, 그렇게 염원하던 위원회가 꾸려졌는데 거기 조사관들이 늘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는 거예요. 당국에 자료든 뭐든 요청하면 안된다고 하고, 수사권도 없고 하는 등등 때문에요. 전두환을 불러내려고 집 앞까지 찾아갔는데도 안돼요. 위원회가 왜 꾸려졌는지 모르겠다고 절망해요. 이번에 세월호특별법 관련 기사를 보다가 갑자기 그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불안해지더라고요. 만약 유가족이 원하는 방식으로 세월호특별법이 통과돼서 위원회가 꾸려진다 하더라도 또다른 장벽이 가로막지는 않을까 해서요. 그 당시는 김대중정부였는데도 그랬는데, 지금은 더하지 않을까요.

 

박가분 운동은 단순히 대중의 분노를 동원해 ‘누가 개새끼다’ 하고 외치는 걸 넘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권력을 요구하도록 하고, 또 그래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제껏 진보나 좌파라고 불렸던 사람들이 그 역할을 못했다고 보고요. 세월호특별법의 문제의식은, 온전한 시민권력을 요구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당사자들이 권한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방향으로 첫걸음을 뗀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그만큼 특별법 문제를 이슈화하고 여론을 설득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박주용 시민이 주체가 되어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박가분씨의 말씀은 참여자가 결정권한을 갖는 더넥스트의 지향과도 연결되네요. 김성환씨가 이 문제를 포함해 세월호에 대해서 말씀해주신다면요?

 

김성환 세월호 이슈는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라는 큰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세월호를 기점으로 다들 다른 패러다임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지만 저는 그게 정확히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지금 사람들이 말하려는 패러다임이 과거처럼 누군가의 이론적 개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다시 말해 선언적 개념이 아닌 거죠. 삶 속에서 구체적인 변화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월호의 메시지가 되어야 해요. 더이상 말로 떠드는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희망을 못 주지 않나요? 정치학자 박명림(朴明林) 교수는 지금 시대가 최소한 이것 정도는 지켜야 한다는 ‘공준(公準)’이 없는 사회라고 했는데요. 이런 사회에서 도대체 지금 사회의 나침반, 나아갈 방향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갈등하는 저를 발견하게 돼요. 취업준비에 열심이었던 제가 이런 활동을 하면서도 오늘 이 시간까지 갈등하는 모습이 바로 세월호가 던지는 질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승자독식 세계에서 한쪽에선 친구를 밟아야만 취업할 수 있는 ‘의자게임’을 하며 살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공존과 공동체와 협동조합과 마을만들기를 얘기하고 있어요. 그런 갈등과 괴리는 우리 사회 누구에게나 있죠. 가만히 있으면 안되는 상황인데도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 때문에 갈등하는 아이들이 있고, 자녀들이 하루 종일 학교, 학원, 독서실을 전전하다 집에 돌아와선 잠깐 잠만 자고 다시 학교에 가는 걸 보면서 ‘저렇게 살면 안되지’ 하면서도 보낼 수밖에 없는 부모의 갈등이 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공통된 기준과 방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계속되는 갈등 속에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게 한국사회의 현주소라고 생각해요. 80년대와 90년대엔 시대담론이 분명했다면, 지금 시대의 담론과 사회적 비전도 좀더 명확해질 필요가 있겠다는 거죠. 그런 나침반 없는 상황에서는 대처할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끊임없이 위험을 만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위험이 다시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키는 게 지금 우리가 겪는 악순환이에요. 어떻게 하면 공통된 시민적 삶의 기준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낼 수 있는가가 저의 주된 고민이기도 합니다.

 

박주용 새로운 패러다임이 부재한 형편에서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느슨한 합의조차 없다는 점을 지적하셨는데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활동가들이 담론적 차원에서 이른바 ‘비전’을 제시함과 함께, 운동하는 삶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 중요할 듯합니다. 그런데 현 상황을 부재와 공백으로 진단하는 것이 적절할까요? 가치있는 삶과 생활인으로서의 필요 사이에서 흔히 느끼는 갈등을 얘기하셨는데, 그렇다면 혹시 문제는 너무 많은 화살표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서로 다른 방향의 가치들이 각기 중요하다는 식으로 주장되고 그 사이에서 질서나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그런 것을 부재라고 얘기해도 될지요.

 

김성환 저는 대안이 부재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더넥스트 활동의 키워드를 정책, 사람, 방법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정책, 즉 ‘what’의 문제는 어느정도 이야기가 돼 있는데 그걸 실현할 사람과 방법이 없는 거예요. 세월호특별법이라는 대안이 제시돼도 실현 주체가 없는 거죠. 더 좋은 교육은 무엇인지, 더 좋은 대학이 어떤 모습인지 많이들 알고 있지만 실현할 방법이 안 보이기도 하고요. 이런 비대칭적인 상황, 불균형적인 상황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물론 제가 말하는 주체는 특정한 정치세력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조세영 패러다임 이야기가 나와서 한마디 보태자면, 홍대 앞 식당 ‘두리반’ 철거 반대투쟁을 다룬 「51+」(정용택 연출, 2013)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어요. 여기 보면 투쟁에 젊은 뮤지션이 많이 참여했는데 그중 대부분은 ‘운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가난해서 연습공간을 갖지 못하던 차에 철거를 막는 차원을 겸해서 그곳에 ‘거주’를 시작한 거죠. 그래서 먹고 놀면서 음악을 맘껏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이 됐어요. 투철한 사명의식을 갖고 참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랫동안 식당주인 부부와도 큰 마찰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고요. 결국 정당한 합의를 이뤄냈죠. 그게 제가 최근 본 투쟁방식 중 가장 신선한 것이었어요. 이 친구들은 낮이고 밤이고 여기서 놀고먹고 연습하고 떠들고 공연하고 회의하면서 살아요. 그래서 용역업체 직원이나 경찰이 오더라도, 늘 누군가가 상주하는 생활공간으로 인식되는 거죠. 그런데 투쟁이 목표했던 합의가 이뤄지고 건물이 철거된 순간 그들의 공간도 같이 사라져버린 거예요. 그래서 역시나 재개발 갈등을 겪고 있는 종로의 커피점 ‘마리’에 갔는데 홍대지역의 특수성과는 달라서 어울릴 수 없었고요. 이런 사례를 보면 청년이 주체가 되는 데 있어서 패러다임의 유무보다 더 중요한 건 각각의 상황이 갖는 특수성에 기반한 운동방식이 아닐까 해요.

 

김성환 요즘 청년들 사이에서는 운동권이 인기가 별로 없지만 그런 청년들에 대해서도 행동하지 않는, 개념 없는 놈들이라는 시선이 많잖아요. 저희는 청년들을 움직이게 하는 데 선거라는 공간이 유효하다고 봤어요. 2010년 지방선거 때, 평상시에는 취업준비 하던 사람들이라도 선거기간을 맞아 확 몰아가서 투표율을 올리고, 그럼으로써 획득한 정치적 결과물로 삶의 질을 변화시키자는 거였죠. 저희가 20대 청년 중에는 거의 처음으로 유권자운동이라는 걸 했고 ‘커피 파티’(시민들의 소규모 정책토론), ‘타운홀 미팅’(유권자와 정치인의 정책 대화)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두가지 생각을 얻었습니다. 첫째는, 그렇게 투표율이 올라가도 20대의 삶은 변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정치적 권력의 획득이 아니었다는 거죠. 정치 마케팅에 가까웠다는 게 지금 생각이에요. 물론 몇가지 성과들이 있긴 하지만 생각보다 굉장히 초라했어요. 2012년 총선 때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에서 청년비례대표를 할당했죠. 그런데 그 과정이 취업면접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취업전형 치르듯이 면접 봐서 권력을 획득하는 셈이지요. 그러다보니 청년을 대변하지 못하고 기성 정치인과 별반 차이가 없게 되는 겁니다. 둘째는, 청년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벌이는 이벤트로 주목받는 것과 별개로 사회 변화를 책임질 주체로서 내가 얼마나 바로 서 있는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됐어요. 청년의 패기와 열정은 높이 사지만, 실제로 우리가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청년들이 그 시대의 패러다임을 실현할 주체로 서기 위한 근육을 키우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어요. 그랬을 때 그 과정을 살아낸 집단이나 세대가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그렇게 얻어진 패러다임이 자연스럽게 시대를 변화시키는 흐름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합니다.

 

 

무엇이 버려야 할 적폐이고 이어받을 유산인가

 

박주용 세월호참사 이후에 박근혜 대통령이 담화를 통해 ‘적폐(積弊)’를 일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국가개조’도 불사하겠다고 천명했는데, 한동안 회자되더니 이제는 그마저도 사그라진 느낌입니다. 그 과정에서도 그럼 무엇이 적폐냐 하는 얘기는 잘 나오지 않았던 것 같고요. 자세한 이야기를 일부러 피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청년으로서 세분은 우리 사회의 적폐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우리가 지금은 청년이라고 불리지만 앞으로는 기성세대로 성장하게 될 텐데 그렇다면 현 시대에서 우리가 물려받아야 할 것 또는 청산해야 할 것이 무엇일지, 각자 활동과 관련해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박가분 저는 대통령이 적폐 이야기를 했을 때 의아했습니다. 대통령이 타겟팅한 것은 관민유착이라든가 부패라든가 낙하산 인사라든가 하는 것들인데, 사실 제 아버지가 관료시거든요. 관료사회의 적폐가 제게는 간접체험으로나마 익숙해서 그런지 제가 느낀 한가지는 새삼스러움이었어요. 예전부터 있던 문제고 본인이 뚝딱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 왜 저런 말을 하는가 싶었죠. 적폐라고 하기도 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예를 들어 어쩌면 유병언 일가가 누군가에게 뒷돈을 건넸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관민유착이 이루어지는데 저는 오히려 그게 이해할 만하다는 입장이거든요. 은퇴하면 노후자금도 필요하고, 자식들 결혼도 시켜야 하고, 이렇게 집값도 높은 나라에서…… 부패를 부추길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라고 생각해요. 대통령의 프레임에 말려들 필요가 없는 거죠. 뭐가 적폐인지는 다들 알고 있지 않나요?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의지가 기존의 사회시스템에 없다는 데 사람들이 절망과 냉소, 환멸을 느끼는 현실입니다. 세월호사건이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적폐에 관해서라면, 특별법 논의에서도 이야기가 나왔지만, 사람들이 원한 것은 정말 성역 없는 조사지 않습니까. 사실 이건 유가족대책위에서 내놓은 안이잖아요. 그야말로 자생적인 필요에 의해서, 당사자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게 자연스러웠죠. 뭔가 더 고민하고 더 똑똑해서 그런 법안을 내놓은 게 아니라. 그런 맥락에서, 앞서도 말했지만 단지 대중의 분노를 동원해 누가 나쁜 놈이고 뭐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만 하는 것을 넘어서야 해요. 왜 우리가 권력을 가져야 하고 그 권력으로 뭘 할지를 명확히하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사상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지점이 ‘세월호의 사상’이고, 거기서 우리의 유산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봅니다.

권력의 문제를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안녕들 하십니까’ 때 그 열풍이 지나자 사람들은 거짓말처럼 일상으로 돌아갔죠. 마찬가지로 세월호사건도, 특별법이라는 새로운 국면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처음만큼의 폭발력은 없어요. 물론 그것 자체가 절망할 일은 아닙니다. 대중이 일상으로 돌아가는 건 지극히 당연하고 그래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사회를 바꾸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소수였어요. 결국에는 대중이 일상에 치이면서 하지 못했던 고민을, 이게 적당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남들이 방기했던 만큼의 고민을 떠맡아서 하는 자리가 저는 운동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요새는 ‘전위’라는 말에 많이들 거부감을 느끼지만, 저는 어느 시대나 그게 필요하다는 입장이에요. 아무리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소통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거기서 항상 권력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아요. 소수의 활동가가 운동을 이끌어나가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시민들이 권력을 잡게 할 수 있을까. 전위, 후위 이런 구분은 여전히 유효하고 오히려 그런 자각 아래에서 민주주의나 소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김성환 저는 활동가의 성격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시민사회가 전반적으로 고민이 커요. 젊은 활동가들은 들어오지 않고. ‘시민 없는 시민사회’라는 말이 90년대부터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요. 2008년 촛불집회 이후 시민사회가 달라져야 한다는 자기반성도 있었습니다. 과거의 권력감시형 시민운동 방식을 넘어서 어떻게 하면 시민들과 함께 공동의 미래를 구상할 것인가가 지금 필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활동가는 시민을 주체로 세워 스스로 비전을 구상하게 하고, 그것을 다시 폭넓게 재조직화하는 일종의 코디네이터나 촉매제, 촉진제와 같은 역할로 전환되어야 해요. 그리고 한편으로, 앞서도 말했지만 정치권력을 획득한다고 해서 실제로 무엇이 달라질까가 지금도 저는 물음표거든요. 예를 들어 486세대, 시민사회 출신 국회의원이 상당수 등장했지만, 여전히 정치는 시민과 괴리되어 있는 게 현실입니다. 제 경험과 관련해 이야기한다면, 6·4지방선거 때 ‘넥스트 서울’이라고, 박원순(朴元淳) 후보를 지지하는 활동을 했어요. 100여명의 청년·대학생이 서울의 미래를 위해서 뛴 거죠. 결국 박원순 시장이 당선됐는데, 그러면 그 이후에 어떻게 할 거냐 하는 문제가 있는 겁니다. 당선 이후로도 시민의 정치적 제안이 실현되는 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시민들이 투표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정치를 압박하고 운동으로 풀어내겠다는 고민을 일상적으로 하지 않으면, 대통령도 여당도 야당도 시민의 말을 듣지 않는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는 거죠. 요컨대 시민참여형 활동이 폭넓게 재조직화되는 과정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겁니다. 정치권력을 감시하는 것을 넘어서 시민이 맘껏 떠들고 꿈꾸는 과정에서 비전과 대안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더이상 소수의 전문가, 국회의원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없는 상황이에요. 현재 정치권력의 비대칭적인 구조를 다시 어떻게 시민 중심으로 돌려놓을 것인가 하는 과제는 결국 시민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활동가의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 중심의 활동가에서 시민들의 열정에 불을 지필 수 있는 활동가로 말이죠.

 

조세영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적폐’에 관해 얘기하자면, 사실 많은 사회적 문제가 그렇지만 여성문제 역시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로 여겨져요. 장애인, 노인, 성소수자 등 어떤 문제의 당사자로 지목되는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자기 문제로 인식할 때 해결의 실마리를 잡아갈 여지가 더 생기는 거잖아요. 세월호사건이 모든 국민에게 접속되는 지점을 갖듯이, 사실 모든 사회문제는 개개인에게 접속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반면 그런 면에서 볼 때, 여성문제는 단순히 인구의 절반이 여자라는 것만 생각하더라도 이상하게 주변화되는 면이 있어요. 심지어 당사자라고 대변되는 사람들조차 덮어두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박주용 우리 세대는 상대적으로 과거세대로부터 무언가를 받았다는 의식이 희박하지 않나 싶습니다. 예전 사람들이라고 해봤자 대개 이삼십년 차이나는 정도인데도 이들과 큰 괴리를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김성환씨가 이야기한 새로운 리더십도 이전 세대의 성취에 기반을 둔 것일 테고, 사회운동만 해도 강력한 조직과 선도적 투쟁이 필요한 시기도 분명 있었죠. 말하자면 적폐를 논함과 더불어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발전시켜가야 할 ‘유산(遺産)’이라는 측면도 함께 이야기되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와 관련해서, 이건 출판사에서 일하는 제 직업적인 관심사이기도 한데, 요즘 청년세대가 어떤 매체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 특히 세분처럼 자기 영역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어디에서 자양분을 얻는지 궁금해요. 그게 사회관계망서비스(SNS)든 뭐든, 지배적인 매체 없이 개인의 편차가 크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김성환 저는 자유분방하게 놀고 사람들과 관계 맺길 좋아해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SNS를 많이 활용하고요. 그런 한편으로 철학책을 많이 보는 편이에요. 지젝(S. Žižek)이라든지 바우만(Z. Bauman)이라든지. 사회학 저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것들이 활동과 많이 연결되거든요. 오늘 초대해주신 『창작과비평』도 한번씩 읽어보는 편인데, 제가 이런 얘기를 왜 하느냐면, 하워드 진(Howard Zinn)이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궁리 2008)에서 자기는 운동과 현장과 이론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성장해왔다는 식의 말을 했어요. 그 부분이 저에게 많이 다가왔거든요. 그런 점에서도 여전히 저는 텍스트가 중요한 자양분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 자양분이 SNS를 통해서 어떻게 퍼지고 수용되어야 할지의 문제도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박가분 저는 대학에서 생활도서관 일을 할 때 말씀하신 유산의 중요성을 실감했어요. 그게 원래는 교수식당으로 설계된 곳이었는데 1990년도쯤에 학생들이 무단점거 해서 만들어진 공간이거든요. 80년대 금서(禁書)조치로 창고에 쌓여 있던 책들을 학생들이 교수식당 건설부지에 인간띠를 두른 채 쌓아뒀어요. 그렇게 해서 생활도서관이 만들어졌죠. 지금은 그런 방식이 더이상 통하지 않고, 운동권도 과거의 과격한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지만, 저한테 있어서 유산이라고 한다면 그런 게 먼저 다가옵니다. 지금은 실행할 수 없는 방식이라도 어쨌든 우리에게 그런 공간을 남겨놓은 거잖아요. 제가 이번에 대학원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이 됐는데, 학생회라는 기구도 사실 그런 운동을 통해서 만들어진 공간이고요. 그런 유산을 어떻게 갱신하는가가 그때그때의 세대에 주어진 역할인 것 같아요.

사실 요즘 사람들이 책을 잘 안 읽잖아요. 한편으로는 이해할 만한 게, 과거에 책이 했던 역할을 영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영상매체가 충분히 잘할 수 있으니까요. 심지어 웹툰도 그렇고. 다만 글에 고유의 역할이 있다고 한다면 비평이 아닌가 생각해요. 비평은 가장 자기반영적인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외부의 어떤 대상을 언급하는 걸 넘어서 자신의 언급에 대해 재언급하면서 인식을 심화시키는 건데 그걸 가능하게 하는 매체로 활자매체만한 것도 없고요. 다만 젊은 사람들이 소설보다 웹툰을 더 많이 보는 현실은 엄연히 존재하지요. 그래서 두가지가 결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창작과비평』 같은 잡지도 우리 사회의 유산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령 문학에서 논의되는 리얼리즘을 문학에만 적용하지 않고 웹툰을 대상으로 그런 담론을 확장시키면 사람들이 더 많이 읽지 않을까 싶어요. 최근에 최규석(崔圭碩)의 「송곳」이라는 웹툰을 재미있게 봤는데요, 주제가 묵직한데도 사람들이 많이 보는 이유는 결국 재미있어서라고 생각하거든요. 영화든 잡지든 여러 매체들이 위기를 겪고 있는데, 물론 사회구조가 문제이긴 하지만 실력을 새롭게 기르는 것도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아요. 일단 시대상이 원하는 주제를 발굴하고, 무엇보다 재미를 갖춰야 해요. 꼭 말초적인 재미뿐 아니라, 사람들이 분명히 ‘깊은 재미’를 원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송곳」만 해도 ‘의외로’ 네티즌 평점이 굉장히 높아요.

 

조세영 던지신 질문에는 조금 다른 답이 될 수도 있지만, 저는 다큐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매체 자체에 대한 고민이 많아요. 나와 영화, 영화 안에서도 어떤 매체, 그리고 그 속에서의 관계들…… 얼마 전에도 누가 독립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다면서 독립영화의 정의부터 꺼내는데, 1997년에 씌어진 어느 글에 나온 내용을 열심히 말하는 거예요. 솔직히 화들짝 놀랐어요. 제 주변의 다들 우리 시대에 독립영화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얼마나 얘기가 안되고 있으면 15년여 전에 정리된 것을 지금까지 꺼내서 얘기하는지 참…… 저는 이 시대의 흐름 안에서 ‘나’와 영화라는 것, 그리고 ‘관계’를 같이 읽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제게는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되는 과정이 영화제작이에요. 이번 작품 「자, 이제 댄스타임」은 제가 극장개봉에까지 참여했거든요. 이 영화에는 실제 낙태를 경험한 이들의 얼굴이 다 노출됩니다. 그랬을 때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지가 아주 중요하죠. 그러면 나는 이 매체의 속성을 잘 이해해야 하는 거예요.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데, 이 매체가 어떤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이다…… 영화배급이라는 게 철저히 자본주의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가 가진 고민이 그 시스템 안에서 깨지는 모습을 지금 보고 있어요. 쉽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제 예상을 더 뛰어넘어서요. 그 와중에 자본논리의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 관객은 제가 원했던 그림에 같이 반응을 해주는데요, 요즘 천만 관객 시대잖아요. 개봉관이 많지 않기도 하지만 제 영화에는 현재 관객이 1200명 들었어요. 물론 그 1200명이 저에게는 무척 큰 의미가 있죠. 여성이슈나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깊은 관심이 있는 소수가 영화제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접한 것이 아니라, 일반 극장에서 상영됐을 때 들어온 분들이거든요. 이 관객층을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는지도 같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영화에서 성폭력이나 낙태를 다루면서 관객에게는 이걸 제3자의 이야기로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이야기로 봐주길 바라죠. 관객이 그 불편함을 갖고 돌아가기를 원하는 거예요. 아까 김성환씨가 얘기한 것처럼 그렇게 만드는 과정도 힘들지만, 그런 영화를 관객이 받아들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불편한 영화를 누가 보고 싶어하겠어요. 요즘같이 시간에 쫓기고 스트레스가 많은 세상에서는 당연히 블록버스터나 매끄러운 로맨스 같은 영화를 찾지요. 저도 그런 영화 좋아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다보면 점점 우리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시간을 갖지 못하는 건 아닌가 싶어요.

 

 

쉬운 희망은 없다, 공감과 연대 경험 쌓아가야

 

박주용 유산과 매체 이야기를 꺼낸 건 우리가 일종의 야생에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어요. 세분이 그렇듯 카메라 하나 들고, 또는 친구 몇명과 모여서 기존의 매뉴얼 없이 처음부터 뭔가를 시작하는 세대가 지금의 청년이 아닐까요. 전반적으로 새로운 매체환경이 가져오는 변화가 사고나 활동방식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이런 방식은 청년들이 ‘연대’에 약하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이기도 한 것 같아요. 청년들이 소규모 ‘취향’ 공동체의 울타리에 안주하거나 아예 개별자로 파편화되어 사회적 주체로서의 역할을 포기했다는 시각이 기성세대에 느슨하나마 폭넓게 자리잡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물론 이런 우리 사회의 분열상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니 다소 손쉬운 진단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렇다면 이제 그 연대에 관해 이야기 나눠봤으면 하는데요, 세분은 청년이자 활동가로서 연대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나요? 좁게는 동료들과의 협력이나 공동작업부터, 크게는 사회 전체의 시각에서 추구해야 할 연대는 무엇인지 각자 경험 속에서 든 생각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조세영 좀 추상적으로 들릴 것 같기는 한데요, 저는 아까 얘기했던 나와 영화와 관객이라는 변수들을 가지고 고민할 때 적이 곧 내 편이고 내 편이 곧 적인 것 같아요. 관객이 내가 갈구하는 바, ‘나의 사랑을 받아줘, 나의 얘기를 들어줘’의 대상인 동시에 내가 추구하는 ‘불편한’ 영화는 철저히 외면하는 적이기도 하고.

 

박주용 꼭 연애 같네요.

 

조세영 「자, 이제 댄스타임」 마지막 장면에 보면 낙태수술을 받고 바로 내려온 여성이 허기져서 설렁탕을 먹는데, 화면이 줌 아웃되면 다른 여자들도 각자 혼자 앉아서 설렁탕을 먹고 있거든요. 실제로 인터뷰를 해보면, 수술 이후에 너무 허기져서 고기가 당겼다, 국물이 먹고 싶었다는 대답이 많았어요. 그렇게 각개전투하는 사람들의 연대를 이미지화한 장면인데, 관객이 이 영화를 통해서 바로 그 지점으로 연결될 수 있겠다고 기대했어요. 일종의 느슨한 관계죠. 요즘 사람들이 선호하는 모임을 보면, 예전에는 오프라인 만남으로 모임의 성격이나 지향을 분명히 갖고 있었는데, 이제는 SNS 같은 것을 통해 집단적 목표에 구속되지 않고도 자기가 원하는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찾잖아요. 이게 상당히 의미심장하다고 보여요.

 

박가분 연대는 크게 두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같은 목적과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 간의 연대도 가능하지만, 같은 목적뿐 아니라 그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을 사용하느냐의 문제도 있는데 그 수단을 공유하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연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여기서 말하는 수단이란 결국 시민·민중의 권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들’에게서 어떻게 권력을 빼앗고 ‘우리’가 어떻게 권력을 가져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이 부분을 명료하게 해야만 비로소 구체적인 연대가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상적인 연대보다는 구체적인 차원에서의 연대의 방법론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김성환씨의 말씀에 많이 공감하는데, 활동가든 조직이든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참여자들이 결정권을 갖는 위치에 서는 것이 아주 중요해요.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권력이 필요하잖아요. 권력을 어떻게 획득하는지 방법을 알려주고 준비해놓는 게 활동가 역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역할의 변화는 사실 사회가 변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원래부터 그래야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데 그동안 못했을 뿐이죠. 물론 지금 우리가 얼마나 잘하느냐라고 한다면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겠지만요.

 

조세영 연대는커녕 공감 자체도 힘든 시기인 것 같아요. 요즘 쏘시오패스(sociopath, 반사회적 성격장애)라는 단어를 많이 쓰잖아요. 저도 이번에 영화를 개봉하면서 관객을 많이 만났지만 그 자리에선 공감을 느꼈지 연대감을 느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사실 연대를 하려면 그전에 공감이 먼저 필요하잖아요. 우리는 현재 공감하는 기회조차 잃어버렸다가 어딘가에서 공감의 대상을 발견하면 거기서 감동을 느끼는 상황인 것 같아요.

 

김성환 제가 단체의 디렉터이지만 ‘디렉션(direction)하지 말고 리브(live)하자’가 원칙이거든요. 운동하는 사람이 스스로 즐겁고 행복해야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할 수 있겠죠. 재미없고 지쳐 있는데 뭔가 비전을 만들어야 할 것 같고, 새로운 삶의 방식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지 않고 있고…… 지금 상황에서 어떤 대단한 메시아가 나타나서 ‘이게 비전이다!’라고 말하면 될까? 전혀 안될 것 같거든요. 비전이란 내 삶으로부터 구현되어야 하는 문제고 그 자체로 치열한 싸움이잖아요. 이론과 현장을 연결하는 실천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석학이나 활동가가 어떤 개념과 이론을 책으로 써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현장에서 일상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때 희망의 조건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합니다. 역시 ‘최소한 이것만큼은 지켜져야 한다’는 공통된 기준들이 중요한 셈이지요.

 

박주용 조세영 감독님 영화에 나오는 설렁탕 먹는 장면을 어느 평론가는 ‘설렁탕 커넥션’이라 부르던데, 그런 연대감이 여러모로 강조된 것 같습니다. 장시간 많은 말씀들 해주셨는데 향후 활동계획을 포함해서 마무리 발언 한마디씩 해주시지요.

 

박가분 우리 편과 적이 누군지 특정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게 일반적인 감각인 것 같아요. 세월호 이슈만 하더라도 구조적인 부패에서 생겨난 문제이기 때문에 무작정 ‘박근혜 물러나라’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만으로는 설득력을 얻기 힘든 상황이지요. 그럼에도 의식적으로 적과 아를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어요. 물론 단지 상대의 불의와 부정만을 이유로 우리 편이 결집한다면 언젠가는 자기모순으로 자멸하게 될 테지만, 그런 의식적 과정 속에서 포지티브한 가치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편이 연대할 수 있는 국면이 만들어질 거라고 봅니다. 일상의 공감과 연대도 중요하지만 적과 아를 나눌 수 없는 상황 자체가 정치의 실종이자 하나의 문제상황이라고 생각해요.

그와 동시에 내가 어떻게 참여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전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전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장기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실력을 기르는 한편 국면마다 성찰이 필요하다는 건데, 연대라는 게 아주 구체적인 수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누구와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어디에 전선을 그을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 조언해주는 선배가 없었는데 이제 다시 그 역할을 누군가 해야 되지 않나 싶어요. 어른의 권위를 부정하는 게 요즘의 경향이지만, 그런 면에서 리더십이나 방향성의 제시는 어느정도 필요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랫동안 한국사회 담론계의 맏어른 노릇을 해온 창비에도 계속 역할이 있지 않을까 싶고요. 저는 어른이 어른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어른의 노력이 필요하겠지만요.

 

조세영 희망이라는 단어가 확 들어오네요. 처음에 했던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저는 분노할 줄 안다는 것이 희망이라 생각해요. ‘설렁탕 커넥션’ 얘기를 해주셨지만, 서로 삶의 커넥션을 가능케 하는 것도 분노인 것 같아요. 저도 영화를 만들 때 분노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분노를 분노로서만 드러내는 게 아니라, 저한테는 영화작업 자체가 누군가가 살아가는 과정을 담는 것이거든요. 내가 살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고. 그래서 늘 뭔가를 고민하려 하는데 사람들과 커넥션이 될 수 있는 문제를 중심으로 생각하죠. 앞으로의 작업도 아마 여성 얘기가 될 텐데요, 저한테는 영화작업이 ‘나’와 내 주변에 있는, 멀리 있어도 그렇게 느껴지는 모든 것을 같이 녹여내는 거고, 그게 제 삶인 것 같아요. 다음 작품으로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성매매인데, 그러면 프로필이 성폭력, 낙태, 성매매 이렇게 3부작으로 완성되나 싶어서 혼자 고민하고 있어요.(웃음)

 

김성환 저희 단체에서 최근에 200명 정도와 집단대화를 한 적이 있어요. 서울의 미래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요. 중학생은 중학생끼리, 고등학생은 고등학생끼리, 또 취업준비생, 신입사원, 중년층 중간관리자, 주부들까지 모여서 대화를 나눴는데, 정리해보니 가장 많이 나온 키워드가 ‘불안’이더라고요. 모든 세대가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데 이 문제를 무엇으로 연결해낼 것인가가 관건 같아요. 불안을 해소하는 것은 결국 그 불안을 해명해내는 과정이지 대통령이 ‘걱정하지 마세요’ 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세월호도 그래요. 계속 불안한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불안을 다시 안정, 희망으로 전환할 것인가가 중요하죠. 참사 이후에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를 보면 실체가 없어요. 아주 구체적이고 분명한 질문이 끊임없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질문을 통해서 토론하는 과정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져야 지금의 사회적 불안과 트라우마가 해결될 텐데 이건 정치인이나 전문가 몇몇이 모여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어쩌면 그건 사실 각자의 공간에서 충분히 가능한 것일지 몰라요. 정당이 당원들한테 투표하라고만 할 게 아니라 당원들과 모여서 세월호 이슈에 대해 토론하고 큰 질문들을 만들어나가야 해요. 지식인사회, 시민사회, 학생사회 다 그렇게요. 서둘러 답을 내리려고 하면 안돼요. 지금 세월호특별법으로 핵심적인 몇가지를 통과시키는 건 필요하겠지만, 빨리 봉합하고 정리될 수 있는 건 아니죠. 9·11테러가 일어났을 때 뉴욕 시민들이 수많은 토론을 통해서 이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무너진 무역센터 자리에 무엇을 지을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했거든요. 그 과정을 우리도 1년이고 2년이고 가져야 지금의 잘못된 과정을 다시 밟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유산이 결국 거기에서 나올 것이다,라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래서 그런 활동을 앞으로 계속해가려고 합니다.

 

박주용 쉽게 희망을 말하지 않고, 각자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과정에서 희망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세분 공히 해주신 것 같습니다. 모두의 건투를 빕니다. 장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2014.7.21 세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