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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권여선 權汝宣
1965년 경북 안동 출생. 1996년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 『레가토』,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숲』 등이 있음. puruntm@empas.com
이모
결혼하기 전에 나는 태우의 친가 쪽은 번다하지만 외가 쪽으로는 외할머니 한분밖에 없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의 부모님을 처음 만나 뵈었을 때 어머니가 외동딸이라 성격이 좀 센 편이겠구나 짐작했다. 상견례는 중식당에서 있었는데 어머니가 코스와 단품 등 모든 메뉴를 결정했고, 아버지는 조금 툴툴거리면서, 태우는 아무 말 없이 그 결정에 따랐다.
결혼하고 한달쯤 지나서 태우는 이모와 외삼촌이 있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니까 시어머니에게 언니와 남동생이 있다는 얘기였다. 그들은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모는 이년째 가족과 관계를 끊고 잠적했고, 외삼촌은 도박빚으로 수배 중이라고 했다. 시어머니는 결혼을 앞두고 굳이 이런 사실을 며느리와 사돈집에 알릴 필요가 있겠는가 고민한 끝에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이모가 병원에 입원했대. 다행히 엄마한테 연락이 됐나봐.”
“무슨 병이시래?”
“말씀 안하셨어. 그건 병이 심각하다는 뜻 아닐까?”
“그게 뭐 꼭……”
나는 어정쩡하게 대꾸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분의 병증에 대해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하루종일 마음이 그랬어. 난 이모가 좋았거든.”
태우의 마지막 말은 내게 모종의 압력으로 다가왔다. 이러다 도박빚으로 수배 중인 외삼촌도 며칠 안에 만취한 상태로 남편 품에 안겨 우리 신혼집에 출현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나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이모님의 병문안을 가기로 했다. 한번쯤은 가보는 게 도리일 터였다. 어머니가 합리적이고 강단있는 분이라 적잖은 의지가 되었다. 어머니는 길도 복잡하니 택시를 타자고 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중에 시이모님이 어디가 아프신지 묻자 췌장암이라는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느 정도 진행이 되었는지, 전이는 안되었는지 물으려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그만두었다. 택시에서 내려 병원 입구를 향해 걸어갈 때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우리 언닌,”
어머니는 잠시 움찔하더니 말을 바꾸었다.
“그러니까 네 시이모님은, 아주 괴팍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정한 편도 아니다. 누구한테 민폐 끼치는 걸 싫어하고 차라리 자기가 손해를 보고 마는 성격이지.”
나는 그런 점은 자매가 아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난 좀 일찍 결혼한 편인데 결혼하고 나서는 친정에 자주 왕래하지 않았다. 친정이 싫었으니까.”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나를 보았다. 이해하겠느냐 묻는 듯도 하고, 너도 그런 건 아니냐 살피는 듯도 했다.
“우리 언닌 평생 직장생활 하면서 결혼도 안하고 엄마를 모시고 살았다. 그 집에 경철이 녀석이, 그러니까 네 시외삼촌 말이다, 걔가 가끔 들락거렸는데, 걔가 돈 사고 치면, 그래, 이제 너한테 못할 말이 어디 있겠냐, 그러면 언니가 몇번 물어주고 그랬지. 그러다가……”
우리는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 서너명이 우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어머니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에야 다시 얘기를 이어나갔다.
“그게 재작년 가을인가 그런데, 언니가 갑자기 편지 한장만 써놓고 사라졌다. 자기를 절대 찾지 마라, 당분간 모든 관계를 끊고 살겠다, 죽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마음이 변하면 돌아오겠다, 뭐 그런 내용이었는데, 참 내용도 놀라웠지만, 그러니까 그게 뭐냐? 너는 글을 쓰니 알겠지. 그걸 뭐라고 그러냐?”
나는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글에 담긴 기운이라고 해야 하나? 글자도 아니고, 글씨체도 아니고.”
“문체요?”
“문체? 그런 걸 문체라고 하냐? 나는 모르겠다. 우리 언니도 옛날엔 글쟁이가 되고 싶어했지. 널 보면 반가워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언니 편지를 읽는데, 문체인지 뭔지에 깃들어 있는 마음이나 기분 같은 게 으스스하게 느껴지는데, 못된 말을 쓴 것도 아니고 다 평범한 말뿐이었는데, 이상하게 무섭고 서럽더라. 난 그게 뭔지 궁금하다. 도대체 그게……”
어머니의 얘기는 거기서 끝났다. 병실에 도착할 때까지 그게 뭐였는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시이모는 인사하는 나를 빤히 보더니 금세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구나!”
그 말이 너무 격의가 없어 나는 당황했다. 어머니는 병상에 누운 언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고, 시이모도 동생을 말갛게 올려다보았다. 침묵이 계속되자 나도 시이모를 물끄러미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매우 말랐고, 거칠고 주름진 피부에, 숱이 듬성듬성 빠진 머리를 모자나 스카프로 가리지 않고 그대로 내놓고 있어 아사 직전의 원숭이처럼 보였다. 어머니와 두살 차이라는데 스무살은 더 들어 보였다. 피곤해서인지 눈이 시려서인지 시이모는 몇초씩 눈을 감았다 뜨곤 했는데, 퀭한 눈을 뜨고 무엇을 응시할 때면 눈의 흰자위에 살짝 푸른빛이 감돌았다.
어머니가 마침내 입을 뗐다.
“병원비는 걱정 마, 언니.”
“걱정, 마라.”
시이모가 천천히 말했다. 되묻는 건지 중얼거리는 건지 애매했다.
“그런 소릴 들으니 참 좋구나. 그래도 난 퇴원할 거다.”
“언니, 제발!”
“부탁인데 엄마한테는 알리지 마라. 그 여인이 내 앞에서 우는 건 절대 보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말하고 시이모는 눈을 감더니 다시 뜨지 않았다. 어머니는 일분 정도 서 있다가 가자, 하더니 병실을 나갔다. 짧고 어색한 병문안이었다. 나는 홀가분한지 서운한지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참 이상한 자매였다. 시트 밖으로 삐죽 나와 있는 시이모의 마르고 주름진 손을 보자 왠지 한번은 잡아보고 싶었다.
“시이모님, 저 갈게요.”
내가 손을 잡자 시이모가 눈을 반짝 떴다. 짓무른 듯 젖은 눈자위 속에서 푸른빛이 거미줄처럼 가늘게 반짝였다.
“너 글 쓴다며?”
“본격적으로 쓰는 건 아니고, 그냥 공부하고 있어요.”
“우리 집에 한번 놀러 와라.”
“아, 네.”
시이모가 웃음인지 찡그림인지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 집에 누굴 초대하는 건 처음이야.”
“아, 네.”
“송장 치우게는 안할 테니 놀러 와.”
“네.”
“아이, 오지 마라, 오지 마!”
고양이처럼 토라진 시이모의 말투에 나도 모르게 투정하듯 물었다.
“아니 왜요?”
“난 떨리는데 넌 심드렁하잖니?”
“아니에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래요. 갈게요.”
“그래, 가라.”
“아니, 시이모님 집에 놀러 간다고요.”
“시이모님은 무슨……”
시이모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네?”
“이모라고 부르라고. 글자도 반으로 줄고 어감도 낫잖니? 놀러 올 거면 얼른 메모해라. 윤경호, 경기도 안산시……”
이모가 퇴원한 후에 나는 그녀의 집을 규칙적으로 방문했다. 규칙은 그녀가 정했는데 일주일에 한번, 월요일 오후였다. 그녀는 매일 집 근처의 도서관에 다니는데 월요일이 휴관일이라고 했다. 나는 결혼준비를 위해 대학원을 한 학기 휴학한 상태여서 시간이 여유로웠다. 아마 내가 살아온 서른해 중에서 그때가 가장 한가한 때였을 것이다.
이모는 안산의 외곽에 있는 오래된 소형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열평 남짓한 실내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아니, 정돈되어 있다기보다 정돈할 것이 거의 없었다. 그녀의 집에는 없는 게 많았다.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휴대전화도, 집전화도 없었다. 당연히 케이블티브이나 인터넷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 뉴스는 어떻게 보시느냐 물었더니 도서관에 가서 거기 있는 컴퓨터로 본다고 했다.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었다. 그녀의 집에 있는 가전제품이라고는 구형 냉장고와 세탁기뿐이었다. 옷장도 없었는데 벽에 붙박이로 설치된 이불장만으로 충분한 듯했다. 집안 전체가 수녀의 방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릇이나 냄비도 몇개 없었는데, 그 때문인지 몸에 밴 습관인지 그녀는 설거지거리가 생기면 그 자리에서 바로 씻었고, 빨랫감이 생기면 세탁기를 돌리지 않고 손으로 빨았다.
이모를 처음 방문한 날은 좀 추웠는데 그녀는 커피가루만 넣은 뜨거운 커피에 설탕을 따로 내주었다. 그녀는 내게 가족이 어떻게 되는지, 태우와 어떻게 만났는지 물었다. 나는 부모님과 오빠가 있으며, 남편과는 친구 소개로 만났고 만난 지 일년도 안되어 결혼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래, 내가 잠적하기 전까지는 태우한테 여자친구가 없었지. 첫눈에들 퍽 좋았던 모양이구나. 근데 넌 그애를 뭐라고 부르니? 신혼이니 모골이 송연하게 불러대지 않겠니?”
나는 좀 부끄러워하면서 달링과 신랑을 합쳐 달랑이라고 부른다고 대답했다.
“달랑이라고 부르면 달랑거리면서 달려오겠구나.”
결혼도 하지 않은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뜻밖의 농담에 나는 당황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는 딱히 장난기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고 말투도 날씨 얘기를 하듯 무심했다.
“네 숫기로 봐서 밖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않는 게 좋겠다. 달링이랑 신랑이랑 합쳤다는 소리도 하지 말고. 다들 나처럼 생각할 거다. 달랑이는 달랑이로 들릴 뿐이니.”
이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여러모로 놀랐다. 그녀는 실제로 수녀처럼 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을 마시고 첫 담배를 피우고 이십분 정도 아침운동을 한다고 했다. 그건 운동이라기보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자세와 동작으로 구성한 일련의 스트레칭이었다. 간단히 아침을 만들어 먹고 씻고 열시쯤 가방을 메고 도서관에 간다. 필기도구와 지갑, 열쇠가 든 가방에 보리차를 담은 통을 챙긴다.
“책 먼지 때문인지 거기 오래 앉아 있으면 그렇게 목이 마르더라고.”
나는 그게 췌장암 병증 중 하나였으리라고 생각했다.
도서관에 가면 일단 서가에서 책을 고르고 자리에 앉아 하루종일 그 책만 읽는 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내용이나 재미 같은 건 상관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글자는 읽을 수 있으니 한 글자 한 문장 한 페이지 한 챕터씩 차례로 읽어나간다. 오후 두시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만들어 먹고 다시 도서관에 가서 문을 닫는 여섯시까지 책을 읽는다. 책을 다 못 읽으면 대출해 가지고 와서 저녁을 만들어 먹고 잠들기 전까지 마저 읽는다. 도서관 휴관일인 월요일만 빼고 그녀가 도서관에 가지 못하는 특별한 사정은 없다.
담배는 하루에 네개비만 피우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 점심 먹고 둘, 저녁 먹고 셋, 잠자기 전에 마지막 담배를 피운다. 술은 일주일에 한번, 일요일 밤에 소주 한병 정도를 마신다. 그날은 다소 사치스러운 안주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고 이모는 말했다.
“예전에는 거의 요리를 안했다. 하더라도 대충 만들어서 맛도 모르고 급하게 먹었지.”
그러다 혼자 살면서부터 요리에 재미를 붙였다고 했다. 요리를 할 때 그녀는 더할 나위 없는 평온함을 느낀다. 요리는 불과 물과 재료에만 집중해야 하는 일이다. 요리를 하면 할수록 그녀는 요리가 창조적인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똑같은 요리를 반복해도 결코 똑같은 맛을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실망시키기는커녕 더욱 매혹시킨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요리하며 일인분의 음식을 만드는 데도 정성을 다한다. 일인분이라고 아무렇게나 만들면 더 맛이 없다. 그녀의 냉장고에는 항상 다시국물이 준비되어 있고, 씻어서 물기를 빼거나 데치거나 말려놓은 야채와 해물 들이 다양했다. 그녀는 많이 먹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날은 한시간 동안 공들여 만든 음식이 반 공기의 해물죽일 때도 있다.
“양은 보잘 것 없지만 맛은 그렇지 않아.”
그녀는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그녀의 집에서 딱 한번 저녁을 얻어먹은 적이 있는데, 반찬은 조기조림과 시래기된장국이었다. 비싼 조기가 아닐 텐데도 양념이 밴 살점은 달았고 시래깃국은 깊고 구수한 맛이 났다. 조기도 시래기도 그녀가 제철에 무더기로 사다 손질해 말린 것들이라 했다.
그러나 내가 무엇보다 깜짝 놀란 건 그녀의 생활비였다. 언뜻 보기에도 검소한 살림이라고 느꼈지만, 그녀는 한달에 65만원만 쓴다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중 30만원은 월세로 나간다는 것이었다. 용돈도 아니고 한달 생활비로 어떻게 35만원만 쓸 수 있는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태우와 결혼해서 한달을 살고 생활비가 얼마나 들었는지 따져보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더 기막힌 건 크게 낭비한 돈이 없으므로 무엇을 줄여야 할지 모른다는 거였다. 만져보지도 못하고 이체되는 돈이 예상 외로 많았다. 그런데 35만원이라니, 우리 아파트 관리비와 우리 부부의 휴대폰 요금만 합쳐도 그 정도는 됐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야. 산술적으로 하루에 만원씩만 쓴다 생각하면 되니까. 5만원은 관리비로 나가지. 여름에는 그보다 적고 겨울에는 그보다 많고.”
담배와 커피, 쌀과 김치, 휴지와 비누, 의료보험 등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비용을 제하면 하루에 실질적으로 쓰는 돈은 만원의 절반인 5천원 정도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5천원이면 택시를 타고 몇 킬로나 갈 수 있는 돈일까.
두번째 방문 때 나는 커피와 케이크, 맥주와 담배 같은 것을 잔뜩 사가지고 갔다. 그녀는 그것들에 손도 대지 않다가 내가 돌아갈 때 도로 가져가게 했다.
“네가 좋은 생각으로 사온 건 안다. 하지만 나는 내 가난에 익숙하고 그게 싫지 않다. 우리 서로 만나는 동안만은 공평하고 정직해지도록 하자. 나는 네가 글을 쓴다는 것도 좋지만 내 피붙이가 아니라는 게 더 좋다. 피붙이라면 완전히 공평하고 정직해지기는 어렵지. 혹시라도 네가 내 집에 뭘 몰래 두고 가거나 최악의 경우 돈 같은 걸 놓고 간다면 내가 얼마나 잔혹한 사람인지 알게 될 거다. 네가 먹을 간식을 사오는 건 괜찮아. 대신 다 먹고 가긴 해야겠지.”
그렇게 그녀와 나는 두달 남짓, 나름대로 공평하고 정직하게 월요일 오후에 그녀의 집에서 만나 묽은 블랙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누구의 삶을 요약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모의 삶이야말로 가장 간단히 요약될 수 있는 삶이 아닐까 싶다.
내가 만나뵌 적이 없는 그녀의 아버지, 그러니까 시외할아버지는 약간 자폐적인 면이 있는 분이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울분과 열등감 때문인지 몰라도 엄청난 술꾼이었는데, 술만 먹으면 사는 일이 비천하다고 고함을 질러대곤 했다. 욕을 하거나 난동을 부리지 않고 오로지, 사는 일이 이렇게 비천하다, 비천해, 하고 외칠 뿐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인 시외할머니는 나도 뵌 적이 있고 우리 결혼식에도 참석하셨다. 나는 그분이 무척 헌신적이면서도 당신의 그런 면을 남 앞에서 극구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성정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 인상을 말하자 그녀는 유감스러운 얘기를 들었을 때처럼 입가를 축 늘어뜨리고 말했다.
“그다지 틀린 얘기는 아니야. 희생정신으로 똘똘 뭉친 옛날 여인이니까. 이타적인 면도 있고 인내심도 강하시지. 중요한 건 무엇을 위한 희생이냐, 무엇에만 배타적으로 이타적이냐, 하는 거 아니겠니?”
그녀는 자기 어머니에 대해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아했는데, 그것도 우리 시어머니와 비슷했다.
어쨌든 그런 부모 밑에서 맏딸로 태어난 그녀는 대학 1학년 여름에 아버지가 술에 취해 넘어져 객사하는 바람에 가장 역할을 떠맡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기업 홍보실에 입사해 쉰다섯살에 홀연 사라지기까지 평생 결혼하지 않고 직장생활을 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리고 이년여간 잠적하여 혼자 살았고, 췌장암에 걸려 석달간 투병하다 죽었다. 이것이 남자 같은 이름을 가진 윤경호, 그녀의 삶이다.
물론 이모의 삶에도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녀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남편과 시어머니로부터 조각조각 들은 얘기를 종합하면, 그녀는 대기업에 입사해서 사오년 동안은 생활비와 동생들의 학비를 댔다. 동생들이 대학공부를 마친 후에는 금전적인 지원을 중단했다. 그러나 남동생이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내는 바람에, 우리 시어머니는 그게 결코 부도가 아니라 도박빚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는데, 아무튼 그 빚 때문에 남동생이 감옥에 갈 판국이 되자, 그녀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과 회사를 그만두면서 받은 퇴직금을 모두 남동생의 빚 청산에 쏟아부었다. 그후로는 몇년마다 자리를 옮기면서 이런저런 출판사에서 근무했다. 그러다 그녀의 어머니, 그러니까 내 시외할머니가 그녀 몰래 서류를 꾸며 남동생의 보증을 서도록 해놓은 바람에 그 빚에 휘말려 서른아홉살에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빚을 다 갚는 데 십년 가까이 걸렸다. 신용을 회복하자마자 그녀는 아동물 출판사에 취직했는데 그때 이미 쉰살에 가까웠다. 그때부터 그녀는 누구에게도 돈 한푼 내놓지 않았다. 시어머니 말씀으로는 아마 그때부터 이모가 가족과 관계를 끊고 혼자 살 결심을 한 것 같다고 했다. 독립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그녀는 누구에게도 돈 한푼 주지 않고 스스로에게도 돈 한푼 쓰지 않으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 즉 내 시외할머니는 식당에 나가 주방일을 도우며 직접 생활비를 벌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이미 말했다시피 재작년 가을에 그녀는 편지 한통을 써놓고 사라졌다. 시외삼촌이 도박빚에 몰려 시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죽네 사네 하던 밤 바로 다음 날에.
이모는 오년여 동안 1억 5천만원 정도를 모았는데 1억은 아파트의 전세 보증금으로 넣고, 남은 5천만원으로 돈이 떨어질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볼 생각이었다. 혼자 사는 건 그녀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전화가 없으니 아무도 그녀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방문객이나 택배원, 우편배달부 때문에 인터폰이 울리는 일도 없었다. 해야 할 일도, 지켜야 할 약속도 없었다. 그 무엇도 그녀의 시간을 강제로 구획하거나 갑작스럽게 중단시킬 수 없었다. 자기 앞에 몇년의 시간이 안개 낀 평원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다는 걸 실감한 뒤부터 그녀는 오로지 과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녀는 멍하니 앉아 오래전 일들을 떠올리곤 했다. 아니, 오래전 일들이 아무 때나 불쑥불쑥 떠오르곤 했다. 그녀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과거에 깊이 몰입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몽유에서 깨어나듯 현실로 돌아오곤 했는데, 그럴 때면 몹시 화가 났고 풀 길 없는 원한에 사로잡혔다.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철도 침목처럼 규칙적으로 살았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자유롭게 살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 희망이 없으면 자유도 없어. 있더라도 막막한 어둠처럼 아무 의미나 무늬도 없지. 그때 나는 방탕하게 돈을 다 써버리고 얼른 죽어버리자 하는 생각밖에 안했던 것 같다. 그러다 조금씩 변해서 지금처럼 살게 됐는데,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밤 이후부터인 것 같구나.”
이제 나는 그녀에게서 들은 그 겨울날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을 골랐고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이해시키기 위해 내 눈을 자주 들여다보았다. 그때마다 그녀의 흰자위에서 새벽처럼 맑고 시린 푸른빛이 반짝였다. 나 또한 재촉하거나 질문을 던지지 않고 조용히 집중해서 들었다.
그날은 시작부터 이상한 날이었다, 하고 이모는 말했다.
아침에 그녀가 베란다로 나갔을 때 세상은 밤새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고 모든 것이 엄청난 한파 속에 바짝 얼어 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들어와 손을 씻으려는데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복도로 나가 계량기함에 덧대놓은 방풍지를 뜯고 계량기함을 열어보았다. 다행히 계량기는 터지지 않았다. 오래된 아파트라 복도 새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두꺼운 천으로 계량기를 감싸고 방풍비닐을 씌워놓았는데도 얼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옷을 두껍게 챙겨 입고 시장으로 나갔다. 눈은 완전히 그쳤지만 날씨는 조금도 눅지 않아 매섭도록 기온이 낮았고 눈이 시릴 만큼 햇살이 강했다. 문화센터 앞 벤치에 늙은 노숙자가 앉아 있었다. 오며가며 몇번 본 적이 있는 남자였다. 그는 늘 술에 취한 채 혼잣말을 했는데 대부분은 욕설이었다. 때로 그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여보셔흐, 여보셔흐,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소리쳐 부르기도 했는데, 말끝은 담배연기처럼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후음에 묻혔다. 누구도 그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그의 속을 훑고 나온 독가스 같은 입김이 공기 중에 떠돌다 제 몸에 들러붙기라도 할 듯 바삐 멀어졌다.
그날따라 그녀는 그에게 돈을 좀 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가방에서 천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그녀가 장갑 낀 손으로 지폐를 내밀자 그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엄지와 검지를 집게처럼 내밀어 지폐 끝을 잡았다. 군데군데 살갗이 터진 그의 오므린 손바닥에 잘못 태운 숯가루처럼 얼룩덜룩한 무채색의 어둠이 고여 있었다. 지폐를 놓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는데, 추위로 눈물이 고인 그의 탁한 눈빛을 보자마자 그녀는 기이한 섬뜩함을 느끼고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떴다. 금방이라도 그가 여보셔흐, 여보셔흐, 소리쳐 부를 것만 같았다.
그녀는 드라이어와 3미터 멀티탭을 사가지고 와서, 부엌의 수도꼭지를 온수로 틀어놓고 현관문을 활짝 열고 긴 멀티탭 전선으로 집 안 콘센트에 드라이어를 연결한 후 계량기함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드라이어를 뜨거운 강풍으로 틀어 온수 계량기 위에 놓고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렸다. 계량기가 터지지는 않았으니 언젠가는 녹을 것이다. 그녀는 가끔 드라이어를 끄고 집 안에 틀어놓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지 확인했다.
비닐봉지를 든 젊은 여자가 총총걸음으로 복도에 들어서더니 그녀에게 물이 안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온수가 안 나온다고 대답했다. 젊은 여자는 드라이어 소리 때문에 못 알아들었는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는 드라이어를 끄고 온수가 안 나온다고 한번 더 말해주었다. 여자는 다소 놀란 듯한 맹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눈이 물고기처럼 크고 튀어나와 더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럼 아무 물도 안 나오겠네요, 하고 물고기 눈의 여자가 물었다. 그녀는 애써 짜증을 억누르고, 냉수는 나오고 온수만 안 나온다고 세번째로 말해주었다. 여자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어, 우리는 냉수만 안 나오는데, 했다. 그럼 얼른 녹이라고 하자 여자의 얼굴에 미안한 웃음이 스쳤다. 우리 집 계량기는 멀쩡해요! 여자는 좋은 정보라도 주듯 눈을 깜빡거리며, 냉수가 단수인 거죠, 했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 그 집도 언 거라고, 우리 집 계량기도 겉으로는 멀쩡하지 않으냐고 말했다. 젊은 여자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계량기함을 들여다보았다. 여자의 삐친 머리칼이 그녀의 볼을 간질였고 비닐봉지에서 닭튀김 냄새가 풍겼다. 이게 언 거예요? 여자가 눈을 크게 떴다.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어 여자의 숨이 그녀의 얼굴에 끼얹어졌고, 금세라도 여자의 튀어나온 눈알이 구슬처럼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누군가와 이렇게 가까이 있어본 게 영겁처럼 오래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갑자기 여자의 어깨를 밀쳐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고, 그걸 눈치라도 챈 듯 여자가 발딱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더니, 그녀와 한집 건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시 뒤에 여자의 남편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나와 계량기함의 방풍지를 뜯고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물고기 여자가 드라이어를 가지고 나오더니, 냉수가 어느 쪽이에요, 할머니? 하고 물었다. 그녀는 못 들은 척하려다 아래쪽이라고 말해주었다.
물고기 여자는 집 안으로 들어갔고, 굉음을 내는 드라이어를 들고 그녀는 위쪽 계량기를, 건넛집 남자는 아래쪽 계량기를 녹였다. 그녀는 가끔씩 드라이어를 끄고 부엌 쪽을 들여다보고 물소리를 확인했지만, 건넛집 남자는 드라이어를 빈번히 껐다 켰다 하며 집 안에 대고 나와, 안 나와? 소리를 질렀다. 이십분 가까이 되어서야 그녀의 부엌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천으로 계량기를 꼼꼼히 감싸고 계량기함을 닫고 방풍지를 다시 붙였다. 문을 닫기 전에 힐긋 보니 남자는 드라이어를 계량기함에 꽂아둔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남자가 혹시 고맙다는 인사를 할까 싶어 기다렸지만 남자는 의식적으로 피하는 동작을 취하며 등을 돌렸다. 다 식은 닭튀김을 먹는 게 화가 났을 수도 있고 추워서 짜증이 난 걸 수도 있지만, 그녀는 왠지 남자가 자기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어쩌면 남자는 돈이 들더라도 차라리 계량기가 터져 수도사업소 사람을 불러 교체하는 편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남자의 등허리를 노려보다 그녀는 오싹한 증오를 느끼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언제였을까. 그의 자취방에서 과도로 참외를 깎아 쪽을 내고 참외 씨를 미세하게 바르며 그의 등허리를 바라보았던 그 봄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병아리 빛깔의 수채화 같던 그 봄날의 오후는. 그리고…… 그녀는 현관 구석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장갑 낀 양손을 번갈아 쥐었다 놓았다. 당장이라도 과도를 움켜쥐고 무엇을 찌를 듯이, 장갑 속의 언 손가락을 바르르 떨게 만드는 이 붉고 어두컴컴한 증오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그녀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쥐었다 놓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쥐었다 놓았다.
이모는 내가 그 등허리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걸 알아차렸다.
“그 사람은 장이 안 좋아서 참외 씨를 먹으면 안되는데 단걸 좋아해서 참외 속은 먹고 싶어했지. 그래서 참외 씨를 하나하나 발라내야 했어. 내가 대리를 달았을 때니까 스물여섯이나 일곱쯤 됐을 때다. 그때 만나서 사오년쯤 사귀다 헤어진 사람인데, 회사 다니는 사람은 아니고 공부하는 사람이었지.”
나는 이모가 그 사람과 헤어진 시기가, 시외삼촌이 사업빚인지 도박빚인지 때문에 감옥에 갈 뻔한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공부하는 사람이니 돈을 벌지 못했을 테고, 이모가 모아놓은 돈도 모두 날아갔고, 이모의 직장마저 불안정해졌으니 결혼은 요원해졌을 것이다. 병아리 빛깔의 수채화는 대개 그렇게 붉고 어두워져 석양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헤어지고 나서 그 사람을 딱 한번 본 적이 있지. 우연히, 무슨 행사장 입구 같은 데서.”
그 사람 옆에는, 그때까지는 그의 아내가 아니었던 어리고 날씬한 여자애가 서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여자들이 브래지어 끈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는데, 그 여자애는 보라색 브래지어 끈이 드러나는 검정 탱크탑에 와인 빛깔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여자애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겉돌았다. 나중에 힐긋 보니 아이들처럼 비상구 계단에서 팔짝팔짝 엇갈려뛰기를 하고 있었는데, 짧은 스커트 아래에서 허벅지가 엇갈릴 때마다 살짝살짝 검정 팬티가 엿보였다. 다들 저 여자애는 대체 누구야 하는 시선으로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다. 그때 이미 그와 사귄다든가, 결혼할 거라든가, 전남편과의 이혼이 문제가 되고 있다든가 하는 소문이 돌았다. 그녀는 그 여자애의 행동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연기라는 걸 깨닫고 혐오를 느꼈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가해한 행동을 하는 그 어린 이혼녀에게서 쉽사리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그후 그 사람과 그 여자애가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다는 얘기를 들었고, 또 얼마 지나서는 누군가 그 사람 집에 놀러가서 그들 부부를 보고, 아이들도 보고, 집안 꼴도 보았는데, 참 애가 애를 키우는 것 같아 걱정되더라는 말을 하는 것도 들었다. 그러고 또 한참 지나서 그녀는 지인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 후배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글을 읽었다. 지인이 싸이월드에 올린 추모글에 따르면 교통사고가 났는데 운전하던 후배의 아내는 중상을 입고 옆자리에 앉아 있던 후배는 사망했다고 했다. 설마 그 사람은 아니겠지 하고 기사를 검색해보았는데, 그가 재직 중인 대학 이름과 부고기사가 떴다. 그런데 그때가 언제쯤이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고 이모는 말했다.
“마흔이 훌쩍 넘었던 건 분명한데, 마흔여섯쯤이었는지 마흔여덟쯤이었는지.”
아무튼 그녀보다 두살 많은 그 사람은 마흔여덟이었는지 쉰이었는지 모를 나이에 죽었다. 그의 죽음을 알고 나서 그녀는 지인의 싸이월드를 통해 알게 된 그의 아내의 싸이월드에 들어가 그 여자가 쓴 글들을 모두 읽었다. 글을 잘 쓰지는 못했지만 많이 올리는 편이었고, 여행을 자주 다니는지 사진도 많이 올렸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그 여자가 페이스북으로 옮겨갔고, 그녀도 덩달아 페이스북에 가입해 그들은 페친이 되기까지 했다.
이모가 그 여자의 페이스북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건 잠적하기 일이년 전이었다고 한다. 그 여자는 뜻밖에도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그때가 선거철이었는지, 그 여자가 재외국민 투표를 했고 한국인인 게 자랑스럽다는 글을 올려놓았는데, 그때에도 그녀는 깊은 혐오를 느끼면서 그 여자가 쓴 글과 그 밑에 달린 158개의 의미 없는 댓글을 모조리 읽었다. 그걸 끝으로 그녀는 다시는 페이스북을 하지 않았다.
이모 나이에 싸이월드와 페북을 했다는 사실에 내가 놀라움을 나타내자 이모는 다소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태우랑 동갑이라니 하는 말인데, 나는 태우가 네살 때 컴퓨터를 산 사람이다. 그땐 아래아한글이 없어서 보석글을 썼다. 너는 모르겠지만 하이텔이니 천리안이니 하는 통신을 시작한 게 서른대여섯쯤이었고, 한때는 통신중독에 게임중독이기까지 했다. 블로그는 귀찮아서 하다 말았고, 싸이월드 좀 하다가 트위터와 페북으로 갈아탔지. 사실 나는 가족과 관계를 끊는 것보다 온라인 관계를 끊는 게 더 힘들 정도였다. 그건 주어진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거였고, 오로지 내가 쓴 글, 내가 보여준 이미지만으로 구성된 우주였으니까.”
그녀가 계량기 때문에 늦은 아침을 해먹고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왔을 때 인터폰을 통해 위층 집 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접속불량인지 어떤 부주의 때문인지 가끔 위층 벨소리가 인터폰으로 들려온 적이 있는데, 그날따라 벨소리는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울렸다. 한시간 넘게 그 소리를 듣고 있다가 그녀는 직접 관리실로 찾아갔다. 관리실 당직자인 늙은 남자는 잠시 뒤에 기사를 보내 조치를 취할 테니 연락처를 남겨놓으라고 했다. 연락처가 없다고 하자, 그는 그럼 어떻게 미리 연락하고 방문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문제되는 집이 우리 집이 아니라 윗집이니 윗집을 방문하면 될 거라고 얘기하자 당직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연락이 안되면 아무것도 안되는데, 하는 소리만 반복했다. 그러면 집에 있을 테니 언제든 방문을 하라고 하자, 아무튼 알았다고, 가서 일단 기다리라고 했다. 관리실에서 돌아온 지 삼십분이 넘어서야 중년과 노년의 기사 두명이 그녀의 집을 방문했고, 그들은 원인규명을 하겠다며 다짜고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내가 혼자 산 이후로 우리 집에 쳐들어온 첫번째 방문객이었지.”
그녀가 우리 집 인터폰이 아니라 윗집 인터폰이 문제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그들은 댁의 인터폰도 문제일 수 있다며 막무가내로 인터폰이 매달린 곳으로 달려가서,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들리는 인터폰에 굳이 귀를 갖다 댔다. 음, 진짜 벨소리가 들리네, 들려. 윗집이 맞아요? 모르지, 아랫집일 수도 있어. 어디 내가 들어볼게요. 들어봐, 들어봐. 옆집일 수도 있겠는데요. 그럴까. 그들은 번갈아 인터폰에 귀를 갖다 대고 인터폰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시간을 끌더니, 잘 알았다고, 윗집과 아랫집, 오른쪽 집과 왼쪽 집에 가서 직접 확인을 해보아야겠다며 위엄있게 나갔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 동안 두 남자가 어느 집에서 인터폰을 수십차례 반복하여 테스트하는지 알 수 없는 묘한 소리들이 인터폰으로 울리더니 결국은 원래 들리던 소리로 돌아왔다.
그들이 다시 찾아왔다. 노인이 아직도 벨소리가 들리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들린다고 하자, 그들은 서슴없이 집 안으로 들어와 직접 소리를 확인했다. 윗집이네요, 윗집. 맞아, 윗집이었어. 둘은 서로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아랫집과 좌우 옆집을 가보았으나 이상이 없다, 윗집에서 인터폰 수화기를 잘못 내려놓아 그런 게 틀림없다, 허나 지금 윗집에는 사람이 없어 부득이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말을 번갈아 늘어놓더니 붉게 상기된 얼굴로 만족하여 돌아갔다.
다섯시간이 넘도록 벨소리는 계속 울렸다. 그녀는 자신의 일상을 교란하는 이 모든 사태를 증오하다가 어느 순간 인터폰을 뜯어내 바닥에 팽개치고 발로 밟아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아니, 보았다기보다 그렇게 행동하는 자신의 근육과 분노를 실제처럼 생생히 체험했다. 그녀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옷을 입고 가방을 들고 무작정 집을 나왔다가 들어가 수도꼭지를 틀어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도록 해놓고 다시 나왔다. 귀에서는 여전히 벨소리가 울렸고, 그녀는 윗집에 올라가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문화센터 앞 벤치는 비어 있었다. 그녀는 늙은 노숙자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추워서 일분도 버티지 못하고 문화센터 건물로 들어갔다. 일요일이라 문화센터는 문을 닫았지만 일층 도서관은 열려 있었다. 도서관이라기보다 작은 열람실에 가까운 그곳은 따뜻하고 조용했다. 열람석은 반 이상 비어 있었다. 그녀는 서가에서 실용적인 철학서를 골라 자리를 잡고 앉아 읽기 시작했다. 역자의 서문을 읽고 작가의 서문을 읽었다. 시간은 묽은 죽처럼 흘러갔다. 그녀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어느 순간 시간이 흐름을 멈추고 서서히 엉기기 시작했다. 3장의 중간 부분을 읽고 있을 때 그녀는 응고된 시간이 점도를 높이면서 온몸을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 느낌은 오래전의 일들을 생각나게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과거에서 불려나온 투명한 유충떼의 습격을 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이었다. “특히 파렴치한 주체에게서 잘 드러난다”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를 뻔했다. 뭔가 행위를 해야 한다는,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는 조급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무슨 행위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꼼짝도 못하고 진땀을 흘리다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려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여보셔흐…… 여보셔흐…… 그것은 뭔가를 달래는 주문과도 같았고, 주문은 효과를 발휘했고, 어느새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여보셔흐…… 여보셔흐……
어디선가 작은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자신의 귀에서 울리는 환청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음악소리는 끊어지지 않고 조금씩 커졌다. 몇몇 사람들이 의자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는 걸 보고서야 그녀는 그것이 도서관 폐관시간을 알리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다 읽지 못한 책을 들고 사서에게 가서 대출신청을 했다. 사서가 회원카드를 달라고 했고, 없다고 하자 회원카드가 없으면 대출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사서는 이십대 후반의 청년으로 머리가 크고 몸이 여위었고 말할 때 혀가 짧다는 느낌을 주었다. 회원카드를 어떻게 만드느냐고 묻자, 오늘은 마감시간이 다 됐고 내일은 휴관일이니 모레 와서 만들라고 했다. 그는 젊은 나이와 혀 짧은 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사무적인 말투를 썼고 안경 낀 얼굴에는 뭔가 책임을 회피하려는 마음을 업무의 분주함 탓으로 돌리려는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십대 내내 거울을 통해 보아왔던, 항상 목이 마른 듯 칼칼한 비정규직의 표정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술과 안주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벨소리는 멎어 있었고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기진맥진하여 반찬가게에서 사온 돌게장을 꺼내놓고 술을 마셨다. 조금씩 술이 오르면서 그녀는 세운 무릎 위에 손을 엇갈려 얹고 그 위에 턱을 고인 웅크린 자세로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느 새벽에 만취해서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탔던 생각이 났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날은 겁도 없이 남의 차에 올라탔다. 새벽이라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 옆에서 그녀는 손을 흔들어 차를 세웠고, 은회색 차가 섰고, 운전자가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그녀가 태워달라고 하자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여 동승을 허락했다. 그런 일은 얼마나 쉽지 않으면서도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한번은 술에 취해 트럭 밑에 누워 조만간 이 트럭이 부르릉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면, 하고 상상한 적도 있다. 그런 상상을 해도 두렵지 않고, 그런 일은 그저 상상일 뿐 자신에게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서 트럭 바퀴가 자신을 타넘고 간다 해도, 그래, 그건 그다지 엄청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수첩이나 메모지에 ‘나는’이라는 글자를 쓸 때마다 자신이 앉은뱅이가 되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공포 때문에 한동안 ‘나는’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고 심지어 발음도 하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이 모든 기억들은,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주 젊은 날의 일일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그녀는 약간의 흥분상태에 빠져들었다. 혼자 산 이래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얘기를 주고받은 날이 없었다. 그녀는 늙은 노숙자와, 물고기 눈의 여자와, 그 남편을 생각했다. 뭐, 할머니라고 부를 수도 있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실의 늙은 당직자와, 카프카의 『성』에 나오는 조수들처럼 어리석고 죽이 잘 맞던 두 기사와, 혀 짧은 사서를 생각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본 그들은 나름대로 사랑스러운 데가 있는 이웃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브래지어 끈 여자의 페북에도 다시 들어가보고 싶었다. 노트북을 사서 인터넷을 연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가 개성 넘치는 이웃이 아닌가.
그녀가 기대감에 가득 차서 돌게장의 껍데기 속에 모아놓은 노르스름한 알과 내장을 입에 넣었을 때였다. 누군가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속의 것을 꿀꺽 삼켰고, 거대한 압착기에 얼굴이 끼인 것처럼 이를 딱 부딪쳤고, 그 엄청난 압력에 혀끝이 짓씹혔다. 눈앞이 번쩍 하더니 모든 기억이 반지 모양의 작고 까만 원형 속으로 빨려들었다. 지독한 통증이었다.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혀끝을 만져보니 침과 함께 피가 묻어났다. 혀끝에 뜨겁고 얇은 쇳조각이 달라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통증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며 조금 전에 떠오른 눈빛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늙은 노숙자도, 참외 씨 남자의 눈빛도 아니었다. 훨씬 더 오래전이었다. 전생처럼 오래전이었다. 혀끝의 예리한 쓰라림이 조금씩 둔해지면서 입안에 녹슨 맛이 퍼져갔다. 지하 주점이었다. 벗겨진 탁자와 곰팡내를 풍기는 자줏빛 천이 씌워진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맞은편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간절하고 조금은 처량한 눈길로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위로 한 채 탁자에 놓여 있는 그의 두 손은 제의의 포즈처럼 보였다. 그녀는 탁자 앞으로 다가앉았다. 그가 두 손을 그녀 쪽으로 좀더 깊숙이 내밀었다. 그녀는 살짝 오므려진 그의 양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피우던 담배를 그의 왼손 손바닥 한가운데에 눌러 껐다. 그의 동공이 활짝 열리고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녀는 그를 빤히 응시했다. 미지근한 온도의 다리미로 옷을 다릴 때처럼 그의 표정이 서서히 펴지더니 마침내 묵묵히 고통을 견디는 자의 무표정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것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쪽 눈에서 찔끔 눈물이 흘러내렸다. 놀란 그녀가 그의 손바닥에 소주를 부었지만 이미 거기에는 반지 모양의 검게 탄 자국이 찍혀 있었다.
“아마 대학 1학년 겨울쯤이었을 거다. 그애는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으로 같은 과 동기였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내게 호감을 느꼈던 것 같아.”
그녀는 지금도 그의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눈과 코, 입술 같은 것의 모양은 고사하고, 평범했는지 못생겼는지 하는 전체적인 인상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하 주점에서의 그 순간에 이르면 그녀는 하나도 남김없이 기억할 수 있었다. 그가 맞은편 탁자에서 구부정하게 등을 구부려 두 손을 내밀던 자세, 둥글게 좁혀지던 어깨 모양, 그녀가 담뱃불로 손바닥을 지졌을 때 그의 얼굴에 나타난 놀람과 경련, 서서히 펴지던 표정과 한쪽 눈에서 흘러내리던 눈물, 재와 담뱃진으로 거칠게 탄 손바닥의 동그란 자국, 뒤늦게 코끝을 감돌던 종이 탄내 같은 냄새.
그녀는 불에 덴 것 같은 화들짝한 경악에 사로잡혀 베란다로 뛰어나갔고, 담배를 피우는 내내 자기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생각해보았다. 자신에 대한 호감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그에게 왜? 잡아주기를 바라고 내민 무력한 손바닥에 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왼쪽 손바닥을 펼쳤다 오므렸고 담배를 다 피운 후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은 뚫고 들어올 그 무엇도 거부하는 눈동자처럼 까맣고 견고하게 얼어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왼손을 깔때기처럼 오므리고 손바닥 가장 깊은 곳에 담뱃불을 눌러 껐다.
“그애를 지진 이유는 단순했어. 성가시고 귀찮았던 거지. 단지 그뿐이었어.”
이모가 죽은 후 나는 그녀가 매일 다녔다는 문화센터 1층에 있는 도서관에 가보았다. 창가에는 일자형 바처럼 컴퓨터 좌석이 여섯석 놓여 있고, 그뒤로 4인용 책상 네개와 열여섯개의 의자가 있고, 벽을 따라 ㄷ자 형태의 개가식 서가가 있었다. 컴퓨터를 이용하는 사람이 셋, 열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일곱 정도 되었는데, 노인도 있고 컴퓨터 앞에서 놀고 있는 초등학생도 있어 마치 주민 쉼터 같았다.
나는 이모가 항상 앉곤 했다는 열람실 중앙의 사각기둥 옆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거기에는 이미 머리가 길고 몸집이 비대한 이십대 중반의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나는 아가씨와 한 자리 건너 창문이 바라보이는 곳에 앉았다. 실내가 좁고 좌석 사이에 칸막이도 없어 띄엄띄엄 떨어져 앉아도 다른 사람의 숨소리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다 들렸다. 나는 노트북을 꺼내놓고 뭔가 써보려다 그만두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2월이라 밖은 황량했다. 이모는 황량한 2월을 이곳에서 두번 보냈으리라.
나는 이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태우에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만 있었다. 이러다 영영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모 스스로도 그 겨울밤에 대해 몇번이나 되풀이해 얘기했고, 얘기를 할 때마다 뭔가 조금 달라진 것 같지 않느냐고 물었고, 나도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하곤 했다. 어쩌면 기억이란 매번 말과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살금살금 움직이고 자리를 바꾸도록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몹시 쇠약해져 한번에 몇마디씩밖에 하지 못했다. 그때 그녀가 한 말들은 또 이전에 한 말들과도 조금 달랐다.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 거고.”
그녀는 내게 입술에 물을 축여달라는 손짓을 했고 나는 거즈에 보리차를 묻혀 그녀의 입에 대주었다.
“여긴, 책도 없는데, 목이 마르구나.”
그녀는 어린 강아지처럼 눈을 감은 채 물을 빨았다.
“그런데 그게 뭘까……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게……”
그때 이모의 얼굴은, 예전에 시어머니가 그녀의 편지 얘기를 하면서 그 문체에서 느꼈던 무섭고 서러운 감정이 뭘까, 골똘히 생각하던 표정과 닮아 있었다. 그녀는 이내 잠인지 혼수인지 모를 상태에 빠졌고 시어머니가 병상을 지키고 있던 다음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아파트 보증금과 통장에 남은 현금은 그녀가 유언장에 써놓은 대로 상속되었다. 원래는 가장 우선순위인 시외할머니에게 모두 상속되어야 했지만, 그녀는 시외할머니에게 1/3, 시어머니에게 1/3, 그리고 태우와 내게 1/3을 상속한다고 지정해놓았다. 시외할머니는 우리가 합의하여 맏딸의 유산 전부를 외아들 빚을 갚는 데 쓰기를 바랐지만 시어머니는 단호히 거절하고 우리가 그토록 사양하는데도 우리 부부의 통장에 이모의 유산을 입금했다.
통장에 입금된 숫자를 보고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한달에 35만원씩만 쓰던 그녀가 9년 5개월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여덟자리 숫자는 그녀와 세상 사이를, 세상과 나 사이를, 마침내는 이 모든 슬픔과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 사이를 가르고 있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처럼도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