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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용준 鄭容俊

1981년 광주 출생. 200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가나』, 장편소설 『바벨』이 있음. sfcyjlove@naver.com

 

 

 

이면의 독백

 

 

1.

 

어느날 내 모든 행위를 2인칭으로 서술하는 목소리가 찾아왔다. 그때 나는 쓰러진 아버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병실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너는 병실을 떠나고 있다.’

그 목소리는 또렷하고 명징했다. 왼편에 선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당황했으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병실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목소리는 또 말했다.

‘문을 열고 있다.’

나는 문고리 잡은 손을 꽉 움켜쥐고 숨을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등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병상에 누운 아버지가 멍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래.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바깥의 소리로 착각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그게 시작이었고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목소리는 쉬지 않고 말을 했다. 그 음성이 너무도 생생했기에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환청, 분열, 섬망(譫妄) 같은 단어들을 검색하고 증상과 사례를 읽어봤다.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가장 큰 두려움은 목소리가 미지의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성격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나를 알고 내가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을 지켜보고 있다. 그는 신처럼 전지전능한 눈을 갖고 내면과 외면 전체를 서술한다. 이것은 자아일까. 아니면 무의식인가. 내심인가. 본심인가. 그는 대체 어디에 있는 누구란 말인가. 목소리를 두려워해야 할지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 나를 두려워해야 할지 판단하기 힘든 불길한 나날이 이어졌다. 해변으로 산책을 나가거나 읍내의 상점을 돌며 볼일을 볼 때, 심지어 슈퍼마켓에서 담배 한갑을 사고 구겨진 지폐 몇장을 내밀 때조차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누군가 내 동선을 따라다니는 것 같은 강박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거나 일상의 사각(死角)을 향해 눈을 돌리며 어두운 구석구석에서 그를 찾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허사였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것은 언제나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처음엔 호전적 태도를 취했다. 목소리를 무시하거나 적대감을 드러냈다. 때론 위악적인 태도로 수평선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내 그 혐오감은 나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백사장에 서서 고함을 치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모노드라마처럼 느껴졌다. 나는 두려웠다. 자아가 산산조각 날 것 같았다.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나를 기어이 미친 사람으로 만들 것 같았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시간이 갈수록 점점 안정되었다. 그는 나의 태도에 반응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먼저 말을 걸어보고, 몇번이나 대화를 시도했으나 그는 내 말이 들리지 않거나 관심이 없는 듯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너는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며 중얼거리고 있어’라는 식으로 이따금씩 내 모습을 묘사할 뿐이었다. 그는 나에 대해 말하는 것 외에는 조용한 존재였다. 중립적이었고 감정을 읽어낼 수 없이 차분한 어조를 갖고 있었다. 그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만 하면 갈등이 없는 비교적 평온한 상황이었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나는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목소리는 단순한 화자가 아니었다. 서서히 개성을 드러내는 나 아닌 다른 인격이었다.

 

 

2.

 

아버지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은 해변이 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단층 건물이다. 오래된 여인숙을 펜션으로 개조한 것으로 ‘ㄷ’ 모양으로 이어져 있는 여덟개의 방이 흰 자갈이 깔린 마당을 마주하고 있다. 기차역과 가깝고 해변이 보이는 풍광, 낡은 건물이 주는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 덕인지 성수기에는 제법 사람들이 찾는다. 하지만 에어컨이 없는 방과 야외 화장실, 조악한 수도시설을 경험하고 나면 누구도 이곳을 다시 찾지 않는다. 때문에 그녀가 이곳에서 장기 투숙하겠다고 했을 때 반가운 마음보다 두려운 생각이 앞섰다. 게다가 지금은 눈이 펄펄 쏟아지는 1월 중순이다. 그녀는 커다란 자주색 캐리어를 끌고 대문을 두드렸다. 문턱을 밟고 서 있는 그녀의 등 뒤로 바큇자국 두줄이 길게 나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뭐라고 설명할 순 없지만 나는 그것이 불길했다. 그 얼굴엔 단순한 이들이 갖는 멍청함과 운명적 체념이 서려 있었다. 죽을 곳을 찾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녀가 당분간 방을 쓰겠다고 했을 때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며 꺼렸던 까닭은 어떤 식으로든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잠시 멍하게 있었다. 아버지가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길게 빼고 여자를 쳐다봤고 간병인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흘이 지난 늦은 밤, 우리는 마루에서 만났다. 그녀는 투숙객들이 으레 그러듯 그것이 대단한 풍경이라고 믿는 멍청한 눈으로 담장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어떤 감정을 갖고 그녀를 본 것은 아니었고 그냥 내 앞에 그녀가 있어서 보는 것뿐이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군청색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미소를 띠고 여기저기 살피며 마루를 돌아다녔다. 움직일 때마다 오래된 나무가 어긋나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동생의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를 손가락으로 만지고 바닥에 놓여 있는 오래된 주전자의 손잡이를 들어보기도 했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 방 앞에 걸려 있는 새장에 흥미를 보였다. 새장엔 새가 없었다. 바닥의 좁은 틈새로 붉은 깃털 몇개가 박혀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내밀며 말을 걸어왔다.

새장에 새가 없네요.

나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새장을 쳐다보곤 눈썹을 까딱하며 말했다.

새장이 있었는지도 몰랐네요……

새장에 새가 없다니 참 이상하네요. 새가 없는 새장이라, 뭔가 근사해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게 뭐가 근사한지 알 수 없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새는 앵무였을 것이다. 그 녀석은 내가 놓아줬는데 새장을 떠나려 하지 않고 날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후에 내가 어떻게 했는지는 잊어버렸다. 그녀는 어느새 내 옆자리에 앉아 자신의 무릎을 인형처럼 껴안고 비극적인 얼굴로 밤바다를 바라봤다. 나는 캔 뚜껑을 따고 한모금 마신 뒤 그녀가 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마루 중앙에 걸려 있는 괘종시계가 한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울렸다. 우린 동시에 등 뒤를 돌아봤고 곧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깜짝 놀랐다고 계속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동안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추워서 더 못 있겠어요. 내 방에서 한잔 더 할래요?

그제야 나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봤다. 그리고 빠르게 몸을 대충 훑어봤다.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괜찮아 보였다. 나는 좋다 싫다 대꾸 없이 맥주를 한모금 더 마셨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 밤, 나는 그녀와 잤다.

자신이 에세이스트라고 했다. 손바닥 크기의 노트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대화 중에도 뭔가를 기록하고 종종 그림도 그렸다. 어깨 너머로 몇 문장 읽어봤는데 형편없었다. 이런 수준이면 수입도 거의 없을 듯 보였다. 뭔가 예술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양 보이길 원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와 나는 열두살 차가 난다. 나는 스물아홉이고 그녀는 마흔하나다. 이렇게 나이 많은 여자와 잠을 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섹스는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읍내의 돼지 같은 여자들보다 나았다. 나는 그날 이후 밤마다 그녀의 방에 들어가 아침에 나왔다. 생각해보니 근 몇년간 한 여자와 주기적으로 반복해서 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따분하기 짝이 없는 곳이라, 누구라도 좋으니 사람이 있으면 무슨 말이든 하거나 듣고 싶었다. 그것이 주는 위안이 있었고 뜻 모를 초조함도 있었다. 그녀는 기혼이었지만 내게는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녀가 이 집을 떠나면 끝날 관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가 떠나지 않으면 끝날 수 없는 관계기도 했다.

그녀의 두 눈 중 하나는 사시였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균형이 어긋났다. 하지만 섹스를 할 때는 두 눈이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그것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섬뜩한 기분을 느꼈지만 동시에 기이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기형적인 에로티시즘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나를 흥분시켰고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우리는 별다른 갈등도 사건도 없이 잘 지냈다. 주로 그녀가 이야기를 했고 나는 들었다. 그녀가 입을 맞추면 자연스럽게 옷을 벗었다. 그녀는 수다를 떨다 힘이 빠져 내 팔을 껴안고 서서히 잠드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다. 무의식을 온전하게 알고 싶어했고 트라우마가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이해하길 원했다. 정신에 인생의 진리와 신비가 모두 들어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자신이 겪었던 경험과 기억에 집중했다. 꿈을 꾸면 그것에 대해 꼭 말해야 했고 자신이 왜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에 대해 온종일 생각했다. 그리고 내게 생각한 것을 말해줬는데 대부분 자신의 경험 일부와 그것이 꿈에 어떻게 투사되었는지에 대한 지극히 자의적인 해석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너무 심한 비약이었고 어떻게 보면 누구든지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접근이었다. 나는 그녀가 한심했다. 그토록 신비하고 대단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정신이라는 세계가 너무도 형편없고 시시해서 마침내 실망하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목소리’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너는 이 대화에 지루함을 느끼며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이며 최선을 다해 들어줬고 동조하는 척했다. 한번씩 그녀는 나에 관해 물었다.

그런데 자기는 자기 얘기는 통 안하네?

글쎄,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어. 나는 나한테 관심이 없거든.

그래도 뭐든 이야기해봐.

뭐가 궁금한데.

옛날 일이나 안 좋았던 기억 같은 거.

잠시 생각했다. 그녀가 좋아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아버지와 관계된 몇몇 사건을 말해줬다. 그리고 유년 시절에 겪었던 수치스러운 일과 그것을 경험할 때 느꼈던 감각 같은 것을 말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대단한 흥미를 보였다. 이를테면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 기절할 정도로 많이 맞았다는 것, 따위였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쥐며 물었다.

아버지가 진짜 죽이려고 했어? 아니면 자기가 그냥 그렇게 느끼는 거야?

그게 중요해?

응, 그게 중요해.

나는 잠깐 입을 다물고 일분 정도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진심으로 죽이려고 했어.

그녀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 그러다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네. 지금의 아버지 상태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그렇겠지. 하지만 힘만 생기면 나를 죽이려 들 거야.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옆방에서 나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천장을 노려보고 있을지도 몰라. 뭐, 나도 그러니까 상관은 없어.

내 대답이 다소 직설적이고 충격적이었는지 그녀는 당황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부드럽게 설명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것은 모두에게 있는 지극히 일반적인 감정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론 다르게 생각했다. 글쎄. 다른 아버지들은 그렇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노력하는 그녀를 민망하게 하고 싶진 않았기에 수긍이 가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제 그만 됐다는 뜻으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냥 섹스나 하면 좋겠다 싶었던 것이다.

 

평온한 날들이었다. 목소리에 대해서도 더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싸워봐야 허깨비와 씨름하는 꼴이니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그를 일상의 한 부분으로 인정했다. 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인정하든지 인정하는 척이라도 할 방법을 찾지 않으면 도저히 이 혼란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편해졌다. 당당하고 담담하게 때론 존중하는 태도로 목소리를 경청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내게 도움이 됐다. 그는 단순히 내 행위를 진술하는 것을 넘어 감정의 이면을 설명해주기도 했다. 그의 말엔 혼란이 담기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정확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나는 그 단호함이 좋았다. 내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직관의 근원이었다. 그의 판단은 내 모호한 느낌을 한층 분명하게 만들어줬다.

 

 

3.

 

열아홉이 되던 해 집을 떠났다. 독립을 하겠다는 거창한 포부 같은 것은 아니었고 그냥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도 확고하고 분명한 감정이었기에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이십대를 혼자의 힘으로 보내는 게 쉽진 않았다. 하지만 어떤 순간이 와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것이다. 오래전 어머니는 떠났고 여동생은 죽었고 가족이라곤 나밖에 없었다. 8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 아주 희한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오른쪽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부들부들 떠는 앙상한 손가락은 종이컵 하나 쥐지 못했다. 한쪽 얼굴이 완전히 뒤틀려버린 모습을 위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의사의 말로는 뇌혈관에 문제가 생겨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정신도 이상해졌나요?

글쎄요. 일부분은 그렇죠. 하지만 기억력이나 사고력은 큰 변화가 없을 겁니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데 문제가 있겠지요.

정신은 온전한데 몸만 이상해졌다는 뜻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병원에 있을 땐 아버지를 관찰하는 게 유일한 일이자 낙이었다. 혈관이 막혀 병신이 된 아버지를 보고 있는데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다. 망가진 그의 모습을 감상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습이 아주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던 장면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주먹으로 내 오른쪽 관자놀이를 소리 나게 때렸다. 그땐 목소리의 출현에 익숙하지 않아 신경이 날카로웠다. 더구나 그 말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다. 이 상황은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다. 나는 결코 아버지가 이렇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대체 귓가에 속삭여대는 목소리는 누구인가. 목소리가 무의식이라는 것을 의심했다. 그는 내 욕망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을 때 마침 일을 그만둔 참이었다. 두달 동안 단 하루도 짜증이 나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그날은 정말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파지를 모아놓은 재활용 쓰레기통에 불을 지르고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그동안 많은 일을 했지만 오래 버텼던 적은 없었다. 안해본 일이 없으나 그 어떤 일도 내게 맞지 않았고 재능도 없었다. 갈등과 스트레스가 생길 때마다 발작적인 분노를 조절하지 못했다. 의자를 들어 모니터를 부수고 도망친 적도 있었다. 이십대가 끝나가는 시절의 내 삶은 에너지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것을 되살려보려는 의욕조차 없었다. 차라리 이제 죽어버리자는 생각도 많이 했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어쨌든 누군가는 펜션을 운영해야 하고 아버지도 돌봐야 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지급되는 보험금을 사용할 수도 없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나중엔 끅끅 소리를 내며 한참 웃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살기로 했다.

 

아버지는 하루의 대부분을 휠체어에 앉아 해변을 바라본다. 그는 오른쪽 전부를 잃어버렸다. 오른쪽으로 기울게 걷고 오른쪽 손은 의지와 무관하게 계속 떨린다. 쇠뭉치처럼 크고 단단했던 주먹이 지금은 두부 하나 으깨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간병인은 아버지를 보살피고 살림을 돕는다. 매일 씻기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밥을 떠먹인다. 하루에 두번 주전자에 깨끗하고 신선한 물을 갈아놓고 추울 땐 모포를 둘러주고 가끔 따뜻한 찻잔을 손에 쥐여주기도 한다. 깔끔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아버지뿐 아니라 나도 많은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할 일만 하고 아버지를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모든 행위는 단정하고 분명하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하지 않는다. 선 앞에 서서 절대로 밟지 않는다. 간병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두려워한다. 내 눈치를 보고 기분을 살핀다. 나는 그같은 태도가 싫지 않다. 이렇게 함께 지낸 지도 일년이 넘어간다. 그동안 우리는 각자 서로에 대해 알 만큼 알았다.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몰라도 무엇을 싫어하고 견딜 수 없어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는 시간이다. 간병인은 내가 원치 않는 일을 절대 하지 않고 내 심기를 거스르는 일도 하지 않는다. 아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다정하게 굴지만 않는다면 다시는 내가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벽에 던지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대부분 시간을 그냥 있는다. 그 어떤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고 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며 그것으로 인한 모종의 압박도 받지 않는다. 오래도록 녹지 않는 까만 얼음과 잔설이 깔린 해변을 걷고 끝없이 밀려들고 부서지는 파도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공중을 선회하는 갈매기를 셈하고 몇대의 배가 내 앞을 지나갔는지를 헤아리다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곤 한다. 이 얼마나 편한 삶인가. 목소리는 내가 보는 것들을 함께 감상하며 묘사하고 때론 그것으로 인해 생겨난 감정에 대해 설명해준다. 종종 대화를 시도하지만 여전히 그는 대꾸하지 않는다. 겨울의 해변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본다. 눈과 모래가 섞인 바람, 물거품 속에 뒹구는 죽은 생물들. 그것은 세계의 끝과 같아서 기묘한 느낌을 준다. 절망과 무력함이 주는 쓸쓸함이 수면을 구기며 부는 바람처럼 사방에서 불어온다. 그게 참 좋다.

모든 게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아쉬운 것도 있고 화나는 것도 있다. 아버지가 망가지면서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작은 불꽃 하나가 꺼진 것 같다. 언젠가 아버지를 내 손으로 죽이고자 했던 은밀한 욕망과 분노가 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덧없다. 모든 게 다 무의미해진 것이다. 아버지는 더이상 아버지가 아니다. 그저 병든, 이미 죽었어야 마땅한 고장 난 육체일 뿐이다.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껌벅이며 기저귀에 똥과 오줌을 지리는 삶. 겨우 연명하는 하루하루. 생각한다. 정말 나는 목소리의 말대로 그것을 원했던가. 열번도 백번도 넘게 생각해봤지만 아니다. 나는 기쁘지 않다. 도리어 분노가 치민다. 몹시 무너뜨리고 싶었던 벽이 무너졌다. 그런데 나는 왜 이토록 허탈한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부분만큼은 분명히 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벽의 무너짐이 아니라 내가 벽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울 수는 없다. 재로 변한 것을 다시 불태울 수도 없다. 목소리가 정말로 유능한 무의식이라면 이런 부분을 서술해줬어야 한다. 아버지의 고통에 내가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에, 앞으로도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에 화가 나는 이 복잡한 심리를 말이다. 지금의 몰락이 나와 무관하게 발생한 것을 견딜 수 없다. 이것은 예전의 분노와는 다른 느낌으로 존재한다. 벽을 뚫고 안쪽으로 파고들어 마치 광물처럼 깊숙하게 자리잡았다. 그것은 점점 단단하고 어둡게 반짝거리고 있다.

 

권태를 이길 수 없을 때가 있다. 발기한 성기는 풀리지 않고 눈은 빨갛게 충혈되며 손발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럴 땐 읍내로 달려가 여자 몇을 사서 ‘응급섹스’를 한다. 하지만 대부분 엉망진창이 된다. 내가 망치기도 하지만 이곳의 여자들이 하나같이 별로다. 화대를 치르고 하는 것인데도 뻣뻣하게 군다. 애썼으나 중간에 죽어버려 사정하지 못한다거나 조금 거칠게 다뤘다고 겁을 먹고 방을 뛰쳐나갈 때, 그런 날엔 술 없이도 취한다. 기분이 진짜 더러워진다. 평소엔 열지 않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아버지의 머리맡에 앉는다. 그리고 말한다. 새벽 내내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다. 저주를 퍼붓고 협박을 한다. 아버지가 내게 했던 일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그때 당신이 내게 어떻게 했는지 그때마다 내가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말한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고 들리지 않는 척한다. 바보 멍청이 흉내를 내고 곧 죽을 사람처럼 숨을 가쁘게 내쉰다. 아버지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때린다. 주먹을 둥글게 쥐고 머리를 두어번 내려친다. 그의 머리가 침대 위에서 탁구공처럼 탁탁 소리를 내며 좌우로 꺾인다. 아버지의 턱을 한손으로 움켜쥐고 눈을 맞춘다. 그의 눈빛은 흐리고 청회색 유기물로 오염되어 있다. 아무것도 맺히지 않는 망막은 내 얼굴을 통과하여 천장을 보고 있다. 아버지는 과거를 보고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응시하는 죽은 생물이다. 저 작고 볼품없는 머리통을 납작하게 밟아 으깨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쯤 되면 목소리가 끼어든다. 차분하게 이 상황을 진술하며 동시에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는 아버지를 시시하게 묘사하고 분명 뜨겁고 날카로운 감정을 미지근하고 둥글게 만들어버린다. 나는 그에게 저항하고 싶지만 결국엔 목소리의 말대로 행한다.

‘너는 숨을 크게 내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4.

 

그녀는 아버지 곁에 쭈그리고 앉아 그의 입술이 물고 있는 담배의 재가 길게 타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아버지는 그것을 스스로 털어내지도 못한다. 그녀의 두 눈동자엔 연민이 서려 있다. 적당한 때에 손톱으로 담배를 건드려 바닥에 재를 떨어뜨린다. 휠체어 바퀴를 만지작거리고 대답도 없는 사람 곁에서 두서없이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마치 자신의 아버지라도 된다는 듯 살갑게 대하고 있다. 내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는다. 최근의 그녀는 불안해 보인다. 가벼운 우울증이 있다고 했지만 그녀의 우울은 단순히 기분이 가라앉는 것과는 달랐다. 저조한 상태로 내내 흥분되어 있다고 해야 할까. 그녀에 대한 인내심이 사라지고 있다. 뭔가 지루해지고 빤해지고 있다. 내 마음은 무엇일까.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하는 감정으로 규정할 순 없다. 이렇겐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가 없으면 아쉬울 것 같고 그녀가 계속 있는 지금은 번거롭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눈을 감고 있으면 옛날에 있었던 기분 나쁜 일이 하나둘 떠오른다. 좋지 않은 조짐이다. 그녀는 나와는 반대로 나를 점점 애인 같은 느낌으로 대한다. 늘 감정이 고조되어 음성이 높고 비음이 섞여 있다. 할 말 안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부끄러움과 망설임도 사라지고 있다. 둔한 그녀는 이런 내 생각을 짐작조차 못하는 것 같다. 그녀가 두꺼운 코트를 걸치고 아버지의 어깨에 모포를 두르며 말했다.

산책 좀 다녀올게.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는 내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 손가락을 움직여 간질이며 말한다.

지루해 죽겠어. 자기가 놀아주지도 않고. 아버지랑 요 앞에 다녀올게.

나는 휠체어를 밀고 대문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낮게 숨을 골랐다. 부엌 문앞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간병인이 급히 몸을 돌려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마루를 서성거렸다. 바닥에서 계속 삐그덕 소리가 났다. 괘종시계가 종을 세번 때린다. 오후 세시. 그 소리가 들리자 몸에서 거짓말처럼 열이 빠져나간다. 시계 옆에 걸려 있는 여동생 사진이 보인다. 나는 그 앞에 서서 오랜만에 찬찬히 사진을 봤다. 그 애는 아홉살이다. 그후로 이십년이 흘렀으나 그 애는 여전히 아홉살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녹색 체크무늬 원피스를 입고 포니테일 머리를 하고 단정하게 서서 정면을 응시하는 소녀. 왼쪽 머리에 체리모형 핀을 꼽았다. 능소화가 만개한 담벼락에 기대고 서 있다. 어깨까지 내려온 주황색 꽃들과 원피스 목에 물결모양으로 접힌 프릴이 서로 어울린다. 사진 속 소녀는 정면을 향하고 있지만 눈동자는 살짝 비틀어 왼쪽을 보고 있다. 정면에는 사진기를 든 아버지가 서 있고 그 뒤편엔 내가 서 있다. 나는 오초쯤 숨을 참고 후,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뱉어낸다. 소녀가 보고 있는 나는 아홉살이다. 붉게 부푼 매 자국을 온몸에 새기고 벌거벗은 채 웅크리고 있다. 벌벌 떨고 있다. 달라붙은 작은 성기를 두 손으로 가리고 있다.

 

‘개새끼.’

 

여동생은 나보다 오분 늦게 태어났다. 우린 이란성이었지만 일란성처럼 똑같이 생겼다. 어머니는 우리가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을 좋아했다. 동생이 머리를 길렀을 땐 나도 머리를 길렀고 내가 머리를 잘랐을 땐 동생도 머리를 잘랐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똑같은 옷을 입혔다. 어떤 날은 사람들이 나를 여자아이라고 착각했고 어떤 날은 동생을 남자아이라고 착각했다. 어머니는 양팔에 우리를 하나씩 껴안고 번갈아가며 입을 맞췄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니었다. 똑같이 생기고 똑같이 꾸며도 동생만 예뻐했다. 나는 만지지도 않았다. 어느날 그는 반쯤 풀린 눈으로 하루종일 나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달려들어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어버렸다. 그땐 내가 동생처럼 머리를 길렀었는데 어깨까지 내려왔던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은 죽은 동물이 바닥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설거지를 하던 어머니는 무심코 그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들고 있던 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는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머리카락과 깨진 유리조각을 내려다봤다. 그 순간 아버지가 주먹으로 내 눈을 때렸고 손목에 수갑을 채워 문고리에 묶었다.

 

어느날부터 아버지는 이상증세를 보였다. 처음엔 일시적인 공황상태라고 생각했지만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져 나중엔 정상생활이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다. 몸을 떨고 소리 지르고 화를 냈다. 꼬리를 말고 이빨을 내보이며 으르렁대는 병든 개처럼 공포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어떤 사건 이후부터 변했다고 한다. 철로 근처 작은 마을 하나가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어 일대의 주민이 모두 이주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아버지는 그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작전을 지휘하는 경찰이었다. 대화를 시도하고 더러는 설득을 했으며 그것이 안된 대다수를 협박했고 몇몇은 사냥하듯 궁지에 몰았다. 일이 거의 마무리되려던 어느날 울분을 품은 소년 하나가 그의 허벅지를 과도로 찌르고 도망갔다. 그 순간 아버지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우습게 본 사냥감을 장난감처럼 데리고 놀다가 기습적으로 코를 물어뜯긴 맹수의 마음 같은 것이었다. 그는 자존심이 상했고 분노가 치밀었다. 아버지는 골목 안쪽으로 숨으려는 뒤통수에 대고 권총을 발사했다. 쓰러진 것은 소년이 아닌 소년의 동생이었다. 소년은 눈에 불을 뿜고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그의 팔뚝을 물어뜯었다. 아버지는 팔을 흔들어 소년을 떨어뜨리고 다시 총을 쐈다. 총알은 소년의 왼쪽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총성을 듣고 달려온 경찰들이 아버지와 소년을 각각 붙잡았다. 한쪽 귀와 턱 일부를 잃은 소년은 정신을 잃지 않고 아버지를 노려보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고 한다.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그후로 아버지는 이상한 악몽과 환각 증세에 시달렸다. 꿈에선 뒤통수가 터진 소녀가 방으로 들어오고 현실에선 그 소년이 문틈에 기대고 서서 자신을 향해 칼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아도 나아지지 않았고 아버지의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아버지는 벽에 등을 기대고 멍하게 앉아 있다가 갑자기 몸을 떨며 두리번거리다 옆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시끄러.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구석에 숨어 떨었다.

시끄럽다고, 이 새끼야.

아버지는 소리를 질렀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어금니를 꽉 물고 입술이 안 보일 정도로 말아 넣는다. 아버지가 달려들며 말했다.

악마 같은 새끼. 뭐라고? 또 말해봐.

내 입술은 한번도 열리지 않았는데 그는 내가 말을 했다고 했다. 주먹으로, 허리띠로, 빗자루로, 의자로, 발로, 닥치는 대로 때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얼굴과 복부를 보호하려 몸을 둥글게 말았다. 탄창이 없는 권총을 내 관자놀이에 대고 계속 격발했다. 그러다 갑자기 아버지는 정신이 든 듯 멍하게 서서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동생은 때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나를 때려놓고 놀란 동생에게 사과를 했다. 동생은 늘 아버지의 팔에 안겨 미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애는 가끔 내게 다가와 아무 말도 없이 손을 잡았다. 손이 축축하게 젖을 때까지 계속 잡고 있었다. 동생의 표정은 늘 어두웠고 내가 맞는 것이 자신의 탓이라는 듯 내내 내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난 동생이 내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나를 가장 아끼는 사람은 동생이라는 생각을 했다가 어떤 날엔 아버지와 동생이 작당하고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주는 양가적 감정 속에서 나는 혼란스러웠고 맞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고통을 느꼈다. 처음에 어머니는 나를 품에 안고 보호하며 아버지와 대립했다. 아버지가 소리를 지를 때 함께 소리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면 대신 맞기도 했다. 신고도 여러번 했지만 출동한 경찰은 집 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와 현관 앞에서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그냥 돌아갔다. 안부를 주고받는 여유롭고 친근한 모습이었다. 내 몸이 폭력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어머니도 이런 집안 분위기에 익숙해졌고 결국 싸움을 포기했다. 그것은 끝이 없는 반복이었고 그 속에서 우리 모두는 마모되고 병들었다. 아버지가 흥분할 때 나를 밖으로 내보내거나 총과 수갑을 장롱 깊숙한 곳에 숨기는 정도로 내 편을 들었다. 어머니는 찢어진 상처에 밴드를 붙이고 피멍이 든 부위에 바셀린을 발라주면서 말했다.

네 아버지가 아파서 그래. 곧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어머니 말은 틀렸다. 아버지는 변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를 버린 것이고 나는 포기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사람 역시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다. 열차사고로 동생이 죽는 일이 생기자 어머니는 완전히 탈진했고 아버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손에서 놓았다. 아니 쥘 힘이 없었을 것이다. 내겐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다거나 서운하다거나 하는 감정조차 없다. 다만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나를 한번도 찾아오지 않은 점은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렇게 된 모습을 어머니가 보게 된다면 그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실은, 그게 궁금하다. 몇번 상상해봤는데 어려웠다. 어머니의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레일 위에 죽어 있는 여동생을 보고 아버지는 완전히 미쳐버렸다. 술잔을 내 얼굴에 정조준해 집어던지며 차라리 너였어야 했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지금도 그 애가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른다. 팔다리가 다 꺾이고 얼굴을 반쯤 잃은 그런 모습으로 왜 죽었어야 했는지.

 

그들이 산책에서 돌아왔다. 뭘 하고 왔는지 둘은 즐거워 보였다. 휠체어에 앉은 아버지의 왼쪽 얼굴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더러운 표정이었다. 그가 웃는 것을 처음 봤다. 심장이 찢어져 혈액이 피부와 근육 사이로 스며들 듯 온몸이 뻐근했다. 그 순간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다급한 음성이었다.

‘너는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본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계속 아버지를 바라봤다.

‘숨을 크게 마시고 길게 내뱉는다.’

나는 바다를 바라보고 심호흡을 했다. 숨이 가빠 잘 되지 않았다. 나는 충동을 누르기 위해 주먹으로 명치를 꾹 누르며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위아래 턱이 탁탁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다음날 오후 그녀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는 자고 있었다. 약을 먹고 잠든 그녀의 모습은 전에 없이 추했고 나이 들어 보였다. 그녀가 이 집에 투숙한 지 한달쯤 되었다. 그녀에겐 문제가 있었다. 단순히 감정기복이 크고 좀 우울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조울증이었다. 조증이 시작되면 나쁘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떠들긴 하지만 가만히 앉아 들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또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내가 무척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착각이 드는데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울증이 시작되면 어려워졌다. 정말 딱, 소리를 내며 스위치가 돌아가듯 감정이 달라졌다. 그녀는 그 상태가 되면 자신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알약을 먹었다. 때문인지 며칠 새 눈에 띄게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거의 잠만 자거나 깨어 있을 땐 축 처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게 너무 짜증이 난다. 그럴 때 그녀는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그냥 사물 같았다. 말도 안하려 했고 섹스도 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생각을 떨치려고 의식적으로 고개를 흔들고 방을 둘러봤다. 조악한 연필화 몇점이 벽에 붙어 있었다. 새장, 해변, 자화상으로 보이는 여자의 얼굴.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노트를 펼쳐봤다. 바다와 눈과 관련된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무심코 뒷장을 넘겨봤다.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가 그려져 있었다.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목소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곁에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느닷없이 여동생이 생각났다. 나는 고개를 젓고 숨을 고르게 쉬려고 애썼다. 기분이 안 좋아지려고 했다. 목소리 역시 그림을 지켜보면서 불규칙적으로 호흡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몸을 뒤척였다. 나는 재빨리 그림을 뜯어내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그녀는 눈을 비비고 몽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왔어? 잘 왔어.

그리고 다시 잠들었다. 흰 종이 위에 나무 부스러기와 흑연가루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그 옆에 보기 좋게 깎인 연필이 놓여 있었다. 나는 연필을 들고 송곳처럼 날카로운 끝을 손가락에 대고 꾹꾹 눌러봤다. 그 순간 목소리가 말했다.

‘너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반쯤 떠진 눈동자가 물속에 잠긴 생물처럼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다. 너는 짝이 맞지 않는 두개의 눈동자 중 한개가 유독 맘에 들지 않는다. 연필을 들고 그녀의 눈을 찌를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몇번 움직였다.’

나는 깜짝 놀라 내 손을 쳐다봤다. 목소리의 서술처럼 연필을 쥐고 있었다. 나는 연필을 바닥에 집어던지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뒤를 돌아봤다. 헷갈렸다. 내가 정말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목소리가 나를 그렇게 이끈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한번도 의식적으로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나와 완전히 다른 의견이라고 주장할 확신도 서지 않았다. 실제로 연필을 쥐고 그녀의 눈꺼풀 위에 대고 있지 않았나. 나는 내가 목소리의 서술처럼 행동할까봐 겁을 내며 발가락을 웅크렸다. 그동안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그는 내 삶을 거의 기계적으로 진술하곤 했는데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침묵했다. 목소리는 그녀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때문에 이야기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나중엔 그녀를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따금씩 들리는 음성이 묘했다. 목소리에 미세한 유리가루가 박혀 있는 듯 싸늘했다. 나는 방에서 나와 직전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간병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는 잠시 그 사람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는 눈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주머니에서 그림을 꺼내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레버를 돌렸다.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가 시킨 거야? 아니면 진짜 내가 그렇게 하려고 했던 거야?

 

그녀는 달라졌다.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방에 들어가면 늘 누워 있었고 억지로 자려고 하는 사람처럼 너무 많이 잤다. 말수도 줄었고 웃지도 않았다. 키스를 하려고 하면 고개를 돌렸고 옷을 벗기려 하면 냉정한 얼굴로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기야, 요즘 기분이 별로야. 이해해줘. 나 약 먹고 있잖아.

약을 먹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약을 먹은 여자와 자는 것은 더 좋을 것 같았다. 제정신이 아닌 여자 위에서 움직이는 기분은 어떨까. 나는 어두운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해 병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분노를 누르기 위해 침을 몇번 삼키며 방에서 나왔다.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았다. 노랗고 건조한 맨발이 보였다. 그 순간 목소리가 말했다.

‘너는 어떤 충동을 애써 참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지나갈 단순한 감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말했다.

참고 있다고?

아니다. 나는 참지 않았다. 할 수 없어서 못한 것뿐이다. 이건 단순한 감정이 결코 아니다. 왜 목소리는 내가 화가 날 때만 참견하는 것인가. 처음에 나는 목소리가 내 마음을 손바닥에 올려놓듯 알 수 있는 줄 알았다. 나는 늘 목소리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완벽하게 두 몸이 하나로 겹쳐져 지내다 어느 순간 두개로 나뉘어 각각 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내 입은 봉해지고 목소리의 입만 남게 되면 어떡하지. 목소리에게 내 몸을 뺏기면 어떡하지. 내내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너는 나를 잘 모르고 있다. 나는 걸레로 발을 덮어버렸다. 목소리가 그것을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집 안의 공기가 전에 없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누군가 긴장하고 있었고 누군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느꼈던 두려움을 다시 느꼈다. 하지만 묘하게 달랐다. 내가 아닌 목소리가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구멍을 뚫어 그것을 꺼내고 싶었다. 나는 내 방에 들어가 벽을 보고 누워 관자놀이 근처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이쯤일까? 아니면 여기에 있나? 어디에 있어?

 

 

5.

 

늦은 아침에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밤사이 전화가 와 있었다. 통화목록을 보니 새벽에 두번 전화가 걸려왔고 그중 첫번째는 삼분가량 통화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순간 지난밤의 모든 기억이 아득해졌다. 그녀와의 통화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삼분이면 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인데 어떻게 아무 기억이 없을까. 나는 그녀를 마루로 불러내 말했다.

새벽에 전화했었어?

통화했잖아.

그런데 이상하네. 잠결이라서인지 잘 기억이 안 나.

잠결이었다고? 자기 어제 목소리 멀쩡했는데?

나는 잠시 시간을 두고 다시 물었다.

무슨 얘기를 했어?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래.

그녀는 약간 두려운 표정으로 말했다.

기억 안 나? 내가 진지하게 말했잖아.

다시 말해봐.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 서 있었다. 그리고 뭔가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그것보다…… 자기 좀 이상했어.

뭐가?

뭐라고 해야 할까. 좀 달랐다고 해야 할까. 어투? 뉘앙스? 암튼 평소의 자기는 아니었어. 묘하게 음성이 높았어. 여성스러웠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날 잘 모르는 것 같았어. 요즘 이상해진 거 알아? 너무 예민해진 것 같고. 가끔 무서워. 눈이 다른 사람 같아. 목소리도 가끔 달라지는 것 같고. 언젠가 잠꼬대를 했는데 그랬어.

내가 잠꼬대를 했다고?

응.

뭐랬는데?

기억 안 나. 그런데 이상한 목소리였어.

 

녹음기를 베개 옆에 놓고 잠들었다. 다섯시간쯤 자고 일어나 그것을 재생했다. 미세한 기계음과 함께 이상한 정적이 흘렀다. 정적도 소리가 있었다. 습도 높은 바람 같은 것이 스피커를 통해 들렸다. 뒤척이는 소리가 있었고 반복적이고 기묘한 템포로 내쉬는 숨소리가 있었다. 한동안 아무 소리도 없었다. 축 가라앉은 침묵만이 계속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졸음이 쏟아졌다. 괜한 짓을 한 것인가. 그러다 순간 등줄기를 훑고 소름이 돋았다.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바깥을 경계하며 서서히 굴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소형동물처럼 어둡고 날카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육성으로 말했다. 그것은 내 목소리였지만 여성적인 목소리로 잔뜩 위장한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뭔가 할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톱이 없는 손가락 끝으로 벽을 긁는, 집중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만큼 희미한 소리. 우는가? 웃는가?

 

그녀는 노골적으로 날 피했다. 나와 있으면 불안해 보였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는 말만 반복해서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알았으니까 내일 가라고 했다. 나는 간신히 화를 참고 있었다. 자꾸 호흡이 꼬여 헛기침을 했다. 내가 때리지도 않았는데 화를 낸 적도 없는데 대체 왜 그러는 것인가.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내 손에서 캐리어를 뺏어들고 소리를 질렀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그녀는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개처럼 기어다니며 울며 소리 질렀다.

미친놈. 너 진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약을 먹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너야. 아주머니가 말해줬어. 너 안 좋은 사람이라고. 빨리 이 집을 떠나라고. 처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의 말이 옳았다. 아니,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다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설명을 포기했다. 나는 엎드려 있는 그녀의 얼굴을 축구하듯 발등으로 올려 찼다.

 

그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마루에 서서 까만 밤바다를 바라봤다. 지겨운 바다. 지겨운 파도. 끝이 없어도 끝없이 반복되는 저 파도소리. 반복 속에 마모되고 깎여가는 모든 것. 거대한 해일이 여기까지 넘어와 흔적도 없이 싹 쓸어가버렸으면 좋겠다. 그동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일제히 고개를 쳐들고 일어서고 있다. 관자놀이가 툭툭 뛰고 주먹에 힘이 고인다. 벌거벗은 맨발이 빨갛게 얼어도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나는 위험하다. 위험한 게 두려워서 미칠 것 같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왔다. 한손엔 천 가방, 다른 한손은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한쪽 눈이 검게 부어 완전히 감겨 있었다.

진짜 갈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쥐고 있던 주먹을 슬며시 풀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었는지 알아?

글쎄.

죽으려고 했어. 여기가 죽기에 좋은 것 같아서.

알고 있었어.

그런데 여기 좋은 곳이 아닌 것 같아. 자기야, 제발 나 보내줘.

늦었는데 자고 내일 아침에 가지그래.

아냐. 막차 탈 거야.

나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마당 한가운데 우뚝 서서 대문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뒤를 돌아봤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말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눈이 평소와 달랐다. 흐리지 않고 명확했다. 분명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눈이었다. 나는 한참 고민했다. 그녀를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갈 것인가. 목소리가 말했다.

‘그녀는 떠났지만 너의 마음속엔 그 어떤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다만 담배 한대를 태우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점퍼를 껴입고 역으로 향하며 말했다.

시끄러.

 

새벽기차는 기묘하다. 이상한 시공간을 뚫고 미지의 세계로 달려가는 것 같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는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고개를 옆으로 꺾고 잠이 든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창밖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거울처럼 내 얼굴을 반사하고 있다. 밤의 우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표정이 희미하게 일렁거린다. 앞좌석에 앉은 중년의 신사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불 좀 꺼줘.

대꾸하는 사람이 없고 다가오는 사람도 없다.

불 좀 꺼달라고.

그리고 이내 넥타이를 눈에 두르고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은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 같았다. 차내의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 고단한 얼굴로 방심한 표정을 짓고 무방비하게 좌석에 늘어져 있다. 살진 몸을 뒤척이며 이를 가는 아주머니. 미라처럼 물기 없는 얼굴을 하고 입을 벌리고 잠든 할머니. 하얗게 마른 혓바닥 옆에 까맣게 충 먹은 어금니가 드문드문 박혀 있다. 좌석 두개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아이는 플라스틱 인형처럼 생기가 없다. 잠든 이들의 얼굴을 백색 형광등이 잔인하게 비추고 있다. 누군가 오열해도, 창문을 때리고 발을 굴러도 눈꺼풀 하나 떨지 않을 것 같다. 역무원도 보이지 않고 음식을 실은 수레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이 시간, 기차의 모든 사람이 다 잠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들은 모두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두 같은 세계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 뒤에 뭔가가 서 있다. 그것이 창문 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잠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잠이 드는 순간 저 문을 벌컥 열고 복도를 빠르게 지나 내게 다가오겠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어디선가 입 냄새가 나고 오래된 생선 냄새가 난다. 한시 방향에 앉아 있는 소년은 깨어 있다. 아니 확신할 순 없다. 눈을 감고 있다. 그애는 토끼탈을 쓴 남자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알 수 없는 노래를 허밍으로 부르고 있다. 플라스틱 병을 손에 쥐고 소리 나게 우그러뜨리고 있다. 낯설고 섬뜩한 멜로디는 기묘한 자장가처럼 나를 졸리게 했다. 입술이 부르르 떨린다. 소리 내 노래를 부르고 싶다. 처음 듣는데 왜 나는 저 멜로디를 기억하고 있나. 왜 저 애의 입을 막고 싶나. 나는 잠들 수 없다. 내 꿈이 공유될까봐, 발각될까봐, 내 꿈의 이미지가 그들에게 보일까봐 두렵다. 내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 때문에 그들의 잠을 깨울 것 같아 두려움이 엄습한다. 소년의 앞에 있는 그물망 속에 피 묻은 솜뭉치가 처박혀 있다. 아직 응고되지 않은 선연하고 축축한 붉은 피. 누구의 피일까. 누가 닦아준 것일까. 소년은 옆자리에 앉아 잠든 이의 낡고 딱딱한 의수를 길고 더러운 손톱으로 톡톡 때리며 리듬을 맞추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허밍을 그치고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묘한 미소를 띠며 소리 없이 입을 벌려 네 음절을 말한다.

응?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왜 나는 그 말이 무섭나. 그애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는 잠든 이들의 수명을 빨아먹고 사는 악마일지도 모른다. 모두 같은 꿈을 꾸게 만들고 그 꿈속에 들어가 마음 약한 이들을 조롱하고 괴롭힌다. 잠이 쏟아진다. 두렵다. 숨이 찬다. 나는 벌떡 일어나 복도를 뛰어 문을 열었다.

 

너는 6호차와 7호차를 잇는 연결부에 서서 작은 창을 통해 바깥을 보고 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밤풍경을 바라보면서 오래전 비슷한 풍경 하나를 떠올렸다. 그때는 창문이 없고 문이 있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커다랗고 자유로운 문이. 우리는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기차를 타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아버지는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너는 잘못도 없이 그에게 얼굴을 맞고 코피를 흘렸다. 나는 너에게 화장지를 건넸다. 너는 받지 않았다. 화장지를 동그랗게 말아 피를 닦고 코에 끼워 넣었다. 너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때도 겨울이었다. 눈이 많이 내렸고 나는 하얀 프릴이 달린 원피스를 입고 눈 오는 풍경을 바라봤다. 그림 같았다. 맹렬한 속도가 모든 풍경을 한 방향으로 짓뭉개며 사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 너는 내 곁에 서서 같은 풍경을 바라봤었다. 우리는 그때 같은 생각을 했다. 같은 감정을 느꼈고 같은 충동을 느꼈다. 그 속도에 파묻혀 그림이 되고 싶었다. 강한 타격으로 깔끔하게 해체되고 싶었다. 너는 한발 뒤로 물러섰고 나는 한발 더 내디뎠다. 한발은 계단에 한발은 허공에 떠 있었다. 한쪽 발밑으로 바람과 그림이 밀려들며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는 잠깐 눈이 마주쳤다. 너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내 등을 떠밀었다. 마지막 순간에 나는 한마디 했고 너는 미소를 띠었다. 그것은 정말 멋진 미소였다.

 

나는 아무 저항 없이 목소리가 들려주는 말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 그래. 너의 말이 맞다. 내가 그랬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왜 내가 그랬는지 모르겠다. 네가 원했던 것 아니었나. 내가 도와준 것 아니었나. 만약 내가 너의 등을 밀지 않았다면 너는 내 등을 밀었을 것이다. 나는 레일 위에 부서져 있는 너의 모습을 보고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주머니에 들어 있던 네가 입었던 옷의 일부라고 확신할 수 있는 찢겨진 프릴 한조각이 내가 했던 일을 떠올리게 했을 뿐이다. 그것은 내게 남겨진 너의 유일한 흔적이었기에 버릴 수 없었고 오열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그것을 보여줄 수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입에 넣고 삼켰다.

그만해. 이제 됐어.

목소리를, 그것이 마치 씹어삼킬 수 있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입안에 머금고 있다가 꿀꺽 삼켰다. 무겁고 불길한 공기가 소리도 없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깊은 곳에서부터 차갑게 차오르는 기이한 감정이 치솟았다. 너무도 압도적이었기에 이미 어떤 성취감 같은 것을 느낄 정도였다.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에 팔목이 시큰거렸다. 나는 문을 열고 좌석으로 돌아갔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 곳에서 소리치는 함성처럼, 언덕을 휘도는 메아리처럼, 발밑에서 잘게 부서지며 터지는 물거품처럼, 아득하게 들린다.

‘너는 이번 역에서 내릴 거야.’

나는 그 말이 들렸지만 개의치 않는다. 기차에서는 이번에 내릴 역에 대한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내릴 사람이 한명도 없는 작은 간이역, 이곳에서 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 눈엔 오직 잠든 그녀의 모습만 보인다. 그녀는 이미 죽어 있는 것처럼 방심한 얼굴로 잠들어 있다. 주름이 진 목덜미, 하얀 피부 속에 묻혀 있는 동맥, 규칙적으로 툭툭 뛰며 꿈틀거리는 목숨. 나는 지금 그것을 움켜쥐려 한다.

‘너는 지금 내려야 해.’

그녀가 뒤척이며 자세를 바꾼다. 나는 몸을 숙여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잠시 숨을 참는다. 그 순간 비명 같은 소리가 들린다.

‘내려.’

 

여기는 어디일까. 어둡고 적막한 플랫폼, 텅 비어 바람만 휘도는 사방. 혼자 서서 멍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역무원도 불빛도 없는 새벽 두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간이 있다면, 구멍 같은 시간이 있다면, 아무도 깨어 있지 않는 시간이 있다면, 고속도로에 차가 한대도 없는 시간이 있다면, 세계의 노인들이 갑자기 모두 죽어버리는 시간이 있다면, 바다에 물고기가 배를 뒤집고 떠오르는 시간이 있다면, 딱 지금 같을 것이다. 이상했다. 아무도 없으나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화가 나지도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나는 차가운 의자에 앉아 호주머니를 뒤져 두번 접혀 있는 껌 하나를 찾아 껍질을 벗기고 씹었다. 여긴 어디지. 도대체 뭐지. 뭐지. 중얼거렸다. 고요했다. 목소리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침묵이 아니었다. 곁에 없는 것 같았다. 죽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레일 끝에 둥근 우물처럼 어둠이 잠겨 있었다. 나는 천천히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