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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최정례 崔正禮
1955년 경기도 화성 출생. 1990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햇빛 속에 호랑이』『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붉은 밭』『레바논 감정』등이 있음. ch2222ch@hanmail.net
바람둥이가 내 귀에
처음엔
바람둥이가 내 귀에 퍼붓는 유혹의 말인 줄 알았지요
홀연 나타나 터질 듯 익은 말을 쏟는 열매들
참을 수 없는 거짓말 같았고 너무나 진짜라서 가짜 같았고
웃는 얼굴을 한 울음이었지요
제 가지를 찢으며 매달린 검붉은 체리
허겁지겁 달겨들어 따기 시작했는데
안 보이는 벌판 끝까지 이어진 무릉의 체리밭인 줄은 몰랐네요
무릉은 남의 나라
이런 식으로 펼쳐져 내 가난을 욕보이네요
애걸복걸의 형식으로 시작되어
갈 테면 가라 울 테면 울어라로 끝나는
연애사건 뒤의 빗줄기
빗줄기 뒤의 아찔한 햇빛같이
어른거리는 잎새와 촘촘히 매달린 체리나무 아래서
꿈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그러나 뭐 이따위 현실이 다 있어
다 딸 수도 없고 두고 가지도 못할 이런 꿈같은
가질 수도 내칠 수도 없고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지금은 현실이지만 앞으로는 꿈이 될 장면 앞에서
슬픔이 망아지 새끼처럼 뛰어들어와서는
내 나라의 가난을 다시 고하네요
너는 내가 아니다
불빛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빨간 신호등에서
팔 벌려 걷는 사람이 하얗게 튀어나오는 동안
너는 내가 아니었다
나도 내가 아니었다
꽃은 한번 피었는데 자꾸 또 피고
저녁이라고
라디오에선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흘러나오고
버스 정류장에서, 맥도널드 앞에서
집을 잃고 손을 내밀면서도
해브 어 나이스 데이를 외치는 너
개를 끌어안고 사는 너
너는 내가 아니다
너는 나를 모른다
안드로메다, 오토 바디, 쎄이프웨이 앞에서
모르는 말을 귓속에 쏟아붓는 너
수돗물처럼 킬킬거리는 너
날아가는 휴일을 망연히 내다보는 너
영원히 달려가고 열심히 출근하고
입술에 키스 키스 키스를 붙이고 사는 너
나와는 살과 피가 다른 너
나는 하나인데 너는 너무 많고
네가 하나일 때 나 또한 너무 많아서
백 갈래로 쪼개져도 닿을 수 없다
떠돌았다, 까페 얄리, 오렌지 플래닛, 아몬드 나무,
지나가는 빛을 향해 가지를 뻗으며
너는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고속도로변에서
죽은 새끼사슴 곁을
떠나지 못하고 머뭇대는 어미처럼
먼곳에 갔다는 것은 없다는 것
가슴이 찢어지는 벌을 받으면서도
이곳에서 머뭇거린다
내가 너라도 되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