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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존재 리얼리즘을 향하여
최근의 총체성과 리얼리즘 논의에 부쳐
김성호 金成鎬
서울여대 영문과 교수. 역서로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헤겔, 아이티, 보편사』 『바그너는 위험한가』 등이 있음. shkim@swu.ac.kr
다이하드
문학이념으로서의 리얼리즘은 진화와 변신을 거듭해온 역사적 생물이다. 서구 미학에서 ‘리얼리즘의 시대’라 불리는 19세기 중후반 이후에도 리얼리즘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새롭고 다채로운 형태로 다시 출현하여 ‘다이하드’적 면모를 과시해왔다. 근대 자본주의체제와 더불어 탄생한 그것은 어쩌면 그 체제가 종말을 고하는 시점에야 사라지기 시작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론으로서의 리얼리즘은 또다른 이야기다. 그 역시 현장의 요구에 응해 변화해왔으나, 이론과 창작의 ‘싱크로율’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큰 편차를 보였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그 수치는 매우 낮은 듯하다. 왕성한 이론에 비해 창작이 빈곤하다거나, 그 반대라는 뜻은 아니다. 양쪽이 다 부진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양쪽이 동시에 부진하다고 싱크로율이 올라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요는 창작의 경향이 변하고 있으며, 기존 리얼리즘론의 대표적 개념—장편소설론의 경우 ‘전형’ ‘총체성’ ‘전망’ 등—으로 그 변화를 설명하기가 거북하다는 것, 심지어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을 동원하기조차 망설여진다는 것이다. 물론 변화는 오래전에 감지되었다. 리얼리즘론이 루카치(G. Lukács)의 설명틀을 넘어 진화한 것도 오래된 일이다.1) 그래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현재 리얼리즘론의 개념과 틀은 창작의 현실에 비해 너무 작거나, 너무 크다.
지난호에서 황정아(黃靜雅)가 ‘총체성’을 재론하고 나선 데는 이런 이론적 곤경에 대한 자의식이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2) 그가 자신의 글이 리얼리즘의 전면적 재론이 아니며 자신은 “심지어 지금 필요한 문학론의 갱신이 리얼리즘론으로 수렴될 수 있는지 여부에도 준비된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3)라고 밝히는 점이 주목된다. ‘준비된 답’이 ‘지금 필요한 문학론의 갱신’을 방해하는 사태가 없지 않은 만큼, 미리 선을 긋지 않고 생각을 밀고 나아가는 자세는 본받을 만하다. 그러나 ‘총체성’이라는 전략적 개념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하는 그의 논의 자체는 분명 리얼리즘론의 맥락에 있고, 그것도 현 시점에 대단히 야심찬 이론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출발점은 황정아의 글에 제시된 총체성과 총체화의 개념이 미학적으로, 특히 소설론으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물음이다. 나의 논의는 체제적 총체화에서 주체적 총체화로, 다시 특정하게 정의된 정서의 개념으로 초점을 옮겨가고, 존재 리얼리즘의 윤곽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맺게 될 것이다.
상실?
황정아의 주장을 검토하기에 앞서, 같은 시점에 총체성 개념에 문제를 제기한 강동호(康棟晧)의 논의4)를 보자. 그는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내세운 총체성의 개념이 “상실의 형식을 빌려 비로소 태동할 수 있었던 일종의 스펙터클로 읽힐 여지가 없지 않다”라고 주장한다.5) 총체성은 루카치가 자기 시대에 결핍된 것을 마치 상실된 것처럼 상상한 결과 존재하게 된 사후 발명품의 성질을 띤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의 기저에는 “루카치의 목적론적 장르론” 또는 “본질주의적 장르론”6)에 입각한 장편소설론 내지 ‘장편소설 대망론’이 중단편 위주로 전개돼온 한국소설의 성취와 가능성을 부당하게 폄하한다는 판단이 놓여 있다. 나는 한국소설사를 조망하면서 이 문제를 다룰 입장에 있지 않지만, 그간 장편 형식의 역사성에 대한 고민이 충분치 않았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또 계몽주의 사상가들로부터 데리다( J. Derrida)에 이르는 서구 식자들의 고대 그리스 시대에 대한 이상화는 고질적인 면이 있다고 보는 편이다. 반면 강동호가 초기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을 루카치 자신이 이후에 내놓은 자기비판까지 동원해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비판하면서도 맑스주의자 루카치에 대해서는 “모든 갈등과 분열이 지양된 존재 총체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7)의 가능성에 그가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됐다고 단정하는 데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후기 루카치의 사유가 일정 국면에서 스딸린주의 미학과 친연성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삶철학의 세례를 받은 청년 루카치가 존재의 타자성에 대해 보이는 깊은 관심이나, 후기의 경우에도 위의 국면을 넘어선 시기에 그가 개진하는 삶과 사회의 영구적 미완성(未完性)에 대한 사유는 강동호의 비판이 루카치에 대한 매우 단편적인 이미지에 근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더 중요한 논점은 유토피아적 사고에 관한 것이다. 초기든 후기든, 루카치의 사유에 유토피아적 차원이 결여된 적은 없다. 맑스주의자 루카치에게 묻는다면 아마 ‘유치한 유토피아주의자’보다 ‘유치한 현실주의자’가 더 혐오스럽다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는 결국 강동호의 관점을 정당화해주는가? 루카치의 유토피아주의가 하나의 관념론, 즉 현실을 이념의 자기구현 과정으로 보는 입장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냉철한 현실판단—여기에는 현실의 적대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그 극복의 지난함에 대한 이해도 포함된다—과 ‘유치하지 않은’ 유토피아적 사고—여기에는 더 나은 삶에 대한 지향뿐 아니라 삶의 본원적 비완결성·가변성·부정성에 대한 긍정도 포함된다—는 얼마든지 결합될 수 있으며, 후기 루카치, 적어도 『미학』(1963)의 루카치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결합이다.8) 그의 청년기 사유에 내포된 풍요로운 통찰을 감안하면 루카치가 후에 행한 자기비판이 오히려 편협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 비판은 ‘유토피아주의’를 겨냥한 ‘현실주의자’의 (또는 더 지독한 관념적 유토피아주의자의) 비판은 아니었던 것이다.
‘상실’의 정서에 대해 말하자면, 현재에 결핍된 것을 과거의 현실에 투사하는 심리는 마땅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블로흐(E. Bloch)가 상기시키듯 과거는 미래에 대한 상상의 중요한 자원이며,9) 이에 대해서는 한국소설의 더 나은 미래를 염원하는 비평가들도 동의하리라 믿는다. 문제는 근대성을 바라보는 시각인데, 서구의 고대를 포함한 전근대에서 곧장 미래의 삶의 모델을 추출하는 것은 판타지소설에서나 가능하겠지만, 전근대에서 근대로, 또는 근대 초기에서 후기로 오면서 상실된 것, 애도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이 과연 없다고 하겠는가? 강동호가 문제 삼는 것은 균열 없는 총체성의 관념이므로 이 질문을 그에게 던지는 것은 부당할 수 있다. 다만 유토피아적 사고에 흔히 따라오는 상실의 정서가 아무런 현실적 근거가 없는 것처럼 단순화되고 희화되는 것 역시 부당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총체화 1
황정아의 글이 지닌 장점 중 하나는 이런 항변조차 불필요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거기서 논의되는 총체성은 상실이나 회복과 아무 관련이 없다. 회복과 그나마 비슷한 것은 체제의 탈(脫)은폐, 즉 자본주의적 물화의 극복일 텐데, 물론 그것은 갈등과 분열 없는 사회의 복원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내가 이해하기로 황정아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표현은 일부 달리한다). 첫째, 총체화하는 체제가 있다. 둘째, 체제적 총체화는 구조적으로 불완전하다. 셋째, 체제적 총체화와 그 불완전성(또는 불가능성)을 동시에 사유하기 위해 총체성 개념이 필요하다. 넷째, 총체성 개념은 끝없는 물음의 형태로 현존한다. 여기서 핵심은 셋째가 되겠지만, 신선하면서 필자의 특성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주장은 사실 넷째다. “이것이 전부인가” 하는 물음을 “가능한 모든 방향에서 가능한 오래 지속하기”를 그는 “사라져서는 안될 리얼리즘의 ‘운동’”으로 파악한다.10)
한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앞서 황정아는 총체성에 관한 지젝(S. Žižek)의 설명을 인용한 뒤, 그에게서 “‘전체’가 진짜 전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과 ‘전체에 대한 개념’이 늘 무언가를 빠뜨리고 있다는 사실이 동일한 층위에 놓인 점”을 문제 삼았다. 즉 “체제의 불능이 체제 인식 혹은 체제 재현의 불가능성으로 단번에 옮아갈 소지도 생긴다. 총체성이 전체주의의 혐의를 벗는 댓가로 스스로의 무능을 자인하는 형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11) 재현 불가능성 또는 ‘말할 수 없음’ 자체가 물신적으로 추구되는 비평 경향에 대한 정당한 경계를 내포한 말이지만, 결국 필자 자신도 전체에 대한 모든 개념이 무언가를 빠뜨리고 있다는 지젝의 주장에 동의하는 셈이 아닌가? 물음은 바로 그 결여, 즉 전체와 그 재현 간의 괴리, 또는 본질과 현상 간의 괴리에서 발원하지 않는가?
어찌 보면 자신의 글에 넘쳐나는 ‘불능’ ‘불가능’ ‘불가능성’이라는 표현에 그 스스로 현혹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혹은 ‘실재주의’(황정아의 표현이다)의 위험을 환기하려고 의도적으로 지젝의 말을 비틀었을 수도 있다. 사실 지젝은 체제 재현의 ‘불가능성’이라기보다 그 필연적 ‘불완전성’을 언급한 셈인데, 자신의 불완전성을 의식하는 재현과 재현의 포기(또는 어떤 극단적 형태의 ‘불가능성의 재현’)는 엄연히 다르다. 황정아의 ‘물음의 미학’은 그가 탁월하게 논하는 아감벤(G. Agamben)의 아우슈비츠에 대한 시각과 통할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의식하겠지만) 라깡주의자 지젝에 의해 재해석된 헤겔적 총체성의 개념과도 연속적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나면, 황정아가 우리 시대 담론지형 안에 되살려놓은 총체성 개념이 리얼리즘론에서 내내 주장해온 바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질문을 바꿔 쓰면, 자신의 불완전성이 자체 내에 기입된 ‘총체적’ 재현은 기존 리얼리즘의 미적 이념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총체화를 체제만이 아니라 주체의 차원에서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총체화 2
전체의 재현은, 그것이 진정한 재현인 한, 물음을 생산한다. 그것은 사실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 의미에 관한 물음이다. 그것은 대상의 인식에 관여하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 주체화, 즉 주체적 세계의 형성에 관여한다. 이 물음과 그에 따른 발견을 통해 주체는 경험을 의미에, 현상을 본질에, 개별 사건을 전체에 연관시키며, 또한 이미 구성된 전체를 계속 변화시켜나간다. 이런 주체적 총체화는 체제적 총체화와 단순히 병행하지도, 일치하지도, 별개로 이뤄지지도 않는다. 체제적 총체화는 대개 주체적 총체화를 통해 작동하나, 후자는 체제적 총체화를 불완전하게 만드는 하나의 결정적 요인이기도 한 것이다. 이 잠재적 불화는 지배-저항, 은폐-탈은폐, 물화-탈물화라는 관념으로는 온전히 파악될 수 없다. 자본주의 세계가 근본적으로 ‘무세계적’(worldless)이라는 인식12)은 갈수록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것을 우리 식으로 풀면, 자본주의적 총체화가 자신의 총체성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기보다, 역설적이지만 일체의 총체적 의미를 사회와 개인의 삶에서 박탈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말이 될 것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에 동참하는 것은 순전한 강제에 의해서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의미’를 거기서 발견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없다. 특히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는 다양한 선택을 통해 동질화하고, 불연속을 통해 영속화하며, 느슨함을 통해 총체화한다. 주체적 세계의 보존은 체제적 본질의 폭로보다 이 ‘무세계의 세계’에 더 위협적이다.
주체적 총체화, 곧 ‘나의 의미있는 세계’를 형성해가는 일이 재현을 내포하기는 하나, 그 본질이 대상 인식에 있지 않다는 점은 다시 강조해야 한다. 주체의 세계는 체험적이고 감각적인 세계, 환경과 주체 자신의 관계에 대한 감각들로 충만한 세계다. 이 세계와 그것의 의식적·언어적 표현 사이에는 근본적 상위(相違)가 있다. 오래전 싸르트르( J.-P. Sartre)는 키르케고르(S. Kierkegaard)를 빌려 “사유에 대한 특정하게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우선성, 즉 실재적인 것은 사유로 환원될 수 없음”을 강조한 바 있다. 불가지론이나 비합리주의로 보일 만하지만, 싸르트르에 따르면 키르케고르는 이런 관점으로 인해 “헤겔과의 관계에서 리얼리즘을 향한 진보”의 표지(標識)가 된다.13) 총체화의 세계는 또한 욕망의 세계, 가능성의 세계, 다시 싸르트르의 용어를 빌리면 ‘기투’(企投, project)의 세계다.14) 거기에는 언제나 주체 자신을 벗어나는 것, 미리 튀어나가서 주어진 대상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불화하게 되는 것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체제적 총체화의 불완전성에 버금가는 주체적 총체화의 불완전성이 생겨난다. 지젝이 말한바 ‘전체’ 관념의 불완전성은 체제와 주체에 각기 다른 이유로, 그러나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여기서 이런 질문을 제기해보자. 총체화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총체성의 개념을 무효화하는가? ‘그렇다’고 답한다면 그것은 내가 ‘되어가는’ 존재라고 해서 나의 인격적이거나 존재론적인 지속성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되어감’으로서의 ‘자기다움’(being)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총체화 자체의 이해가 불가능하다. 총체화는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총체성은 총체화 과정의 완결상태도, 거기서 유추된 초월론적 가상(즉 착각)도 아니다. 그것은 그 과정의 지속성 자체다.
이 모든 논의의 미학적 함의는 무엇인가? 장편소설이 총체성의 형식이라는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오늘날 이 말은 다음과 같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즉 장편에서는 총체화하는 체제의 내재적 불가능성과 총체화하는 주체의 내재적 불가능성, 체제의 결락과 재현의 한계가 동시에 형상화되어야 한다. 물론 실제로 형상화되는 것은 두가지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다. 체제의 재현이 주체적 세계의 형성과 완전히 동일한 과정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체제와 주체의 세계가 동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체제적인 힘이—가령 주체에 대한 압력이나 주체의 욕망의 형태로—주체의 의미세계 안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G. Deleuze)의 용어를 빌리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체제 ‘자체’가 아니라 (그런 것은 추상의 세계에만 존재한다) 체제와 주체의 ‘접속’이다.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체제의 주체적 재현과 재현의 한계의 형상화가 맞물리는 구체적인 양상이다. 그것을 파악함으로써만 우리는 앞서 제기한 질문, 즉 자기 한계를 의식하는 재현이 왜, 그리고 어떻게 리얼리즘적인지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근래에 개진한 ‘정서’의 개념에 주목해보자. 그가 정서를 리얼리즘(사실주의) 서사의 한계지점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정서
철학과 심리학에서부터 정치적 담론과 뇌과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정서는 가장 ‘핫한’ 주제 중 하나지만, 제임슨이 리얼리즘론에 정서를 끌어들인 것은 좀 의외다. 정서의 논의에서 늘 그렇듯이 제임슨도 자신의 개념을 유사 개념과 구별한다. 그는 “정서”(affect)라는 용어의 선택이 궁여지책이었다고 하면서 그것을 “명명된 감정”(named emotion)에 대립시키는데, 그 의도는 다음과 같다. “정서(또는 정서들)는 모종의 방식으로 언어를, 그리고 언어에 의한 사물(및 느낌feelings)의 명명을 피해가는 반면, 감정은 무엇보다 일군의 명칭들로 분류되는 현상이다.”15) 언어에 저항하는 모호한 ‘정서’와 쉽게 언어화되는 가시적 ‘감정’의 구별, 그리고 이에 기초한 재현 문제의 제기는15) 전형적인 모더니즘 미학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제임슨은 자신의 ‘정서’ 개념이 포스트모던한 것의 이론과 경험에 연관되어 있음을 밝힌다. 즉 정서는 시간성의 소멸과 ‘영구적 현재’, 이 현재 속에서 유일하게 지속되는 경험으로서의 몸의 감각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임슨은 이런 의미의 정서를 이제 19세기 중반으로 돌아가 당대의 서구문학 속에서 발견한다. 명명할 수 없는 정서는 자신을 담아낼 새로운 재현적 구조물과 그에 수반하는 언어적 혁신을 요구하는데, “그러한 언어적 요구가 (…) 처음으로 들리고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은 19세기 중반쯤, 말하자면 부르주아 시대의 1840년대다.”16) 문학에서 정서의 출현은 명명된 감정의 체계와의 경쟁을, 나아가 감각세계의 역사적 변화를 함축한다. 정서는 고정된 의미에 저항하는 감각적 경험이자 ‘실존적인 것’으로서, 의미와 실존 사이의 화해 불가능한 결별은 근대성의 근본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의미화되지 않는 실존은 부르주아적 주체성의 특징으로 이해된다.) 플로베르(G. Flaubert)와 보들레르(C.-P. Baudelaire)는 감각에서의 이러한 근대적 변화를 가리키는 지표다. 소설에서 이 변화는 “정서의 리얼리즘”17)을 탄생시킨다.
이렇게 정서 및 정서와 문학의 관계를 역사화하면서 제임슨은 19세기 리얼리즘의 내적 구조를 설명하는 새로운 틀을 제시한다. 이제 리얼리즘은 부르주아사회의 형성에 따른 탈신비화나 그 사회 자체에 대한 비판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시간적으로 리얼리즘의 양끝을 구성하는 두가지 상이한 ‘충동’의 긴장된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된다. 한쪽에는 리얼리즘의 시발점이 되는 서사(이야기)의 충동이, 다른 쪽에는 결국 리얼리즘의 해체를 가져올 정서의 충동이 있다. 여기서 ‘충동’을 ‘시간성’으로 바꿔 읽어도 좋은데, 서사가 연대기적 시간성을 함축한다면 정서는 과거와 미래가 없는 현재, 즉 시간성의 종말 자체를 자신의 고유한 시간성으로 지닌다. 정서는 “시점(視點)의 지배”18)에 대해 싸움을 벌이기도 하므로, 우리의 맥락에서는 19세기 리얼리즘의 내적 모순을 총체화하는 힘과 총체화에 저항하는 힘 사이의 적대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율배반적인 ‘정서의 재현’을 중심으로 문학사의 한 시대를 설명하면서 제임슨은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전래의 시대구분에 대해 약간의 변형을 시도한다. 한편으로는 ‘정서의 출현’ 이전과 이후의 리얼리즘이 유의미하게 구별된다. 다른 한편 정서 리얼리즘을 구성하던 서사와 정서의 긴장이 깨지고 리얼리즘이 붕괴한 결과 세가지의 주요 흐름이 나타나는데, 곧 모더니즘, 유사-리얼리즘적 대중서사, 그리고 포스트모던 서사다.19)
제임슨의 광범위하고 복잡한 논의에서 일반화된 주장을 몇가지 뽑아보았는데, 이 내용만 해도 여기서 일일이 검토하기는 벅차다. 다만 앞서 논의한 총체화와 재현의 문제와 관련하여 제임슨의 ‘정서론’이 어떤 의미를 지닐지 생각해보자.
첫째, 제임슨이 시도한 정서 개념의 역사화는 우리가 살핀 총체화하는 주체의 개념 역시 역사화할 필요를 암시한다. 정서의 개념, 특히 포스트모던한 것의 경험에서 끌어온 정서 개념을 플로베르와 보들레르를 넘어 리얼리즘 소설가로 불리는 19세기 작가들의 작품 전반에 적용할 수 있을지, 일부 작가에 관한 제임슨 자신의 논의가 적실한지는 따로 검토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 시기의 서구 리얼리즘을 흔히 유통되는 용어인 ‘비판적 리얼리즘’ 대신 ‘정서 리얼리즘’으로 일반화하여 부르는 것은 일단 유보해야겠고, 앞의 용어에 축적되어온 풍부한 미학적 함의를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이 경우 1840년대는 결정적 기준점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서사와 정서, 서사화된 기억과 그에 편입되지 않는 ‘경험’, 역사성(또는 과거·미래가 응축된 현재성)과 순수한 현재성 등의 모순적 공존은 다름 아닌 총체화하는 주체의 구조를 적시하지 않는가? 이 구조는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겪은 서구·비서구 사회의 개인들에게서 광범위하게 발견될 텐데, 어쩌면 그것은 제임슨이 파악하듯이 꼭 근대성의 특징이라기보다 근대 이후 ‘장기지속’에 속하는 특징일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제임슨의 주장이 비서구는 물론 서구 내에서도 극히 일부의 현실을 설명할 뿐이라는 전제가 따른다.)
둘째, 제임슨은 ‘명명된 감정’과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정서가 리얼리즘 문학에서 인식에 대해 보조적이거나 주변적인 현상이 아니라 리얼리즘의 정수에 해당함을 주장한다. 물론 그의 주장은 특정 시대와 지역에 국한된 것이지만, 체제의 ‘총체적 재현’의 이념과 완전히 결별하지 않은 현대 제3세계 소설에 그 주장을 적용하거나 변용해볼 여지는 많다.
셋째, 제임슨이 개념화하는 ‘정서의 리얼리즘’은 발자끄(H. Balzac)에게서 ‘비판적 리얼리즘’의 원형을 찾는 엥겔스(F. Engels)-루카치의 미학·비평 담론에 근본적으로 도전한다. 이 도전이 ‘발자끄(의미)에서 플로베르(실존)로’의 형태로만 제기되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형태는 아마도 ‘인식에서 존재로’일 것이다. 루카치에게 제기된 바 있는 ‘인식론주의자’라는 비난은 돌이켜보면 부당한 면이 있고 그런 비난을 가한 쪽 스스로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았던 듯하지만, 삶과 예술에 대한 그 모든 심오하고 유연한 사유에도 불구하고 루카치가 장편소설의 가치를 무엇보다 현실의 (비판적·예지적·총체적) 인식에서 구했음은 사실이 아닐까 싶다. 가령 제임슨이 말하는 ‘정서’를 루카치라면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에게도 작품은 주체의 의식과 감성을 거쳐 구성된(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그 구성의 원리이자 목적은 모순적 현실의 ‘본질적인 동시에 가상적인’ 재현에 있다. 그에게 ‘정서’는 아마도 이렇게 재현되는 세계의 일부, 즉 재현된 세계 내에 배치된 요소이거나, 아니면 미학적으로 실패한 재현을 뜻하지 않을까. 그는 삶의 본원적 비완결성을 인정하지만, 이런 성질조차 재현에 포함될 요소이지 재현의 비완결성이나 재현의 한계로 ‘구현’될 요소로 간주하지는 않았을 성싶다. ‘인식에서 존재로’는 인식의 부정이 아니라 고양을 나타낸다. 작품의 ‘정서적’ 차원은 거기에 머무는 주체(작가, 주인공, 독자)의 세계인식이 종결되지 않았고 종결될 수 없지만 이 불가능성이 주체의 가장 고유하고 내밀한 가능성으로, 체제와의 가장 ‘그다운’ 형태의 접속으로 전화되었음을 나타낸다. 정서에서 체제적 총체화의 불가능성과 주체적 총체화의 불가능성은 겹쳐진다. 정서는 재현의 한계지점일 뿐 아니라 주체의 새로운 출발점, 세계를 향한 ‘궁리’가 다시 시작되는 곳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서에 함축된 문학적 가능성의 궁극적 발현형태를 우리는 ‘존재 리얼리즘’으로 고쳐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존재 리얼리즘
여기서 ‘존재 리얼리즘’으로 지칭하는 것은 제임슨이 설명한 19세기의 ‘정서 리얼리즘’과 동일하지 않다. 사실 존재 리얼리즘의 논의는 제임슨의 시대구분과 상당히 어긋나는 구도를 전제한다. 제임슨의 정서 리얼리즘이 19세기 중반의 서구 소설과 소설이념을 가리킨다면, 존재 리얼리즘은 거기에 내재한 가능성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어떤 모순적 과정을 거쳐 점차 구체화된 결과로서의 이념과 작품을 가리킨다. ‘모순적 과정’이란 무엇보다 모더니즘의 역할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제임슨이 정서의 개념을 포스트모던한 것에서부터 19세기 리얼리즘으로 소급해 끌고 들어왔음은 앞서 언급했지만, 정서에 관한 한 그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에도 본질적 연속성을 가정한다. 변증법의 공식에 충실하게 그는 리얼리즘의 내적 모순에서 그것이 붕괴하고 새로운 양식이 출현할 근거를 찾는다. 모더니즘은 리얼리즘에 내재한 정서의 논리가 강화되고 자율화된 데 따른 결과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인가?’ 나는 모더니즘이 역사적·체제적 현실에서 물러나 개인의 의식으로 기어들어간 왜소한 문학이념이라는 가설 또는 통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체제 재현의 방식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분명한데, 그 변화의 핵심은 제임슨이 다른 곳에서 말하듯이 현실을 ‘유토피아적’으로 대체하는 물화된 감각을 환기하는 것이라기보다, 의식과 대상의 분리를 허용하지 않는 감각이나 정서로서의 세계체험을 의도적으로 환기하는 것이다.20) 이 시도가 종종 실험 자체의 논리에 의해 의식과잉 상태로 귀결되고, 따라서 체험적 리얼리티의 환기라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을지라도, 내가 보기에 모더니즘적 실험의 단계가 없었더라면 존재 리얼리즘적 창작도, 제임슨 자신의 정서론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모더니즘은 앞선 리얼리즘이 붕괴한 결과이자 원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이전과 이후의 문학을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거창한 가설을 좀더 밀고 나아가보자. 앞서 언급했듯이 제임슨은 19세기 중반에 출현한, 적어도 그 시기의 소설들이 포착하려고 애쓴 정서가 기존의 감정체계와 경쟁을 벌였다고 본다. 부르주아시대가 열린 후 ‘명명된 감정들’의 체계가 작동한 방식을 우리는 ‘센티멘털리즘’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서구에서 리얼리즘의 발흥은 곧 센티멘털리즘의 발흥이었다. 이로부터 리얼리즘의 발전과정을 거칠게 도식화해보자면, 센티멘털-리얼리즘→비판적 리얼리즘(여기에는 ‘리얼리즘’의 이름에 값하는, 즉 덜 교조적-낭만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포함된다)→존재 리얼리즘이 될 것이다. 이 가설이 설득력을 지니려면 각각의 항에 대해, 그리고 서로의 연관에 대해 상세한 설명이 뒤따라야 하겠으나 여기서는 몇마디만 첨언하기로 한다.
리얼리즘 앞에 수식어를 붙여 그 ‘종’을 구별하는 것은 개별 작품의 성취에 대한 판단을 오도할 우려가 없지 않고, 한편 그 수식어가 우리의 경우를 포함한 제3세계 문학의 특수성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난이 일 법도 하다. 그러나 이런 구별은 리얼리즘을 동질적이고 영구한 이념으로 신화화하는 대신 역사적 현상 또는 ‘생물’로 파악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으며, 나아가 그 ‘생물’의 운동공간을 서구로 한정하지 않으려는 의도 또한 포함하고 있다. 물론 변화하는 ‘지배종’에 따라 리얼리즘의 시기를 구분하는 것이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18세기 문학에도 사회비판적인 요소가, 19세기에도 존재론적 관심이 있었으며, 20세기의 리얼리즘 소설은 종종 센티멘털리즘과 비판적 리얼리즘의 변형된 버전이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문학에는 다른 문학이념(혹은 반문학 이념)과 더불어 앞서 말한 세가지 리얼리즘이 공존한다. 심지어 하나의 작품에서 그것들을 분간하는 것도 가능한데, 길게 논할 여유는 없지만 권여선(權汝宣)의 『레가토』(창비 2012)도 한 예가 될 것이다. 그 나름의 울림을 지닌 작품이나, 1980년대 묘사의 일부와 연관된 ‘명명된 감정’(특히 긍정적 감정)의 처리방식에는 토를 달고 싶다. ‘명명된 감정’은 그것대로 미학적 역할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그것이 작가(주체)의 세계 탐색에 방해가 되는 면이 없지 않다. 이에 비해 작가의 이전 장편 『푸르른 틈새』(살림 1996)에서 정서의 흐름은 센티멘털리즘에 자리를 내주는 경우가 거의 없고 우리를 존재의 끝자락으로 몰아세우곤 한다. 이 점에서 그것은 최근에 나온 한강(韓江)의 『소년이 온다』(창비 2014)가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이 주체적 세계로서의 체제 경험을 절묘하게 환기한 것에 비견된다. 여기서 그는 1980년 광주를 자명한 의미를 내장한 역사적 기억으로도, 초역사적인 ‘인간의 문제’로도 환원하지 않는 가운데 생생한 감각적 현재로서 재창조해낸다. 이 소설에서 과거란 현재로 재창조됨으로써만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그러한 시간, 우리의 현실에 새롭게 나타난 ‘사건’으로서의 시간이다. 현실의 모사라기보다 현실의 틈을 벌려 새로운 현실의 자리를 만드는 것, 있어야 하나 부재하는 어떤 것을 비로소 있게, 경험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그것이 애초에 있어야 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그렇게 현실의 지평에, 즉 가능성의 세계이기도 한 주체의 감각세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 진정한 실천이자 포이에시스(poiēsis)로서의 창작—이것이 리얼리즘의 본령이 아닐까.21)
존재 리얼리즘이 제임슨적 의미의 ‘정서’에 민감하다고 해서 반드시 더 ‘감성적’인 언어에 경도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본질은 더 슬퍼하거나 더 기뻐하거나 더 분노하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 또 그 본질은 모더니즘 미학의 상투화된 버전에서 들먹이곤 하는 아리송한 의미나 머뭇거리는 말, 또는 침묵의 제스처에도 있지 않다. 물론 가시화된 감정과 실험적인 언어가 삶의 체제성과 체제의 불가능성을 드러낸다면 그건 또다른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존재 리얼리즘은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알레고리와 단순히 대척관계에 있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것들과 동일한 층위에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포스트모던하거나 알레고리적인 리얼리즘이 가능하다. 이는 사실(주의)적 묘사나 ‘사실주의적 기율’이 존재 리얼리즘과 맺는 관계의 우연성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리얼리즘 문학에는 어쨌거나 주어진 세계와의 구체적인 대결의식이 있어야 하고, 또한 세계의 드러남이나 열림에서 오는 놀라움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전투적 구체성과 놀라움이 ‘사실주의적으로’ 확보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22) 리얼리스트가 맞서는 대상을 ‘체제’로, 구체성을 ‘현장성’으로 바꿔 불러도 마찬가지다. 현장성은 체제와 주체(주체적 세계)의 ‘접속’이 생생함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는데, 그 생생함은 사실주의적으로 구현될 수도 있고, 알레고리 같은 다른 방식으로 구현될 수도 있다. 물론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묘사가 고유하게 지니는 힘 또는 미학적 가치가 있으며, 그것은 현실의 알레고리적 환원으로 대신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사실주의·전형성의 구현·리얼리즘이 개념상 서로 구별되어야 할 뿐 아니라(이는 기존 리얼리즘론에서도 종종 재확인해온 바다), 리얼리즘적 성취는 사실적 재현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다시 말해 사실적 재현이 리얼리즘의 핵심은 아니어도 하나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관점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관점을 따를 때 사실주의에 기초하지 않은 작품의 리얼리즘적 가능성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고, 그 가능성을 인정할 경우에는 설명의 일관성이 문제될 수 있다. 가령 현실과의 대면에서 알레고리에 깊이 의존하는 작품을 보자. 알레고리는 사실이나 사실적 상황 대신 명백한 의미와 ‘명명된 감정’을 가지고 작업하는 서술양식이다. 그러나 물적 지배체제를 떠받치는 의미와 감정의 체제에 충격을 가하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조장하는 전복적인 알레고리가 있으며, 우리는 이것을 (주로) 사실주의의 효과로 설명하지 않으면서 존재 리얼리즘에 포함시킬 수 있고, 그래야 마땅하다. 예를 들어 박민규(朴玟奎)의 『핑퐁』(창비 2006)이나 황정은(黃貞殷)의 『백(百)의 그림자』(민음사 2010)가 그렇고, 바깥으로 눈을 돌리자면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문제적인 작가 중 하나인 쿳시( J. M. Coetzee)의 여러 작품이 그렇다. 쿳시의 강점은 주체의 제한된 경험의 알레고리적 설정을 통해 체제, 즉 ‘배제된 내부’로서의 수용소 체제이기도 한 아파르트헤이트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가시화할 뿐 아니라, 주체의 의미세계, 즉 작가 자신과 같은 양심적 아프리카너의 자의식과 당혹감을 한치의 자기연민 없이, 그러면서 예상을 뛰어넘는 강도와 깊이로 전달한다는 것, 그로써 독자가 기존의 어떤 안전하거나 명확한 ‘입장’과도 동일시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철의 시대』(Age of Iron, 1990)에서 기꺼이 백인으로서의 내면적 수치를 감내하며 살아온 커런 부인이 그런 태도조차 진실을 회피하는 장치였음을 고백하면서 “수치심의 용도”를 말할 때 우리는 더이상 ‘명명된 감정’의 세계에 갇혀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보다 알레고리적 측면이 더 강한 『마이클 K의 삶과 시대』(Life & Times of Michael K, 1983), 『포우』(Foe, 1986), 『치욕』(Disgrace, 1999)23) 등이 체제와 주체의 ‘접속’을 조금이라도 덜 강렬하거나 덜 문제적인 방식으로 제시한다고도 할 수 없다. 흑인의 목소리를 최소한으로 절제하면서도—심지어 『포우』에서는 주요 인물인 흑인이 혀가 잘린 채 등장하는데, 주지하듯이 이는 총체적 박탈의 역사를 지닌 흑인의 처지와 백인에 의한 흑인 재현의 근본적 한계에 대한 자의식을 동시에 표상한다—쿳시는 흑인의 존재를 백인이 궁극적으로 대면해야 할, 그러나 자신의 철저한 해부와 해체를 통해서만 겨우 다가설 수 있는 역사적 실재로서 강력하게 환기한다. 쿳시가 어느 면에서는 ‘포스트모던’하지만 결코 재현 불가능성의 유희를 즐기는 포스트모더니스트나 메타픽션 작가가 아니라 리얼리스트로 불려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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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령 백낙청(白樂晴)이 1996년에 내놓은 「로렌스와 재현 및 (가상)현실 문제」(『안과밖』 창간호)를 보라. 내가 알기에 이 글은 그가 당대의 다른 이론들과 대면하여 리얼리즘론의 핵심 명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재구축하고자 한 일련의 시도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한다. 물론 이후의 비평과 논평이 리얼리즘론으로서 무의미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리얼리즘론이 다른 이론적 담론과 전면전을 벌이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그 글에서가 아닌가싶다.
2) 황정아 「리얼리즘과 함께 사라진 것들—운동으로서의 ‘총체성’」, 『창작과비평』 2014년 여름호.
3) 같은 글 19면.
4) 「비동시성의 동시성—세계 체제 속에서의 한국 소설을 논하기 위한 예비적 질문들」, 『문학과사회』 2014년 여름호.
5) 같은 글 555면.
6) 같은 글 561, 569면.
7) 같은 글 562면.
8) 『미학』의 출간 당시 제목은 『미적인 것의 고유한 특성』이다. 삶의 부정성과 관련하여, 가령 다음을 보라. “과연 인간의 인격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가, 또 이러한 전체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보존될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전체성 가운데 무엇이 본질적이고 무엇이 피상적인가 하는 문제들은 인간의 모든 활동 속에서 끊임없이 제기”된다. 따라서 총체성, 지속성, 현상과 본질의 통일에 대한 “긍정은 동시에 부정”이며, “그러한 부정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확정이요 인격의 본래적인 지속성”이다. 요컨대 삶은 하나의 질로 요약되지 않으며, 전체의 재현은 늘 부정당할 위기에 처한다. 여기서 루카치와 현상학 사이의 거리는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루카치 미학』 제2권, 임홍배 옮김, 미술문화 2000, 91면.
9) Ernst Bloch, The Principle of Hope, Vol. 1, trans. Neville Plaice et. al., Cambridge: MIT Press 1985 참조.
10) 황정아, 앞의 글 32면.
11) 같은 글 25면.
12) Slavoj Žižek, The Parallax View, Cambridge, MA: The MIT Press 2006, 308, 317~19면 (우리말 번역본은 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604, 622~25면) 참조. 지젝은 바디우로부터 ‘무세계적’이라는 표현을 가져오면서 부분적으로 그를 비판하기도 한다. ‘무세계성’ 개념의 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렌트로, 다시 하이데거로 향하게 될 것이다.
13) Jean-Paul Sartre, Search for a Method, trans. Hazel E. Barnes, 1963; New York: Vintage 1968, 12면. 싸르트르는 감각의 세계에 역사를 도입한 맑스주의와 실존주의가 키르케고르에서 다시 한발 더 나아간 ‘진보’라고 본다. “운동하는 변증법적 총체화”는 “다름 아닌 역사”다(30면).
14) 같은 책 91~100면 참조.
15) Fredric Jameson, The Antinomies of Realism, London: Verso 2013, 29면.
16) 같은 책 31면.
17) 같은 책 35면.
18) 같은 책 11면.
19) 같은 책 187~88면 참조.
20) 졸고 「탐닉의 효용—모더니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크리티카』 창간호, 2005, 188~214면)에서는 제임슨이 『정치적 무의식』(The Political Unconscious, 1981)에서 개진한 모더니즘론에 문제를 제기하고 모더니즘의 역사적 의의를 이 자리에서보다 상세히 논했다.
21) 반면 『소년이 온다』의 서술자가 2009년에 용산의 불타는 망루를 보고 “저건 광주잖아”라고 중얼거렸다는, 에필로그에 소개되는 에피소드는 ‘80년 광주’의 역사적 보편성을 다소 작위적인 방식으로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 에필로그는 에필로그로 읽어야 한다.
22) 사실주의가 ‘실사구시의 정신’과 같은 어떤 정신성으로 이해된다면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의 관계는 우연적인 것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둘을 구별하는 이유에 관해 의문이 들 법한데, 국내에서 그 구별과 동시에 둘의 본질적 연관을 가장 치밀하고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백낙청의 경우, 자신의 ‘리얼리즘’ 개념에 내재한 존재론적 성격이 더 표면화하고 구체화될수록 리얼리즘의 인식적 지향을 명시해줄 개념으로서 ‘사실주의’의 필요도 오히려 더 강화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백낙청은 리얼리즘의 한 축으로서의 ‘사실주의’에서 ‘사실(주의)적 묘사’라는 의미도 포기하지 않은 듯하다. 이 글에서 제시하는 존재 리얼리즘 개념의 많은 부분은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에 빚지고 있지만 이 둘의 실제 관계에 대해서는 따로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23) 『치욕』의 알레고리적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앞의 두 경우와 달리 이 작품의 서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구체적 상황과 심리에 대한 사실적 묘사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흑인 학생과 성적 관계를 맺은 백인 교수의 딸이 흑인에게 강간당하고 교수는 개의 사체를 처리하는 신세로 전락한다는 플롯에 담긴 역사적 알레고리의 의미는 명확하다. 소설에서 달성한 리얼리즘이 그러한 알레고리와 어떤 식으로 엮여 있는지는 별도로 살펴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