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고은 高銀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1958년 등단. 시집 『문의마을에 가서』 『새벽길』 『조국의 별』 『남과 북』 『두고 온 시』 『백두산』 『만인보』 『허공』, 시선집 『어느 바람』 등이 있음.
뒷산
2009년 8월 3일 새벽 잠결에 온 것
바람 부시는 날이사 내 몸뚱어리 내 못난 손발도
씌어대는지
씌어대는지
금방 소나무 가지들로 되고 말아
그예 바람에 홀린다
바람 부시는 날이사 모처럼 내 몸 안 설킨 오장육부도
바깥 솔바람소리에 쓸려
아리고
아리고
아리기만 하다
어머니께서 뒷산에 가자며 꿈결 서른살인 듯 앞에 서신다
어머니의 빈 바구니에 벌써
멀가까운 솔바람소리가 바슬바슬 담기신다
뒷산 왼 골짝 솔바람 속에 안기노라면
어머니는 소나무 밑둥 송이 하나를 슬쩍 따
바구니에 담고는 웃음지으신다
용하게
용하시게
가을이 다 오셨다 바람 부시는 날이었다
또다시 어머니의 뒤를 따라나섰다
뒷산 오른쪽 골짝에 이르러
솔바람소리는 다친 듯 씁쓸하나
정작 솔바람은 달착지근하시다
웬일로 송이가 아니 계셨다
누가 따갔나보다고 내가 구시렁대자
아니란다 누가 먼저 따가지 않아도
하나도 안 보이는 날이 있단다라고
어머니가 무슨 초록 인기척에 솔깃해하며 말하신다
그때였다
어머니 발 앞 거기
쌓인 솔잎 사이로 빙긋이
송이 하나가 계셨다
오늘 어머니의 저승 어디이신지 통 모른다
이런 날
감히 나도 몇마디 발보일까보다
시가 바구니 가득 담기시는 날이 있고
시가 하나도 담기시지 않는
빈 바구니의 퀭한 날이 있다
아마도 시가 푹 주무시는 동안
개구리로
배암으로
에미곰으로
푹 푹 겨울잠 깊이 주무시는 동안
내 빈 바구니의 가난도
별 뾰쪽할 수 없이 잠결에 접어드는 것인지 아닌지
바깥 붐비는 가루눈들 조금 기어들어와
내 잠결의 콧등이나 눈가생이에
무람없이 내려앉으며 녹으시는 것 모른다
날아가는 법
서릿밤
가는 기러기네들 울음소리 숨 걸린 울음소리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릿밤 자정 저쪽
함께 가던 기러기 한분 지쳐
날개 접으려 할 때
날개 접고
그만 떨어져버리려 할 때
안돼
안돼 하고
함께 가던 기러기 두분이
양켠에서
접힌 날개 겯고
뒤서거니
앞서거니
그 기러깃길 이어가는 것 봐
가는 동안
다시 살아난 기러기
날개 일으켜
막 태어난 듯 떳떳해지며
서릿밤 언 새벽길
벌써 저만치 두런두런 가는 것 봐
아니 그 기러기네들 가다가
일제히
빈 들
작년의 빈 들
신철원 구철원에 내려앉아
곤히 잠들 때
번갈아가며
한분씩 눈 뜨고 살펴
잠든 분들 지켜내는 것 봐
아홉번이나 열번도 많지
한두번쯤
나나 자네나 언제 이래보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