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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명진 『할리우드 사이언스』, 사이언스북스 2013

누가 과학비평을 두려워하는가?

 

 

강양구 姜亮求

프레시안 학술·과학 담당기자 tyio@pressian.com

 

 

165-촌평-할리우드_fmt『할리우드 사이언스』는 ‘영화비평’과 ‘과학비평’ 사이에 놓인 독특한 책이다. 이 말에서 많은 이들이 낯선 느낌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문학, 영화 심지어 정치 비평을 표방하는 수많은 말과 글에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서 ‘과학비평’을 업으로 삼고 있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예를 들어보자. 한국문학사의 가장 빛나는 비평들이 국문과, 영문과, 독문과, 불문과 등에서 문학을 공부한 이들에 의해서 생산되었음에도 누군가가 ‘문학을 전공한 이들만이 소설을 제대로 읽고 의미있는 비평을 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면 한동안 SNS에서 조리돌림을 당할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문학이나 영화를 심리학자나 진화학자 심지어 경제학자나 물리학자의 눈으로 읽는 일이 장려된다. 어느 순간부터 문학평론이 당대의 가장 유행하는 철학, 사회학, 심리학, 심지어 진화심리학 같은 과학이나 혹은 여타 사회과학 방법론의 실험대가 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다른 영역에서는 비평의 벽이 갈수록 낮아지는데, 왜 유독 과학만은 요지부동일까? 다수의 과학자가 과학의 중요한 특징으로 ‘경이로움’(sense of wonder)을 꼽는 사정까지 염두에 두면 이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경이로움이야말로 바로 문학, 영화를 비롯한 온갖 예술의 기본적인 특징이 아니던가. 똑같이 경이로운데 문학, 영화는 수년간 훈련받은 비평가뿐 아니라 옆집 아저씨도 별 두개, 세개를 줄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은 노벨상 정도는 받아야 그 과거·현재·미래를 논할 자격이 되고, 최소한 대학에서 박사학위 정도(석사도 절대 안된다!)는 받아야 특정 분야를 놓고서 공개적으로 한두마디라도 거들 수 있다. 도대체 이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할리우드 사이언스』를 읽는 내내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공교롭게도 이 책이야말로 과학비평의 한 본보기를 도발적으로 제시한,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과학비평집이기 때문이다. 좋은 비평이 늘 그렇듯이, 이 책에 실린 서른편의 에세이는 그 자체로 과학비평의 존재 이유를 유감없이 증명한다. 그리고 앞의 질문에 답하며 과학비평의 방향까지 제시한다.

과학을 특별한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흔히 드는 이유는 실재(實在)와의 관계이다. 예를 들어, 어떤 과학자들은(그중 상당수는 좌파를 자처하는데) ‘과학은 그 자체로 실재를 드러내는 활동이므로 (다수결 같은 정치논리에 휘둘리기 십상인) 과학의 민주화 같은 주장은 말도 안된다’고 주장한다. 훈련받은 과학자들이 과학을 독점해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저자 김명진(金明振)은 태양을 도는 아홉개의 행성 중 하나에서 하루아침에 그 지위를 박탈당한 명왕성을 둘러싼 논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명왕성 파일」(2011PBS 방영)을 소개하면서, 이런 주장이 과연 적절한지를 따진다. 왜냐하면 명왕성의 행성 지위를 놓고서 논쟁을 벌이던 과학자들이 2006년에 투표로 그 가부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명왕성이 행성 지위를 잃은 데 격분한 사람들이 과학자에게 “언제부터 과학적 사실을 투표를 해서 정했느냐”라고 되묻는 대목에 주목한다. 평소 ‘과학은 실재에 뿌리박힌 특별한 지식’이라고 되뇌어온 과학자들은 이제 그런 주장에 익숙해진 일반인으로부터 똑같은 논리로 “면박을 당하는 굴욕을 경험하게”(70면)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일은 과학자 스스로도 들여다보기 쉽지 않은 과학에 켜켜이 싸인 역사의 흔적을 드러내고, 또 당대의 과학지식을 둘러싼 열띤 논쟁을 대중 앞에 활짝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학비평에 꼭 필요한 소양은 당연하게도 과학을 비평의 대상으로 상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럼 과학자로서 훈련을 받은 경험은 어떨까? 과학자야말로 과학비평의 적임자일까? 그래서 마치 창작과 비평이 문학을 비롯한 예술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로 자리잡은 것처럼, 과학자 공동체 내에서 창작뿐 아니라 비평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또 그것을 수행하는 과학자가 나올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과학을 특별한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이들은 그 이유로 과학자 공동체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은 과학자 공동체가 보통 사람보다 똑똑하고, 세상사에 초연할 뿐 아니라, 돈과 같은 온갖 이해관계로부터 다른 집단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것이라고 상상한다. 로버트 머튼(Robert C. Merton) 같은 사회학자는 이런 통념을 좀더 공식화해서 과학자 공동체가 다른 집단과는 다른 (불편부당하고 끊임없이 회의하며 공동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독특한 규범에 의해서 운영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가끔 “미치고 나쁘고 위험한”(159면) 과학자가 있더라도 과학자 공동체는 자정작용을 통해서 이런 일탈을 가차없이 처단할 것이다.

그런데 과학자 공동체에 덧씌운 이런 통념은 과연 얼마나 현실에 부합할까? 정년퇴직한 한 과학자가 3년에 걸쳐서 대학 실험실에 카메라를 들이대 완성한 다큐멘터리 「천성적으로 집착이 강한」(2009Richard Rifkind 외 연출)을 보자. 저자는 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과학자의 모습이 과학자 공동체를 묘사하는 통념과 크게 다름을 지적한다. 과학자는 “강한 규율과 위계 구조”(176면)에 기반을 둔 실험실에서 “끝도 없이 계속되는 반복 작업”과 “고된 노동(과학자들 스스로의 자조적인 표현에 따르면 ‘삽질’)”(174면)을 해야 한다. 이들은 선뜻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 실험뿐 아니라 “다른 실험실과도 사투를 벌여야 한다.”(178면) 매일 아침 자기와 겹치는 논문이 아직 나오지 않은 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떤 과학자는 연구결과를 조작하고 싶은 유혹에 휩싸인다(알다시피 몇몇은 실행에 옮긴다). 어떤 과학자는 자신과 경쟁하는 과학자의 논문을 동료심사(peer review) 과정에서 일부러 퇴짜 놓는다. 기업의 후원을 받은 또다른 과학자는 실험에 성공해놓고도 발표하지 못한다. 실험 성공에 따른 특허가 기업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유행을 좇지 못한 대다수의 과학자는 성공을 하고서도 『네이처』(Nature)나 『싸이언스』(Science) 같은 잡지로부터 외면을 받고서 변방으로 밀려난다. 물론 가장 불행한 몇몇은 다른 실험실과의 경쟁에서 뒤처져 과학계에서 퇴출된다. 이들은 결국 실험실을 떠나 생계를 유지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로서 훈련받은 경험이 과학비평에 도움이 될까? 이건 마치 재벌그룹의 과장에게 해당 기업을 비평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경제비평은 있지만 정작 그 핵심 주체인 기업 자체는 비평 대상에서 제외된다.) 좀더 심하게 말하면, 신부나 목사가 자신의 종교를 상대화해서 비평하길 기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제 뭔가 확실해졌다. 누구나 과학기술시대로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 오늘날 과학비평은 어떤 비평작업보다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작업을 막아온 과학자들은 그런 비평을 할 만한 여건도 안될뿐더러 오히려 그런 비판적 작업을 통해서 늪 같은 현실에서 구제되어야 할 이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어떻게 어디서 이 어려운 작업을 시작할 것인가? 『할리우드 사이언스』는 바로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누가 과학비평을 두려워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