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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미월 金美月

1977년 강원 강릉 출생.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장편소설 『여덟 번째 방』, 소설집 『서울 동굴 가이드』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이 있음. welcomesnow@hanmail.net

 

 

 

장편연2

세 사람이 호랑이를 보았네

 

 

소윤의 이야기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책을 집어든다. 햇빛이 책 앞표지에 부착된 청구번호 스티커에 반사되면서 순간적으로 눈을 찌른다. 소윤은 눈살을 찌푸린 채로 책을 펼친다. 『위대한 개츠비』. 그녀의 좌석은 열람실 구석의 창가에 있다. 탁자가 오후 볕에 보송보송하게 달구어져 있어 그녀가 책장을 넘기느라 몸을 움직일 때마다 기분 좋은 온기가 두 팔꿈치로 전해진다. 도서관은 따뜻하고 조용하고 평화롭다. 잠들기 딱 좋은 환경이랄까.

그러고보니 오후 세시다.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 날마다 졸음과 싸워야 했던 마의 시간대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소윤은 전혀 졸리지 않다. 잠이라면 집에서 이미 물리도록 자고 나왔으니까.

자고 싶을 때 잔다. 깨고 싶을 때 깬다.

그것이 행복의 최우선 조건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집에서 차로 한시간 거리에 있는 출판사에 다니던 때였다. 알람소리에 억지로 눈을 뜨는 새벽마다 소윤은 지옥을 상상했다. 그곳에는 알람시계들이 가득했다. 모두 요란하게 울려대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상상 속에서 그녀는 이를 악물고 당장 그것들의 정지 버튼을 모두 눌러버리겠다고 마음먹지만 언제나 손을 내밀다 말고 주춤거려야 했다. 정지 버튼들이 모조리 날카로운 상어 이빨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진과 명주에게 들려주었을 때 두 사람은 지옥도와 함께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소윤의 상황에 안타까워하며 청하지도 않은 의견들을 내놓았다. 먼저 소윤이 알람소리에 잠을 깰 때마다 심리적으로 상어 이빨에 물어뜯기는 듯한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그런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리라고 말한 것이 진. 곧이어 전체적으로는 그에 동의하되 소윤의 고통이 심리적인 것이라기보다 육체적인 것에 더 가까우리라고 주장한 것이 명주.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하나마나 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야말로 자고 싶을 때 자고 깨고 싶을 때 깰 수 있는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 때문에 소윤은 그다지 위로를 받지 못했다.

물론 출판사를 그만둔 후에는 소윤도 그들처럼 언제든 원하는 때 자고 원하는 때 깰 수 있게 되었다. 평일인데도 이튿날 출근 걱정 없이 밤새 맥주를 홀짝이며 보고 싶었던 영화들을 몰아서 보고 새벽에 잠들 때나, 오후 느지막이 깨어 침대에서 하염없이 뒹굴 때는 분명히 행복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최우선 조건이 충족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행복의 최후 조건은 무엇인가, 요즘 그녀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중이다.

소윤이 자리잡은 이곳 일반열람실의 탁자는 팔인용이다. 여덟개의 좌석에 여덟명의 남녀가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그러나 탁자에 놓인 책들은 한눈에도 서른권이 훌쩍 넘어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아홉종의 『위대한 개츠비』와 일곱종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여섯종의 『죄와 벌』, 그리고 『폭풍의 언덕』과 『변신』과 『노인과 바다』와 『달과 6펜스』와 『동물 농장』 등이 서너종씩 쌓여 있다. 그 고전의 산을 탁자에 쌓아올린 이가 바로 그 앞에 앉은 소윤이다.

그녀는 옆자리 사람들이 저를 흘끔거리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런 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누가 보아도 그녀는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의 특정 페이지에 꼭 찾아내야 하는 암호라도 있다는 듯 곧장 그 부분을 펼쳐 소리는 내지 않고 입술만 달싹이면서 몇줄쯤 읽다가 이내 풀죽은 얼굴로 책장을 덮어버리기를 반복할 뿐이다. 소윤은 그 일을 벌써 세시간째 하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일이다. 외주로 맡은 편집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탁자 위에 펼쳐놓은 교정지는 어느 유명한 남자 아나운서의 독서 에쎄이집 원고다. 외모가 출중하고 언변도 빼어나지만 무엇보다 최근 온·오프라인에서 정치적 소신을 드러내는 언행을 일삼으며 진보진영의 새 얼굴로 급부상한 동시에 대중의 인기도 급상승한 인물의 첫 책이라 출판사의 기대가 크다. 문제는 그 아나운서가 자신이 읽은 오십여권의 책에 대한 감상과 함께 해당 책의 일부분을 인용하면서 그 출처를 밝혀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들을 일일이 찾아 각주를 다는 일이 바로 지금 소윤이 하고 있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소윤이 뒤적이고 있는 『위대한 개츠비』의 경우를 보자. 작가가 사망한 지 70년이 넘었으니 저작료 지불할 필요 없겠다, 고전인데도 베스트셀러 대열에 늘 끼어 있겠다, 그 인기에 힘입어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된 『위대한 개츠비』는 수십종에 달한다. 절판된 책을 제외하고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것들만 집계해도 삼사십종은 좋이 될 터였다. 그중 도서관에 비치된 것만 십여종. 개츠비는 과연 위대했다. 어쨌거나 그러니 그 아나운서가 어떤 해에 어떤 출판사에서 나온 어떤 책을 읽었는지 소윤이 어떤 수로 알겠는가. 편집자로 꼬박 칠년을 일했지만 이런 일을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아나운서가 원고에 인용해놓은 대목은 세 문장이었다.

‘한가지는 분명하지, 다른 일은 잘 몰라.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에게 생기는 건 아이들뿐.’

그러나 소윤이 방금 훑어본 세권의 『위대한 개츠비』는 해당 대목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놓고 있었다.

1. 한가지는 분명해. 다른 것들은 몰라도. 부자에게는 돈이 늘지만 가난뱅이에게 느는 건 아이들뿐이라는 거.

2. 다른 일은 몰라도 한가지는 확실하다고.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지만 가난뱅이는 자식들만 점점 많아지지.

3. 한가지는 확실하지, 다른 건 잘 모르지만.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아이들만 늘어난다는 거야.

아아, 그리고 편집자에게는 흰머리만 늘어나겠지.

소윤은 한숨을 쉬며 책에서 얼굴을 들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중년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얼른 고개를 숙이더니 책장을 넘겼다. 한 탁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책장 넘기는 소리가 새삼스럽게 들려왔다.

네번째 책도 아니었다. 젠장. 소윤은 책장을 덮었다. 윗니로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다섯번째 책을 펼쳤다. 이제까지 어쩌다 운 좋게 첫번째 책에서 문제가 해결된 경우도 몇번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이 작업이 너무나 비능률적이고 비생산적인 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나마 『위대한 개츠비』는 워낙 유명한 책이라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소윤이 못 읽어보았거나 읽었더라도 기억이 잘 안 나는 책들은 아나운서의 인용문이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책을 아예 처음부터 통째로 읽어야 했다. 대체 이게 뭐하자는 노릇인가. 그 아나운서에게 어느 출판사 책을 참고한 것이냐고 물어보기만 하면, 혹은 페이지 수만 알려달라고 해도 일이 훨씬 손쉬워질 것 아닌가 말이다.

“저자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요.”

소윤이 일찍이 출판사에 제 의견을 피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허어, 소윤씨도 참. 그런 걸 어떻게 물어봅니까?”

“왜요? 왜 못 물어봐요?”

“안 그래도 너무 바빠서 정신없는 분이시잖아요.”

그것이 끝이었다. 안 그래도 바쁜 유명 저자의 심기를 혹시라도 해칠 수 있는 일은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논리 앞에서 그것 때문에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 있지 않느냐는 편집자의 하소연은 아무 맥을 못 추었다. 하기야 무얼 바라겠는가. 출판사는 갑이고 편집자는 을이다. 아니, 작가가 갑이고 출판사가 을이지. 그러면 편집자는 병. 더구나 소윤과 같은 외주 편집자는 정. 그것도 아니면 무, 기, 경, 신…… 아, 이거다!

마침내 다섯번째 『위대한 개츠비』에서 아나운서가 인용한 부분과 마지막 조사 하나 문장부호 하나까지 완벽하게 일치하는 그 대목을 발견해낸 것이다. 소윤은 고개를 들고 누구에게든 ‘이것 봐요, 내가 해냈다니까요!’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일단 교정지에 출판사의 이름과 그 대목이 나오는 페이지를 옮겨적었다. 숫자를 잘못 옮기지는 않았는지 두번이나 확인했다. 물론 그녀도 안다. 다수의 평범한 독자들 가운데 책 속의 인용문이 어느 출판사 어느 판본의 몇 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인지 각주를 꼼꼼하게 확인해가며 읽는 이는 없다는 것을. 있다면 일종의 서지학적 변태겠지.

그러나 다수 독자의 관심 밖에 있다 해도 그것을 생략할 수는 없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는 작가에게, 그 작가가 빚진 다른 작가의 작품들에, 그리고 독자에게 마땅히 지켜야 할 예의가 있고 규칙이 있다. 설령 당장은 독자가 한명도 없다 할지라도 언젠가 나타날지 모를 가상의 독자를 위해 책 만드는 사람은 모든 까다롭고 번거로운 법칙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소윤으로서도 그를 이해시킬 방법이 없다. 다만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자 특유의 외로운 자부심과 지적 우월감이 그 답답함을 일부 보상해주었으므로 그녀는 편집자라는 직함을 부끄러워해본 적이 없다.

개츠비들을 한쪽으로 치웠다. 맨 위에 예의 다섯번째 책이 ‘압권’의 위치를 뽐내듯 약간 흐트러진 자세로 놓여 있었다. 그러고보니 소윤의 집에도 있는 책이었다. 소유주가 진인지 명주인지는 모르나 거실의 공동 책장에 분명히 꽂혀 있는 것이었다. 제 집에 있는 것과 똑같은 책이 그 아나운서의 서재에도 꽂혀 있겠거니 생각하자 소윤은 문득 ‘유명 인사라봐야 별거 없네’ 싶었다. 유수한 문학 출판사에서 나온데다 번역이 매끄러워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책이니 한마디로 좋은 책 잘 고른 건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간호사가 대기실 벽에 걸린 시력검사표 옆에 섰다. 소윤은 쟈르갈을 검사선 위에 세운 후에도 얼른 물러나지 않고 공연히 그녀 주위를 얼쩡거렸다. 진료를 받기 전에 시력검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검사표에 인쇄된 한글들이 종성 없이 아주 단순한 자음과 모음으로만 이루어진 것들임을 모르지 않는데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간호사가 가느다란 봉으로 시력검사표의 특정 기호들을 짚기 시작했다.

“가, 스, 니.”

그래. 잘한다, 쟈르갈.

“왼쪽이요.”

3, 나비, 7, 4.”

“비행기, 오른쪽이요.”

어찌된 일인지 소윤의 귀에는 쟈르갈의 한국어 발음이 다른 때보다 더 정확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봉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지만 쟈르갈은 대답을 주저하지 않았다. 소윤은 그녀의 거침없는 한국어 실력보다도 자신의 눈에는 당최 글자인지 벌레인지 분간도 안되는 작은 기호들마저 척척 알아보는 그녀의 무시무시한 시력에 감탄했다. 보호자랍시고 소윤이 서 있는 위치도 쟈르갈과 같은 검사선 끄트머리인데, 아무리 애를 써도 시력 0.7 기준선 아래의 기호들은 식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쟈르갈의 대답을 듣고 다시 보아도 숫자 44 같지 않았고 비행기는 비행기 같지가 않았다. 그것들은 그저 거무스름한 점일 뿐이었다. 시력이 좋은 사람 눈에만 보이는 비행기라니, 눈이 나쁜 사람은 볼 수 없는 나비라니.

갑자기 소윤은 선물용으로 인생의 시력검사표를 직접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선물 받을 사람의 시력을 미리 알아야 한다. 예컨대 시력이 1.0이라면 그가 볼 수 있는 1.0 기준선 위쪽에 좋은 의미를 가진 단어들을 배치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랑이라든가 평화라든가 행복, 희망, 성공, 무지개, 네잎클로버 같은 낱말들. 마찬가지로 그의 시력으로 알아볼 수 없는 1.0 기준선 아래쪽에는 실패나 변비, 월요일, 좌절, 실연, 무좀, 꽝이 나온 복권, 이런 낱말들을 인쇄하면 재미있겠지. 그 맞춤제작 시력검사표를 선물 받은 이는 언제나 보기 좋은 것만 보게 될 것이다. 시력이 나쁘다고 마냥 우울해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좌우 모두 2.0입니다.”

간호사가 쟈르갈을 향해 웃는 것을 보고서야 소윤은 상상에서 벗어났다.

“이거 맨 아랫줄까지 다 맞히는 분은 처음 보네요.”

다소 들뜬 듯한 간호사의 말에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던 소준이 먼저 와아 하며 탄성을 질렀다. 최대한 남의 주의를 끌지 말아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소윤은 그에게 눈을 부라렸다. 다만 저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인지라 흥분으로 얼굴이 붉어진 것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쟈르갈만이 다들 웬 호들갑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평생 시력검사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소윤은 그녀를 대기실 의자로 이끌고 와 제 옆에 앉혔다. 검사표의 최고값이 2.0밖에 안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현재 쟈르갈의 오른쪽 눈이 충혈되어 있어 평소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을 텐데도 2.0이 수월하게 나온다면, 눈 상태가 건강할 때 측정한 시력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나올까. 소윤의 마음을 읽었는지 소준이 낮은 목소리로 몽골인의 평균시력이 4.0 정도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노라 귀띔해주었다. 광활한 초원에서 가축을 기르며 살다보니 언제 쳐들어올지 모를 적에 대비하기 위해서 항상 먼 곳까지 살펴야 하고 그러다보니 저절로 멀리까지 볼 수 있도록 시력이 발달한 것이라나.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냐고 소윤이 반문하려 할 때였다.

“이소윤 환자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소윤과 쟈르갈이 동시에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곤혹스러워하는 쟈르갈의 표정을 보고서야 소윤은 아차 하고 허둥대며 뒤늦게 그녀의 팔을 잡았다.

“저기, 보호자도 같이 들어가도 되지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진땀이 났다. 아까 집에서 쟈르갈에게 병원에서의 행동강령을 숙지시킬 때와는 딴판이었다.

쟈르갈의 오른쪽 눈이 갑자기 충혈된 것은 이틀 전 일이었다. 집 근처 약국에서 산 안약을 넣었지만 증상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몽골인 불법체류자가 의료보장을 받을 수는 없으니 어떻게 하나 모두 고민하다가 결국 건강보험 지역가입자인 소윤의 주민등록번호로 쟈르갈에게 안과진료를 받게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혹시라도 쟈르갈이 병원에서 실수할까봐 소준의 주도로 모의훈련까지 했다. 그런데 그때는 여유만만했던 소윤이 지금은 거짓말이 탄로날까봐 전전긍긍하는 데 반해 쟈르갈은 몰라보게 태연자약한 것이다.

“속을 알 수 없는 애야.”

명주가 그랬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지난번 다 같이 인근 공원에 산책을 다녀온 후였다. 당시 공원에서 쟈르갈은 결연한 어조로 소윤의 집을 나간 후에는 복수를 하러 갈 계획이라고 말해 모두를 아연하게 했다. 수첩에 끊임없이 뭔가를 적고 있던 진이 먼저 정적을 깼다.

“누구한테? 무슨 복수인데?”

“아니, 그게……”

소준이 뭔가 알고 있다는 듯 머뭇거리며 운을 떼는데 쟈르갈이 나서서 대답을 가로챘다.

“농담이에요, 농담.”

소윤이 그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까닭은 그 직후 쟈르갈이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멋쩍게 웃으며 제 말을 번복한 것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농담이 아니고, 비밀이에요, 비밀.”

그때까지 통 말이 없던 명주가 끼어들었다.

“그거나 그거나 다 같은 말이야.”

“네?”

“둘 다 뭔가 제대로 설명하기 싫을 때 갖다붙이는 거거든.”

다분히 심술궂은 명주의 말을 쟈르갈이 알아들었을지는 의문이다. 좌우지간 그것을 끝으로 그녀의 복수를 주제로 한 대화는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약속했던 열흘은 금세 지나갔다. 그러나 아무도 소준과 쟈르갈에게 나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실은 두 사람 다 처음 이틀을 빼고는 거의 집에 붙어 있지를 않아서 그런 말을 할 기회도 없었다. 소준은 일자리를 구한다는 이유로, 쟈르갈은 만날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보통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 귀가했다. 소윤과 진과 명주가 정오를 전후로 일어나 보면 두 사람은 이미 외출하고 없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저녁에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무렵에는 소윤과 진과 명주가 각자의 방에서 소설을 쓰거나 편집 일을 하느라 바빠 서로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소윤은 쟈르갈과 한방을 쓰는데도 그랬다.

다섯 사람은 모두 여전히 한집에서 잘 지냈다. 하지만 소윤은 어쩌다 하나의 프레임 안에 명주와 쟈르갈 두 사람만 들어 있는 것을 볼 때면 뭔가 조마조마했다.

 

현관문 앞에 우편물이 쌓여 있었다. 전부 책이었다. 수신자는 다섯권 모두 진. 두권은 출판사에서, 세권은 소윤도 이름을 아는 진의 동료 소설가들에게서 온 것이었다. 진의 방은 이미 책들로 포화상태였다. 커다란 책장 세개에 책을 가득 꽂고도 자리가 모자라서 벽을 따라 방바닥에서부터 성벽처럼 쌓아 올린 책들도 높이가 1미터에 육박했다. 이것들을 그 위에 더 쌓았다가는 책 벽이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하고 생각하며 소윤은 새로 온 책들을 옆구리에 끼고 현관문을 열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은 소설 마감을 하기 위해 늘 가던 동네 까페에 갔을 테고 명주는 곧 출간될 책의 표지 시안을 보러 출판사에 갔을 터였다.

소윤은 진의 방 문지방에 책들을 내려놓았다. 진이 집에 없을 때 그녀는 절대로 진의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명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들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 적도 없는데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제 방의 문을 열어놓고 있을 때가 더 많은 소윤과 달리 진과 명주는 평소에도 방에 있을 때 항상 문을 닫아놓는다. 문을 닫아야 방이 비로소 방이 된다는 것을 아는데도 소윤은 거실에서 셋이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그들이 각자 방으로 들어가면서 문을 닫으면 마음이 쿵 내려앉고는 했다. 왠지 문이 닫히는 순간 그들의 표정이 싹 바뀔 것 같았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거실에서는 사람 좋게 웃고 떠드는 가족의 얼굴을 하고 있다가 방으로 들어가는 즉시 고독하면서도 신경질적인 소설가의 얼굴로 바뀌는 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상상하면 할수록 약간 오싹해지는 기분이었지만 그럼에도 소윤은 그들의 두번째 얼굴을 한번 보고 싶었다.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소준과 쟈르갈이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소준이야 제 방이 따로 없으니 늘 그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쟈르갈도 같은 방을 쓰는 소윤이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거실처럼 트인 공간이 편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소준과 함께 있고 싶어서인지 잠잘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거실에서 보내곤 했다. 소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와 진과 명주 셋이 늘 앉곤 했던 그 살구색 천소파에 소준과 쟈르갈이 앉아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이 처음 이 집에 오던 날 진과 명주는 소윤에게 다투어 물었다.

“둘이 무슨 사이야?”

“두 사람은 어디서 만났대?”

소준은 쟈르갈을 가리켜 ‘사정이 딱한 친구’라고만 했다. 소윤이 보기에 두 사람은 연인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서로를 대하는 태도를 보아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소윤은 밤늦게 소준이 오피스텔 입구에서 누군가와 다정한 말투로 오래 통화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몇번 있었다. 통화 상대가 여자이며, 소준의 연인이거나 혹은 연인 근처 단계에 있는 사람일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소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고 하자 명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남동생에 대한 신뢰가 깊구나.”

천만에. 그것은 명주의 착각이었다. 단지 귀찮아서 그랬을 뿐이다. 소윤은 원래부터 소준과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을뿐더러, 삼년 만에 난데없이 나이 어린 몽골인 여자애까지 데리고 알거지 꼴로 나타난 남동생의 인생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남동생이 자신의 인생에 끼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주성분이 뭐예요?”

쟈르갈이 안약 상자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보고 있었다.

“응? 주성분?”

소준이 그녀에게서 약 상자를 건네받았다.

안과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점안액, 나머지 하나는 안연고. 둘 다 알러지성 결막염 치료제였다. 소윤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디 보자, 염산올로파타딘, 그리고……”

소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 바보니? 주성분이라는 단어의 뜻을 묻는 거잖아.”

“아.”

딱하게도 그가 쟈르갈에게 주성분의 뜻을 주성분 못지않게 어려운 단어들로 풀이해주는 것을 듣고 있노라니 문득 ‘외경심’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소윤이 그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이 아마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국어사전에서 그 뜻을 찾아보았는데 풀이가 딱 세 음절로 나와 있었다. 경외심. 그래서 이번에는 ‘경외심’을 찾아보았다. 그것의 풀이 또한 세 음절이었다. 외경심. 정답은 사전이 엉터리라는 것이었지만 당시 소윤은 저도 모르게 그 알 수 없는 단어에, 그 단어의 알 수 없음에 매료되었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풀이가 영원히 미루어지면서 끝내 제 본질을 보여주지 않는, 읽을 수는 있지만 헤아릴 수는 없는. 그 신비한 낱말에 소윤은 외경심을 품었더랬다.

“별규? 별규는 뭐예요?”

“누나, 들었지? 설명 좀 해줘.”

소준이 저는 이제 할 만큼 했다는 듯 공을 소윤에게 넘겼다. 별규? 소윤이 약 상자를 보니 주요성분 이름 옆에 괄호가 쳐져 있고 그 안에 별규라 적혀 있었다. 이런저런 의약품 포장지에서 종종 본 적이 있는 단어 같기는 했다. 그런데 한자가 병기되어 있지 않으니 무슨 뜻인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혹시 별도 규정의 준말인가?

추측만으로는 안된다. 모르는 단어를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다. 소윤은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으로 국어사전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했다. 그것은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단어였다. 자판 위를 오가는 소윤의 손가락이 바빠졌다. 한참을 스마트폰만 붙잡고 있으니 오히려 쟈르갈은 제가 언제 그런 것을 궁금해했느냐는 듯 주방으로 가고 소준은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며 집 밖으로 나갔다. 소윤은 결국 제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스마트폰으로 하는 검색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책상 위에 이제 겨우 1교를 끝낸 독서 에쎄이집 교정지가 쌓여 있었지만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갓 입력된 뜻 모를 단어 하나밖에 없었다.

편집자로서의 직업의식이 발동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학창 시절부터 어휘에 관심이 많았다. 새로운 단어의 뜻을 알아내고 그것의 유의어며 반의어를 찾아 단어장에 기록하는 일이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이 식빵만큼 얇은 전자사전을 한손에 들고 다니며 영어공부에 몰두할 때 소윤은 벽돌처럼 두꺼운 종이책 국어사전을 두 팔로 껴안고 다녔다. 틈만 나면 그것을 펼치고는 마치 진귀한 음식이 가득한 뷔페에서 접시를 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사람처럼 자신이 아직 맛보지 못한 새 낱말에 무엇이 있나 이쪽저쪽 살펴보고는 했다.

그녀는 자신이 언제 처음으로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는지를 기억한다. 제 인생 최초의 사전을 어떻게 갖게 되었으며 그때 사전에서 찾아본 최초의 단어가 무엇이었는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소윤이 초등학생이었을 때다. 그녀는 엄마와 둘이서 시외버스를 타고 외갓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빠와 소준이 왜 함께 가지 않았는지 그것까지는 기억에 없다. 창밖에 초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차창 왼쪽으로 눈에 익은 ‘공사중’ 표지판이 보였다. 그러더니 얼마 안 있어 ‘서행’이라 적힌 처음 보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소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서행이라니. 길이 외길이었다. 어떻게 서쪽으로 가란 말인가. 옆자리의 엄마가 하필 곤히 잠들어 있어서 당장 물어볼 수도 없었다. 혹시 서쪽 어딘가에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법의 길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 길로 가면 무엇이 나타날까. 어둠이 점점 짙어지는 창밖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소윤은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서쪽으로 나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의 길을 상상했다.

그녀의 엄마는 곧바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웃으면서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외갓집에 가기 전에 먼저 시내 서점에 들러 보급형으로 나온 얇은 국어사전을 샀다.

“엄마도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래?”

“엄마는 알아. 하지만 네가 직접 찾아봐.”

엄마가 소윤의 손에 사전을 쥐어주었다. 그것이 소윤 인생 최초의 사전이었다.

“다른 사람이 말해주면 금방 잊어버리지만, 자기가 직접 찾아보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거든.”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어린 나이에도 소윤은 제 엄마가 방금 그렇게 근사한 말을 했다는 사실만은 절대 잊어버리지 못할 거라고 탄복했다. 그리고 서점 출입문 안쪽에 선 채 사전을 펼쳤다. 미농지(美濃紙)처럼 얇은 종잇장을 한장씩 한장씩 넘겼다.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ㄷ’을 지나, ‘ㅂ’을 지나 ‘ㅅ’이 나타나고 ‘사’를 넘어 마침내 ‘서행’을 찾아냈을 때는 잠시 숨을 멈추어야 했다. 사전에는 동음이의어로 두개의 단어가 실려 있었다. 소윤이 찾던 것은 첫번째 단어였다. 천천히 가시오. 표지판에 적힌 단어가 ‘서행(西行)’이 아니라 ‘서행(徐行)’이었다는 것과 아울러 그날 소윤의 머릿속에는 그것의 반의어 ‘속행’과 유의어 ‘완행’도 함께 저장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소윤은 사전을 통해 익힌 낯선 낱말들, 특히 문어체를 실생활에서 활용하기 좋아했다.

“그건 좀 조야하잖아?”

“천궁(天弓)이 떴으니 소원 빌러 가자.”

“급식이 맛없어서 대궁밥이 너무 많아.”

“이 더위가 꺾이고 나면 곧 백상(白商)이 오겠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을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낯 뜨겁지만 그때는 자못 필사적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성적표 발송봉투의 집 주소 뒤에 멋들어지게 ‘본제입납(本第入納)’이라고 썼다가 학생이 시건방지다며 담임의 호출을 받은 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또래들 사이에서 잘난 척한다고 따돌림 당하기 쉬운 캐릭터였는데도 운이 좋았던 것인지 친구들은 소윤을 싸이코라는 둥 할망구라는 둥 놀리기는 했어도 미워하지는 않았다.

따지고보면 소윤의 첫사랑이 어처구니없이 끝난 것도 단어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대학 신입생 때 그녀는 같은 교회에 다니던 한살 많은 오빠를 연모하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완벽한 ‘교회 오빠’였다. 흰 셔츠에 남색 니트 조끼에 주름 잡힌 면바지, 동그란 뿔테 안경과 장식 없는 손목시계가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은 적어도 북위 38도선 이남의 교회에는 없을 터였다. 항상 서글서글 웃는 얼굴에 피부가 깨끗하고 눈매가 선하며, 누구에게나 다정다감하고 예의 바르고 신앙심도 깊은데다, 기타까지 잘 치고 찬송가마저 잘 부르던 청년. 우여곡절 끝에 그와 교제하게 되었을 때 소윤은 날마다 두 발이 지면에서 3센티쯤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말하자면 진흙탕 위를 걷는다 해도 발바닥에 흙 한점 안 묻힐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할까.

실제로 남자친구로서의 그는 소윤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친절하고 사려 깊고 다방면에 재주도 많은 인물이었다. 복병은 그가 수시로 보내오는 문자메시지에 있었다.

‘소윤이 패션은 문안하면서도 감각적이야.’

‘오늘 우리 소윤이 꾀 예쁘네.’

문안하다니 뭐가? 꾀 예쁜 건 또 뭐지? 안 예쁘다는 건가?

처음에는 실수인 줄 알았다.

‘너처럼 나도 남이 부탁하면 거역을 잘 못하거든.’

거역이라니. 황제폐하가 그에게 뭔가를 부탁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다음에는 장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소윤이 감기 빨리 낳으라고 기도했어.’

맙소사, 내가 바이러스인가? 감기를 낳게?

주고받는 메시지 수가 늘어날수록 소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실수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마음이 그에게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두 사람은 곧 헤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그녀의 두 발은 어느새 땅바닥에 철퍼덕 붙어 있었다.

소윤이 그와 헤어진 이유를 궁금하게 여긴 사람은 비단 그 당사자만이 아니었다. 교회 친구들이 더 난리였다. 다들 그 오빠처럼 괜찮은 남자도 없는데 대체 왜 헤어진 것이냐며 쉬지 않고 캐물었던 것이다. 소윤은 차마 어휘력 때문이라고 혹은 정서법 때문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게 너무 사소한 이유라서가 아니었다. 뭔가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물론 누군가는 그까짓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인품이나 성격이 훨씬 중요한 거라고, 어휘력이 풍부하고 정서법에 정통하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과 비례하는 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항상 맞는 말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겠는가, 어휘력이 빈약하고 정서법이 엉망인 사람의 인품과 성격에 대해서는 아무 호기심도 생기지 않고 심지어 있던 호감마저 사라지는데. 그게 소윤이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 찾았다!”

마침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소준이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그는 문이 열려 있는 소윤의 방 앞으로 갔다.

“뭘 찾았는데?”

“별규 말이야. 그 뜻이 뭔지 찾아냈다고.”

“뭐?”

그녀가 설마 여태까지 그 단어와 씨름하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소준은 입을 딱 벌렸다. 그래도 제가 벌인 일이니 할 수 없다는 듯 주방에 있던 쟈르갈을 소리쳐 불렀다.

“웹 문서며 블로그까지 다 뒤졌는데 딱 하나 있더라.”

소준이 대표로 모니터에 떠 있는 설명을 읽기 시작했다.

“별규는 ‘별지 규격’의 준말로서 대한약전 등 의약품공정서에 수재되어 있지 않은 의약품에 대한 규격을 말한다. 의약품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 관리 규정이 약전에 수재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그것의 관리 규정을 별도로 설정하여 관리해야 한다. 그렇게 설정하는 기준 및 규격을 ‘별지 규격’이라 한다.”

소준이 고개를 흔들었다. 읽는 도중에도 이미 후회하는 듯했는데 다 읽고 나서는 더 크게 후회하는 표정이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본인은 대충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다시 쉬운 말로 풀어 외국인에게 설명할 자신은 없을 테니까. 쟈르갈이 화면을 들여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중얼거렸다.

“별규는…… 별지…… 규격의……”

“안돼. 이제 그만.”

소준이 쟈르갈에게 거실로 나가자는 눈짓을 했다.

“모니터 오래 보면 눈에 안 좋아.”

그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다.

 

대낮부터 진이 책 정리를 하고 있다. 자신의 방 책꽂이에서 버릴 책들을 간추려 거실에 내놓고 있는데, 한권 내놓을 때마다 일일이 앞의 몇장을 훑어보고 그 책에 얽힌 추억을 더듬어가며 버릴까 말까 고심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책이 마침내 그녀의 방 문지방을 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진의 방에는 책이 칠백권쯤 있다. 명주의 방에도 삼백권쯤 있다. 소윤의 방에도 오백권쯤. 그리고 거실의 공동 책장에 꽂힌 책이 천권 이상이다. 그러니 이 집에 있는 책을 모두 합하면 이천오백권이 넘는 것이다.

언젠가 진은 거실 책장 앞에 서서 말했다.

“무서워.”

혼잣말을 하나보다 하고 소윤이 그냥 지나치려다가 진의 표정이 어딘가 심상하지 않아서 대꾸해주었다.

“뭐가 무서워?”

“우리가 이 책들을 다 읽지도 못하고 죽을 거라는 게.”

“그게 무슨 소리야?”

진은 소윤이 물어봐주기를 기다린 것처럼 술술 말을 이었다.

“책 한권을 읽는 데 평균 이틀이 걸린다고 가정해봐. 이천오백권이면 오천일이 걸려. 그러면 오천 나누기 삼백육십오 하면, 대략 십삼년이나 십사년 정도 되겠지?”

“응. 그런데?”

“물론 우리가 이제 삼십대 초반이니 그렇게 십몇년 후에 금방 죽지는 않을 거야. 문제는 끊임없이 새 책들이 쏟아져나온다는 거지. 우리가 읽을 책이 계속 늘어난다고. 밑 빠진 독에 계속 물을 붓는 격이란 말이야. 그리고 우리는 절대로 이틀에 한권씩 책 읽는 일을 평생 하지는 못해. 그러니까 결국 죽을 때까지 우리가 소유한 책을 다 읽지 못할 거야.”

“언니는 그게 무섭다는 거야?”

“응. 무서워, 이 책들보다 내가 먼저 죽을 거라는 게.”

비문이었지만 소윤은 지적하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비문이 뜻을 더 잘 전달하기도 하는 법이다. 진이 만약 ‘이 책들을 전부 읽는 데 소요되는 시간보다 내게 남은 예상수명이 더 짧다는 게 무서워’ 하고 말했다면 소윤은 ‘이런 사람이 쓰는 소설은 지루해서 못 읽을 거야’ 하고 답답해했을 것이다. 진은 정말로 무섭다는 듯 한참을 책장 앞에 서서 책들을 노려보았다.

소윤은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뭐하러 가정해서 미리 두려워하느냐고 핀잔을 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해서 머리 쥐어뜯어가며 글로 쓰는 게 소설가가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소윤이 소설가 두명과 같은 천장 아래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면 누구나 신기해하고 궁금해한다. 하여 열이면 열 꼭 물어본다.

“어때요?”

어떻긴. 소설가라고 별다를 것 있나.

소윤이 집주인의 입장에서 볼 때 명주와 진은 훌륭한 세입자들이다. 기본적으로 두 사람 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몸에 배어 있어서 서로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게다가 진은 사회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적당한 결벽증이 있어서 자신의 방을 청소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거실과 욕실까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청소를 도맡아 한다. 그런가 하면 명주는 요리솜씨가 빼어나고 음식 나눠먹는 것을 좋아해서 툭하면 이런저런 요리를 만들어 동거인들을 거두어먹인다. 셋 중에서 맏언니이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밥도 곧잘 산다. 그러니 집주인 입장에서는 청소와 요리 두가지가 세입자들을 통해 한번에 해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윤이 집주인의 얼굴을 벗고 그냥 같은 삼십대 여성의 입장에서 그들을 본다면 답이 조금 달라진다. 명주와 진은 확실히 괴팍한 데가 있다. 그들의 관심사는 일반적인 삼십대 여성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일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관심사뿐 아니라 생활방식도 다르고 삶의 지향점도 다르다. 명주와 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소설’이다. 그러나 소설에 대한 인식이나 소설을 쓰는 방식, 소설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소윤이 그들과 함께 살면서 가장 먼저 놀랐던 점은 그들이 소설을 쓰는 방식이 소윤이 막연히 짐작했던 것과 영 딴판이라는 데 있었다. 먼저 진의 경우를 보자.

“방에 책이 너무 많아서 마음이 안정이 안돼.”

요 며칠 동안 진은 몇번이나 그렇게 말했다.

“내 방에 책들이 있는 게 아니라 책방에 내가 있는 것 같아.”

그러더니 급기야 제 방의 진짜 주인은 저라는 것을 책들에게 확인시켜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책 정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리를 끝내려면 아마 한나절은 꼬박 걸릴 터였다. 당장 내일모레가 원고 마감일이라더니 뜬금없이 책 정리라.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아니, 마감 전이면 항상 그랬다.

소윤이 볼 때는 참 희한한 일이었다. 진은 어째서 원고 마감기한이 다가오면 갑자기 집필 이외의 일들로 더 바빠지는 것일까. 그것은 진이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 보름 전에는 진의 고향친구 아버지가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하여 그 장례식이 고향에서 치러졌다. 지난주에는 진이 참석해야 할 결혼식이 두건이나 있었다. 하나는 대학교 때 은사의 아들의 결혼식, 하나는 진과 친한 사촌동생의 결혼식. 며칠 전에는 서너달 전에 예약해두었던 진의 건강검진이 있었고 며칠 후에는 그녀가 등단한 문예지에서 주최하는 신인문학상 시상식이 있다. 진은 그 자리에 예심위원 자격으로 참석해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다음주에는 명주의 새 장편소설 출간기념회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판에 대체 무슨 정신으로 소설에 집중하겠느냐는 진의 푸념에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진이 그 모든 대소사에 불참했다는 것이다. 진은 고향에서 열린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에 인편으로 조의금만 보냈고, 참석해야 한다던 두건의 결혼식에는 축의금 전달조차 하지 않았으며, 꼭 하리라 전부터 별러왔던 건강검진은 한달 뒤로 미루었다. 그리고 어제는 문예지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피하지 못할 사정으로 신인문학상 시상식에 불참하게 되었다고 미리 통보했다. 그래놓고 진이 여전히 이런저런 일 때문에 소설 집필에 집중할 수 없다고 불평하는 것을 예전에는 소윤도 납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물었던 적이 있다.

“전부 불참했으니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것과 똑같은 거 아냐?”

“어휴, 얘는. 그게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어?”

진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는 결혼식장에 가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불참에 대해 미리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혹은 후회하는 과정에서 똑같이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기 때문에 결국은 결혼식장에 갔다 온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소윤이 그렇다면 차라리 다녀오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물어보려는데 진이 먼저 말했다.

“오히려 갔다 오느니만 못해. 그럼 최소한 욕은 안 먹으니까.”

자, 늦게라도 알았으니 그럼 다음번에 비슷한 일이 닥칠 때 진이 그 자리에 참석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결혼식장에 가야 한다며 불평하다가 끝내 가지 않을 것이고 그다음에는 가지 않은 것이 간 것만 못하다며 불평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원한 것이 처음부터 결혼식이고 뭐고 신경 쓸 일이 아무것도 없는 평온한 상황이었는가 하면 그것 역시 아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아마 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날들의 권태에 대해 불평할 것이다. 너무 권태로워서 소설을 쓸 수가 없다고 말이다.

그것을 소윤은 진과 명주와 함께 산 지 넉달 만에 깨달았다. 소설이 안 써질 때는 발밑에서 개미 한마리가 기어가도 그것이 방해가 된다. 그러나 소설이 잘 써질 때는 무당이 코앞에서 요령을 흔들며 작두를 타도 집필에 몰두할 수 있다. 그것이 진이다. 그녀는 그저 핑계를 찾는 것이다. 소설이 잘 안 쓰이는 상황을 변명해줄 지푸라기를 잡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오늘은 그것이 그녀의 방에 너무 많은, 그래서 진에게 흡사 책이 주인인 방에 그녀가 객으로 와 있는 듯한 언짢음을 제공해준 책들이 되었다.

반면에 명주의 경우를 보자. 명주는 집필방식이 진에 비해 훨씬 단순하고 명쾌하다. 그녀는 오래 끄는 법이 없다. 구상을 끝내면 곧장 집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길에는 갈림길도 없고 샛길도 없다. 오로지 직진할 뿐이다. 무엇보다 명주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외부로부터의 모든 호출에 일절 응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대소사에 휩쓸리지도 않고 가공할 집중력으로 집필에만 신경 쓴다. 그리고 마감일 이전에 원고를 끝낸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명주는 굉장히 모범적인 작가다. 모든 일에 원칙이 있고 그것을 순리에 맞게 행하니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 문제도 없을 리가 있겠는가. 명주에게도 당연히 구멍이 있다. 그것은 작정하고 집필에 몰두하기 전에 그녀가 작업 환경을 완벽하게 만드는 데 몹시 집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은 워드프로세서가 깔린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다. 집에서든 도서관에서든 까페에서든 노트북 전원만 연결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명주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집이 아니면 안된다. 그리고 노트북으로는 절대 작업을 하지 못한다. 그녀에게는 최고 사양을 갖춘 데스크톱과 최고 화질의 대형 모니터가 필요하다. 손에 쥐기 좋은 마우스와 손가락이 닿는 느낌이 좋은 키보드가 있어야 하고 둘 다 무선 제품이어야 하며 나아가 눈의 피로를 덜어주는 LED 스탠드와 집중력을 높여주는 천연 아로마 오일도 반드시 구비돼 있어야 한다. 상판이 넓고 두껍고 묵직한 원목책상에 인체공학을 고려하여 설계된 가죽의자도 없으면 안된다. 이때 가죽의 색상은 필히 검정색이어야 한다. 게다가 책상 아래쪽에는 착용감이 좋은 순면 슬리퍼와 그것을 신은 두 발을 올려놓을 수 있는 나무 발판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한가지 더, 창문에 암막 커튼을 쳐놓고 있어야 한다. 이상의 조건들 중에서 어느 한가지라도 빠지면 명주는 소설 집필을 시작하지 못한다. 마치 개인 전세기에 독채 대기실에 전용 화장실이 없으면 공연을 할 수 없는 톱스타 연예인처럼. 그래서 명주는 까페를 전전하며 글을 쓰는 진과 달리 집에서밖에 작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소윤이 보기에 진이나 명주나 괴팍하기로는 피장파장이다.

“너, 소설이 안 써지는구나?”

명주가 방에서 나왔다. 같은 소설가라서 척 보면 딱 아는 모양이다. 그녀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켜더니 책을 분류하고 있는 진의 옆을 지나 소윤이 앉아 있는 주방 식탁으로 왔다. 그리고 커피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으면서 물었다.

“마실 거지?”

진과 소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책 먼지가 날리는지 진이 별안간 재채기를 했다. 그러고보니 거실에 나와 있는 책이 이미 서른권 이상 되어 보였다.

“근데 너, 그 많은 책을 다 읽은 거야?”

진이 무어라 대답했으나 원두 분쇄되는 소리에 묻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입 모양으로 보았을 때 대답이 짧지는 않았으니 아마 ‘읽은 것도 있고 안 읽은 것도 있다’ 비슷하게 대꾸했으리라. 어차피 대답이 궁금해서 한 질문은 아니었던 듯 명주는 다시 묻지 않았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어, 책을 많이 읽어야 된다고. 책 많이 읽으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추울 때 따뜻한 곳에서 일하고 더울 때 시원한 곳에서 일한다고.”

진이 책을 뒤적이던 손놀림을 멈추고 명주를 바라보았다.

“책을 안 읽으면요?”

“그야 추울 때는 더 추운 곳에서 일하고, 더울 때는 더 더운 곳에서 일해야 한다고 하셨지. 바로 당신이 그렇게 사셨다면서.”

세 사람 다 잠시 말이 없었다. 분위기가 엄숙해지려는 찰나 진이 한번 더 재채기를 했다. 그녀는 코를 훌쩍이고 나서 다시 말을 꺼냈다.

“책을 안 읽으면 커서 근무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일하고 가난하게 산다는 얘기네요? 필요할 때 난방을 못하고 냉방도 못한다는 거니까.”

“그렇지.”

“하지만 작가들은 책을 많이 읽는데 가난하잖아요.”

그 와중에도 소윤은 진이 주어를 명주와 자신을 싸잡아 ‘우리는’이라 하지 않고 ‘작가들은’이라 한 것에 주목했다. 명주는 적어도 작가가 된 이후에는 가난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 진 역시도 배곯으면서 사는 작가는 아니었다.

“음,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네.”

“그러게요.”

이번에는 소윤이 얼른 명주의 말을 받았다.

“그 책이 어떤 종류의 책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 아닐까요?”

방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진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식탁으로 왔다. 명주가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 숫자대로 머그컵 세잔에 커피를 따랐다.

“그럼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 거지?”

“왜 있잖아요, 10년 만에 10억 모으기, 그런 책들.”

“당신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재테크의 모든 것.”

“돈에 미쳐라.”

“복권 당첨의 비밀.”

서로 돌아가면서 책 제목을 주워섬기다 말고 세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였을까. 소윤은 싱겁게 웃는 진과 명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그들은 작가고 저는 편집자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것은 뭔가 좀 억울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어째서일까. 작가가 편집자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닌데, 작가로서의 그들을 부러워해본 적도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프리랜서 편집자의 일상은 단조롭다. 일을 의뢰해준 출판사에 가서 원고를 받아오고 집에서 윤문 및 교정교열을 하고 다시 출판사에 가서 원고를 넘긴다. 그 일을 대여섯차례 반복하면 된다. 간혹 저자를 직접 만나야 할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 소윤은 차가운 책상과 뾰족한 펜 하나만 있으면 되는, 다른 사람의 온기와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이 일이 좋았다. 글을 쓰는 일이 뜨거운 열정을 요구한다면 이미 씌어진 글을 뜯어고치는 일은 차가운 냉정을 요구할 것이다. 소윤은 남의 원고에서 불필요한 것을 솎아내고 누락된 것을 보충하고 어수선한 것을 가다듬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그 과정의 차가움이 제 적성에 딱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처음부터 편집자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가수를 꿈꾸거나 요리사를 꿈꾸거나 작가나 과학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것들을 건너뛰고 처음부터 가수 매니저나 요리 비평가나 출판 편집자나 과학자의 아내처럼 무대 뒤에 있는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소윤도 그랬다. 세상에 편집자라는 직업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녀에게 책은 읽는 것 아니면 쓰는 것이었다. 무대 뒤에서 그것을 만드는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작가가 되기를 꿈꾸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단지 책 읽기를 좋아하고 언어를 정확하게 구사하는 데 관심이 많은 대학생일 뿐이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러하듯이 그녀가 편집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대학 졸업반 때였다. 여럿이 모인 술자리에서 취업준비와 대학원 진학 이야기가 탁자를 한바탕 휩쓸고 간 후에 한 남자 선배가 대뜸 자신이 오래전부터 소설을 써왔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얼마 전에 출판사와 계약도 했고 곧 초고를 넘길 일만 남았다고 했다. 오, 세상에, 그럼 우리가 아는 바로 이 사람이 작가 선생님이 된다는 말인가? 하며 모두 소스라치게 놀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것에 관심을 보인 이는 소윤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이튿날 선배는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던 소윤을 불러내 자신의 원고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미스터리 공포소설이었다. 무대는 산속의 외딴 병원이요, 주인공은 정신질환자로 오인받아 강제입원 당한 사내요, 그가 밤마다 병동의 환자들이 이유 없이 죽어나가는 비밀을 파헤친다는 이야기였다.

“읽을 만해?”

선배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재미있어요. 무섭고,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를 긴장시키고.”

“긴장시키고, 그리고?”

“마지막의 반전도 기발하고.”

“기발하고, 그리고?”

“기발한데, 그런데……”

“그런데?”

내내 올라가 있던 그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소윤은 불현듯 자신이 누군가의 글을 읽고 그것에 대해 의견을 말하는 일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묘사를 좀더 넣어주면 어떨까요?”

“묘사를?”

“예컨대 앞부분에서 이 병원이 얼마나 기괴한 곳인지 보여주는 장면 있잖아요. 주인공이 처음 병원에 도착해서 깜짝 놀라는 때. 거기서 그냥 황량하다, 낡고 음산하다, 그렇게 설명만 하지 말고 그럴듯한 묘사 장면 하나를 슬쩍 넣어주는 거지요.”

소윤은 자신이 이상한 열정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조바심 같기도 하고 승부욕 같기도 하며 어찌 보면 책임감 같기도 했다.

“음, 그러니까, 이런 장면은 어떨까요? 간호사 둘이 접수대에 앉아 있어요. 얼굴은 무표정한데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죠. 뭔가 하고 보니 살아 있는 메뚜기들을 가느다란 철사에 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인공이 접수대 앞을 지나가는데 풀냄새 같기도 하고 비린내 같기도 한 냄새가 코를 찔러요.”

소윤은 말하다 말고 두 손바닥으로 제 뺨을 감쌌다.

“뭔가 기괴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처럼 생생한 묘사 장면이 몇군데 들어가면 독자가 느끼는 공포감이 더 커질 거 같아요. 책장을 덮은 후의 여운도 훨씬 오래 갈 거고요.”

마지막 한조각을 남겨둔 퍼즐 앞에서 손에 쥔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느낌이 이럴까. 혹은 눈썹만 칠하면 완성되는 미인도를 앞에 둔 화가가 붓을 쥔 채 머뭇거리는 느낌이 이럴까. 뺨이 뜨거웠다.

“안 그래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어, 혹시 기분 상했어요? 그런 거 아니죠?”

그래도 선배가 잠자코 있자 소윤은 갑자기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제 말은, 꼭 그렇게 고쳐야 한다는 게 아니라, 에이, 제가 소설에 대해 뭘 알겠어요? 그냥 아무거나 떠오르는 대로 막 말해본 거예요. 전 묘사 같은 거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요.”

심지어 소윤은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뺨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저기, 소윤아……”

한참을 더 말이 없던 선배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메뚜기 말고…… 다른 곤충 뭐 없을까?”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소윤의 허락을 받고 원고에 그녀가 예로 든 묘사장면을 삽입했다. 메뚜기를 귀뚜라미로 바꾼 것을 빼면 그녀가 말한 것 그대로였다.

선배의 책을 출간할 예정이라는 출판사에 소윤이 편집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간 것은 그로부터 나흘 후의 일이었다. 선배의 끈질긴 권유 때문이었다. 사실 소윤은 집안이 경제적으로 풍족한 편이라서 굳이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면접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한편으로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다. 출판사라는 곳에 대해, 편집 일이라는 것에 대해, 자신이 선배의 작품을 읽고 이야기할 때 느꼈던 그 뜻밖의 희열에 대해 좀더 상세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 5층짜리 사옥을 갖고 있는 대형 출판사였다. 1차로 교정교열 필기시험이 끝난 후 문학부 팀장이라는 남자가 소윤을 따로 불렀다.

“교정교열 경험이 전무하다는 거 맞아요?”

“네? 네.”

그는 소윤의 시험지를 들여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A3용지에 출력한 원고 뭉치를 소윤에게 건네며 읽어보고 의견을 말해달라고 했다.

그것은 하이틴 로맨스 소설이었다. 가난하지만 당연히 예쁘고 착하며 자립심 강한 까페 여종업원이 그 까페의 젊은 사장, 당연히 키 크고 잘생기고 부유하지만 바람둥이에다 반항아 기질이 있는 그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라는 것을 앞의 다섯장만 읽어도 훤히 파악할 수 있었다. 문제는 줄거리가 뻔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종류의 책은 원래 줄거리 뻔한 맛에 읽기도 하는 거니까.

“아주 빠르게 술술 잘 읽혀요. 적당히 자극적이고, 적당히 감성적이고, 독자가 대리만족을 느끼기 적당한 해피엔딩이고요.”

소윤은 팀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문제는, 이 작가가 욕심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욕심이 많다고?”

“네. 아는 게 참 많은데, 그걸 독자에게 다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을 미처 다스리지 못해서, 작품에 꼭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다 집어넣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구체적인 예를 한번 들어보세요.”

소윤은 어느새 며칠 전 선배의 작품에 대해 말하던 때와 같은 이상한 희열에 휩싸여 있었다, 초조함 같기도 하고 의무감 같기도 한 그 열기에.

“음, 주인공이 남자의 집에 처음 갔을 때 응접실 벽에 걸린 고서화들을 보게 되잖아요. 그걸 주인공은 그냥 지나치고 마는데, 난데없이 작가가 개입해서 그게 어느 시대 어느 문인의 작품인지 장장 다섯쪽에 걸쳐 설명을 하더라고요. 제 생각에 독자들은 그 부분을 안 읽고 넘겨버릴 같아요. 지루하니까요. 소설에 기여하는 바도 없고요.”

“소설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

“네. 그게 남자의 취향이나 성격을 보여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뒤에 일어날 사건의 복선이 될 수도 있는데, 애석하게도 작가가 그렇게 활용하진 않았더라고요. 저는 독자가 로맨스물에서 기대하는 것이 응접실 벽에 걸린 고서화에 대한 지식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주인공 남녀의 애틋하고도 격정적인 사랑, 그게 얼마나 그럴듯하게 잘 표현되었느냐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닐까요?”

소윤은 신중하게 어휘를 골라가며 진중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인물에 대해, 문체에 대해, 제목에 대해서도. 그러나 말은 길었어도 긍정적인 평가는 사실상 없다시피 했으니, 그녀의 총평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설마 이딴 걸 돈 주고 사는 사람은 없겠지요?’였다.

그 작품이 한국 로맨스 소설계의 여왕벌로 불리며 충성심 높은 고정 독자들을 많이 거느린 것으로 독보적인 위상을 뽐내는 작가가 야심차게 내놓은 신작이라는 것, 그리고 그 여왕벌이 소윤이 현재 면접을 보고 있는 출판사가 보유한 몇 안되는 스테디셀러 작가 중 한명이라는 것을 소윤이 알 턱이 없었다. 상품으로서의 책의 가치를 가늠할 줄 아는 안목 또한 편집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 덕목인 만큼 소윤은 그런 점에서 벌써 결격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운이 좋았던 것일까. 혹은 팀장의 눈이 좋았던 것일까.

자신이 편집자로서 그 정도 결격사유쯤 갈음하고도 남을 만큼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음을 소윤은 대학의 마지막 한 학기 동안 그 출판사에서 교정교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여실히 입증해 보였다. 그녀는 모두 다섯권의 판권에 제 이름을 올렸다. 그중에서 특히 그녀의 성취욕을 고취시키고 나아가 업무능력도 배가시킨 것은 다름 아닌 여왕벌의 책이었다. 소윤은 아직 초심자였기에 상대적으로 고칠 부분이 많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 확인할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있었고 그만큼 배우는 것도 더 많았던 것이다.

결국 여왕벌의 책이 마지막 한조각까지 깔끔하게 맞춰진 완성품 퍼즐의 형태로 출간되고 독자들의 반응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소윤은 출판사로부터 정식 입사 제의를 받았다. 마침 그 무렵에 그녀가 고대해왔던 선배의 미스터리 공포소설도 출간되었다. 소윤이 직접 편집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서문의 ‘땡스 투’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작 ‘땡스 투’를 외치고 싶은 것은 그녀 자신이었는데도.

첫 직장에서 삼년을 근속한 후 그녀는 두번째 직장으로 스카우트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과 명주를 만나게 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