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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애란 金愛爛
1980년 인천 출생.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하고 2003년 『창작과비평』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비행운』,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이 있음. brokenname@empas.com
입동
자정 넘어 아내가 도배를 하자 했다.
—지금?
—응.
소파에서 주춤대다 ‘그래’ 하고 일어났다. 아내가 뭔가 먼저 ‘하자’ 하는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베란다로 가 수납장서 벽지를 꺼냈다. 몇달 전 동네 대형마트에서 산 ‘셀프 도배지’였다. 한 롤에 이만 몇천원. 폭은 내 어깨너비만한데 길이가 10미터를 넘어 손안에 전해지는 무게가 제법 묵직했다. 발바닥을 더럽히기 싫어 까치발을 든 채 설명서를 읽다, 왠지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 곁눈질로 거실 불빛을 봤다. 그러곤 설명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큰 소리로 외쳤다.
—정말 지금 할 거지?
지난달 어머니가 잠시 집에 다녀갔다. 두 사람 다 정신이 없을 테니 당분간 살림을 맡아주시겠단 명분이었다. 짐을 푼 첫날부터 어머니는 집 안 곳곳을 의욕적으로 쓸고 닦았다. 우편물을 정리하고, 먼지 낀 선풍기를 분해해 일일이 날개를 닦고, 시든 고무나무에 물을 줬다. 돼지고기와 메추리알을 섞어 간장에 졸이고, 멸치와 꽈리고추를 볶아 집안에 매운 내를 풍기고, 김을 굽고, 깻잎을 재우고, 냉동실을 정리했다. 아내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종종 무기력한 눈으로 쳐다봤다. 나이 드신 양반의 악의 없는 참견과 잔소리도 묵묵 감내하는 듯했다. 아니 감내했다기보다 의식하지 못했다 할까 안했다 할까. 적당한 말을 몰라 그냥 그게 말이니 싶어 저쪽에서 열심히 구사하는 몸짓을 아내는 수신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좀 바빴다.
그렇게 열흘쯤 지나서였다. 한밤중, 부엌에서 갑자기 ‘펑!’ 소리가 나 뛰어나가보니 어머니가 검붉은 액체를 뒤집어쓴 채 바닥에 주저앉아 계셨다. 우연히 테러범 옆에 있다 살점과 핏물 세례를 받은 양 얼빠진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손에는 눈에 익은 원통형 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두달 전, 집 앞 어린이집에서 보내온 복분자액이었다. 도로 돌려줄 생각에 손도 안 대고 방치해둔 걸, 갑자기 뚜껑을 딴 바람에 내용물이 폭발하듯 솟구친 모양이었다. 검붉은 액체는 어머니의 흰색 티셔츠뿐 아니라 식탁과 장판, 밥통과 전기주전자 등 자잘한 가재 위에도 어지럽게 튀어 있었다. 특히 식탁과 마주한 벽의 상태가 심각했는데, 산뜻한 올리브색 벽지 위로 시뻘건 얼룩이 번져 있는 게 마치 누군가 순전히 이웃을 모욕하기 위해 갈겨놓은 낙서 같았다.
—아이고, 이거 다 아까워서 어쩐다니.
어머니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셨다.
—아니, 나는 그냥 목이 말라서…… 니들이 통 안 먹길래……
나는 일단 어머니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 엄마. 어디 안 다쳤어?
어머니는 ‘내가 늙어서 주책이다’ ‘이 사람들도 참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걸 팔아야지 이런 걸 만들면 어쩐다니’ ‘병에 가스가 찼나보다’ 하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곤 바로 욕실로 가지 않고 키친타월을 둘둘 풀어 바닥부터 닦으려 했다. 평소 같으면 걸레를 빨아 쓰면 되지 뭐하러 종이를 낭비하느냐 나무랐을 터였다.
—놔둬, 엄마. 내가 할게.
엉거주춤 허리를 숙이며 슬쩍 아내를 쳐다봤다. ‘그렇지, 여보? 우리가 하면 되지? 넌지시 동의를 구한 거였다. 그런데 그때까지 내 옆에서 꼼짝 않고 있던 아내가 몹시 나직하고 또 상스러운 투로 뜻밖의 말을 했다.
—아이 씨……
어머니가 바닥을 훔치다 말고 고개 들어 아내를 봤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부엌 벽면에선 붉고 끈끈한 액체가 세로로 긴 자국을 남기며 조용히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내는 어색해진 분위기 따위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이게 뭐야.
—미진아.
그만하라는 뜻으로 지그시 아내의 팔뚝을 잡았다. 그러자 아내는 화를 내는 건지 이해를 구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서글픈 비명을 질렀다.
—다 엉망이 돼버렸잖아.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 온 건 작년 봄이었다. 분양면적 24평, 실면적 17평에 지은 지 20년 된 아파트였다. 요즘 같은 때 빚을 내서 집을 사는 건 다들 미친 짓이라 했지만 경매로 싸게 나온 물건이 있어 포기하기 쉽지 않았다. 많은 경우 매매가와 전세 보증금의 차가 크지 않았고, 원하는 조건의 전셋집을 구하기 어려웠을뿐더러 이사라면 지긋지긋하던 차였다. 오랜 고민 끝에 아내와 나는 결국 이 집을 사기로 했다. 집값의 반 이상을 대출로 끼고서였다. 몇십년간 매달 갚아야 할 원금과 이자를 떠올리면 자주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남의 주머니가 아닌 내 공간에 붓는 돈이라고 생각하면 억울함이 덜했다. 누군가 그 아파트 역시 당신 집이 아닌 커다란 남의 주머니일 따름이라고 일러준다 해도 할 수 없었다. 아내는 앞으로 영우가 어린이집을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되겠다며 기뻐했다. 사실 자긴 그게 제일 좋다고. 근처에 편의시설이 많은데다 서울보다 공기도 맑아 마음에 든다고 했다.
—영우도 여기 좋아.
혼자 블록 쌓기를 하거나 그림책을 보다가 곧잘 어른들 대화에 끼어들곤 하던 영우가 그날도 말참견을 했다.
—왜? 영우는 여기가 왜 좋은데?
그즈음 한창 놀랍고 재밌는 말을 쏟아내던 영우에게 아내가 기대감을 갖고 물었다. 부모로서 뭔가 해줬다 싶은지 답도 듣기 전에 벌써 뿌듯한 표정이었다. 영우는 여느 때처럼 입에 맑은 침을 문 채 선홍색 혀를 놀려 천진하게 대꾸했다.
—응. 차가 많아서.
베란다 밖 8차선 도로 위로 길게 늘어선 출퇴근 차량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한동안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꽤 얼떨떨했다. 명의만 내 것일 뿐 여전히 내 집이 아니면서 그랬다. 20여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이제 막 어딘가 얇고 연한 뿌리를 내린 기분. 갓 돋은 뿌리 하나가 땅속 어둠을 뚫고 나갈 때 주위에 퍼지는 미열과 탄식이 내 몸에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 났다. 퇴근 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면 이상한 자부와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딘가 어렵게 도착한 기분. 중심은 아니나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밀려난 건 아니라는 ‘안도’가 한숨처럼 피로인 양 몰려왔다. 그 피로 속에는 앞으로 닥칠 피로를 예상하는 피로, 피곤이 뭔지 아는 피곤도 겹쳐 있었다. 하지만 되도록 부정적인 생각은 안하려 했다. 세상 모든 가장이 겪는 불안 중 나는 좀더 나은 불안을 택한 거라 믿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건 얼마간 사실인지 몰랐다. 적어도 내겐 뭔가 선택할 자유라도 있었으니까. 아파트 매매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얼마 뒤, 티브이 예능프로그램에서 개그맨들이 ‘신문지 게임’ 하는 걸 봤다. 발 디딜 면이 점점 줄어드는 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최대한 오래 버텨야 하는 게임이었다. 개그맨들은 서로의 몸에 엉긴 채 용을 쓰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중 몇팀은 신문지 너머로 쓰러져 게임에서 탈락했다. 그땐 티브이 앞에 앉아 캔맥주를 마시며 낄낄댔는데, 요즘 내가 그 놀이의 참가자가 된 기분이었다. ‘반의반’ 또 ‘반의반의 반’ 크기로 접힌 종이 위에 외발로 선 채 가족을 안고 부들부들 떠는. 그렇지만 결국 살았다고 카메라를 보고 웃는. 대학 동기 몇몇은 내게 벌써 집장만을 했느냐고 부러움이 섞인 축하를 건넸다. 나는 괜히 겸연쩍어 ‘그래봤자 하우스푸어’라 변명했다. 한 친구는 ‘그래도 나는 그냥 푸어인데 너는 하우스푸어니 얼마나 좋냐’고 받아쳤다. 입주 후 양가 부모님과 친구들, 직장 동료를 초대해 몇차례 집들이를 했다. 가까운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음식을 나누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럴 땐 우리가 채무자란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매매계약서와 은행계좌에 쓴 내 이름이 낯선 가명처럼 느껴졌다. 새벽 요의에 잠에서 깨 화장실에 갈 때면 이따금 욕실 문 앞에 서 불 꺼진 거실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러곤 있어야 할 것은 모두 제자리에 있는지, 지켜야 할 것은 또 그 상태로 있는지 확인한 뒤 자리에 들었다.
아내는 집을 꾸미는 데 반년 이상 공을 들였다. 틈나는 대로 ‘좁은 집 셀프 인테리어’나 ‘가구 리폼’ ‘DIY’ 등의 정보를 살피며 실행에 옮겼다. ‘정착’에 대한 욕구는 전부터 나보다 아내가 더 강했다. 아내는 2년 내내 전문대학 기숙사에 살았고, 졸업 후 한창 학습지 교사로 일할 땐 두꺼운 요 대신 은색 돗자리를 갖고 다니며 독서실을 전전했다. 남들이 놀러 다닐 때나 쓰는 은박 돗자리를 휴대하기 좋고 버리기 쉽단 이유로 애용한 거였다. 그래서 한때 아내에게는 ‘날마다 소풍’이란 별명이 붙은 적도 있다고 했다. 그뒤 아내는 삼수 끝에 공무원 시험을 포기하고, 나와 결혼을 하고, 난임 치료를 받고, 두차례 유산 끝에 영우를 가졌다. 공무원이 되는 대신 노량진에 있는 공무원 입시학원에서 사무를 봤고, 잦은 이사 끝에 아파트를 샀다. 모든 게 지난 10년간 정신없이 벌어진 일들이었다. 집을 산 뒤 아내는 휴일마다 베란다에서 계속 무언가를 자르고, 칠하고, 조립했다. 우리가 10년 가까이 쓴 낡은 침대와 의자, 식탁과 수납장을 ‘리폼’했다. 어두운 갈색 가구에 흰색 페인트를 입힌다든가 연한 하늘색 또는 오렌지색 페인트를 발라 분위기를 화사하게 바꿨다. 한동안 우리 집에선 페인트와 접착제, 광택제, 나무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 ‘북유럽 스타일 가구’ 혹은 ‘스칸디나비아 패브릭’ 등을 알아보다 가격을 보고 낙심한 아내가 나름 택한 자구책이었다. 아내에게는 정착의 ‘사실’뿐 아니라 ‘실감’이 필요한 듯했다. ‘쓸모’와 ‘필요’로만 이뤄진 공간은 이제 물렸다는 듯, 못생긴 물건들과 사는 일은 지쳤다는 듯. 아내는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했다.
아내가 인테리어에 가장 정성을 쏟은 공간은 단연 거실과 부엌이었다. 아내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싸게 샀다며 패브릭 소재의 2인용 소파를 들여놨다. 짐작건대 충전재로 폐목재와 재활용 스펀지를 쓴 저가 소파인 듯했다. 나는 아내의 결정에 이견을 보태거나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어쩌다 아내가 의견을 물어오면 ‘괜찮네’ ‘나쁘지 않네’ 덤덤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나 역시 집이 환해지는 게 싫지 않았고, 돌아가신 아버지 말마따나 남자는 집에서 망가진 물건 잘 고치고 고장 난 데만 손볼 줄 알면 된다 싶었다. 아내는 소파 옆에 훤칠하니 잘생긴 고무나무 한그루도 들여놨다. 영우가 아기 때처럼 화분 위 돌을 빨거나 잎을 뜯어먹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다. 아내는 자신이 직접 만든 선반 위에 ‘러브(LOVE)’ ‘해피니스(HAPPINESS)’라는 영어단어가 적힌, 그러나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는 파스텔톤 깡통을 올려놨다. 한쪽 벽면에는 철사와 앙증맞은 나무 집게를 이용해 빨래 널듯 가족사진을 전시했고, 그러고도 뭐가 허전했는지 새 세마리가 나무 위에 앉은 ‘월 스티커’를 사다 빈 공간에 붙였다.
부엌과 마주한 작은방은 영우를 위해 꾸며졌다. 영우도 처음 가져보는 자기 방이었다. 아내는 평소 구석에 숨는 걸 좋아하는 영우를 위해 조그마한 인디언 천막을 손수 만들었다. 영우는 아기 때부터 어디든 잘 기어가 먼지를 집어 먹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뚫어지게 쳐다보곤 했다. 창문에는 ‘로보카 폴리’가 그려진 스크린 롤을 달고, 방문 위론 ‘ㄱㄴㄷ 한글 차트’를 붙였다. ‘기역’ 란에는 ‘강아지’가, ‘니은’ 칸에는 ‘나비’가 나오는 식의 브로마이드였다. 그즈음 영우는 한창 글자를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공부에는 도통 취미가 없는지 혹은 아직 어려서 그런지 글씨를 쓰라고 손에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를 쥐여주면 아내가 애써 청소해놓은 거실 바닥을 더럽혀놓곤 했다. 평소 별로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는 아내는 자신이 애써 가꿔놓은 공간을 아이가 어지럽힐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어느 때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그랬다. 영우는 제 방에서 온갖 장난감에 침을 묻혀가며 놀고, 그림책을 보고, 춤을 추고, 소파 뒤나 의자 밑 등 좁은 틈이나 구석만 보면 기어들어가 숨어 있곤 했다. 그리고 가끔은 세모난 천막에 들어가 종알종알 싱그러운 헛소리를 하다 잠이 들었다.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얼굴로.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슴이 저릴 정도로 무고한 얼굴로 잤다. 신기한 건 그렇게 짧은 잠을 청하고서도 눈 뜨고 나면 그사이 살이 오르고 인상이 변한다는 거였다.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시간이 하는 일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맡은 일을 알 수 있었다. 5월 혹은 9월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가장 인상적인 건 부엌 벽면이었다. 남루하고 어지러운 세간 사이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움’을 주장하고 있어, 그렇지만 ‘안간힘을 쓰듯 화사’해 눈에 띄었다. 그곳에는 이미 한참 전에 유행한 포인트 벽지가 붙어 있었다. 탐스럽다 못해 징그러운 튤립이 송이송이 무더기로 박힌 벽지였다. 흰색 바탕 위론 누런 얼룩과 파리똥인지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까만 점들이 튀어 있었다. 아내는 까다롭고 엄정한 얼굴로 그 벽면을 천천히 뜯어봤다. 그러곤 ‘내가 이 집 주인이라면 여기 단순하고 산뜻한 벽지를 발랐을 거’라 속삭였다. 중요한 건 ‘수납’과 ‘배치’, ‘배색’이라고. ‘인테리어’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바로 이런 거라며 사뭇 전문가 행세를 했다. 정작 육아며 직장 일로 자기는 미용실도 못 가면서 그랬다.
—우리 집도 정신없잖아.
아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항변했다.
—우린 애가 있으니까 그렇지.
아내는 육아와 살림에 대해 내가 조금이라도 비난하는 투를 보이면 예민하게 굴었다.
—이 집도 애가 있었나본데?
부엌 형광등 스위치에 붙은 뽀로로 스티커를 가리키자 아내가 조그맣게 웅얼댔다.
—우리 집은 여기보다 좁잖아. 좁은 집은 아무리 정리해도 표가 안 난다고.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아내가 제일 먼저 손본 건 부엌 벽면이었다. 아내는 입주 전 인테리어 가게에 들러 도배지를 골랐다. 그러곤 주인아저씨에게 부엌과 거실 도배는 모두 흰색으로 하되 씽크대와 마주한 부엌 벽면만 올리브색 벽지로 발라달라고 주문했다. 단색으로 통일된 공간에서 올리브색 벽면은 단연 ‘포인트’가 됐다. 아내 말마따나 눈맛도 시원하고 집이 훨씬 넓어 보이는 듯했다. 아내는 그 벽 아래 4인용 식탁을 놨다. 아이보리색 다리에 엷은 오렌지색 상판을 얹어 따뜻한 느낌을 주는 식탁이었다. 우리는 그걸 밥상 겸 찻상으로 썼다. 상판 한쪽에 전기주전자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차와 종합비타민,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으쓱한 기분이 드는 커피그라인더를 올려놨다. 우리는 그 식탁에 둘러앉아 머리를 맞대고 자주 밥을 먹었다. 드물게 손님이 올 때는 거실에 큰 상을 폈지만 대개는 거기서 끼니를 해결했다. 아내와 나는 등받이가 없는 일자형 의자에, 영우는 ‘유아용 접이식 식탁의자’에 앉아 웃고 떠들고 싸우며 허기를 채웠다. 그리고 그런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배웠다. 화장실 유리컵에 꽂힌 칫솔 세개와 빨래건조대에 널린 각기 다른 크기의 양말, 앙증맞은 속옷처럼 평범한 풍경이 귀한 추억이고 사건인 걸 알았다. 우리는 거기서 영우를 먹이고, 가르치고, 혼내고, 어이없는 말대꾸에 그만 허탈하게 웃어버리고, 그 와중에 권위를 잃지 않으려 재빨리 엄한 표정을 짓곤 했다. 영우는 거기서 젓가락질을 배우고, 음식을 흘리고, 떼쓰고, 탁자 아래 숨고, 울고, 종알종알 분홍 혀를 놀려 어여쁜 헛소리를 했다. 그러니까 거기 4인용 식탁에서. 식탁과 맞닿은 올리브색 벽 아래서. 두달 전, 집 앞 어린이집에서 보내온 복분자액은 바로 거기 튄 거였다.
아내와 나는 복분자액이 터진 밤의 일을 따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다음날 바로 내려가셨고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나날을 보내려고 애썼다. 그러니까 어제와 같은 하루, 아주 긴 하루, 아내 표현대로 ‘다 엉망이 돼버린’ 하루, 몇백시간짜리 하루를.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감기’ 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를 삼키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단풍이 지는 이유는, 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까닭은 모두 그 때문인 것처럼 여겨졌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들고 있는 느낌이 났다.
지난봄, 우리는 영우를 잃었다. 영우는 후진하던 어린이집 차에 치여, 제대로 치료 한번 못 받아보고 그 자리서 숨졌다. 52개월. 봄이랄까, 여름이란 걸, 가을 또는 겨울이란 걸 겨우 다섯번도 채 보지 못한 아이였다. 가끔은 속에 열불이 날 만큼 말을 안 듣고 말썽을 피웠지만 딱 그 또래 아이들만큼 그랬던, 어디서 배웠는지 제 부모를 안을 때 토닥토닥 고사리 같은 손으로 등을 두드려주기도 하던, 이제는 다시는 안을 수 없는 아이였다. 다시는 야단칠 수도, 먹일 수도, 재울 수도, 깨울 수도, 사과할 수도 없는 아이였다. 화장터에서 아내는 영우를 보내며 ‘잘 가’라 않고 ‘잘 자’라고 했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양, 손으로 사진을 매만지며 그랬다.
어린이집 원장은 영업배상보험에 가입돼 있었다. 가해 차량 역시 자동차종합보험을 들어 우리는 보험회사를 통해 민사상 손해배상을 받았다. 많다거나 적다거나 하는 세상의 어떤 잣대나 단위로 잴 수 없는 댓가가 지급됐고, 어린이집 쪽에서는 그걸로 일이 마무리됐다 생각하는 듯했다. 운전사를 바꾸고 당시 현장에 있던 보육교사까지 이직시켰는데 무얼 더 바라느냐고 묻는 듯했다. 직접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우리를 대하는 표정이나 태도가 그랬다. 내가 보험회사 직원이란 이유로 동네에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소문이 돈 것도 그즈음이었다. 처음에는 듣고도 믿을 수 없어 경악했다. 놀라운 건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을 믿는다는 거였다. 그게 영우를 잃은 것 못지않게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사람들은 영영 모를 터였다. 안다면 그럴 수 없을 터였다. 소문과 별개로 나는 나대로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아내는 직장을 관둔 지 오래고 매달 통장에선 아파트 대출금과 이자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내 월급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액수였다. 그즈음 어린이집 차량 보험회사 직원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회사 근처로 나갔다. 그는 사무적으로 나를 위로하고 공적인 어휘로 보험료 지급과정을 설명한 뒤 서류 한장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내 이름을 적을 자리와 계좌번호를 쓰는 칸이 비어 있었다. 그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나 역시 잘 알고 있는 양식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와 같은 사무적인 표정으로 누군가의 슬픔을 대면했을 터였다. 나는 얼마간 아무 말도 못하고 담배를 연달아 세대 피웠다. 잘못된 걸 바로잡고, 집안을 일으키는 건 가장의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배우고 자랐다. 하지만 내가 계좌번호를 적는 순간 이상하게 원장을 용서하는 결과를 낳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저 생각나는 건 어둠. 퇴근 후 딸각— 하고 스위치를 켰을 때 컴컴한 부엌 한쪽서 울고 있던 아내의 얼굴과 다시 딸각— 하고 스위치를 켰을 때 거실 구석에서 어깨를 들썩이던 아내의 실루엣뿐이다. 이따금 아내는 베란다 창문을 바라보며 동어반복적인 말을 했다.
—여보. 영우가 있는 곳 말이야, 여기보다 더 좋을 것 같아. 왜냐하면 거기는 영우가 있으니까.
한번은 아내가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러 나갔다 십분 만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내는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 것 같다고, 당신은 안 그러냐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아내는 사람들이 자꾸 본다고, 아이 잃은 사람은 옷을 어떻게 입나, 아이 잃은 사람도 시식코너에서 음식을 먹나, 아이 잃은 사람은 어떤 반찬을 사나 빤히 지켜본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내가 그런 시선뿐 아니라 마트 안에 바글거리는 어린아이들 때문에 외출을 기피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런 공간에 있을 때 이따금 숨이 막히고 다리가 풀렸기 때문이다. 그뒤 아내는 필요한 게 있으면 대형마트 싸이트에 들어가 인터넷 주문을 하는 듯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아이뿐 아니라 아내까지 잃게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하나둘 영우 물건들을 표 안 나게 정리했고 그걸 알게 된 아내와 크게 싸우기도 했다.
—여보, 우리 이사 갈까?
딸각— 하고 다시 스위치를 켰을 때 안방에 쪼그려 앉아 있던 아내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젖은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퇴근길에 곧장 동네 부동산에 들렀다. 그런데 지난해 우리가 이 집을 산 가격보다 아파트 시세가 이천만원 이상 떨어져 있었다. 어찌 할까 고민하다 부동산 앞에서 담배를 연달아 두대 피웠다. 그러곤 결국 집 파는 걸 포기하고 아내에게는 그냥 ‘집이 계속 안 나간다’고 둘러댔다. 물론 우리에게는 1원도 건드리지 않은 보험금 통장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한푼도 써선 안되는 돈이었다. 한번도 아내와 상의한 적 없지만 암묵적으로 그렇게 동의하고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소포가 왔을 때 아내와 나는 한동안 신기한 물건 보듯 그 상자를 빤히 바라봤다. 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감이 오지 않아서였다. 상자 겉면에는 ‘장수식품’이라는 로고와 더불어 ‘국산 복분자 원액 100퍼센트’라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아내는 상자에서 작은 봉투를 발견하고 카드를 꺼내 읽었다. 그 안에는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풍성한 한가위 맞으세요. 햇님어린이집’이라는 상투적인 글귀가 적혀 있었다. 추석이라고 아이들이 조물조물 만든 송편을 예쁘게 포장해 들려보낸 적은 있어도, 각 가정에 건강식품을 선물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여기가 어디라고. 우리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우리 집에 잘못 배달된 거라는 걸 알았다. 영우 일로 나빠진 평판을 그런 식으로나마 바꿔보려 하는 모양이었다. 주소록을 갱신하지 않은 탓인지, 신입교사가 실수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내는 이 사람들 어쩌면 이리 무감할 수 있느냐며 흥분했다. 알고 보냈으면 나쁜 거고 모르고 보냈음 더 나쁜 거라고. 나는 뭐라 말을 못 잇고 아내 옆에 서 있었다. 그러곤 복분자액을 어린이집으로 다시 돌려보낼 때까지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치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두달 전 일이었다.
아내와 나는 한동안 벽에 묻은 얼룩을 없애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종이에 밴 물은 웬만해서 잘 빠지지 않았다. 젖은 행주로 닦고, 매직 블록으로 문지르고, 화장솜에 아세톤을 묻혀 두드려도 소용없었다. 행주질을 여러번 한 곳은 비교적 얼룩이 흐릿했지만. 얼룩이 완전히 깨끗하게 없어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흔적을 지우려고 하면 할수록 우둘투둘 벽지만 더 헤졌다. 결국 도배를 새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아내와 동네 대형마트에 갔다.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 나간 건 오랜만이었다. 잡화와 공구, 형광등, 건전지 등을 파는 구역을 돌다 여러 종류의 벽지가 전시된 진열대 앞에 섰다. 선반 위로 일반 도배지에서부터 셀프 도배지, 시트지와 한지 따위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그중 우리는 ‘물에 5초만 담그면 끝’이라 적힌 ‘풀 먹인 셀프 도배지’를 골랐다. 제품설명서에는 ‘도배가 쉽고 즐겁다’ ‘도구가 필요 없다’ ‘기존 벽지를 뜯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왠지 읽기만 해도 성취감과 자신감을 주는 문장이었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이제 마음에 드는 색상과 무늬를 고르는 것뿐이었다.
—이걸로 할까?
아내가 미간을 찡그렸다.
—무늬 없는 거면 좋겠는데.
—그래? 이 정도면 깔끔하지 않나?
—다른 건 없어?
—이런 스타일은 싫잖아, 그렇지?
—어.
—그나마 이게 제일 단순한데. 흰 바탕에 아이보리색 무늬라 티도 별로 안 나고.
—……
—나중에 올까?
그런데 그때까지 까다롭게 벽지를 살피던 아내가 갑자기 안절부절 못하더니 ‘그냥 당신 마음에 드는 걸로 해’라고 했다. 어서 자리를 뜨고 싶어하는 양 결정을 서둘렀다. 집안 인테리어에 관해서라면 거의 독점적으로 모든 걸 선택해온 아내가 이번엔 내게 모든 걸 떠넘겼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영우만한 아이가 카트에 앉아 제 부모에게 뭔가 종알대고 있었다. 위층 서점에서 샀는지 두 팔에는 ‘우리 아이 창의성’이란 책이 안겨 있었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벽지를 고르는 동안 잠시 생기 있던 아내는 그뒤 우리가 언제 마트에 간 적이 있었느냐는 듯 도배일을 싹 잊었다. 관심이 사라진 건지 의욕이 줄어든 건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일찍 퇴근한 날이나 주말 저녁에 ‘오늘 도배나 할까?’ 하고 물으면 아내는 매번 ‘다음에’ ‘나중에’라고 대답했다. 평소 씽크대에 설거지 거리를 절대 쌓아두는 법이 없는 여자의 대답치곤 낯설었다. 아내는 이미 씻어놓은 그릇이라 해도 물기까지 완전히 말라있는 걸 선호했다. 요리든 뭐든 그렇게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상태’가 좋다고 했다. 그런 아내가 붉은 액체로 사납게 얼룩진 벽지를, 점점 말라붙어 피처럼 가뭇하게 변하는 공간을 계속 방치해두고 있었다. ‘웬만한 건 나 혼자 할 수 있는데 도배는 당신이 도와줘야 한다’고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어느 땐 나 역시 좀 귀찮기도 하고 피곤해 아내가 하자는 대로 했다. 그렇게 미룬 게 벌써 두달째였다. 그런데 오늘, 그러니까 토요일이라 늦게까지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던 내게, 까무룩 눈꺼풀이 감겨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까 고민하던 내게 아내가 도배를 하자는 거였다.
—여보, 거기 좀 잡고 있어봐.
—여기?
—응.
아내가 줄자 끝을 손으로 고정했다. 기역자로 구부러진 탓에 바닥에 딱 붙지 않아 갑자기 튕겨나가지 않게 잘 붙들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벽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2.3미터 부근에 연필로 작은 표시를 했다. 실제 길이보다 2~3센티 여유를 두고서였다.
—이런 게 몇개 필요해?
—세장.
—안 모자라?
—응. 이거면 충분해.
마트에서 산 벽지를 삼등분해 잘랐다. 흰 바탕에 아이보리색 꽃이 자잘하게 돋아 있는 도배지였다. 아내는 내가 고른 벽지가 썩 맘에 안 드는 눈치였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식탁은 이미 거실 쪽으로 빼놓은 상태였다. 아내와 첫번째 종이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곤 벽지를 미지근한 물이 담긴 욕조에 담근 채 잠시 기다렸다 양쪽 끝을 잡고 나왔다. 젖은 종이를 만질 때는 힘 조절을 잘해야 했다. 아내와 양쪽 종이 끝을 잡고 조심조심 유리 나르듯 부엌으로 이동했다. 말 그대로 ‘협동’이었다. 세로로 긴 벽지를 잡고 두 팔을 뻗은 채 까치발을 서자 벽지 끝이 몰딩 부분에 닿았다. 밑에서 벽지의 중간 부분을 잡고 있던 아내가 나를 올려보며 말했다.
—우리 신랑 키 크네.
오랜만에 보는 미소였다. 하지만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 났다. 벽지가 반쯤 벽에 붙었을 즈음 아내가 재빨리 뒤로 빠지며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줬다. 도배용 솔이 따로 없어 아내가 설거지 후 씽크대 물기를 정리하기 위해 사놓은 조그마한 유리닦이를 이용해 위에서 아래로 쭉쭉 문질렀다. 손 움직임에 따라 물에 불은 풀이 벽 아래로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벽면 아래론 이미 신문지를 깔아놓은 상태였다. 사방에 풀냄새가 진동했다. 도배지를 붙이고 뒤로 물러서 잠시 벽면을 바라봤다. 옆에 복분자액이 사납게 튄 면에 비해 티 하나 없이 깨끗한 곳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장으로서 뭔가 잘못된 걸 바로잡았다는 자긍심이 들었다. 형광등을 갈거나 하수구를 뚫을 때 느낀 감정과 비슷한 거였다.
—간단하네. 금방 하겠는데?
개수대에서 손을 대충 헹군 뒤 두번째 벽지를 들고 욕실로 갔다. 그러곤 다시 욕조에 종이를 넣고 아무 말 없이 몇초간 기다렸다. 그런데 그사이 아내의 눈빛과 호흡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아내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벌거벗은 영우의 작은 몸, 엉덩이에 푸르스름한 자국과 불룩 나온 배, 기분 좋은 냄새와 따뜻한 체온 같은 걸 상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엌 창문 좀 열까?
—냄새 빠지게?
—그것도 그렇고. 잘 마르라고.
아내가 씽크대 앞 작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작은 사각틀 안에서 힘센 바람이 회오리쳐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아내가 몸을 바싹 움츠렸다.
—바람이 차네.
—문 닫을까?
—아냐, 잠깐 열어두지 뭐.
두번째 벽지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아내를 바라봤다.
—여기 아래 좀 잡아봐.
첫번째 종이를 붙인 뒤 순서와 요령을 익힌 아내가 자연스레 도배지 아랫단을 잡았다. 서고, 앉은 것만 다를 뿐 나와 같이 두 팔 벌린 자세였다.
—11월이네.
무덤덤한 아내 말이 새삼 낯설고 시렸다.
—그러네.
—곧 겨울이불 꺼내야겠다.
—어. 새벽에 좀 춥더라.
—있지.
—어.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 사는 건 돈이 많이 드는 거 같아.
—그렇지.
—여보.
—어.
—혼자 일하느라 힘들지?
—뭐 늘 해온 건데.
—내가 밥도 잘 못 챙겨주고.
—뭘. 자기나 잘 챙겨 먹어.
—여보.
—어.
—오늘 도배 끝나면 다음주에……
—……
—우리 그 돈 헐자. 빚 갚아야지.
—……
순간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다. 도무지 방법이 없어 잠을 설치다, 그 돈을 쓰자 하면 아내가 나를 괴물로 보지 않을까 뒤척이던 밤이 떠올라서였다.
—응? 그렇게 하자, 오빠.
애써 호흡을 가다듬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
유리닦이를 이용해 위에서부터 아래로 꼼꼼히 벽면을 문지르며 내려왔다. 그러곤 속으로 ‘오늘은 아내가 일어나는 날이구나, 이제 막 일어나려는 참이구나’ 중얼댔다. 그러니 오늘은 내게도 또 영우에게도 중요한 날이라고. 아내는 내가 중간쯤 내려왔을 때 또다시 내 등 뒤로 빠져 내가 움직일 공간을 만들어줬다. 그러곤 벽지가 얼추 자리를 잡으면 물걸레와 마른걸레를 번갈아 사용하며 벽면 위 풀을 닦아냈다.
—여기 이사 오고 참 좋았는데. 당신도 그랬어?
—어.
—우리가 살아본 집 가운데 제일 좋은 집이었잖아. 그렇지?
그랬다. 잠이 안 올 정도로 좋았다. 어딘가 어렵게 도착한 느낌. 중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튕겨나간 것은 아니라는 거대한 안도가 밀려왔었다. 우리 분수에 이 정도 온 거면 멀리 온 거라고, 욕심부리지 말고 감사하며 살자고 다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영우가 사라진 뒤 문득 조용해진 집 안에서, 이따금 소름끼칠 정도로 고요해진 이곳 아파트에서, 아내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도배지를 들고 서 있자니 결국 그렇게 도착한 곳이 ‘여기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벽처럼 가파른 이 시멘트 벽면 아래였나? 하는. 우리가 20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힘들게 뿌리내린 곳이, 비로소 정착했다고 안도한 곳이 허공이었구나 싶은 느낌이 들었다.
—여보, 저기 울룩불룩해. 종이 운 거 같은데. 다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디?
—저기.
—괜찮아. 며칠 지나면 흡착될 거야.
—저기는? 삐뚤어진 것 같은데?
—어디?
벽면서 몇걸음 떨어져 나와 도배지 무늬와 세로선을 살폈다.
—그래? 난 모르겠는데?
—아니야. 이쪽으로 살짝 기울어졌어.
—어. 그러네.
두번째 벽지를 천천히 떼어내 위치를 조정했다. 다행히 풀이 금방 마르지 않아 교정이 가능했다.
아내와 물에 분 종이를 들고 조심스레 부엌으로 이동했다. 이제 세번째 벽지만 바르면 다 끝날 터였다.
—한꺼번에 불린 뒤 한쪽에 개어놓을 걸 그랬다.
—풀이 마를까봐 그랬지.
—잠깐 이것 좀 치우고.
아내가 허리를 숙였다. 그러곤 벽 아래 있던 조그마한 수납함을 뒤쪽으로 쭉 뺐다. 아내가 공간을 아끼기 위해 만든 한쪽 면이 뻥 뚫린 사각함이었다. 우리는 그걸 영우 식탁의자 옆에 두고 수납함 겸 보조 의자처럼 썼다. 수납함을 치우자 바닥에 뽀얀 먼지가 드러났다. 천장을 향해 길게 팔을 뻗어 두번째 벽지 옆에 세번째 종이를 덧댔다. 아내가 허리 숙여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나는 아내가 얼른 먼지를 훔치고 내 밑으로 들어와 벽지 아랫단을 잡아주길 바랐다. 그런데 걸레질을 하던 아내가 갑자기 꼼짝하지 않았다.
—여보.
—……
—영우 엄마?
—……
—미진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벽지서 손을 떼지 못한 채 아내를 내려다봤다.
—오빠……
—응?
—여기…… 영우가 뭐 써놨어……
—……뭐라고?
—영우가 자기 이름…… 써놨어.
아내가 떨리는 손으로 벽 한쪽을 가리켰다.
—근데 다…… 못 썼어.
아내가 흐느꼈다.
—아직 성하고……
아내가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 듯 끅끅댔다.
—이응하고……
—……
—이응하고, 아니 이응밖에 못 썼어.
그러곤 아이처럼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나는 영우가 제 이름을 쓰는 걸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림도 글씨도 아닌 형태로 구불구불 뭔가 끼적이는 건 본 것 같은데. 제대로 앉거나 기지도 못했던 아이가 어느새 훌쩍 자라 ‘김’자랑 ‘이응’을 썼다니 정말 대견해 곁에 있으면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영우의 머릿결은 또 얼마나 찰지고 부드러웠는지. 영우를 단 한번만이라도 어떤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다시 안아보고 싶었다. 부엌 창문으로 11월 바람이 사납게 들어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내가 숨을 고르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기억나.
—뭐가.
—영우 눈.
—……
—불을 보던 우리 아이 눈.
—……
—내 생일에 당신이 케이크 사왔잖아. 초에 불붙이고. 우리 영우는 태어나고 촛불 처음 보는 거였는데. 불을 엄청 신기한 거 보듯 골똘히 응시했잖아? 그날 내가 두돌도 안된 영우한테 ‘영우야, 오늘 엄마 생일인데 뭐 해줄 거야?’ 하고 물었는데. 그랬더니 잠자코 있던 영우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그 말도 못하던 아기가 잠시 뭔가 고민하더니 갑자기 나한테 막 박수를 쳐주더라고. 기억나, 오빠? 그 애가 나한테 박수를 쳐줬어. 생일이라고.
아내는 연주를 끝낸 뒤 수천명의 기립박수를 받은 피아니스트마냥 다시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던진 꽃에 싸인 채. 꽃에 파묻힌 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사람마냥 내가 받치고 선 벽지 아래서 훌쩍였다. 흰 바탕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이보리색 꽃이 촘촘히 박힌 벽지를 이고서였다. 그러자 이제 그 꽃이 마치 누군가 아내 머리 위에 함부로 던져놓은 조화(弔花)처럼 느껴졌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악의로 던져놓은 국화 같았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했던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까 우리를 피하고 수군댔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 쭈그려 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나도 멍하니 아내 말을 따라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그러곤 내가 그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내가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봤다. 젖은 눈동자가 스위치가 고장 난 형광등마냥 어두웠다. 캄캄했다. 아내는 한 손으로 영우가 직접 쓴, 아니 다 못 쓴 이름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그 순간 어디선가 영우가 다다다다 뛰어와 두 팔로 내 다리를 감싸안을 것 같았다. 토닥토닥 제 엄마의 등도 두드려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거였다. 바로 그 단순한 사실에 가슴을 도려낸 듯 아팠다. 나는 결국 고개를 푹 떨궜다. 부엌 바닥 위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 손에서 벽지를 놓을 수도, 그렇다고 놓지 않을 수도 없어 두 팔을 든 채 벌서듯 서 있었다. 물 먹은 풀이 내 몸에서 나오는 고름처럼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겨울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두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