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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세랑 鄭世朗
1984년 서울 출생. 2010년 『판타스틱』으로 작품활동 시작. 장편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 『지구에서 한아뿐』 『이만큼 가까이』가 있음. snare@naver.com
효진
냉장고 아래 칸에서 재료를 꺼내고 있을 때, 평소 나를 싫어하던 선배가 위 칸을 갑자기 여는 바람에 날카로운 모서리에 이마를 다쳤어. 생각보다 피가 많이 났어. 피의 양에 비해 심하게 찢어진 건 아니었는데도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어. 조용히 운 것도 아냐. 왈칵 울었어. 서른명이 복작거리는 주방에서 소리를 죽이지 않고. 바깥쪽 껍질이 떨어져나가 속살이 드러난 크루아상처럼 서러웠어. 그날만은 그 선배도 잘 대해주었지만, 문을 벌컥 여는 행동의 저 바닥에는 분명 적의가 있었다고 생각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말이야. 금방 떠나버릴 외국인, 무책임한 외국인, 질 나쁜 외국인,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언제나 모른 척 웃고 있었으니까. 웃는 척이라는 걸 들켜버려서 더 미움 받았으니까.
적의에 대해 생각해. 적의에 오래 노출되고도 괜찮은 사람은 여기든 거기든 없을 거야. 그 나쁜 입자들을 씻어낼 수 있는 샤워 비슷한 게 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해. 간편한 에어샤워 같은 것.
울면서 만든 베리타르트의 맛을 두고 컴플레인이 걸려오진 않았어. 슈거파우더로는 거의 모든 걸 덮을 수 있지. 사람들의, 관계의 가장 저열하고 싫은 부분까지도 말이야. 그리고 그날 퇴근하면서 너를 떠올렸어. 내가 다친 이마의 그 부분은 언젠가 네 얼굴에 무지개가 맺혔던 부분.
내가 너를 떠올릴 때, 그 순간을 자주 생각해. 두장의 유리가 맞닿은 틈이 프리즘처럼 무지개를 만들어냈을 때를. 학교 앞의 별로 예쁘지도 않은 까페였는데 유리창이 가끔 그렇게 재주를 부렸잖아. 관자놀이에 무지개가 있다고 내가 말하자, 너는 아주 조심스럽게 눈을 옆으로 굴렸어. 마치 그러면 볼 수 있을 것처럼. 자칫하면 무지개가 사라지고 말 것처럼. 사진을 찍어주고 싶었는데 그때의 화소 낮은 휴대폰 카메라엔 좀처럼 잡히지 않았어.
지난번에 통화하다가 네가 했던 말 기억나? 내가 꼭 네 머릿속에만 있는 인물인 것 같다고. 너도 여기 오고 나도 거기 가고 그저 몇달 보지 못했을 뿐인데 그런 기분이 든다고. 나도 토오꾜오도 정말로는 없는 게 아닐까 가끔 이상한 상상을 한다고. 멋대로 토오꾜오를 없애지 마, 하며 나는 웃었고 말이야.
우리가 여기 처음 왔을 때는 가난한 여행자였고, 나는 너 없이 돌아와서 여러번 신분이 바뀌었지만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아. 그래도 너와 함께 갔던 곳을 지나면 그때의 날짜와 날씨 같은 것들이 마음속에 자막처럼 지나가. 그런 곳들에 남자친구들과도 몇번이나 더 갔지만 희한하게 최초의 기록만이 떠오르지. 사실 그건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어. 그래서 남자친구들이 대대로 너를 버거워하나봐. 우린 어째서 이렇게 슬프도록 스트레이트일까. 이렇지 않다면 남자친구들, 하고 복수로 말해야 하는 극적이고 피곤한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아무하고도 너만큼 파츠가 맞지 않아, 응, 맞아. 피 에이 알 티 에스, 그 파츠. 여기선 자주 쓰이는 표현인데 네가 그렇게 확인하니까 좀 다르게 들린다. 작고 견고한 부속품이 된 것 같네. 조금 모양이 다른, 하지만 나란히 들어가는 파츠.
네가 못 믿는 것도 이해가 가지만, 나는 정말 하루에 네시간씩 자고 있어. 자정에 들어와서 새벽 네시에 다시 일어나 나가. 우리가 함께 살 때는 먼저 일어난 네가 가끔 내 코밑에 손가락을 대거나 맥박을 체크하고는 했으니 그새 많이 바뀌었지. 내가 죽은 것처럼, 이제 깨어나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사람처럼,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잔다고 넌 싫어했잖아. 잠은 점점 더 가벼워지는 것 같아. 덮지 않은 것처럼 가벼운 차렵이불 같아져.
나는 여섯시까지 긴자의 타르트 가게로 출근해.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 먹는 곳이야. 80년대부터 유명했는데 최근에는 사실 조금 주춤하고 있어. 다이깐야마(代官山)라든지 체인점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동네에 무리하게 진출했다가 철수해야 했거든. 지점장들 사이의 권력투쟁과 암투가 보통이 아니야. 내가 일하는 지점의 지점장도 그새 세번이나 바뀌었어.
한껏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매장 안쪽에는 서른명이 북적대는 주방이 있어.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모두 고생인데도 분위기를 따지자면 싸늘해. 실수를 하면 그날은 말이 없다가 다음 날 지점장이 부르지. 바보 같은 짓을 했을 때 즉시, 바로 위의 선배가 혼낸다면 차라리 나을 것 같아. 며칠 전에는 2주도 안된 신입사원이 무단결근을 하더니 전화가 왔어. 더이상 못 견디겠다고 하더라. 위염, 장염, 과호흡으로 그만두겠다고 했어. 사람이 계속 바뀌고 있는데 어쩌면 80년대부터 지금까지 쭉 그렇게 지속되어온 걸지도 몰라.
오전 근무가 끝나고 세시까지는 카부끼쪼오(歌舞伎町)의 스페인 식당에서 에끌레르를 만들어. 에끌레르는 스페인 디저트도 아니고 심지어 마스터도 칠레에서 유학했다고 하니 약간 정체를 알 수 없어. 아무래도 마스터의 부수입용 소일거리인 것 같아. 나는 에끌레르만을 위해 고용된 셈인데, 제과학교 학생을 구한다기에 지원했지만 외국인이라 처음에는 자리를 얻지 못할 뻔했어. 그래도 이제는 아르바이트 세곳 중에 가장 잘해주셔. 특히 자영업의 쓰디씀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주시지. 얼마나 쉴 새 없는지, 근근이 유지되는지 말이야.
에끌레르를 만들고 나면 제과학교에 가. 현장에서 은퇴한 교수님들의 강의는 과학적이라기보단 직관적인 편이야. 소금이 들어가면 케이크 스펀지가 빨리 탄다기에 어떤 원리인지 물었더니, 풀장보다 해수욕장에서 빨리 타지 않느냐는 어이없는 대답이 돌아왔지. 그런 말을 들으려고 비싼 돈을 내고 다니는 건 아니야 이 영감탱이야, 하고 속으로 투덜대게 되지만 그래도 많이 배우고 있어. 내가 못생긴 걸 구워낼 때면 혹독하게 지적해주거든. 자네, 지금 그 슈크림 못생겼지만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지? 전혀 귀엽지 않아. 엄청 기분 나쁘게 생긴 빵이야. 나 교수님들 성대모사 완전 똑같이 할 수 있는데 네가 몰라서 아쉽다.
수업이 끝나면 복어집에서 일해. 나를 포함해 아르바이트생이 여섯명인 가게인데 복어가 잘 팔리지 않아서 요즘은 장어요리도 팔고 있어. 간판의 ‘복어전문’이 좀 어색하게 되어버렸지만 손님이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수조 속에 장어가 더 많아졌더니 복어들이 적응을 못하고 당황해하는 것 같아. 매일 복어 사진을 찍는 게 요즘의 취미야. 복어는 얼굴이 꼭 어린애 같아서 표정이 보이거든.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은 처음엔 날카롭게 굴었는데 요즘은 좀 나아졌어. 오봉(お盆) 때 대신 일해주고 추석 때 다시 부탁하는 그런 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아. 사장님은 잠시잠시만 다녀가서 가게가 한산할 때는 주방장 아저씨가 늦은 저녁을 챙겨줘. “한국사람들도 카레 먹어?” 하고 물었을 땐 웃고 말았어. 일본사람들은 왜 인도사람보다도 카레에 대한 자부심이 클까.
남자친구도 복어집 아르바이트생이었어. 지금은 학교공부가 바빠져서 그만뒀지만, 우리 둘만 외국인 아르바이트생이었지. 남자친구는 베이징에서 왔어. 네 머릿속에서 토오꾜오가 희미해진 것처럼, 나에겐 베이징이 가본 적 없는 먼지로 지어진 도시야. 이야기로만 듣는 베이징은 점묘화 같아. 언젠가 가보게 된다면 달라지겠지. 국제변호사가 되고 싶어서 여기 왔대. 나는 제과학교 때문에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남자친구는 영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하다가 서로 싸울 때는 일본어로 싸우지. 그럴 때면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어. 남자친구는 한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한국어를 배울 생각이 없고, 나도 중국어는 ‘칭다오 세병 주세요’밖에 못해. 남자친구가 나중에 베이징에서 살 생각이 있냐고 물었을 때,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 식탁 위에 칭다오 세병만 있어도 되냐고 되물었더니 막 웃더라.
남자친구의 이름엔 버드나무가 있어. 버드나무는 한국어로도 일본어로도 중국어로도 발음이 크게 다르지 않아. 그 발음이 좋아서, 남자친구의 약간 길고 흰 얼굴이 좋아서, 안경이 잘 어울려서, 자다가 작은 지진이 있을 때면 명치 부분을 단단하게 안고 눌러줘서, 우울해할 때면 판다 동영상을 보여줘서, 대충 그런 이유로 좋아해. 중국인들은 어쩐지 판다에 대해서 쿨할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더라. 어두운 방에서 모니터만 빛내며 판다 동영상을 무한반복해서 보고 있는 남자친구를 보면 가끔 짠해. 그런 날은 힘든 일이 있었던 날이거든. 너도 힘들구나, 그게 우리 관계의 바탕인 거 같아.
내가 사는 방은 도로변 건물의 5층인데, 내진 설계 때문에 조금 큰 트럭만 지나가도 흔들려. 피곤한데도 좀처럼 잠들 수가 없어. 여전히 못 믿겠지? 그렇게 죽은 듯이 자던 내가 자꾸 깨. 그런 밤에는 여러가지를 생각해. 고등어 낚시를 나갔다가 참다랑어떼를 잡았다는 뉴스 속 어부 아저씨들이 계속 럭키하기를 바라기도 하고, 병뚜껑이 목에 걸려서 죽었다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마지막 기분을 가늠해보기도 하고, 뜻은 잘 모르지만 「Iko Iko」를 부르기도 해. 특히 가을에는 돼지풀 알레르기가 심해서 더 못 자. 숨을 못 쉬겠어. 서울에선 없었는데 토오꾜오에 아마 돼지풀이 더 많은 거겠지. 이름도 안 예쁘고 생긴 것도 안 예쁜데 꽃가루를 엄청 날리나봐. 어차피 고생할 거면 조금 가련하고 여성스러워 보이는 알레르기도 하고많은데 하필 돼지풀이라니.
하지만 아르바이트가 세개면 어떻게든 잠들어야 하기 때문에 한두가지 방법을 체득했어. 아무 상관이 없는 단어들을 연달아 생각하면 다시 잠들 때가 있어. 이를테면 단추, 래브라도 리트리버, 오간자, 쇄빙선, 고무나무, 분무기, 그리스 정교회, 줄자, 파인애플, 열풍기, 나비, 슬리퍼…… 연관성이 없고 패턴이 없어야 해. 그러면 뇌가 지루해지는지 잠들어.
그래도 잠들지 않으면 피곤한 발에 새 신을 신는 상상을 반복적으로 하는 거야. 아주 푹신한 새 신이어야 해. EVA 겉창에 라텍스 깔창이라서 신는 순간 신음이나 탄성이 나올 정도로 편한 종류 말이야. 그런 신발을 처음으로 신는 상상을 계속하면 좋은 꿈을 꿔. 혹시나 잠이 잘 오지 않으면 해봐.
다른 사람들은 늦은 시간에 이제 아무도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데 아빠는 여전해. 술에 취해서 새벽에 메시지를 보내지. 워낙에 그런 사람이니까. 내 이름을 효도 효(孝)에 다할 진(盡)으로 지은 것부터가 이기적이지 않아? 신생아에게 그런 명령어를 입력하다니 너무하잖아. 자발적으로 효도할 마음은 전혀 나지 않는 이름이야. 심지어 효나 진이 항렬자인 것도 아냐. 오빠 이름엔 항렬자를 써놓고 나는 새로 지었어. 아빠 때문에 메신저 프로그램을 지웠다 다시 깔았는데, 그러고 보니 무음 기능이 있더라.
아빠는 술만 먹으면 ‘사방 백리 안쪽의 남자만 진짜 남자’랬어. 나머지는 핏줄이 나쁘고 반편이에 가까워서 계집애나 다름없다는 게 일관된 주장이었지. 오빠에게라면 몰라도 계집애인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해서 어쩌란 건지, 자라는 내내 그랬지.
너를 한번도 고향집에 초대하지 않은 건 아빠 때문은 아니야. 아빠는 손님 대접은 또 잘해. 그보다는 재미도 없고 풍경이 빼어난 것도 아니고 특산물도 없는 동네여서였어. 심지어는 외식을 할 수 있는 식당이 두세군데밖에 안되었는데 모조리 맛이 없었어. 가장 오래된 가게는 동태찌개집이었는데 맛도 맛이지만 가끔 고기 안쪽이 차가울 때가 있었어. 경양식집의 돈까스는 부직포 행주를 씹는 것 같았고. 가끔 친구들과 함께 동네를 가장 먼저 뜨는 사람이 식당들의 문을 열어젖히고 더럽게 맛없다고 외치고 떠나자는 약속을 할 정도였어. 그런 약속을 다섯번쯤 했지만 떠날 때가 되어선 다들 말없이 떠나거나 아예 떠나지 못했지. 볼거리가 하나쯤은 있지 않겠냐고? 아, 오래된 절이 하나 있긴 한데 고려시대에는 꿋꿋하게 삼국시대 불상을 만들고 조선시대에는 꿋꿋하게 고려시대 불상을 만들어서 미술사적으로 의미는 있다더라. 절 뒤의 절벽에 부조로 새겨진 관세음보살의 얼굴마저 대자대비함과는 거리가 멀게 완고했어. 여차하면 크게 혼낼 것 같은, 무언가를 끝없이 거부하고 있는 표정이었지.
어릴 때 나는 내내 소포만 기다렸어. 서울로 시집을 간 이모들이 사촌들이 다 읽은 전집을 보내줄 때마다 과자세트도 보내줬거든. 서울에 흩어져 살던 세 이모는 각자 다른 과자점에서 오래가는 쿠키박스를 골랐어. 무슨무슨 당이라는 오래된 가게도 있었고 프랑스 장군의 이름을 딴 가게도 있었고 당시엔 유행했지만 지금은 없어진 체인점도 있었어. 가끔은 남대문 수입상가에서 샀을 외국 과자도 있었고. 방학이 되면 서울에 직접 가기도 했어. 이모들과 아빠가 크게 싸우기 전까지는 말이야. 서울에 가지 못하게 된 후로는 소포를 더 간절히 기다렸어. 책도 반가웠지만 열자마자 쿠키를 맛별로 하나씩 골라뒀지. 아빠와 오빠가 쿠키몬스터처럼 먹어치울 테니까 미리 확보해둬야 했어. 종이박스가 아니라 양철캔이 오면 내 차지였기 때문에 그 예쁜 통들은 보물이 되었어.
이미 먹은 지 한참 된 과자의 맛을 복기하면서, 자랄수록 어떻게든 서울에 가겠다고 반복해서 결심했어. 어느 순간부터는 사투리도 쓰지 않았어. 혀가 먼저 서울에 갈 준비를 했던 것 같아. 다행히 재수하지 않고 한번에 붙었지. 재수를 하면서, 집에만 있으면서 그 동네에 머무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기 때문에 절박했거든.
그런데 대학에 보내주지 않겠다고 했어. 내내 준비하고 지원하고 논술시험과 면접을 보러 서울에 다녀온 것까지 다 봐놓고는 아빠가 딴소리를 했어. 돈 때문은 아니었어. 물론 버거운 돈이긴 하지만 아빠는 할아버지가 물려준 벽돌공장 터가 비싸게 팔려서 여유가 있을 때였거든. 오빠만 해도 부족함 없이 세시간 거리 대도시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고. 오빠보다 공부를 잘했던 게 아빠의 어딘가를 자꾸 건드린 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나올 줄이야. 아무래도 서울은 아닌 것 같다, 통학할 수 있는 학교로 내년에 다시 봐라, 그보다 대학을 꼭 가야겠냐. 나는 구운 머랭처럼 하얗게 굳어 있었지. 울며불며 지랄을 해볼까 했는데 지랄할 힘도 나지 않았어. 아빠가 어깃장을 놓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아빠의 눈에는 내가 온전한 한 사람이 아니란 걸 터득한 지는 벌써 오래여서 결국 오빠한테 전화를 걸었고, 소환되어 온 오빠가 내 대신 싸웠어. 건성으로 싸웠는데도 아빠를 설득해냈어. 오빠의 결정적인 한마디는 ‘남들이 흉본다’였지. 어릴 때 내내 때리고 괴롭혔던 걸 그 설득으로 갚았다고 생각해.
집을 떠나면서 나는 명절에도 돌아가지 않는 애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어. 띄엄띄엄 돌아갈 때마다 마음이 누그러지기는커녕 거기가 내 집이 아니란 것만 더 확실해졌달까. 스무살 때부터 나의 끝없는 불효가 시작된 셈이야. 입학하자마자 너를 만나서, 너와 같이 살면서 완벽한 파트너까지 얻었으니. 너도 알다시피 내 목표는 두가지였어. 하나는 서울의 가장 탁월한 디저트들을 한번씩 먹는 것. 계절 따라 꽃처럼 피었다가 사라지는 가게들을 놓치지 않고 추적해서 대표 메뉴와 숨은 메뉴를 다 먹어보고 기억하겠다고 말이야. 나머지 하나는 아빠가 그렇게 무시하는 타 지역에서 서울로 몰려든, 포장지도 알맹이도 다른 남자애들을 모조리 만나보는 거였어. 나는 그렇게 ‘팔도 컬렉터’가 되었고, 너는 계획적이었던 건 아니지만 경험 없는 남자애들만 계속 만나서 ‘체리 컬렉터’가 되었으니 우린 정말 딱 맞는 콤비였지 않니.
내가 가장 많이 좋아했던 남자애는 섬에서 온 아이였구나. 그래, 네가 그간 추궁한 대로야. 걔만큼 좋아했던 애는 없어. 근이가 자란 곳은 전복 양식장으로 유명한 섬이었고, 걔는 거기서도 가장 큰 양식장 집 아들이랬지만 처음엔 너나 나나 전혀 몰랐지. 나는 근로장학생이라 도서관 출입구에서 추위에 떨고 있었고, 너는 논술 과외를 하며 학생들이 800자짜리 길쭉한 원고지를 채우는 동안 졸곤 하던 2학년 때였잖아.
어떻게 만났는지 말 안했던가? 그럴 리가. 네가 잊은 거겠지. 학기 초였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시간표를 착각해서 수업에 늦었는데, 횡단보도 가운데 하필 맨홀 뚜껑이 있었고 키튼힐(kitten heel)의 굽이 딱 끼어버린 거야. 중심을 잃은데다 당황해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뒤에서 오던 근이가 그걸 빼주었어. 속도를 멈추지도 않고 아주 빠르고 단호한 손으로 굽을 빼주고는 그대로 가버렸지. 어찌나 효율적으로 움직였는지 5미터 바깥에서 내게 닥친 작은 재앙을 미리 알아챈 것 같았어. 눈이라도 맞추고 생색냈다면 반하지 않았을 텐데 한번 쳐다보지도 않고 가버렸어. 감사 인사도 제대로 듣지 않고 말이야. 어쩐지 그게 좋았어. 생색의 시옷자도 모르는 넓고 차가운 어깨가, 헤어라인이 명확한 목덜미가. 보폭이 큰 아이였기 때문에 나는 겨우 근이가 들고 있던 책 제목만을 확인할 수 있었지. 학교 도서관 도장이 찍혀 있어서 얼른 봤거든. 좀 멋진 책이면 좋았을 텐데 당시 유행하던 가벼운 자기계발서였지만 그래도 대출정보를 조회할 수 있었던 게 어디야. 네명이 그 책을 대출하고 있었지만 남자 이름은 근이뿐이었기 때문에 이름과 소속된 과와 학번을 알 수 있었어. 그때부턴 너도 도와줬잖아. 그 과의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근이의 시간표를 빼돌렸고 교양강의를 같이 들으며 우리는 천천히 근이를 포획했지. 한 학기를 통째로 쏟아부은 작전이었어.
웅, 용, 근같이 너무 수컷 이미지를 풍기는 이름은 싫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네가 함께 그물을 쳐줘서 가능했어. 아직 셔터 소리가 나지 않았던 휴대폰으로 근이 사진을 몰래 찍어줬고, 조별 과제를 함께하자고 시큰둥하게 말을 건네줬으니까. 아마 근이는 여전히 우리가 우연하게 친해졌다고 믿고 있을 거야.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발표를 같이 해서, 동갑이라서 친해졌다고 그렇게.
휘적휘적 사라지던 뒷모습만큼이나 앞모습도 보기 꽤 괜찮았고, 잘생긴 얼굴에서 나오는 어마어마한 사투리가 더 매력이었어. 나는 그때 이미 사투리가 오히려 더 어색하게 들렸는데, 근이는 전혀 고치지 않았어. 그후의 직업 선택을 생각하면 근이야말로 사투리를 일찍 고쳤어야 했는데. 그치? 근이는 뭘 해도 자연스러운 사람이었어. 너는 근이의 그런 면이 억눌린 데나 뒤틀린 데가 없어서, 사랑받고 속 편하게 자라서 그렇다고 했지. 나같이 오류가 많은 여자애는 그렇게 내부구조가 단순한 남자애를 만나는 게 맞을 거라고도 했어. 그때나 지금이나 너는 정말 직언하는 친구야.
니는 지금 하나도 이해를 못허고 있다아. 교수님 말씀을 듣기는 허냐. 갑갑허다아. 근이가 말하는 것도 좋았고, 근이 흉내를 네가 너무 잘 냈기 때문에 그것도 끊임없이 우리를 웃게 했잖아. 근이가 방학 때 아버지 차를 몰래 타고 나왔다가 빗길에 전복시켜버렸을 때도, 그 상황에서 서울에 있는 나에게 전화해 우쩐다냐아, 우쩐다냐아, 하고 노래 부르듯이 길게 말했기 때문에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어. 어떻게 근이에 관련된 모든 일에는 즐거워할 수 있었을까. 기본적으로는 돈 때문이었을까? 근이 지갑엔 지갑이 반으로 접히지 않을 만큼 현금이 많았잖아. 언제나 두꺼웠지. 5만원권이 나오기 전이라서 더 그랬겠지만 아무튼 놀라울 만큼 두꺼웠어. 전복은 비싸니까. 비싼 조개니까. 돈이 있다고 누구나 주변에 베푸는 건 아닌데 근이는 정말 기분 좋게 돈을 썼다고 생각해. 전복의 안쪽 같은, 그런 무지개 같은 분위기가 근이에게 있었어. 조개껍데기 돈을 쓰는 것처럼 호쾌했으니까. 가난한 친구들을 매일 거둬 먹이면서도 보답을 바라거나 치사하게 구는 적은 한번도 없었어. 우리가 다 같이 먹고 난 자리에는 조개 무덤이 생길 것 같았잖아. 바구미가 생긴 묵은 쌀만 먹다가, 근이와는 포식을 했으니.
근이가 방 앞에 찾아왔던 겨울날이 기억나. 왜 마음이 상해서 먼저 돌아왔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근이가 찾아올 걸 알고 있었던 건 분명해. 첫날은 끝까지 문을 열어주지 않자 돌아갔는데, 그다음 날에 와서는 택시에서 내리지 않았어. 추워서 서 있을 수 없으니까 미터기를 켠 채로 그냥 앉아 있었던 거야. 미친 게 아닌가, 기가 막혀서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어. 네가 없는 주말이었어.
근이와 사귀면서부터 과자를 만들었어. 이미 머릿속에는 서울의 과자 지도가 대강 완성된 다음이었고, 직접 만들고 싶었지. 황학동에 갔다가 외국인 가족이 쓰다가 버리고 간 듯한,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조그만 중고 전기오븐을 구한 게 시작이었어. 팬이 너무 작아서 쿠키 한상자를 구우려면 다섯번쯤 구워야 했어. 토스터보다 좀더 큰 오븐이었어. 심지어 전압이 맞지 않아서 오븐만 한 변압기를 써야 했고 아무래도 썩 맛있게 구워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열심이었어. 근이와의 기념일 전날엔 서울 시내 전철역 곳곳의 물품 보관함에 과자와 선물을 숨겨놓았어. 다음 날 손을 잡고 보물찾기를 할 수 있도록. 대학로에서 을지로로, 을지로에서 신촌으로, 신촌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노량진으로, 노량진에서 강남으로, 강남에서 잠실로. 지금 만드는 것들과는 많이 다른 형편없는 과자였지만, 그래도 근이는 잘도 먹었어. 다른 사람 주지 않고 혼자 다 먹겠다고 했는데 그 말이 듣기 좋았어.
근이를 주려고 만들었다가 실패한 것들을 네가 다시 포장해서 네 남자친구들에게 줬던 건 생각나니? 직접 만들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잘도 먹혔지. 대신 뒷정리를 같이 해주었는데 30분이면 할 걸 둘이서 딴짓하느라 세월아 네월아 닦았잖아.
근이는 군대를 갔고, 군대를 다녀와서는 호주에 갔어. 호주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어. 대학도 겨우 왔는데 무슨 어학연수. 몸만 오라고 해도 도저히 그럴 염치는 없었어. 골드코스트라고 했어. 근이답게 낙천적인 지명을 골랐구나 싶었어. 서핑을 배운다고도 했고 캠핑을 간다고도 했고 호주의 유명한 배우를 봤다고도 했고 롤러코스터를 탔다고도 했어. 인터넷전화는 반박자쯤 느려서 성가셨고 한번쯤 가야지 했지만 결국엔 가지 않았어. 근이가 돌아왔을 때 나는 직장인이었고 근이가 취직 준비를 할 때는 다시 대학원을 다니다 말다 하는 중이었어. 대학원 때부터는 너와도 따로 살았잖아. 방은 반 토막이 되었고 오븐도 고장 나서 버렸어. 그사이 언젠가부터 근이와 나는 헤어져 있더라.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났어. 맨홀에 낀 굽을 빼주는 정도의 귀여운 일은 언제든 쉽게 일어나고, 근이는 좀처럼 집요한 타입이 아니었으니까. 억눌리지도 뒤틀리지도 않은 사람이 집요하기란 쉽지 않아, 그치?
그래도 자주 만났어. 계절이 바뀔 무렵에 한번씩. 너도 기억하는 언젠가는 다음 날이 면접이라 해서 너희 집에 갔지. 근이 눈썹이 무성해 보여서 깎아달라고 말이야. 나는 눈썹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그리면 그렸지 깎을 일이 없어서 눈썹 칼이 낯설었어. 갑작스러운 방문에 너는 웃다 못해 짜증을 냈지만 공들여 근이의 눈썹을 깎아주었어. 그저 모양만 잡아주었을 뿐인데 근이의 눈매는 훨씬 깔끔해 보였지.
그 면접은 물론 통과하지 못했고, 2년이 더 걸렸구나. 근이가 이마 제모를 받고 나서 됐으니까. 나는 그 약간 좁은 듯한 이마도 좋아했는데 평범하게 넓은 이마가 되고 나서야 근이는 아나운서가 될 수 있었어. 나중에 벗겨지면 진짜 아깝겠네, 근이가 전화해서 그렇게 말했을 때 너무 서울말이라서 놀랐어. 대학시절 내내 고치지 않았던 사투리를 드디어 완벽하게 고친 건데 이상하게 그게 싫었어.
가장 좋아했던 남자애가 TV에 나온다고 해서, 그 이유만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아냐. 나는 굉장히 여러가지로부터 도망쳤거든.
그전에 석사학위 논문을 썼어. 너는 마침내 묶여 나온 내 논문을 열심히 읽고 나서는 웃기다고 했어. 웃기면 안되지, 하면서도 비전공자가 끝까지 읽어줬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어. 그렇구나. 나는 웃긴 논문을 썼구나. 들개가 나오고 아주 오래전에 죽은 사람의 훼손된 시신이 나오고 역병을 이용하는 정치인들이 나오고 달력과 달력에서 누락된 것에 대한 논문이었어. 다행히 전공자들에게는 웃기게 읽히지 않았는지 학회에서 몇번 발표하기도 했어.
그런데 그즈음 분위기가 별로 안 좋아졌달까. 가끔 불안정한 사람들이 대학원에 들어올 때가 있잖아. 전공과 상관없이 과마다 한명씩 꼭, 병원에 갔어야 했는데 대학원에 와버린 케이스. 우리 과에도 그런 사람이 들어온 거야. 약간 과하게 들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여자애였는데, 술을 자기 주량보다 많이 마시는구나 정도가 첫인상이었어. 그리고 그해가 다 가기도 전에 그 후배는 교수들 사이를, 교수와 조교들 사이를, 선후배 동기 사이를 굉장히 복잡한 선으로 이간질시켰어. 교수 임용과 장학금 수령 결과가 바뀔 정도로 어마어마한 작업이었던 모양인데 애초에 악의가 있어서 벌인 일이면 빨리 탄로가 났겠지만 그저 자기 안의 불안을 사방에 던진 꼴이어서 꼬리가 늦게 붙잡혔어. 불안정한 사람 한명이 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행위였다고 할까. 나도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 중 하나였어. 그런 거짓말은 거짓말로 밝혀지고 나서도 이상한 효력을 발휘하잖아. 사람들은 지쳤고 그 어떤 것도 회복할 의지가 없었어. 덕분에 살이 몇 킬로쯤 빠졌지만 사실 너무 흔한 일이지. 분명 지금 어디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걸.
그리고 그때 만나던 사람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그 사람과 헤어졌지. 시기가 가까이 겹치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이었구나. 근이를 좋아했던 것처럼 좋아하진 않았지만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어. 큰 회사에 다녀서 늘 바쁘고 피곤해했지만, 성실하고 다정해서 괜찮지 않을까 했어.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계셨는데 인사를 하러 오라고 해서 꽤 긴장한 채 찾아갔지. 막 그 집에 들어섰을 때의 풍경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좀 달랐어. 장식대 없이 바닥에 바로 놓인 텔레비전 앞에 개지 않은 요와 이불이 도롱이벌레가 벗어놓고 간 껍질처럼 놓여 있었거든. 만약 그 이불이 개어져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가끔 생각해보는데 그랬을 것 같진 않아. 그 사람 어머니는 완충이 될 만한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바로 돈 문제를 꺼냈거든. 자기가 꼭 받아야 하는 용돈의 액수와 우리가 마련해줘야 하는 주거환경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나는 꼭 끼는 트위드 투피스를 입고 식탁에 앉아서 자세를 고칠 때마다 의자에서 나는 소리에 불안해했어. 어찌나 난방을 하지 않았는지 스타킹을 신은 발가락이 얼다 못해 아팠어. 정말로 날 만나고 싶었다기보다는 아들이 모아둔 돈은 자기 것이라고 확실히하고 싶어 전전긍긍했던 것 같아. 좋은 회사에 다니는 아들이 왜 나 같은 대학원생과 만나는지 모르겠다고 거의 직접적으로 말했어. 곤란한 얘기들이 계속 이어지는데, 그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옆에서 휴대폰 게임을 했어. 뾰롱 뾰로롱 하는 효과음도 줄이지 않고서. 도망쳐야겠다, 돌아와서 혼자 있게 되자마자 입 밖으로 그 말이 나왔어.
그대로 반대방향으로 뛰고 싶은 본능을 누르고 천천히 헤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에겐 그렇지 않았나봐. 그 점잖던 사람이 웬 인터넷 사이트에 내 이름과 얼굴을 다 공개하며 자기 집이 가난하다고 홀어머니를 대놓고 무시하면서 도망간 여자라고 글을 올리기 시작했거든. 가난하기로 치면 나도 가난하고 사실 내가 도망친 건 가난보다 좀더 어둡게 끈적이는 어떤 것으로부터였는데 나는 ‘◯◯女’라고 유행하는 비속어들로 요약되어버렸어. 그 사람은 새벽에 전화해 돌아와달라고 울면서도 매일매일 글을 올리더라. 욕설이 섞인 게시물과 간절한 전화 사이의 간극이 더 소름 끼쳤어. 오랜만에 이름이 흔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전화번호를 바꾸고 이사를 갔더니 흔한 이름과 뿌연 사진이 돌아다니는 것은 이겨낼 수 있게 되었지. 그러고 보니 그때 밥을 먹고 나면 자주 토했는데 아무래도 위험했었나. 갑자기 마른 연예인들이 티브이에 나오면 턱 옆에, 귀 아래에 튀어나오는 부분이 있거든. 나도 그때 그 부분이 불룩 나왔었는데 토하는 사람들의 특징인 거 같아. 그런 연예인들은 조금 걱정하게 돼.
너는 그 사람을 처음 만나보고 나서 애는 엄청 쓰는데 재미있는 말은 한마디도 못하고 어딘가 열등감이 있을 것 같다고 싫어했는데…… 네가 만나본 내 남자친구 중에 제일 싫다던 그 말을 왜 제대로 듣지 않았을까. 하여튼 내가 너무 머저리 같아서 너한테도 자세히 못했던 얘기야.
처한 상황 모두에 진저리를 치고 있을 때쯤 학회에서 만난 일본 교수님이 방문연구원으로 오지 않겠느냐고 연락을 해오셨어. 하루도 생각해보지 않고 가겠다고 했어. 그렇게 효율적인 성격이 아닌데 준비를 어찌나 착착 해나갔던지 몰라. 그런데 그렇게 수월할 리가 없잖아.
출국을 일주일 앞두고 아빠한테 전화가 왔어. 할아버지 할머니가 동시에 편찮으셔서 그 간병을 하던 엄마가 먼저 나가떨어질 판이었거든. 마지막으로 집에 갔을 때 요즘엔 요양원도 있고 요양 보조금이란 것도 있다며 이러다 엄마가 암이라도 걸리겠다고 대들었다가 아빠한테 뺨을 맞고는 다시 가지 않았었는데, 정말로 암에 걸렸다고 했어. 다행히 아주 초기고 예후도 좋은 종류라 해서 곧 안도했지. 그런데 그다음 말이 문제였어. 이제 나더러 내려와 집안을 꾸리라는 거야. 어차피 제대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공부도 분수에 맞게 해야 한다며 살림을 하고 간병을 하라고 했어. 너무 당연해하고 당당해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끔찍했고, 그렇지만 다 멈추고 내려가기엔 내가 그만큼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어. 똑같이 나와 살아도 오빠는 애틋해하고 나는 원망했던 엄마였으니까 사실 공평하다면 공평한 일이지만. 다음 달에 내려갈게요, 하고는 그다음 주에 비행기를 탔어. 한시간 사십오분의 비행이 끝나고 하네다 공항에서 수화물을 찾으며 내가 느꼈던 안도감에 대해 죄책감을 가져야 할까. 더 멀리 날아갔다면 더 큰 안도감을 느꼈을까.
방문연구원이었지만 연구는 열심히 하지 않았어. 다음 논문이 어쩌면 내 안에 없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나는 서울에 처음 갔을 때처럼 이번엔 토오꾜오의 과자 지도를 그렸고 말이야. 너 없이 나 혼자. 내가 케이크 사진을 찍어 보내면 너는 당뇨 예방 상식을 보내줘서 얼마나 웃었다고. 괜찮아. 딱 한번씩만 먹어. 윤곽이 대충 잡히고 나면 그것도 훨씬 덜 먹고. 서울에 있을 때보다 6킬로가 쪘지만 여전히 표준 미달인걸. 몸의 어떤 부위가 다공성인지 다 새 나가나봐.
유학생들 모임에서 제과학교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전혀 생각이 없었어. 그런데 자꾸 떠오르는 거야. 나는 계속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는 인간인데 그러면서도 줄곧 좋아해온 건 단것밖에 없지 않나 했어. 태어난 곳으로부터, 소속된 모든 집단으로부터, 제대로 된 관계로부터 도망쳐왔어.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아. 남보다 못한 가족들과도 어떻게든 연을 이어가려고 애쓰고, 처음 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끝까지 해내고, 거지 같은 회사를 개선시키고, 성격이 안 맞는 남자랑 다투고 다퉈서는 안정적인 관계에 다다르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해. 그런 사람들처럼 살고 싶었어.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하고 끊임없이 도망쳤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위기의 순간이 오면, 핑 돌아서 도망쳤지. 정말은 위기의 순간이 오기도 전에 도망쳤지.
불러주신 교수님한테 죄송했고 서류 문제로 몇번 한국에 오가야 했지만 결국 제과학교에 입학했어. 우리 반에서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 어쩌다 보니 한·중·일 가리지 않고 동생들이 인생상담을 해오지만 웃는 얼굴로 거절하고 있어. 계속 도망친 사람이 상담은 무슨,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어. 그런데 타르트 가게에서 알바를 시작하고, 눈 감고도 베리타르트를 만들 수 있게 된 다음부터 조금 바뀌기 시작했어.
혹시 나의 특장은 도망치는 능력이 아닐까? 누구나 타고나게 잘하는 일은 다르잖아. 그게 내 경우에 도주능력인 거지. 참 잘 도망치는 사람인 거야. 상황이 너무 늦기 전에, 다치기 전에, 너덜너덜해지기 전에 도망치는 사람. 타이밍과 속도를 조절해서 도망치는 사람. 똑같은 타르트를 삼백개쯤 만들었을 때, 스스로에게 조금 너그러워졌어. 마음 안쪽에 베리타르트의 어떤 궁극적인 완성형을 그릴 수 있게 되었을 때 말이야. 가게에서 파트를 바꿔 다른 맛의 타르트를 만들라고 시키면 혹시 이 평정심도 무너질까? 궁금하네.
그리고 오백개, 천개를 만들었을 때는 최초로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해냈어. 초등학교 2학년 때였어. 시골 학교였기 때문에 나는 그 몇 안되는 애들 중에 공부를 가장 잘하는 아이였고 선생님들의 예쁨을 잔뜩 받았거든. 그런데 전혀 예뻐해주지 않는 선생님이 있었어.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로 걸어다니는 남자 선생님이었지. 어느 날 그 선생님이 심부름을 시켰어. 과학실에서 알코올램프를 가져오라고. 나는 그 선생님 반도 아니었고 종례도 끝난 후였지만 그래도 가지러 갔어. 그 선생님 교실에 가져다드렸더니, 교실엔 나랑 그 선생님밖에 없었는데, 선생님이 심지를 빼고 알코올램프를 마시기 시작했어. 아무 말 없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나는 어렸고 당황했지만 그게 내가 봐서는 안될 장면인 건 알고 있었어. 대충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 오후엔 아무것도 못했던 기억이 나. 한동안은 그 선생님만 보이면 피해 다녔어. 학년이 올라가고 그 선생님이 전근을 가면서 잊을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에서 메틸알코올에 대해 배우면서 문득 다시 떠올렸어. 그 램프에 든 게 메틸알코올이 아니라 에틸알코올이었구나. 아니면 눈이 멀고 죽어버렸겠지, 하고. 더 나이가 들어서는 아마 과학실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먼저 들은 게 있었겠거니 싶었고.
직접 가지러 갔어도 되었을 텐데. 내가 가길 기다렸다가 마셔도 되었을 텐데. 그 선생님은 그러지 않았어. 상처를 주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해. 인생은 아주 불행한 거라고 아홉살짜리 아이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던 거라고 말이야. 잔인하고 이상한 어른이었지. 만지지 않았지만 만진 것만큼 나빴어. 보이지 않는 곳에 흔적을 남긴 거야. 나는 그때부터 도망쳤던 것 같아. 예고된 불행으로부터 도망쳤어. 만약 도망치는 걸 멈추면 알코올램프보다 더 나쁜 걸 마시게 될지도 모른다고, 나도 모르게 스스로 암시하게 되어버렸던 거야.
어딜 가도 보이는 부분만 달콤할 거라고 생각해. 무지개 퀼트로 장식된 가게 안쪽 주방은 스테인리스스틸이지. 마무리가 좋지 않은 산업용 냉장고 문으로 이마를 찢는 선배들은 하와이에도 헬싱키에도 세상 가장 친절한 사람들의 도시라 해도 분명 있을 거라 확신해. 그래도 어떤 휴지기가 필요했어. 타르트 반죽의 휴지기처럼, 사람에게도 그 비슷한 게 필요하지 않을까? 아, 휴지기를 모르는구나. 반죽을 잘 식히지 않으면 구멍이 나. 처음 여기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몇개나 구멍을 냈는지 몰라. 단계마다 십오분씩 냉장고에서 식히지 않으면 축축 늘어져서 백 퍼센트 구멍이 나버려. 적당히 차가운 곳으로 도망쳐 잠시 숨을 고르는 것, 거기서 얻는 것들은 분명히 있어.
남자친구? 글쎄, 남자친구…… 남자친구로부터는 당분간 도망치지 않을 것 같아. 너는 남자친구 사진을 보자마자 근이를 닮았다고 했잖아. 그리고 근이도 나랑 꼭 닮은 여자애랑 결혼했다며 너희 둘은 대체 뭘 하는 거냐면서 화를 냈고. 하지만 역시 각자의 일관된 취향일 뿐일 거야. 지금 남자친구가 좋아. 좋아해. 남자친구는 요리를 제법 잘해서 내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중화요리 육첩반상을 차려놓을 때가 있어. 불 맛이 중요하다고 방을 구할 때는 4구짜리 가스레인지가 있나 없나 엄청 따지더라고. 전기 인덕션만 보면 치를 떨어. 그따위 걸로는 요리할 수 없다나. 내가 짜장밥을 한번 해줬을 때 이런 건 개밥이라고 해서 그날 죽자 살자 싸웠는데, 그다음부터는 자기가 도맡아서 요리해. 편하게 된 셈이긴 하지. 아, 그래서 6킬로가 쪘나. 그래도 불하고 요리에 대한 집착 말고는 괜찮은 애야. 질투도 잘 안한달까. 가끔 한국에서 친한 오빠들이 전화를 하는데 내가 오빠, 하고 반갑게 받으면 남자친구가 웃어. 오빠가 일본어로 꼬마들이 여자 가슴을 부르는 ‘옷빠이’랑 발음이 비슷하거든. 남자친구가 막 웃으면서 너는 너한테 없는 걸 그렇게 반갑게 부르는구나, 그러는 거야. 난 중국어를 분명 욕부터 배우게 되겠지만 같이 도망치기에는 좋은 파트너야. 짐 싸라고 하면 중국식 요리 칼만 챙길걸. 그 칼로 당근 꽃도 만들더라. 대단해.
오랜만에 길게 통화했다, 그치? 나도 갈지자걸음을 제대로 했지만 너도 참, 소설이라니…… 하긴 같이 살 때 새벽마다 그렇게 키보드를 기글기글 긁더니만. 손톱으로 치니까 그런 소리가 나지. 자판이 남아나질 않았잖아. 시끄러웠냐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엄청 시끄러웠어. 손톱 말고 손가락으로 좀 치라고. 소설이 되면, 음, 특별히 보여줄 필요는 없어. 그런 것쯤 아무렇지 않을 만큼 신경이 굵어졌나봐. 인터넷에 사진이 돌아다니는데 소설쯤이야.
그보다 베리타르트를 직접 만들겠다니…… 그냥 내가 보내주는 게 낫지 않나? 비행기에 아이스박스 태워서 보낼게. 굳이 직접 만들겠다면, 딸기 씨부터 깨끗하게 빼야 해. 씨가 있으면 안 예뻐. 빨간 딸기를 기본으로 블랙베리, 블루베리, 라즈베리, 프랑부아즈를 넣어. 프랑부아즈는 나무딸기 향을 추출한 증류주야. 반죽에는 소금을 한 꼬집 넣는 거 잊지 말고. 필링을 크림치즈로 할지 아몬드크림으로 할지 커스터드로 할지 마음을 정해. 부풀지 않게, 바삭하게 타르트 지를 굽고 타르트 속을 넣은 다음 딸기를 올려서 다시 구워야 해. 레시피는 있니? 어디서 얻은 레시피니? 막 만드는 거 아냐.
아무래도 못 미더우니까 영상통화를 켜고 해. 그래, 거기 세워놔. 내가 여기서 같이 봐줄게. 응, 얼굴 좀 괜찮아졌지? 그 봐. 나도 토오꾜오도 잘 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