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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야만적인 나라의 황정은씨

그 현재성의 예술에 대하여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평론집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가 있음. kiwookh@gmail.com

 

 

같은 텍스트라도 큰 사건을 겪은 이후에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은 문학작품의 독자가 종종 경험하는 사실이다. 추측컨대 그 사건을 계기로 세상이 실제로 달라졌거나 적어도 세상을 받아들이는 독자 자신의 감각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416일의 세월호사건을 전후해서 일어난 이 감각상의 차이는 유난히 도드라진다.

이 글은 낯선 어법의 소설을 선보여온 황정은(黃貞殷)의 작품세계를 『의 그림자』(민음사 2010), 『야만적인 앨리스씨』(문학동네 2013), 『계속해보겠습니다』(창비 2014)를 중심으로 살펴보려는 시도다. 다수의 비평가들이 이미 그의 소설의 비범한 예술성에 주목하는 논의를 했고, 나 또한 소설의 정치성을 특이하게 구현한 예로 『의 그림자』를 거론하기도 했다.1) 그런데도 최근작인 『계속해보겠습니다』는 물론 전작들까지 함께 논하려는 것은 그의 주요 작품들을 세월호 ‘이후’의 달라진 감각과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고 싶기 때문이다. 황정은이 사회참여적인 작가라서 그렇게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2009년 용산참사 이후의 항의시위에 참여하면서 「입을 먹는 입」(『문학동네』 2009년 겨울호)을, 지난해 세월호사건 집회에 나간 후에는 「가까스로, 인간」(『문학동네』 2014년 가을호)을 썼고, 이 글들을 통해 민감한 사회정치적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힌 것은 사실이지만, 이 뛰어난 산문들도 그의 소설과는 일단 구분해서 다룰 일이다.

 

 

1. 빛과 그림자의 예술

 

황정은은 처음부터 독특한 방식의 단편소설을 썼지만 그 특유의 문체와 주제, 모티프와 기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것은 『의 그림자』일 것이다. 이 소설의 의의는 기존 소설의 여러 통념을 깨뜨리는 동시에 그 자체로 새로운 발상과 독특한 감수성을 보여준 데 있다. 2000년대 이래 등장한 파격적인 소설들 가운데 기존 형식의 뒤집기와 해체에 능한 예는 많지만 그처럼 새롭고 독특한 경우는 드물다.

2010년 발간 당시뿐 아니라 세월호라는 ‘사건’을 겪은 후에 읽어도 이 작품의 호소력이 여전한 까닭을 그 비범함을 빼고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비범함을 말하는가? 우선 주어진 현실을 제시하는 독특한 방법부터 살펴보자. 이 소설은 도심 재개발과 철거라는 민감한 사회적 주제를 깔고 있지만 그 전에 이런 주제를 다뤄왔던 통상적인 사실주의 소설과는 상당히 다르게 느껴진다. 명백한 차이는 인물들의 그림자가 스스로 움직이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버젓이 등장하는 것이지만,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태도도 사뭇 다르다. 주인공인 은교와 무재의 선문답식 대화에서 엿볼 수 있듯 고통의 당사자들이 자신을 ‘희생자’로 내세우지도 않거니와 작품의 분위기도 이들에 대한 공감을 전제로 연민과 연대를 요청하는 당위적인 태도나 온정주의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런 변화 말고 현실묘사 자체가 특이한 점은 없을까?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을 구분하지 않는 평자들은 앞서 지적한 눈에 띄는 변화를 근거로 이 소설을 리얼리즘과는 다른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 소설의 현실묘사가 정확히 어떤 특성을 띠고 있는지 눈여겨보지 않는다. 소설의 공간을 이루는 도심의 오래된 전자상가라든지 주인공인 은교와 무재가 나중에 찾아가는 섬까지도 우리 현실의 구체적 장소를 필요한 만큼은 정확하게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소설 속 전자상가는 철거를 앞둔 세운상가를, 두 연인이 찾아가는 섬은 근년의 석모도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만, 실제와 부합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특이한 점은 있을 법한 시공간을 상당히 정확하게 제시하면서도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 데 있다. 여기서 공간과 사물에 대한 황정은 특유의 예민한 감각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소설의 화자인 은교는 공간과 사물을 범상한 듯 서술하지만 사실은 매우 섬세하게 지각한다. 가령 종종 이런 식의 서술이 등장한다.

 

나는 도심에 있는 전자상가에서 일하고 있었다. 가동과 나동과 다동과 라동으로 구별되는 상가는 본래 분리되어 있었던 다섯개의 건물이었으나 사십여년이 흐르는 동안 여기저기 개축되어서 어디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는 구조로 연결되어 있었다.(29면)

 

소설 뒤쪽에 붙인 ‘작품 해설’에서 신형철(申亨澈)은 이 구절을 두고 “그저 ‘다섯개의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해도 될 텐데 이 작가는 각 동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명한다. 각 동의 상점들마다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새겨져 있는 사십년의 시간 앞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일 것이다”(176면)고 논평했다. “각 동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명”하는 언술행위에 함축된 뜻을 잡아채는 눈썰미와 그 풀이도 그럴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할 것은 ‘예의’보다 존재의 ‘개체성’에 대한 황정은의 비상한 감각과 헌신성이다. 무재가 은교에게 가마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는데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에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38면)라고 유머러스하게 던진 말에도 개체성에의 눈멂이야말로 폭력이라는 생각이 묻어 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는 은교가 수리실의 여씨 아저씨 책상 서랍을 정리했을 때이다. 화자는 서랍 속에 들어 있는 “철사 조각, 나사들, 드라이버 손잡이, 카세트테이프, 라벨들, 봉투에 담긴 알약들, 처방지들, 메모들, 쇳가루들, 전선들 (…)” 하고 무려 26개 품목을 죽 열거한 후에 그 “외에도 아무리 봐도 뭔지 모를 마른 것이라거나 브래지어 후크 같은 것이 발견되기도 하는 등 종잡을 수 없었다”(47~48면)고 말을 맺는다. 마치 그 잡다한 것 하나하나의 ‘처지’를 염두에 두고 그 개체성을 묵살하는 폭력을 가하지 않으려는 듯이 말이다. 통상적인 사실주의자라면 26개 품목을 다 열거할까? 십중팔구 몇몇 적절한 예만 들 것이다. 그렇기에 26개 품목을 9행에 걸쳐 일일이 열거하는 이 장면은 특정한 시공간과 그 속의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기보다 작가/화자의 주관적인 의도에 따라 훨씬 늘려놓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있는 그대로’ 제시하지 않은 쪽은 오히려 품목들을 (인용자처럼) 전부 묘사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자르거나 아니면 ‘온갖 잡다한 것들’이라는 식으로 뭉뚱그려버리는 종래의 사실주의 작가들이 아닌가? 작가가 의도했든 안했든 이 열거 장면은 보통의 사실주의자(혹은 자연주의자)들보다 더 사실적으로 밀고나감으로써 사실주의적 관념사물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는 생각을 뒤집고 사실주의가 빠지기 쉬운 맹점개체성에의 눈멂을 꼬집는 대목으로 읽힌다.

오무사 전구가게의 묘사가 빛을 발하는 것도 개체성에 대한 예민한 감각에 힘입은 바 크다. 그간 알전구를 하나씩 더 넣어주는 오무사 할아버지의 배려와 그 가게가 사라졌을 때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버리지는 않을까”(104면) 하는 은교의 염려에 초점을 맞춰 이 대목은 흔히 ‘윤리’적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이 ‘윤리’라는 것도 그 가게의 특이성과 오무사 할아버지가 손님을 대할 때의 그 할아버지 특유의 모습이 살아 있지 않으면 작가의 설교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알전구 다발로 ‘빽빽한’ 가게 벽에서 할아버지가 손님이 주문한 알전구를 찾아내어 “손바닥만 한 비닐 봉투를 벌려서 입구를 동그랗게 만들어둔 다음에, (…) 봉투 속으로 한번에 한개씩 (…) 제비 새끼 주둥이에 뻥 과자 주듯, 떨어뜨”(103면)리는 동작이다. 할아버지는 아마 알전구를 하나씩 세어나갔을 테지만 이 동작을 통해 그 알전구 하나하나를 대하는 할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군더더기 없이 전해지면서 마치 할아버지와 알전구 하나하나 사이의 특별한 ‘관계’가 드러나는 느낌이다.

황정은은 특정한 시공간과 동작의 묘사에서 이런 정확하고 빼어난 재현능력을 보여주면서도 다른 한편 사실주의적 규범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설 속의 현실과 인물을 자신의 미학적·‘윤리’적 요구에 따라 과감하게 편집하고 변형해서 제시해왔다. 이미 여러 단편을 통해서 아버지를 모자로 바꾼다든지 항아리에 말하는 능력을 부여한다든지 온갖 기이한 존재들과 귀신까지 출연시켰으니 이 소설에 등장하는 그림자 분리현상은 그리 놀라운 일은 못된다. 불행과 모멸의 극한에서 참다못해 절망과 죽음을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이 현상은 등장인물이 거의 예외 없이 겪는 일이라서 작품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 소설의 핵심적인 모티프이자 서사장치인 것이다.2)

이 소설에서 그림자 분리현상이라는 초자연적 혹은 환상적 장치가 성공한 것은 아버지를 모자로 변형시킨다든지 하는 종전 장치에 비해 훨씬 복합적이고 미묘한 방식의 표현력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발상은 사람의 그림자가 독자적으로 움직일 때의 섬뜩한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이지만, 작가는 이를 여러 단계로 세분화하고 인물들의 운명이 자신의 독립된 그림자에 대한 태도에 따라 달라지게 함으로써 삶과 죽음 사이의 다양한 상태를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령 한 인물이 자기 그림자에 장악되는 과정은 처음에는 그림자가 스스로 일어서고, 다음에는 분리되어 스스로 걸어가고 심지어 식탁에 버젓이 앉아 있기도 하다가, 마침내 그 분리된 그림자가 그 인물의 등에 올라타고 입속으로 들어가서 말을 장악하기까지 한다.

여기서 결정적인 순간은 분리된 그림자에 자신을 내맡길 때이다. 소설의 첫 장면에서 숲에서 그림자를 따라가다 길을 잃은 은교는 뒤따라온 무재가 그림자한테 당한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하자 “……내 그림자도 그토록 위협적인 걸까요?”라고 묻는다. 무재가 “글쎄요”라고 얼버무리자 또 묻는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무재 씨, 죽는 걸까요, 간단하게.

따라가지 마요.

무재 씨가 문득 나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그림자가 일어서더라도, 따라가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는 거예요.(20면)

 

‘따라가지 마요’라는 한마디에는 은교에 대한 무재의 따뜻한 배려 이상의 애절함이 깃들어 있다. “따라가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는 거”라는 무재의 충고로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직전에 무재의 아버지가 ‘따라가지 마요’라는 어머니의 간청에도 “일단 일어선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다고 토로하다가 “귀신 같은 모습이 되어” 죽고 만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길한 분위기는 잠시 후 은교가 ‘섹스’를 언급하면서 금세 달라진다. “섹스 말인데요, 그게 그렇게 좋을까요./좋지 않을까요./좋을까요./좋으니까 아이를 몇이나 낳는 부부도 있는 거고./글쎄 좋을지./궁금해요?/그냥 궁금해서요./여기서 나가면 해볼까요./나갈 수 있을까요”(21면)하고 특유의 문답식 대화가 이어지다가 무재의 사랑고백(“나는 좋아합니다./누구를요./은교 씨를요./농담하지 마세요./아니요. 좋아해요. 은교 씨를 좋아합니다.”, 22면)으로 끝난다. 죽음의 그림자 때문에 축축하고 어두웠던 분위기가 환한 삶의 빛 쪽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삶의 빛과 죽음의 그림자 사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두 남녀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죽음 쪽으로 기울다가 삶 쪽으로 다시 기우는, 삶과 죽음의 리듬과 아슬아슬한 균형에서 작가의 ‘윤리’로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작품 자체의 팽팽한 긴장이 발생한다. 요컨대 섬세하고 정확한 재현에다 그림자 장치의 중층적 효과가 더해져서 비범한 소설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림자 장치의 효과로 인한 성공에 댓가도 따른다는 것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생생한 사물성과 관계성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 한두군데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딘지 몽환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소설에 서려 있는 몽환적 아름다움이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엄습하는 섬뜩한 공포감은 충분히 매력적이라서 이 작품의 최대 미덕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때의 몽환성은 그림자 장치의 우화적 효과와 관련이 있지만, 우화적인 요소를 활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몽환적인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3) 이 소설에서의 우화적 요소의 활용이 현실과의 대면을 회피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시대현실과의 맞닥뜨림 혹은 발본적인 성찰에 일정한 제약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림자의 ‘실체’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겠지만 그 실체를 상상하게 해주는 반면 그 풍부한 세부사항을 이미지로 축소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2. 야만적인 나라의 비장한 예술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의 그림자』의 집필을 끝낸 후 황정은이 구상한 ‘폭력 삼부작’의 첫째권이다. 왜 이런 구상을 했을까? 『의 그림자』도 언어적 폭력(가령 ‘슬럼’에 깃들어 있는 폭력)과 사회구조적 폭력(산업재해와 강제철거)에 민감한 텍스트이지만 폭력의 문제를 좀더 ‘본격적으로’ 다룰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곳이 전보다 훨씬 더 폭력적으로 변했다는 판단도 작용한 듯하다. 이를테면 이명박정부 이래 갈수록 ‘야만적인 나라’가 되어가는 이곳의 황폐화된 삶을 직시하려는 작가적 분투로 여겨진다.

의 그림자』에 비해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분위기는 잔인할 정도로 어둡다. 『의 그림자』의 정조(情調)가 그림자(어두운 현실/죽음)의 위협 아래서 위태롭지만 그만큼 애틋해지는 삶이라면,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마치 그 그림자 세계 한가운데 갇혀버린 채 악몽 같은 현실을 사는 듯한 느낌이다. 우리 시대의 폭력과 ‘악몽 같은 현실’을 보여주는 소설은 이전에도 많이 출간되었고 그중에는 새로운 형식을 실험한 것도 적지 않았다. 가령 김이설(金異設)의 『환영』(자음과모음 2011)은 스스로 희망의 싹을 잘라버리는 냉소적인 자연주의 미학을, 김사과의 『테러의 시』(민음사 2012)는 어둠을 폭로하는 사실주의와 재현주의마저 내파(內破)하는 미학적 무정부주의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두 소설 못지않게 이 시대 어둠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면서도 양자와 다른, 황정은 특유의 방식을 보여준다. 그 특이한 형식을 예시하기 위해 몇몇 요소를 거론해본다.

우선 소설의 장소 ‘고모리’가 어떤 곳인지 짚어보자. 작가 자신이 이 장소에 대해 “오래된 무덤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 마을을 생각했”4)다고 밝힌데다 성경의 ‘고모라’와 관련해서도 의미심장한 울림이 있어 이곳을 마치 우리가 사는 현실과 다른 곳으로 해석하려는 경향5)이 있다. 그런데 고지식한 사실주의자가 아니라면 고모리는 일단 텍스트에서 기술된 대로 이 나라 대도시 주변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특정의 소도시/마을로 받아들일 일이다. 한때 “시내와 시외의 경계인 개활지”(10면) 인근에 위치한 그곳은 벌판을 가득 채운 벼들의 물결을 볼 수 있었으나 재개발사업의 열풍이 지나간 지금은 거대한 주거단지로 탈바꿈했다. 인근의 하수처리장은 악취가 심해 증축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항의가 있었으나 “재개발사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면서” 잠잠해졌다. 주민들은 재개발사업이 되면 “낡은 집들은 돈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이를 악물고 참고 견딘 것이다.(25면) 고모리는 지난 수십년 동안 한국사회의 성장주의가 낳은, 돈독이 잔뜩 오른 재개발사업 현장 중의 하나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곳 주위에도 있을 법하지 않은가?

주인공이자 화자인 앨리시어는 가족이 사는 곳을 소개하기 전에 그 한쪽 옆에 있는 개장을 먼저 언급한다. 다음은 그중 한 구절이다.

 

개야.

개가 발톱으로 개장을 긁는다. 긁어도 소용없는 모서리를 맹렬히 긁고 뒤로 물러났다가 같은 자리를 다시 맹렬하게 긁는다. 수년째 새끼 잡는 냄새와 기척에 시달려 돌아버렸는지도 모르겠다.(13면)

 

앨리시어 아버지는 새끼 개를 때려잡고 굽고 이웃과 나눠먹는 행위를 어미개가 뻔히 보는 앞에서 한다. ‘개야’라는 처연한 호명은 이어지는 단문들의 섬뜩한“수년째 새끼 잡는 냄새와 기척에 시달려”의미와 결합되어 개장에 스민 어둠과 개의 공포를 바로 눈앞에 불러내는 효과가 있다. 현실의 어두운 곳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환경결정론적 자연주의 문학은 흔히 서두에 궁지에 몰린 동물의 상황을 배치함으로써 향후 전개될 인간들의 비슷한 처지를 암시하곤 하는데, 이런 배치로 인해 이 소설에도 자연주의적 색채가 짙게 드리워진다. 그러고는 불쑥 “개장 곁에 앨리시어의 집이 있다”(14면)라는 서술이 등장한다. 마치 개장이 주된 장소이고 앨리시어의 집은 그 개장에 곁가지로 붙어 있는 것처럼. 개장과 사람의 집의 위상을 뒤집는 이 문장은 그후 소개되는 앨리시어의 집이 개장의 상황과 다르지 않는 ‘야만의 나라’임을 예시(豫示)한다. 이 개장 속의 살아 있는 개와 마을 논둑에 죽어 있는 개, 두 개의 섬뜩한 이미지가 합쳐지면서 고모리는 ‘절망과 죽음이 살아 있는 곳’6)처럼 느껴진다.

소설 속 폭력의 중심에는 앨리시어의 어머니가 있다. 그녀가 ‘씨발 년’이 되는 순간은 폭력 문제를 다루는 근년의 소설 가운데서도 명장면에 속한다. 그녀는 어릴 때 월급을 빼앗는 아버지한테 대들다가 추운 겨울날 “발가벗겨져 집밖으로 쫓겨나 눈 속에 서 있어야” 했다.(41면) 버티다 못해 집 안으로 들어와 보니 식구 모두가 잠들어 있다. 그녀는 자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어머니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왜 내다보지 않았을까. (…) 죽고 싶을 정도로 나는 씨발 추웠는데 왜 나를 궁금해하지도 않는 얼굴로 자고 있나”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수제비 냄새와 낡은 이불깃과 잠든 인간들의 냄새가 섞인 따뜻한 공기 속에서 아주 조용하게 씨발 년이 발아한”(428면) 것이다. 앨리시어의 외할머니는 이웃으로부터는 ‘선한 사람’으로 통할지언정 “포스트 씨발 년을 탄생시킨 씨발 년”(43면)인 것이다. ‘씨발 년의 발아’ 장면은 폭력의 방조자가 폭력의 가해자 못지않게 폭력의 재생산에 일조함을 일러준다.

‘씨발됨’의 심리상태라든지 신체적·언어적 폭력 현장의 묘사와 서술은 우리 시대 폭력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성찰이라 여겨진다. 다만 여기서는 청소년들이 흔히 사용하는 비속어와 욕을 ‘화끈’하게 구사한 점이 폭력 장면의 실감을 더해준다는 것, 그것이 언어의 수행적(performative)이고 정동적(情動的, affective)인 성격을 최대한 활용하는 황정은의 특장이라는 것에 주목하고자 한다. 가령 앨리시어의 어머니가 ‘씨발 년’이라고 말할 때의 씨발은 “백 퍼센트로 농축된 씨발, 백만년의 원한을 담은 씨발, 백만년 천만년은 씨발 상태로 썩을 것 같은 씨발”(27면)이라는 서술은 ‘씨발 년’이라고 독살스럽게 내뱉는 소리의 맹독성을 상상하게 만든다.

예전에는 앨리시어의 외할머니가 폭력의 방조자였는데 지금은 앨리시어의 아버지가 폭력을 방조한다.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은 스스로가 ‘씨발 됨’의 상태에 몰려 이 야만적인 나라에서 벗어나는 출구를 찾으려 한다. 첫째는 배다른 누나와 형에게, 다음엔 구청의 가정폭력 담당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앨리시어는 어머니의 폭력에서 동생을 구하려고 스스로를 폭력적으로 단련하여 드디어 어머니와 ‘맞장 뜰’ 자신감이 생길 즈음 동생을 잃게 된다. 동생의 죽음은 어머니의 폭력과 형의 부재 탓만은 아니고 고모리의 특수한 환경과 그날의 우연이 겹쳐 일어난 것이지만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면이 있다.

이 소설이 꿈과 이야기로 가득하다는 사실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꿈을 꾸고 이야기를 하는 행위는 인간 삶의 필수조건이요 엄연한 ‘사실’이라서 소설 속의 꿈과 이야기(‘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사실주의에 어긋나는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의 비중을 과도하게 높이면서 그 부조리한 서사에 암시적·예지적 의미를 부여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꿈과 꾸며낸 이야기는 의식과 무의식의 접경지대에 거주하면서 양쪽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특히 사람 목소리로 전해질 때 소름끼치는 것이 있다. 앨리시어의 어머니가 꾸는 섬뜩하고 불길한 꿈‘복숭아술로 유명한 마을에 애들이 납치되는데 그 범인이 앨리시어로 밝혀지는 꿈’(83~84면)이 그렇다. 그녀는 이 꿈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앨리시어에게 의식과 무의식을 관통하는 ‘온몸의’ 타격을 가한다. 앨리시어가 “여기 이 모퉁이에서” 그 꿈의 다른 버전을 이야기하는 대목(113~14면)은 그가 아직도 그 꿈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이런 점에서 앞서 『의 그림자』의 성취로 거론한 삶과 죽음, 빛과 그림자의 두 리듬과 양자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이 이 작품에서는 죽음 쪽으로 확실히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앨리시어와 고미의 동성애적 관계가 남아 있지만 이 소설에서 둘의 관계는 앨리시어와 동생의 관계에 비하면 부차적이다. 그러나 삶과 빛의 리듬이 완전히 끊겼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동생이 죽기 전까지 형제간에 심심풀이용이지만 더없이 절박하게 나누는 이야기들은 압도적인 폭력세계의 독기 어린 서사에 대항하는 최후의 버팀목 구실을 한다. 은교와 무재처럼 다정하게 주고받는 대화와 이야기, 노래와는 달리 그들의 이야기는 적대적인 폭력세계 한가운데서 발각될까봐 몰래 하는 속삭임에 가깝다. 그중 그들의 궁지를 반영하는 것(‘어머니가 여우인 이야기’와 ‘소년 앨리스 이야기’)도 있고 엉뚱한 것(‘네꼬 이야기’와 ‘라디오 출력석 이야기’)도 있지만 형제간의 교감을 통해 무의식까지 스며든 폭력에 대응하는 서사자원으로 동원된다는 점에서는 감성적 힘이다. 그러나 앨리시어 형제 이후의 사람들에게 희망의 자원이 될지언정 그 이야기들이 그들을 구출하지는 못한다. 앨리시어는 꿈과 이야기가 접속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어머니의 폭력적 지배로부터 자신과 동생을 구하지 못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의 서사는 자연주의적 색채가 짙은데다 전작처럼 안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우화적 요소도 없다. 그러나 무의식까지 지배하는 출구 없는 야만의 세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날수록 마치 공포영화 혹은 잔혹동화를 보는 것처럼 현실에서 ‘도리어’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환상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장치가 없음에도 전설과 꿈 이야기와 뒤섞이면서 잔인한 설화적 분위기가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남다른 화자와 화법으로 인해 상투적인 자연주의 문학과 확연히 달라진다. 소설을 완전한 절망으로 빠지지 않게 하는 이 특이한 화자의 어법은 『의 그림자』의 그림자 장치처럼 작품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서사 ‘장치’이기도 하다. 화자는 서두에서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는 곧바로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라고 묻는다. 그런데 화자는 ‘나’가 아니라 ‘앨리시어’라고 칭한다. 마치 자신을 타자인 것처럼 객관화하여 부르는 것이다.

 

그대는 (…)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앨리시어의 체취를 맡을 것이다.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도꼬마리처럼 달라붙는다. 갈고리 같은 작은 가시로 진하게 들러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7~8면)

 

소설의 화자인 앨리시어는 독자로 추정되는 ‘그대’에게 “도꼬마리처럼 들러붙는” 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 이유임을 밝힌다. ‘그대’뿐 아니라 ‘앨리시어’도 불특정하게 느껴지는 것이 이 대목의 묘미인데, 이 불특정성은 이어질 폭력과 죽음 이야기가 어떤 특정한 인물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그대’도 연루된 보편적인 것임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화자가 죽은 동생의 이야기를 하다가 무시로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와 독자에게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를 물음으로써 소설 전편에 일종의 리듬을 부여한다. 독자를 향한 이런 물음 혹은 말 걸기는 앞서 지적한 황정은 소설 언어의 ‘수행적’이고 ‘정동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또 하나의 예다. 이때 리듬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수행성의 필수 요소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앨리시어의 실패와 패배의 기록”(161면)이지만 화자는 절망과 죽음에 의탁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이 이야기의 독자를 포함한 ‘그대’를 끝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남다른 화자와 화법을 통해 미래의 희망을 작품 깊숙이 박아놓음으로써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결정론적 비관이나 전망 부재의 자연주의와는 갈라서게 된다.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설정하는 구도에서도 특이하다. 가령 『환영』이나 『테러의 시』처럼 흔히 폭력의 피해자로 부각되는 여성/어머니가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는 가해자의 전형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앨리시어의 어머니의 폭력은 아버지의 방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 구도는 가부장적 폭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가부장적 폭력’이라는 정형화된 틀로 이 시대의 폭력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의 그림자』에 비해 인물 형상화에서도 유의미한 진전이 있다. 무엇보다 드디어 악인다운 악인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출현한 것이다. 은교와 무재, 앨리시어와 그 동생은 작가와 거리가 별로 없는 데 반해 앨리시어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전혀 다른 존재들(‘씨발 년놈들’)이다. 앨리시어의 어머니는 『계속해보겠습니다』의 애자, 순자와 함께 놓고 보면 또 하나의 어머니상, 이를테면 ‘폭자’라고 부름직한 인물이다. 앨리시어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이래 지속된 성장제일주의와 배금주의가 낳은 괴물 같은 존재인데, 이 인물을 특히 실감나게 하는 것은 돈밖에 모르는데도 민주주의와 생명존중의 논리를 제 입맛대로 갖다붙인다는 점이다. 어미개가 보는 데서 새끼 개를 때려잡는 위인이 낚시로 잡은 물고기 몇마리 풀어주고는 “세상 나고 자란 목숨 가운데 가치 없는 것은 없는 거다”(52면)는 설교를 한다. 요컨대 황정은은 자기와는 다른 가증스러운 인물을 실감나게 창조함으로써 그 인물의 ‘처지’에 선 것이다. 그것이 소설가에게는 최고의 ‘윤리’이기도 하다.

 

 

3. 계속해보겠습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황정은이 ‘소라나나나기’라는 제목으로 『창작과비평』에 연재한 작품을 개고해서 출간한 소설이다. 그사이 일어난 세월호사건이 개고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할 법한데,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제목이 달라진 점이다. ‘소라나나나기’는 개체성과 새로운 감각을 중시해온 황정은다운 제목으로 적잖은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도 표제로 ‘계속해보겠습니다’7)를 선택한 데는 작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8)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전작들에 비해 인간관계가 훨씬 복잡해지면서 분량도 늘어났다. 이 복잡성은 소설의 세 화자인 소라, 나나, 나기가 차례로 각각 자신의 현재적 삶과 과거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고 나나의 짤막한 이야기로 마무리하는 독특한 구성에 일정 정도 반영되어 있다. 이들 각각은 나머지 두 사람의 삶에 대해 논평하는데 이것이 복합성을 더해준다. 이런 복합적인 관계망 속에 떠오르는 핵심적인 물음은 우선 생명의 문제이다. 소설의 중심적인 흐름을 형성하는 주된 모티프는 나나의 임신이고 이 폭력적인 세상에서 새 생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전면에 대두된다. 생명과 관련된 또하나의 물음은 소라와 나나가 이웃집 벽에 붙은 나방에게 던지는 “죽었니 살았니”이다. 뻔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이미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회백색이더라도 선명하고 곱던 빛깔이 미심쩍고, 살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며칠이고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 미심쩍다”(33면)라는 서술에서 엿보이듯 현실의 관계 속에서는 판별이 쉽지 않다. 무엇이 진짜 사랑일까라는 문제는 이 물음들과 더불어 핵심적인 질문으로 던져진다. 이 역시 섬세한 삶의 감각과 도덕적 판단을 필요로 한다. 요컨대 이 소설의 주된 관심사는 생명과 사랑의 문제인데, 이것이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는 ‘애매함’을 내포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9)

복합적인 인간관계를 드러내는 데 일조한 것은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오가는 화법이다. 화자인 소라, 나나, 나기 각각은 자신의 현재적인 삶을 서술하는 동시에 기억을 통해 과거의 잊히지 않는 장면과 인물을 무시로 불러내는데, 독자는 이 이중의 서사를 통해 주요 인물 각각의 삶을 시간상의 변화 속에서 감지할 수 있다. 또한 이 덕분에 그들에 버금가는 인물인 소라와 나나의 어머니 애자와 나기의 어머니 순자, 그리고 나기의 동성애 연인인 ‘너’의 삶도 소설의 의미망 속에 중요한 자리를 부여받게 된다. 이 소설은 『야만적인 앨리스씨』와 달리 삶과 죽음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지켜내고 있지만 단순히 『의 그림자』에서 보여준 예전 형식의 균형으로 되돌아간 것은 아니다. 성소수자로서의 나기의 삶이 너무 어둡기 때문에 밝음이 우세한 소라와 나나의 장들과 접합됨으로써 가까스로 소설은 전체적인 균형을 이룬다는 느낌이다.

이 소설에는 전작들과 달리 눈에 띄는 장치는 없지만, 소라와 나나의 이야기를 상당히 이질적인 나기의 이야기와 함께 묶어두는 ‘거멀못’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어릴 적에 함께 공유했던 특이한 구조의 집이다. 소라와 나나의 아버지가 산재(産災)로 죽은 뒤 그들 가족이 이사한 이 반지하의 집을 화자 모두는 소중한 장소로 떠올리는데, 최근에 꿈에서 이 집을 본 소라는 이렇게 서술한다. “본래 창고로 사용하던 지하실 중앙에 양쪽 방향으로 트인 벽을 하나 세워 현관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두개의 셋집을 만든 구조”로서 “벽 이쪽과 저쪽에 사는 사람들은 각자의 집을 한개씩 가진 것이 아니고 반씩 나눠 쓰는 집”이었다고 하면서 “이상하지만 그런 집도, 세상에 있는 것”(28면)이라고 덧붙인다. 공간적인 감각이 탁월한 작가가 아니고서는 이 기이한 공간을 여러 이야기들을 묶는 거멀못으로 활용하지 못할 것이다. 나기를 처음 만나는 날 소라와 나나는 그 집 중간에 가로놓인 벽을 돌다가 나기네 집 쪽으로 건너가게 된다.

 

두 집을 나누는 가운데 벽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활짝 펼쳐진 나비 날개처럼 이쪽과 저쪽이 같았다. 다만 나나와 내가 방금까지 있던 공간과는 다르게 소리가 있고 온기가 있고 인간이 생활하는 데 사용되는 사물들이 고스란히 있는 공간이었다.(34면)

 

소라와 나기가 이 집에 사는 동안 이 특이한 구조 덕분에 나기네와 접속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생활의 ‘소리’와 ‘온기’와 생활에 필요한 ‘사물들’을 전혀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 특이한 공간이 없었다면 순자가 그들에게 6년간 아침마다 도시락을 챙겨주는 일이 가능했을까. “그 시절엔 초등학생이라도 도시락을 싸서 다녔는데 나기네 어머니는 나기의 도시락까지 세개를 준비해서 신발장에 얹어두었다. 나기네 신발장 위에 한개, 우리 쪽 신발장 위에 두개. 나나와 나는 아침마다 그것을 챙겨서 등교했다”(40면). 두 집 사이가 완전히 차단되었을 경우를 생각해보라. 아침마다 문을 두드려 도시락을 건네주고 건네받는 과정을 오래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삶의 기운과 죽음의 기운을 팽팽하게 엮어 묘한 균형을 이룬 것도 주목할 점이다. 소라와 나나의 장을 관통하는 죽음의 기운은 그들의 어머니 애자로부터 나온다. 애자는 ‘전심전력’으로 사랑했던 남편(김금주)을 끔찍한 사고큰 톱니바퀴에 말려들어 온몸이 짓뭉개져 죽은 사건로 잃고 실의에 빠져 소라와 나나를 돌보지 않는 채 “너희의 아버지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가 특별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은 아니란다./그게 인생의 본질이란다./허망하고,/그런 것이 인간의 삶이므로 무엇에도 애쓸 필요가 없단다”(12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남편의 사고가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비롯된 산재라는 의식도 없고 남편의 친가에서 사고 위로금을 가로채 생계를 위협하는 데도 무대응인 채 모든 것을 접고 허무 속으로 침잠한다.

애자의 이런 모습은 어린 소라와 나나의 삶에 이중의 타격을 가한다. 우선 경제적인 곤궁과 돌봄의 부재로 그들은 고아나 마찬가지의 상태가 된다. 스스로 먹고 입는 것을 챙겨야 하고 학교에서 당하는 ‘왕따’에 둘이서 대처해야 한다. 이런 생활적인 어려움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애자의 반복적인 허무 이야기가 그들에게 안겨주는 정서적인 폭력이다. 가령 소라에게 애자의 이야기는 “달콤하게 썩은 복숭아 같고 독이 담긴 아름다운 주문”처럼 들린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므로 고통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특별히 더 고통스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특별히 더 달콤”한데 그런 달콤한 이야기를 들으면 “머릿속이 나른해”지고 “만사를 단념하”게 된다. “자기만의 황폐에 빠진 애자”(128면)의 이야기는 앨리시어의 어머니(‘폭자’)의 잔인한 꿈 이야기 못지않게 심각한 손상을 가한다. 애자는 ‘폭자’처럼 자식을 마구 패거나 쌍욕을 해대는 ‘씨발 년’은 아니지만 자신이 죽음에 가까이 있는 탓으로 정서적으로는 ‘폭자’보다 더 깊은 죽음의 기운으로 자식들의 삶을 뒤덮는 것이다.10) 반지하로 이사할 때 애자는 소라와 나나에게 수레를 돌려주라고 보내는데, 자매는 애자가 그때 자살하려 했음을 직감한다. 씩씩하고 영매(靈) 기질도 있는 나나는 그런 애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수십번 수백번 죽어버렸구나./저렇게 누워서, 여러 가닥으로 찢어져서./그런 것을 그냥 알게 된 어린 시절”(95~96면)이었다고 말한다.

자매의 어린 시절을 애자의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지켜준 것은 나기와의 만남, 그리고 순자가 싸준 도시락이었다. 소라는 순자의 도시락이 자기와 나나의 ‘뼈’를 키웠을뿐더러 무엇보다 그들을 “오로지 애자의 세계만 맛보고 자라지는 않도록 해준 것”으로 “대단히 대단하다”고 평가한다(44면). 순자의 도시락 이야기는 『의 그림자』의 오무사 이야기처럼 ‘윤리’적 혹은 도덕적 성찰이 담긴 대목이다. 하지만 순자의 도시락은 오무사 할아버지가 끼워주는 여분의 알전구처럼 ‘타자의 배려’라는 측면뿐 아니라,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시락”이지만 ‘집밥’ 같은 것이다.11) 그게 ‘대단히 대단한’ 것은 “오로지 애자의 세계만 맛보고 자라지는 않도록 해”줌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되찾게 하고 삶과 죽음의 차이를 분별해주는 바탕이 된 데 있다.

애자의 어두운 그늘에 살던 소라와 나나에게 순자의 도시락이 삶의 숨통을 터준 중요한 계기였다면 그들의 현재 이야기에서 중대사건은 나나의 임신이다. 소라의 태몽으로 시작되어 나나의 임신을 둘러싼 자매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 그리고 나나와 아기 아빠인 모세의 갈등과 결별12)의 과정이 병치된다. 현재의 이야기에는 미혼모와 편부모 가정에 대한 입장 차이를 포함한 사회적인 쟁점들도 대두되지만 여기서는 삶과 죽음의 이중적 리듬과 관련된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소라는 태몽을 꿈으로써 동생의 임신을 눈치채고는 속으로 “어쩌려는 걸까, 하고 걱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어쩌자는 거야, 하고 화가 나./나나는 애자가 될 셈인가”라고 힐문하고 마침내 “싫다고” 생각한다(23면). 소라는 엄마가 된다는 것은 곧 애자가 된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애자는 없는 게 좋다”고 판단하면서도 “사랑스러울 정도로 가엾”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45면). 그러다 얼떨결에 동생을 따라 산부인과에 가서 “쐐, 쐐, 쐐, 쐐, 쐐, 쐐” 하는 나나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고는 그 소리에 사로잡히게 된다. “두근, 두근, 하는 소리를 듣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요란하게 쐐, 쐐”(64~65면) 하는 소리를 들은 소라는 생명현상의 격렬함을 깨닫고 ‘싫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고쳐먹는다.

나나는 종종 스스로를 ‘나나’라고 자칭하고 ‘입니다’체로 이야기하며 ‘제대로’ 묻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중시한다. 나나는 애자에 대해 소라보다 단호하다. 가령 나나가 애자를 요양원으로 보내는 결단을 할 때의 속내는 이렇다. 애자는 “이미 죽었으므로 더는 죽으려 하지 않고 다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갖 활동을 시시때때로 정지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소라를 망가뜨리고 나나를 망가뜨리고. 나나는 그런 것을 더는 두고 보고 싶지 않습니다”(99면). 이런 나나의 태도가 의미심장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나나가 모세와 함께 요양원으로 애자를 찾아갔을 때이다. 애자가 요양원의 자기 방을 “벽에서 천장까지, 점점이 붙여나간 종이꽃으로 꽃 천지”(133면)로 만들어놓은 광경을 쳐다보면서 나나는 생각한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마음과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뒤섞여 동요하고 말았습니다. 애자는 침대에 앉아서, 밖으로 터지고 번진 듯한 애자의 내면으로 발을 들인 사람들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나는 침대 곁에 마련된 긴 의자에 앉아 도시락을 무릎에 올렸습니다. 도시락의 무게로 무릎을 누르며 애자를 마주 보았습니다.(133면)

 

“시들지 않고 썩지도 않고 먼지에 덮인” 종이꽃들 가운데 앉아서 나나와 모세를 “잠자코 바라보고” 있는 애자는 언뜻 영정사진 속의 인물처럼 보인다.13) 그런데 종이꽃 천지에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는 나나가 유령 같은 애자를 마주 볼 때 “도시락의 무게로” 무릎을 누르는 동작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도시락은 순자의 도시락은 아니지만 상징적인 층위에서는 그와 다르지 않아서 그 무게로 죽음 같은 애자를 대면할 수 있게 한다.

나나가 모세네 화장실에서 요강을 발견하고 거기 깃든 의미를 받아들이는 태도에서도 삶의 감각이 미묘하게 작용한다. 나나가 “사랑스럽지만 더는 안되겠다”(146면)면서 모세와 헤어질 것을 고려하게 된 계기는 모세의 아버지가 요강을 사용하고 어머니가 요강을 비운다는 사실 자체라기보다 모세가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결정적이다. 요강에 함축된 ‘윤리’적인 성찰이 작가의 설교로 떨어지지 않는 까닭은 오무사 장면처럼 나나가 목격하는 모세네 가족의 기이한 관계가 명징하고 섬세한 감각으로 선연하게 포착되기 때문이다. 가령 모세 아버지가 자기 아내에게 ‘어이’ 하고 부르는 호칭이라든지 “생기가 사라져서 인형 같은 모습”(108면)의 모세가 어머니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면서 이야기하는 광경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나나는 모세가 “전혀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이고 그 점은 조금 무섭다”(103면)고 하는데, 이게 단순히 나나의 영매적인 감수성의 소산인 것 같지 않다. 모세네 가족 전부가 그림자를 뻔히 보고서도 그것이 그림자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의 그림자』의 여씨 아저씨 가족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나기의 이야기는 동성애자로서의 그의 삶이 앨리시어나 그의 동생 못지않게 폭력과 죽음의 세계에 노출되어 있음을 실감케 한다. 황정은은 「뼈 도둑」(『파씨의 입문』, 창비 2012)에서 이미 한 동성애자의 어려운 처지와 그 절절한 사랑을 극도의 추위 속에 눈 덮인 대지를 가로질러 죽은 애인의 뼈를 도둑질하러 가는 형상으로 부조한 바 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 앨리시어와 고미 사이는 둘 다 폭력에 시달리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애절하지는 않다. 그런데 이 두 사례에 비해서도 나기와 나기의 연인 ‘너’의 관계가 유독 어둡게 채색된 데는 나기가 상대방에게 마음대로 접근할 수 없는, 일종의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정과 관련이 있다. 동성애에다 짝사랑이니 이중의 어려움이 겹쳐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감안해도 나기가 ‘너’에게 매혹되는 대목들은 이 둘의 사랑이 ‘문제적’임을 암시한다.

 

너는 작았지. 머리카락이 가늘고 입술이 붉었지. 건방졌지. 난폭했고, 조용했지. 폭발하듯 갑자기 웃을 때가 있었는데 아무도 네가 왜 웃는지를 몰랐다. 네가 그렇게 웃을 때, 매번은 아니고 이따금 나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 약간 벌어진 두 눈은 미묘하게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주 노란색이었지. (…) 이상한 눈. 실은 모르겠다. 나는 너를 때리고 싶었나. 만지고 싶었나. 너의 목을 조르고 싶었나. 만지고 싶었나. 나는 너를 기다린다. 너의 소식을 기다린다.(172면)

 

연인에게 매혹되는 순간을 꽤 실감나게 그려낸 장면인데, 애매하기는 하지만 가학적 성애의 느낌으로 살짝 채색된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열네살 때 나기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때도 매혹감은 폭력의 흔적과 함께 찾아왔다. ‘너’가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해 보라색으로 멍든 목을 손으로 긁을 때 “멍과 살갗의 대비가 또렷했고 가느다란 약지가 그 경계를 더듬듯 누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있다가 얼굴을 붉혔다. 예쁘다고 느꼈고 외설적이라고 느꼈다. (…) 옷깃 속으로 숨어들어간 멍을 마저 보고 싶었고 그 등에 손바닥을 대보고 싶었다”(177면).

나기는 ‘너’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했고 나기의 ‘너’에 대한 애정을 눈치챈 아이들이 ‘변태’라고 부르며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나기 역시 멍이 들기 시작했고 연인에게 이렇게 폭력을 당하는 일은 잠시 돈 벌러 일본에 가 있는 동안에도 계속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나기가 또래들에게 맞아서 멍들기 시작할 열네살 무렵 어항 속의 물고기를 괴롭히는 나나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다. 나기는 몇차례 힘껏 때리고는 아프냐고 묻고 나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내가 너를 때렸으니까 너는 아파. 그런데 나는 조금도 아프지 않아. (…) 내가 아프지 않으니까 너도 아프지 않은 건가?”(130면) 하고 묻고는 지금 나나가 아픈 것과 조금 전 나나가 괴롭힌 금붕어가 아픈 것은 같은 것임을 지적한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이걸 잊어버리면 남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괴물이 되는 거야”라고 덧붙인다. 폭력을 통해 폭력의 문제를 지적하는 나기의 모습은 아이러닉할 수 있지만 폭력을 당함으로써 폭력의 본성을 간파한 듯한 역설도 성립한다. 무엇보다 나기의 슬픔이 짙게 배어 있고 이것이 나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나나는 이를 소중한 가르침(“그 옛날, 나기 오라버니가 나나의 뺨을 때려 가르쳐준 것”, 142면 참조)으로 간직한다.

나기의 내면은 심하게 분열되어 있고소라·나나와 삶, 음식을 공유하는 밝은 자아와 오로지 연인의 죽음을 기다리는 어두운 자아나기의 사랑은 그가 나나에게 일러준 폭력에 대한 교훈마저 뒤집는다. 사실 나기의 사랑은 애자의 사랑처럼 사랑 자체가 최고의 가치가 되는 ‘전심전력’의 형식이다. 나나는 사랑의 이런 측면을 경계한다. 나나는 사랑의 정도를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아기가 생기더라도 아기에게든 모세씨에게든 사랑의 정도는 그 정도,라고 결심해두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애자와 같은 형태의 전심전력, 그것을 나나는 경계하고 있”다고 고백한다(104면). 이 소설에서 제기되는 가장 중요한 물음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즉 소설은 애자와 나기의 사랑처럼 어떤 ‘정도’도 정하지 않고 죽음까지 받아들이는 사랑과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 이윽고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정도”를 정하려는 사랑 중 어느 쪽이 진정한 것인지, 혹은 도덕적인 것인지를 묻고 있는 듯하다.

나기의 이야기는 파편화되어 있고 너무 어둠 일색이라서 그 연인관계의 구체적인 모습을 온전히 실감케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 취약점은 나기의 길이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 중 소수자의 길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들뢰즈(G. Deleuze) 식으로 말한다면 나기는 ‘소수자 되기’와 ‘여성 되기’를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다만 그런 나기의 사랑도 일방적으로 지지받기보다 다른 사랑들과의 관계 속에서 상대화된다. 사실 나나도 “오라버니와 아이를 만들고 싶”을 만큼 나기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거절당하는 ‘짝사랑’의 아픔을 겪은 적이 있다. 나기가 나나의 사랑을 간파하고 그것이 새끼오리가 누군가를 무작정 따라다니는 ‘각인’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나나를 “울려버린 뒤 어쩔 수 없이 너의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191면) 둘의 아픔도 각별한 데가 있다. 나나 속의 새 생명이 자라면서 세 화자가 조금씩 변하는 모습도 눈여겨봐야 한다. 태어날 아이에 대한 사랑의 조화가 아니고서는 이 변화를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나나는 “자그자그자그자그” 하는 자신의 것과 다른 박동 소리를 들으며 “신체에서 모체로의 전환”(124면)을 느끼며 자신을 ‘엄마’라고 자칭하고, 소라는 동생의 아이를 함께 키울 마음이 되며, 심지어 나기마저 그 분위기에 ‘감염’된다. 나기의 지독하게 어둡고 아픈 사랑은 새 생명에 대한 세 화자의 기대 및 사랑과 함께 놓임으로써 가까스로 균형에 이른다.

 

세편의 소설을 검토하면서 분명해진 것은 황정은이 가장 아픈 주체들의 처지에서 우리 당대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야무지게 생각하는 작가라는 사실이다. 그는 빼어난 사실묘사를 구사할 수 있지만 사실주의를 초과해서 환상적·우화적인 수법을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렇지만 그의 예술의 초점은 기발한 방식으로 삶의 여러 양상을 색다르게 제시하거나 오로지 주어진 삶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나처럼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살고 있는가를 묻는 데 있다고 여겨진다. 세월호 이후에도 황정은 소설이 빛을 발하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다만 소설에서 이 물음을 제대로 묻는 일과 삶의 현재성을 실감케 하는 일이 둘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한두번의 문답으로 끝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 지금까지의 물음에서 우리가 사는 이곳이 심각하게 망가진 ‘야만적인 나라’라는 진단은 나왔지만 물음과 답은 계속될 필요가 있다. 그의 소설은 이 중요한 물음을 날카롭게 던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해왔고 ‘계속해보겠습니다’라고 힘겨운 다음의 시도를 약속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해당 소설들을 장르론적인 관점에서는 검토하지 않았다. 장편소설 ‘대망’론자로 취급받지만 나의 기본 입장은 단편이든 중편이든 (경)장편이든 작품이 훌륭하냐 아니냐를, 훌륭하다면 얼마나 그리고 어디가 훌륭하냐를 묻는 것이 우선이며 이미 나와 있는 훌륭한 작품을 알아보는 일이 특정 장르의 성과를 ‘대망’하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황정은은 어떤 소설이 어느 정도의 분량이 필요한지를 아는 작가다. 앞서 검토한 세편의 소설은, 세계문학의 분량 기준으로 전작 두편은 중편(novella)에, 『계속해보겠습니다』는 경장편에 해당한다. 나는 그가 분량의 차원만이 아니라 우리 당대의 복합적이고 구체적인 관계들과 당대적 삶의 도덕성·부도덕성을 ‘제대로’ 묻는다는 의미에서 점점 장편소설 쪽으로 나아갔고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이미 이 시대의 중요한 장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런 전제를 달지 않고 그가 계속 시도하는, ‘대단히 대단한’ 현재성의 예술을 지켜보면서 나 역시 ‘계속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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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졸고 「문학의 새로움과 소설의 정치성」,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창비 2011 참조.

2) 이 장치의 동원에 대해 신형철은 “이것은 미학(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자세)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불행의 상투적인 표현들이 범람하고 있어서 “소설가는 ‘불행의 평범화’에 맞서서 ‘불행의 단독성’을 지켜내야 한다”(179면)는 것이며, 이 장치를 구사하는 것이 “그 무슨 발랄한 현실 일탈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유일무이한 불행에 대한 소설가의 예의”(180면)임을 강조한다. 신형철의 이런 견해는 경청할 만하지만, 윤리에도 ‘작가’의 윤리가 있고 ‘작품’의 윤리라 부름직한 차원이 있는데, “소설가의 예의”에만 주목하여 ‘작가’의 윤리만 강조하고 ‘작품’의 미학적 차원을 부정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이 장치의 구사는 당연히 미학(기법)의 문제이기도 하며, 그것도 작품 전체의 미학적 짜임새에 작용하는 중대한 요소라고 봐야 한다. 이것이 성공할 때만이 “유일무이한 불행에 대한 소설가의 예의”도 실답게 지킬 수 있다. 흔히 ‘도덕’(morality, morals)의 개념과 대립적으로 설정되는 ‘윤리’(ethics)라는 용어도 따져보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데, 이 개념쌍은 평자에 따라서 정반대의 뜻을 함의한다. 가령 블랑쇼, 벤야민, 랑씨에르의 구분법에 따르는 진은영에게 문학의 가치는 ‘비윤리’ 혹은 ‘모럴(도덕)’에 있는 반면 푸꼬, 데리다, 레비나스의 입장을 취하는 김홍중이나 신형철의 경우는 ‘윤리’에 있다. 이로 말미암은 혼란과 부작용에 대해 백낙청은 “서양의 개념을 근거로 윤리와 도덕을 구별하다보면 원래 동아시아 전통에서 말하던 도덕, 즉 도()와 덕()에 대한 사유가 실종되고 만다”고 지적하는데, 세월호 이후에는 그런 의미의 ‘도덕’이란 용어를 되살릴 필요가 절실해진다. 백낙청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활력과 빈곤」,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비 2011, 126면. 이 글에서 푸꼬·데리다·레비나스적 ‘윤리’는 작은따옴표를 쳐서 표시하기로 한다.

3) 가령 호손(N. Hawthorne)은 사실주의와 우화적 요소를 결합하여 낙관주의로 치닫던 당대 미국의 어두운 진실을 냉정하게 탐구했다. 사실과 우화 사이에서 생겨나는 애매성(ambiguity)을 활용하여 당대의 시대정신을 뒤집어 어둠(숲)의 진실과 빛(마을)의 허위의식을 조명한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졸고 「모더니티와 미국 르네쌍스기의 작가들」, 『안과밖』 1998년 상반기호 65~73면 참조.

4) 황정은·복도훈 대담 「뫼비우스의 씨발 월드, 그 바깥을 꿈꾸기」, 『자음과모음』 2014 봄호 223면.

5) “모든 것이 부서졌다가 재조립된 평행현실(parareality)로서의 ‘고모리’”라는 심진경의 견해(「극장적 세계와 탈정념 주체의 탄생」, 『창작과비평』 2014년 겨울호 115면)가 한 예이다. 그는 김영찬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2000년대 문학에서 현실은 그렇게 소설 바깥으로 밀려나감으로써만 존재감을 발휘하는, 부재와 부정의 동력이었다”(같은 면)고 서술하는데, ‘문학에서 현실’을 실증주의·사실주의의 시각으로 한정한 후 그 ‘실증적 현실’이 없다고 지적하는 격이다.

6) 복도훈은 고모리를 “죽음이 살아서 삶과 관계를 지배하는 곳”(앞의 대담 222면)이라고 논평한다.

7)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앨리시어의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처럼 반복되면서 수행성이 강해지는 말이다. 이 발언은 소설의 세 화자 중 하나인 나나의 말이므로 일차적으로는 나나가 독자에게 이야기를 계속해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거기에 작가도 편승하여 자기도 이야기를 계속해보겠다고 말하는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런데 그 발언(혹은 그 변종인 ‘계속하겠습니다’)의 배치가 바뀌면서, 즉 나나의 이야기 장()에서 ‘*’ 표시로 구분되는 절의 서두에 놓이다가(100, 123, 137면) 말미로 위치가 바뀌면서(143, 161면) 뉘앙스가 달라진다. 게다가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소설의 마지막 말(228면)이자 책의 표제에까지 등장하면서 ‘무엇을’ 계속하겠다는 건지 살짝 애매해진다. 이를테면 ‘계속해보겠다’라는 동사의 행위가 텍스트 안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다가온다.

8) 황정은은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개고하면서 책 제목은 ‘계속해보겠습니다’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작가의 말’을 대신하는 면이 있으며, 그 뜻에 대해서는 ‘계속해보겠다’는 것이 삶이든 사랑이든 결국 세 화자의 이야기인데, 거기에 자기는 “살짝 손가락만 이렇게 얹어본”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 80회 「황정은 2부‘계속해보겠습니다’(with 송종원 평론가)」(2014.11.17.) 참조.

9) 황정은은 『계속해보겠습니다』의 집필에서 개고, 출간 사이에 삶의 애매성을 탐구하는 뛰어난 단편들을 썼다. 특히 「상류엔 맹금류」(『자음과모음』 2013년 가을호)와 「양의 미래」(『21세기문학』 2013년 가을호) 참조.

10) 애자는 『의 그림자』에서 남편이 타워크레인의 추에 압사당한 후 그림자가 달라붙고 입속으로 들어가 “입이랄지, 검은 것 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조그만 구멍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71면) 부조리한 고집을 세우는 유곤의 어머니와 흡사하다.

11) 정혜신은 세월호사건의 치유과정에서 전문적인 상담가보다 비전문적인 일반 시민의 참여가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치유의 핵심을 집밥에 비유한 바 있다. “비유를 하자면요, 우리가 집밥을 만들 수 있잖아요. 자격증 없어도 아무나 조금 덜 맛있든 어쩌든 만들어 먹고 살잖아요. 그리고 심지어 고급요리는 안 먹어도 문제가 없는데, 집밥을 오래 못 먹으면 사람이 정서적으로도 문제가 생겨요. 그러니까 맛은 덜해도 집밥은 우리한테 심리적으로 중요한 바탕이 되는 요소란 말이죠.” 정혜신·진은영 대화 「이웃집 천사를 찾아서: 세월호 트라우마, 어떻게 극복할까」, 『창작과비평』 2014년 겨울호 171면.

12) 연재본에는 나나가 모세와의 관계를 지속할 것으로 나오지만 단행본에서는 결별하는 것으로 바뀐다. 이에 대해 작가는 모세가 다른 세계를 만난다면 바뀔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염두에 뒀지만 그것은 “내 욕망”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단호하게 결별하는 쪽으로 바꿨다고 말한다. 앞의 「라디오 책다방」 인터뷰 참조.

13) 송종원은 이 장면에서 조화로 가득한 ‘신당’이나 ‘꽃상여’를 떠올리면서 애자가 무당 같다는 논평을 한다. 앞의 인터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