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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신예소설가특선
이승은 李承恩
1980년 서울 출생. 201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vinoshy@naver.com
왈츠
차는 집 앞 골목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가 먼저 운전석에 타고 그녀가 조수석에 탔다. 자리에 앉은 후에 시동을 걸자 차의 진동이 느껴졌다. 그는 막 출발할 것처럼 벨트를 매고 기어를 바꾸었다.
누구 차지? 못 보던 건데.
앞차를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어서 출발해. 바람 좀 쐬고 싶어.
그녀는 창문을 열고 티셔츠를 살짝 위로 올려 바람이 들어오게 했다. 그녀는 반소매 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굽이 낮은 샌들을 신었다. 발목에 거는 가느다란 끈은 풀어둔 채였다. 그녀의 발뒤꿈치와 발바닥에 분홍빛이 돌고 햇살을 받은 팔과 다리는 하얗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각도가 안 나오겠는데.
그는 운전대에서 손을 떼었다. 앞뒤로 차가 바짝 서 있는 상태에서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골목에는 평소보다 많은 차가 꼬리를 물듯 주차되어 있었다.
차에 연락처가 있겠지.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차에서 내린 그는 앞차의 운전석과 조수석을 살폈다. 세차 상태가 불량했지만, 이 동네에서는 보기 드문 검은색의 고급 차종이었다.
저 차가 빠져야 가든지 말든지 하지. 근데 저 차에는 아무것도 없어.
다시 차에 올라탄 후 그는 욕을 섞어 앞차 주인을 험담했다. 그가 입은 회색 티셔츠는 구겨져 있었고 뒤통수의 머리카락은 뻗쳐 있었다.
거울 좀 봐봐.
그녀가 손가락으로 그의 입가를 가리켰다. 룸미러로 입을 살펴보던 그는 혀와 손톱을 이용해 치아 사이에 낀 것을 빼내려고 애썼다. 오늘 아침에도 어젯밤에도 그는 양치를 하지 않았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술에 취해 있었다.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거실 바닥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맑고 화창한 일요일 오후였다. 정오를 넘긴 햇살이 집 안에 가득 차 TV 화면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눈이 부셨다. 커튼을 치자 햇살이 사라지면서 거실이 어두워졌다. 집에는 어제 먹고 남은 술이 있었다. 그들은 맥주와 소주를 섞어 마시다가 술이 떨어진 후에 차에 올라탔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어떻게 할 거야?
그가 물었다.
저 집 차일 수도 있어. 얼마 전에 새로 이사 왔거든.
그녀가 말했다. 그들이 사는 삼층짜리 빌라 바로 옆에는 좀더 낡은 빌라가 있었다. 외벽의 벽돌이 몇군데 떨어진 건물로,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아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녀는 대시보드 위에 쌓인 먼지를 손으로 닦아내고 바지에 문질렀다. 햇볕이 내리쬐는 차 안이 점점 달궈져 겨드랑이에도 땀이 차기 시작했다. 그들은 벨트를 풀었다.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그때 옆집의 고동색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왔다. 남자 한명이 골목을 가로질러 맞은편 집 담벼락으로 향했다. 담벼락에는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남자를 지켜보던 그는 차 문을 열었다. 차 주인인지를 확인하고 차를 빼달라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멈칫하는 사이 남자는 손을 털며 고동색 문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봤어?
그녀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는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황급히 자루에 던져넣는 것을 보았다.
저 사람, 바이올린을 버렸어.
그녀가 말했다. 그는 핸들에 몸을 기대며 남자가 턱시도를 입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그 남자가 앞차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모습도 떠올려보았다.
그가 차에서 먼저 내리고 그녀가 따라 내렸다. 그들이 사는 빌라로 들어서 계단을 올랐다. 삼층에 다다랐을 때 그녀가 그를 붙잡았다.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그와 그녀를 비추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계단을 도로 내려갔다.
몇분이 흐른 뒤에 그녀는 맥주가 든 봉투와 바이올린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거야. 이걸 버린 거라고.
진짜 바이올린이네.
그가 낡고 작은 바이올린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갔다. 갈색 몸통과 양쪽에 알파벳 f 모양으로 뚫린 구멍, 끝에 달린 소용돌이 형태의 조각이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여전히 윤이 나는 부분도 있고 칠이 벗겨져 나무의 속살이 드러난 곳도 있었다.
소리가 제대로 날까?
기다란 활을 살피며 그가 물었다. 그녀는 맥주를 한모금 마시고 바이올린을 어깨에 올렸다. 자세를 잡고 활을 줄에 대고 밀었다. 소리는 끔찍했다. 날카로운 뭔가가 귓속을 긁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 지었다.
이건 멀쩡해. 버릴 물건이 아니야.
그녀는 기뻐했다. 소리 나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팔아도 돈이 되겠는걸.
그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우리 연주회 갔을 때 기억나?
그녀가 갑자기 큰소리로 물었다.
클래식 연주회 갔을 때. 끝나고 와인 마셨잖아.
맥주를 들이켜던 그가 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우리 연애하던 때 말하는 거지?
그가 물었다.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생각해냈다. 다른 사람과 갔던 것을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는 연주회에 간 적이 없었다. 치료받으러 왔던 환자와 간 것 같았다. 그녀는 얼굴이 가려진 채로 입을 벌리고 누워 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한때 치위생사였다. 결혼하고 나서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의 권유로 공부를 시작하여 이년 동안 보통 직장인들이 회사에 있는 시간만큼 도서관에서 보냈다.
그녀는 빈 잔을 내밀었다. 그가 맥주병을 따서 잔을 채워주었다.
이렇게 둘이 있는 게 좋아. 나가봤자 번거롭기만 하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번 주말은 그와 그녀가 온전히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주말이었다. 그는 직장에서 제안을 받았다. 먼 곳에서, 지방에서 근무해야 계속 일할 수 있었다. 다음주부터 시작이었다. 기숙사가 제공되고 교통비는 따로 나왔다. 처음 그의 전근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납득할 수 없었다. 실수나 잘못을 한 것은 아닌지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매일 통화를 하겠지. 통화하다가 잠이 들고 전화를 안 받으면 걱정을 하다가 왜 안 받느냐고 짜증을 내고. 그러다가 우리는.” 그녀는 멈췄다가 다시 이야기하곤 했다.
한밤중에 혼자 깨어날 생각을 하면 지금도 무서워.
그녀는 잔을 깨끗이 비운 후에 창가로 갔다. 커튼을 밀어젖히자 주홍빛 햇살이 집 안으로 번졌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겨낼 거야.
그녀가 입가를 손등으로 닦았다. 거실 바닥에 앉아서 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숙사 생활을 생각하면 그도 끔찍했다. 군대로 복귀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별 망설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연애할 때처럼 재미있어질 거라고, 일년 후에는 상황이 좋아질 거라며 그녀를 달랬다.
그녀가 그에게 다가와 입 맞추었다.
바이올린을 배워보는 게 어때?
그가 물었다.
학교 다닐 때 난 기악반 같은 것도 해본 적 없어. 아무도 나한테 해보라고 안했어.
그녀가 말했다.
피아노는 쳐본 적 있어. 바이올린은 처음이지만 피아노는 쳐봤어.
그녀가 바이올린을 내밀었다.
자기도 해봐.
그는 바이올린을 받아 들었다. 그녀가 자루 뒤지는 모습을 창문으로 지켜본 그는 바이올린을 만지기 전에 깨끗이 닦지 않은 걸 후회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게 뭔지 알아?
그녀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뭔데?
난 활동적인 게 좋아. 몸을 움직이는 거.
그녀는 몸을 씰룩였다. 그의 앞에서 리듬을 타며 몸을 흔들었다. 그와 그녀는 잠시 키득대며 웃었다. 그녀가 그를 일으켜세웠다. 잔을 높이 들어올려 건배를 유도했다. 두 잔이 부딪치며 맥주 거품이 흘러넘쳤다. 그녀는 바이올린을 집어들고 연주를 했다.
그만해. 더는 못 들어주겠어.
그가 바이올린을 빼앗았다. 방금 한 말을 농담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바이올린을 턱으로 눌러 고정하고 네개의 줄을 문질렀다. 찢어지는 듯한 소리에 그녀가 웃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코를 찡긋하고 귀를 막는 그녀를 보며 그는 힘차게 활을 당겼다. 음악에 취한 바이올리니스트처럼 눈을 감고 눈썹을 실룩거리며 자유자재로 활을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활을 줄에 대지 않고 연주하는 시늉만 했다. 그녀가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었다. 그가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껴안은 채로 두 사람은 몸을 조금씩 움직여 거실 한가운데로 왔다. 거기서 그는 두 팔로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제자리에서 돌자 그녀의 다리가 공중에 붕 뜨며 원을 그렸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웃었다. 회전목마에 탄 것처럼 주변이 빠르게 지나갔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힘이 빠졌고 둘은 주저앉듯이 바닥에 누웠다. 네모난 천장과 둥근 등이 여러개로 흩어졌다가 다시 겹쳐졌다. 숨을 몰아쉬던 그가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얼굴과 목, 쇄골과 가슴을 평평하게 하려는 듯 힘주어 그녀의 몸을 문지르고 귓불을 깨물면서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옆구리에 그의 손이 닿자 그녀는 간지러움을 타며 몸을 움츠렸다.
자기야.
그녀가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손을 잡았다.
아직이야. 나도 하고 싶어. 근데 아직 안 끝났어.
입술을 오므렸다가 미소 지으면서 그녀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검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방금 이야기 하나 지었어. 딸은 바이올린을 계속 배우고 싶어하는데 아버지는 반대하는 거야.
그녀가 일어나 앉아 바이올린을 집어 들었다.
그래서 버렸다는 거야?
그는 여전히 누워 있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싱긋 웃으며 그녀는 주홍빛을 띠는 햇살에 바이올린을 비춰보았다.
이걸 갖고 싶지만 그래선 안되겠지. 가져다줄까봐.
그녀가 그를 보며 말했다.
초인종을 누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그와 그녀를 맞이했다.
저희는 바로 옆집에 살아요. 3층이요.
그녀가 여자에게 그와 자신을 소개했다. 여자는 집 안으로 들어오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이미 집 안에 많은 사람이 있었다. 현관에 놓여 있는 다른 신발들을 밀어내고 발 디딜 공간을 찾아내야 했다.
손님이 많으시네요. 이사온 지 얼마 안되셨죠?
그녀가 미소 지으며 크게 숨을 내쉬자 맥주와 소주가 뒤섞인 냄새가 미지근한 공기 속으로 퍼졌다. 여자는 작게 네,라고 대답하며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건너편 골목에 빵집이 맛있어요. 과일은 그 아랫집이 더 싸고요.
여자는 대꾸 없이 있다가 바이올린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걸 가져왔어요. 우연히 발견했는데 멀쩡해서 가져온 거예요.
그녀가 바이올린을 내밀었다. 아이들은 거실에서 놀고 있었다. 여자아이도 있었다.
버린 거예요.
여자가 힘없이 웃었다.
아이들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저 아이들 중에 누군가는 골이 나 있을 거라고, 아니면 자기 바이올린을 버렸는지 아직 모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니에요. 아이들 것 아니에요.
여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버리시는 거예요? 소리도 괜찮은 것 같아요. 저희가 연주해봤어요.
그녀가 그의 팔짱을 꼈다. 그는 집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한쪽 벽에는 아직 풀지 못한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그들의 집과 같은 구조에 방이 하나 더 있는 정도였다. 집 안에는 총 여덟명이 있었다. 어른이 다섯, 아이가 셋. 여자들은 흰 종이가 깔린 상 위로 음식을 나르며, 남자들은 거실 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을 흘끔거렸다. 안쪽의 방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더 나타났다. 바이올린을 버린 남자였다.
무슨 일이야?
남자가 그와 그녀에게 눈인사하며 여자에게 물었다. 가까이에서 본 남자의 얼굴은 대칭이 맞지 않았다. 한쪽 눈썹이 올라가고 한쪽은 내려가 있었다. 인상을 쓰다가 굳어진 것 같았다. 그것만 빼면 남자는 미남이었다. 팔십년대 유명했던 영화배우를 닮았다. 이 집안의 남자들도 그 영화배우를 조금씩 닮은 듯했지만, 주인 남자가 가장 흡사했다.
필요하시면 가져가세요.
남자가 말했다. 여자가 남자를 힐끗 보면서 남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쓸 만할 거예요.
남자는 여자를 무시하고 그와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요?
그녀의 웃음소리가 거실에 울려퍼졌다. 그와 그녀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혹시 케이스는 없나요? 원래는 케이스가 있었겠죠?
집을 나서기 전에 그녀가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자가 문을 열어주며 짧은 배웅을 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TV를 켰다.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기로 했다. 바이올린은 거실 서랍장 위에 올려두었다.
바이올린이 누구 거였을까?
그녀가 물었다.
글쎄.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골목에 있던 검은색 차가 누구 것인지는 알아냈다. 신발장에 차열쇠가 걸려 있었다. 그런 차열쇠는 흔한 것이 아니므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맥주를 마시며 리모컨을 눌렀다. TV 화면에 자음 순서대로 영화제목이 떴다. 여러편의 영화제목 뒤로 역도 경기가 방영되고 있었다. 체중계에 올라서서 몸무게를 확인한 선수는 경기대로 걸어나갔다. 경기대 중앙에 서서 기합을 한번 크게 내뱉고 손을 비비더니 쇠로 된 바를 잡았다.
술을 마시던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한마디 할 줄 알았어. 그 사람들, 우리 내보낸 다음에 수군거렸잖아.
그녀가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못 들었어? 내가 먼저 나오고 네가 뒤에 나왔잖아. 우리가 취했다고, 문을 왜 열어줬느냐고 아저씨가 아주머니한테 화냈잖아.
옆집에서처럼 거실에 그녀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게 웃겨?
그가 물었다.
왜 그래?
그의 얼굴을 보고 그녀가 물었다. 그는 아무 대꾸 없이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수의 우렁찬 기합소리에 놀라 그녀도 TV 화면을 보았다. 역기의 무게는 130kg. 엉덩이를 뒤로 빼면서 앉은 후에 선수는 역기를 들어올렸다.
자기 화났어?
그녀가 다시 물었다.
자기는 모든 걸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 어쨌든 바이올린이 생겼잖아.
그녀가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나한테 화난 거지?
그렇지 않다고 그는 대답했다. 그는 영화를 틀었다.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제작사의 로고가 뜨면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잔을 든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졸리면 자.
그가 말했다.
아니야. 자기랑 영화 볼 거야.
그녀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럼 세수하고 오든지. 정신을 좀 차려. 그래야 영화를 보지.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기울어진 잔에 반쯤 채워진 맥주가 찰랑거렸다.
나도 알아. 어렵지 않게 시험에 붙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나도 알아.
그녀가 눈을 떴다. 그녀는 얼마 전 2차 시험에 떨어졌다. 그래서 1차부터 다시 준비해야 했다. 두번째로 준비하던 시험이었다.
내가 생활비만 축낸다고 생각하지?
그가 TV에서 눈을 떼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가 불안해하는 것 알아. 많이 실망한 것도 알아.
그가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리며 등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다 잡은 물고기를 놓아준 셈이었다. 공인중개사무소를 하는 삼촌에게 부탁해놓았기 때문에 합격만 하면 그녀는 바로 출근할 수 있었다. 자식이 없는 삼촌은 조카들을 잘 챙겨주려고 했다.
삼촌은 기다려주실 거야. 공수표를 날리는 분은 아니라고. 너와 나를 좋게 보셨다니까.
그는 그녀가 이 말을 듣고 좋아할 줄 알았다. 기운을 낼 줄 알았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졸려. 잠깐 나갔다 올까봐.
눈을 감은 채로 그녀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는 그녀의 손에 들린 맥주잔을 낚아채듯이 빼앗았다. 그는 평온함을 사랑했다. 작년을 떠올리면 더욱 그랬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제때에 월급이 나오지 않자 통신요금부터 밀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가 오랜만에 분홍색 원피스 가운을 입었다. 다시 치위생사가 되어 동네 치과에서 시간제로 일했다. 그때 그녀는 급격히 늙어가는 것 같았다. 몇주 만에 그녀는 일을 그만두고 싶어했다. 그는 흔쾌히 찬성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너한테 투자를 하는 거야.’ 대신 지금의 직장을 얻기 전까지 그가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회사가 정리되면서 삼개월치는 받았지만, 나머지는 받지 못했다. 그들은 연체된 카드 대금을 조금씩 갚아가는 중이었다.
다시 준비해봐. 아깝게 떨어진 거잖아. 한번 더 기회가 주어진 걸로 생각하자.
그는 그녀의 어깨와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녀는 잠시 목을 뒤로 기댔다가 고개를 바로 했다. 그들은 한동안 조용히 영화를 보았다.
저 영화 봤어.
시선을 화면에 그대로 둔 채 그녀가 말했다.
봤어?
그가 물었다.
자기야. 공부하지 않고는 시험에 붙을 수 없어. 공부해도 떨어질 수는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없어. 그건 확실해.
그녀가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뭐?
그는 제대로 알아들었지만 그렇게 물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똑바로 서 있지 못했다. 약간 비틀거리다가 TV 옆 수납장에 무릎을 부딪혔다.
나 시험 안 봤어.
그녀는 수납장이 거기에 놓여 있다는 것에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시험 안 봤다구.
그녀가 다시 말하며 벽에 기대섰다. 그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날 그는 시험장까지 그녀를 데려다주고 저녁에는 둘이 외식을 했다.
네가 간 다음에 도로 나왔어. 복도에 서 있다가 까페로 갔어.
그녀는 한쪽 뺨을 긁었다. 손톱으로 긁고 난 자리가 붉게 변했다.
그럼 도서관에서 뭘 했어? 매일 도서관에 갔잖아.
그는 TV를 끄고 팔짱을 꼈다. 화면이 검게 변하면서 사방이 고요해졌다.
영화 봤어. 처음에는 잠깐 쉴 때 보기 시작했어. 이 영화도 다 본 거야.
그리고 또 뭘 했어?
그가 물었다. 그녀는 말없이 벽에서 등을 떼어내고 욕실로 걸어갔다.
그는 TV를 켰다가 다시 끄고 자신의 발을 쳐다보았다. 그의 양발이 젖어 있었다. 그는 허리를 구부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맥주병을 세웠다.
욕실에서 돌아온 그녀가 그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세수를 하고 왔다. 얼굴과 머리카락에 물기가 있었다.
안 나갈 거야?
그가 물었다.
그럼 내가 먼저 나갈게. 담배 한대 피우고 올게.
리모컨을 그녀의 옆에 내려놓으며 그는 현관으로 향했다. 그때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쾅 닫히고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거야?
그가 문 앞으로 가서 문고리를 잡았다.
혼자 있고 싶어.
그녀가 방 안에서 소리 질렀다.
내 말이 맞지? 우리가 어떻게 됐는지 보라구. 우린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문 열어.
그가 문을 두드렸다.
나한테 실망한 거지? 그렇다고 말해. 솔직해져봐.
그녀가 문을 열고 말했다. 다시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가 문을 손으로 잡고 있었다.
다치고 싶지 않으면 손 치워. 난 문 닫을 거야.
그녀가 그의 어깨를 세게 밀었다. 그가 양쪽 손목을 잡자 그녀는 필사적으로 뿌리쳤다. 뜨거운 것에 닿은 듯 어깨를 움츠리며 손을 빼냈다. 그는 생각보다 쉽게 뒤로 물러났고 그녀는 문을 닫았다.
네가 날 미워하지 않을 때까지 혼자 있을 거야.
그녀가 방문에 기대서서 외쳤다.
날 혼자 있게 내버려둬.
그녀는 한번 더 외쳤다. 그는 문을 두드리지도 그녀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녀는 문득 집에 혼자 있는 것 같은 섬뜩함을 느꼈다. 거실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에 그녀는 문을 열었다. 방문 앞에서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바닥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다.
자기야. 왜 그래?
그녀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내려고 했다.
그렇게 하지 마. 아파. 아프다고.
그는 괴로워했다. 얼굴과 손을 건드리지도 못하게 했다.
어떻게 된 거야?
눈을 못 뜨겠어.
계속 눈물이 나 그의 얼굴은 축축했다.
내가 어떻게 해줄까? 말해봐.
그 말을 반복하며 그녀는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응급실에 가야겠어. 구급차를 부르거나. 내 휴대폰 어디 있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그녀는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내고 눈을 살펴보려고 했다.
잠깐만 날 좀 내버려둬. 그게 좋겠어. 제발.
그가 소리 질렀다.
그래, 그럴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감고 벽에 기대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시계 초침 소리만 들렸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시리고 따끔했지만 참기 어려운 통증은 지나갔다.
여기 계속 이러고 있었어?
그가 물었다. 그녀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내가 보여? 내가 제대로 보여?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와락 안았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목을 조를 듯이 그를 꽉 안으며 그녀가 말했다.
자기야, 너무 괴로웠어. 전부터 말하려고 했어. 그런데 전근을 가게 되었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더 말할 수 없었어.
그를 안은 채 그녀가 말했다.
계속 놀겠다는 건 아니야. 다른 걸 찾아볼 거야.
그래. 알았어. 무슨 말인지 알았어.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그가 말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남자들도 만났어?
남자들?
입술을 오므리며 그녀가 물었다.
도서관에서 사람들을 만났다고 했잖아.
그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남자들은 없어. 다 여자야. 이런 걸 준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야.
내가 걱정하는 건 그런 거야. 그게 아니라면 괜찮아.
혼잣말하듯이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를 일으켜세웠다. 그들은 마주 서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밝은 불빛 아래에서 그녀가 그의 눈동자를 살폈다. 다음날 함께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그가 먼저 욕실에서 얼굴과 발을 씻은 후에 그녀가 들어갔다.
자기야. 끝난 것 같아.
욕실에서 나오며 그녀가 말했다.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녀가 싱긋 웃었다.
눈은 어때?
괜찮아. 말짱해.
그는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그녀가 담뱃갑을 찾아주었다.
그들의 집은 경사진 골목의 중턱에 위치했다. 위로도 아래로도 여러 갈래의 좁은 골목길이 뻗어 있었다. 그는 가로등 아래 서 있고 그녀는 거실 창가에 서 있었다. 담배를 꺼내며 그는 창가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실루엣만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평소에는 이쯤에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라이터의 불이 잠시 그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누군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옆집 여자였다. 처음에 그는 여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앞치마를 벗은 여자는 조금 달라 보였다.
마침 여기 계셨네요.
여자가 쿠킹호일로 덮인 접시를 내밀었다. 한 손으로 접시를 받으며 그는 감사의 말을 전했다. 맛있게 먹을게요,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도 여자는 가지 않고 서 있었다. 여자를 보며 어쩌면 남자와 여자는 부부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못생기지는 않았지만, 남자에 비하면 한참 못 미쳤다. 그저 평범했다.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
바이올린,이라고 여자가 말했다. 그는 여자의 말을 기다렸다. 여자가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시력을 회복했으나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돌려주셨으면 해요. 아까는 사정이 있었어요.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서 있는 자신의 차와 그 앞의 검은 세단을 바라보던 그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쩌죠. 버렸는데요. 자루에요.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자루에 없던데요.
여자의 목소리는 느릿하면서도 초조했다. 그는 여자에게서 무언가를 찾아냈다. 여자의 목에는 주근깨가 많았다. 자잘한 주근깨, 아니면 갈색 점이 목에서 어깨까지 퍼져 있었다. 팔에는 없었다.
오는 길에 자루에 넣었어요. 누가 집어갔나보네요. 자루 뒤지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는 연기를 내쉬고 담뱃재를 털었다. 담배 연기가 가로등 불빛 속에서 퍼지다가 사라졌다.
다시 한번 자루를 뒤져보세요. 자루가 꽤 깊어요. 속에 있을 수도 있죠.
그는 쿠킹호일을 벗겨보았다. 기름진 전이 몇가지 담겨 있었다. 군침이 돌았다. 하루 종일 먹은 게 없었다.
그가 접시를 들고 돌아왔을 때 거실 바닥은 깨끗했다. 그녀는 술병을 치우고 걸레질을 해두었다.
다른 얘기는 없었어?
그녀가 물었다.
없었어.
그 아주머니는 사연이 있어 보여.
그녀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듯 입술에 손을 대었다.
그들은 전을 맛있게 먹었다. 배가 부르고 나른했다. 원피스 잠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침대 위를 정리하고 방에 스탠드를 켜두었다.
네 말대로 레슨을 받아볼까봐.
그에게 기대며 그녀가 말했다. 반쯤 열린 창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올 때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한번 꽉 쥐었다.
일년 동안 바이올린을 배우는 거야.
그녀가 그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넣었다. 접시를 밀어두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시작했다. 그는 할 마음이 사라졌었지만 한번 시작되자 걷잡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일이 진행되었다. 그녀의 다리가 몸을 조여왔다. 그녀의 움직임에는 리듬이 있었고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그 방식이 그는 좋았다. 어느 순간에 이르면 원하는 것이 저절로 이루어졌다. 곧 그 상태에 이르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순간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부턴가 더이상 집중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랍장 위를 보고 있었다. 바이올린을 세워놓은 벽면이었다.
저게 뭐야?
그녀의 몸이 위로 살짝 들렸다. 그도 그걸 봤다. 벽면에 무언가 있었다. 그는 가로등 아래에서 봤던 여자의 주근깨를 떠올렸다.
개미야.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에프킬라,라고 외쳤다. 그가 에프킬라를 찾아왔을 때는 깨끗한 흰 벽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서랍장 주변의 구석에 엄청난 양의 에프킬라를 뿌렸다. 그녀는 잡아당기듯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들은 거실 한가운데 서서 말을 주고받았다.
개미가 아니었어.
그가 말했다.
그런 건 처음 봐.
그는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다.
그럼 그게 뭐란 말이야. 뭘 말하고 싶은 거야?
그녀가 대들듯 물었다. 그녀의 팔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윤기가 사라진 그녀의 피부를 보며 그는 자신들이 발가벗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거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옷을 집어 들었다. 서둘러 옷을 입었다. 바지를 먼저 입었다.
이걸 버리고 올게.
그가 바이올린을 가리켰다.
그걸 버린다고?
그녀가 물었다. 그녀는 머리칼 속으로 손을 쑥 넣어 뒤로 넘겼다. 그가 원피스 잠옷을 내밀자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그녀의 고개가 힘없이 꺾이는 것을, 양손에 그녀의 얼굴이 묻히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런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괴상하게 생긴 벌레가 한꺼번에 무리 지어 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어서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우선 신발을 신어야 한다고, 그 전에 티셔츠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날카롭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왜? 도대체 왜?
두 손에 가려졌던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는 웅변하는 사람처럼 똑바로 서서 양손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린 채 주먹을 쥐었다. 한 손에 바이올린을, 한 손에는 원피스 잠옷을 들고 서 있는 그의 앞에서 그녀가 다시 한번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