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평론
시의 미래와 낙서의 과거
황현산 黃鉉産
문학평론가, 고려대 명예교수. 저서 『얼굴 없는 희망』 『아폴리네르』 『말과 시간의 깊이』 『잘 표현된 불행』 『밤이 선생이다』 등이 있음. dasungumi@gmail.com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이 2013년에 찍은 영화 「카운슬러」(The Counselor)에는 마약밀매 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일이 잘못되어 벼랑 끝에 몰린 변호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중개자를 통해 범죄조직과 타협하려 하지만, 용서받지 못한다. 차라리 범죄조직의 대변인이라고 불러야 할 그 중개자는 변호사에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으며 어떤 선택도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안또니오 마차도(Antonio Machado)의 시 「길손」의 한 구절을 읊는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길손이여, 당신의 발자국이
길일 뿐 다른 길은 없다네,
길손이여, 아무런 길도 없다네,
길은 만들어진다네 걸으면서.
걸으면서 길은 만들어진다네.
그리고 그대는 뒤돌아보며
그 길을 볼 수 있지,
결코 다시는 밟지 못할.
길손이여, 아무런 길도 없다네
바다 위에 포말 자국뿐.
중개자가 읊은 것은 첫 세 구절이다. 이 시는 인류라는 거대한 바다의 한 방울 물과 같은 개개의 인간이 그때그때 선택한 발걸음으로 돌이킬 수 없는, 그러나 결국은 지워지고 말 발자국을 찍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되는 운명을 형이상학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 운명은 모든 인간의 운명이다. 모든 인간은 걸으면서 제 길을 만드는 길손이다. 중개자는 이 형이상학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는 전체적으로 이 시의 해석이나 다름없는 영화 「카운슬러」에서, 한 인간의 운명을, 그 인간이 저지른 망동과 그 결과를 극악한 현실의 한 국면에서만 바라보며, 어떤 선택도 불가능한 한 정황을 그 인간에게 보여줌으로써, 그 인간을 다른 인간에게서 제외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중개자가, 또는 이 영화를 감독한 리들리 스콧이, 또는 그 원작 씨나리오를 쓴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가 이 시를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다거나 편의대로 소비하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변호사가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서 이 시를 들을 때, 시는 교과서적 무덤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구체적 국면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고, 개개의 인간에게 나날의 지극히 사소한 행위를 지극히 엄숙한 운명의 틀 안에서 보게 한다. 보는 눈에 따라서는, 시가 말하려는 모든 인간의 운명을 한 인간의 운명으로 지악(至惡)하게 축약한 이 영화는 범죄소설에서나 볼 수 있었던 거대한 다국적 범죄조직의 광범하고 냉정한 폭력이 우리의 평화로운 삶 속에 어떻게 형태를 바꾸어 준동하고 있는가도 생각하게 한다. 무작하게 끊어버릴 수도 있었던 통화를 계속하며 이 시를 읊었던 중개자가 저 시의 형이상학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는 시의 위의(威儀)를 빌림으로써 수렁에서 발버둥치는 생명에게 편안한 포기의 길을 제시하고, 그의 절망에 하나의 형식을 부여한다. 그래서 수차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자리에 발을 들여놓은 경솔한 주인공이 저 고전적 영웅의 면모를 얻기도 할 것이다. 좋은 시는 제가 태어난 구체적 정황을 떠나서도 그 생명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 생명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것은 또하나의 구체적 정황을 만났을 때이다.
한 시인이 제 목소리로 시를 쓸 때, 그의 배후에 다른 목소리가 있다는 말은 여러가지 다른 뜻 외에, 그의 시가 늘 다시 써질 수 있다는 뜻도, 그가 다른 시를 다시 쓰고 있다는 뜻도 포함된다. 어떤 사람들은 황병승(黃炳承)이나 김경주(金經株) 같은 시인이 이른바 전통서정시를 걷어차버린 것처럼 말하지만, 소월이나 미당이 없는 그들을 생각하는 일 또한 어렵다. 황병승이 “찬비가 얼굴을 때리는 새벽”1)이라고 읊을 때도, 김경주가 “거울은 우리에게 저승을 보여주기 위해/만들어진 물성”2)이라고 단언할 때도, 거기에는 소월의 「왕십리」가, 미당의 「국화 옆에서」가 어떤 방식으로건 개입하고 있다. 여기서는 소월과 미당이 황병승과 김경주의 배후이지만, 또한 신세대의 시인들이 소월과 미당의 배후이기도 하다. 신세대 시인들이 시를 쓰는 현실은 소월과 미당이 미래에 만나게 될 또하나의 구체적 정황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시인들이 바로 그 자격을 내걸고 쓴 ‘작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시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낙서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과 몽상과 지성을 자극하여 일정한 정도에서 서정적 울림을 지니는 글은 모두 그 나름의 배후를 지니고 있다.
인터넷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초기단계에서부터 이 가상공간을 문학창조의 공간으로 삼으려는 시도들이 자주 나타났다. 이들 시도의 이면에는 다량의 텍스트를 수용하면서도 누구에게나 접근 가능한 이 공간이 인쇄출판물의 한정된 지면에서 문학을 해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만인의 참여를 유도하는 이 글쓰기의 터전이, 활력을 잃고 서고에 쌓이는 문학에 새로운 활력을 동반한 구체적 정황을 만들어주리라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이 희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접근 가능한 공간은 급하게 찾아갈 필요가 없는 공간이 되었으며, 중심축이 없이 프로파간다에 휘둘리기 쉬운 이 공간은 구체적인 진실들을 오히려 무의미한 소란 속에 묻어버리거나 기화(氣化)시켰다. 수많은 문학작품이 게시되었지만 인터넷이 창작공간이 되기는 어려웠다. 작가가 어느 싸이트에 작품을 게시하는 일은 출판물에 발표하는 것과 절차만 다를 뿐이었다. 죽은 작가에게도 산 작가에게도 인터넷은 특별한 덕을 베풀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개인의 글쓰기가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한 짧은 글쓰기에 집중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근년에 한 네티즌이 페이스북에 2행연 시의 형태를 지닌, 짧은 만큼 재치있는 글을 지속적으로 올려 화제에 올랐으며, 이를 한데 묶어 몇권의 책을 펴냈다. 첫권은 단기간에 20쇄를 넘게 찍을 만큼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어느 젊은 비평가는 시인들이 새로운 표현형식을 찾아 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 진위야 어떻든 우리에게서 인터넷이 창작공간으로 활용되어 일정한 성공을 거둔 최초의 예이니 잠시라도 관심을 갖는 것이 마땅하다. 몇개의 글을 인용한다.
짧은/순간//많은/생각(하상욱 단편 시집 ‘모르는 번호’ 中에서)
너무/아름다운 너//너무/평범했던 나(하상욱 단편 시집 ‘사이즈 품절’ 中에서)
일하고/싶어요//일하게/해줘요(하상욱 단편 시집 ‘전 직원 등산’ 中에서)
부질/없어(하상욱 단편 시집 ‘책상 정리’ 中에서)
‘단편시집’ 『서울 시』 첫 두권(중앙북스 2013)의 여기저기서 뽑은 글들이다. 따로 해석을 붙일 필요는 없겠다. ‘단편 시’마다 밑에 붙어 있는 작은 글씨의 글들이 저자와 글의 장르와 제목을 알려줄 뿐 아니라 ‘재치’의 눈을 제공하여 해석의 기능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은 글씨의 글들에는 이상한 점이 많다. 편마다 저자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은 글을 처음 페이스북에 올릴 때의 정황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시의 단편이거나 ‘단편 시’일 글을 “단편 시집”이라고 부르는 점이나, “中에서”라는 말의 쓰임은 납득하기 어렵다. ‘中에서’의 쓰임에 대해서는 저자 자신이 “나와 당신의 삶과 경험의 교합점을 찾는 글”(1권 11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미흡한 설명이지만 이해는 된다. 그는 시의 조각들이 지닐 수밖에 없는 부족분을 ‘中에서’로 보충하려 한다. ‘中에서’로 지시하는 삶과 경험의 출처가 시의 조각을 시로 완성해주고 ‘시집’으로 팽창시켜줄 것을 그는 기대하거나 기대하는 척한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모든 낙서의 전략이지만 낙서의 약점도 거기 있다. 사실 이 ‘단편시집’의 저자가 그 조각글에서 줄곧 말하고 있는 가벼운 환멸의 경험 가운데 우리의 소설이나 시가 한번쯤 다루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 그는 그 배후를 소생시키기보다는 소비하는 데 불과하기에 그 자신이 누구의 배후가 되는 일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는 ‘교합’을 기다리면서도 그것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위해 어떤 언어적 모험도 실천한 적이 없기에 그의 글이 패스티시(pastiche)의 낙서에서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인터넷 글쓰기가 대부분 일정한 창조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까닭도 인터넷을 창조하거나 재창조해야 할 것들의 구체적 정황에서 피신하는 자리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이 작은 사건은 진실 하나를 다시 확인시킨다. 사람들이 시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에 제 감정을 의탁하고 제 마음의 깊이를 시를 통해 확인하고 싶어하며, 가능하다면 자기 자신도 그런 시를 쓸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는 흉물이 되어버린 지하철의 시도, 등산로에서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시구의 팻말도 시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이런 마음과 연결된다. 이런저런 방송이 인색하게 내주는 시 낭독 프로그램도 이런 만남을 위한 것이다.
한편에서는 시와 시인도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한다. 용산참사가 일어났을 때, 시인들이 위주가 되어 자발적으로 모인 192인의 문인들은 릴레이 1인시위를 하며 각종 매체에 글을 기고하여 두권의 책을 냈다. 시와 산문이 현실의 구체적 상황과 만나 그 구체적 상황이 되려 했던 이 운동의 현실적 성과는 그러나 문학적 성과만큼 크지 못했다. 시가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세월호 침몰사고 후에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그 진실의 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문인들은 ‘304 낭독회’를 조직하여 희생자의 수만큼 반복될 이 낭독회의 두번째 행사를 마쳤다. 특히 두번째 낭독회를 준비하면서 306명의 문인이 ‘한줄 문장’을 썼을 뿐 아니라 537명의 시민에게서도 같은 글을 받아내었다. 다음은 시민과 문인들의 ‘한줄 문장’ 가운데 일부를 옮긴 것이다.
희생자들을 위한 정의. 세계가 당신들과 함께 한다. 지금 진실을!
그 어떤 권력도 자식을 잃은 부모를 이길 수는 없다. 세월호특별법을 제정하라.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 순간 당신은 ‘다음 희생자’입니다.
너희가 거짓말한다고 우리도 거짓말할 거라는 말 마라!
눈을 떠야 보이는 어둠이 지금 여기 있다.
못난 어른이라서 죄송합니다. 진실을 밝힐 때까지 잊지 않고 행동하겠습니다.
세월호 해결 않는 대한민국에서 내리고 싶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안전한 나라의 시작!
침묵은 금이 아니라 독극물이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거밖에 없어서 정말 미안해. 애들아, 정말로 잊지 않을게.
세월이 흐른 뒤 더 끔찍한 형태로 돌아올, 미래의 세월호를 기억하라.
침몰한 배를 타고 우리는 불면의 난바다로 나아가고 있다. 다 함께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의지마저 가만히 있으라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만납시다.
그러나 세월은 늙어가고 진실은 언제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세월호특별법이 정의의 끝은 아닐 수 있지만, 그 시작인 것은 분명하다.
세월호는 가슴에 묻었지만 진실은 세상 밖으로.
세월호 가족들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은 4월 16일입니다.
바다 밑에서 죽지 않은 손이 올라온다. 그 손을 잡아 끌어올려야 한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앞의 열줄은 일반시민들의 글이며, 뒤의 열줄은 문인들의 글이다. 앞의 글이나 뒤의 글이나 같은 생각을 같은 감정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차이는 한눈에 드러난다. 시민들의 글은 진솔하고 생생하며, 문인들의 글은 정제되었고 어떤 식으로건 한줄이 다른 여러줄로 확장될 수 있는 수사학적 장치를 담고 있다. 시민들은 대체적으로 머리에 떠오른 첫 생각을 적은 데 비해 문인들은 품었던 생각의 끝을 적고 있다. 시민들은 현실의 한 국면에 서 있지만, 문인들은 한줄의 글 속에서도 그 국면에서 또하나의 국면을 연출한다. 글을 통해서만 본다면, 동일한 구체적 현실 앞에서 그 구체성을 감지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시민들은 거리에서 썼을 것이며, 이 행사를 기획한 문인들은 책상에서 썼을 것이라는 점을 물론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글을 썼다고 해도 이 차이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차이가 시와 사람들을 가로막지만, 사람들이 시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은 시가 특별한 글이기를 바라고 실제로 시가 특별한 글인 것을 이 차이가 말해준다. 시가 시이기를 포기하고 사람들과 만날 수 없는 이유가 이와 같다.
현대사에서 ‘한줄 문장’이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크게 힘을 떨쳤던 것은 프랑스의 68혁명 때였다. 1968년 5월에 벨기에의 어린 아이였던 어떤 사람이 훗날 인터넷에 ‘슬로건과 낙서’라는 제목으로 그 짧은 글들을 모아놓았다.3) 당시 빠리 시내에 넘쳐났던 이 ‘낙서’들은 반자본주의와 반보수주의의 기치 아래 권력을 타도하고, 국가이데올로기의 전파기관인 대학과 언론기관을 분쇄하고, 그 하수인인 경찰과 맞서 투석전을 벌이라고 독려하며, 막연한 미래에 기대를 걸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을 누리고 그것을 미래로 연장하라고 권고한다.
국가를 타도하라.
바리케이드는 거리를 막지만 그러나 길을 연다.
벽에도 귀가 있다. 당신들의 귀에는 벽이 있다.
황금시대는 황금이 지배하지 않는 시대였다. 황금 송아지는 언제나 진흙으로 만들어졌다.
행복은 하나의 새로운 이념이다.
소비를 늘려라, 삶을 줄이게 될 것이다.
서둘러라 동지여, 낡은 세계가 너를 뒤쫓는다.
철자뻡은 관료행티다.
배운 것을 모두 잊어라. 꿈꾸기로 시작하라.
예술은 죽었다, 그 시체를 소비하지 말라.
나는 당신에게 다른 세계를 말한다. 바로 당신의 세계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
젤다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 노동 타도!
포석 아래, 해변이.
위의 인용은 그 많은 낙서 가운데 번역하기 쉽고 별도의 설명이 없어도 이해될 수 있는 문장을 고른 것인데, 그러다보니 격렬하거나 욕설이 들어 있는 슬로건을 옮겨놓을 수 없게 되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시위자들이 무슨 내용을 어떤 문장형식과 어떤 수사법으로 말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세계관과 사회관이 있으며 그것은 무정부주의자들의 주장으로 연결된다. “철자뻡”의 거부는 학교교육에 대한 거부이며, 엘리트 교육과 출세지향주의 교육에 대한 비판일 뿐 아니라 일체의 제도와 문화에 대한 탄핵이다.4) 초현실주의자들의 세계관과 예술관이 떠받들리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은 현실에 대한 상상력의 우위를 표방한다. 랭보( J. N. A. Rimbaud)의 산문시에서 한구절을 얻어 변형했거나 거기서 착상을 얻은 글들이 있다. 그 글들은 현실에서의 삶과 노동은 어떤 것이건 결국 예종(隸從)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다.
인용한 문장들 가운데 마지막 문장, 시위자들에게 크게 호응을 얻어 빠리 곳곳에 벽보로 나붙었다는 이 짧은 문장은 겉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격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빠리 가로의 모든 포석을 뜯어내어 투석전의 무기로 사용하고 나면 휴가지의 해변과 같은 낙원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설명이 더 필요한데, 게시자 자신이 이 문장을 처음 쓴 사람의 증언을 전하고 있다. 한 시위자가 빠리의 어느 거리에서 포석을 걷어내다가 그 밑에서 고운 모래를 발견했다. 그는 짧은 글을 썼다. “빠리의 포석 밑에는 풀이 있다. 당신의 모습을 보라. 당신은 처량하다.” 그의 동료가 반항자는 희생자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뒤의 문장을 지우고 “포석 밑에는 풀이 있다”고만 썼다. 그의 동료는 풀이 ‘자연주의’를 말하기에 반항에 어울리지 않으며, ‘대마초’로 오해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붉은 글씨로 “포석 아래 해변이”라고 써서 벽보를 만들었다. 포석 아래 깔려 있던 희생자들은 처음부터 포석이 없는 낙원의 주민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이튿날 “포석 아래”와 “해변이” 사이에 푸른색 잉크로 쉼표를 넣었다.5) 이 쉼표는 현실에서의 운동과 그에 대한 성찰을 동시에 강조할 것이며, 변혁의 과정에 엄숙성을 부여할 것이다.
이 ‘낙서’가 완성된 과정은 시의 탄생에 대한 설명과 같다. 하나의 문장이 어떻게 특별한 문장이 되는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 말에 대한 이 엄숙한 경험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려 했던 운동의 과정에서 얻어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가 많다. 언어는 행동과 발견을 통해서 해방된다. 언어가 해방된다는 것은 상투적 사고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언어는 그 깊이를 통해서만 해방된 자리로 간다.
그 끝에 68혁명을 두고 있는 1960년대의 프랑스에서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던 문학적 전위 가운데 하나는 울리뽀(OULIPO)의 언어실험이었다. OULIPO는 작업실을 뜻하는 ouvroir, 문학을 뜻하는 littérature, 잠재성을 뜻하는 potentiel에서 각기 첫 두 글자를 따서 조합한 말이다. 작가와 과학자와 수학자 들이 초현실주의 전후의 전위운동과 수학을 연결시켜 일정한 제약을 내걸고 글쓰기의 잠재적 가능성을 타진하는 이 실험의 내역과 결실에 관해서는 이들의 공식 웹싸이트를 통해서 알 수 있지만, 더 쉬운 방법으로는 한국의 울리삐앵들이 발간한 책자를 참조할 수 있다.6) 울리뽀는 68혁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그 실험방법이나 제약은 한국어로는 실천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이런 조건을 뛰어넘으려는 것이 모든 언어적 모험의 목적이기도 하다. 한국 울리삐앵들의 여러 실험 가운데 하나로 작성된 「혁명 전야—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는 이른바 ‘이접’의 방법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언어 속에 프랑스 68혁명의 언어를 끌어들인다.
친애하는 고대 학생 제군! 낡은 세계가 너를 뒤쫓고 있다.
한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니,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 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자유와 생명을 위협하고, 네 행복을 산다. 그걸 훔쳐라.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증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으니,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만약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니, 너희 바지 지퍼를 여는 그만큼 자주 너희 두뇌도 열어라.
(…)
우리들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 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돌이킬 수 없는 주먹을!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여름은 더우리라!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 지루함은 반혁명적이다.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각 처단하라. 가면 쓴 이가 바로 그다!
—경찰의 학원출입을 엄금하라. 그들의 악몽이 우리의 꿈이다.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치 말라. 바리케이드는 거리를 막지만 길을 연다.7)
이 ‘시’(시라고 불러야 한다)의 정체는 1960년 4·19혁명 당시 고려대 학생단이 낭독했던 선언서의 문장을 그대로 (일부 문장의 종결어미를 연결어미로 바꾸어서) 가져온 것이며, 문장 끝부분의 사체(斜體)는 68혁명의 ‘낙서’를 옮겨다 접붙인 것이다. 이 이접으로 역사연구의 자료로만 읽힐 낡은 문서는 의외의 활력을 얻어 모든 변혁운동에 적용될 궐기의 글이 되고, ‘낙서’는 선언서의 맥락을 공유함으로써 그 분산성을 극복한다. 두 종류의 글은 서로 협력하여 시가 된다.
이 시에서 작성자가 쓴 글은 한마디도 없다. 그렇다고 그의 노력을 작게 평가할 수 없다. 선언서의 문장은 시가 내포하는, 또는 이제 이루어질 어떤 가상의 시가 만나는 구체적 정황이 되고, ‘낙서’는 그 정황에 때로는 종합적인, 때로는 미학적인 해석이 된다. “한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라는 선언서의 말은 선언자들의 자각을 말하고, ‘낙서’의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는 그 자각의 힘이 이제 다른 세계를 기획할 수 있는 상상력으로 확대되기를 촉구한다. 이 촉구는 물론 현실보다 시적 상상력이 더 우월하다는 초현실주의적 담론에 기초를 둔다. 독재의 발악이 “전체 국민의 자유와 생명을 위협”한다는 말은 정치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진단이고 고발이다. 여기 붙는 “네 행복을 산다. 그걸 훔쳐라”는 정치권력이 자본권력과 결탁하여 생명의 행복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선언서의 말을 해석해 소유라는 이름의 도둑질에 또하나의 도둑질로 맞설 것을 권유한다. 선언서가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할 때 맞이하게 될 “영원한 저주”에 대해서 ‘낙서’는 “너희 바지 지퍼를 여는 그만큼 자주 너희 두뇌도 열어라”라는 명령으로 깨어나서 탐구하는 정신이 결국 역사를 바꾸게 될 것임을 강조한다. 이 시의 작성자는 자기 손으로 아무것도 쓰지 않았지만, 그는 상황의 제공자이며 그 해석자이다. 그러나 선언서와 ‘낙서’ 가운데 어느 것이 시의 구실을 하고 어느 것이 주체적 상황의 구실을 하는지 말하기 어렵다. 두 글의 긴장도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이다.
인터넷 환경이 죽은 작가에게도 산 작가에게도 특별한 덕을 베풀지 못했다고 나는 앞에서 말했다. 그때 나는 확실히 주제를 생각해내고 그것을 표현할 얼개를 짜고 그리고 마침내 쓰고자 했던 것을 써서 완성하는 전통적인 글쓰기의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글쓰기라고 암암리에 생각하고 있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 ‘한 줄 문장’들과 다른 나라의 ‘낙서’들과 한국의 잠재문학실험자들의 노력을 살펴보면서 이 새로운 환경이 우리의 젊은 작가들, 특히 젊은 시인들의 글쓰기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으리라고 믿게 된다. 그들의 시에는 개방된 공간에서 커서의 재촉 아래, 양방향 소통의 압력 아래, 시의 위의를 지키면서 동시에 시를 산포하는 방식이 벌써 스미어 있다.
내가 이제 마지막으로 소개하려는 시는 시 쓰기를 둘러싼 여러 환경의 변화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나타나기도 어려웠고, 시로 이해되기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승일(金昇一)의 시 「You can never go home again」8)은 같은 제목을 지닌 토마스 울프(Thomas Wolfe)의 소설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는 어느 자리에도 확실하게 몸 붙이지 못하는 여자에 관해 말하기에 그 관계를 완전히 부인할 수도 없다. 시인은 한 여자의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자신의 서술을 일종의 메타언어로 먼저 지시한다. 이를테면 시의 시작이 이렇다. “다음은 수녀스님이 꾸고 있는 꿈이다 신딸이 신엄마에게 큰절을 한다 대단해요 하느님은 백인이었다 부처님도 백인이었다 하지만 아직 하느님과 부처님을 만나보지는 못했다 분명히 곧 만날 것이다 다음은 꿈에서 깬 수녀스님이 무얼 하는지 묘사하고 그녀의 생각을 서술한 글이다”. 낯선 단어 “수녀스님”은 “수녀면서 점집을 겸한 작은 절의 스님”인 주인공을 일컫는 말이다. 그녀는 수녀이면서 신내림을 받은 수습 무당이다. 시가 길어 후반부만 인용한다.
다음은 수녀스님의 미래를 소개하는 글이다 희정은 믿음이 강할 때는 가끔씩만 믿지 못할 것이며 분노가 치밀 때는 가끔씩만 믿을 것이다 다음은 믿음이 강할 때의 불신 속에서 희정이 하는 행동이다 희정은 잠을 잔다 다음은 분노가 치밀 때의 믿음 속에서 그녀가 하는 행동이다 그녀는 눈을 감는다 다음은 눈을 감은 여자의 생각이다 믿고 있다 다음은 눈을 감은 여자의 생각이다 눈을 뜰까 다음은 수녀스님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희곡을 요약한 것이다 막이 오르면 수녀스님의 일상이다 막이 내렸다가 다시 오르면 수녀스님의 49재다 우리 스님을 성당에 묻다니 불자들이 화가 났다 비구니들이 승무를 춘다 막이 내렸다가 다시 오르면 수녀스님의 꿈이다 신엄마가 신딸에게 이제 가자고 한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다음은 수녀스님의 생각을 서술한 글이다 희곡을 썼네 여기까지 쓴 다음 나는 희정 씨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 그곳에서 그녀를 꺼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해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다 자야겠다
이 시는 소설 같은 것을 써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서투르게 짠 얼개 같고 그가 쓴 낙서 같다. 그러나 말은 얼마나 세련되었으며, 생각의 선회는 얼마나 빠른가. 작자가 이 글을 시라고 내세우지 않더라도, 말의 특별한 성격이 이 시를 시 아닌 것에서 떼어놓는다. 하느님과 부처님이 백인이라는 점에 민족적인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낯선 존재들이고, 낯설기에 거룩한 존재들이다. 수녀스님은 거룩한 존재를 만나지 못한다. 여자에게 신내림은 낯설고 거룩한 존재 앞에서 선택 가능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응이다. 그러나 이 구체적인 순간은 분열되고 짧아서 여자는 수녀로도 스님으로도 늘 산만하다. 일관성 있고 강력한 것은 시인이 자신의 서술을 지시하는 메타언어다. 그런데 이 메타언어에 뒤따라오는 ‘언어’는 지극히 빈약한 내용만 담고 있다. 그래서 종교의 비극과 시의 비극이 겹친다. 시인은 편안하지 않다. 이 시는 시쓰기의 잘 만들어진 실패담일 뿐 아니라 그 실패의 현장보고서다.
이 시는 분명 이해되지 않는 시, 곧 난해시로 분류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 시가 소통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시에서의 소통이란 소통되지 않는 것을 소통하려는 노력임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시에서 자신이 시에 기대하는 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이 시를 방송에서 낭송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청중 앞에서 낭송을 한다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 사람들은 먼저 이 세련된 말의 유희를 즐길 것이다. 그 가운데 그들은 실패의 시를 들으며 실패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보게 될 것이며, 자신의 실패를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과 시인은 실패의 구체적 정황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썼던 낙서가 시의 미래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시라고 생각하는 시가 시를 구제하고 대중과 만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런 시들이 어떤 상업적 성공을 거둔다 해도 그것은 시의 ‘시체를 소비’하는 것과 같아서 시를 죽음으로 몰고 갈 뿐이다. 시의 개념을 개혁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개념을 넓히는 가운데 시가 현실의 구체적 국면과 만나고, 저 자신이 그 구체적 현실이 되는 길이 그렇게 먼 것은 아니다.
--
1) 「내일은 프로」, 『육체쇼와 전집』, 문학과지성사 2013.
2) 「비어들」, 『고래와 수증기』, 문학과지성사 2014.
3) Slogans et graffiti (http://users.skynet.be/ddz/mai68/index.html).
4) 글쓴 사람은 자신이 솔선해서 철자법을 무시하고 orthgraphe를 orthografe로 쓰고 있다.
5) Slogans et graffiti.
6) 남종신·손예원·정인교 『잠재문학실험실』, 작업실유령 2013.
7) 같은 책 74~75면.
8) 『문학과사회』 2014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