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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  손택수 시집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빛나는 먼지들’의 힘으로 운행하는 ‘목련 전차’

손택수의 시와 함께 떠나기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평론집 『환각의 칼날』 『풍경 속의 빈 곳』 『서정은 진화한다』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등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손택수 孫宅洙

시인. 1970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경남대 국문과와 부산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가 있다. 신동엽창작상, 오늘의젊은예술가상, 임화문학예술상,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1

문태준 김선우 손택수 진은영 심보선 김행숙 황병승……

언젠가 우리 시사(詩史)1970년생 시인들을 위해 별도의 지면을 할애해야 할지도 모른다. 1970년. 근대화의 요란한 구호들과 기계음 없이 떠올리기 힘든 이 해는 우리의 심중에 한국이 산업사회로 출범한 첫해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사실보다는 오롯한 체감의 차원에서다). 1969년까지는 전근대, 시골, 논밭, 자연, 수공업, 대가족, 공동체 등을 정렬해두고, 1970년부터는 근대, 도시, 공장, 개발, 산업, 대량생산, 핵가족, 개인화 등을 덮어쓰기 하는 인식과 감각의 무의식적 체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이든 상징이든, 체질이 다른 두 세계가 역사적으로 마주치며 갈라지는 정점을 ‘1970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생의 기원을 1970년에 둔 시인들이 전근대와 근대, 오래됨과 새로움, 노래와 산문 등의 이질적인 지평을 어떤 형태로든 소화해야 할 필연을 안고 사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거칠게 분류해 문태준 김선우 손택수 등이 ‘전부터 있어 내려온’ 재래(在來)의 미덕을 기린다면, 진은영 심보선 김행숙 황병승 등은 ‘지금 있거나 앞으로 올/와야 할’ 모던(modern)의 향방을 탐색한다. 그중 손택수에 관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의 핵심은 그의 시 전체 지형과 관련된다. 손택수 시의 본령은 전근대 세계를 열애하고 시적으로 현재화하거나, 그것의 반대항으로서 근대의 비루한 행적을 질타하는 데 있지 않다. 손택수의 시는 전근대와 근대가 불편하게 동행하고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문제 자체를 사유하고 살아내며 재론하고자 한다. 때로 상극처럼, 짝패처럼, 거울처럼 어지럽게 이접하는 두 세계를 어떻게 시적으로, 더불어 구체적인 삶 속에서 재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 어려움에 대한 통감이 손택수의 시를 떠받치는 동시에 뒤흔드는 근원이다.

이러한 시적 체제가 손택수의 첫시집1)에서부터 완전히 확립된 것은 아니다. 그와 동세대 시인들의 시에 유사한 문제의식이 부재하거나 빈약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근본적이면서도 집요하게 파고드는 점에서 손택수의 시 작업은 각별한 바가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손택수 시가 천착하는 궁극적인 화두는 전근대와 근대의 패러다임 및 그 교체와 혼돈의 1970년발()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손택수의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과 문명 전환에 맞닿은 거대한 사회·역사적 사건들이 가역적으로 환치되고, 비가역적으로 이월되며, 시련과 모순을 나누어 갖는 가운데 전개된다. 드라마의 온갖 잡음과 무음은 시인의 (무)의식을 거쳐 텍스트의 (무)의식에 스며든다. 손택수의 시에서 텍스트의 표층은 묘사하고 기술하며, 심층은 논쟁하고 자문한다. 표면은 웃고 울고 노래하고 수런대며, 이면은 웅숭그리고 골똘하며 적막하다. 노래와 산문, 공동체의 둥그런 이야기와 개인의 바스러진 사연(/私緣), 당나귀가 쓰는 시와 생활의 먼지, “나뭇잎과 푸른 물고기에 대한 비유”와 “하수도관을 뚫고 들어간 나무”(「나무의 수사학 4」, 『나무의 수사학』)들의 두 계보 사이에서 텍스트가 취할 화법과 자세는 그에게는 너무 적거나 너무 많다.

몰락하고 제압하며, 견디고 관철하는 두 세계의 격돌을 살아온 시인은 시의 유구한 깊이와 높이를 모르지 않으나, 세상의 다른/낯선 척도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의 ‘위대한 힘’을 모르지 않으나, 누군가의 시선에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시의 무력에 눈감을 수는 없다. 시의 다양한 장치들을 유려하게 다룰 줄 모르는 바 아니나, 그에만 골몰할 수는 없다. 짐작하겠지만, 이 분열과 상처야말로 손택수가 사랑하고 꿈꾸며 시를 쓸 수 있는 역설적인 힘이자 창작방법론이다. 더불어 그의 고군분투를 끊임없이 위태롭게 하는 생의 항상적인 기류다.

 

2

제가 고향 담양의 들판을 뛰어다니다가 서른해를 보낸 곳이 부산입니다. 부산이란 지명은 구체적인 실체가 아닌 추상으로 그만의 고유한 체취가 묻어나지 않죠. 국()이나 도(), 시()처럼 체감되는 공간이 아니라 어딘가 막연하게 다가옵니다. 추상으로서의 장소를 가능한 한 살갗으로 직접 부비면서 살고자 하는 게 농경민의 전통이겠지요. 실제로 저는 틈만 나면 산동네의 슬레이트 지붕 위에 올라가 수평선을 바라보았습니다. ‘붕-’ 후미진 골목길을 따라 올라오는 뱃고동 소리와 소금기가 있는 낯선 말들, 물너울에 비치는 빛살 같은 눈부심을 간직하고 있는 풍경들. 이 새로운 풍경이 그리움을 앓게 했습니다. 낯선 도시의 풍경 속에서 지금 내게는 없는 무엇인가가 비로소 분명하게 각인되기 시작한 거지요. 바다를 통해 내면공간이 열렸다고 해도 좋을 텐데, 아마도 ‘내국 디아스포라’의 슬픔 같은 것이 그 공간을 채워주었을 것입니다. 돌이켜보니 성장기의 가장 예민한 시기에 저는 언어적으로도 그렇고 존재론적으로도 디아스포라의 슬픔 속에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전근대에서 근대로 옮겨왔으니 모국어도 존재도 다 분열을 앓은 거지요. 그때 향수병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말해야겠네요. 어느날 저는 고향에서 멱을 감던 기억을 불러오기 위해 세숫대야에 물을 받고 고개를 처박았습니다. 콧속으로 물을 빨아들이고 있노라면 강물이 콧속으로 들어올 때의 감각이 살아났거든요. 그 찡하고 맵고 알싸한 느낌. 눈물이 흥건하도록 희미해진 감각을 찌르는 물의 환기를 통해 매번 귀향의식을 치렀나봅니다. 특정 장소에서 가치로 바뀐 고향을 갖게 된 자들의 귀향은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더 간절한 꿈으로 생을 자극합니다. 여기엔 ‘나는 너다’와 같은 동일성의 세계가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하나가 될 수 없는 균열이 있습니다. 나와 너를 찢어놓은 균열의 고통을 직시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꿈꿉니다. 어쩌면 실향과 유랑의 성장기가 제게는 문학수업 시절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손택수는 유년기에 별안간 고향에서 타향으로, 시골 들판의 생흙에서 해안 도시의 아스팔트로 이주하면서, 자신의 존재와 삶이 통째로 도려내지는 충격에 노출된다. 그가 스스로 규정한 ‘내국 디아스포라’의 수난은 존재와 언어, 삶의 공간, 생활세계, 주변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 등 모든 층위에서 진행된다. “사람의 눈은 마주 보지 못하고/별의 동자라도 봐야 살 것 같을 때 있었지”(「쇠똥구리별」). 지나온 어떤 시절에 관한 이 회상은 실은 손택수가 고향을 떠나온 이후의 모든 시간을 관통하는 설명이다. 별다른 선입견은 없었으나 사람들과 세계에 대한 감각이 이미 형성된 아이가 낯선 도시에서 맞닥뜨린 삶은, 기약없이 연장되는, 외롭고 슬픈 이방인의 임시 체류였다. 이런 맥락에서 손택수의 시는 농경사회와 산업사회, 전근대와 근대가 불시에 마주친 가운데 이루어져야 했던 불가능한 성장의 기록이며, 아이러니하게도 그 속에서 억압받은 사람들의 상처를 통해 확보될 수 있었던 근대의 암울한 내면풍경이다. 마사 너스봄(Martha Nussbaum)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충만한 목소리로 인간의 역사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하는 심오한 사회·역사적 조건들과 운동들을 발견해야 하”며, 좋은 문학작품을 통해 “인간 노력의 온전한 세계, 즉 오직 그 속에서만 정치가 완전하고도 온전한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삶의 ‘진정한 실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2) 의도한 바 없이 손택수는 이러한 사회·역사적 조건들과 운동들을 발견하고 삶의 ‘진정한 실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인간 역사에 관한 ‘충만한 목소리’의 한줄기를, 일찌감치 찢겨져버린 자신의 삶 속에서 ‘영원’에 맞닿은 아득함의 감각으로 감지한다.

 

저물녘 쿨럭이는 슬레이트 지붕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아이

제가 평생을 기다리고 있는 건 저녁이 올 때까지 하염없이

무엇을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림 속에 빠져 있던

그 외로운 아이인지도 모릅니다

기다리는 일 하나만으로도 참 멀리 갔다 온 듯합니다

이걸 영원이라고 불러도 좋을지요

언젠가 저도 저 산등성이를 밀며 가는 구름을 따라 흘러가겠습니다

—「살구나무 그림자가 바위를 미는 동안」 부분

 

아이에게 기다림의 영원성을 알게 한 장소인 “저물녘 쿨럭이는 슬레이트 지붕”은 “저 산등성이를 밀며 가는 구름”의 환유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원점에는 “배추, 고추, 상추, 푸성귀밭의/식물과 곤충이란 것들이/그렇게 다들 한통속이었”고, “그걸 먹고 사는 사람도 순하디순한 소처럼/철퍼덕, 철퍼덕, 차진 똥을 누며/식물과 곤충과 혈연으로 두루/일가를 이루었”던 ‘대가족제도’의 자연-마을 공동체가 있다.(「쇠똥구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 『호랑이 발자국』) 식물과 곤충과 사람의 몸은 서로에게 열려 함께 살아가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몸 밖의 공간과도 허물없이 이어져 있다. 여기는 존재와 장소, 신체와 세계가 동등하게 환치되는 세계, 서로가 서로를 넉넉히 대행하는 세계이다. 한평생 고달픈 노동에 헌신해온 농부의 굽은 등, 그 기울기에 맞추어 평생을 쓰러져간 나무의 둥치는 자연-마을 공동체의 삶과 역사를 고스란히 저장한 존재이자 장소이며 신체이자 세계다.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이 곧 자신의 확장된 신체’라는 손택수의 신체관 혹은 세계관이 그가 뼈와 살로 체득한 자연의 섭리를 농축한 것임을 알게 한다.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가 간파했듯이 장소를 ‘나-당신’(I-Thou) 관계로 경험하는 것은, 사람과 장소를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전체적이고 무의식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3) 손택수는 존재와 장소가 서로에게 기쁘게 흘러들며 봉헌되는 세계를 “다시 눈부시게 만나는 한때”를 꿈꾼다. 그리고 그 순간이 자신의 생의 최종 목적지임을 명기해둔다. 「붉은 거미」(『호랑이 발자국』)에 그려진 것처럼, 살아 있는 것들이 같은 굴곡으로 쓰러지며 마침내 이르게 될 “어느 먼 곳”은, 모든 생명체와 만물로부터 존재-장소를 박탈해 무존재와 무장소성의 세계를 건설하고 있는 근대의 행진을 통해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이다. 손택수는 이 균열의 갈림길 앞에 서는 난감한 일을 중단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 갈림길이 끝없이 나뉘는 두 길이 아니라, 만남과 헤어짐이 불규칙하게 반복되는 미로라는 점에 있다. 한편에는 자연을 유기적이고 미학적으로 재현하려는 부드러운 유혹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것이 불가능하거나 무용한 일임을 단언하는 냉엄한 현실이 있다. 한쪽에는 자연이 드러낼 듯 감추고 감출 듯 드러내는 마술적 진경을 받아쓰는 담백한 언어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오염된 자연의 실재와 미감을 노래하는 일은 성립되지 않으며 허상과 기만을 내포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하는 통증의 언어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사안이 한번에 완수해야 할 선택이나, 한쪽이 다른 쪽을 지우는 배타성의 논리로 사유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연-마을 공동체의 세계로부터 우리의 삶이 여전히, 또 앞으로도 내내 계승하고 배워야 할 것은 적지 않다. 근대는 근대적인 것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그 안에는 변형되고 변주된 형태일지라도 근대가 축출한 다른 것들이 끈질기게 작동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는 이 이질적인 생명력과 혼돈까지를 포함해서 근대다. 존재와 삶의 온전함에 관한 기억을, 현실의 전체성과 광대함에 반응하는 능력을, 인위적 욕망과 손쉬운 만족을 지양하고 자신의 개체성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을, 채움이 아니라 덜어냄으로써 피어나는 여백과 무미(無味)의 세계를 간단히 포기할 수는 없다.4)

 

실제 경험과 시, 삶과 시, 언어와 삶이 11로 대응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치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지요. 그러니 감히 살아온 대로 썼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삶과 시가 일치하지는 못할망정 일치하려고 노력하는 지점은 있겠지만. 물론 어떤 지점에서는 삶 자체가 언어적인 기획을 넘어서서 스스로 형식이 되어서 육박해오는 지점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 시편들이 올 때 작가는 또다른 절망에 이르게 됩니다. 삶이 곧 시 자체가 되었다고 한들 가만히 짚어보면 그 안에는 언어가 되지 못하는 지점들이 잔여처럼 남아 있게 마련이거든요. 언어기호 자체가 사물을 대신하지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잔여로 남아 있는 세계는 또다른 상처를 발생시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상처가 시를 또 쓰게 하는 풍요로운 수원지가 되지요. 창상(創傷)이라는 말 자체가 상처와 창조는 한 뿌리라는 뜻이잖아요. 삶이 시가 되는 순간 또다른 상처가 발생합니다. 이 상처는 또다른 상처와의 만남을 통해 대화적인 국면 속으로 건너가게 되고 더 큰 상처와의 연대를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요. 더 큰 상처를 만나면 더 큰 승화가 이루어지니까요.

가령 어릴 적 기억을 다룬 「흰둥이 생각」(『나무의 수사학』)이란 작품 속 소년은 완전 허구적인 인물이에요. ‘흰둥이’도 원래는 ‘검둥이’였지요. 이 강아지 한마리가 제 무의식 속 트라우마였나봅니다. 가장 외로웠던 시절에 고아처럼 가족과 헤어져 살던 무렵의 저를 따라다니던 강아지가 생각났어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을 테죠. 그런데 강아지를 마주한 순간 제 가족사와 유년기가 동시에 떠올랐습니다. 행복했던 유년기와 불우했던 소년기를 추적하다보니 우리의 가족사를 둘러싼 1970년대의 근대화 풍경까지 생각이 뻗치게 되더군요. 홀로 귀향해서 가족을 그리워하던 소년의 슬픔은 결국 도시로 도시로 밥벌이를 위해 떠난 그 시대의 신산한 풍경들과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제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었고 우리 사회를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지요. 근대화를 위해 가장 연약한 사회단위인 가정이 결국 국가가 방기한 책임을 다 떠안았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 희생하에서 이루어진 것이 상처투성이 근대화입니다. 개인의 분열과 상처가 세계의 상처와 만나는 지점을 저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어릴 때 꿈이 뭐냐고 물으면 농부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이들도 학교 선생님들도 많이 웃었을 거예요. 제 선친도 농사짓기 싫어서 고향을 떠났으니 그런 꿈은 아예 꾸지 말라고 그러더군요. 농업과 열등 인생을 연결짓는 근대사를 우리는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농()자는 별과 노래가 결합된 말이잖아요. 이렇게 아름다운 산업이 어디 있겠습니까. 서너살 때 아마 첫 모내기를 했을 거예요. 몰캉하게 발바닥 깊숙이 들어와 박히던 대지의 느낌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어쩌면 발바닥이 오목하게 파인 건 지구별을 더 깊숙이 끌어안기 위함인지도 모릅니다. 좀더 자라서는 밭에서 할아버지 지게 작대기로 모국어를 익혔어요. 「자음」(『목련 전차』)이란 시에 쓴 그대로입니다. 한 글자 쓰고 나서 하늘이 떠나가라 소리를 치며 익혔으니까 몸과 언어와 대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제겐 언어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생명활동 그 자체로 다가왔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있어요. “농부들의 움직임은 아주 느려서, 마치 느리게 도는 별들이 그와 함께 움직이는 듯하고, 농부의 궤도와 별의 궤도가 서로 겹치는 것 같다.”5) 이런 글을 읽을 때 제 가슴은 뛰고 또 통증을 느낍니다. 농부는 되지 못하고 시인이 된 제게 이제 농() 자는 별과 노래의 이별노래가 돼버린 것 같아요. 별과 노래의 캄캄한 골짜기를 품고 메아리를 기다리고 있다고나 할까요?

 

3

내가 살아온 이야기가 곧 공동체 서사의 인상적인 일부가 되는 것은 문학적으로는 행운이다. 그것이 거대한 변화와 변혁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 말할 것이 없다. 손택수가 지금까지 펴낸 네권의 시집에서 ‘나’의 이야기는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등의 가족 이야기를 파생하며, 감수성과 가치관, 생활 등에 관한 공동체적 서사의 디테일을 구축해왔다. “가족사 내부에서 개인의 기억은 홀로 존재하거나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형태로 보존된다. (…) 손택수는 이러한 미적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앓음’들을 세상을 향한 공공의 영역으로 옮겨낸다. 이 세계의 물신(物神)을 비켜나가는 과정에서 이 공공의 영역은 더없이 소중하고 따듯한 시인의 은신처가 된다”.6) 손택수 시의 특장은 이 공공의 영역을 농경사회의 ‘오래된 미래’(그가 이 지평에서 처음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에 한정하지 않고, 근대적인 생활세계의 현재형으로 계속 다시 쓰고자 하는 점에 있다. 그가 겪어온 삶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이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지금도 계속 촉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송장뼈 이야기」(『호랑이 발자국』)에서, 어린 시절 ‘나’는 구전되는 민간의약품인 ‘송장뼈’ 덕에 머리에 난 부스럼이 말끔히 나은 일이 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위해 송장뼈를 구해온 곳은 그가 일하던 경부고속도로의 건설현장이었다. ‘송장뼈’의 출처가 근대화의 포크레인에 파헤쳐진 공동묘지/건설현장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송장뼈’는 자본의 계산법으로는 흉물스럽고 쓸모없는 폐기물에 불과하지만, 마술적인 자연의 시선으로는 고통스러운 병을 단번에 낫게 하는 명약이 된다. 나아가 “진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세상의 썩은 머리 속”을 “한 됫박의 소금처럼” 살균해줄 정화제로 지명되기도 한다. ‘송장뼈’는 자본의 위력이 지배하는 산업사회(아버지)와 자연의 힘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농경사회(할머니)에 걸쳐 있는바 ‘나’는 신체의 변형-병증인 부스럼과 신체의 변형-죽음인 ‘송장뼈’를 통해 두 세계가 기묘하게 연접되는 경험을 한다. 그로부터 손택수가 얻은 것은 경이로운 치유의 체험이며, “이 세상이 썩어서 아주 절단이 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런 송장뼈들 때문이 아닐까”라는 믿음 내지는 희망이다.

 

‘파악된 것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엘뤼아르(P. Éluard)의 시구로 기억합니다. 시는 어떤 의미에서 파악할 수 있는 영역과 파악되길 끝없이 거부하는 영역을 동시에 지닌 장르입니다. 자유로운 정신은 아는 길로만 다니진 않겠지요. 공들여 쌓은 성도 스스로 무너뜨리고요. 사실 쌓는 재미도 있지만 무너뜨리는 재미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비평적 도식을 넘어서서 말할 수 없는 영토에 대해 끝없이 말하고자 할 겁니다. ‘농경문화적 상상력’이니 ‘오래된 미래’니 이런 비평적 수사가 올가미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에요. 어떤 이원론적 시선이 독법으로 선택될 때 여러 가능성의 영토들이 힘없이 추방당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요. 물론 제가 그런 자의식에 값하는 작품들을 선보였는지는 다른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하여간, 가능한 한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자로서 우연성을 향해 한껏 자신을 열어젖히는 지점에 서 있을 때 시의 숨통이 트인다는 느낌입니다.

 

목련이 도착했다

한전 부산지사 전차기지터 앞

꽃들이 조금 일찍 봄나들이를 나왔다

심하게 앓고 난 뒤의 머릿속처럼

맑게 갠 하늘 아래,

전차 구경 와서 아주 뿌리를 내렸다는

아버지 어머니도 그랬겠지

꽃양산 활짝 펴 든

며느리 따라 구경 오신 할아버지도 그랬겠지

나뭇가지에 코일처럼 감기는 햇살,

저 햇살을 따라가면

나무 어딘가에 숨은 전동기가 보일는지 모른다

전차바퀴 기념물 하나만 달랑 남은 전차기지터

레일은 사라졌어도,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레일을 따라

바퀴를 굴리는 힘을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목련 전차」(『목련 전차』) 부분

 

‘송장뼈’의 이중적 면모는 「목련 전차」에서 ‘목련’과 ‘전차’로 변주된다. 전차의 동력과 시스템으로 이미지화되는 목련, 목련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에 기대어 스케치되는 전차(기지터)는 “아름다운 것은 윤리적”이라는 쑤전 쏜택(Susan Sontag)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손택수가 갈망하는 세계의 구도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전차-목련 혹은 목련-전차가 상상력과 가치관, 일상생활과 사회구조 등의 다양한 층위에서 호환되는 세계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손택수의 삶은 물론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의 삶이 복합적으로 녹아들어 있으며, 그 삶들이 미래의 당위적 차원에서 계속 소환되며 재구성되고 있다. 그러나 ‘목련’과 ‘전차’가 별개로 나뉘어 각자의 길을 걸어온 것이 근대의 역사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근대 초기 문물의 상징인 ‘전차’가, 피었다가 이내 사라지는 목련과 같은 운명을 겪었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다. “레일은 사라졌어도, 사라지지 않는/생명의 레일을 따라/바퀴를 굴리는 힘을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주어는 ‘목련’과 ‘전차’ 둘 다이며, 둘 다여야 한다. ‘목련’과 마찬가지로 ‘전차’도 사라지지 않는, 사라져서는 안될 생명력의 주어가 되어야 한다. 손택수는 인간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으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생명력 넘치는 세상에 대한 꿈을 ‘목련 전차’의 메타포로 압축한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근대문명 전체를 상징하는 넓은 의미의 ‘전차’가 ‘목련’의 세계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며, 공생과 거듭남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사라지지 않는/생명의 레일을 따라” 피고 지는 목련-전차가 운행되고, 자연과 문명, 근대 이전과 이후가 생명의 레일로 이어져 있는 삶의 공간. “떨어져내리는 잎사귀 잎사귀마다/빛나는 통증으로 하늘과 이어져 있”음을 아는, “천문을 품고 있”는 “상할머니의 몸”(「구름의 가계」, 『목련 전차』)과 “별들의 신호를 알아듣고 씨를 뿌”리면 “씨앗들도 알아듣고/최대의 發芽를 이루”는 “문중 대대로 내려온 농법”(「달과 토성의 파종법」, 『목련 전차』) 등의 귀한 유산을 이어가는 사람들. 손택수의 ‘목련 전차’는 이러한 세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열망과 좌절의 시간들을 싣고, 나날이 더 거대해지고 황량해지는 자본의 제국의 외곽을 힘겹게 유랑한다.

 

등단 후 지방에서 첫 시집을 내려고 했습니다. 원고청탁도 없고 아는 출판사도 없고 그저 막막하기만 했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2001년인가 『신생』 창간 편집장을 하면서 동인들 배려로 신작시 집중조명란을 얻게 되었어요. 이걸 보고 창비 편집자가 작품을 몇편 보내보라는 뜻을 전해왔습니다. 정식 청탁은 아니었지만 저로서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이때서야 비로소 시단 말석에 진입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 편집진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작품을 두어번 더 퇴고를 한 뒤에서야 비로소 발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송장뼈 이야기」 등이었을 거예요. 그 이후에도 무슨 특별한 약속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그냥저냥 내려던 시집 원고를 다시 구성하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경험이 제게는 각별했습니다. 시를 쓰는 작업과 시집을 묶는 작업이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종의 연출도 해야 하고 시들을 배우 삼아 동선도 새로 짜면서 자연스럽게 좀더 저다운 어법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가족’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가족’ 이야기를 쓴다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닙니다만, 적어도 제 자신에겐 덜 부끄럽게 느껴졌거든요. 그렇게 재구성한 원고를 계간지 발표를 인연으로 무작정 창비에 보낸 겁니다. 그후에도 아마 두어번은 더 개고를 한 걸로 기억합니다. 기다리기 힘든 시절이었는데 그때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제목은 고형렬(高炯烈) 선생이 지어줬습니다. 『호랑이 발자국』, 흔적으로만 남은 설화적 세계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 제목이 저의 첫 꼬리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다음 시집이 『목련 전차』였거든요. 자연과 인간이 적극적 미분화 단계에 머물러 있는 설화적 복합체로부터 고향을 떠나 도시노동자로 편입된 저희 부모님 이야기가 그 시집에 집중적으로 실려 있습니다. 말하자면 ‘목련’과 ‘전차’가 동거하고 분열하는 갈등의 공간을 염두에 둔 셈이니 앞 시집과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다음 『나무의 수사학』은 주로 서울 근교를 떠돌면서 지낸 십년 동안의 제 기록입니다. 제국주의 시절엔 나라를 잃고 유랑민이 되었지만 이제는 자본의 유랑객이 되어 떠돌아야 합니다. 어느날 뿌리가 뽑혀서 공원으로 가는지 새 아파트단지로 가는지 모를 일군의 나무들이 트럭에 실려 가는 걸 보았는데 그게 꼭 제 처지 같더라니까요. 나무가 나무로 있으면 행복할 것을 어울리지 않게 수사법을 써야 하니 얼마나 고역이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시집 세권을 가족 삼대로 구성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도 ‘가족시’의 범주에서 논해주진 않았지만 쓰다보니 저도 모르게 그런 흐름이 복류천처럼 숨어 흐른 것 같습니다.

 

4

산업사회와 도시가 탄생시킨 압도적인 생산물의 하나는 ‘먼지’다. 먼지는 털어내도 계속 쌓이며, 점점 더 짙은 농도로 회색빛 도시의 빈틈을 점령한다. 먼지는 도시가 생산의 공정에서 만들어내는 부산물이며, 도시의 생산이 곧 파괴임을 증명하는 증거물이다. 먼지는 극히 미미하고 무가치하며 심지어 해로운 이물질로, 보잘것없음과 비위생과 공해와 죽음 등의 표상이 된다. 「나무의 수사학 3(『나무의 수사학』)에는 두 종류의 먼지가 그려져 있다. “아직 눈을 감지 못하는” “불과 재의 시간을 지나온 먼지 한점”과, “쿨룩쿨록 잠든 내 몸속을 하얗게 떠돌아다니는” ‘나’의 “숨결을 타고 들어온 먼지들”이다. 용산참사(2009)를 뚜렷이 환기하는 “불과 재의 시간을 지나온 먼지 한점”은 근대의 개발과 생산의 공정에서 희생된 목숨들의 환유이자 그 현재형의 실체다. ‘내 숨결을 타고 들어와 몸속을 떠도는 먼지들’은 힘겨운 노동과 일상을 반복하는 소시민의 환유이자 그 오염된 몸의 실질적인 일부이다. 그렇다면 폭력과 죽음과 착취가 공공연히 난무하는 먼지의 땅에서 ‘나무의 수사학’은 어떻게 설계될 수 있을까. 적어도 당분간은 “사라져버”리고, “다시 들리는 것도 같”으며, “으깨”지는 형태로 가설(假設)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손택수의 생각이다. 지금과 앞으로도 얼마동안 ‘나무의 수사학’은 ‘먼지’를 뒤집어쓴 형태로 씌어지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나무의 수사학’의 다른 이름은 ‘먼지의 수사학’이거나 ‘먼지의 진술서’다. 손택수의 시세계가 최근으로 올수록 ‘나무’에 거리를 두고 나무를 뒤덮고 있는 ‘먼지’들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이런 내막에 의한다. 애초에 손택수는, “해마다 번연히 실패할 줄 알면서도/가슴속에 호랑이 발자국 본을 떠오는 이들”(「호랑이 발자국」, 『호랑이 발자국』)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시적 정체성을 기록해둔 바 있다. 신화적인 세계를 향한 아름답고도 ‘번연한 실패’에 손택수는 다시 피폐하고 ‘번잡한 실패’를 대응시킴으로써 ‘나무-먼지의 수사학-진술서’를 새로이 써나가고자 한다. 가령, “이름을 통해서 만”나 “이름 때문에 한몸이” 되고, “다시 이름을 통해서 헤어”져 “이름 때문에 남남이” 되었으나, “어쩌면 애초부터 나무는 나무였고/나는 나였던 것뿐이었는지도 모른다”(「목도장」, 『목련 전차』)라는 수사-진술은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 동일성의 사유와 미학의 간극을 함의하면서 그의 두번째 시적 출발을 예고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시서화(詩書畵)로 일세를 풍미했던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어떤 이가 시를 빨리 짓는 법을 묻자, “구름이 흘러가고 비가 오며, 새가 우지지고 벌레가 우는 것이 모두 마음에 관계되지 않는 게 하나도 없다. 길을 가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이것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된다. 이에 따라서 생각의 길이 트이고 예리해진다.(雲行雨集 鳥蟲吟 無一不關涉於心 行住坐臥 未嘗暫忘於是 從此思路闊利)”라고 답했어요. 조희룡의 말처럼 마음에 관계되지 않는 사물은 하나도 없지요. 마음이 닫힐 때 세상도 닫히고, 마음이 열릴 때 세상도 열립니다. 사랑은 결국 각질화되기 쉬운 마음을 언제든 교감 가능한 반응체로 만들어놓는 작업이겠지요.

어떤 대상을 누구보다 오래 그리고 지극하게 바라보면 그 대상이 놀랍게도 종국엔 저 자신을 보여줍니다. 자기들을 보고 있는 ‘나’를 볼 수 있게 해준다는 말이지요. 실제로 저는 나무 한그루를 삼년 동안 관찰한 적도 있습니다. 삼년이면 그 나무와 저 사이에만 있는 어떤 비밀이 생기고도 남을 시간입니다. 식물사전이나 인터넷 지식검색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유일무이한 우주적 사건! 반복할 수도 없고 복제할 수도 없는 서로에 대한 그런 집중을 통해 빛나는 고독의 지평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고독은 일상적인 순행적 시간질서와 균질적 공간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 분리시키는 특별한 경험을 가능케 합니다. 이런 경험 속에서 우리는 굳이 수고로운 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얼마든지 낯선 여행 체험을 하게 되지요. 여행을 하는 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새롭듯 고독과의 만남을 통해 세계는 비로소 싱싱해져요. 은폐되어 있던 사물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그를 둘러싼 세계와 내가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고독은 하나의 이파리에 시선을 비끄러맨 채 숨결을 고르게 다독이는 시간을 갖는다는 말이기도 하면서 붐비는 자신의 내부로 맑은 못물 같은 침묵이 흘러들어오게 하는 시간 그 자체가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이 빛나는 고독을 방해하는 번잡한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고독을 병균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질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야 물건이 팔릴 테니까요. 이번 시집에서 제가 맞닥뜨린 일상들은 「녹슨 도끼의 시」의 ‘녹’이었고, ‘떠도는 먼지들’이었으며, 「돼지껍데기 젖꼭지를 물고」의 ‘껍데기 같은 비루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일상이 구체적인 시의 육체로 편입되면서 시의 형식이 파열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유기적인 구조의 서정성이 일상의 잡음들과 만나면서 이슬에 핏빛이 어렸다고나 할까요. 핏물을 안고 잔뜩 응등그린 모습이 제가 보기에도 짠합니다. 꽃도 식물도 다 일그러져 있고 아름답기보단 통증으로 욱신거립니다. 오죽하면 「꽃들이 우리를 체포하던 날」 같은 시를 써야 했겠습니까. 자연은 무한한 상상력의 원천이고 제가 돌아가야 할 원형으로서의 원소들이지만 자연에 촉발된 서정은 제게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떠도는 먼지들’이 ‘빛나는’ 지평을 열어준 게 죽음입니다. 주로 2부에 실린 작품들인데 육친을 상실한 기억들을 육화한 작품군입니다. 시집을 묶고 보니 3부부터 작품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도 그와 관련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저는 3부의 서시인 「꽃벼랑」 같은 작품에 자꾸 눈이 갑니다.

 

한번 더 생각해보면, ‘먼지’는 ‘흙’의 입자이다. 모든 생명과 사물이 흙으로 돌아가는 중간 과정의 미세한 분해물이다. 먼지의 위상과 쓰임은 또 있다. 생계를 위해 세상 여기저기를 헤매며 일한 이의 신발에 뽀얗게 쌓인 ‘먼지’는 노동의 수고와 신성함을 말해주는 징표이다. 자연의 들판에서 일한 농부의 옷과 신발에는 ‘흙’이 묻어 있고, 도시의 번잡한 일터에서 일한 노동자의 옷과 신발에는 ‘먼지’가 묻어 있다. 전혀 다른 질료와 가치로 판별되어온 ‘흙’과 ‘먼지’는 이처럼 본질적으로 강한 유사성과 친연성의 관계에 있다. 그러고보니 ‘흙’과 ‘먼지’는 각기 ‘목련’과 ‘전차’의 계열에 속한다. 「한 켤레의 대지」에서 ‘먼지’는 ‘목련-전차’의 세계가 어떻게 현대의 일상에서 구축될 수 있는가에 관한 하나의 예를 보여준다.

 

발에 꽉 끼는 신발은 감옥 같아, 뒤꿈치를 꾸겨 신었다

(…)

저녁이면 바짝 당겨졌던 길은 끈을 따라 느슨하게 풀어지고

부은 발을 감싸던 가죽 위엔 흙먼지가 앉겠지

아마도 곤한 여정 끝에 흘린 땀이 풀썩이는 먼지들을

젖은 가죽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 까맣게 뭉친 빛을 내겠지

그 빛 속으로 태양과 바람과 비구름이 스며들어서

내 맞춤형 신발이란 마침내 한켤레의 크고 헐렁한 대지,

그리하여 나는 소금쟁이처럼 연못도 강물도 신어보고

떠가는 목선을 신고 수평선을 넘어도 보리라

—「한켤레의 대지」 부분

 

‘흙’ 즉 ‘대지’가 ‘먼지’의 거대한 집합체임을 깨달으면서 손택수의 시는 현실의 고통과 낭만적 환희가 섬세하게 직조되는 차원으로 나아간다. 하루의 “곤한 여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저녁에 노동자-생활인-시인은, 먼지를 대지로, 땀에 젖은 낡은 신발을 연못과 강물과 목선 들로 바꾸는 마법(?)을 펼친다. “곤한 여정 끝에 흘린 땀이 풀썩이는 먼지들”이 내는 “까맣게 뭉친 빛”을 빌려 “마침내 한켤레의 크고 헐렁한 대지”를 신발 삼아 “연못도 강물도 신어보고/떠가는 목선을 신고 수평선을 넘어도 보리라”. 인용 부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손택수가 “제 문수에 맞지 않는다는 듯/땅거죽을 뚫고 올라와 발꿈치를 내민 나무들처럼/여전히 신발 뒤축을 꾸겨 신는 버릇을 버리질 못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발 뒤축을 꾸겨 신는 버릇”은 “발에 꽉 끼는 신발”의 “감옥 같”은 세계를 거절하는 표현이며 행위다. ‘먼지’가 ‘빛’을 내며 순식간에 ‘대지’로 확대되는 비밀은, 생명의 대지를 끊임없이 죽음의 먼지로 분해하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계속 직시하는 데 있다. 난데없이 “밥버러지”로 불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는 생활의 나날 속에서, “마빡 깨어지면서도 절벽을 쓰다듬는” “폭포를 삼킨 모기”의 사투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폭포를 삼킨 모기」).

 

쌍용차 희생자 분향소가 있는 덕수궁 대한문 앞

식목일 새벽에 중구청이 분향소를 철거하더니

그 자리에 화단을 만들었다

사연도 모르고 마냥 해사하게 피어난 꽃들이라니

하긴, 방학 동안 철거용역 알바를 하고

학비를 마련하는 대학생들도 있다고 한다

졸업을 해도 취직은 되질 않고

대출받은 학자금 이자 갚느라 결혼도 미루면서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학생을 나도 안다

(…)

나는 함부로 돌멩일 던질 수가 없는데

아무래도 꽃의 죄까지 엄히 따져야 할 시대가 닥친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화단으로 들어가면 즉석에서 현행범으로 체포한다는

펜스를 치고 철야경비까지 서는 대한문 앞에서

—「꽃들이 우리를 체포하던 날」 부분

 

“찡그리면서도 꽃은 피”고 “실은 찡그림마저도 피어나 꽃”이며(「꽃벼랑」), “꽃이 피면 죽는 게 아니라/죽음까지가 꽃이다”(「대꽃」). 꽃의 모든 여정을 ‘꽃’이라 부르는 손택수의 다시쓰기는 ‘흙/대지’와 ‘먼지’, ‘목련’과 ‘전차’가 이어지는 길이 결코 평탄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두 세계의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망명할 수 없으며 두 세계를 온전히 살아낼 수도 없는, 어느새 이미 분리 불가능해져버린 ‘세계들’(복수로만 존재하는)의 시민인 손택수—이는 그의 운명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운명이다—에게 시를 쓰는 일이란, 지나온 길의 폐가에 남겨진, “먼지를 풀썩이며 조용히 미쳐가는”, “금이 가거나, 깨어진/거울조각을 품”는 일일지도 모른다(「버려진 집 속에 거울조각이 있다」, 『호랑이 발자국』). 혹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의 “가도 가도 닿을 수 없는 타향살이”, “제자리걸음으로 천만리를 가는 별”과 “떠난 적도 없이 끝없이 떠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바위”의 여정을 묵묵히 이어가는 일일 수도 있다. “명소란 명소는 다 돌아다녀봤지만/흔들리는 꽃 한송이 앞에도 당도한 적 없는 여행자”. 손택수는 자신을 ‘탕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탕자의 기도」). 그가 탕진한 것은 ‘세계들’ 속의 지난한 여정을 위해 아낌없이 바친 ‘시’이며, 그가 이룩한 것 또한 이 여정에서 ‘찡그리며’ ‘죽음까지를’ 꽃피우고자 한 ‘시’이다. 농투성이의 ‘흙/대지’의 삶에서 도시노동자의 ‘먼지’의 삶에 이르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이 빛날 수 있는 것은 청결하지 않은(?), 떠도는, 무한히 탕진해도 좋은 시의 덕분이다.

 

최근에 회사를 그만두고 아무도 주지 않은 안식년을 제 자신에게 주었습니다. 근 십년 동안 출판업을 했는데 단 한권의 책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는 자괴감과 시인으로서의 무력감이 스스로 절벽 앞에 서게 한 셈입니다. 더는 현장의 시인으로 있을 수 없겠다는 두려움, 망각의 공포가 회초리를 들었지요. 만 4년 만에 네번째 시집을 냈는데 다음 시집은 좀더 서두를 계획입니다. 처음으로 기획이라고나 할까, 어떤 의도적 단절을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번 시집이 앞 세권의 시집과 이후를 구분짓는 마디가 되겠지요. 제가 대나무의 고장에서 태어났잖아요. 대나무는 마디에서 새 가지가 올라옵니다.

고향 이야기로 마무리짓고 싶습니다. 담양에선 양반들의 정자와 무지렁이 농투성이들의 정자를 분리해서 불렀어요. 면앙정, 식영정처럼 8부 능선 위에 올라가서 평야를 내려다보는 지체 높은 정자가 있는가 하면 그냥 평지에 납작하니 엎드린 정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름 없는 정자를 시정(詩亭)이라고 불렀어요. 제가 면앙정 앞마을에서 태어났거든요. 시는 면앙정에 가야 있고 정작 시정엔 시가 없었는데도 굳이 ‘시’자를 붙였습니다. 시 읽는 소리라고는 들판을 핥고 가는 바람, 시구라고는 장바구니를 들고 나와 군내 버스를 기다리던 아낙과 들일을 마치고 와서 쉬는 노인밖에 없었는데 말입니다. 시란 시는 모두 지체 높은 정자로 보내고 농투성이 마을에 내려와서 자신이 시인 줄도 모르고 시가 된 정자가 제게는 시정이었습니다. 문자로서의 시와 불립문자로서의 시 사이를 오르내리면서 저는 또 미래의 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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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에서 다루는 손택수 시집은 다음과 같다. 『호랑이 발자국』(창비 2003), 『목련 전차』(창비 2006), 『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 2010),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창비 2014). 이 가운데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의 수록작을 인용할 경우 시 제목만 밝힌다.

2) 마사 너스봄 『시적 정의』, 박용준 옮김, 궁리 2013, 158면.

3)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논형 2005, 172면.

4) 다음의 통찰을 참조할 수 있다. “우리가 피상적 유혹을 멀리하고 편파성을 피할 때, 지나치게 즉각적이고 제한된 일을 꾀하지 않을 때(다시 말해 중용의 가치를 지킬 때), 우리는 현실의 전체성에, 그 광대함에 반응하는 능력을 온전히 견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세계에 대한 우리의 참여는 진정한 것이 되며 우리는 온 우주와의 연관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관적 시각에서 담()은 인위적 욕망의 기대를 무산시키고 손쉬운 만족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며 우리로 하여금 관심의 범위를 넓히게 한다는 점에서 건전하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넘어서게 한다.”(프랑수아 줄리앙 『무미 예찬』, 최애리 옮김, 산책자 2010, 106면)

5)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최승자 옮김, 까치 2010, 142면

6) 박준 「울지 않으려 부르는 노래」,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발문, 12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