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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 제4회 사회인문학평론상 수상작

 

변신하는 리바이어선과 감정의 정치

 

 

박가분

1987년생. 고려대 경제학과 대학원 재학중. 저서로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 『일베의 사상』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 등이 있음. paxwonik@naver.com

 

 

1. SNS와 반응사회

 

『피로사회』(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012)라는 저작이 인문학 저서로서 이례적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사회’라는 유사한 저작이 줄을 잇고 있다. 이는 그만큼 독자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상에 대한 진단과 방향제시에 목말라하는 방증이다. 김종엽(金鍾曄)은 이러한 세태를 “사회를 말하는 사회”1)라는 개념으로 반성적인 차원에서 규정지은 뒤 사회구조의 역사적 변천을 등한시한 채 남발되는 시대규정이 인상비평의 나열과 일면적인 분석에 그칠 것을 우려한다.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서, 본고에서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모바일폰의 보급으로 네트워크사회에 진입한 현재사회의 모습을 ‘반응사회’로 규정한다. 이는 인터넷과 SNS를 매개로 사안에 대한 분노와 공포 등 정념발산이 ‘자기목적화’된 사회를 묘사한다. 본고는 ‘감정의 전염성’으로 특징지어지는 네트워크사회에서 ‘사상(思想)’을 통한 시대적 진단과 대안제시가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위기의식에 가득 찬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여기서 반응사회란 사상의 존립기반의 변화 및 위기를 근저에서부터 추적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도입된 용어규정이다.1)

세대갈등이라는 계기에 주목하며 『88만원 세대』(우석훈·박권일, 레디앙 2007)가 제기한 담론은 “사회를 말하는 사회”의 범례로서 세대갈등을 둘러싼 좀더 넓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인식에 소홀했다는 유사한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것은 젊은이의 자립적인 사회운동을 촉구하는 ‘사상’으로서는 유효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저자 우석훈(禹晳熏)은 한편에서 SNS와 인터넷 상에서 표출되는 젊은이들의 분노를 추수하며 ‘짱돌을 던져라’라는 식의 의지주의로 치닫다가 2012년 실망스러운 선거결과로 “내가 20대가 싸우지 않을 핑계를 제공했다”며 돌연 절판선언을 감행하는 등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는 저자의 모순된 반응에 주목하며 한명의 유명논객이 일관된 방식으로 시대의 변화를 포착하고 대안을 제시한다는 ‘사상적 임무’를 더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사태를 목도하게 된다. 여기서 세가지 물음이 떠오른다. (1) 오늘날 사상적 임무는 무엇인가? (2) 누가 그것을 떠맡을 것인가? (3) 사상은 어떠한 형태로 변용되어야 하는가?

이 세가지 문제에 묻고 답하기 위해 우선 근대사상 자체가 어떤 ‘신화적 이미지’에 입각해 있었는가라는 물음을 경유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사상적 임무를 재정식화하기 위해 예비적으로 근대사상이 뿌리내리고 있던 신화적 이미지의 역사적 변천을 다소 거친 방식으로라도 추적할 것이다. 그 이후 우리는 원래의 질문에 대한 잠정적인 답변에 이를 것이다.

 

 

2. 근대의 신화 리바이어선,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

 

이미지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정념을 환기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17세기 중반 막 출현한 근대국민국가라는 정치형태를 사상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리바이어선’(Leviathan)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리바이어선은 페니키아 신화에 등장하는 사나운 바다 괴물로서 아홉개의 꼬리를 지니고 불을 뿜으며 바다와 하늘에 군림하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성서와 유대교 신화에도 등장하는 이 괴물은 하느님에 대항하는 악마적 존재로 묘사되었다. 한편 그것은 홉스가 1651년 출간한 책의 제목이다. 거기서 그는 교회와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이제 막 자립한 국민국가가 이권과 종교를 둘러싼 내전의 ‘공포’에 의해 강요된 계약의 산물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리바이어선』은 국민국가의 기원에 자리잡은 ‘신화’가 되었다. 국민국가라는 정치구조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신화’로 취급하는 논자들도 이 책의 신화적 지위에 주목한다. 오늘날 국민국가가 과거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고 국민국가를 넘어선 사회적 결속을 모색하는 방향도 있다. 이 모두 리바이어선이라는 이미지에 국민국가의 존재이유를 명확히 집약시킨 홉스와 반대로 국민국가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의 복잡성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국민국가를 긍정하든 혹은 공동체와 개인의 자율성을 구하며 그것에 대항하든 두 길항력 모두 리바이어선이라는 이미지의 자장 안에 존재한다. 어느 경우든 국민국가를 둘러싼 신화, 즉 국민국가를 하나의 ‘자립적인 정치적 실체’로 간주하는 신화의 두 얼굴이다. 그렇다면 근대사상의 기저에 있는 이 신화의 정체는 무엇인가?

잠시 우회하면, 이데올로기 비판이나 민속사회학의 문맥에서 논의된 신화 개념을 새롭게 사고하는 일본 사상가 후꾸시마 료오따(福嶋亮太)의 논의를 참조할 수 있다. 『신화가 생각한다』(기역 2014)라는 저작에서 그는 신화의 역할을 네트워크사회의 문맥에 접한다. 연결성이 심화된 현대사회에서 신화란 네트워크상의 의사소통을 집약하여 정보량을 감축하는 ‘게이트’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익명성과 무작위성에 노출된 커뮤니케이션에 ‘이해 가능성’ 혹은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시스템이다.

 

과거 ‘신화’는 일반적으로 어떤 정치 이데올로기, 사회를 근저에서부터 개혁하려는 운동과 결부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신화는 그러한 낡은 의미와는 관계없고 오히려 좀더 단순하게 정보처리 방정식(알고리즘)을 의미한다. 신화는 우리를 둘러싼 정보 네트워크의 복잡성을 감축하고 때로는 네트워크 그 자체를 확장하기도 하는 운동성을 갖고 있다.2)

 

결국 신화의 개념은 ‘사회의 정보처리 양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네트워크에서 임의의 연결망에 따라 의사소통이 분산된다. 그것을 일정한 장소(서사든 이미지든)로 집약하는 데서 ‘신화’가 발생한다. 같은 맥락에서 ‘넷우익’(net-右翼)의 출현이라든가 인터넷 인종주의의 출현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정보의 폭주, 복잡성의 증대, 커뮤니티의 고립이라는 신종의 ‘공포’ 속에서 일정한 방향성을 재확인하기 위해 창출된 넷상의 사회계약인 셈이다. 그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이든 아니든. 내친 김에 말하면 『리바이어선』 역시 국민국가를 둘러싼 다양한 담론과 사회적 관계를 (활자인쇄에 조응하는) 근대적 커뮤니케이션의 문맥 아래 단일 이미지로 압축하려 했던 최초의 신화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논의에 기초하여 맑스(K. Marx)의 『독일이데올로기』를 재조명할 수 있다. 이 책은 맑스주의 사상의 문맥에서 흔히 (저 악명 높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위상학적 구분을 처음으로 제기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런데 맑스는 해당 저작에서 상품의 교환뿐 아니라 의사소통, 자연과 인간의 물질대사, 더 나아가 전쟁마저도 ‘교통’(Verkehr)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한다. ‘생산양식’을 주로 고찰하는 『자본론』과 달리 이 책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새로운 ‘교통양식’의 출현, 즉 교통의 증대와 심화라는 양식(mode) 아래 고찰된다.

여기서 우리는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알뛰세르)이라는 불가해한 테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할 실마리를 얻게 된다. 우선 하부구조의 하중은 자생적으로 발생하는 사물과 인간 사이의 복잡한 연결망을 우리가 임의로 변경할 수는 없다는 근본적인 사실에 놓여 있다. 특히 점차 익명화되고 추상화되는 근대적인 시장 및 사회관계에서 우리는 연결의 ‘무작위성’에 종속된다. 한편 상부구조는 무작위한 연결로 성립한 네트워크에 일정한 ‘인격’을 부여한다. 친숙한 사례를 들자면 웹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애플리케이션(application, ‘앱’으로 약칭)이 대표적이다. 앱은 인격에 대한 적합성을 바탕으로 웹상의 정보를 걸러내는 창구로 기능한다. 이때 앱은 “인간이 정보의 선택압(選擇壓)을 결정하는 하나의 참조항이 된다.”3) 말하자면 앱의 집합은 임의성과 무작위성에 노출된 불안정한 상태에 ‘자각’과 ‘결정’의 계기를 부여하는 플랫폼이다. 하지만 거기서 성립한 인격은 어디까지나 가상이다. 스피노자(B. de Spinoza)는 『에티카』에서 인간이 인과관계의 복잡한 그물망을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기에 사건의 원인을 누군가의 의도로 환원해서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거기서 이미 네트워크사회를 예견했다. 예컨대 인간이 어떤 앱을 선택한 것은 그것이 마침 그 자리에 있었기( just in time) 때문이다. 반면 사용자는 스스로가 의욕하여 앱을 선택했다고 상상함으로써 주체로서의 만족감을 얻는다. 또한 사용자가 복수의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함에 따라 복수의 ‘나’가 초래되며 충돌하는 일이 발생한다. 따라서 그같은 기능부전을 사후에 조정하기 위한 별도의 행위가 필요하다. 주체상을 통합하는 법, 종교, 민족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메타-어플리케이션’이다.

네트워크사회에서도 성립하는 이같은 하부구조-상부구조 도식은 후꾸시마가 ‘낡은 것’으로 치부하는, 19세기 중반 맑스가 제기한 ‘이데올로기 비판’의 문맥에서 이미 정식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서 인간은 사회를 창조하는 동시에 주어진 사회적 한계 내에서 그리한다는 자각을 얻는다. 우리는 정확히 이러한 맑스적인 문제설정(〓이데올로기 비판) 아래 근대신화의 변용과정을 고찰할 것이다. 근대사회에서 ‘신화’란 무작위성으로 점철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주체적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이다. 근대적 주체는 우연한 사건과 상처를 필연적인 것으로 떠맡는 행위에 의해서 비로소 주체가 된다. 물론 스피노자가 지적했듯 거기서 반드시 사후적인 인과관계의 날조가 이뤄진다. 그 점을 몰인식하는 한 신화는 한낱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러한 인식의 맹점을 재차 주체성의 긍정적인 계기로 반성하는 것, 바로 거기서 이데올로기와 변별되는 ‘사상’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현대사상’의 관건은 앞으로 우리에게 유효한 신화가 무엇이냐는 물음을 정확한 방식으로 제기하는 데 있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위대한 허구”이다.4)

 

 

3. 리바이어선의 감정회로

 

교통 및 통신기술의 발달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심화된 연결성 속에서 개인은 역으로 권리와 의무에 대한 ‘자각’을 상실할 위험에 노출된다. 예컨대 개인은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임의의 노드로 전락할 수 있다. 근대사상 속에서 제기된 인간소외, 착취, 물신화 모두 ‘각자 자유롭게 자기를 실현한다’는 리버럴 사회의 비전 아래 인간이 집단적으로 봉착하는 난국을 다룬다. 한편 근대사상은 사회주의든 자유주의든 전체주의든 익명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배경 아래서 주체적인 자각과 결단의 계기를 도입하고자 하는 기획이었다. 일본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근대 정치사상가들이 “인간이 그 고정적 환경에서 분리되고, 미지의 인간 상호 간에 무수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사태에 직면했고, 이에 대하여 “사회의 질서나 제도나 관습 같은, 요컨대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이 모두 인간의 산물이며 인간의 지성의 힘으로 바꾸어갈 수 있다는 자각”5)을 끊임없이 환기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결국 근대정치사상의 요점은 커뮤니케이션의 증대가 불러온 ‘무작위’한 사물과 인간의 배치 속에서 (마루야마의 말을 빌리자면) ‘주체적 작위’를 불러일으키는 데 있다. 물론 이 역시 하나의 신화이다. 다만 그것을 신화라는 이유로 포기하는 한 인간은 동물로 전락한다. 적어도 근대사상가들은 그같은 우려를 가졌다. 과격하게 말하면 그들의 눈에 인간은 미지의 타인과 접촉할수록 사적 세계에 몰입해버리는 동물이다. 그것을 인간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주체적 공동성을 환기하는 강력한 신화적 계기가 요청된다.

한편 무정형한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주체적인 자각을 일으키고자 할 때 집단적인 감정회로를 경유해야 할 필요성이 자각되었다. 리바이어선의 신화를 정립한 홉스가 그의 기원적인 저작에서 주목한 것은 ‘공포’라는 감정이었다. 예컨대 중심의 조정자가 없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비화된다. “이와 같이 서로 불신하는 상황에서 누구나 닥쳐올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면 선수를 치는 것 외에는 타당한 방법이 없다.”6)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복잡한 반응회로는 공포에 의해 동기화(synchronize)된다. 홉스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주권자에게 자연권을 양도하는 프로세스를 묘사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체적 결단은 주권자가 아닌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는 측에서 일어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홉스는 공포의 전염을 통해 역으로 자연권에 대한 개개의 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트릭’을 이용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공포스러운 상황이 실제로는 현실화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상황의 도래에 대한 ‘위협’만으로도 충분히 사회계약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홉스가 가정한 상황이 현실적이지 않다거나, 인간은 서로 협력하는 본성이 있다는 반론은 요점을 놓친다.7)

‘반응회로상에서의 감정을 동기화시켜 주체적 자각을 도모한다’는 모티프는 홉스 이래 근대사상가들의 논의에서 반복되었다. 유럽을 배회하는 공산주의의 망령에 대한 공포로 유럽열강 사이에서 체결된 ‘신성동맹’에 대한 맑스 『공산당선언』의 묘사도 이를 재확인한다. 포스트모던 사상가인 리처드 로티(Ricahrd Roty)도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민음사 1996)이라는 저서에서 사적인 세계에 몰입하는 인간이 ‘연대’로 나아가는 계기를 ‘전체주의’에 대한 공포로 설명한다.8) 일례로 로티가 긍정하는 공적 작품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 같은 것이다. 공포란 의외로 이질적인 사상가들을 하나로 묶는 키워드이다. 한편 기쁨과 슬픔과 같은 감정을 정치적 범주로 사고했던 스피노자(『정치신학논고』) 이래로 데이빗 흄(『정념론』), 애덤 스미스(『도덕감정론』), 르네 데까르뜨(『정념론』) 역시 감정의 문제를 다루었다.

근대철학자들이 정념의 문제를 다룬 이면에는 이성과 감정의 조화라는 따분한 주제의식보다는 착종된 연결망 속에 흩어진 인간의식을 공통의 감정회로상에서 동기화한다는 문제의식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합리론자로 알려진 데까르뜨(R. Descartes)의 경우가 흥미롭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나는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거나(이루어지거나) 발생하는 모든 것을, 그것이 발생하여 (영향을 미치는) 주체에 비추어보아 수동(정념)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발생하게 만드는 (또다른) 주체의 관점에서는 능동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주시한다. 그래서 능동인과 수동인은 대체로 아주 다름에도, 능동과 수동은, 그것들이 연관될 서로 다른 두개의 주체로 인해 두 이름을 지녀도 항상 동일한 하나여야 한다.”9) 데까르뜨는 여기서 ‘능동과 수동’의 연쇄로 구성된 광의의 회로 안에서 인간의 감정을 살펴보고 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자연과학자로서”10) 감정회로를 고찰했던 것이다.

한편 근대사상에서 감정은 ‘상상의 공동체’(베네딕트 앤더슨)를 창출하는 기제로 파악되었다. 헤겔(G. W. F. Hegel)은 ‘신문이야말로 근대인의 예배이기 때문에 근대인에게는 예배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는데 이 역시 비슷한 주제를 다룬다. 본래 예배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의례를 행함으로써 시공간을 초월해서 타자와 동일한 지평에 있다는 숭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이었는데 신문이 그것을 불필요하게 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프랑스혁명 이후 헤겔의 사상에서 아이띠혁명에 대한 신문보도가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가설도 주목받고 있다.11) 신문을 통해 당대 유럽인은 대혁명에서 초래된 감정(공포, 기대감 등등)을 공유한 것이다. 내친 김에 말하면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현존재’가 그 배후에서 자신과 연관된 사물 내지는 인간과 동시대적인 기분(〓존재이해)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즉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시대적으로 공유된 기분은 급기야 ‘존재론화’되기에 이른다.

 

 

4. 리바이어선의 정신사적 상황

 

지금까지 인간의 주체적 결단의 계기를 환기하는 리바이어선의 신화가 공동의 감정회로에 기초한다는 것을 보았다. 20세기 중반의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는 그 계기를 극단으로까지 사유했다. 그는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에서 그야말로 감정회로의 폭주라고 할 만한 사태 속에서 리바이어선(〓주권자)이 탄생하는 신화적인 순간을 인상적으로 묘사했다.

 

“인민은 공공성의 영역에서만 존재한다. 1억의 사적인 개인들이 일치된 의견을 가진다 해도 그것은 인민의 의지도 아니며 여론도 아니다. 인민의 의지는 갈채(acclamatio), 즉 자명하고 부인되지 않는 〔감정의인용자〕 현존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아니 인민의 의지는 최근 50년 동안 대단히 꼼꼼하게 형성되어 왔던 통계장치를 통해서보다 갈채를 통해 더욱 잘 표현될 수 있다. 민주주의적 감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민주주의는 비밀투표의 계산 시스템과는 아주 다른 어떤 것이라는 인식이 더욱더 확실해질 것이다.”12)

 

인민의 공적의지가 ‘투표’보다 ‘박수갈채’에 의해 더 잘 대표된다는 그의 사고는 나치의 만행을 정당화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의 진술은 오늘날 정치상황을 특징짓는 두 축을 명확히 한다는 장점이 있다. 첫째는 집단적인 감정의 현존이다. 토론과 숙의보다는 공개석상에서 드러나는 인민의 강렬한 감정에 정치를 기초지으려는 시도가 좌우를 막론하고 꾸준히 감행되었다. 둘째는 수에 기초한 통계장치이다. 오늘날 사회과학자들은 설문조사 및 통계기법의 개량을 통해 일시적인 변덕으로 편향되지 않은 사물의 추세를 포착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저 두가지는 실상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일례로 일본 현대사상가 아즈마 히로끼(東浩紀)SNS의 키워드 연관 분석, 타이핑 패턴 분석 등 다양한 기법으로 넷상의 무의식적 여론을 계량적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제약조건으로 삼아 정책을 입안한다는 발상을 제기하기 시작했다.13) 근대정치의 근본 카테고리는 ‘감정’과 ‘숫자’라고 할 수 있는데 둘은 점차 불가분의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68만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네트워크를 통한 대규모 ‘감정전이’가 이뤄진다는 증거가 발견됐다.14) 실험자는 뉴스피드에 뜨는 포스트 노출빈도를 조절함으로써 감정전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관찰했다. 그 결과 긍정적 포스트를 접한 빈도가 감소하면 긍정적 포스트를 더 적게, 부정적 포스트를 더 많이 생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 연구는 통념과는 반대로 사람들 사이의 직접 접촉이 없이도 감정의 전염이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한다. (윤리성의 문제를 무시하고) 이같은 실험의 결과를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자극하는 키워드를 기초로 특정사안에 대한 대규모 여론형성이 가능할 것이다. 실험에서 드러났듯 SNS는 카를 슈미트가 주목한 “감정의 현존”을 시각적·물리적으로 구현하는 네트워크이다. 그것은 그가 의회주의적 타성에 맞선 위대한 정치적 결단을 불러일으키기에 미흡하다고 생각했던 ‘통계장치’의 발전에 기초한다.

한편 ‘감정조작’ 실험의 윤리적 파장을 우려하는 논자들은 (우리가 주목하는) 요점을 놓치고 있다. 실험은 사회의 공동성을 환기하는 데 있어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공유하는 회로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SNS의 본질적 기능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렇게 본다면 실험자/피실험자 구분을 막론하고 이 거대한 네트워크 안에서 모두가 부지불식간에 감정조작의 공범자라 해도 좋다. 본연의 감정과 조작된 감정의 구분은 여기서 의미가 없다. 물론 이같은 사태를 성급한 문명비판으로 가져가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애초에 인간성〓휴머니티는 작위의 산물이다. ‘감정이입’을 통해 자타의 구분을 발생시키고 주체로서의 자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구도 역시 신화적 소산이다. 이러한 작위를 단순히 작위라는 이유만으로 거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낭만주의 같은 또다른 작위로 퇴행할 뿐이다.

 

 

5. 리바이어선의 몰락과 ‘반응사회’의 도래

 

오늘날 리버럴 사회는 각자 자유로운 자기실현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원리를 따른다. 이에 입각한 정보통신의 발전으로 타인과 기분을 공유하기 쉬워졌지만 역으로 시민적인 자각의 계기 혹은 공공성에 대한 관심이 실종되는 정신적 위기가 발생한다. 이는 카를 슈미트가 직면했던 ‘의회주의의 정신적 위기’(지루한 이익협상으로 점철된 의회정치에서 주권적 결단의 계기가 실종된다)보다 한층 근본적인 것이다. 그는 집단적 감정의 표출을 극단화해서 주권적 결단을 촉구했지만 이제는 그 방법마저 통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의 과잉과 이성의 실종 같은 일차원적인 문제로 정리될 수 없다. 이미 언급했듯 근대의 정치적 이성은 인간 사이의 착종된 감정회로와 처음부터 연동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감정회로 자체가 근본적인 변용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시대진단은 바로 그 점에서 출발한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오늘날 세월호 추모집회까지 시민참여의 추동력은 공포와 분노 그리고 연민과 같은 감정이었다. 세월호 추모정국에서 노란 배경의 추모 리본과 선박을 형상화한 로고가 모바일 메신저를 비롯한 각종 SNS 프로필을 수놓았다. 세월호 유족을 위로한 교황의 방한도 화제를 낳으며 전국적인 종교적 위로의 열풍을 초래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비참한 기분을 공유하는 것 이상의 명확한 행동강령이 없었다. 아니 기분의 공유 그 자체가 행동강령이었다. 그 와중에 세월호특별법의 의미, 기존 사법시스템과 의회를 우회한 집단적 결정의 통로를 만들어낸다는 것의 사상적 의미는 반추되지 않은 채 단순히 ‘인간에 대한 예의’나 ‘이윤에 맞선 생명’ 같은 그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는 구호가 난무했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나 ‘예의’ 그리고 ‘생명’의 의미 자체가 변질되었음에도 말이다.

오늘날 불의하고 부패한 체제에 맞선 반란자들이 공유하는 정확한 구호는 ‘제국주의 타도’도 아니고, ‘신자유주의 반대’도 아닌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의 『분노하라』이다.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는 말로 운을 띄운 저자는 자신의 레지스땅스 이력을 반추하며 젊은이들에게 사회양극화, 이민자에 대한 차별, 금권정치 등에 ‘분노’할 것을 주문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그 분노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면서 말이다.15) 2010년 프랑스 현지에서 수백만부가 팔려나간 『분노하라』 씬드롬은 오히려 우리가 분노할 능력을 잃기는커녕 항상 분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역으로 반증한다. 레지스땅스의 기본동기가 분노였다는 그의 언급은, 레지스땅스가 나치즘을 향해, 그것을 키워낸 제국주의를 향해,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를 향해 분노했다는 사실을 부지불식간에 누락한다.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주의 아래서 누구를 향해 궁극적으로 분노해야 할지가 명확하지 않다. 그 때문에 일각에서는 항상 모든 것에 대해 분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다. 저 노익장의 분노는 ‘파시즘’ 같은 명확한 대상보다는 ‘금권정치’ ‘인종주의’ ‘양극화’ ‘차별’ 같은 끝없는 환유적 연쇄 위에 부유한다. 같은 맥락에서 인터넷 포털 ‘다음’의 서명운동란이나 ‘네이트’ 판을 들여다보면 부조리한 사건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게시물들이 꾸준히 높은 주목을 얻으며 게시판 상단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근대주체가 ‘상호수동성’이라는 기이한 반응구조로 특징지어진다고 논평했다. “상호작용의 또다른 측면이 상호수동성이다. 대상에 상호작용하는 것의 이면은 (단지 수동적으로 쇼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대상 자체가 대신 수동성을 갖는 것, 내게서 수동성을 빼앗는 것, 그래서 대상 자체가 나 대신 쇼를 즐기고 자발적인 향략의 의무에서 해방시켜주는 상황이다.”16) 지젝은 쇼프로그램에서 관객의 웃음소리를 주요 장면에 입힌다든지 관객의 반응을 미리 자막으로 대변하는 것을 거론하며 뉴미디어의 도래 이면에 자리잡은 근본적인 수동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논평을 넷상의 공유문화, 즉 사안에 대한 언급을 리트윗(retweet, 재언급·인용)하고 게시물을 퍼나르는 행위로 사안에 대한 주체적인 입장표명을 대신하는 사태에 적용할 수 있다. 사안에 대한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용이할수록 그 자체가 자기목적적인 행위가 된다. 간단히 말해 그것이 네트워크사회의 ‘상호수동성’이다.

그런데 역으로 본다면 그러한 상호수동성은 어떤 사건에 반응하는 것이 능동적 행위로 전도되는 사태로 요약될 수 있다. 앞서 보았듯 근대사회는 ‘타인과 공유한 감정으로 스스로를 자각한다’는 식의 능동성과 수동성의 교묘한 상호교차를 이용했다. 무작위한 관계망 속에서의 인간의 근본적인 수동적 차원 혹은 ‘내던져져 있음’(하이데거)을 직면하고 역으로 외부를 자각하는 내면을 불러온다는 전략이 취해졌다. 그런데 오늘날 능동성과 수동성이라는 범주 자체에 근본적인 변용이 일어났다. 네트워크사회에서 우리는 기이한 사건과 사물에 열광어린 반응을 보이도록 미리 준비되어 있다. 분노라는 수동적인 감정의 전이가 ‘분노하라!’라는 도덕적 정언명령으로 과잉 능동화되는 것에서 시대의 징후를 엿볼 수 있다. 모두가 무언가에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분노는 분노를 위한 분노로 소진된 채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와 ‘나는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관한 자각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사회는 리바이어선처럼 아홉개의 꼬리가 달린 괴물이라기보다는 말미잘 같은 자포동물이나 촉수가 여러개 달린 연체동물에 더 가깝다. 어떤 자극이 주어질 때, 수많은 ‘예민한 촉수’로 이뤄진 말미잘은 멀리서 보면 넘실넘실 춤을 추면서 마치 어떤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어떠한 사고도 의지도 결여되어 있다. 이른바 반응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6. ‘분노하라’와 ‘멈춰라, 생각하라’ 사이에서

 

한편 슬라보예 지젝은 2013년 국역본으로 출간된 『멈춰라, 생각하라』17)에서 ‘분노하라’와 대립되는 구호를 제시한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이렇게 주문했다. “사유를 시작하라. (…)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시작해야 한다.”18) 현재의 맥락에 대입하면 우리는 분노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사고해야 한다. 예컨대 세월호 사건에서 국가와 지배체제의 폭력과 무책임성에 끊임없이 분노하기보다는 일개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이라는 독자적 권한을 부여하고자 한 세월호특별법의 ‘의미〓방향성(sense)’을 생각해야 한다. 왜 우리가 그러한 ‘특별한 권력’을 원했는지, 근본적인 책임규명을 위해 의회시스템과 사법시스템을 포함한 국가체제와 왜 대립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거기에 ‘세월호의 사상’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 멈춰서 생각하는 계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만 그 제안의 한계는 그것이 주관적 결단의 계기를 과장한다는 데 있다. 멈춰서 생각한다 해도 어디서 무엇을 멈추라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미셸 푸꼬(Michel Foucault) 이래 관심을 불러온 규율권력의 모티프를 역전시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내면에 직접 호소하기보다는 개인을 둘러싼 환경의 조작에 의해 특정행동 및 사고방식을 내면화한다는 푸꼬의 모티프 역시 어찌 보면 쏘셜플랫폼을 통해 감정적 공명을 유도하는 ‘반응사회’의 도래를 미리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푸꼬의 경우 근대적 지식과 담론을 매개로 주체를 훈육하는 ‘권력’을 발견했다면 오늘날에는 그것은 ‘정보’를 매개로 한다. 네트워크 이론가 로런스 레식(Lawrence Lessig)은 그같은 권력을 ‘아키텍처’라 부른다.19) 일례로 “웹공간은 ‘건축환경(bulit environment)’으로서 유저의 행동을 규정한다. (…) 현실공간과는 다른 공간 특성을 살린 코딩(coding)이 실행되어 그 속에서 유저의 평판이나 열광을 장치해둔 애플리케이션이 웹공간을 점유해간다.”20) 애플리케이션과 플랫폼의 설계에 의해 사용자를 특정방식으로 동기화하고 반응을 유도해가는, 그 행사주체와 출처가 불분명한 신종의 ‘환경권력’이 대두한 것이다. 확실히 그같은 권력에 사고의 자유를 제약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역으로 보면 동일한 환경조작에 의해 사고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멈춰서 생각하자는 선언보다는 차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도로에 과속방지턱을 설치하는 것 같은 방식으로 사고를 유도하는 ‘장치’(dispositif)를 도입하는 역발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즈마 히로끼는 (포인트는 다소 다르지만) 바로 그같은 가능성을 승인한다.

 

현대는 의사소통의 시대라 불리지만 인터넷을 가득 메운 의사소통은 더이상 사람들을 타자가 있는 세계, 즉 보편적이고 공적인 이상의 장으로 인도하지 않는 것이다(우노와 같은 세대의 사회학자 기타다 아키히로는 이러한 무능한 의사소통을 ‘이어짐의 사회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이러한 무능한 의사소통 속에도 타자는 깃든다는 식의 억지에 가까운 논리를 만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의사소통에 사이토가 ‘마음의 동요’라고 칭한 것과 같은 계기를 어떻게 해서 끼워넣을 것인지, 그 구체적인 환경설계에 관한 논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21)

 

낙관론자들의 생각과 달리 정보의 공유 및 개방 그 자체가 자유의 원천이 되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정보환경을 어떻게 설계하고 활용할 것인가이다. 변화된 정보환경에 기반하여 산출된 인간의 의식과 지식 그리고 무엇보다 ‘사상’은 과거와는 다른 범주가 될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그같은 변화에 입각하여 권력에 맞서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는 사상을 밀어붙여야 한다.

 

 

7. 나가며현대사상의 임무

 

오늘날 반응사회에서는 사건에 대한 감정과 반응을 공유하는 것이 자립적인 행동강령이 되었다. 반응 자체에 반응하는 악순환에 빠짐으로써 사건의 의미〓방향성을 ‘멈춰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본래 신화라는 것은 무작위한 세계의 배치에서 생성된 불안과 과잉정보를 처리하며 세계에 대한 주체의 태도를 결정하는 양식이었다. 타인의 기분을 공유하는 감정회로도 그같은 신화의 플랫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감정회로가 인간의 사고에서 자립함으로써 그 자체로 사회적 관계를 재편하는 힘이 되는 등 폭주하는 양상을 보인다. 결국 어떠한 신화도 무력해졌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응사회의 바깥으로 나아갈 길은 존재하는가? 이 안에서 인간의 사상적 자유가 확보될 수 있는가? 세계의 의미와 방향성을 논할 수 있는가? 우선 이 물음을 물음으로서 자각하는 것이 현대사상이 담당해야 할 몫이다.

우연한 물음이 전국적 대자보 열풍을 불러일으킨 ‘안녕들 하십니까’ 현상을 돌이켜보자. 당시 SNS에 대자보를 인증하는 문화가 대자보 유행확산에 한몫을 했다.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이것 역시 네트워크사회 특유의 현상이자 집단적인 감정조작의 산물이다. 사소한 물음이 어떤 ‘열광’을 이끌어낸 사건은 우리 사회의 위태로운 단면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것은 대자보 앞에서 ‘멈추고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거기서 우리는 반응사회 내부에서 그 논리가 내파되는 흥미로운 사건을 목격했다. 감정과 기분을 공유하는 문화 안에서 사고의 계기가 마련되는 징후를 발견한 것이다. 이처럼 시대적 폐색감을 공유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을 유도해갈 것인지가 사회의 방향성을 가름할 것이다.

그같은 가능성을 승인한다면 우리는 사상 자체의 변용을 모색해야 한다. 어떤 사상이든 현행의 사회구조는 임의로 주어진 것일 수 없고, 반드시 집단의 반성적 평가와 변화를 거쳐야 하는 것이라는 전망을 옹호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상은 시대의 ‘전위’ 역할을 자임하는 데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사상적 작업은 시대의 한계를 실천적으로 넘어서고자 하는 자들의 것이다. 그러나 사상이 지식인 일부의 자기만족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은 (홉스의 기원적인 몸짓과 같이) 다종다양한 매체를 형태로 독자적인 감정회로를 구축해야 한다. 거리에서의 기분을 공유하는 선동적인 팸플릿들이 근대사상이 출현한 매체환경이 되었듯, 현대사상은 네트워크사회에 만연한 감정의 전염성에 다가가 그것을 역이용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된다. 블로거들이 결합하여 화제가 되는 사건을 빠르게 포착해서 심층보도의 소재로 삼는 ‘슬로우뉴스’나, 대중의 분노를 야기한 사건을 화젯거리로 삼아 역으로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적 물음으로 나아가는 ‘안녕들 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의 슬라이드는 감정의 폭주에 다가가 그것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선례다. 이처럼 사상적 논의는 기존 활자매체에 더해 시각매체 및 음성매체와 다각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이를테면 오늘날 유행하는 웹툰, UCC, 짤방(‘짤림 방지’의 줄임말로, 웹게시판에 올리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가리키는 인터넷 용어) 등 인터넷매체에 대한 비평적 활용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SNS의 타임라인이 정보를 매개로 한 환경권력〓아키텍처로서 기능했다. 새로운 사상은 새로운 매체환경에서 자라난 인간의 감정회로를 재설계하는 작업에서 발생할 것이다. 단, 사상은 오늘날의 거리에 만연한 공포와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뿐 아니라 희망과 용기 그리고 집단적 헌신과 같은 새로운 감정의 자원을 찾아야 한다.

그같은 궁극적인 사상적 기획은 레닌(V. I. Lenin)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집약되어 있다. 그는 거기서 ‘전위’의 임무로 ‘전국신문에 대한 계획’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정견을 전달하는 정치신문이라기보다는 투고자, 배포자, 편집자의 네트워크로 이뤄진 ‘정치폭로에 특화된 SNS’에 더 가깝다.22) 거기서 그는 맑스주의자로서는 이단적이게도 노동계급 외의 농민, 도시빈민, 여성, 소수민족에 가해지는 정치적인 억압을 “전 계층의 전 주민”을 향해 폭로할 것을 주문한다. 그는 체제에 대한 분노를 공유할 뿐 아니라 그에 입각한 정치행동을 유도하는 공통의 쏘셜플랫폼을 구상했고 그것을 ‘전위’라고 불렀다.22) 레닌은 “신문은 신문이다. 일정한 조건 아래서 그것은 전위조직이 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오늘날 사상가들은 현 시대의 매체환경에 관해 이같은 레닌주의적인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사상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추이와 반응의 속도를 따라잡고, 국면마다 집단적 자각을 환기하고 사회를 근저에서부터 뒤흔들 구호와 슬로건을 움켜잡아야 한다. 전위로서의 정치적 자각, 대중의 기분을 포착하는 순발력과 감각, 공동의 집단지성 및 기술적 숙련과 결합되는 것, 오직 거기에만 위기에 봉착한 사상의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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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종엽 「‘사회를 말하는 사회’와 분단체제론」, 『창작과비평』 2014년 가을호 참조.

2) 후쿠시마 료타 『신화가 생각한다』, 김정복 옮김, 기역 2014, 17면.

3) 같은 책 36면.

4) 알랭 바디우 『투사를 위한 철학』(서용순 옮김, 오월의봄 2013) 참조.

5) 고바야시 마사야 『마루야마 마사오』(김석근 옮김, 아산정책연구원 2013) 147면에서 재인용.

6)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최공웅·최지원 옮김, 동서문화동판 2009, 130면.

7) 카라따니 코오진(柄谷善男)은 홉스의 자연상태가 실은 영주와 교회 그리고 도시국가 간의 전쟁상태라는 ‘역사적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홉스가 『리바이어선』을 쓴 것은 청교도혁명의 한가운데에서였다. (…) 그가 옹호하려고 했던 것은 내전상태를 종결시키는 자로서의 주권자이다.” 『세계사의 구조』(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12) 117면 참조.

8) 후쿠시마 료타, 앞의 책 79면 참조.

9) 르네 데카르트 『정념론』, 김선영 옮김, 문예출판사 2013, 18면. 강조는 인용자.

10) 같은 책 12면 참조.

11) 수잔 벅모스 『헤겔, 아이티, 보편사』(김성호 옮김, 문학동네 2012) 참조. 이 책은 헤겔의 작업이 1791년 아이띠 노예혁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가설을 제기한다.

12) 카를 슈미트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 나종석 옮김, 길 2012, 38면. 강조는 인용자.

13) 아즈마 히로키 『일반의지 2.0』(안천 옮김, 현실문화 2012) 188면 참조.

14) “감정상태 SNS로 전염된다” 헤럴드경제(인터넷판) 2014.6.30.

15) 스테판 에셀 『분노하라』(임희근 옮김, 돌베개 2011) 참조.

16)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박정수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7) 40~41면 참조.

17) 원제는 “The Year of Dreaming Dangerously”. 한국어판 주성우 옮김, 와이즈베리 2012.

18) 한국일보 2012.2.7.

19) 로렌스 레식 『코드』(김정오 옮김, 나남 2002) 참조.

20) 마루타 하지메 『장소론』(윤상현·박화리 옮김, 심산 2011) 237면 참조. 강조는 인용자.

21) 아즈마 히로키 『일반의지 2.0』 188면. 강조는 인용자.

22) 졸고 「고유명으로서의 레닌」(연재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제3회), 『오늘의 문예비평』 2013년 가을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