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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병수 『한국 생명공학 논쟁』, 알렙 2014
영화가 말하지 못한 한국사회의 속살
강양구 姜亮求
프레시안 학술·과학 담당기자 tyio@pressian.com
2005년 ‘황우석(黃禹錫) 사태’를 모티프로 한 영화 한편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입소문을 타고서 관객이 꾸준히 들었고, 영화 속 주인공의 실제 인물인 ‘제보자’와 공중파 피디 등이 언론의 주목도 받았다. ‘기억하기’에 유난히 인색한 한국사회의 풍토를 염두에 두면, 비록 ‘허구’를 앞세우긴 했지만 그 사건을 기억하고 평가하는 영화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한복판에서 취재하고 기사를 썼던 평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점도 있다. 영화는 물론이고, 제보자나 공중파 피디가 그 당시의 사태를 회고하는 방식은 대충 이렇다. 일탈행위를 한 ‘나쁜’ 과학자가 있었고, 그 과학자의 악행을 ‘착한’ 제보자가 고발했고, ‘용기있는’ 언론인과 그를 돕는 과학자를 통해서 ‘진실’이 알려져 마침내 ‘정의’가 실현되었다……
과연 당시의 사태를 이렇게 단순한 할리우드 ‘영웅서사’로 정리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2005년 12월 황우석 박사의 조작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도 그를 지지하며 수개월간 거리로 나섰던 수많은 우리 이웃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들 중 상당수는 지금도 여전히 황박사가 음모의 희생양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막상 들춰보니 줄기세포는 물론이고 황우석 박사가 수년간 공언해온 과학연구 대부분도 실체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연구가 대통령(김대중과 노무현), 여야를 막론한 정치인, 관료, 기업인, 언론인, 지식인 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모두가 한낱 사기꾼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갔단 말인가?
영화는 물론이고, 2000년대를 빛낸 ‘공익 제보자’로 이참에 확실히 자리매김한 제보자도, ‘참 언론인’의 표상으로 대중에게 각인된 피디도 이런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있다. 영화보다 조금 앞서 나온 김병수(金炳秀)의 『한국 생명공학 논쟁』이 각별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먼저 이 책의 제목으로도 쓰인 ‘한국 생명공학 논쟁’의 독특한 면모부터 살펴보자. 미국에서 배아 복제 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이들은 주로 근본주의 기독교 지지자를 염두에 둔 공화당과 그 외곽 정치세력이다. 미국에서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입장이 공화당(반대)과 민주당 리버럴(찬성)을 가리는 지표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황우석 박사의 복제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생명공학을 둘러싼 논쟁 양상은 미국과 달랐다. 한국사회에서 생명공학 감시운동은 시민과학센터 등이 주도한 과학기술 민주화운동, 환경운동, 보건의료운동 등 사회운동이 이끌고 가톨릭 등 종교계는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이들은 인간 복제 배아줄기세포 연구로 상징되는 생명공학에 대한 한국사회의 ‘열광’이 박정희정부 때부터 이어져온 ‘과학기술’과 ‘경제성장’을 두 축으로 하는 성장주의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계급, 젠더, 윤리, 환경 등 얽히고설킨 수많은 문제가 ‘침묵’을 강요당해온 사실을 폭로했다.
저자는 바로 2000년대 초반부터 이 생명공학 감시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역전의 용사다. 이 책에는 저자가 치렀던 수많은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흔적을 통해서 우리는 미처 몰랐던 ‘사실’을 기억하고, 그간의 생명공학 감시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성찰’하며 아울러 한국사회에서 생명공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전망’할 수 있다.
책의 곳곳에서 현장으로부터 나온 번뜩이는 통찰을 얻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딱 한가지만 언급하자. 저자의 관심사는 최근 몇년간 ‘생명’과 ‘감시’가 만나는 현장으로 이동했다. 시민의 유전정보를 수집한 데이터베이스(바이오뱅크)와 연결된 ‘맞춤의학’이나, 유전정보를 이용한 개인식별을 통해서 범죄예방이 가능하리라는 전망 등이 그 예다. 저자는 이런 시도가 애초 내세운 목적(맞춤의학, 범죄예방)을 달성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되레 심각한 문제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예를 들어, 이미 정부는 시민의 유전정보를 “소중한 국가자원”으로 간주해서 “생명산업을 육성”하는 데 쓰겠다고 공언한 상태다(65면). 시민의 유전정보가 새로운 이윤추구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다분한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우리는 권력의 억누를 수 없는 감시 본능이 과학기술과 만났을 때, 어떻게 디지털 사생활이 유린될 수 있는지 이미 국내외 몇몇 사례를 통해서 경험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개인별 유전정보가 수집되고, 그것이 국가나 기업에 의해서 관리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만 해도 섬뜩하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박근혜정부의 의료산업 육성정책이 가리키는 지점이 바로 생명을 이용한 이윤창출이라는 걸 염두에 두면, 심기일전한 새로운 생명공학 감시운동의 필요성은 더욱 절박하다. 과학기술과 경제성장에 열광하다 황우석 사태를 낳은 그 구조는 지금도 여전한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한가지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준다. 분명히 생명공학 감시운동의 현장으로부터 비롯된 기록이지만, 정작 저자는 현장의 ‘활동가’에서 강단의 ‘연구자’로 존재 이전을 시도하고 있다. 끝없는 활동 속에서 개인의 기력은 갈수록 소진되고, 현장에서 갈고닦은 전문성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 이런 변모를 부추겼을 것이다. 하지만 갈수록 역량있는 ‘활동가’는 줄어들고 팔짱 끼고 논평하는 ‘연구자’만 늘어나는 세태는 과연 바람직한가? 너도나도 연구만 하겠다고 나서면, 도대체 그 연구의 토대가 될 현장은 누가 지킬 것인가? 저자에게 또다른 짐을 지우는 게 미안하긴 하지만, 누군가는 ‘소를 키워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저자는 글머리에 언급한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 됐어야 마땅하다. 그가 없었더라면 현실의 제보자나 언론인이 황우석 사태의 진실을 밝히기 훨씬 어려웠을 테니까. 앞으로 또다시 이같이 과학기술을 둘러싼 문제가 곳곳에서 터질 때, 바로 그 현장에서 그의 목소리를 계속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