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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성석제 成碩濟
1960년 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로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인간적이다』,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 『위풍당당』 『단 한 번의 연애』 『투명인간』 등이 있음. songsokze@hanmail.net
믜리도 괴리도 업시*
너에게 전화가 온 건 꼭 오년 만이었다. 네가 그새 세차례나 바뀐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하지도 않았다. 나긋나긋하면서도 나른한, 연육제에 푹 담겨 부드러워진 고기처럼 무장해제가 되게 만드는 네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이유도 묻지 않고 네가 말하는 장소로 가겠다고 말했다. 알코올중독자가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맹세를 오년쯤 잘 지키다가 오랜만에 단골술집을 만나서는 별생각 없이 들어가버리듯.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네가 어떻게 살았을지 가늠해보았다. 너는 문자 그대로 자력갱생(自力更生)하는 인간의 표본이었다. 유산이나 복권 당첨금처럼 노력 없이 생긴 재산이 조금이라도 있다 싶을 때 주변의 누구에게든 무상으로 줘버리고 훌훌 떠나버리는 것, 그게 너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너에 대한 평판과 호오를 결정짓는 요소였다. 사람들은 너를 처음에는 천사처럼 좋아하다 더이상 네가 줄 게 없다는 걸 알면 악마처럼 대했다. 아니 대하지 않고 욕을 하며 떠나가버렸다. 너에게 구체적인 피해를 입은 것도 없으면서.
으악새. 그게 네 별명이었다. 대학시절 일부러 어른들만 출입하는 다방에 터를 잡은 우리가, 소파에 반쯤 누워 줄담배를 피우거나 서로에게 끊임없이 욕설을 퍼부음으로써 무심코 다방에 들어서는 어른들을 내쫓는 놀이를 즐기고 있을 때, 너는 혼자서 지절거리는 스피커에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다말고 느닷없이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망루 위 소년처럼 “으악새가 새가 아니고 갈대 비슷한 풀이라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일제히 가래침을 돋워 너를 겨냥하면서 ‘쪼다 같은 게 분위기 조진다’고 가락을 붙여서 너를 타박했다. 풀이 울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고. “갈대도 순정이 있다는데……” 네가 한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사 풀이 진짜로 눈물을 흘리며 울고 갈대에게 한몸을 불사를 순정이 있다 해도 네가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주제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으악새는 총에 맞아 죽어가는 새를 연상시키지만, 실제로 ‘으악’에 가까운 단말마 비명을 지르는 동물은 인간이다. 새가 죽을 때 내는 소리라야 짹, 아니면 끽일까. 네게 ‘으악새’라는 별명이 오래도록 따라붙은 건 네가 그런 식으로 턱도 없는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슬그머니 나타나 뒤통수를 침으로써 사람을 ‘으악’ 소리가 나도록 놀라게 해서였다. 그래. 그랬다. 가을바람에 흰머리를 나부끼는 낭만적인 억새에서 너를 연상하기 힘든 것처럼 네가 우리와 다르고 잘난 뭔가 있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어쨌든 너는 키가 크긴 했다. 누가 가꾸지 않아도 자력갱생하는 수많은 풀 가운데 가장 키가 큰 억새처럼.
초등학교 6년 동안 너와 나는 같은 학교에 다녔다. 두어번인가는 같은 반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귀공자처럼 차려입은 너와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너를 둘러싼 하이에나 같은 무리는 다른 아이들이 네게 접근하면 콧등을 찡그리고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들은 네가 사는 동네 시장 장사꾼들의 자식이었다. 소방서의 망루보다 까마득히 높은 굴뚝이 있는 주물공장이 네 아버지 것이었고 그의 재산은 시장 모든 상인들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다는 소문이 돌았다.
읍내 외곽 마을 농사꾼의 자식인 나는 읍내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너를 멀찌감치 넘겨다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반장선거 때가 되면 네 어머니가 학교로 출동해—초임 교사처럼 젊어 보이는데다 화려하게 성장한 아름다운 귀부인이어서 학교 전체가 환해지는 것 같았다—반공삐라를 뿌리는 비행기처럼 사탕을 뿌려댐으로써 너무도 간단하게 너를 반장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너는 고장 난 로봇처럼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가령 반장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과업인 수업시간의 구령, “차렷, 선생님께 경례”도 제대로 순서를 외우지 못하거나 덜덜 떠느라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했다. 담임은 너를 혼내거나 해임하지 않고 반 아이들이 돌아가며 인사를 하게 했다. 반 아이들은 네 덕분에 민주주의란 공평한 기회를 보장하는 것임을 배울 수 있었다. 그 또한 네 어머니의 돈봉투 덕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학교에 기악합주단이 만들어졌을 때 네 어머니는 실로폰이나 큰북처럼 인기 없고 비싼 악기 대부분을 구입해서 학교에 기증했다. 너는 그런 악기 중에서 가장 쉬운 심벌즈조차 배우지 못했으나 합주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발표회에서 혼자서만 연미복을 빼입은 너는 박자와 음정이 엉망인 지휘를 했는데도 기립박수를 받았다. 너는 언제나 가운데 자리에서 많은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무기력하고 슬퍼 보였다. 하필 그때마다 내 눈길이 네게 향한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초등학교 6년 동안 너와 나는 제대로 된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았으니 네가 도대체 나라는 존재를 아는지도 몰랐다. 궁금하지 않았다. 중학교를 추첨으로 진학하게 됨으로써 다시 보기 어렵게 된 초등학교 남자 동기생의 절반 정도, 그러니까 사립중학교에 배정된 백명의 아이들처럼.
네 아버지의 공장은 엿장수, 고물상 들이 골짜기와 마을을 돌며 수집해온 쇳조각을 용광로에 녹여 농기계며 철근 등 갖가지 유용한 도구와 일상용품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네 아버지의 공장은 고향의 군 전체에서 최첨단의 과학과 기술, 설비를 갖춘 최대, 최고의 산업체로 여겨지고 있었다.
우리가 중학교 입학을 열흘쯤 앞두고 있던 어느 쌀쌀한 날 오후, 네 아버지의 공장에서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어느 고물상이 수집해온 쇳덩어리 가운데 6·25 때 버려진 불발탄이 있었고 부주의한 일꾼이 그것을 용광로에 집어넣는 바람에 엄청난 폭발이 발생했다. 공장을 덮고 있던 지붕이 부서지고 현장에 있던 사람 예닐곱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주변의 건물 유리창 수백장이 깨졌다. 굴뚝 뚜껑이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날아가 있다가 다른 고물수집상의 수레에 실려 공장으로 돌아왔으나 결코 원래의 자리로는 갈 수 없었다
충격을 받은 네 아버지는 뇌출혈로 쓰러져 죽을 때까지 일어나지 못하는 몸이 됐지만 나는 그런 걸 알지도 못했고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집에서 읍내 외곽의 중학교까지 6킬로미터쯤 되는 신작로를 오가기 위해 자전거를 배우느라 바빴고 중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자전거와 함께 길 아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지 않는 게 가장 큰 관심사였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서너달 뒤, 하지 무렵에 네 아버지의 공장에 큰 불이 나서 공장과 공장 인근에 수십년 동안 쌓였던 어마어마한 양의 고물과 네 가족이 살던 저택이 속수무책 타버렸을 때는 모를 수가,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자전거를 배운 이후 처음으로 자전거를 타고 읍내로 가서 불길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전거를 세우고 그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위태롭게 선 채로 한 시대의 역사가 젖은 쓰레기처럼 연기를 내며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읍내 사람들이 전부 공장 앞으로 모여든 것 같았다. 그중에는 너를 옹위하던 하이에나 무리도 있었다. 모두들 구경만 할 뿐이었다. 엄청난 공해를 유발하는 공장으로 떼돈을 벌면서 이웃들에게는 떡 한번 돌리지 않았으니 그 때문에 망조가 든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엄마가 1남 4녀의 자식들에게 양복점에서 맞춘 옷만 입히고 외제 책가방과 학용품을 들려서는 몇걸음 되지도 않는 학교를 오갈 때 자가용에 태워 보내는 식으로 거들먹거렸으니 죄를 받는 것이라고 여자들은 수군거렸다. 소방대원조차 화재진압을 하기보다는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평생 보기 드문, 경험하기 힘든 대형 화재의 현장을 보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손 놓고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여느 때와 달리 읍내의 사나운 아이들이 가장 늦게까지 화재현장에 남아 있던 나를 무시하고 그냥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나는 너에 관해 갖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불이 나자마자 네가 네마리의 흰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가족과 함께 바닷가의 별장으로 가는 것을 떠올렸고 네가 여자 형제들과 나란히 목에 깡통을 걸고 한길에 나앉아 있는 것을 상상할 때는 재미있는 동화책을 읽는 것처럼 목으로 침이 연신 넘어갔다.
나는 중학교 2학년 초에 서울로 전학했고 방학이면 고향집에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어쩌다 보니 너를 둘러싸고 있던 하이에나들이 고향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들로부터 네 아버지가 공장에 화재가 일어난 뒤 일년 만에 숨졌고 네 엄마는 믿을 수 없게도 남편의 무덤에 풀도 나기 전에 대도시에 있는 주물공장 공장장과 재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는 아버지의 공장에서 불타지 않고 남은 유일한 건물인 일꾼들 숙소 겸 식당(‘함바집’으로 불렸다)에서 연년생인 누나 하나, 여동생 셋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한동안은 네 집에서 십년 넘게 일해온 식모가 아이들을 돌봤지만 결혼을 하면서 떠나버렸다. 그뒤로 네 신세와 꼴은 급전직하로 추락했다.
너는 세수도 못한 얼굴로 찢어진 교복을 입고 등교했다. 한문과 영어, 수학을 같이 가르치던 학생과 주임 선생이 교문에서 여자 형제들 씻기고 입히고 먹여 학교에 보내고 오느라 지각했다는 너의 변명을 듣고는 “네 엄마는 제 자식 놔두고 남의 집 계모로 가버리고 너는 여동생들 뒷바라지하는 식순이가 됐으니 앞으로 네 이름을 ‘신데렐로’라고 해라”라고 한 뒤로 너는 고향의 전 중학생, 아니 모든 남자를 대표하는 ‘부엌데기’가 되었다. 네 부하였던 아이들이 하루 만에 모두 네 상전으로 변했다. 그 아이들의 책가방을 집집마다 배달해주려면 지게질이라도 배워야 할 형편이었지만 지게가 없던 너는 온몸에 책가방을 매달고 들고 이고 지고 물고 읍내를 돌아다녔다. 점심시간에는 학교 앞 구멍가게에 네 책가방을 잡히고 ‘까치담배’를 외상으로 받아다가 반에서 대장인 아이에게 상납하곤 한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수업시간에는 선생에게, 쉬는 시간에는 아이들에게 돌아가며 구박당했다. 특히 남성 호르몬이 넘쳐나다 못해 공기 속에까지 비산될 정도였던 남자중학교에서 너는 여중생처럼 주목을 받되 무리 내 서열은 성적처럼 꼴찌였다. 쉽게 말해 너는 한때 읍내 최고의 귀공자 미소년에서 ‘만인의 똥개’로 전락했다.
네가 왜, 어떻게, 무엇을 위해 그토록 힘든 시절을 견뎌냈는지 정확하게 아는 아이는 없었다. 네가 거의 매일 저녁, 주물공장의 폐허 위에 앉아 “아아 으악새 슬피 우는”으로 시작하는 네 어머니의 애창곡을 나지막이 부르는 것을 들었다는 아이는 있었다. 언젠가 네 아버지가 좋아하던 “복사꽃 살구꽃 피는”으로 시작하는 노래를 들었다는 아이도. 그런 식으로 힘든 시간을 흘려보냈다고 하더라도 그 노래들이 그 시절을 참고 견뎌낼 이유는 되지 못한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기차역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너를 보았다. 너는 교복을 입은 채 철로변에서 석탄과 나뭇가지 같은 땔감을 줍고 있었다. 껑충 자란 키에 비해 교복은 너무 짧고 작았고 곳곳이 기워져 있었으며 눈이 날리는 추운 날씨임에도 너는 홑겹인 교복 하나만 입고 있었다. 때에 전 얼굴에 장갑도 끼지 못한 손발은 터졌고 몸을 구부리는 바람에 드러난 쇄골이 쇠꼬챙이처럼 말라 보였다. 그럼에도 어쩐지 너는 당당해 보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네 눈은 빛났다. 그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뭔가를 기억해내고는 말을 걸려 했다. 오히려 내가 먼저 몸을 피할 정도였다. 너는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어른 같았고 나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온실 속에서 갖가지 보살핌과 보호를 받으며 손도 까딱하지 않던 화려한 화초로 있을 때는 생각할 수조차 없던 강인한 모습이었다. 몇년 사이에 한 사람에게 생겨난 너무도 극적인 변화에 나는 ‘으악’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어지간히 놀랐다. 그날 이후로 나는 너를 영원히 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너는 보호를 받으면 무기력해지고 남을 보호하게 되면 강해지는 특이한 체질을 가졌다.
네 험담을 하던 하이에나들도 네가 식당을 차려도 될 정도로 뛰어난 ‘손맛’과 손재주를 가졌다고 칭찬했다. 너는 움막집 같던 일꾼 숙소를 아기자기하게 꾸몄고 누이들에게 오므라이스, 카레라이스, 소시지볶음이나 크림수프 같은 것을 직접 요리해주었다. 주물공장이 불 탈 때 살아남은 유일한 책은 네 어머니가 사서 들여놓고 한번도 읽지 않고 방치한 『현대 동서양 요리전서』 씨리즈였는데, ‘함바집’에서 백반만 먹던 일꾼들이 눈호강이나 하자고 식모를 시켜서 그 책을 일꾼 숙소에 빼돌려놓았던 덕에 무사했다. 너는 천연색 그림과 사진이 반 이상인 그 책을 읽고 또 읽어 스스로 뜻을 깨달았고 동서양 요리의 심오한 세계에 빠져들며 부수입 격으로 여형제들을 먹여살릴 수 있었다. 공고생인 덕에 집안의 웬만한 고장은 직접 수리했고 청소며 바퀴벌레, 쥐 잡기, 바느질도 도맡았다. 네 집의 여자들은 손에 물 한번 묻히지 않고 얼굴만 가꿀 수 있어서 ‘불타버린 주물공장 네 자매’의 미모에 관한 소문은 나날이 커졌고 그 자매를 훔쳐보러 오는 아이들이 늘면서 네 평판은, 형편은 한결 좋아졌다. 집안까지 밀고 들어와서 네 여형제들과 대화를 나눴던 아이들은 읍내를 주름잡는 실력자들이었다.
성적 때문인지 가족 부양 때문인지는 불확실하나 너는 동기들보다 일년 늦게 읍내 외곽에 새로 생긴 종합고등학교 야간반 기계과에 입학했다. 중간에 휴학을 했으므로 졸업도 동급생에 비해 일년 늦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과정에 5년을 보낸 셈인데 그 시절에 네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열성을 쏟았던 건 요리전서의 그림과 사진에서 영향을 받은 미술이었다. 너는 미술 실기를 비롯, 모든 사안을 ‘빳다질’, 곧 몽둥이찜으로 해결하기로 악명 높은 미술 선생이 지도교사인 ‘종고 미술반’에 들어가서 누구보다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삼년간 미술반의 ‘줄반장’을 했다. 네 어머니의 도움이 전혀 없이.
네가 서울의 대학에서 개최하는 전국 고교생 미술대회에 지역 대표로 나왔을 때 우리는 만났다. 내가 그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고향의 하이에나 한마리가 미리 길 안내를 해주라고 연락을 해와서였다. 대학 캠퍼스 연못가에서 나는 네가 고향에서 재료를 공수해다가 여관방에서 새벽에 손수 말아온 김밥을 먹었다. 너는 교련복을 입고 있는 고등학생, 나는 장발에 청바지를 입은 대학 2학년생이었다.
“야, 이게 말로만 듣던 ‘이현수 김밥’인데 과연 사나이 가슴을 고향의 맛으로 시큰하게 울려주누나. 근데 너는 왜 안 먹냐?”
“난 아까 먹었어. 네 생각해서 따로 이인분 싸왔으니까 많이 먹어.”
너는 학생이라기보다는 학교에서 잡일을 하는 아저씨처럼 나이 들어 보였고 대한민국 평균 키인 나보다 한뼘 가까이 컸다. 그리고 부지깽이처럼 말랐다.
“그러니까 말이다. 사람이 둘, 김밥이 둘인데 지금 내가 이인분째 먹고 있는 거잖아. 네 건 어딨냐고?”
“나는 학교 앞 기사식당에서 백반을 먹었어. 고마워.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네가 나한테 신경을 많이 써주는구나.”
“오랜만? 우리가 언제 어디서 왜 만났던가? 난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네 집에 불이 났을 때 개울 건너 자전거 위에서 불구경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안될 것 같았다.
“나는 너를 늘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서 지금도 어제 만난 사이처럼 가깝게 느껴져.”
“자식, 징그럽게 왜 이래. 남녀 동창도 아니고 생각하기는 뭘 생각해. 김밥 잘 먹었다. 상 꼭 받고 가라.”
너는 정말로 상을 받았다. 시상식에서 대학총장이 직접 수여하는 최우수상을. 미술대학이 주최하는 고교생 미술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면 무시험으로 그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네가 입학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나는 왠지 찜찜했다. 나는 삼학년이고 너는 일학년인데 남들 보는 앞에서 친구처럼 지내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너는 입학하자마자 뻔질나게 나를 찾아왔다. 강의실이든 서클룸이든 캠퍼스든 시위현장이든 가리지 않고. 특히 시위현장에서는 무리속에 섞여앉아 운동가요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눈물을 번쩍이는 때도 있었다.
어쨌든 여럿이 있는 동안에는 나는 네게 반말을 했고 내 동기나 1년 후배들은 너를 ‘현수씨’로 부르게 됐는데 너는 대부분 입을 열지 않는 식으로 대답했다. 내가 문학 서클에 있고 네가 미술 서클에 있어서 합동으로 시화전 액자를 만들게 됐을 때 더 자주 만나게 됐다. 너를 하도 봐서 지겨워서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군대에 갔다.
군대에 있는 동안 나는 철저히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 비밀로 했다. 네가 집으로 연락을 해오거나 찾아왔을 때도 특수부대에 있어서 편지, 면회가 절대로 안되는 것으로 해두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너와 완전히 단절된 채 살 수 있었다.
교련 덕분에 6개월 복무단축 혜택을 받아 이년 만에 복학을 했다. 가장 먼저 나를 알아본 건 너였다. 학생식당에서 우리는 마주쳤다. 너는 여전히 말랐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에 교련복을 입고 있었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 때문에 너는 어디서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키가 너무 크면 맞는 군복이 없어서 군대가 면제라는 말이 있었는데 군 면제 대상자가 굳이 대학에서 교련을 받아야 하나 궁금해졌다. 너는 군대 가는 것과 상관없이 교련 학점을 이수해야 졸업을 할 수 있다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네가 군대를 간다는 거야, 안 간다는 거야?”
“신체검사를 계속 연기하고 있어. 아직 동생들이 완전히 독립을 못했고, 엄마도 아프고.”
너의 누나는 이미 결혼을 했고 여동생 하나는 치과의원에, 하나는 간호학원에 다녔으며 하나는 여고생이었다.
“엄마가 아프다고? 네 엄마는 출가하지 않았냐? 가출인가?”
네 어머니의 인생역정은 너무 드라마틱해서 모를 수가 없었고 한번 들으면 잊을 수도 없었다. 재혼한 네 어머니는 오년 만에 새 남편이 급사한 뒤 적지 않은 재산을 상속받았다. 너는 어머니가 다시 가족과 합류하는 것을 거절하고 주물공장을 팔고는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재산을 사등분해서 모두 여형제들 몫으로 정함으로써 여형제들이 네 어머니의 도움을 받지 않도록 만들었고 무소유의 너는 그들이 출가하기 전까지 부엌데기로 살림을 하며 함께 살고 있었다.
너는 네 신상에 관한 나의 장황한 자문자답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내 식판이 거의 다 비자 너는 살짝 네 식판에 있던 밥을 덜어서 내 식판으로 옮겼다. 나는 내가 네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게 불편했다.
“학생식당 밥 정말 개떡 같네. 군대 짬밥보다 더 개밥 아냐. 앞으로는 돈 좀 들어도 교직원식당 가서 먹어야겠다. 복학생 체면이 있지.”
음식 이야기가 나오자 네 눈이 반짝였다.
“나는 사먹는 음식이 너무 자극이 강해서 소화가 잘 안되고 속이 안 좋아. 그래서 집에서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거든. 학생식당 밥맛 없으면 내가 네 도시락도 같이 싸가지고 올까? 전혀 어렵지 않아. 동생들 거 쌀 때 같이 싸면 되니까. 채식 괜찮지? 수업이 언제야? 점심시간에는 없지?”
나는 다시 ‘너 좀 징그럽다’라고 말하려다가 그 말을 된장국 속의 딱딱한 두부와 함께 꿀꺽 삼켰다. 시골에서 아버지가 경운기와 육신의 근력으로 농사 지어 부쳐주는 돈으로는 학생식당에서 밥을 사먹기도 벅찼다. 복학까지 했으니 내가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밥값을 벌지 못하면 굶어야 마땅했다. 교직원식당 이야기는 학생식당에도 자주 못 올 경우에 대비한 알리바이일 뿐이었다.
“너 진짜 음식 하나는 기똥차게 하더라. 고향 바닥에 소문이 쫙 퍼져 있는 거 너도 알지?”
“그래. 그런데 서울에서는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친구들이 없어. 맛에서 시골 냄새가 난대. 너는 잘 먹어줄 것 같아. 내일부터 내가 네 도시락 싸올 테니까 열두시에 만나자, 중앙도서관 앞에서. 안녕.”
너는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나는 어정쩡하게 그러자고 하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기울어져가는 해를 배경으로 전신주처럼 긴 다리를 옮기는 너를 보며 나는 문득 네가 도시락을 싸왔다면서 왜 학생식당에 밥을 사먹으러 왔는지 궁금해졌다. 의문은 곧 풀렸다. 너는 나를 보고 따라 들어온 것이었다. 배가 고프지 않았으니까 밥도 먹는 시늉만 했고 내게 그 맛대가리 없는 밥을 덜어주기도 했다. 나는 그런 적이 한번도 없다. 너는 항상 그랬다. 그게 너와 나의 차이다.
너는 그뒤로 내 도시락을 싸왔다. 도시락이라는 건 간단해 보이지만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는 게 적지 않다. 반찬에 따라 기분을 잡치기도 하고 외관 때문에 열등감이나 외로움이 생겨나기도 했다. 너는 세심하게 그런 것을 살펴서 점심을 굶어야 하는 내 문제를 최대한 해결해주면서도 내가 내켜하지 않는 표정이거나 적절치 않은 상황에서는 도시락을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았다.
그래, 내가 지금 네게로 가는 건 망할 놈의 복학생 시절, 그 망할 놈의 도시락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일본에 여행을 갔을 때 기차역마다 파는 도시락이 다르고 역에서 판매하는 도시락(에키벤, 驛弁) 맛자랑 대회까지 있다는 것을 알고는 네 얼굴부터 떠올렸으니까. 네가 혹시 일본의 어느 역 근처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턱없는 상상을 했다. 세상의 수많은 도시락, 특히 목이 메도록 맛있는 도시락을 먹을 때마다 너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무렵 일년에 절반은 집 밖에서 잤고 절반은 집 안에서 잤다. 우리의 서울집은 똑같은 크기의 방 두개 사이에 부엌 하나가 있는 셋집이었고 3남 3녀의 형제들은 성별로 나뉘어 기거했다. 내가 집에서 잘 때는 나를 자신의 집에서 재워준 친구들이 동행했다. 전원이 남자였다. 밤새 술 마시고 떠들고 바둑을 두고 고스톱을 치고 누군가는 구석에서 자고 누군가는 입시공부를 하고 누군가는 중고생인 동생의 예습복습을 도와주고 누군가는 노래하고 누군가는 밖에 나가 토하고 들어왔다. 너는 내 친구가 아니라 누군가의 과 후배였고 서클 동료였다. 때로 너의 존재나 호칭, 돌발적 언행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지면 너는 옆방으로 가서 내 여형제들과 어울렸다. 너는 내 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악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왔고 그들 몫의 주스를 사왔다. 게다가 밤새 젊은 수컷 영장류 십여명이 먹어치울 고열량 음식을 내 여동생들과 함께 마련했다.
술이 한잔씩 돌아가면 일어서서 노래를 하는 게 관례였는데 네 차례가 오면 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일어서서 ‘아아, 으악새 슬피 우는’으로 시작되는 ‘뽕짝’을 2절까지 불러댔고 ‘복사꽃 살구꽃 피는 정든 내 고향’으로 분위기를 완전히 ‘조지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정수리로 형광등을 들이받아 먼지를 턴 뒤에 자리에 앉았다. 너는 우리 집 여형제들에게 나보다 훨씬 더 큰 신임을 얻었고 심지어 나는 한번도 받지 못한 포옹과 다정한 인사까지 받았다. 시간이 열시가 가까워오면 너는 집이 멀어 가봐야겠다면서 일어섰다. 집이 멀든 가깝든 모두 자고 갔던 아이들은 네가 가고 난 다음, 그 친구 착한 건지 바보인지 모르겠다, 있어도 없는 것 같고 없어도 있는 것 같다, 왜 왔는지 왜 갔는지 모르겠다고 논평했다. 남은 친구들은 밤새 서로 물어뜯고 치고받고 싸울망정 절대 서로에 대해 그런 평가를 하진 않았다. 모두 똑같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내 방에서와 달리 네 핏속에 들어 있는 ‘무상(無償)의 베풂’ 유전자는 네 집으로 동성 이성 구별 없이 많은 친구를 불러들인 것 같다. 너와 그들 사이는 다감하고 친밀했다. 생일 때 선물을 주고받고 크리스마스에 카드를, 방학 때는 엽서를 보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먹고 마시고 공개적으로 논쟁을 벌이고 결론을 맺은 뒤 포옹이나 악수로 화해했다. 내 입장에서는 그런 분명함, 도시성이 부럽기는 했다. 그뿐이었다. 나는 그 무렵부터 열애에 휩싸여 있어 그 상대 빼고는 누구에게라도 관심이 많지 않았다.
어쨌든 네가 우리 집에 왔으므로 내가 답방의 형식으로 너희 집에 간 것은 자연스러웠다. 너희 집에서는 네가 제일 어른이었다. 너는 그 집을 직접 골랐고 샀고 네 힘으로(신데렐로로나 부엌데기로나) 꾸려나가고 있었다. 잠시 물려받은 재산이든 맡아주고 있는 것이든 어쨌든 그 집 전체에 전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네가 집안의 유일한 남자임에도 네게는 집안 구성원을 모두 낳고 기르며 보살피는 여성성, 모성이 느껴졌다. ‘과부는 쌀이 서말, 홀아비는 이가 서말’이라는데 진짜 과부인 네 어머니는 고향의 일꾼 숙소에서 혼자 늙어가고 있었다.
거실의 장식장 제일 좋은 자리에는 『현대 동서양 요리전서』 씨리즈가 모셔져 있었고 모차르트 명곡 전집, 베르디의 오페라 전집, 베토벤의 피아노 쏘나타 전집 등의 LP 음반이 화질 뛰어난 외국산 화집 렘브란트·루벤스·까라바조·페르메이르·고흐 등과 함께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반대편의 책장에는 니체나 코플스턴의 원서가 상단에, 중고책방에서 구한 듯한 묵은 책과 시집이 하단에 꽂혀 있었는데 거기에는 자연스럽게 LP음반 전집의 케이스처럼 손때가 묻어 있었다. 세심하게 선정되고 보살펴지고, 심지어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너는 나를 맞이해서 부산하게 방을 치우는 시늉을 하고 턴테이블에 얹혀 있던 LP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내가 좋아하던 핑크 플로이드 연주 이후에 레너드 스키너드, 레드 제플린이 흘러나왔다. 그 집의 다른 손님들이 좋아하는 음악—딥 퍼플, 레너드 코헨, 마마스 앤 파파스 같은 가수들의 음악이 이어졌다. 주객 합쳐 남녀 여덟 명이 둥그렇게 모여앉은 뒤 무릎에 이불을 덮었다. 이불 위에는 네가 사온 귤이 놓였고 귤껍질을 벗기고 먹으면서 카드놀이를 했다. 게임에 져서 술래가 되면 노래를 부르거나 가볍게 삼십초가량 춤을 춰야 하는 벌칙을 받았다. 소주 병나발을 분다거나 귀뺨을 맞거나 옷을 하나씩 벗는 게 아닌 것이 참 신선하고 건전했다. 그 대신 친근하고 다정하고 아름다운 청춘 남녀, 나이나 직업에 관계없이 서로를 친구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냐고 그 밤, 그 방은 내게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열시가 되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건전해서 나 같은 잡놈은 더이상 같이 못 놀겠다.”
내 말은 농담이 아니었지만 모두들 웃었다. 여자들 몇몇이 같이 가야겠다고 일어섰고 너는 전송을 하러 나왔다. 버스정류장까지 다 와서 너는 내 팔뚝을 살짝 쥐었다 놓았다.
“좀더 이따 가지 않을래?”
“왜?”
“왜는, 너 좋아하는 와인도 있고. 여자들하고는 못할 얘기도.”
술이 있다는 바람에 나는 간단히 돌아섰다. 마음에 안 들면 언제라도 너희 같은 순둥이들쯤 무시하고 집에 가버리면 그만이니까.
돌아오니 술판이 제대로 차려져 있었다. 얼음에 채워진 샴페인의 이름은 이미 들었던 퀸의 음반 <Killers Queen>에 나오는 샴페인 ‘모에 에 샹동’이었다. 뒤이은 화이트와인 역시 국산 포도주가 아닌 독일 모젤 지방에서 나오는 녹색 병의 리슬링 품종의 와인이었다. 뚜렷한 취향도 경험도 없던 나는 달콤한 화이트와인 맛에 순식간에 매혹당했다. 마지막으로 나온 술은 국산 보드카였다. 맛이나 원산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알코올 도수 사십도 이상이라는 게 핵심이었다. 너는 세숫대야만 한 커다란 유리그릇을 장식장에서 꺼냈다. 오렌지를 직접 짜서 만든 주스 두병을 아낌없이 거기에 투하했고 미리 준비한 얼음을 깨뜨리고 믹서에 넣어서 갈아 그릇에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보드카 두병을 부은 뒤에 수저로 내용물이 잘 섞이도록 휘저었다. 그새 누군가 큰 스푼으로 다섯번쯤 설탕을 끼얹었다.
“이 칵테일 이름이 스크루드라이버야. 새콤달콤해서 엄청나게 센 술이라는 것도 모르고 여자들이 좋다고 마시다 뻗어버리는 바람에 ‘레이디 킬러’라고 하지. 뻗고 난 뒤에 스크루드라이버로 나사를 돌려 박아버리듯 홍콩으로 보내버리기 때문에……”
술이 약한 편인 너도 그날은 완전히 풀어져 있었다. 음담패설을 서슴없이 늘어놓았다. 너는 시골에서 식구들을 위해 네 한몸 바쳐 희생만 한 것만은 아니었다. 시골 아이들이 성적으로 훨씬 조숙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례로 증명했다. 예컨대 ‘다라이(함지)와 바께쓰(양동이)’에 막걸리와 소주, 맥주를 부어서 적당히 혼합한 뒤에 ‘양재기’로 퍼서 한 양푼씩 ‘노털카 원샷(다 마신 그릇을 머리 위에서 흔들었을 때 한방울도 떨어져내리지 않게 한번에 쭉 마셔버리는 것)’으로 한바퀴씩 돌리면 삼십분도 못돼 수십명이 한꺼번에 홀딱 벗고 엉켜서 뻗어버린다는 것 같은. 그 경험담이 너무 실감나게 재미있어서 나는 당분간은 갈 수 없었다. 나중에 내가 가려고 일어서면 네가 붙들거나 아니면 다른 아이가 잡았다. 남자 셋, 여자 하나 해서 나까지 다섯명, 그래, 너희 넷이 최소 한번씩은 잡았다. 그래서 종내 가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잠결에 나는 눈을 떴다. 어떤 축축한 촉수가 내 하체, 특히 성기를 집요하게 더듬고 핥고 있었다. 나는 촉수를 피해 벽으로 돌아누워 최대한 몸을 벽에 붙였다. 마침내 벽과 한몸이 되었다 싶었을 때 눈을 떴다. 낯선 어둠이 맨발에 밟히는 깨진 유리조각처럼 위험스럽게 느껴졌지만 방광이 터질 것 같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불을 켜는 곳이 어딘지 몰라서 눈대중으로 바깥으로 가는 방향을 잡았다. 뭔가가 물컹, 하고 밟혔지만 급해서 무시했다. 부엌 하수구에 소변을 갈기고 나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손목의 야광시계로 5시를 조금 넘은 시각임을 확인하고 죽을 때가 된 노인이 목에 걸린 끈덕진 가래를 내뱉는 것 같은 버스 엔진 소리를 들었다. 거실에서 잠깐 멈췄을 때, 가버릴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래도 되었다. 가방이 눈에 띄었다면 즉시 신발을 신었을 것이다. 가방이야 핑계였다. 깨어난 네가 학교로 가지고 올 것이니까, 아마도 예쁜 찬합에 고향의 맛이 담긴 도시락을 넣어가지고. 하지만 나는 방으로 돌아갔고 그새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너를, 너희를 보았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들은 모두 알몸이었다. 특히 너는 기다란 애벌레처럼 허리를 S자로 구부린 채 잠들어 있었다. 유난히 목소리가 크고 목젖이 다 보이게 웃던 녀석은 유리창의 붉은 셀로판지를 투과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 때문에 정육점의 고기처럼 보였다. 더럽다거나 추악한 게 아니라 낯설었다. 유일한 여자는 옷을 입은 채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지, 나중에 옷을 챙겨 입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트레이닝복 바지 속에 속옷을, 전날 아침에 빨랫줄에서 걷어서 입은 아버지의 속잠뱅이를 입고 있지 않았다. 나는 속옷을 벗었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누가 벗긴 것인지, 누구에게 벗겨달라고 했는지, 내가 누구의 속옷을 벗겼는지, 자동적으로 벗겨졌는지도. 어쨌든 나는 도망쳤다. 낯선 남의 집에서 자다가 깨어 말없이 도망치는 아이처럼. 울지는 않았다. 마구 달리다가 숨이 차서 죽을 것 같았을 때 생각했다.
어쨌든 지금 나는 살아 있어. 다행이야. 방이 너무 더워서, 혹은 아이들이 그냥 옷을 모두 벗고 자는 버릇이 있었던 것뿐이야. 아니, 모든 게 계획적이었어. 보일러를 일부러 세게 돌렸던 거야. 금방 취하게 하고 제 손으로 옷을 벗게 만들었어. 여자애는 나를 붙들기 위한 미끼였던 거고. 원한 게 뭐였나. 4대 1의 혼음? 3:1:1? 1:1:1:1:1? ‘아무 일도 없었다’에서 나는 에이즈에 걸릴 것이고 온몸에 반점이 번져서 죽을 거라는 불안까지, 낙관과 비관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항문이 아프거나 화끈거리는 느낌은 없었지만 만져보는 건 두려웠다. 고환 아래가 따끔거렸고 이미 무엇인가 버섯이나 부스럼처럼 돋아 있을 것 같았다.
너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네게 가지 못했다. 그후 그날 밤은 내 인생에서 실제 경험한 최악의 황음(荒淫)이자 용암처럼 뇌를 태우는 번뇌에서, 어쩌면 세상사람 모두 비슷하게 비밀스러운 사건을 겪었으면서 굳이 말을 하지 않고 살아갈 뿐이라는 논리로 천천히 식어서 굳어갔다. 여관에서 밤새 틀어주는 포르노비디오를 보면서 위안을 얻는 동안 시간은 흘러주었다. 술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실연 역시. 밤샘 당구는 괜찮았다. 돈 후안, 오스카 와일드, 기욤 아뽈리네르를 읽는 것도. 너는 졸업까지 한 학기를 남겨두고 휴학을 했는지 낙제를 했는지 군대에 갔는지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너를 다시 만난 건 5년이 지난 뒤였다.
그곳은 게이들이 많이 모이는 바였다. 회사에서 회식을 하러 자주 가던 음식점에서 다녀오던 길이었다. 아무런 장식 없이 ‘情’이라는 한 글자만 써놓은 간판이 달린 술집이었다. 주렴이 쳐진 문이 있고 안에서 노을처럼 어둡고 붉은 조명 속에 서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회사 선배들은 서슴없이 그들을 ‘호모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별다른 이유도 없이 낄낄거렸다. 자신은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게 다행스럽고, 그래서 소수자도 약자도 아니니 핍박받거나 무시당하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에서 나오는 웃음 같았다. 나는 그들 앞에서 누구보다 드러나게 큰 동작으로 따라 웃는 체했다. 그러다가 사래가 들려 기침을 했고 벽에 대고 계속 기침을 하는 나를 두고 동료들은 먼저 가버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벽에서 돌아서다 나는 너를 보았다. 너 역시 나를 보았다. 너는 머리를 짧게 깎았고 수염이 거뭇했으며 몸에 붙는 검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퀸의 프레디 머큐리를 흉내 냈는지도 모른다. 너는 종이로 말아서 피우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나는 별다른 이유 없이 그게 마약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내용물을 담배에서 마약으로 쉽게 바꿔서 피울 수 있을 거라고.
“오랜만이다. 잘 지내?”
언젠가 교련복을 입은 채 그랬듯 너는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회사 사람들은 골목을 돌아가 시야에서 멀어진 참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면서 눈물을 닦았다. 혹시 네가 오해할까봐 고개를 도리질하면서 바쁘다, 가야겠다고 말했다.
“헤이 수영, 나 유학 가. 모레 출발.”
너는 급하게 말했다. 나는 예의상 어디로, 얼마나 오랫동안 가느냐고 물어주었다.
“빠리에 그림 공부하러 갈 거야. 프랑스는 말 배우는 게 정말 어렵대.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어. 나 너한테 편지해도 돼?”
나는 마음대로 하라, 잘 갔다 오라고 하면서 자리를 떴다. 네가 내 주소를 알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새 결혼을 했고 본가 역시 이사를 했으므로 바뀐 주소를 아는 친구가 별로 없었고 네게 알려줄 사람은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는 두달 뒤 정확하게 우리 집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 빠리에 안착했으며 어학연수를 시작했으니 내가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내가 너를 왜 염려하겠느냐고 반문하기도 전에 너는 지금 마음에 드는 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특히 연인을 벌써 사귀게 됐는데 연인 덕분에 프랑스 말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익혀가고 있다고 쓴 편지를 연달아 보냈다. 일련번호가 매겨진 다음 편지는 유학을 떠나기 전에 나를 꼭 보고 오려고 했고 볼 수 있어서 기뻤으며 나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너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라는 대목에서 나는 편지에 불을 붙여서 회사 뒤편의 쓰레기 소각장에 버렸다. 그뒤로 네 편지가 오는 족족 회사로 가져가서 뜯어보고 파쇄기에 넣거나 화장실 변기에 넣어 버렸다.
하지만 편지가 거듭되면서 그냥 버리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디에 쓸지는 모르지만, 뒀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편지는 빠리 생활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적은 일기 같았다. 빠뜨리지 않는 건 편지 맨 처음과 뒤 내 이름 앞에 붙은 ‘사랑하는’ 또는 ‘그리운’이라는 간지럽고 의례적인 수식어였다. 의외로 네 문장은 문학적이고 정확했다. 문장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때는 펜으로 단순한 그림을 그렸다. 그게 아주 간명하고 상징적이어서 역시 그림쟁이는, 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나는 이따금 네가 편지를 보내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만큼의 빈도로 답장을 보냈다.
편지는 오년 넘게 계속되었다. 그동안 나는 아이를 낳았고 이사를 했으며 회사에서 승진도 했다. 아내의 지속적인 산후우울증으로 부부싸움이 시작됐다. 아내가 자신이 임신해 있는 동안 내게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느냐고 공격했을 때 나는 네게 당분간 집으로 편지를 보내지 말라고 했다. 너는 회사로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고급 초콜릿이나 구하기 힘든 음악을 담은 CD 음반과 함께. 나는 그것을 회사 책상서랍 깊숙한 곳에 넣고 잠가두었다.
순조롭게 과장이 된 내가 회사 동료와 연애를 하기 시작한 건 30대 중반이었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오로지 아이에만 관심을 쏟을 뿐 나를 월급 토해내는 기계로 여기는 아내와는 심신 모두 소원해져 있었다. 네가 한국의 최연소 예술가로 빠리 중심가의 유명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점심 때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신문기사를 읽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독신이었고 삼십대 초반이었으며 많은 유부남의 눈길을 받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네가 내 친구라고 이야기했다. 너는 프랑스의 미술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교수들이 “당신 같은 작가가 왜 우리에게 미술을 배우려고 합니까. 이미 일가를 이루었고 우리보다 나으니 더이상 가르칠 게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자신들이 속해 있는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도록 주선해주었다는 과장된 이야기가 기사로 실려 있었다. 너는 프랑스의 화단에서 이미 정상급 위치에 오른, 한국 출신의 몇 안 되는 화가라고 했다. 그림은 전시되는 족족 ‘완판’을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네 그림보다는 보디빌더처럼 강인해 보이지만 군살 하나 없이 단련된 네 몸, 정면으로 쏘아보는 빛나는 눈에 관심이 많았다. 네가 보내준 전시회 도록도 우리 사이에 다리가 되어주었다. 불륜에는 핑계나 이유가 있지만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내 인생은 그때 가장 뜨겁게 불타올랐다. 가장 빛나던 순간이고 충만했으며 욕망도 강력했다.
걷잡을 수 없는 순간이 이어졌다. 오후의 서울 도심 여관, 출장지, 한강 고수부지의 차 안, 교외의 러브호텔, 회사 옥상에서 우리는 틈만 나면 들러붙었다. 나는 나사였고 그녀는 너트였다. 어떤 스크루드라이버가 내 엉덩짝 뒤쪽에 있는 십자 홈을 돌려서 그녀에게 필사적으로 파고들게 만드는지 몰랐다. 어쨌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한창 피스톤운동을 하던 중에 초등학교 시절 하이에나 같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네가 가끔 생각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순수한 사랑은 정감이 섞인 연애가 되고 결국 쾌락만이 목적인 불륜으로 변해갔다.
아내가 뒤늦게 내 불륜을 눈치 채고 어떤 근거에서인지 ‘가중처벌’을 한답시고 회사에 공개적으로 알리는 바람에 나는 사직서를 내야 했다. 이혼을 당하면서 퇴직금과 아파트를 모두 내줬다. 내 상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다. 내 인생 최악의 시기였다.
그때 너는 최단기간에 정상급에 진입한 재불 화가로서 일시 귀국해서 국내 최고의 화랑에서 전시회를 연다고 했다. 네가 연락을 해왔을 때 나는 강남의 유흥가에서 룸살롱 아가씨들을 데려다주는 자가용 영업을 뛰고 있었다. 가진 건 외제차 하나밖에 없었고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너는 내가 운전을 해서 자신을 도와주기를 원했고 우리는 전시회에 필요한 크고 작은 일을 함께 했다. 이를테면 공항에서 그림을 받아 화랑에 실어가거나 국내 최고의 양복점에서 턱시도를 맞춰 입거나 언론사와 인터뷰를 할 때 너를 약속장소에 데려다주고 호텔까지 다시 모시고 가는 것 같은. 전시 중에 네 그림은 모두 팔려나갔다. 그림의 질이 높은 데 비해 값이 싸다는 게 중평이어서 중산층 부부들까지 네 전시회에 손을 잡고 몰려들었다. 그렇게 되는 데는 언론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어째서인지는 너도 몰랐고 나는 더욱 몰랐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기 전에 너는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여행기간 중에 내 생일이 있었고 네가 큼직한 선물을 안겨줄 것 같다는 예감에 나는 네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나 빠리에 있을 때부터 내내 꿈꿔오던 게 있어. 한국의 러브호텔에 가보는 거야.”
내가 차를 몰고서 서울을 빠져나와 한시간쯤 달렸을 때 너는 말했다. 나는 ‘꿈의 궁전’이라는 평범한 이름의 외딴 모텔 앞에 차를 세웠다. 내가 한창 연애를 할 때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낡은 건물에 손님이 거의 없는 썰렁한 곳이었다. 건물 외벽은 칠이 벗겨지고 유리에는 금이 가 있었다. 주변은 한식당조차 없는 농촌이었다.
모텔 복도에는 철이 한참 지난 비디오테이프가 만화대본소의 파본처럼 쌓여 있었다. 너는 거기서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영화를 골랐고 헨리 밀러 원작의 영화 ‘북회귀선’을 선택했다. 나는 모텔 카운터에 맥주와 마른안주를 주문했다. 밤안개가 낀 빠리의 몽환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가로등 불빛 아래 자전거를 타는 연인들이, 그 장면만이 인상적인 예술영화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기대했던 포르노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맥주만 마셨다. 비닐로 싼 마른안주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너는 평면 모니터 속에 들어가기라도 할 듯 영화에 집중했다.
침대는 붉은 비로드가 씌워진 심장 모양이었고 조명 역시 분홍색이었으며 망사 커튼이 침대를 둘러져 있었다. 눕자마자 천장의 거울이 보였다. 나는 즉시 침대에서 자는 것을 포기하고 소파를 선택했다. 냄새 나고 꺼진데다 구멍이 났으며 얼굴에 뭔가가 쩍쩍 묻어나는 소파는 내 인생처럼 끔찍했다.
너는 침대에 엎드려서 감탄사를 연발하며 영화를 끝까지 보았다. 또 영화를 고르러 나가는 네게 나는 맥주를 더 주문해달라고 부탁했다. 언제 잠들었는지 몰랐지만 그날 밤 타이트한 내 속옷은 벗겨지지 않았다. 그런 시도조차 없었다. 너는 생일이나 선물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공항에서 헤어질 때 너는 나를 포옹했고 사랑한다, 편지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너는 기름값, 밥값, 차값, 주차비, 고속도로 통행비, 일당, 적절한 기회비용 등 모든 경비를 부담했지만 내게 특별한 의미가 담긴 금일봉을 하사하지는 않았다. 그건 친구에 대한 대접이 아니니까. 친구가 아무리 원한다 해도.
그뒤에 너는 한번 정도 더 전시회를 가졌다. 국제적인 성가(聲價)가 나날이 높아지면서 국내 시장에서의 작품 가격도 올라갔다. 너는 다시 한번 나를 고용했다. 그동안 내 일당과 차값은 많이 올랐고 기름값 등 물가도 올랐다. 그런데 지난번에 비해 할 일이 확 줄어들었다. 너는 사적인 외출이 잦았고 그때는 내가 너를 따라나설 수 없었으며 일당도 당연히 없었다. 너의 가장 큰 관심은 내가 목적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외출에 있었기 때문에 전시회는 그저 그랬다. 너는 모든 예술가에게는 ‘한때’라는 게 있는데 그게 자신에게 아직 오지 않았든지 지나갔든지 둘 중 하나일 거라고 했다.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두번 다시 너의 ‘가방모찌’는 하지 않겠다, 억만금을 주지 않는 한은. 그렇게 맹세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기분이 나빴던 건 확실하다. 그렇다고 맹세를 다 지키면서 살기에 인생은 짧고 구름 끼는 날이 대부분이다.
한때 내 섹스 파트너였던 여자를 룸살롱이 밀집된 동네 길가에서 우연히 만났다. 싱겁게 다시 불이 붙었다. 재미는 없었다. 그 여자는 애인도 남편도 없는 무주공산이고 나도 그랬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그만 만나자고 동시에 말했고 동시에 웃어버렸다. 너트와 볼트는 용도를 다하고 나면 그냥 쇳조각일 뿐이었다. 네 아버지의 공장이 생각났다. 그건 불타버렸다. 시간과 한 시대, 사람들과 함께.
나는 모든 일을 혼자 해결했고 해결할 수 있었다. 아이들 양육비를 벌어 송금해야 했고 살아가야 했고 예술 같은 건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다행히 나는 농촌 출신이었고 내 피에는 수십대를 이어온 농부의 유전자가 들어 있었으며 위기를 맞을 때마다 끈기와 근면성, 낙천성, 집중력 같은 스위치가 때맞춰 켜져주었다. 나는 개미처럼 묵묵히 일했다. 네 그림 값이 얼마나 더 올랐는지, 한때의 주식형 펀드와 예술시장이 그랬듯이 거품이 꺼지고 말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하지만 이제는 여유가 생겼다. 새로운 여자도 만난다. 나이는 나보다 약간 많지만 아직 끝물의 강렬한 단맛이 남아 있고 믿기 힘들 정도로 푸근하다.
너는 약속장소인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혼자 나와 있지 않았다. 찰리 채플린과 아돌프 히틀러의 중간쯤 되는 인상의 금발 독일인 남자가 일어서서 나를 맞이했다. 그는 얼마 전 초국적금융회사의 한국지점에서 자산운용을 하는 책임자로 부임하게 되어 너와 함께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에게는 결혼 전력이 있었고 아들과 딸이 있으나 뒤늦게 자신의 ‘성향’을 깨닫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고 이혼했다고 했다. 그의 지갑에 들어 있는 사진으로 볼 때 전처 포함 온 식구가 모두 금발이었다.
“결혼생활은 끔찍한 의무의 연속이에요. 현수와 나, 우리 둘의 관계는 아주 자유롭죠. 전혀 서로를 구속하지 않아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유럽인 특유의 개방성 때문인지, 내가 이미 그들이 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오해한 데서 나온 것인지는 잘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똑같은 회사에서 만든 스마트폰에 똑같은 케이스를 씌우고 있었다. 같은 브랜드의 양복을 입었으며 동시에 각자의 스마트폰에 도착한 페이스북 내용을 두고 가벼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면전에서 직접 고백을 듣고 보니 망치로 미간을 맞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많이 놀랐니?”
국내외의 수많은 연예인, 유명인이 게이임을 밝히고 그 때문에 많은 편견과 불이익을 감수했으며 동성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된 나라도 여럿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긴 했다. 그렇다고 충격이 덜한 건 아니었다.
“나, 나, 난 정말 네가 그런 줄은 몰랐다. 도, 도대체 언제부터 그, 그렇게 된 거야?”
나는 되도록 네게 상처가 되지 않을 말을 고르려고 애썼다. 하지만 기껏 나온 질문이라는 게 너무도 뻔한 것이었다. 천장을 향해 얼굴을 들고 생각에 잠겨 있던 네 눈에서 물기가 배어 나왔다. 이윽고 내가 ‘으악’ 하고 소리칠 새도 없이 눈물이 방울져서 흘러내렸다. 아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래? 생각해보니 너는 내 말에 상처를 받아서가 아니라 그동안 스스로의 정체성을 숨겨오면서 겪었을 고통과 번민이 생각나서 눈물을 흘린 것이었다. 너는 목이 메어 염소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어릴 때부터, 내가 철들기 이전부터인지도. 너를 대학에서 처음 만났을 때쯤에는 내가 여자애들보다는 남자애들에게 훨씬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어. 하지만 너는 아냐.”
“뭐가?”
“너희, 제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이성애자들은 꼭 그렇게 묻더라. 언제부터 게이였느냐. 나를 어떻게 생각해온 거냐. 나를 볼 때 흥분한 거 아니냐. 기분 더럽다…… 내 대답은 이래. 나도 눈이 있고 수준이 있거든? 미안하지만 너희들은 내 취향이 아니야.”
금발은 우리가 나누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시선만 발화자에게서 발화자에게로 옮겨다녔다. 그러다가 네가 눈물을 흘리자 나를 노려보기도 했다. 네가 영어와 불어, 독일어가 뒤섞인 말로 통역을 해주었다. 금발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열을 올리느냐는 듯 고개를 으쓱하고는 뭐라고 요란하게 지껄여댔다. 그 녀석이야말로 교만해 보였다. 망해버린 제국의 환관처럼.
“저 놈이 뭐래? 몇살이야? 언제 만난 거야?”
“하나씩 대답할게. 자기는 커밍아웃 하고 나면 가장 흔히 듣는 반응이 너는 위에서 하니 아래서 하는 편이니, 그러니까 탑이냐 바텀이냐 하는 거래. 두번째, 쟤 우리보다 다섯살 어려. 만난 지는 육년 됐고. 빠리에서 만나서 파트너가 된 뒤로 일년이 멀다하고 나라를 옮겨다니면서 근무했지. 덕분에 세상 구경은 많이 했네. 이 식당 꼬꼬뱅은 정말 괜찮은데. 제대로 된 부르고뉴 방식이야. 부야바스도 맛있어 보여.”
“그래서 너희들은 누가 바텀이고 누가 탑이라는 거야?”
“오랜만에 만난 친구끼리 밥 먹으면서 나누는 대화치고는 참 수준 있고 우아하게 느껴지네. 좀 편한 자리에서 대화를 이어갑시다.”
저녁을 마친 뒤 너의 제안으로 브루어리하우스—수제(手製) 에일 생맥주를 판다는 곳—으로, 아니 술을 손으로 만들지 발가락으로 만들기도 하느냐는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옮겨갔다. 독일 바바리아 방식으로 국내의 어느 산중에서 만들었다는 생맥주가 나오자 금발은 제 세상을 만난 듯 말이 많아졌다.
“저 자식, 이름이 뭐야? 히믈러야, 아우토반이야? 밥맛없는 놈이네, 정말. 진짜 다국적기업 소속이긴 한 거야? 저렇게 혼자 잘나서 어떻게 여러 나라 다니면서 남 비위 맞춰가며 장사를 해? 옛날 같으면 모가지부터 뎅겅 잘릴 인상이구만.”
어쩐지 내 입에서는 고운 말이 나가지 않았다. 아, 내가 혹시 질투라도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보일까 싶어 입술이 말랐다.
“아르놀트. 아까 소개했잖아. 아르놀트 슈토름이라고.”
“뭔 놈의 이름이 그렇게 부르기 어렵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친척이냐? 아, 그 아놀드는 슈왈츠제네거 집안이구만. 그 인간도 지 마누라 놔두고 나이 든 가정부를 건드렸다나 어쨌다나 그래서 내 맘에 쏙 들었었는데. 하여튼 넌 그런 이름이 뭐가 좋아서……”
상황이 마음에 안 들 때 내용 없이 장황스러워지는 버릇이 또 나온다 싶어 나는 말을 멈추었다.
“저 사람 독일계 유태인이야. 머리도 염색한 거고. 이름도 할아버지 때 독일식으로 바꿨다고 하더라고. 서로 더 친해지고 나서 절실함, 열정이 살짝 가라앉은 뒤에 말해 줬어. 저 사람에게는 소수자로서 뼈아픈 상처가 있어. 나는 그걸 금방 알겠더라. 그래서 첫눈에 사랑하게 된 건지도……”
“성적 소수자로 어릴 때부터 상처가 많은 사람이 인종적 소수자를 사랑하게 됐다? 유럽에서는 게이가 소수자가 아닌가보지?”
“신경을 안 쓴다는 거지. 아니 우리보다 훨씬 덜 쓴다는 거야. 인종적인 편견만 빼면 이들은 참 평등하고 민주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집안일도 정확하게 분담해서 하고. 우리 지금 살고 있는 집이 한남동 외교관들 많이 사는 거리인데 아르놀트랑 나는 요일별로 요리와 청소를 나눠서 하기로 했어. 한번은 쟤 손님이 열명쯤 와서 떠들썩하게 파티를 하고 갔는데 청소를 할 생각을 안하고 게임만 하고 있는 거야. 내가 화가 나서 진공청소기를 집어던지니까 자신이 청소하는 날이 아니라고, 내가 화를 내는 걸 자기는 이해를 못하겠대. 그때 헤어질 뻔했어.”
“헤어지기도 해? 그냥 각자 집으로 가면 되는 거 아냐?”
“우린 동거계약서를 썼으니까. 물건을 살 때도 나중에 절반으로 나눌 수 있는 걸 사는 편이거든.”
술을 좀 마시고 나서 용기가 난 나는 이따금 영어로 아르놀트에게 말을 걸었다. 그때마다 그는 좋은 질문이라고 반색을 하더니 더럽게 길게도 대답했다. 네가 번역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중간에 몇번씩 물어봐야 할 정도로. 그러니 자리가 지루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너와 내가 대화를 시작하면 기이할 정도로 차가운 낯빛이 되어—자기중심적인 표정의 전형이라고 할 만했다—생맥주를 마시고 또 주문했다. 술집 남자 종업원에게 미소를 지은 게 우리 두 사람에게 웃어 보인 시간보다 길었을 것이다.
“나 너한테 부탁이 있는데.”
“뭐야, 그게? 이제 와서 너랑 자달라는 건 아닐 거고.”
“난 널 섹스 상대로 원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냥 노래방에 같이 좀 가줘. 빠리에서부터 노래방에 가고 싶었어. 가서 듣고 싶었어. 옛날 노래, 내가 대학 다닐 때 네가 잘 부르던 운동가요 같은 거. 그래줄 수 있겠니?”
“그러자, 노래방 비는 저놈보고 내라고 해. 술은 네가 사고.”
내가 노래방을 가본 게 정말 얼마만인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자칫하면 바가지를 쓰기 쉬운 가요주점 ‘노래빵’을 잘 피했고 ‘노래빠’도 지나갔지만 ‘노래반’에는 속수무책 속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 셋이 지하 가요주점에 들어가자 여주인은 반색을 했다.
“아가씨 주문해요?”
난 분명히 그렇게 들었다. 나는 아가씨 필요 없다, 자체적으로 조달하겠다고 했다. 노래반이 노래방과 다른 건 넓은 홀에 노래방 설비가 되어 있었고 무대에 서서 노래를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원한다면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아가씨를 주문하든 찜을 쪄먹든 마음대로였다. 무슨 애국심에서가 아니라 나는 화장실이 있는 뒷계단으로 가는 복도 안쪽 방에서 뒤엉켜 있는 남녀를 아르놀트가 보지 말았으면 싶었다. 그냥 무참했다. 금발의 유태인이 중세 고성의 주인처럼 오만하고 고고한 표정을 짓는 것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노래를 골랐다. 네가 원하던 대로 운동가요이면서 대중적으로 친근한 곡을 서너곡 골라서 부르기 시작했다. 너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긴 다리를 뻗친 채 노래를 들었고 아르놀트는 노래책을 계속 뒤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김빠진 맥주처럼 재미없는 노래를 노래방 특유의 적당한 박자, 적당한 톤으로 부르면서 신물이 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 나는 네게 마이크를 넘겼다.
“야, 이현수, 너야말로 간만에 조국의 품에 안겼으니까 옛날 노래나 해봐라. 제대로.”
너는 아르놀트에게 뭔가를 이야기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가 고른 노래의 제목이 모니터 화면에 나타났다. 고복수의 「짝사랑」이었다.
아하으아 으으악새 스을피 우우니 가으을이이인가아요 지나아친 그 세에워얼이이 나르을 울리입니이다 여울에 아로옹 저어즌 이즈르어진 조가아악달 가앙물도 출렁출렁 목이이이 멥니이이다아……
목이 멘다는 부분에서부터 목이 멘 네가 2절을 부르는 동안 너의 별명을 낳은 노래의 제목이 ‘으악새’가 아니었다는 것을 아르놀트에게 어떻게 표현할까, 짝사랑이 억새와 무슨 상관인지 생각했다. 상관은 무슨 상관. 무상관의 상관성이다. 그러느라 네 노래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 너는 노래를 마치고 아르놀트의 옆자리로 돌아와 품에 안기기라도 할 듯하면서 담뿍 미소를 담아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르놀트는 네 손을 잡아서 위로 쳐들고는 입을 맞추더니—무슨 은혼식 뒤 파티로 노래방에 온 부부도 아니고—바지에서 휙휙 바람소리를 내며 무대로 걸어나갔다. 그가 고른 노래는 놀랍지도 않게,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였다.
그의 음색은 의외로 기름졌고 많이 불러본 노래인 듯 박자와 음정도 정확했다. 그러면 뭐하나. 노래가 싫은데. 세상에는 두 부류의 남자가 있다. <My way>를 노래방에서 부르는 사람과 절대로 그 노래를 듣지 않으려는 사람. 나는 그 범주에 게이도 집어넣었다. 세상 남자에는 한 부류가 더 추가된다. <My way>를 노래방에서 부르는 게이. 너의 열렬한 박수에 이어 아르놀트는 한곡을 더 불렀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Can’t help falling in love>. 듣자 하니 이미 한국의 노래방에서 많이 놀아본 솜씨였다.
그의 노래가 진행되던 중에 한 무리의 젊은 여자들이 구두소리를 내며 계단을 통해 내려왔다. 그들 역시 한잔 하고 나서 노래방을 찾아나섰다가 취기에 분별력이 떨어져 ‘노래반’에 들어온 게 명약관화했다. 하지만 그들은 노래를 부르는 금발의—얼음조각처럼 잘 생긴—외국인에게 호기심을 느낀 듯 잘못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도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무대 오른쪽 자리에 모여 앉았고 자기들끼리 뭔가를 속삭이며 돌아가는 꼴을 관망하고 있었다. 아르놀트는 여자들을 보고는 뭐가 좋은지 헤벌쭉 웃더니 내가 제목을 전혀 모르는 1990년대의 빠른 춤곡을 골랐다. 그리고 음정과 박자를 제대로 맞추지도 못하면서 악다구니를 쓰듯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안쓰러움을 느낀 건 왜였을까. 왜 여자들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을까. 내가 만류할 겨를도 없이 아르놀트는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인 듯 또다른 노래를 골랐다. 제가 요람에서 라디오를 통해서나 들었을 80년대 후반의 아이돌 뉴키즈온더블럭의 <Step by step>이었다. 아르놀트가 간신히 박자를 맞춰 노래를 부르는 사이 여자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 아르놀트가 진땀을 흘리고 있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저 인간, 양성애자로 제대로 양다리 걸친 거 아닌가.
그때 네가 퉁겨진 대나무처럼 무대 앞으로 뛰쳐나갔다. 너는 아르놀트와 여자들 사이의 넓은 공간을 무대로 발레리노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이라기보다는 사지를 순서대로 뻗었다 걷었다 하는 식의 맨손체조에 가까웠다. 노래가 레이프 가렛의 <I was made for dancing>으로 바뀌었다. 길었다. 내가 들어본 어떤 노래보다 긴 듯했다. 너는 필사적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빌어먹게 노래를 못 부르는 연인과 그를 동물원의 외국산 동물처럼 바라보는 여자들 사이를 가로막은 채 손발과 몸통을 폈다 오므렸다 하며 춤추고 있었다. 기름이 잘 쳐진 기계처럼, 축제장의 키다리 인형처럼 관절은 원활하게 움직였으며 동작은 컸다. 하지만 그걸 결코 아름답다고, 춤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기괴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여자들이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네 선의와 헌신이 아르놀트에게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고 있는 건 확실했다. 아르놀트는 제가 자발적으로 뛰어든 곤죽의 진탕에서 벗어나려고 또 노래를 신청하고 불렀다. 너는 춤을 추고 또 추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노래 반주가 멈추었다. 너는 온몸이 땀에 젖어 자리로 돌아왔다. 견디다 못한 여자들은 일어서서 우루루 가버렸다.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아르놀트는 무대 중앙에서 노래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미친놈. 미친놈의 새끼들.”
내가 중얼거리는 동안 너는 긴 손가락을 뻗어 머리에 묻은 땀을 훑어냈다.
“그래도 오래 살다보니 정이 들었어. 미우니 고우니 해도 결국 내 사랑인데 어쩌겠니.”
나는 싸이키델릭 조명이 소리 없이 돌아가고 있는 천장을 향해 오래도록 얼굴을 돌리고 있다가 천천히 물었다.
“사랑이야?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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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가요 「청산별곡」에서 인용. 뜻은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