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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시평
허울뿐인 교육과정 개정이 교육을 망친다
최수일 崔水日
수학교육연구소장 choisil@hanmail.net
한 나라의 교육의 역사는 교육과정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교육에서 교육과정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아홉번에 걸친 개정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좋은 교육과정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큰 문제는 교육과정의 현장 시행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새로운 교육과정을 만들었으면 현장에서 그것이 제대로 적용되고 있는지, 개정의 취지를 뒷받침하는 여러 정책이 잘 시행되고 있는지 등을 분석하고 부족한 점이나 미비한 부분을 보완해서 교육과정이 잘 정착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노력은 교육부만이 아니라 교육과정을 만든 사람들이 직접 해야 한다. 그런데 여태까지의 모습을 보면 교육과정을 만드는 사람은 따로 있고, 시행 현장에서는 교사가 자신의 생각대로 가르친다. 그러다가 행정부나 정권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현장의 불만이나 시행과정의 문제점은 아랑곳없이 교육과정을 개정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숱한 개정에도 실제로는 수십년 전과 내용상 별로 다를 게 없는 교육과정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멀리 돌아볼 것도 없이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2015 개정 교육과정’ 논란만 봐도 알 수 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은 2009 개정 교육과정이 현장에서 아직 제대로 시행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나온 것이라서 이전의 2007 개정 교육과정 졸속 시행과 마찬가지의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2013년부터 적용되고 있는 2009 개정 교육과정은 시행 2년도 채 되지 않았고, 초등 5·6학년, 중 3학년, 고 2·3학년에는 아직 적용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교육과정이 또 바뀌는 데 따르는 교사들과 시민들의 피로감은 엄청나다.
둘째 문제는 교육과정 총론과 각론의 괴리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총론의 개정 이유가 각론에 먹히지 않아왔기에 이번 2015 개정 교육과정 연구진은 이 점을 반드시 개선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총론팀과 각론팀의 갈등이 다른 어떤 때보다도 크다. 총론팀에서는 일부 교과의 내용을 축소할 필요가 있다는 개정 이유를 발표했지만 해당 교과는 이를 무시하고 내용을 더 늘리는 개정안을 내놓고 있다(그러나 서류상으로는 축소했다고 발표할 것이다). 이런 괴리가 왜 계속되는 것일까? 가장 큰 원인은 교육과정 개정이 너무 급작스럽고 강압적이기 때문이다. 바쁘게 개정일정을 잡아놓고 거기에 맞춰서 무조건적으로 진행하는 방식으로는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어렵다.
더구나 각론팀의 개정 요구를 수렴하여 총론팀이 개정안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이뤄진 아홉번의 개정 모두 총론팀이 ‘위’로부터 온 요구를 받아들여 결론을 내놓고 각론팀에게 강요하는 식이었다. 이 강요는 거절할 수 없는 것이어서 각 교과에서는 형식상 총론의 요구대로 개정에 응해왔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에 부합하는 각론을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제7차 교육과정(1997년 고시) 이후에 전면적인 교육과정 개정은 없다고 선언을 해놓고도 벌써 세번째 총론을 바꾸고 있는데, 각 교과에서 부분 개정하겠다고 나선 경우가 아직 없는 실정에서 바꾸지 않겠다고 선언한 총론만 왜 계속 바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각론팀의 피로감도 큰 상황이다.
특히, 이번 2015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의 발단은 2013년 10월 25일 2017학년도 수능체제 확정시, 교육부가 융합형 수능을 위해 통합형 교육과정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부터다. 그러나 정작 2014년 9월 24일 발표한 2015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 총론 주요사항에는 수능체제에 대한 내용은 빠져 있다. 수능을 고칠 의지나 정책대안도 없이 무조건 교육과정만 무의미하게 고치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셋째 문제는 교육과정이 대학입시와 학교시험 제도를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개정도 수능시험 개편과 연계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수능시험 개편 논란은 교육과정 개정보다 훨씬 민감하고 합의가 어려운 부분이어서 결국 이 논의는 시작도 못한 채 교육과정 개정안만 내놓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대학입시는 한번도 교육과정을 지켜오지 않았다. 각 교과의 교육과정 마지막 장(章)은 ‘평가’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 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평가방안은 미사여구에 불과하다. 국가가 관리하는 수능시험은 자기들이 만든 교육과정을 스스로 어기고 있다. 교육과정의 ‘평가’ 항목에서 나열하고 있는 평가방식은 교육학 책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며, 학교현장에서는 전혀 시행되고 있지 않다. 심지어 수능시험에 학교 내신시험도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다.
제7차 교육과정 때부터 우리나라는 국가 수준에서 성취 기준과 성취 수준1)*을 만들어 학교현장에 보급해 각 학교가 교육과정의 목표에 부합하는 평가를 실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수능시험이 교육과정의 평가규정을 어기고, 국가 수준의 성취 기준에 없는 문제를 출제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국가 수준에서 성취 기준과 성취 수준을 개발하는 목적은 이를 교육현장에 보급함으로써 학교에서의 교수·학습활동 및 평가활동을 안내하고 개선하는 데 있다. 수능시험이 교육과정의 성취 기준을 어기면 학교의 수업만으로는 대비가 불가능하다. 교육이 학교의 정상적인 수업만으로 완성되지 않기 때문에 사교육 등 추가적인 교육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 문제는 각 교과별로 교육과정 개정을 위한 평상시의 준비와 노력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교육과정이 갈수록 좋아지려면 국가적인 개정 요구에만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각론팀이 아닌 상설 교육과정위원회가 존재해야 한다. 거기서 지속적으로 변화가 필요한 부분, 수정해야 할 부분, 새로 만들어야 할 부분 등을 모아서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이런 연구가 사오년 이상 쌓이면 저절로 교육과정을 개정할 필요가 대두될 것이고, 수시개정 체제에 부합하는 교육과정 개정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현장에서 교사들의 수업과 교육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수시로 수집하고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교육부에는 총론과 각론 부분의 여러 교육과정 심의위원회가 상설되어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운영되고 있지 못하다. 교육부나 정치권의 개정 요구가 들어올 때만 모여서 논의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2년 임기인 이들 심의위원 중에는 임명장을 받으러 모이는 것 말고는 단 한번의 회의 없이 임기를 마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육과정에 문제가 많으니 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작금의 교육문제는 온 국민의 관심사이자 괴로움이다. 사교육비가 가정경제에 미치는 부담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지만 마땅한 해결책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교육과정이 잘 만들어지고, 모든 교육실행이 교육과정과 부합하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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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취 수준이라는 용어는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 처음 나왔고, 제7차 교육과정과 2007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평가기준이라는 용어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