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황석영 黃晳暎
1943년 만주 창춘(長春) 출생.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고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황석영 중단편전집』(전3권)을 비롯해 장편 『무기의 그늘』 『장길산』(전12권) 『오래된 정원』 『손님』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이 있음.
만각 스님
그해 여름에 나는 글을 쓸 거처를 찾고 있었다.
십년 가까이 끌어오던 연재소설의 마지막 장을 끝내야 했지만 도무지 일손이 잡히질 않았다. 참사가 벌어진 뒤에 나는 다른 지방에서 일년 넘게 지내다가 광주로 돌아와 다시 한해를 허송세월로 보냈다. 시내에 나가보아도 아는 이들은 여전히 잠적하거나 구속된 상태였다. 운 좋게 화를 피하고 남게 된 사람들은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되도록 당시의 참경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외출해서도 누군가를 만나기가 불편하던 시절이었다. 아내는 내가 광주의 후유증에 휘말리고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이게 될 것을 염려했다. 최군이 서울에서 내려와 있었고 아내는 그에게 내가 집필할 마땅한 장소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찾아낸 곳은 담양에 있는 절집이었다. 담양은 광주에서 차로 삼십분밖에 걸리지 않았고 영산강 상류의 제법 너른 개천과 왕대밭이 어우러진 조용한 읍이었다. 나는 이삿짐을 용달차에 싣고 최군과 함께 담양에 갔다. 이삿짐이라야 책상으로 쓸 접이식 플라스틱 밥상과 자료와 책과 책장이 전부였다. 읍내 끝자락의 다리 건너편 언덕 위에 그 절이 있었다. 오솔길 모퉁이에 ‘호국사’라는 작은 나무 팻말이 걸려 있었다. 나는 소리 내어 절 이름을 읽어보고는 말했다.
지킬 호(護)에 나라 국(國)이라, 어쩐지 제목이 수상한데?
최는 그냥 무심하게 대꾸했다.
호국불교라는 말두 있잖아요.
트럭은 숨 가쁘게 매연을 토하며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 절 마당에 들어섰다. 초입에 있는 방 한칸짜리 집에서 스님이 나왔다. 연이어 나란히 붙어 있는 한옥의 대청마루에서 풍채 좋은 할머니가 내다보았고 부엌에서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절의 요사채라기보다는 남도 어디에나 있는 일자 한옥의 살림집으로 보였다.
앞서 찾아왔던 최군이 나를 스님에게 소개했고 나는 그와 마주 서서 어색한 합장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곳은 원래 대처승 절집이었다는데 주승은 죽고 그의 안사람이 권리를 물려받았다. 작은 보살이라 부르는 몸매가 뚱뚱하고 후덕하게 생긴 육십대 초반의 할머니가 이 절의 주인인 셈이었고, 공양주 보살이라는 칠십대의 꼬부랑 할머니가 부엌살림을 맡고 있었다. 이 절의 유일한 승려는 이제 갓 환갑을 맞은 만각이라는 중이었는데 작은 보살이 그를 모셔다 놓았다고 했다. 암자라고는 해도 읍내 안에 있어서 재를 지내거나 치성 드리려고 오는 신도들도 제법 끊이질 않아서 이들 두 할머니와 스님의 말년이 고생스러울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아, 식구가 하나 더 있는 걸 빼먹을 뻔했다. 복실이란 아홉살 먹은 계집아이가 살림집에서 두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내가 기거할 집채는 살림집 옆의 법당인 극락보전과 기역자처럼 엇갈려서 마당과 절 입구를 향하고 있었는데, 창호지 바른 방문 넷이 보이고 앞에는 툇마루가 길게 일직선으로 달려 있었다. 이 집채의 방은 모두 네칸인데 내가 쓸 방은 오른쪽의 방 두칸을 튼 상하방이었다. 두 방 가운데 미닫이가 있었지만 좌우로 열어두고 한 방처럼 쓰게 되어 있었다. 내 방 옆의 두 방들은 빈 방이었다. 말하자면 이곳이 그야말로 손님이나 승려들이 기거할 요사채의 꼴을 하고 있었다. 얼핏 듣기로는 그전에 고시생이나 입시생이 더러 기숙을 했다고 한다. 툇마루의 널판이 아직 거칠고 기둥도 나무색이 선명하니 아마도 절집이 조성된 뒤 가장 나중에 지었을 것이다.
최군과 내가 이삿짐 중에 가장 큰 책장을 맞들어 방 안에 들여놓으려고 쩔쩔매는데 스님이 달려들어 방문을 좌우로 활짝 열어젖히고는 우리를 거들어주었다. 책장을 비스듬히 기울여서 간신히 문지방을 넘어갔다. 책을 꽂고 책상을 펴놓고 트렁크에서 옷가지를 꺼내어 벽에 대충 걸고 나니 어느 틈에 저녁때가 다 되었다. 읍내도 살필 겸해서 최군을 배웅하려고 함께 절 경내를 나서려는데 살림집 앞의 평상에 앉았던 스님이 말했다.
공양 들지 않고 어디 나가시오?
네, 오늘은 읍내 나가서 먹을라구요.
스님 옆에 앉았던 작은 보살과 부엌문 앞에 섰던 공양주 보살이 차례로 말했다.
선생님은 이제 매일 자실 테지만 손님두 절밥 한번 잡숴보구 가요.
시방 표고랑 가죽잎 맛나게 튀겨놨어. 손두부도 지져놓고, 오늘 찬이 걸은디.
우리는 그저 웃어 보이며 가볍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고 얼른 언덕길로 접어들었다. 언덕을 내려가 다리를 건너자마자 뚝방을 따라서 오일 장터가 나오고 상가와 식당이 늘어선 중앙통이었다. 거처를 찾아주고 이사까지 도와준 최군을 그냥 보낼 수는 없어서 광주까지 알려진 떡갈비 전문 식당에 들어가 앉았다. 소주를 마시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친구 잘 있지?
나는 윤의 서울 은신처를 아내가 주선한 것을 알고 있었고 최가 그의 마지막 행적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윤은 이미 동료들의 도움으로 마산에서 밀항선을 탔고, 언젠가 아내는 윤이 무사히 미국에 도착했으니 안심하라는 말을 했었다. 최는 짐짓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누가요,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별호를 말했다.
합수 말야.
강이나 냇물이 합친다는 한자겠지만 전라도 곁말로 합수는 뒷간 거름을 뜻하는데 윤이 스스로를 잔뜩 낮춘 별명이었다. 최는 긴장한 표정으로 변하면서 얼른 주위를 둘러보더니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손님 서넛을 확인하고는 다시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
건강하게 잘 있대요.
짧게 대답한 그가 내 술잔을 채웠다. 서로 잔을 가볍게 부딪치고 동시에 마셨다. 최가 화제를 바꾸려고 딴소리를 했다.
인철이형이 입원했답니다.
김인철은 상원이가 죽던 날 도청에 함께 있었다. 그는 옆방에서 창문 전방을 지키고 있다가 계엄군이 들이닥치자 칼빈 총을 층계 아래로 던지고 기어 내려갔다. 군인들이 사정없이 개머리판으로 그의 머리를 짓찧었다. 상무대에서 응급치료만 받았고 달포 넘도록 거친 조사를 받았다. 우리는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지난 겨울 사면 때에 중죄인을 빼고는 거의가 교도소에서 나왔는데, 그는 나오자마자 아내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친정집이 있는 섬으로 가서 요양을 했다. 그런 중에 몇번이나 가출을 해서 그의 아내와 동네 사람들을 애먹였다고 한다. 육지로 나가는 부두 뱃머리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산을 타넘어 갔다가 섬의 반대편에서 방황하는 그를 데려오기도 했다. 그는 언행이 좀 이상하기는 해도 주위 사람들의 얼굴은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최군을 보내고 나는 절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아홉시 조금 넘었을 뿐인데 사방이 고즈넉하고 풀벌레 소리만 어둠 속에 가득 찼다. 나는 모처럼 절에 왔으니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생각이었다. 예불은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하니까 참례하지 못하더라도 아침밥은 먹을 작정이었다. 일곱시쯤이라면 속세에서 출근하기 전에 아침 먹는 시간이지만 절에서는 늦은 시간이다. 나는 아침밥을 일주일에 두세번 먹을까 말까 하면서 지내다가 나중에는 그나마 그만둬버렸다. 역시 일상에 익숙해지면서 올빼미 같은 평소의 생활습관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열시쯤에 나는 침실로 정한 상하방의 아래 칸에 자리를 펴고 누웠다.
호국사에서의 첫날 밤, 아마 새벽 두시가 넘었을 것이다. 소변이 마려워서 저절로 잠이 깼다. 사방이 캄캄한데 형광등의 점등 줄을 잡으려고 허공을 휘저어보다가 그냥 창문을 밀고 툇마루로 나섰다. 툇마루 아래 섬돌에 발을 딛는데 잠결에 잘못 디뎠는지 삐끗하면서 그대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일어서려니 발목에 힘이 빠지고 아파서 땅을 디딜 수가 없었다. 변소는 그 집채의 왼편 끝에 있었다. 처마 밑에 잇대어 달아낸 헛간이었다. 안에는 목물을 할 만한 넓적한 구둘돌을 놓았고 함지도 있어서 나는 여름내 거기서 땀을 씻었다. 맨 안쪽 구석에 쪽문이 있는데 그게 변소였다. 헛간 문을 열었다가 어둠 속에서 전구를 어떻게 켤지 몰라 얼른 포기하고 돌아서서 풀숲에 오줌을 누었다. 그리고 절뚝거리며 방으로 돌아와 다시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발목이 부어올라 복사뼈가 펑퍼짐해 보일 정도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욱신거리고 통증이 느껴졌다. 내가 툇마루를 내려와 깨금발로 껑충거리며 외발뛰기를 하다가 잠시 쉬고 다시 그러는 양을 보고 만각 스님이 쫓아와서 부축해주었다. 그는 나를 평상에 앉혀주었다.
아니 어쩌다가 이리 되었소?
간밤에 변소 가려다 섬돌을 잘못 디뎠어요. 택시 좀 불러주십시오.
스님은 읍내 차부로 전화를 걸고 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여튼 여기 터가 쎄요.
제가 실수로 넘어졌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했지만 그는 더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통증도 견딜 수 없었지만 발목의 겉모양으로도 심상치 않아 보여서 나는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라도 찍어볼 작정이었다.
내가 절뚝이며 집에 들어서자 아내는 놀란 모양이었다.
좀 삔 거 같아. 별건 아닐 거요.
아내와 함께 시내 중심가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갔다. 평소에 잘 아는 의사가 있어서 그의 주선으로 진찰도 받고 엑스레이도 찍었다. 결과가 나왔는데 골절이라고 했다. 발목을 삐끗한 것치고는 제법 중상을 입은 셈이다. 발목이 부러졌다고 말하면 모두들 놀랄 테지만 사실은 뼈에 살짝 금이 갔다고 한다. 깁스를 하고 달포쯤 지나서 다시 경과를 보자고 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한쪽 다리에 석고덩어리를 매달고 목발까지 짚게 되었다. 진찰과 치료가 끝나자 아내는 갑자기 생각난 듯 병원 로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참, 김인철씨가 입원했다던데.
우리는 원무과에 문의해서 그의 병실을 찾아갔다. 신경정신과의 병실 번호를 확인하고 아내가 먼저 문을 빼꼼히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고 안에서 오메,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인철의 아내가 쫓아 나왔다. 그녀는 먼저 내게 인사를 했다.
선생님 이게 무슨 일이래요. 어디 다치셨어요?
아내가 내 대신 말했다.
넘어져서 골절됐답니다. 인철씨는 어때요?
그냥 그렇죠 뭐. 들어가보셔요.
그녀는 물기가 가득 고인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더니 가만히 말했다.
뭐라고 엉뚱한 소릴 해도 그저 그러려니 하세요.
인철은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대뜸 쾌활한 목소리로 반겼다.
아이고 형님, 형수님 나 데리러 오신갑네. 내 얼른 인나서 도청에 나가야 허는디. 상원이 양현이 다들 지키고 있지라?
나는 그제야 그가 거의 멀쩡한데 약간 이상하다는 말이 무슨 소린지 눈치를 챘다.
다들 잘 있다네. 남 생각 말구 우선 자기가 건강해져야지.
의사도 그라고 저 사람도 그라는디 내가 아프다는 것이여. 이렇게 멀쩡한디 참 답답해 죽겄소. 도청을 지키러 가야 허는디.
나는 그의 시간이 어디에서 멈춰 있는지 뒤늦게 알게 되었다. 멀쩡해 보이는 그가 이 병동에 누워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 아내가 뒷전에 섰다가 그에게 말도 건네지 못하고 밖으로 먼저 나갔고 그의 아내도 뒤를 따라 나갔다. 병실 안에는 나와 환자만 남았다. 그가 갑자기 내 손목을 꽉 움켜쥐더니 웃는 얼굴로 다급하게 여러가지를 한꺼번에 물었다.
우리가 이겼지라? 계엄군이 광주서 철수했겄지요? 서울하구 부산 시민들이 들구일어나지 않았습디여? 아믄 내 그럴 줄 알았다 그 말이오.
나는 그의 억센 손아귀에서 내 손을 간신히 빼내고 한걸음 물러서며 얼버무렸다.
모두들 자네만 기다리구 있네.
도망치듯 병실을 나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그가 외쳤다.
형님, 상원이한테 내가 꼭 도청에 나간다고 전해주쇼!
절의 하루는 새벽 세시 무렵의 예불로 시작된다. 나는 만각 스님의 수행 정도가 그리 높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같은 시간에 일어나 하루도 빠짐없이 예불을 드리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보통 새벽 세시면 일어나는데 먼저 절 경내의 곳곳을 돌면서 염불을 하고 법당에 들어가 예불을 올렸다. 절에 머물던 초기에 몇번 새벽 예불에 참례했던 적이 있다. 공양주 할머니도 그때쯤 일어나 세수를 말끔히 하고 스님과 함께 예불을 올렸다. 작은 보살은 며칠 걸러 한번씩 참례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범종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면 잠이 깼다가 다시 잠들곤 했으나 나중에는 꿈결처럼 법당의 목탁 소리를 들으면서 내처 잤다.
나는 늘 스님과 겸상을 하여 밥을 먹었다. 우리는 마당의 평상에서 먹고 두 보살 할머니와 복실이는 대청마루에서 먹었다. 처음 겸상을 하던 아침에 서로가 통성명을 하던 자리였다.
만각입니다.
나는 그의 법명을 따졌다.
그러니까 만 자가 무슨 만입니까?
늦을 만(晩)입니다.
늦을 만에 깨달을 각(覺)이로군요.
스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별로 깊은 뜻은 없고요, 말 그대로 늦깎이라는 소리지라. 사십 넘어서 중이 되었은께.
내가 스님과 매 끼니를 함께 먹다보니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지만, 만각은 평소에 불교를 믿으라든가 불법에 대한 얘기를 한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그는 여염의 평범한 시골 노인처럼 세속적이어서 어쩌나 보려고 내가 불경에서 주워들은 유마거사나 지장보살의 일화를 지껄이면 잠자코 듣기만 하다가 대꾸했다.
원래 배운 것도 없고 무식해서 불경을 제대로 읽은 바가 없지요. 절집에 들어와서 그래도 밥값이나 하려고 염불만 몇가지 외웠습니다.
그러니 불경 얘기를 시켜본 내가 무색할 정도였다. 절에 간 지 한 열흘이나 되었을까, 만각은 밥을 먹고 상을 물린 자리에서 비로소 내 발목 부상에 대하여 얘기를 꺼냈다.
그만하기가 참 다행입니다. 여기 절터가 워낙 드센 터라서요.
지난번에도 그러시던데 그게 무슨 얘기예요?
여기가 원래 육이오 때 격전지라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려는데 스님이 턱짓을 하면서 말했다.
조 아래 내려가보슈. 거기 뭐가 있나.
평상에서 일어나 축대 아래를 내려다보니 작은 전각 한채가 보였다. 절 입구에서 돌계단으로 내려가면 작은 마당이 나오고 맞은편에 전각이 있었다. 보통은 지장전이나 칠성각이 있기 마련인데 ‘충혼각’이라는 현판이 보였다. 숲속에는 충혼탑도 세워져 있었다. 전각으로 가까이 가서 찢어진 창호지 틈으로 안을 살펴보니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쓴 위패가 줄줄이 꽂혀 있었다. 평상으로 돌아가 만각에게 물었다.
저게 다 누구의 위패입니까? 백개 가까이 되는 것 같은데요.
담양에서 전사한 전투경찰들이오. 담양군 현충일 행사를 해마다 우리 절에서 합니다.
그러면 전에는 절 이름이 호국사가 아니었나요?
작은 보살님이 아시겄지요. 호국사는 영령들을 모시고 나서 붙은 이름이니께.
나는 만각 스님이 터가 세다고 하던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확인하듯 물었다.
스님 말씀은 여기 터가 센 것은 죽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고, 그래서 내 다리가 부러졌다는 말씀이 되겠네요?
하여튼지 그런 일이 종종 있어서요. 낭중에 찬찬히 얘기해보십시다.
그는 나를 궁금하게만 만들고 더이상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다시 한달쯤 지난 뒤에, 내가 광주에 나가서 깁스를 부수고 목발까지 내던지고 홀가분하게 되었을 무렵이었는데, 스님은 출타했고 두 보살들만 평상에 나와 앉아 있었다. 가끔씩 올라와 텃밭 농사일도 돕고 절 안팎의 잡일을 도맡아 하는 김씨가 베어온 강낭콩을 두 할머니와 복실이까지 모여 앉아 까고 있었다. 나도 마당에 나섰다가 그 틈에 끼어 앉았다.
요놈을 밥에 놔 묵으먼 겁나게 맛있지라.
공양주 할머니가 합죽이 입을 이죽이며 웃었고 작은 보살이 덧붙였다.
콩 까고 앉았으먼 왼갖 잡생각이 웂어진당게. 요것이 시집살이 시름도 달래주었다는 일인디.
나는 공양주 할머니 옆에 찰싹 붙어 앉아 있는 복실이에게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을 시켜보려고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계집아이가 그냥 고개를 숙이고 키드득거렸다.
복실이여. 임복실이라구 말혀라.
작은 보살이 일렀지만 아이는 대답 없이 다시 키득 웃기만 했다.
너 뉘집 딸이냐?
내가 다시 물었더니 두 할머니는 잠자코 콩만 깠다. 김씨가 절 뒷마당을 돌아 나오는데 지게에는 햇고구마가 가득 담긴 함지가 얹혀 있었다.
맛보시라고 앞 고랑만 조금 캐봤어라.
물김치하구 고구마는 천생배필인디 오늘 점심은 별식이 되겄네.
공양주 할머니가 고구마를 간수한다고 부엌으로 움직이자 복실이도 얼른 따라갔다. 나와 함께 콩을 까던 작은 보살이 말했다.
저애가 여섯살에 여기 왔어라. 누가 사정해서 맡았는디 기르다본께 손녀같이 정이 듭디다.
작은 보살은 부엌 쪽을 한번 살피고 나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쟤 애비가 감옥 갔는디, 에미는 도망가불고.
김씨가 와서 일하는 날은 막걸리가 상에 오르는 날이었다. 김씨는 공양주 보살을 큰어머니, 작은 보살을 작은어머니라고 불렀다. 주지가 살아 있을 적에 절에서 자란 그는 지금은 아랫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자기 땅이 많지 않으니 농사 이외에 구들 놓는 미장일부터 목수일이나 지붕 고치기 같은 각종 허드렛일로 생계를 잇는다고 했다. 또한 그는 절의 땅을 부쳐 먹으면서 땔감을 장만하는 등의 잡일을 거들었다.
만각 스님은 출타했다가도 저녁밥때가 되면 반드시 돌아오곤 했는데, 그날도 여섯시쯤에 비탈길을 올라왔다. 스님과 나와 김씨가 함께 저녁상을 받았고 큼직한 막걸리 주전자가 상 옆에 곁달아 나왔다. 우리는 막걸리 잔을 서로 권하고 마시기를 거듭했다. 식사를 마치자 술배까지 불러서 그야말로 사지를 움직이기가 거북할 정도였다. 김씨는 상을 들어다 부엌에 갖다주었고 스님과 나는 평상에 앉아서 바람을 쐬었다. 내가 깁스를 떼어낸 것을 보고 스님이 물었다.
어째 이젠 걸을 만하슈?
아직은 조심해야 한답니다. 그래도 부지런히 걷기 연습을 해야죠.
참 그만하기가 다행이라니께.
스님은 그날따라 곡차에 흥이 났던지 말이 많아졌다.
여기 터가 세다고 전에 내가 말했지요? 빈방이 많어도 손님을 받을 수가 없지요. 학생도 두엇 하숙을 쳐봤고 고시생도 있었는디 모두 못살겄다고 도망가불고. 선생님이 워낙 대가 쎄신 모양이여.
왜, 뭐가 나타나서 혼을 냅니까?
나는 그저 농담조로 물었건만 스님은 이제 망설이지 않고 얘기를 시작했다.
밤마다 가위도 눌리고 하숙하던 학생은 아침에 코피를 줄줄 흘리며 뛰쳐나와선 그대로 보따리 싸서 내빼기도 했지라우.
나야 섬돌을 헛디뎌서 다리가 좀 심하게 삐었다 치고, 다른 이들은 아마도 혼자 적적하게 절집에서 지내다보니 꿈자리가 사나웠던 게 아니냐고 스님의 이야기를 자르려는데, 그는 고개를 흔들며 절대로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거였다.
만각은 영광 불갑사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그 절에서 십여년 동안 불사를 도우며 지내다가 누군가의 소개로 이 절에 주승 대신 오게 되었다. 만각 스님이 지금 쓰고 있는 단독 별채는 나중에 김거사와 함께 지은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처음 이 절에 왔던 날 바로 내가 묵고 있는 그 방에서 자게 되었다. 깊은 밤에 문득 방문이 열렸다. 꿈결인지 잠결인지 방문을 열고 선 검은 것을 보았고 목소리도 분명했다. ‘스님 밥 좀 줘요.’ 검은 것이 말했다. 만각은 잠결에 ‘부엌으로 가야지 왜 여기 와서 밥을 달래?’ 하다가 얼핏 잠이 깼다. 방문은 휑하니 열려 있고 사방은 캄캄했다. 그런데 뇌리 속에 선명하게 그 검은 것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내가 배추머리를 잘 알제. 옛날에는 옆머리를 치깎았는디 그냥 놔두먼 우게서 자라갖고 덥수룩하게 덮이거던. 그거이 배추머리랑게. 산사람덜 머리가 다 그 모양이여.
나는 만각이 말하는 산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번에 알아들었다. 이 고장 사람들은 빨치산을 산(山)사람이라고 했다. 중이건 빨치산이건 입산자라고 부른다. 꿈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잠이 깨버린 만각은 마침 예불 때도 되어서 옷 입고 마당에 나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목탁 치고 염불을 올렸다. 이튿날 다시 그 방에서 잠들었는데 전날과 같은 무렵에 배추머리가 또 나타났다. 이번에는 방문 앞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와 그의 배 위에 걸터앉아 목을 졸랐다. ‘밥 줘, 밥 좀 줘.’ 만각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에잇, 하면서 그를 뿌리쳤는데 깨어보니 상반신을 곧추 세우고 일어나 앉아 있었다.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그는 아침 일찍 봇짐을 싸고는 두 보살에게 떠나겠다는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자기와 이 절집이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했더니, 보살들은 ‘스님 왜 그려? 스님 무슨 일이여?’ 하며 말렸다. 그가 하는 수 없이 이틀 동안 겪은 일을 말하자 공양주 보살 할머니가 픽 웃으며 말했다.
멀 그깟 일 갖고 그려. 내가 구진 날 아궁이 앞에 불 때고 앉았으먼 젊은 아낙이 애 업고 나타나 부엌문 옆에 지대서는, 할무니 밥 좀 줘요오 그라는디. 그라먼 내가 네끼년, 너 줄 밥이 어딨냐 하먼 쓰윽 웂어지더만. 머 애덜도 나타나고 영감 할멈도 나타나.
그런 얘기를 듣고 나서 만각의 뇌리에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호국사는 담양에서 전사한 전투경찰의 혼령을 모신 절이라 현충일 행사도 맡아 하는데, 나라에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절집에서야 차별 없이 먹여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경찰이 죽었다고 비석까지 세웠는디 빨치산이나 민간인덜은 또 월매나 죽었으까. 오른손잽이만 밥 주고 모셔주는디 오여손잽이들도 밥을 줘야 헌다 이거여.
만각은 절을 떠나는 대신 밥을 함지 가득 퍼놓고 숟가락을 몽땅 쓸어다 꽂아놓고는 향 피우고 목탁 때리며 재를 올렸다. 그러고 나서부터는 신기하게도 별탈이 없게 되었다. 만각 스님은 이제 해마다 군의 현충일 행사를 치른 다음날에는 작고 조촐하나마 절 식구들이 떡도 하고 제물도 차려 또다른 넋들을 위한 재를 올린다고 했다.
나는 만각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쩐지 가슴이 저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베트남 전장에서 집중 포격이 휩쓸고 지나간 마을을 지나며, 부패가 시작된 주검들 위에 검은 얼룩이 되어 덮여 있거나 구름처럼 허공에 맴도는 거대한 파리떼를 보면서 귀신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매복 초소에서 동이 틀 무렵, 최후 저지선 앞에 널브러진 시신들의 구멍 틈으로 들락거리는 들쥐떼나 도마뱀의 오글거리는 움직임을 관찰하며 다시 중얼거리곤 했다. 정말, 귀신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후로 불면증에 시달리며, 무엇인지 모를 초조한 강박증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고 방 안을 서성대거나, 무작정 외출해서는 아무 목적도 없이 차 한잔도 마시지 않고 같은 길을 빠른 걸음으로 몇번이나 왕래하다가 숨 가쁘게 귀가하던 그런 나날이 이어졌다. 그런 어느날엔가 낮잠에 빠져 있다가 아우가 방에 들어와 내 팔을 밟고 지나갔고 나는 자다가 일어나서 화병을 집어 그애의 머리를 내려쳤다. 그러한 날에 나는 귀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일하기 전에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생각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이며 쓰려고 하는 이야기가 당신들 같은 이들의 삶과 죽음을 위한 것이리라. 그러니 나를 조금 도와줬으면 좋겠다. 내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신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기를. 그러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고 차분해졌다.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나는 방문을 열고 앉아서 앞마당의 벚나무 잎사귀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내다보고 있었다. 복실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지 작은 몸을 웅크리고 비탈길을 올라왔고 대청마루에서 내다보고 앉았던 만각이 냅다 고함을 질렀다.
아니 저것은 우산도 없이 핵교에 갔단 말여?
복실이의 머리카락은 젖어서 찰싹 달라붙었고 셔츠와 치마도 흠뻑 젖어서 꼭 비 맞은 참새 꼴이었다. 곁에 있던 작은 보살이 말했다.
우산 줘서 보냈는디 어따 내버렸디야. 너 우산 어쨌냐?
복실이가 대답을 못하고 처마 밑에 섰는데 작은 보살이 다시 물었다.
우산 잃어뻔졌냐?
복실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각이 다시 호통을 쳤다.
저런 못난 년이 있나. 그 우산이 얼마짜린데 잃어뻔져야? 저년 집에 못 들어오게 해야 혀.
부엌에서 공양주 보살이 나오더니 복실이의 손목을 잡아끌고 가려 했고 만각은 급히 고무신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서서 그 손목을 잡아챘다. 나는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다가 조금씩 조바심이 생겨서 문턱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만각이 두리번거리다가 싸리비를 집어 들더니 사정없이 복실이의 등짝을 때렸고 계집아이가 주저앉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는 비명을 지르거나 달아나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입을 앙다물고 참았다. 만각이 몇번 더 복실이의 등짝을 때리자 나는 저도 모르게 방문을 나서서 툇마루에 선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만각은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뭐라고 끝없이 욕설을 내뱉으며 돌아섰고 공양주 할머니가 울음을 터뜨린 아이를 데리고 부엌 안쪽으로 피해버렸다. 나는 속으로 꽤나 분개했다. 아니, 스님이란 작자가 그까짓 우산 하나 잃어버렸다고 어린애를 저렇듯 과도하게 야단치고 때리기까지 하다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새벽마다 예불 올리고 불경 외는 것도 다 쓸데없는 짓처럼 보였다.
그날 저녁까지 비가 와서 대청에 올라앉아 만각과 겸상을 받았다. 나는 못마땅한 감정이 삭지 않아 그와 말을 나눌 기분이 아니라서 묵묵히 밥만 퍼먹었다. 저녁밥상을 물리고 녹차를 마시면서 한담을 나누는 때가 되어서도 나는 만각에게 말을 걸 기분이 아니었다. 그런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만각은 잠잠히 앉았다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복실이 저 지지바를 데꼬 온 것이 나요. 교도소 봉사 나가시는 노스님이 당부혀서 최고수를 한 사람 맡았는디, 그 딸이 복실이요.
최고수라면……
암만, 사형수지라. 발써 몇해 전에 갔구먼요.
어느 야채장수가 있었다. 그는 김장철이면 트럭을 몰고 고랭지 배추밭을 돌면서 밭떼기로 입도선매를 하고 다녔다. 실하게 잘 자란 배추밭을 선금 주고 도맡아두었는데 나중에 다시 가니 밭주인은 다른 장사꾼에게 좀더 좋은 값으로 넘겼다면서 딴소리를 했다. 두 사람이 밭고랑에서 말다툼하다가 야채장수가 홧김에 발치의 괭이를 집어들고 밭주인을 찍어버렸다. 홧김에 눈이 뒤집혔던 야채장수가 제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대는 머리가 깨져 죽어 있었다. 그는 황급히 주검을 부근 야산에 묻어버리고 달아났다. 먼데서 이 광경을 본 목격자가 있어서 그는 이내 잡혔다. 그는 교도소에서 불교에 입교했고 만각은 노스님의 소개로 한달에 한번씩 면회를 다녔다. 광주참사가 있고 나서 전국 교도소의 사형수들을 일제히 처리할 무렵에 그는 처형당했다.
교도소에서 통보가 와갖고 마지막 입회를 갔는디, 염불해주고 작별하려니 주소를 알려줍디다. 즈이 딸을 절에서 키워달라고 두 손 모으고 어찌나 간절하게 부탁을 허든지.
스님이 애를 너무 야단치는 것 같아서 좀 안쓰럽던데요.
나는 그쯤 말하고 화제를 바꾸고 싶었지만 만각은 어쩐지 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친척 집에서 애를 찾아 델꼬 왔는디, 눈칫밥을 먹어 그런가 지지바가 거짓소리도 잘허고 바른 구석이 웂당게.
나는 더이상 끼어들기 싫어서 대꾸하지 않았다. 늘 밥을 함께 먹다보니 허물이 없어진 탓도 있겠지만 복실이 때문에라도 나는 그가 스님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귀뚜라미가 풀숲에서 울기 시작하고 고추를 걷을 무렵이 되었다. 무더위가 아주 가신 것은 아니었으나 저녁에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내 방 앞 툇마루에 앉아 있기가 좋았다.
어느날 자고 일어나니 온 나라가 떠들썩할 정도로 큰일이 벌어져 있었다. 신문 방송은 그 일로 며칠 동안 시끄러웠다. 대한항공의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바다에 추락했다. 뉴욕을 출발한 비행기는 알래스카의 앵커리지 공항에서 급유한 뒤에 지정항로인 일본의 북해도를 비스듬히 날아와 동해 영역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자동항법 장치가 되어 있을 여객기는 웬일인지 예정 항로를 벗어나 소련 영공인 캄차카와 사할린스크를 통과하는 길로 잘못 접어들었다. 같은 항로에 미군의 정보수집기가 가끔 출몰했는데 같은 보잉 기종이었고 소련의 극동 공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투기를 출격시켰다. 그들은 여객기를 정보수집 비행기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이 산속의 작은 절에도 텔레비전이 있어서 뉴스는 날마다 더욱 자세한 소식을 전했다. 나중에는 잔해가 발견된 수역까지 사망자의 유가족들이 배를 타고 찾아가 울며불며 거친 파도에 화환을 던지고 작별하는 장면까지 방송 화면에 나왔다. 나는 화염에 싸인 여객기와 그 안의 승객들의 비명이며 마지막 참경을 떠올렸고, 동시에 여객기의 꼬리 날개에서 명멸하는 불빛을 추적하던 전투기의 조종사를 생각했다. 발사를 결심한 조종사의 굳은 얼굴과 버튼을 누르는 그의 손가락 동작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불공을 드리러 왔는지 아낙네들이 여럿 보이고 마당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그런 날은 내 방에서 혼자 밥상을 받게 되었다. 공양주 보살 할머니가 구부정한 걸음걸이로 내 방 앞까지 오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오늘은 김거사랑 여그서 공양 자시우. 육것도 있응게 막걸리도 한잔 드시구.
김씨가 상을 들고 마당을 건너왔고, 공양주 보살이 막걸리 주전자와 삶은 닭 한마리를 면보로 덮어 쟁반에 받쳐들고 뒤따라왔다. 할머니는 마루 옆에 서서 닭을 먹기 좋게 찢어주고 돌아갔다. 나는 막걸리를 김에게 먼저 따라주었다. 그는 평소에 말이 별로 없는 사람으로 나와 먼발치에서 눈이 마주치면 빙긋 웃어 보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가 먼저 인사로 몇마디 말을 걸어야 할 것 같았다.
누가 작정하고 큰 불공을 드리는 모양이죠?
예, 광주서 왔다는디 부자랍디다.
김씨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아는 바도 별로 없는 눈치였다. 건너다 보니 요사채 살림집에는 손님들이 가득했고 평상에서는 가사장삼 차림의 스님들 둘이 만각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아마도 큰 행사가 있으면 이웃 절의 스님들께 응원을 청하는 모양이었다. 복실이가 보자기에 싼 것을 들고 와서 김에게 내밀었다.
떡이래요. 집에 갖다주라고요.
김은 돌아서려는 복실이를 부르더니 작업복 주머니를 뒤적여 천원짜리 한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너 맛난 거 사묵어라.
복실이는 얼른 받더니 우리가 보는 데서 딱지처럼 네모나게 돈을 접어 손에 꼭 쥐고 마당을 건너갔다. 김이 바라보고 앉았다가 말했다.
애들 적에는 학교 앞에 주전부리가 너무 먹구 싶더먼요.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궁금하던 것을 김씨에게 물었다.
공양주 할머니는 가족이 없는가요?
큰어머니요? 작은어머니허구 사촌지간이지라.
아, 그렇군요.
큰어머니는 사변 때 온 식구가 변을 당혀서 사촌동상을 찾아왔다지요. 두 분이 의가 좋습니다. 지도 부모 잃고 어릴 적에 여그서 자랐지라. 스님까지 세분이 늙마에 서로 의지해 사시니 참말로 다행이어라우.
상을 물리기 전에 그는 마지막으로 남았던 막걸리를 내 잔과 자기 잔에 차례로 따르더니 쭈욱 마셨다.
비행기가 떨어졌다더만요. 사람 죽는 거시 개미굴 쑤셔논 거나 매한가지겠지라.
그러게 말요.
김씨가 상을 받들고 건너간 뒤에 나는 어두운 방에 앉아서 그가 말했던 개미굴을 머릿속에 떠올려보고 있었다. 심심한 여름 오후에 개미구멍을 발견하면 아이들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나뭇가지로 쑤시고 파헤쳐보기도 하고 발로 밟아버리기도 하고 오줌을 누기도 하는 것이다. 이 작은 생물들은 무너진 구멍에서 기어 나오고 뒤덮인 흙더미를 헤치려고 버둥대며 서로 끊임없이 더듬이로 확인하면서 살길을 찾아 움직인다. 그들에게 닥친 이해할 수 없는 불운을 받아들이며 짓뭉개진 동료의 몸을 물고 안전한 곳을 향하여 나아간다.
이튿날 나는 아침을 거르고 점심밥을 첫 끼니로 먹게 되었다. 낮에 경내가 시끄러워 빈둥거리며 하루를 보냈기 때문에 새벽까지 일을 했던 것이다. 자고 일어나 세수하러 드나드는 나를 보았던지 공양주 보살이 복실이를 시켜서 점심 드시라고 내게 전했다. 평상을 바라보니 만각 스님과 객승이 벌써 밥상을 받아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밥상 앞에 앉으니 만각이 내게 손님을 소개했다.
어제 불사가 있어갖고 도와달라고 모셔왔지라.
손님 중이 합장하며 아무개라고 제 법명을 말했고 나도 어색하게 마주 합장을 하며 인사를 했다. 이 중은 어깨도 딱 벌어지고 머리도 완전 삭발이 아니라 이부로 깎아 머리카락이 새카맣게 곤두선 것이 벌건 혈색과 더불어 매우 정력적으로 보였다. 객승은 공양 중에도 끊임없이 얘기를 했다. 그는 아무개 절의 누가 성질이 개차반이라느니, 누구는 절 공사를 하면서 딴주머니를 차고 있다느니 하다가, 자기가 중앙에서 밀린 것은 바로 그놈들 모함 때문이라고 못을 박았다. 객승은 속인인 나에게도 들으라는 듯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만각에게 말했다.
내가 종단 호법부에 있어서 잘 알지만 정화를 해야 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중의 탈을 쓰고 음주에 계집질도 허고 거기다 부조리까지 저지릅니다.
나는 어쩐지 이 중이 못마땅해서 일부러 그를 좀 건드리기로 했다.
무슨 조리를 저질러요?
아, 부조리 말입니다. 부정부패요.
스님은 계를 칼같이 지키는 모양이죠? 곧 한소식 하시겠네요.
객승은 내 태도를 대번에 눈치챘다. 그리고 내가 이 절에 글을 쓰러 온 아무개라는 것도 만각에게서 미리 들었을 것이다.
글줄깨나 쓴다는 중들도 더러 있는데 그것들 대개 덜떨어진 것들입니다. 우리가 호법부에서 감찰 보고 있을 때 정각이란 중을 제적시킨 적이 있어요. 같잖은 소설을 썼는데 악의적으로 불교계를 비방하고 전체 승려들을 모욕했지요.
나는 그게 김성동의 「목탁조」 사건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십대 때에 자의로 출가하여 방랑승으로 아는 스님들의 연줄로 절을 떠돌아다녀서 승적에 올리지도 않았으니 무승적의 제적이었던 셈이다. 김성동은 그 일로 파계하고 환속했으며 다시 『만다라』를 써서 세간에 알려졌다.
내가 호국사에 들어오기 바로 십여일쯤 전에 그에게서 느닷없이 전화가 왔다. 바로 이튿날이 오일팔 삼주년이라 내가 망월동 행사에 참석할까봐 관내 정보과 형사가 아침부터 찾아오고 집에서 칩거한다는 다짐까지 받고 돌아간 직후였다. 정확하게는 원경 스님이 먼저 전화를 걸었다. 정각과 함께 광주에 내려가도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정각은 김성동의 절집 법명이었다. 원경은 신도가 물려주었다는 폐차 직전의 웨건을 몰고 다녔는데, 그 무렵에 거의가 차도 없고 운전도 못하던 문인들은 곧잘 원경을 운전기사 삼아 지방 나들이를 다녔다. 나는 성동이가 온다는 말에 큰일났다는 생각이 앞섰다. 광주항쟁 이래로 연재를 쉬고 있다가 겨우 다시 쓰기 시작하여 이제 마지막 한권 분량을 남겨놓고 있던 때여서 광주 주변의 어느 절에라도 숨어버릴까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김성동이 내려오면 사나흘은 작살이 날 것이고 그러면 틀림없이 연재는 펑크였다. 김성동의 취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수화기에 대고 사정없이 야멸차게 거절하고 끊었다. 이틀쯤 지나서 나는 그들이 방향을 돌려 원주 김지하에게로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속도로에서 중앙선을 넘은 트럭이 달려들었고 원경이 핸들을 갑자기 틀자 차는 가드레일을 받고 뒤집어지면서 논두렁에 처박혔다. 안전띠를 매지 않았던 조수석의 김성동은 머리로 앞유리창을 받고 차 바깥으로 튕겨나갔다. 나는 그뒤에 일주일쯤 지나서 목숨을 건진 성동이가 두차례의 뇌수술 끝에 회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회복되었지만 그 맑고 끼끗하던 이마에는 굵은 흉터가 남았고, 한쪽 눈은 시력을 잃었다. 원경은 박헌영의 사생아였고 김성동은 이문구처럼 아버지가 좌익으로 처형당한 환가여손(患家餘孫)이었다.
나는 더이상 대꾸 없이 밥이나 먹었으면 좋았으련만 그 시대의 격정 때문이었을까, 호법하고 감찰한다는 중에게 말했다.
당신이 제적했다는 그 사람이 나하구 친한 후배요. 교통사고로 뇌수술까지 받고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나도 소문으로 들었수다. 그게 다 불교를 욕보인 업보니까 부처님이 천벌을 내린 거요.
객승의 의기양양한 말이 끝나자마자 어느 결에 나는 밥그릇을 들어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그는 삭발한 머리에 밥알을 뒤집어쓴 채로 멍청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평상을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이것도 부처님 천벌이다 이놈아. 니가 명색이 중이냐? 에라 이 나쁜 놈 같으니.
그는 등을 돌리고 마당을 건너가는 내게 외쳤다.
너 이놈, 당장 경찰에 고소할 거다. 어디 두고 봐라. 감히 스님을 폭행해?
오후 늦게 모시 도포를 걸치고 외출하는 차림새로 만각이 툇마루 앞에 와서 나를 찾았다. 서에서 사람이 왔다고 스님이 일러주었고, 형사가 평상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잠깐 가시지요. 누가 좀 뵙자고 허니께.
그가 안내한 곳은 읍내 경찰서 길 건너편 다방이었다. 말끔한 양복차림의 중년이 들어오더니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얼핏 보니 담양경찰서 정보과장이었다.
관내에 계시다는 말을 진작 듣고도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무슨 사고가 있었다고?
우리를 안내한 형사가 어깨를 펴며 대답했다.
네, 폭행 껀으루 고소 고발이 들어왔습니다.
알았어. 가서 그 스님 모시구 와.
정보과장은 연신 빙긋빙긋 하면서 내게 말했다.
이런 일이 아니라도 늘 번거로우실 텐데 조심을 하셔야죠.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흥분했던 저의 잘못입니다.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건 엄연한 폭행사건입니다. 그만하기가 다행이지만 우리도 입장이 참 난처하거든요. 많이 다치진 않았다니까, 사과하고 피해자와 합의하세요.
경찰은 목격자인 만각의 진술도 들은 뒤여서 자초지종을 알고 있었다.
수사과 일이지만 선생님은 우리가 관할하는 인사니까 제가 도와드리러 나온 겁니다.
나는 수치와 열패감으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객승이 형사와 함께 다방으로 들어와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진단서와 고소장을 냈으니 저 사람 꼭 처벌해야 합니다.
정보과장은 말없이 앉아 있고 형사가 말했다.
뭐 알아보니 오 센치의 찰과상이라는데 일단 스님이 마음을 푸시오. 작가 선생이 반성하고 사과를 드린다니께.
객승은 펄펄 뛰었다.
아니 이 양반들이 모두 한통속이구먼. 여보슈,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여. 이 사람 귀싸대기라도 몇대 올려쳐야 내 분이 풀릴까 말까 한데.
정보과장이 지켜보다가 싸늘한 어조로 객승에게 말했다.
여보쇼 스님, 백양사 온 지 얼마 안되셨지? 전에 월정사 기셨구. 호법부에는 언제 기셨나?
뭐 좀 오래됐어요.
아 그래 스님이 귀싸대기는 뭐며, 분이 풀린다는 건 다 무슨 소리요?
그거야 뭐……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에게 말했다.
스님에게 사과하세요. 그리고 언제 한번 연락드리겠습니다.
그가 깔끔하게 퇴장한 뒤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객승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 사과의 말을 했다.
제가 수양이 부족해서 크게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아니 절대로 용서 못해. 당신 입건되기 전에는 내가 물러서지 않을 거여.
이제까지 한쪽에 비켜난 자세로 묵묵히 앉았던 만각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떽! 하고 고함을 질렀다.
이눔아, 대가리에 아까징끼 좀 바르면 되는 거여. 속인이 잘못했다 사과하먼, 중이 내가 더 잘못이라고 사과해야 도리에 맞지. 다시는 우리 절에 얼씬도 하지 마라.
일사천리로 꾸짖고 만각은 나가버렸고 잠잠히 앉아 있던 우리에게 형사가 말했다.
합의된 걸루 알고 지는 가보겄습니다.
밤새워 일하고 오후 늦게 잠에서 깼는데 사실은 밖에서 뭔가 두런거리는 소리에 선잠이 깨었던 터였다. 몇번 돌아눕고 뒤척이며 일어나기 전에 뜸을 들이고 있었는데 밖의 툇마루에서 만각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느이 누나한테는 안 가봤냐?
아뇨.
왜 안 갔어?
내가 가먼 자형이 벨로 좋아라 안허요. 친동상도 아니고요.
니가 왜 친동상이 아녀? 니들 엄마는 달르지만 다 내 자석인디.
요새는 큰집서 지내요.
아, 그런다고 했제. 이번 참에 핵교 졸업하먼 머할라냐?
군대나 갈라고요. 기술하사관 모집이 있어갖고.
뭔 기술을 배울라고?
통신이나 운전은 그저 그렇구요, 중장비가 전망이 좋아라우.
중장비가 뭐시여?
도자나 포크렌 머 그런 거.
잉, 그것이 쓸모가 많겄구먼. 생각 잘혔다. 기술이 있어야 묵고살제.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 틀림없었다. 도란거리는 얘기를 계속 듣고 있기가 뭣하여 헛기침 소리를 냈더니 말소리가 뚝 그치고는 이내 잠잠해졌다. 이렇듯 점심까지 거른 날은 읍내에 내려가 국수나 장국밥을 사먹기 마련이었다. 툇마루에 나서 보니 조금 전까지 만각과 얘기를 나누던 소년이 앉아 있었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일어나서 인사를 꾸벅 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던지라 예에, 하며 인사만 받고 더이상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후 며칠 동안 소년은 비어 있던 내 옆방에서 지내는 모양이었다. 복실이와는 이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는지 법당 뒤뜰에서 함께 도토리를 주우며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리곤 했다. 소년이 가버릴 때까지 스님은 모른 척했다. 며칠 뒤에 저녁을 먹은 뒤 역시 녹차 한잔 나누는 자리에서 스님이 입을 열었다.
고놈이 막내요. 우그로 딸 둘 있고요.
나는 그러시냐고 건성으로 끄덕일 뿐이었다.
마누라를 둘씩이나 잡아묵고, 세상살이에 뜻이 없은께 출가하고 말었지라. 첫채번은 사변 때에 나 집 비운 사이에 죽어불고, 두번채는 그것이 복실이맨키로 넘으 집서 컸는디 나허구는 이십년 차이요. 애 낳고 멫년 살다 가불데.
나는 찻잔을 든 채 물끄러미 만각 스님을 바라보았다. 엊그제 객승에게 일갈하던 때에, 솔직히 내 편을 들어서가 아니라 그가 비로소 스님답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새벽 예불을 올리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일상을 견디는 일이 쉽고도 가장 어려운 것처럼.
모처럼 광주 집에 들렀더니 아내가 김인철이 병원을 옮겼다고 말했다. 그가 한밤중에 없어져서 일대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의 아내가 연락해서 청년들과 병원직원들이 몰려 나가 밤거리를 헤매고 다녔는데 그를 발견한 곳은 도청 앞의 분수대였다. 밤이라 분수가 멈추어 있었는데 그는 분수대에 올라가 뭔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직원들이 그를 차에 태우고 병원에 돌아왔을 때 모두들 어디로 가버렸느냐고, 상원이는 어디 있느냐고 자꾸만 묻더란다. 결국 인철의 아내는 담당의사와 의논하여 그를 시 외곽의 안전병동으로 옮긴 것이다.
문선배에게서 연락이 와서 시내로 나갔다. 문시인이 근무하는 학원가 근처의 술집에서 그를 만났다. 평범한 고깃집이었는데 그는 누구와 같이 나와 있었다. 용건은 서로간에 별게 없었지만 그동안 본 지가 오래되었으니 술이라도 한잔 나누자는 자리였다. 같이 나온 사람은 나도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정아무개라는 교수였다. 그들은 동창생이었고 같은 연배였다. 시국 얘기도 나오고 김인철의 실성에 대한 이야기도 하다가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호국사에서 발목 부러졌던 얘기를 꺼냈다. 물론 만각 스님의 배추머리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정교수가 내 말을 듣고는 담양 가마골이 빨치산 노령병단 사령부가 있던 곳이며 장성·영광·함평까지 그들의 작전구역이었다고 말했다. 산맥의 지형이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하면서 그는 덧붙였다. 각 지방의 경찰 병력만으로는 중과부적이어서 육군 십일사단이 증파되어 이 지역의 토벌을 맡게 되면서 대대적인 양민학살이 벌어졌다. 학살이 가장 심했던 곳이 영광 부근과 담양 지역이라고 그는 말했다. 문시인이나 정교수가 둘다 나보다 십년 연상이어서 전쟁에 대한 기억들이 생생했다. 그 무렵에 광주의 참극이 벌어지고 나서 사람들은 갑자기 케케묵은 옛날 기억을 더듬어 육이오 때의 체험을 미주알고주알 풀어놓기 시작했고, 그것은 젊은이들의 군대 얘기처럼 술자리의 다른 화제들을 모두 삼켜버렸다.
광주에 나갔다가 돌아온 이튿날이던가 작은 보살이 내 방 앞에 와서 전화가 왔으니 받아보라고 했다. 나는 처음 있는 일이라 어리둥절해서 살림집으로 건너갔다. 상대방이 나를 확인하고 나서 ‘잠깐 기다리쇼’ 하더니 곧 목소리가 들렸다.
정보과장입니다. 점심이나 모실까 하는데 바쁘지 않으시죠?
나는 전에 그가 한번 연락하겠다던 말이 생각났고 어쨌든 신세를 졌던 터라 서둘러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어디로 가뵐까요?
내려오시면 만성교 앞에서 직원이 기다릴 겁니다.
절에서 내려와 다리를 건너면 곧장 중앙통으로 이어진 초입이었다. 마르고 키가 큰 젊은 형사가 기다리고 서 있다가 마주 걸어오며 인사를 했다. 그의 안내로 시장 거리를 지나 골목 안에 있는 한정식집으로 갔다. 식사 자리에서 오간 화제란 이 지역의 특산물이나 음식에 관한 얘기라든가 전에 그가 근무했다는 다른 항구도시에 관한 것들이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호국사 얘기가 나왔는데 전에 대처승 절이었지만 현재 정식으로 조계종단에 소속된 것은 아니고 형식상으로는 개인 소유라고 했다. 소유권자인 부인이 돌아가시면 호국사는 결국 조계종 측으로 귀속될 거라고 그가 말했다. 만각 스님 얘기가 나오자 정보과장이 말했다.
스님이 알고 보니 우리 경찰 출신이더군요. 고향은 고창인데 경사까지 근무했고, 영광 불갑산 공비토벌로 훈장도 받았어요.
마흔이 넘어서 출가했다고 그러던데요.
불갑사에서 출가하고 거기 쭉 있다가 여기로 온 지 한 칠팔년 되었을 겁니다.
과장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 양반 염불은 제대로 할 줄 아나 몰라.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새벽에 꼭 일어나시고 예불을 빼놓는 날이 없으세요.
그런 모양이죠? 매일 새벽마다 종소리가 들리더라고.
아내를 두번이나 잃었고 자식들도 딸 둘에 아들 하나라던 스님의 얘기를 입밖에 꺼내지 않았지만 정보과장은 그런 것들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난세에 공을 세웠다면 그만큼 사연이 많은 인생을 살았단 얘기죠.
그는 헤어지기 전에 잠깐 본론으로 돌아갔다.
될 수 있으면 광주 나가지 마시고 여기서 조용히 집필만 하시면, 저희도 좋고 집안도 편안하실 테고…… 위에서 늘 걱정입니다. 애로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 저에게 연락주십시오.
아침저녁으로 서리가 비치더니 첫눈이 내렸다. 그날도 점심때가 다 되도록 늦잠에 빠져 있었는데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 만각 스님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년, 내가 거짓소리 하지 말라고 그랬제? 이게 발써 몇번채여. 개침에서 쪼꼬레또가 나왔는디 이게 어서 난 거여? 이런 거 사먹을 돈이 어딨냔 말여. 바른대루 말 못혀?
계집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가 들려서 나는 방문을 열고 툇마루로 나갔다. 스님은 작은 댓가지를 들고 아이의 궁둥이며 종아리를 닥치는 대로 후려갈겼다. 작은 보살은 살림집 마루 위에서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고, 공양주 보살은 부엌 앞에서 지켜보다가 스님이 매를 휘두르자 굽은 허리에 한쪽 팔을 바삐 내저으며 다가섰다.
스님, 그 돈 내가 준 거여. 그만해여.
할머니가 복실이 앞을 가로막자 스님은 얼굴이 벌게진 채로 댓가지를 쳐들고 외쳤다.
누가 애한테 씨잘데없이 주전부리 버릇을 갈치냔 말여. 이렇게 커서 돈 맛이 들먼 시주함에도 손대고 보따리 싸서 도망가고 그라제.
스님은 그제야 나까지 툇마루에 나와서 구경하고 있는 걸 보고는 화를 삭이지도 못하고 슬그머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전 같으면 나는 스님에게 쫓아가서 불도를 닦는다는 사람이 어린애를 데리고 이게 무슨 화풀이냐고 한마디했을 테지만, 그냥 읍내 나가서 오랜만에 국밥 한그릇으로 점심을 때웠다.
겨울철에는 공양주 할머니가 쓰는 부엌 옆방에서 저녁 공양을 하는데, 저녁 밥상을 두고 스님과 마주 앉게 되자 나는 참았던 말을 입밖에 꺼냈다.
복실이를 왜 그렇게 과하게 혼내세요?
그랬더니 스님은 말없이 밥만 먹다가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나가 아를 길러보덜 않은께 그런갑소.
어찌 보면 내 질문에 어깃장 지르듯 하는 대꾸로 여겨져서 나는 공연한 질문을 했다고 잠깐 후회를 했다. 묵묵히 밥 먹고 어서 내 방으로 돌아가자 싶어 숭늉을 마시고 얼른 일어서려는데, 만각 스님이 내 등 뒤에 대고 중얼거렸다.
가엾은 것이 징허게 싫어서 그라요.
아마도 그 대답은 스님 스스로에게도 아직 성이 차지 않는 미진한 것이었던지, 다음날 저녁밥상 앞에서 스님이 다시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몸이 다 오욕칠정의 노리개지라.
그러나 그 말은 앞의 것보다 훨씬 못 미친다고 나는 생각했다.
겨울을 나고 이듬해 오월 말경에 기나긴 소설을 끝낸 나는 앞뒤가 맞아 떨어지느라고 그랬던지 현충일이 끼었던 주말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는 이 절집에서 현충일 행사와 그다음 날에 혼령들을 위하여 올리는 기이한 구명시식(救命施食)을 보게 되었다. 군수와 경찰서장과 관리들과 전몰자 유가족들이 중심이 된 현충일 행사는 당일 오전 중에 화환이 일렬로 늘어선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이튿날 밤에 절집 식구들만 모인 또다른 혼령들을 위한 불사는 어딘가 호젓하고 처량하여 가난한 초상집 분위기였다. 법당 뒤뜰 북쪽 모퉁이에 하얀 쌀밥을 그득히 퍼담은 함지를 갖다놓았다. 밥 위에 수십개의 숟가락을 꽂아놓고 가사장삼을 차려입은 만각 스님이 향불을 피우고 목청 높여 염불을 외울 때, 작은 보살과 공양주 보살은 소복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비손하면서 두 뺨이 젖도록 눈물을 흘렸다. 김거사와 그의 아내도 뒷전에서 비손했다. 복실이는 잔치라도 만난 듯 부엌 앞마당에서 팥시루떡을 들고 깡충거리며 뛰어다녔다.
나는 스님의 법명이 자기에게 꼭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어디 그이뿐이랴. 사람살이란 언제나 뒤늦은 깨달음과 후회의 반복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