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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최윤정 사진_fmt

최윤정 崔允禎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과 4학년. 1992년생.

chochang1120@naver.com

 

 

 

보급형 선악과 베어먹기

김사과론

 

 

1. 선악과, 사과, 그리고 김사과

 

오늘날, ‘사과’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살아가면서 한번도 사과를 먹어본 적 없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며, 반대로 매일 아침마다 사과를 먹는 사람은 적어도 그보다 흔할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과일로 사과를 꼽는 사람의 수는 귤이나 포도를 꼽는 사람의 수에 크게 뒤지지 않을 것이며, 가장 싫어하는 과일로 사과를 꼽는 사람의 수 또한 귤이나 포도를 꼽는 사람의 수에 크게 앞서지 앞을 것이다. 그렇다. 사과를 피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죄의 첫경험은 아득하다 못해 망각된 지 오래이며, 죄의 의미가 퇴색된 사과는 수많은 과일 중 한종류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사과를 필명으로 삼은 그녀, 김사과에게 사과란 무엇인가? 김사과의 사과는 과일의 일종이자 원죄의 상징이며, 무엇보다 ‘상품’이다. 다시 말해 어디서나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고, 누구나 쉽게 맛볼 수 있는 ‘보급형 선악과’이다. 한때, 낙원이 있었다. 낙원은 완벽했으나, 인간은 선악과를 베어먹고 그곳에서 쫓겨났다. 이후 인간은 신의 솜씨를 흉내내려 무던히 애썼고, 마침내 자본이라는 역대 최고의 성과물을 냈다. 자본은 낙원만큼이나 완벽하고, 거기에서 버림받는 인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선고된 새로운 죄명은 무엇이며, 이들은 어떤 벌을 받고 있는가?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김사과를 편다. 그리고 그녀가 내미는 사과를 베어먹는다.

 

 

2. 실패했다는 죄

 

나는 수사일지를 펴고 적는다. 여기, 세명의 죄인이 고발되었다.

「과학자」에 기록된 ‘죄인1’의 신분은 재수생, 소속은 재수학원이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바꿔보자면 이렇다. 죄인1의 신분은 실패자, 소속은 ‘극복훈련소’이다. 그가 명문대에 입학하였다고 가정해보자. 그의 신상에는 큰 변동이 생긴다. 그는 더이상 죄인이라 불리지 않으며, 그의 신분은 ‘(늦은) 대학생’으로 격상된다. 괄호 안의 수식어가 약간 거슬리기는 하겠으나 까짓 거 뭐 어떤가. 그것은 낙인이 아니다. 오히려 훈장이다. 그는 실패를 멋지게 극복했으므로 극복훈련소의 우수사례로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다시 살아난 그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간다. ‘성공자’라는 영광의 타이틀, 궁극의 신분을 획득할 그날을 위해.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여전히 죄인1로 남아 있다. 그는 재수학원에 잘 나가지 않으며, 그처럼 재수학원에 잘 나가지 않는 여자친구, 한나와 집에서 하루종일 빈둥대며 지낸다.

 

그러니까 아무도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까. 그렇다면 좀 무섭다. (…) 하지만 난 가만히 있었다. 한나도 그랬다. 우린 모든 것이 지겨웠고 어디부터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게 우리의 문제라는 것도 난 알고 있었다. 그게 우릴 갉아먹고 있다는 것도 난 알았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가만히 있었다. 왜냐하면/난 사실 죽고 싶어. 내가 말했다./나도 그래. 한나가 말했다./우리 같이 죽자. 내가 말했다./응. 한나가 말했다./거짓말 마. 니가 나랑 같이 죽겠냐. 내가 말했다./맞아. 한나가 말했다.(「과학자」, 『영이』, 창비 2010, 56면)

 

얼핏 보기에, 둘의 상황은 비슷하다. 둘 다 재수생이며, 둘 다 특정 음식에 중독되어 있다. 그는 ‘고추장’에, 한나는 ‘밀크티’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그리고 그와 한나의 차이는 그와 한나의 식습관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그는 고추장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렇다고 다른 음식을 먹지 않는 건 아니다. 그는 “고추장이 내 목구멍으로 밀려들어오는 순간, 모든 게 편안해졌다. (…) 갑자기 세상이 멀리서, 아름답게 살아났다. 난 부끄럽지도 않았다”(41면)라며 고추장 중독에 빠진 ‘계기’를 회상하는데, 모의고사에서의 마킹 실수 사건이 바로 그에 해당한다. 즉 그에게 고추장이란, 실패를 망각하게 하는 마약성 진통제의 다름 아닌 것이다. 반면, 한나는 밀크티 이외에 다른 어떤 음식도 먹지 않는다. “난, 한번도, 뚱뚱했던 적이, 없어”(54면)라는 그녀에게는 거식증의 ‘계기’도, 밀크티 중독의 ‘계기’도 모두 부재해 있다. 즉, 그녀는 감각을 속이는 것보다 감각을 비워내는 데 더 집중한다. 그러므로 한나는 죄인이 아니다. “사실 내가 무시당하는 것은 내가 무시당할 만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객관적 자아인식이다”(40면)라며, 자본의 교육제도 안에서의 실패를 ‘나’라는 존재의 근원적 실패로 받아들이는 그와 달리, 한나는 “온몸이 먼지가 되어 훅 불면 날아가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말라비틀어”(38면)져 ‘나’라는 존재 자체를 이 체제 안에서 ‘삭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장편 『풀이 눕는다』(문학동네 2009)에 기록된 ‘죄인2’의 신분은 백수이다. 그녀에게는 두가지의 소속 가능 후보가 있는데, 첫번째는 가족과 함께 살던 고급 브랜드 아파트이며, 두번째는 그녀의 남자친구, 풀의 집이다. 그녀는 ‘가족’, 그리고 ‘고급 브랜드 아파트’를 이렇게 정의한다.

 

그들은 근면하고 쾌활한 워킹클래스였다. 그건 그들이 자신의 존재 이유나 가치에 아무런 회의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들은 인생을 바쳐 죽도록 일했고 그리하여 살아남은 자신들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풀이 눕는다』 15면)

누구도 저 빌딩들을 거절할 수는 없을 거라고. 누구도 그럴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을 거라고. 여기에 사는 그 누구도 저 빌딩들이 가리키는 미래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거라고. 그러자 좀 우울해졌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빌딩들은 더욱 거대해졌다. 뿌연 어둠 속에서 그것들은 뻣뻣하게 선 채로, 백년 전 셀린느가 묘사했던 것처럼, 미끄러지듯 우리를 쫓아왔다. 그리고 난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풀이 눕는다』 140면)

 

즉, 그녀의 가족은 자본이 규정한 신분제에 따라 ‘성공자’라는 영광의 타이틀을 거머쥔 사람들이며, 그들이 사는 고급 브랜드 아파트는 단지 입구에 ‘Winner Only’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는 ‘성공인증소’인 것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에 얽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입성하기 위해 부던히 애쓴다. 성공을 인증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바로 실패의 인증으로 직결되기에, 사람들은 인증을 미루기 위해 계속해서 달린다. 꾸준히 속도를 유지하면서 종종 속도를 높여준다면, ‘예비성공자’의 신분만큼은 보장되므로. 그리고 ‘풀’이 있다. 그 어떤 것도 인증할 생각 없이 느릿느릿 걷는 ‘예외’가 있다.

 

풀, 내가 왜 너를 좋아하는지 알아? (…) 넌 저런 데서 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야./생각해봐. 도대체 누가 저런 데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어? (…) 물론 너는 저게 싫어. 전혀 원하지 않아. 하지만 이미 너도 우리들 중의 하나야. (…) 너가 아무리 아니라고 주장해도 소용없어. 세상은 이따위로 생겨먹었어. 세상은 너 혼자 아름답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아.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무너져내리고 마니까. (…) 너는 파괴당할 거야. 짓밟힐 거야. 너는 절대로 못 이겨. 절대로. 그리고, 그러니까, 풀./너는 절대로 지면 안 돼.(『풀이 눕는다』 145~47면)

 

그녀는 고급 브랜드 아파트를 나와 풀과 함께 그의 집에서 지낸다. 그들은 자본이 요구하는 이른바 ‘생산적인 활동’을 일절 거부한다. 풀은 그림을 그리며, 그녀는 글을 쓴다. “삶을 불확실성 속으로 완전히 밀어넣”어, “우리 자신조차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161면)한 채 살아가려는 그들은 자본의 포위망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 보인다. 그러나 직업이 없는 그들을 먹여살리는 건 생활비를 보내주는 그녀의 동생이 가진 재산이며, 풀은 명문대 미대에 다니는, 다시 말해 자본의 교육제도에 의해 검증된 예술가, 김권과 어울리는 것을 즐거워한다. 사실 그들은 한번도 자본의 포위망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것이다. ‘예외’인 줄 알았던 풀은 알고 보니 ‘죄인3’에 불과했으므로 이미 “난 아무것도 아닌, 동생의 쓰레기통에 불과하니까”(33면)라며 자본과 의견 일치를 본 죄인2 옆에 나란히 서게 된다. ‘Loser Only’라고 적힌 ‘실패인증소’의 팻말을 올려다보며 죄인3은 말한다.

 

나 진짜 열심히 살았단 말이야. 아니 열심히 산 건 아닐지도 몰라. 그래도 잘못한 건 없잖아? 이런 벌을 받을 정도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 그래 나는 돈도 없고 머리도 나쁘고 재능도 없어. 그러면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거야?(『풀이 눕는다』 274면)

 

죄인2가 죄인3을 타이르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래야만 하니까. 그게 옳은 거니까. 게으른 건 잘못이니까. 멍청한 것도. 그런 사람들은 벌을 받아야 하니까. 거지가 되지 않으려면 죽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해. 그게 옳은 거니까.(『풀이 눕는다』 278면)

 

죄인1이 고추장을 퍼먹으며 그들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제 와 뭘 어쩌란 말이냐. 난 이제 고추장이 없으면 안된다. 고추장 때문에 내 인생은 완전히 망해버렸다!(「과학자」 50면)

 

그리고 입소에 앞서, 자아정체성(“무시당할 만한 사람”)을 찾는 데 혁혁한 도움을 준 고등학교 동창, ‘스페셜 트리플 에이반’ 소속, 이수정 양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이수정은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여자애였다. (…) 나는 이수정 덕에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쉽게 과학자의 꿈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과학자」 40면)

 

합류한 죄인들이 손에 손잡고 ‘실패인증소’의 입구로 휘청휘청 들어선다. 나는 수사일지를 다시 펴고, 앞서 적은 문장을 신중히 수정한다. 여기, 세명의 죄인이 자백하였다.

 

 

3. 의심했다는 죄

 

수사일지를 한 페이지 넘기자, 심문 대상자 두명의 기록물에 관한 쪽지가 붙어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약간 거슬린다. 그들은 고발되지 않았다. 그들은 ‘죄인’이 아닌 ‘잠재적 죄인’이므로, 나는 그들을 한층 조심스럽게 살펴야 한다. 『미나』(창비 2008)를 뒤적이던 중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실수가 아닐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수정. 「과학자」에서 분명 그 이름을 보았다. 알다시피 수정의 신분은 ‘우등생’이며, 소속은 ‘스페셜 트리플 에이반’이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바꿔보자면 이렇다. 수정의 신분은 ‘성공(예정)자’이며, 소속은 ‘성공훈련소’이다. 아무도 수정의 찬란한 미래를 의심하지 않으므로, 괄호 따위는 생략해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수정은 체제의 ‘정답’이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정답’을 도출하길 권장하는 교육당국의 평가기준은 그녀의 의식구조 그 자체이다. 수정은 합리적이고 실용적이며 정확하다. 수정이 어른이 된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교육과 경제는 자본이라는 하나의 체제로 수렴한다. 그녀는 시험지의 선택지를 훑듯 신속하게 돈의 흐름을 파악할 것이며, ‘최대이익’을 산출하길 요구하는 다국적 대기업의 유용한 ‘도구’로 쓰임받을 것이다.

 

 

그런데 완성도란 무엇인가. (…) 소비자를 위한 다섯 가지 언어로 쓰여진 사용설명서이며 다섯 지역의 화폐 단위로 계산된 가격표이다. 직관적인 인터페이스, 단순하며 아름다운 로고, 빠르고 경쾌한 국면전환, 그런 것들을 사람들은 완성도라고 부른다. 아카데미 또한 학생들에게 그런 종류의 완성도를 요구하며 그것은 수정이 가장 자신있는 모든 것이다.(『미나』 82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영이』, 이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에는 바로 그 유용한 도구 중 하나인 ‘나’의 삶이 기록되어 있다. ‘나’의 신분과 소속은 어른 버전 수정의 그것과 일치한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을 함부로 여길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가서 모두를 함부로 여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야심만만한 수정과 달리, ‘나’는 “열심히 살지 않으면 뒤처지고 뒤처지면 끝장”(188면)이라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그저 실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애써왔을 뿐이다. 수정은 그녀보다 열등한 누군가를 밟기 위해 살지만, ‘나’는 그보다 우월한 누군가에게 밟히지 않기 위해 살아왔다. 어쨌거나 체제 안은 밟지 않으면 밟히는 방식으로 작동하기에, 둘은 ‘성공자’라는 동일한 부류로 묶이며, 따라서 ‘의심’이라는 동일한 죄의 혐의를 입는다.

수정이 체제의 ‘정답’이라면, 실패자들은 체제의 ‘오답’이다. 수정은 당연하게도 그들을 혐오한다. 그들은 복수 혹은 다수의 정답을 주장하며, 선택지를 추가하고, 시험지를 찢어버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이 대열에 지예, 그리고 ‘미나’가 합류한다. 시험을 망친 지예는 독서실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지예의 친구인 미나는 시험지를 백지로 제출했고, 학교를 자퇴했으며, 불면증에 시달린다. 미나는 수정의 가장 친한 친구인 동시에 ‘오답’이다. 미나의 이중성은 수정을 혼란에 빠뜨렸고, 이 혼란 속에서 ‘의문’이 피어난다. 미나에 대한 의문은 수정 자신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며, 나아가 체제에 대한 ‘의심’으로 확장된다.

 

내가 이박삼일간 여러분의 정신을 확실히 개조해주겠다. 움직여라. 생각은 내가 대신 해줄 테니. 움직여라./수정은 교관의 눈에 들었다. 아이들은 의무적으로 수정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 수정에게 남은 것은 근육질의 종아리와 두 뺨의 옅은 주근깨와 식중독과 식중독의 후유증과 그에 대한 학교당국의 냉담하고 형식적인 처리와 자신에 대한 모멸감뿐이었다.(『미나』 70~71면)

 

‘수련원’이라는 공간은 학교, 학원, 기업과 정확히 같은 원리로 설계된 곳이다. 따라서 수정은 변함없이 성공자였고, 성공자답게 극한의 상황을 훌륭히 견뎌냈다. 그러나 수정은 실패자가 된 채 수련원을 나와야 했다. 노력은 보상을 보장하지 않았고, 훈련은 적응을 돕지 못했다. 수정이 충성하던 자본의 법칙이 수정을 배신한 것이다. 수정은 병에 걸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후유증에 시달리기 위해 훈련을 받은 셈이 되었다. 체제는 언제나 수정의 편이었는가? 수정은 언제나 성공자였는가? ‘언제나’는 아니었다. 체제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곧 수정에게 결함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수정은 “불필요한 것을 단호히 외면”하며 “무감각한 상태”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이 사실을 회피해왔다. 그러나 미나를 만날 때마다, 미나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수정은 자꾸만 이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결국 수정은 ‘자본’이라는 체제에 의존하는 대신, ‘수정’이라는 체제를 만들기로 한다. 자본의 모든 ‘오답’을 제거한 체제. 그것이 바로 ‘수정’이라는 체제이다.

 

나는 사람이 싫다. 멍청하니까. 멍청한 애들이 싫다. (…) 왜 그러고 사는지 모르겠다. 너 같은 인간은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말한 다음에 아주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이고 싶다. 그러고 나서 웃어야지. (…) 나는 좋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 위대한 사람이 될 거다.(『미나』 101~2면)

 

한편 ‘나’는 ‘세상에 정답은 없다’는 주의이다. 그에게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오답’이며, 구성원인 사람들과 그들이 의미를 부여한 사물들 또한 무수한 오답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모든 것에 무관심한 ‘나’에게 확실한 건 단 하나, ‘공포’뿐이다. ‘나’는 자신의 공포뿐 아니라 타인의 공포까지도 감지한다. 이 공포는 성공해야 한다는 공포, 실패해선 안된다는 공포이며, 따라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포’이다. 자본은 이를 원동력으로 체제를 지탱해나간다. 자본은 공포를 “성취감”으로 둔갑시켜 사람들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지만, ‘나’는 “단 한번도 어떤 성취감도 느껴본 적이 없”(188면)는 사람이므로, 자신이 왜 움직이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므로 질문한다. 생각한다. 이 과정 속에서 ‘나’는 공포감지 능력을 얻었으나, 여전히 정답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정답 같은 건 처음부터 없는 게 아닌가? 공포가 전부인 건 아닌가?

 

확신을 가져라. 자신을 사랑하라. 도전하라. 믿으라. 하고 싶은 것을 하라. 미래가 눈앞에…… 있다…… 반면 난 언제나 의심했고 날 사랑하지 못했고 불신했고 하고 싶은 것을 미루었고 미래는 마치 내 눈앞에서 침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움직이면 움직일수록」 213면)

 

‘나’의 풀리지 않는 의문은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급기야 ‘살해’로 이어진다. 이는 논리적으로 이상 없는 파국이다. 공포는 생존을 위해 발달된 감각이며, ‘나’는 체제에 의해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공포’를 감지할 줄 안다. ‘나’는 매순간 순도 높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므로, ‘방어본능’에 의해 공포라는 적을 공격한다. 공포가 깃들지 않은 존재는 체제 안에 없다. 따라서 그는 “주위의 모든 것이 내 분노의 원인이다”(191면)라는 명목 아래, 주위의 모든 것을 제거한다.

수정과 ‘나’는 위험하다. 그들은 체제가 인정한 ‘성공자’이므로, 체제가 어떤 방식으로 운용되는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해결되지 않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곧 체제의 한계에 대한 고발이다. 그들은 언제든 ‘반역자’로 돌변할 위험을 가지고 있는 ‘잠재적 죄인’인 것이다. ‘성공인증소’에서 간부회의가 열렸다. 체제가 파악하지 못한 전제가 있고, 통제하지 못한 변수가 있으며, 그리하여 예상치 못한 결과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간부들은 이를 꼼꼼히 분석하여 오류를 수정했으나, 곧 또다른 오류가 발생했고, 또다시 수정했으며, 또다시 발생했다. 수정과 ‘나’가 손을 높이 든다. 이제 뒤처리에는 신물이 났으므로, 차라리 오류를 ‘제거’해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그들의 제안이 안건으로 상정되었고, 과반수로 통과되었으며, 곧바로 시행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적용대상이 모두 사라진 후 남는 건 체제가 아닌, 체제의 ‘도식’뿐이다. 현실이 아닌 가상이 되어서야, 체제는 진정으로 단 하나의 ‘정답’만을 도출해낸다. 성경 속에 그려진 낙원처럼, 수학 문제집 속에 적힌 공식이 된다. 나는 쓸모를 잃어버린 수사일지를 덮는다. 창밖으로 던진다.

 

 

4. 모두가 죄인이거나, 죄목이 사라지거나

 

두번째 시나리오. 나는 수사일지를 성실히 적어나가 기어이 마지막 장에 다다른다. 내가 보지 못한 이름도, 읽지 못한 기록물도, 파악 못한 죄인도 이제 더이상은 없다. ‘실패인증소’의 수용인원은 초과되었으며, 나는 물론이고 내가 수사한 수많은 죄인들 중 그 누구도 ‘성공인증소’의 성공자들을 ‘실제로’ 알지 못한다. 그들은 부쩍 한가해진 단지 내를 여유롭게 걸으며 오직 그들끼리만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며, 성공의 비결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성공인증소’에서 더이상 새 입주민을 받지 않게 되자, 성공자와 실패자 사이에 존재하던 절대다수의 중간계층, ‘예비성공자’의 명칭은 ‘예비실패자’로 변경되었다. 뭘 해도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으리라는 ‘무력감’이 열심히 살다보면 언젠가 성공하리라는 ‘기대감’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정오의 산책」(『영이』)의 한과 『천국에서』(창비 2013)의 케이를 수사일지의 마지막 장을 장식할 최후의 죄인으로 맞이한다.

케이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저는 솔직히 명품에도 관심없고, 돈 많이 버는 것도 별로 관심 없어요. 그냥 적당히 소박하게 살고 싶어요.”(243면) 그녀에게 주어진 사명은 ‘성공자’가 되는 것도, ‘실패자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닌, 무슨 수를 써서든 ‘남과 다를 것’. 다시 말해 ‘특별해지는 것’이다. 돈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고,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는 없다. ‘다수’와 ‘동일시’는 특별한 케이의 특별한 사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케이는 좀더 돈냄새가 덜 나는 곳, 좀더 사람들이 덜 모이는 곳을 찾아 헤매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렇게 그녀는 대중, 그리고 매스미디어와 거리를 두고 활동하는 뉴욕의 힙스터들, 홍대의 인디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소수취향’ 공부에 몰두한다. 그러나 자본은 자본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 자본에 반하는 것 상관없이 모조리 자본화시키는 ‘무한한 포용력’을 가지고 있다. 상품이 될 가능성이 잠재해 있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자본이라는 공통된 이름으로 획일화되는 동시에 자본이라는 공통된 이름하에 세분화된다. 그렇게 자본은 애써 ‘외부인인 척’하는 까다로운 손님들마저 우수고객으로 만들고야 말며, 나아가 충성스러운 노예로 길들인다.

한편 한은 케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하는 ‘다수’ 중 한명이자, 앞서 살펴본 ‘죄인’들과도 다르다. 한은 ‘실패’하지도 않았고, ‘의심’하지도 않는다. 그는 일상의 유지를 위해 크고 작은 고통들을 묵묵히 견뎌낼 줄 아는 근면하고 순종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일상으로 설명되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는 선택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앞서 체제의 ‘예외’가 되고자 했던 『풀이 눕는다』의 풀과 ‘그녀’의 방식은 결국 ‘실패’로 끝을 맺지만, 비록 잠깐이나마 그들은 자본이라는 조정장치가 사라진,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삶”의 모습을 목격한다. 이는 체제에 적합하게 손질된 모든 존재들의 “감추어진 겹”이 드러나는 순간이며, 한은 이 순간을 그 누구보다 풍부하게 감지한다.

 

그런 식으로, 허물어지는 한가운데서 감추어져 있었던 삶의 맨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거기 진짜 삶이 있었다. 단 한조각도 빼앗기지 않은 순수한 삶이 말이다. 그런데 그게 과연 삶이었을까? 단지 환영이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그건 아름다웠다. (…)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좋았다.(『풀이 눕는다』 161~62면)

 

물론 그는 여전히 세상을 가득 채운 사물들을 전과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있었다. (…) 그러나 거기에는 감추어진 겹이 하나 더 있었다. 그는 그 사물들, 하늘과 나무와 도로, 그리고 그 사이를 움직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따라 부드럽게 흐르는 힘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밝은 빛으로 이루어진 흐름이었다. 한은 정말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전에는 이런 것을 볼 수 없었는가?(「정오의 산책」 171면)

 

풀과 그녀가 이 순간을 지속시키는 데 실패한 원인은 그들의 체험이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라는 데 있다. 풀과 그녀는 자본을 거부함으로써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려 하기보다는, 자본을 거부함으로써 체제 안에서 ‘탈락’되고자 한다. 따라서 만일 풀과 그녀가 체제에서 자유로워진다면, 이는 체제 안에 살고 있는 모두를 위한 구원이라기보다는, 두 사람만을 위한 사적인 구원1)*에 더 가까울 것이다. 반면 한은 조부모인 정과 회에게 자신의 체험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지만, “한이 혓바닥을 움직일 때마다 그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했”(185면)으므로, 정과 회는 한이 하는 어떤 말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으며, 그들에게 한은 단지 ‘공포’의 대상에 불과할 뿐이다. 체제 안은 익숙하지만, 체제 밖은 낯설다. 자본은 당연하지만, 자본 아닌 것은 상상이 불가능하다. ‘모르겠다’는 공포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포를 뛰어넘기에, 한 또한 사적인 구원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상의 소진’은 한을 태워버릴 수는 있겠으나, 체제에는 흐릿한 그을음만을 남길 뿐이다. 오히려 단 한순간도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본 적 없을 뿐 아니라, 부단히 자본의 영역 확장에 일조해온 케이가 『미나』의 수정이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의 ‘나’의 경우와 같은 극단적 ‘파국’, 혹은 『풀이 눕는다』의 풀과 ‘그녀’나, 「정오의 산책」의 한의 경우과 같은 비일상적 ‘구원’이 아닌, 주체적 ‘인식’을 통하여 체제 너머로 나아가는 데 성공한다. 체제라는 단일한 ‘틀’ 속에 가둬진 세상은 “수족관”이 베낀 바다와 다름없다. 체제 안이 전부인 양 착각하는 사람들과 수족관 속이 진짜 바다인 양 착각하는 물고기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취향의 소진’은 공허를 남기고, 공허는 곧 새로운 취향으로 채워지지만, 제아무리 매혹적이라 해도 영원한 취향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취향은 소진된다. 영원한 건 취향이 아닌 취향과 공허의 굴레, 다시 말해 상품과 싫증의 반복이다.

 

네 주위엔 언제나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격려하는 사람들뿐이잖아. 아마도 그래서 너는 언제나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사람이었나보다. 어쩌면 그래서 너는 힘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랬을 거 같아. 하지만 부러웠어. 진짜 부러웠어. 근데 그래서 너는 그게 뭔지도 모르는 채로 네가 원하는 것을 끝도 없이 찾아 헤매고 있고 나는 반대로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이, 아무 생각도 아무것도 안 찾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나봐.(『천국에서』 338면)

 

진열대 위, 상품들이 말한다. “여기는 천국이야.” 진열대 앞, 케이가 고백한다. “이 안에서 나 더이상 즐겁지가 않아.” 케이는 어떤 상품을 선택할지 고민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지”(340면) 고민한다. 케이의 쇼핑에는 ‘이것만은 반드시’라는 철칙이 없다. 그녀는 “흐르는 물”처럼 유연하게 ‘이것’에서 ‘그것’으로, ‘그것’에서 ‘저것’으로 손을 뻗는다. 상품들은 진열대 위에 우아하게 누운 채,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을 기다린다. 그들에게도 역시, 그 ‘누군가’가 반드시 케이일 필요는 없다. 케이와 상품 간의 “우연”적 만남은 그러나, ‘어느 것’이든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본의 명령에 따른 ‘필연’적 결과에 불과할 뿐이다. 케이는 자유롭다. 단, 수족관 안에서만 자유롭다. 그러므로 케이는 사실,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 “더이상 우연을 믿지 않”게 되어서야, 케이는 “마침내 문을 열었다.” 문밖에서도 케이는 별다른 문제 없이 걷고, 달린다. ‘인증’하기 위해서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도 아닌, ‘인증’과 ‘사명’ 모두가 사라진 곳으로 가기 위하여. 달리는 케이는 깨닫는다. “수족관 따위 없다는 것을.”(341면) 다시 말해, 케이는 ‘체제’가 절대적인 게 아니라 ‘체제에 부여된 절대성’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체제에 절대성을 부여했는가? 불과 몇분 전의 케이 자신을 포함하여, 여전히 체제 안에 머물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다. 결국, 김사과의 ‘보급형 선악과’는 실패자, 성공자 그리고 그 어느 쪽도 아닌 자 모두를 죄인으로 만들고야 만다. 자본이라는 속임수, 체제라는 허상에서 벗어난 죄인은 더이상 속박된 죄인이 아닌 자유로운 주체이다. 스스로 사과를 베어문 아담과 이브는 비로소 눈을 뜬다. 한때 낙원이었으나, 더이상 낙원이 아닌 자본을 본다. 그렇게 그들은 낙원으로부터 해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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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연민과 분노라는 소중한 품성을 가장 예민하게 느끼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구원하기를 꿈꾸며, 사적인 구원의 행위를 공적인 현실의 구원으로 확대시키기를 꿈꾸는 자가 시인이다.” 이명원 「연민과 분노가 필요한 지금」, 『해독』, 새움 2001, 18면.

 

 

 

평론 | 심사평

 

모두 18명의 대학생이 글을 보내왔다. 신춘문예와 문예지 공모에 평론 응모작이 줄어드는 현실에서 볼 때 자못 고무적이라 할 만하다. 더 바람직한 일은 응모작들의 수준이 대체로 높았다는 점이다. 대학생 예비 평론가들의 기량이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상위권의 글들이 지닌 장점은 ‘넘치는 에너지’였다. 대학생다운 패기와 열정이 넘치고, 작품에 대한 애정이 넘치며, 작품을 장악하려는 의욕이 넘치고, 기성 평론과는 다른 새로운 독법을 제시하려는 포부가 넘쳤다. 읽는 내내 긴장감과 비평적 흥미를 경험하게 하는 글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넘치는 에너지’는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는 평론이 경계해야 할 다양한 ‘과잉’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특히 평론의 틀 짜기와 개념화, 분석도구 설정 등에서 프로이트, 라깡, 들뢰즈, 지젝 등의 외국 이론에 과하게 의존하는 현상은 우려를 자아냈다.

「사랑하는 눈을 뜨라, 그리고 한낱 꽃같은 심장으로 침몰하라」는 서정주의 『화사집』에서 탈주의 주체와 자기부정의 운동성을 읽어내려는 비평적 자의식이 선명하다. 하지만 자의식과 도전정신이 승한 나머지, 표현과 어조의 격앙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소설이라는 탈을 쓴 문학과 정치」는 정용준의 소설을 ‘한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의 ‘정치적인 계보학’으로 읽어낸다. 최근 문학의 위기 담론과 정치 논쟁까지를 아우르려는 스케일에 비해 논의의 구체성은 소박한 편이다. 또한 주체와 사랑, 정치 등에 대한 논의에서 자기 목소리가 부족하며 작품과의 밀착성이 떨어진다. 「가면과 얼굴의 전도」는 김영하의 『빛의 제국』을 대상으로 ‘N포세대’와 그 이전 세대의 정체성의 차이를 분석한다. 문제의식이 분명하지만, 소비사회의 거짓과 진실을 이분법적 구도로 설정한 점, 평론과 학술논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점, 세대 담론을 텍스트에 연역적으로 적용한 점이 아쉽다. 「미로: 떠도는 것들의 집」은 박성준, 손순미, 황병승의 시를 근대에 대한 이의 제기로서 ‘비정상’과 ‘결핍’의 관점에서 읽는다. 시의 속살을 더듬어나가는 감각이 예민하다. 세명의 시인을 한꺼번에 다룬 내공이 인상적인데, 결론이 없어 마무리가 안된 글이 되고 말았다. 「결여의 존재론: ‘나’의 상실에 대하여—김숨 소설 읽기」는 마지막까지 물망에 오른 글이다. 김숨 소설을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매력을 지녔다. 김숨 소설에서 ‘반복’이 갖는 의미, 즉 우리 삶의 내밀성이자 전부로서 과잉(결여)과 붕괴의 형태로 나타나는 ‘반복’이 ‘나’의 존재에 가하는 충격을 설명한다. 비평적 감식안이 섬세하고, 이를 뒷받침할 문장력과 논리 구성 능력도 갖추었다. 루카치와 지젝의 이야기를 좀더 녹여내서 썼다면 더 자연스럽고 깔끔한 글이 되었을 것이다.

최윤정의 「보급형 선악과 베어먹기—김사과론」은 신선하고, 간결하고, 명료하다. 텍스트와 현실사회를 겹쳐놓고 읽는 비평적 통찰력이 뛰어나며, 근사한 글쓰기나 위엄있는 평론에 대한 강박이 없다. 이 글은 우선 형식이 독특하다. 수사일지를 기록하는 형식을 빌려, 김사과의 여러 소설로부터 죄인과 심문 대상자 들을 소환한다. 죄목은 체제 진입의 ‘실패’와 체제에 대한 ‘의심’이다. 태초의 선악과가 낙원과 낙원 추방을 가르는 유일한 징표이자 사건이었던 반면, 자본주의체제에서 선악과는 자본의 일방통행로를 질주하는 예비성공자들(예비실패자들로 전환 중인) 앞에 널려 있는 상품이며 일상이다. 최윤정은 ‘보급형 선악과’라는 흥미로운 개념 설정을 바탕으로, “‘체제’가 절대적인 게 아니라, ‘체제에 부여된 절대성’이 절대적”이라는 깨달음이 김사과 소설이 현재 우리 사회에 던지는 귀중한 메시지임을 설파한다. 한국문학의 미래를 열어나갈 좋은 평론가로 대성하기를 바라며, 따뜻한 축하를 보낸다.

김사인 김수이

 

 

 

평론 | 당선소감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 기뻤고, 곧바로 겁에 질렸습니다. 글을 쓰는 데 자격이 필요하다면, 저는 그 자격을 박탈당한 사람, 아니 곧 박탈당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웠습니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 다가간 적도, 도망친 적도 없는 척했습니다.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척했습니다.

잠이 오지 않던 새벽, 지금보다도 더 어린 제가 쓴 지금보다도 더 설익은 첫번째 평론(이라기보다는 긴 감상문)을 기억합니다. 아무도 저를 찾지 않던 때였습니다. 이번에는 명백하게 제가 먼저 도망친 때였습니다. 저는 도망쳤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썼습니다. 저를 억울하게 만들었고, 뒤이어 고개 숙이게 만들었던, 제 안의 기묘한 성분들에게 예쁜 명분을 붙여주려 애썼습니다. 명분이 되어준 그 작품을 저를 대신해 사랑했습니다.

저는 여전하지만, 저의 성분들은 잠잠해졌습니다. 언젠가부터 저는 더이상 도망치지 않게 되었고, 그것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기로 결심했기에 가능해진 일이었습니다. 그대로 있는 게 자연스러운 것들을 동경했습니다. 버려지느니 홀로 부패해가기를 택한 것들과 친해졌습니다. 방부제를 친 하얗고 매끄럽고 단단한 것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종종 그런 저를 상상하며 글을 썼지만, 어찌됐든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은 못될 것입니다.

음(-)의 형태로 움직일 줄 아는 죄인들을 만났고, 알았습니다. 저는 차마 죄인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을. 죄인이 되기에는 너무 소심했고, 죄인이 아니라기엔 너무 자주 도망쳤습니다. 저는 그저 그들 바깥에서 그들과 최대한 가까워지려 애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명분이라는 폭력 없이 작품들을 사랑하고 싶었지만, 저는 이번에도 작품들을 완전히 놓아주진 못한 것 같습니다. 작품들이 자꾸만 제 손을 빠져나갈 때마다, 저는 저의 다른 쪽 손을 맞잡듯 작품들을 붙잡았습니다. 뻔뻔함을, 집착을 패기로 너그러이 봐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게는 너무나 과분한 상입니다. 저를 사랑하기에 갖은 애 다 써주신 부모님, 사랑합니다. 시 쓰는 K야. 내가 막 걸음마 뗀 아이처럼 막 걸음을 멈췄을 때,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사랑해. 문학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던 제게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서울과기대 교수님들, 감사합니다. 저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훨씬 더 글 잘 쓰는 스터디원들, 부족한 저를 이끌어줘서 고마워요. 지면상의 문제로 한명씩 언급할 수는 없어도, 여태 저에게서 도망치지 않아주신 모든 이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쓰고 나서는 벌벌 떨면서도, 쓸 때는 그저 재미있게 쓰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덜 어설프게, 더 제멋대로이고 싶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움직이지 않은 척할 생각입니다만, 조금은 흔들려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은 것 같습니다. 시치미 뚝 떼며, 그렇게 쓰겠습니다.

최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