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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한국현대사, 같고 다른 세가지 길

김종필, 이종찬, 임재경의 회고록을 읽고

 

 

한홍구 韓洪九

성공회대 교수, 한국현대사.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책임편집인. 저서로 『사법부: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역사와 책임』 『대한민국사』(전4권) 『유신』 등이 있음. hongkoo@skhu.ac.kr

 

 

회고록 읽기와 역사연구

 

문헌자료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역사학도들에게 회고록은 사료로 쓰기도 애매하고, 무시하기도 힘든 참 골치 아픈 존재다. 구술 인터뷰의 경우는 그래도 질문자가 어느정도 개입하여 추가질문도 하고 반대증거도 제시할 수 있지만, 문자화된 회고록은 일방통행길처럼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다. 사람의 기억은 착오가 있게 마련이다. 의도적으로 자기변명이나 미화를 하려는 것이 아니더라도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어떤 것은 지워지거나 부풀려지고 어떤 것들은 서로 엉켜버린다. 하물며 어떤 역사적 사건의 핵심에 있었던 사람이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동이나 결정을 정당화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면 그의 기억은 자발적인 왜곡의 과정을 겪게 된다. 회고록은 중요한 자료이긴 하지만 마치 오염된 시료처럼 실험에 사용하기는 매우 꺼려지는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처음 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된 1970년대나 80년대에는 워낙 연구서도 자료도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헌책방에서 『광복20년』 『정계야화』 『흑막』 『내막』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 같은 회고록이나 비화 등을 찾아 읽어야 했다. 이때는 『창작과비평』 등에 실린 현기영 김춘복 이문구 윤흥길 김원일 등의 소설이 해방에서 한국전쟁에 걸친 현대사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화가 진척되고 또 해외자료가 발굴되면서 원 사료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지고 연구자의 층도 두터워짐에 따라 회고록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급격히 감소되었다. 특히 노무현정부 시기에 본격화된 과거사정리사업은 몇몇 사학자의 노력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방대한 사료를 발굴해냈다. 그렇지만 이런 사료들이 현대사의 광범한 영역을 모두 포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권력 내부의 은밀한 이야기는 처음부터 자료가 만들어진 적도 없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여전히 회고록에 무엇이라 쓰였는가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회고록에는 공식사료에서 보기 힘든 관련자들의 인간성이나 생각, 서로의 관계, 인물평 등이 생생하게 나와 상황과 시대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권력의 핵심에 있었거나, 어떤 큰 역사적 사건에서 당사자로 활동한 사람들의 증언도 중요하지만, 권력의 외부에서 당대인의 생각을 전해주는 회고록 또한 소중하다.

요즘도 회고록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원조보수라 불리는 김종필(金鍾泌, 1926~ ), 광주학살을 통해 등장한 전두환정권에서 온건합리파란 묘한 위치를 점하다가 김대중정권 탄생의 1등공신이 된 이종찬(李鍾贊, 1936~ ), 그리고 평생을 비판적 언론인·지식인으로 일관해온 임재경(任在慶, 1936~ ) 세 사람이 최근에 낸 회고록1)은 특별한 관심을 끈다.

 

 

듣고 싶은 것은 없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많은 『김종필 증언록』

 

아마도 대중적인 관심이 가장 크게 쏠린 책은 『김종필 증언록』일 것이다. 한마디로 이 책을 평한다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이다. 김종필은 자신은 “회고록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면서 “자화자찬, 자기미화와 정당화의 늪에 빠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110면).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근 몇년간 읽은 회고록 중 자화자찬과 정당화를 가장 많이 한 책이 아닐까 한다.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권력의 정점 부근에서 보낸 JP는 누구보다 깊은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고, 누구보다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분량도 1천쪽에 가깝다. 장을 볼 때는 이것저것 귀한 식재료를 많이 사간 것 같은데 막상 식탁에 내놓은 음식은 변변치 못한 격이다. 말한 것보다는 말하지 않은 것, 드러낸 것보다는 감춘 것에 더 관심이 가게 만드는 책이다. 원조보수를 자처하는 노정객이 인생 90에 입을 열었다면 더 솔직했어야 했다. 중앙일보 연재 당시의 제목은 ‘소이부답(笑而不答)’이었다. 이백(李白)의 유명한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에서 따온 말로, 왜 깊은 산속에 사느냐고 묻거든 빙그레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내 마음은 편안하다(問余何事栖碧山 笑而不答心自閑)는 뜻이다. 김종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실컷 늘어놓았지 정작 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씩 웃으며 비켜갔다. 그 마음이 과연 이백이 말하듯 스스로 한가로운 것이었을까?

나는 젊은 시절의 김종필은 누가 뭐라 해도 패기만만하고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멋있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군사정권의 2인자였던 JP는 대학생들과의 토론을 피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그에게 꼭 설득된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은 야유로 JP를 맞이했지만 두세시간 열정적으로 학생들에 맞서 토론했던 그를 큰 박수로 떠나보냈다고 한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매력은 나이 든 쌀리에리가 재주 넘치지만 경박한 모차르트를 여전히 질투하고 부러워하며 회상하는 점에 있다고 할 것이다. 『김종필 증언록』에서 나는 비록 지금은 나이 들었지만 그런 JP를 만나고 싶었다. 늙고 주름진 쌀리에리가 자신이 바로 모차르트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력이 없다. 그 JP는 어디로 갔을까?

시작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특히 한국전쟁 개전 초기 한강 인도교를 폭파할 때 200미터쯤 떨어져 있던 김종필의 얼굴에 후두둑후두둑 사람의 피와 살점이 떨어졌다는 얘기는 너무도 생생했다. 김종필은 5·16군사반란의 이른바 ‘혁명공약’ 제1항,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는다는 것이 박정희(朴正熙)의 좌익경력 때문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박정희의 좌익경력은 이제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궁금한 점은 박정희의 좌익경력이 아니다. 정말 문제가 되는 점은 김종필 자신의 좌익경력이다. 미국은 또는 한국의 보수세력은 박정희의 좌익경력을 사실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박정희는 좌익의 조직체계 전체를 ‘분’ 댓가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좌익의 입장에서 볼 때 박정희는 용서받을 수 없는 배신자였다. 그런데 JP는 달랐다. 당시 징병제도 아니었는데 서울대 학생이 장교도 아닌 사병으로 입대했다면 99퍼센트 좌익운동을 하다 경찰에 쫓겨 군으로 도망친 경우였다. 당시는 전산화가 되어 있지 않아 군입대가 경찰의 추적을 피하는 가장 안전한 피난처였다.2) 당시 미 대사관 서기관으로 있던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은 「군사정부 내에서의 공산주의자 영향력에 관한 테제」라는 비밀문서를 작성한 바 있다.3) 헨더슨은 김종필이나 그의 측근인 김용태(金龍泰), 장태화(張太和) 등 군사정권 요인(要人) 중 상당수가 “현재 공산주의 ‘슬리퍼’(활동하지 않고 숨어 있는 스파이)인지, 아니면 우리가 바라듯이, 단지 회개한 과거 좌익분자들의 친목집단인지는 입증되지 않은 상태”라고 주장했다.

김종필의 자민련 총재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극우논객 이동복(李東馥)은 필자와의 인터뷰4)에서 깜짝 놀랄 증언을 했다. 미국이 5·16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다음날인 1961523일, 김종필은 이백여명의 내외신 기자들을 태평로 국회의사당에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했다고 한다. “혁명정부의 경제정책은 어떻게 됩니까”라는 어느 외신기자의 질문에 김종필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혁명정부의 경제정책은 사회주의로 나갑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동복은 이 사회주의는 이집트의 나세르(G. A. Nasser)식 사회주의였으며, “군사쿠데타 주체 가운데에 그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박정희는 자신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1963)에서 자신도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지사들처럼 조국을 근대화시키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함한 명치유신의 지사들은 처음 쿠데타를 단행했을 때는 개화니 조국근대화니는 생각도 하지 않는,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위정척사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막상 권력을 잡고 보니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며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원조보수’ JP가 자신도 한때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었다고 털어놓는 것이 이제 와서 무슨 큰 흉이 될까. 기왕 회고록을 쓰는 마당이면 처음부터 솔직했어야 했다. 이 점을 감추고 나니 왜 미국이 김종필을 그토록 경계했으며, 왜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들이 공산당의 조직방식을 채택했으며, 어쩌다 ‘거물 간첩’ 황태성(黃泰成)이 공화당 창당 요원들을 밀봉 교육시켰다는 논란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다.

5·16군사반란의 주역들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에 모여 있었다. 한마디로 5·16은 정보장교들이 일으킨 군사반란이었다. 민간인 학살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4월혁명 직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의 해원(解寃)을 위한 생존자와 유가족 들의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는데,5) 5·16으로 집권한 정보국 출신들은 이 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군사정권은 이승만정권이 무너진 뒤 거창에서 유가족들이 희생자들의 유해를 수습해 만든 합동분묘를 파헤쳐 네 뼈 내 뼈 없이 섞인 유골을 유족들을 모아 n분의 1로 나누어주고 추모비는 땅에 묻어버렸다. 경상남북도 유족회의 경우 이른바 혁명재판에서 다섯명이 사형을 구형받았고, 한명이 사형 선고되었지만6) 다행히 집행되지는 않았다. 왜 이런 가혹한 탄압이 이루어졌을까. 한국전쟁 기간에 일어난 가장 끔찍한 사건은 보도연맹 학살이다. 이승만(李承晩)에게 바로 지금이라며 학살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건의한 곳은 어디였을까. 당시의 군과 정보기관 편제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육군본부 정보국밖에는 없다. 이 점은 5·16으로 탄생한 군사권력 핵심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로 앞으로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며, 아마도 현대사 연구자들이 JP에게 가장 물어보고 싶은 대목일 것이다.

『김종필 증언록』에서 가장 허술하게 처리된 부분은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1973)이 아닐까 한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 자신도 김대중 납치에 대해서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김종필은 박정희가 “아 글쎄, 이후락 그자가 서울에 김대중을 데려다놓은 후에 보고를 하잖아. 나한테 한마디도 않고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라며 화를 감추지 못해 자신은 박정희가 김대중 납치를 지시하거나 거기 개입하지 않았음을 알고 안도했다는 것이다(1441면). 회고록에서 일관되게 박정희를 옹호하는 김종필은, 김대중 납치사건은 중앙정보부장 이후락(李厚洛)이 ‘윤필용 사건’(1973)으로 궁지에 몰리자 박정희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 ‘죽을 꾀’를 낸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후락이 박정희 모르게 그런 꾀를 냈고, 중앙정보부 요원이 현장에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선명한 지문을 남겨놓았다면 박정희는 이후락을 당장 해임시켰어야 옳다. 필자가 말석으로 참여했던 국정원과거사위원회에서는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하여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이라는 명시적인 지시를 내린 바는 없지만, 이후락의 김대중 납치는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김대중의 일본에서의 활동을 방치하고 있는 점을 계속 질타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결론내린 바 있다. 김종필은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악화된 한일관계를 단 한번의 총리회담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다나카의 직선적이고 호방한 성격에 나와 개인적 인연이 더해진 덕분”이라고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1444면). 그러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박정희정권은 대한항공 회장 조중훈(‘땅콩회항’ 조현아의 할아버지!)을 통해 일본 총리 타나까(田中角榮)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바치며 한국정부의 일본 주권침해를 덮어버렸다.

김대중 납치사건이 박정희는 전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고 강변하는 김종필은 문세광(文世光)의 박정희 저격에 대해서는 “문세광이 김일성의 지시로 박대통령을 시해하려 했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한국의 최고 지도자를 시해하는 것은 어떤 상황이라 해도 김일성의 직접 지시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주장했다(1463면). 문세광이 김일성의 지시로 박정희를 죽이려 했다고? 아내를 잃은 박정희는 처남 육인수(陸寅修)에게 “납치사건이 없었더라면 이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며 대단히 비통해했다고 한다.7) 박정희 자신이 문세광의 저격사건이 김일성의 지시가 아니라 김대중 납치사건에 분노한 재일동포 청년의 과격한 행동이었음을 털어놓은 것이다. 한국정부가 문세광의 배후로 지목한 조총련계 인사에 대해 일본경찰은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김종필이 단정한 것처럼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숨졌는지도 사실은 심각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대목이다.

김종필의 박정희 변호는 10·26사건을 설명하는 데에서 절정에 달한다. 김종필은 10·26사건의 원인을 김재규(金載圭)의 ‘발작증’으로 단순화시켰다. 과연 그날 박정희가 어린 여성들과 차지철(車智澈) 앞에서 김재규를 몰아붙이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건을 피할 수 있었단 말인가. 김대중 납치사건이나 10·26사건은 유신 폭압권력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부분이 발현된 것이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19716월 국무총리가 된 김종필은 유신시대 전반기 국정의 2인자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은밀하게 진행된 유신 친위쿠데타의 준비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것은 김종필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는 박정희가 19725월 어느 토요일 “내가 국가비상관리 체제를 생각하고 있어”라며 뒷날 유신이라 불리게 된 비상조치에 대해 미리 귀띔해주었다고 주장했다(1404면). 김종필은 유신을 추진한 사람이 흔히 알려진 것처럼 이후락이 아니라 박정희였다면서, 자신은 박정희가 지휘하는 이 작업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중간중간 어떻게 돌아가는지 흐름만 파악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종필은 유신의 문제점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3선개헌 때와는 달리 유신을 적극 지지했고, 박정희를 제외하고 “나만큼 유신 시대의 중심에 있던 사람은 드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유신잔당 물러가라고 구호를 외치는 대학생들에게 나는 “유신잔당 아닌 유신본당”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그는 김대중과 손을 잡아 역사적인 정권교체를 이룰 때도 박정희의 정치적 상속인으로서의 입장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내가 김대중에게 직접 고통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점에서 나 외에 박대통령을 대신해 그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줄 사람은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은 이회창(李會昌)40만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겼는데, 김종필은 그 40만표는 김대중이 충청권에서 이회창에게 앞선 40만표와 일치하는 것이라며 DJP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런 지지의 댓가로 김대중에게 국민화합 차원에서 박정희기념관을 지어줄 것을 요구했고, 김대중이 이 약속을 지켰다고 회고했다(2227~29면). 이런 입장은 나름 일관성있는 것이고, 정치적 상속자로서 긍정적인 부분뿐 아니라 부정적인 부분에도 자기 방식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이는 박정희라면 절대선으로 생각하며 부정적인 유산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는 박근혜(朴槿惠) 대통령과 뚜렷하게 비교되는 점이다. 역사는 박근혜와 김종필 중 누구를 박정희의 정치적 상속인으로 규정할 것인가? 흥미로운 점은 이 방대한 회고록에서 박근혜는 10·26 당일 박정희의 시신을 청와대로 운구해오는 장면에서만 잠깐 등장할 뿐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종필이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과 손잡았을 때 박근혜는 이회창을 지원하는 것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고,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에는 “김대중 대통령은 아버지가 하시던 일마다 반대하고 입장을 달리했던 분”이라며, 김종필과 박태준(朴泰俊)을 싸잡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든다는 말이나 안하면 모를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 어떻게 그쪽과 공조할 수 있느냐”고 비판한 바 있다.8) 김종필은 김영삼(金泳三)처럼 박근혜를 공개적으로 ‘칠푼이’라고 폄하9)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정치부 기자들과 정계 소식통들은 박근혜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청문회에서 “천벌받을 짓”이라고 강력하게 해명한 ‘출산설’의 진원지로 JP를 꼽고 있다. 김종필이 당시 아무리 한발 물러나 있었다 하더라도, 최태민(崔太敏) 문제며, 5·16장학회 문제며, 박정희 사후 유가족의 육영재단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 등에 대한 정보와 입장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김종필은 함구했다. 정말 증언해야 할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소이부답’이란 말 뒤에 숨은 김종필은 책의 끝부분에 가서는 패션, 그림, 음악, 건축, 골프, 고사성어, 골동품과 서화(어떻게 소장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는 거의 밝히지 않았다) 등에 대한 취미를 이야기한다. 심지어는 미술계에서 당시에도 ‘얼굴이 화끈’ 거린다며 크게 반발했고10) 지금은 재앙으로 기억하는 ‘애국선열 조상(彫像) 건립’ 사업도 자랑거리로 등장한다.

『김종필 증언록』에는 황태성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남쪽에 온 직후 미국정보기관의 조사를 받았다는 등 새로운 사실도 적지 않게 들어 있다. 또 2인자로서의 철학이나 지혜도 잘 표현되어 있고,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람으로서의 경륜이나 자부심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김종필의 역할과 비교해볼 때 거의 함량미달이라 부를 만큼 아쉬움이 남는다. 90년대에 중앙일보가 취재하여 연재한 「청와대비서실」류의 정치비화보다 새롭지 않다. 또한 중앙일보가 조선로동당 고위 간부 박병엽(朴秉燁)의 구술을 받아 펴낸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92)의 경우, 그 내용의 중요성과 마치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이 제자리에 딱 맞춰지는 듯한 정확성 때문에 연구자들이 경악과 환호를 금치 않을 수 없었다. 단, 『김종필 증언록』은 현대사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JP에게 질문을 던지기에 좋은 출발점이 될 수는 있다. 이 질문에마저 그는 ‘소이부답’을 내세울 것인가?

 

 

생생한 증언 속에 남는 의문, 『숲은 고요하지 않다』

 

『김종필 증언록』은 많은 중요한 사건을 다루면서도 정작 중요한 비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다보니 현대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면 대충 아는 이야기들이 계속 나와 지루한 느낌을 준다. 반면 이종찬의 『숲은 고요하지 않다』는 우리가 적당히 아는 사건들의 다른 측면을 디테일을 살려가면서 보여주기 때문에 아주 흥미롭다. 그가 동아일보에 이 회고록을 연재하는 동안 나는 ‘그 회고록 참 재미있다’며 읽어보았느냐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이종찬은 어려서부터 일기를 써왔고 취미는 신문 스크랩이었다고 한다. 때로 수십년 전 일기나 업무일지를 인용하고 부인의 수기까지 등장하는 그의 회고록은 기록의 정확성과 신빙성에서 다른 회고록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종찬, 그리고 뒤에서 다룰 임재경의 회고록에 대한 평을 하기에 앞서 한가지 고백할 사실이 있다. 두 저자에 대해서는 김종필과 같이 거리를 두고 평할 만한 위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두 저자를 자주 뵙거나 깊은 이야기를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특히 이종찬 전 의원에 대해서는 집안 아저씨 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 내 할아버지는 이종찬의 조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선생을 모시고 독립운동을 했다. 우당이 며칠 사이에 따님과 손녀딸(이종찬의 누님)을 잃는 횡액을 당했을 때 어린 소녀들을 업고 병원으로 뛰어갔으며 장례 치르는 일을 맡아 한 분도 할아버지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또한 우당기념사업회의 초대 회장을 맡으셨고, 나도 이종찬 의원의 자제 이철우(李喆雨) 교수와 각별한 사이다. 이런 세교(世交)가 있는 처지에 냉정하게 그의 회고록을 평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으나, 책 내용이 중요하고도 흥미로워 이 글에 포함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잘 알려진바 이종찬은 남다른 집안 출신이다. 본인이 서문에서 밝힌 대로 그 집안의 삶은 “역사의 현장 그 자체”(16면)였고, 어려서부터 보고 들은 것이며 만난 사람들은 모두 하나 가득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그의 할아버지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이고, 작은할아버지는 초대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이다. 일본 패망 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충칭에서 상하이로 날아왔을 때 공항에서 찍은 기념사진 속 백범(白凡)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있는 까까머리 소년이 바로 이종찬이다. 어머니는 고종황제의 유일한 누님의 딸이니 몰락했지만 황실의 지친(至親)이기도 하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 대통령,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의 손자 김종인(金鍾仁)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와 함께 대한민국에서 조상복을 잘 타고난 대표적인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이명박(李明博)도 하고 박근혜도 하는 대통령에 제대로 후보조차 되지 못한 것은 어떤 까닭일까. 김우중(金宇中)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 어떤 책보다도 설득력있게 제시하지만, 온건 합리 보수에 경기고에 육사를 나와 문무 양쪽의 주류 엘리트를 대표하는 그가 정상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천쪽짜리 회고록을 읽고도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가 한번쯤 집권하는 것이 민주주의로의 이행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을 터인데라는 부질없는 아쉬움이 남기 때문인 것 같다.

중국 상하이에서 나서 자란 이종찬이 어린 시절 제일 듣기 싫어했던 말은 ‘왕궈누’, 즉 망국노(亡國奴)였다. 어린 그는 해방이 되면 금시발복할 줄 알았으나 상황은 여의치 못했다. 귀국할 때는 꽃다발 대신 DDT 세례를 받았고, 삼한갑족 명문가의 며느리이자 고종의 조카딸인 어머니가 옷 한벌 장만할 돈이 없어 중국에서 입던 중국옷 차림으로 학교에 왔기에 이종찬은 철없는 아이들로부터 ‘짱꼴라’라는 놀림을 받았다. 그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해방의 감격을 나누며 함께 상하이에 왔던 “아름드리 느티나무나 낙락장송” 같던 거목들이 귀국 오년 만에 다 갈라서 하나하나 “역사의 수레바퀴 틈바구니에서 힘없이 명멸해간” 사실이었다(17면). 백범이 피살되었을 때 그의 영전에서 김규식(金奎植)이 “형님은 복도 많으시오. 이렇게 돌아가시니 형님은 복이 많으신 거요”(169면)라고 울부짖던 말씀을 어린 이종찬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깨우쳐가는 과정이 이종찬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었다.

내가 이십대였던 1980년대에는 우당 같은 독립운동가의 자손이 어떻게 친일파로부터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의 한 축을 담당하는지 그 경로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파란만장한 고교시절을 보낸 자신이 왜 육사를 지원했고, 입학과정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생생하게 들려준다. 가난한 집안형편에 학비 걱정은 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로 육사를 지망한 그는 면접시험에서 “귀관의 집안도 소위 독립운동한 집안”이냐는 모욕적인 대접을 받았다. “일본군에 들어가 ‘천왕폐하 만세’를 외치던 자들이 득세해 장군이 되고, 낯선 땅에서 목숨 바쳐 싸우던 독립운동가는 오히려 멸시를 당하는 이런 모순” 앞에서, 일제에 당한 고문으로 청력을 잃고도 보청기조차 끼지 못한 아버지는 “돈이 없어 육사에 간다는 생각은 말고 선조들이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던 그 정신에 따라서 간다고 생각하면 안되겠느냐”라고 이종찬을 달랬다고 한다(1108~10면).

이종찬은 전두환 5공정권의 핵심인물이었고, 나는 민주화운동의 변방에서 왔다 갔다 한 처지이니, 아무리 세교가 있는 집안이라 해도 그와 나의 경험과 입장의 차이는 뚜렷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몇몇 대목을 읽다가는 내가 요즘 대중강연에서 열심히 강조하는 내용이 그대로 나와 있어 깜짝 놀라기도 했다. 조금 길지만 한 부분을 인용해보기로 하자.

나는 1949년 여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세가지 사건, 즉 ‘국회 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 강제 해체’, 그리고 ‘백범 암살’ 음모가 모두 새로 등장한 공안세력이 벌인 일이라고 확신한다. 여기에 이승만의 사전승인이 있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이승만 권력의 비호 아래 특수조직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를 세칭 ‘88구락부’라고 했다. 이는 신성모와 같이 이승만의 직계에 해당하는 새로운 아첨 세력과 송진우·장덕수의 암살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던 한민당 세력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중간층으로는 일제하의 경찰과 군 출신들이 있었다. 즉, 반민특위 강제 해산 이후 반격을 받지 않기 위해 독립운동 세력을 뿌리째 제거하려 기회를 노리던 김태선, 김운하, 노덕술, 전봉덕 등의 경찰 세력과 일제에 충성을 바치다가 이제는 신생 대한민국의 군부를 장악하려 했던 채병덕, 원용덕, 김창룡, 장은산 등의 군 세력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상층의 정치세력과 중간층의 군경세력이 모두 이승만을 정점으로 신권력층을 형성하고 있는 가운데, 그 하부선으로 김지웅, 홍종만 등이 외곽에 있고, 다시 그들의 하수인으로 안두희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음모의 개략적인 그림이었다.(1 66~67면)

이종찬은 동백림 간첩단 사건(1967)에 관해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시민들이 정신적으로 황폐해졌다”면서 “사전에 전혀 모르다가 임석진의 자수로 전모가 드러나는 바람에 체면을 구긴 김형욱의 광적인 분풀이 때문에 나라의 중요한 일꾼이 될 만한 분들이 일생을 망쳤던 것이다. 이는 개인의 손실일 뿐만 아니라 나라의 손실이기도 했다. 지금도 국정원이 이런 식의 우를 범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나만의 바람이 아닐 것이다”(1217면)라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나 역시 국정원과거사위에서 활동하면서 동백림 사건을 조사할 때 이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이종찬은 1965년 육군 대위로 진급한 직후 중앙정보부 중앙정보학교 공채 정규1기로 입교하면서 중앙정보부와 인연을 맺었고, 198010월 민정당 창당을 준비하기 위해 기획조정실장을 끝으로 중앙정보부를 떠났다. 16년간 중앙정보부에서 일한 ‘정보맨’이었던 그는 김계원(金桂元)에서 이후락으로 부장이 바뀌면서 1971년 대통령선거에 중앙정보부가 어떻게 개입했는지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그 스스로 인정했듯이 정보맨으로서의 자기검열을 하여 “이미 세상에 알려져 있는 것들 중에서 일부만 골라 그 내용과 결과, 그리고 그에 대한 약간의 소견을 기록하는 수준”(2555면)에서 정보기관에서 일한 시기의 일들을 회고록에 담았다는 점이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원칙이었다. 뒤에 김대중정부에서 안기부장이 되었을 때, 그는 안기부의 기밀정보를 동교동에 전달한 자의 고위직 등용을 한사코 반대했다. 동교동 입장에서는 공신일지 모르지만 정보기관의 입장에서는 배신자라는 이유에서였다.

1972년 유신선포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회고록보다도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유신선포의 디데이나 1971년 대선 날짜를, 역학에 밝은 중앙정보부 간부 김성락(金成洛)이 며칠간 출근도 않고 목욕재개를 한 끝에 일진을 봐서 골랐다는 진술은 매우 흥미롭다. 이종찬은 유신선포 하루 전 정부종합청사 회의장에서 극비리에 중앙정보부 전() 부서장 및 분실장 회의가 소집되었는데, 이 회의의 내용을 기록했던 자신의 비망록을 책 여섯쪽에 걸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1284~89면). 김종필은 이후락이 남북대화에 치중하느라 실제 유신작업에 별로 관여하지 못했고 유신을 주도한 것은 박정희였다고 주장하지만, 중앙정보부 내부에서 일의 전개과정을 지켜본 이종찬은 이후락이 남북대화를 통해 “7·4공동성명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냈”고 국민들이 감격한 사이 “평화통일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내부 체제를 정비한다는 명분 아래” 유신이라는 “작품을 만드는 데 이후락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라고 쓰고 있다. 또한 뒤에 자신이 국정원장이 된 뒤 살펴보니 “이후락의 후임 부장들 중 상당수가 이후락이 남긴 ‘선례’를 생각하며 남북대화를 이용해 ‘한몫’ 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라고 썼다(1292면). 이후락이 7·4공동성명 기자회견 준비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서술은 권력자가 언론을 어떻게 다루고 자신의 역할을 극대화하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10·26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이종찬도 김종필과 마찬가지로 우발적인 사건으로 보지만, 김재규 개인에 대한 평가는 김종필과 매우 다르다. 이종찬은 김재규가 욱하는 성격이 있긴 하지만 자신이 “직접 부장으로 모신 김재규는 기본적으로 선량한 사람”으로, ‘정의감도 있고 인정도 많았으며 효자에 독실한 불교신자’였다고 말한다(1308면).

늘 궁금했던 것은 하나회 출신도 아닌 이종찬이 어떻게 전두환(全斗煥)에게 발탁되어 민정당 창당의 주역으로 나서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종찬의 인생이 바뀐 계기는 역설적으로 김재규가 제공했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 해외 파트에서 근무하던 이종찬에게 베트남 통일 이후 현지에 억류된 주월한국대사관 이대용(李大鎔) 공사 등을 석방시키는 비밀임무를 맡겼다. 운명의 1026일, 이 문제가 급진전되어 이종찬이 급하게 작성한 보고서를 들고 김재규가 오전에 박정희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2·12사건이 터진 뒤, 이종찬은 실력자로 부상한 전두환을 근 이십년 만에 찾아가 이 문제의 해결을 요청했고, 결국 이대용 일행의 귀국을 성사시켰는데, 이것이 전두환이 이종찬을 신임하게 된 계기라는 것이다.

이종찬의 회고록에서, 아니 이종찬의 인생에서 가장 큰 아쉬움은 광주학살에 대한 어떤 태도 표명도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소외되었던 독립운동세력, 또는 독립운동을 계승한 세력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 광주의 피를 손에 묻힌 전두환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단 말인가. 우당이라면, 성재(이시영)라면, 백범이라면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고 권력을 잡은 자와 손잡을 수 있었을까. 나는 이종찬이 결국 김대중을 지지해 평화적 정권교체에 큰 기여를 하고, 또 비록 도루묵이 되긴 했어도 안기부의 개혁을 위해 성심으로 노력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그렇기에 5공의 핵심이었으나 독립운동가의 후손답게 민주진영으로 복귀한 그가 광주학살에 대한 태도 표명을 회고록에서도 하지 않은 것에 아쉬움이란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그 무엇이 묵직하게 남는다.

이종찬은 5공화국 실력자 시절, 남산 백범광장의 맞은편에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동상을 세웠다. 그로서는 작은할아버지 이시영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정에서 평생 형제처럼 지낸 백범과 다른 길을 선택한 게 못내 가슴 아팠던 것이다. 이종찬은 성재의 동상을 굳이 백범광장 맞은편에 모신 이유를 그렇게 해서라도 두분을 화해시키고 싶었던 것이라고 썼다(175면). 두분의 화해는 필요하고 또 가능한 일이다. 이종찬은 나아가 김구와 이승만의 화해를 꿈꾸고 있다. 이 화해는 과연 가능한 것일까.

 

 

비판적 언론인이 쓴, 소설보다 재미있는 회고록 『펜으로 길을 찾다』

 

임재경의 회고록 『펜으로 길을 찾다』는 분량이 앞의 두 회고록의 삼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밀도나 재미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해 역사학자의 장황한 설명보다 잘 만든 영화나 연극 속 한두마디 대사와 표정이 그 의미와 분위기를 더 잘 전달하는 때가 있듯이 이 책은 길게 설명하지 않고도 상황의 본질로 독자들을 바로 이끄는 매력을 지녔다. 한때 소설가를 지망했던 문학청년이었던 때문일까. 임재경의 회고록에는 인물과 상황이 살아숨쉰다.

이 책은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4·19 직후인 초년기자 시절까지를 다룬 1부와 60년대 이후부터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어 편집인 겸 논설주간 등으로 참여한 때까지를 다룬 2부로 구성되어 있다. 2부는 2008년 창간 20주년을 맞아 한겨레에 마련된 회고록 연재란 ‘길을 찾아서’의 첫번째 필자로 쓴 것이고, 1부는 2014년 『녹색평론』에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다. 임재경의 팔순을 겸해 출간된 이 책은 그의 두번째 단독저서이다. 평생 기자 한 길을 걸어온 원로 언론인으로서는 저서가 지나치게 적은 편이다. 백낙청(白樂晴) 교수가 임재경을 두고 “항상 공부하고 다양하게 활동한다. 그에 비해서 책 낸 것이 많지 않다. 이게 항상 불만이었다. 책을 쓰지 않고 읽기만 하는 것도 게으름이 아닐까”라고 말한 적이 있다.11) 좋은 저서를 많이 냈어야 하는데 술 좋아하고 바둑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성격 덕분에 저작이 많지 않다.12) 그의 첫번째 저서는 1983년 해직기자 시절에 펴낸 『상황과 비판정신』(창작과비평사)이다. ‘까칠한’ 글쟁이 고종석은 이 책을 “한국인 직업 저널리스트가 쓴 최량의 저서 가운데 하나”이며 “창비신서의 순금 부분에 속한다”라고 극찬했다.13)

기자 시절을 다룬 2부의 내용도 흥미롭지만, 내가 정말 재미있게 읽은 것은 처음에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1부였다. 저자는 일제 말기에서 해방 후 월남할 때까지 살았던 강원도 김화의 풍경을 손에 잡힐 듯이 그린다. ‘국어(일본어) 상용’을 강요받던 시절이지만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당연히 조선말을 썼다. 그러나 이름은 동무들끼리 부를 때도 토요까와(豊川)니 카네우미(金海)니였다. 일제의 창씨개명 효과는 아이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일정하게 발휘되고 있었다. 50년대 저자의 대학생 때도 시라까와(白川)가 있었고, 십여년 뒤 신문사에는 아라이(荒井)가 있었다.

그의 부모에 대한 서술도 대단히 입체적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버지가 얹혀살던 고모 집을 뛰쳐나와 평양으로 도망친 것은 열한살 때였다. 가출어린이였던 아버지는 양복점 심부름꾼에서 시작해 양복 제조 견습공, 제조공, 재단사, 양복점 주인으로 신분의 수직적 상승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양복점을 해서 번 돈으로 별 연고가 없는 강원도 김화에 토지를 장만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열네살 아래였다. 나이만 젊은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무학인 반면 어머니는 부유한 자작농의 딸로 일본 유학까지 한 신여성이자 민족유일당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한 진보적 여성이었다. 어머니 유언이 아버지와 합장하지 말라는 것이었다니 부부의 정이 각별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런 결합이 이루어졌을까. “고학력 미혼의 좌파 여성활동가들에겐 생활고보다 견디기 어려운 박해가 있었으니 그건 ‘성적(性的) 시달림’이었다. 일제 고등계 형사들은 미혼의 좌파성향 여성운동가들을 개별적으로 찾아다니며 ‘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감옥에 보내 일생을 망쳐버리겠다’는 투의 위협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 위협을 가하는 고등계 형사가 기혼 남자라면 ‘결혼’은 곧 첩 신세로 전락함을 뜻하는 것이다.”(91면) 그 많던 근우회 회원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하는 궁금증이 참 씁쓸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여성 빨치산들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임재경이 전하는 해방 직후의 풍경도 매우 흥미롭다. 그는 해방을 복장의 변화로 기억하고 있다. 자신은 더이상 각반(脚絆)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어머니는 몸뻬를 벗어던지고 흰 치마저고리로 갈아입었다. 어머니뿐 아니라 군청 쪽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의 모두 흰색 한복을 입고 있었”다(48면). 군청에서 당사에 올라 격정적으로 연설하고 있는 사람도 국민복이나 국방색 정장이 아닌 흰 셔츠 바람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김화군수였다. 어제까지도 황국신민과 내선일체와 옥쇄(玉碎)를 부르짖던 입으로 조국독립을 외친 것이다. 그러고는 그날 밤 공금을 챙겨 야반도주했다고 한다. 개학식을 해보니 천지개벽한 듯 세상이 바뀌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교장은 우리말로 훈화를 했고, 지긋지긋하던 황국신민서사도 사라져버렸다. 담임은 이제는 교실에서 일본말을 쓰면 벌을 받는다면서 ‘벌’을 일본식으로 ‘바찌’라고 거듭 말했다. 이런 역설적인 모습은 소설보다 더 재미있다.

이 책에서 또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임재경이 북쪽에 있는 쌍둥이 이복누이에게 “살아 있으면 보아라”라며 쓴 편지이다. 벼락부자인 아버지는 당시에 돈 있는 사람들이 대개 그랬듯이 혼외자를 낳았는데 당시 열살 전후의 임재경과 그의 형은 이 사실을 몹시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그 까닭이었을까, 절절한 편지의 마지막에 임재경은 “정말 한스럽게도 우리 3형제는 너희 쌍둥이와 아지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구나”(76면)라고 고백하며 용서를 빈다.

임재경의 문체는 덤덤하지만 그가 전하는 에피소드들은 매우 극적인 것이 많다. 어머니가 한강다리 끊긴 이후 최초로 서울로 들어온 이야기며, 세 모자가 시골로 식량 구하러 갔다가 폭격 맞아 죽을 뻔한 이야기는 아주 극적이고, 썩어빠진 군대에 대한 서술은 매우 생생하다. 1950년대의 대학가 풍경에 대한 서술도 흥미로운데 그중 이기양(李基陽)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다. 이기양은 동백림 사건의 발단이 된 인물로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있던 중 동구에서 실종된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국정원과거사위 당시에 동백림 사건을 조사하면서도 시간과 인원 부족 때문에 이기양에 대한 조사를 하지 못했는데 이 책이 그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주니 놀랍고 반가울 뿐이다. 임재경은 이 책에서 대학친구, 술친구 들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중 몇은 임재경과 동갑인 이종찬의 친구이기도 하다. 뒤에 임재경의 사돈이 되는 거리의 철학자 채현국(蔡鉉國)이 어려운 친구들에게 집을 사준 이야기 등은 매우 낭만적이다. 천하의 임재경이 조선일보 입사시험에서 사군자(四君子)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공자, 맹자, 석가모니, 예수 그리스도”라고 썼다는 대목은 놀랍고, 그런 답을 쓰고도 신문사에 합격했다는 사실은 더 놀랍다.

임재경은 자신의 초임 기자시절을 회상하며 기자론을 펼친다. “기자의 생명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의문을 가지고 접근하는 데 있다고 확신”하는 그는 세월호참사 이후 수많은 ‘기레기’(기+쓰레기)가 등장한 원인으로 “‘인습적’이고 판에 박은 기성의 판단기준을 묵수하는 순간 기자 직업윤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250면)을 꼽았다. 임재경은 5·16 직후 민족일보 폐간과 조용수(趙鏞壽) 사장 사형 등에 대해 기자들이 별 이야기를 안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당시 신문사 안 공기는 “언론자유가 군의 강압에 놓인 언론의 현실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촌놈’들이나 하는 유치한 짓”으로 보고 있었으며, 엘리트 의식에 절은 기자들은 “막걸릿잔을 앞에 놓고도 군사정권을 비난하면 의례히 ‘기자는 지사(志士)가 아니잖아’ 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고 한다(252면). 6·25 이후 언론계에는 ‘기자 비()지사론’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영리업체인 신문사가 주는 급여를 받는 기자들이 무슨 주권재민이고 민중의 미래에 대해 떠들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임재경에게 한겨레신문이 소중했던 이유는 이곳이 “완전히 폐기된 구식용어, 지사라는 말의 본디 쓰임새가 있는 곳”(416면)이기 때문이다.

기자로서 임재경이 크게 좌절한 것은 삼성의 한비(한국비료) 밀수사건(1966) 이후 삼성이 한국비료의 국가 헌납 약속을 백지화하려고 기자들을 모아 공장시찰을 시킨 데 대해 그가 삼성의 불순한 의도를 고발하는 기사를 작성해서 조선일보 본사에 송고했을 때였다. 그러나 그 기사는 통째로 빠지고 다른 신문에는 흔히 나지 않던 삼성의 전면광고가 실렸다. 이 기사의 존재를 삼성에 알려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조선일보 내부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언론계의 삼성장학생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펜으로 길을 찾다』의 장점은 그 비판의 화살을 자신에게도 돌리곤 한다는 점이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정치부장에 남재희(南載熙), 외신부장에 리영희(李泳禧)를 두고 해방 후 조선일보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이끌었던 김경환(金庚煥)과 나눈 대화다. 김경환이 일본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찬밥신세로 있던 유신 직후, 임재경에게 “정치부에서는 왜 선거제도의 국제비교나 역사적 변천에 관한 해설을 쓰지 않는가” 묻자 임재경의 입에서는 “거의 자동적으로 ‘뻔한 것 아닙니까. 중정에서 못 쓰게 하니까 그렇지요’”라는 답이 튀어나왔다. 임재경이 프랑스 연수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광주 대단지 소요에 대해 누구에겐가 묻자 ‘뻔한 것’이라는 말을 듣고 울화가 치밀었는데 자신이 똑같은 말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312면).

임재경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1980) 과정에서 김대중 과도내각 명단에 ‘경제 담당’으로 이름이 실렸다는 이유로 신문사에서 쫓겨났다. 그가 해직언론인으로 우울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미국에 살고 있는 다른 두 아들을 시켜 임재경의 하버드대 유학을 추진했다. 이때 미국 망명 중인 김대중도 하버드대학에 연수를 와 ‘과도정부 수반과 각료’가 십일년 만에 처음 만났다고 한다. 미국에서 돌아온 임재경은 창작과비평사에서 편집고문이라는 직함으로 한겨레신문이 창간될 때까지 삼년 반 동안 월급 받고 생활했다.

임재경은 한겨레의 집안싸움에 대해서는 자신이 말하기에 매우 거북한 위치라며 피해갔지만, 여성차별을 없애기 위한 노력과 어느 신문보다 앞서 컴퓨터 조판 시스템을 도입했던 일을 특별히 강조했다.

지면 제약 때문에 이 글도 뒷부분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못하고 있지만, 임재경의 회고록이 꼭 그런 느낌이다.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임재경은 리영희, 송건호(宋建鎬)와 더불어 진보언론 진영에서 뚜렷한 역할을 했고,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던 분이다. 그가 살아온 시대, 그가 겪은 일들, 그가 만난 사람들에 대해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회고록은 서둘러 끝나버린다. 김종필처럼 중요한 대목에서 딴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그가 하는 이야기는 바로 우리가 듣고 싶은 이야기이다. 그가 1972년 유신이라는 “민주공화국에 까무러칠 일”을 표현한 대목은 탁월하다.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발표가 나왔는데 “‘방성대곡(放聲大哭)’은 기대할 수 없더라도 입 험한 기자들인데 ‘개새끼들!’ 하는 소리 하나 듣지 못할 정도로 편집국은 교교했다”(304면)는 것보다 당시의 분위기를 잘 전달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여기서 멈춰야 하는가? 우리는 언론인들의 유정회(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추천으로 구성된 원내교섭단체 유신정우회의 약칭) 의원 발탁이며, 4·19세대가 권력에 편입되는 과정이며, 유신을 거치며 언론이 체계적으로 망가지는 과정 등 그후 벌어진 구체적인 일들의 내막을 임재경의 입을 통해 듣고 싶은데, 그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술 마시러, 바둑 두러 간 느낌이다.

 

 

역사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기록으로

 

김종필은 90에, 임재경과 이종찬은 80에 회고록을 내놓았다. 세편 다 만만치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김종필은 분명 한 시대를 연 사람이다. 좋게 얘기해서 불운한 2인자, 솔직하게 얘기하면 찌그러져버렸지만, 그는 분명 5·16을 설계한 사람이었다. 박정희에 가려졌지만, 김종필이 없었으면 박정희도 없었다. 한 시대를 열고, 그만큼 오래 정치의 중심에서 현대사를 만들어온 사람은 없다. 그런데 회고록에는, 나름 흥미로운 대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소이부답’에서 부답만 두드러지고, 한가로운 웃음 대신 멋쩍은 웃음만 남은 느낌이다.

이종찬은 김종필처럼 ‘풍운아’라 불릴 만한 생을 산 것은 아니지만, 한때나마 권력의 중심에 섰던 이들 중에서 그만큼 뚜렷한 역사관과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는 충실하게 자신이 겪은 일들을 썼으나, 그에게는 치러야 할 지명 방어전이 남아 있다. 그의 이야기도 소중하지만, 그에게는 회고록을 남기지 않고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작은아버지와 고모들이 있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이제는 이종찬만이 세상에 전할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과도내각’의 경제담당으로 이름이 올랐다지만, 임재경은 평생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했지 권력을 누린 사람은 아니다.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그는 자신이 살아온 시대와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했다. 그런데 하다 만 느낌이다. 처음 한겨레신문에 회고록을 연재할 때 80회 하기로 한 것을 45회로 반토막낸 것은 분명 직무유기다. 나도 그렇지만 게으른 필자들의 경우, 글은 필자 자신이 아니라 ‘마감’이 쓰게 되는 일이 다반사다. 80에 문학청년으로 나선 임재경에게는 내친김에 더 많은 마감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이종찬과 임재경은 90에 또다른 회고록을 낼 책임이 있다.

본디 회고록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듣고 싶은 내용보다는 당사자가 말하고 싶은 바를 쓰는 것일 수는 있지만, 이제는 회고록을 내는 사람들이 관련자들의 반대신문에 책임지고 응했으면 한다. 회고록은 당시의 상황이나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만 그 자체, 사료로 쓰기에는 위험한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자료와의 비교검증, 당사자나 반대입장에 선 인물에 대한 확인이 반드시 요청된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회고록을 남길 경우 기초가 된 구술테이프 등 육성자료를 같이 남기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아야 한다. 무게있는 회고록의 출현은 역사연구자들에게는 다루기 힘든 재료가 쌓이는 일이지만, 역사와 인간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좀더 솔직하고 성찰적인 회고록이 여기저기에서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또 그래야 한다. 민간인 학살이며 고문조작이며, 한국현대사에는 처음부터 문헌사료가 만들어진 적이 없어 당사자들이 입을 열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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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종필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전2권), 와이즈베리 2016; 이종찬 『숲은 고요하지 않다: 이종찬 회고록』(전2권), 한울 2015; 임재경 『펜으로 길을 찾다: 임재경 회고록』, 창비 2015.

2)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도 재미언론인 문명자에게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문명자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월간말 1999, 58면.

3) 그레고리 헨더슨 문서 편집본 「발굴—현대사 뒷모습 1: 박정희의 좌익 전력」 「발굴—현대사 뒷모습 2: 김종필의 좌익 활동」, 박태균 「발굴—현대사 뒷모습 3: 이 문서는 어떻게 작성됐나」, 『프레시안』 2001.11.15~19(http://www.pressian.com/news/review_list_all.html?rvw_no=1012).

4) 이동복과의 인터뷰, 2014.7.14, 서울 종로구 견지동 평화박물관.

5) 김종필의 장모 조귀분도 남편인 박상희(박정희의 셋째형)가 1946년 10월항쟁 과정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관계로 경북지역 민간인 학살 유족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6) 「이원식에 사형 확정」, 『경향신문』 1961.11.14; 한국혁명재판사 편찬위원회 『혁명재판사』 4집(1962) 189~368면의 각 지역 피학살자 유족회 사건 참조.

7) 「이후락 증언에 할 말 있다」 중 육인수 증언, 『신동아』 1987년 11월호, 335면.

8) 「“아버지 유지 받든다면서 DJT 공조 할 수 있습니까”, 박근혜 의원 ‘발끈’」, 『경향신문』 1998.8.6.

9) 「김문수, 오늘 경선 참여 선언」, 『조선일보』 2012.7.12.

10) 「태평로의 선열·위인, (석고상을) 동상으로 바꾸기로」, 『경향신문』 1965.1.30.

11) 구영식 「“목이 타는 세상, 잔치로 끝나는 게 아니다”—임재경 전 한겨레 부사장, 회고록 『펜으로 길을 찾다』 출판기념회」, 『오마이뉴스』 2015.11.3.

12) 남재희 「문학청년 기질의 언론 투사, 임재경」, 『진보열전—남재희의 진보인사 교유록 오십년』, 메디치 2016, 242면.

13) 고종석 「임재경, 마지막 지식인 기자」, 『말들의 풍경』, 개마고원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