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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24인 신작시선
문정희 文貞姬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나는 문이다』 『카르마의 바다』 『응』 등이 있음. poetmoon@gmail.com
거위
나는 더이상 기대할 게 없는 배우인 것 같다
분장만 능하고 연기는 그대로인 채
수렁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오늘 텔레비전에 나온 나를 보고
왝 왝 거위처럼 울 뻔했다
내 몸 곳곳에 억압처럼 꿰맨 자국
뱀 같은 욕망과 흉터가
무의식의 주름 사이로
싸구려 화장품처럼 떠밀리고 있었다
구멍 난 신발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차갑고 더러운 물을 숨기며
시멘트 숲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나는 나에게 다 들켜버렸다
빈틈과 굴절 사이
순간순간 태어나는 고요하고 돌연한 보석은
사라진 지 오래
기교만 무성한 깃털로
상처만 과장하고 있었다
오직 황금알을 낳기 위해
녹슨 철사처럼 가는 다리로 뒤뚱거리는
나는 과식한 거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