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작가조명

 

마음을 공구로 조이는 사람

 

 

박소란 朴笑蘭

시인.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이 있음. noisepark510@hanmail.net

 

 

 
 

작가조명_사진쪼그려앉은 한사람의 뒷모습. 노상에 앉아 읽다 만 책은 잠시 옆에다 놓아두고 어딘가를 가만히 응시하는 이의 희고 둥근 등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송경동의 시집 표지사진 말이다. “살면서 나 역시 숱하게 쪼그려앉아 보았지요”라고 말하는 시인을 꼭 닮은 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시인은 이미 오래전 「쪼그라앉은 사람들」이라는 시를 쓴 일도 있다. “집밖에 나와 악다구니로 생선을 팔고 있는 쪼그라앉은 사람들/집밖에 나와 이쑤시개며 좀약이며를 펼쳐두고 쪼그라앉은 사람들/집밖에 나와 지하도녘이나 공원 양지녘에 쪼그라앉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 시다. 시인도 지금 저들처럼 안간힘으로 쪼그려앉아, 아니 쪼그라앉아 있는 것일까. 바쁜 걸음을 멈추고 앉아 시인은 무슨 생각에 잠긴 것일까.

 

먼저, 한편의 시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아직 ‘꿀잠’을 자던 시절 시인이 쓴 시다.

 

꼬막 껍질 하나에 옴싹 들어갈

짜디짠 말 한마디 갖고 싶다

「시」 전문

 

짧아서 더 간곡하게 읽히는 이 시는 2006년 펴낸 첫 시집 『꿀잠』(삶이보이는창) 후반부에, 그러니까 「용접꽃」 「쇠밥」 「철야」 「나우정밀노조 해산총회」 같은 견고한 시들 한참 뒤편에 쑥스러운 듯, 마치 머리를 긁적이는 듯한 자세로 조용히 실려 있다. 시인의 치열한 시세계를 놓고 보았을 때 어쩌면 잠시 한발 물러서 있는 듯 보이는 이 시에 오래 시선이 머문 것은 시가 저 자신도 모르게 드리운 여러 서정적 풍경들 때문이다. 문예반 제일 끝자리에 짐짓 비스듬히 기대앉은 반항기 가득한 소년의 열없는 얼굴이며, 실은 어떤 잘못을 저지를 때보다 더 두근거렸을 그 소년의 마음이며, 을지로 일대를 기웃거리며 일자리를 찾고 또 밤이면 잡부숙소나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8만원짜리 지하방에 엎드려 뭔가를 끼적이는 스무살 일용공 청년의 해진 수첩이며, 가까스로 노동자문학회라는 것을 꾸려 하루하루 시의 근육을 기르는 문예운동가의 야무진 손끝이며, 밤늦도록 꺼지지 않았을 그 책상의 불빛이며…… 시인이 지낸 일련의 시절이 이 짧은 시 속에 모두 든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 시절 시인은 참 힘겹게 시를 붙들었을 것이라는 짐작.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실천문학사 2011)에서 그는 “문학은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 구원의 장”이라 고백하기도 했는데.

가정환경도 안 좋고 하다보니 늘 비뚤어진 아이로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칭찬이란 걸 받아봤어요. 살면서 거의 처음 들어본 칭찬이다, 하는 기분. 국어선생님께서 숙제를 보고 ‘너는 참 시를 잘 쓰는구나’ 하셨죠. 시가 뭔지도 모르고 ‘아, 나도 하나쯤 잘하는 게 있는가보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시를 좋아하게 됐고요. 그러고는 소년원도 다녀오고 엉망으로 살았잖아요. 그러면서 딱 한가지가 기억나더라고요. ‘아, 나도 잘할 수 있는 게 하나는 있다고 했어.’ 그뒤로 시를 써보니까 좋더라고요. 누구랑도 이야기하지 못한 것을 저 자신과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써볼 수 있는 것이더라고요, 시라는 게. 그런 게 저에게 많이 힘이 됐고. 특히나 삶이 힘들면 더더욱 이런저런 말을 하고 싶잖아요. 소통하고 싶고, 존중받아보고 싶고……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물어보고 싶고. 그럴 때 시라는, 문학이라는 형식이 실제로 제게 굉장한 위안이 됐던 것 같아요.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꿀잠』을 지난 사십대 중반의 시인을 만난 것은 전혀 사소하지 않은 일들의 기록인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창비 2009)에서였다. 그곳에서 시인은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연거푸 제 가슴을 치고 있었다. 때로는 대추리에서, 용산에서, 때로는 영장이 기각된 뒤 재조사를 받으러 간 경찰서에서. “일년치 통화기록 정도로/내 머리를 재단해보겠다고/몇년치 이메일 기록 정도로/나를 평가해보겠다고 (…) 내 과거를 캐려면/최소한 저 사막 모래산맥에 새겨진 호모싸피엔스의/유전자 정보 정도는 검색해와야지 (…) 저 새들의 울음/저 서늘한 바람결 정도는 압수해놓고 이야기해야지 (…) 이게 뭐냐고” 시인은 분투하고 있었다. 신산한 삶의 터널을 지난 소년은 그렇게 투사가 된 것일까. “어딘가 손 하나가 필요한 곳에/내 손 하나가 있었다면/그것으로 그만, 무엇을 기억할 일도/남길 일도 없다. 아침만이 있을 거라고/나는 이제 믿지 않는다”(「겨울, 안양유원지의 오후」)는 시인은 그러나 지쳐 보였다. 온 미간을 찌푸린 얼굴은 조금 야윈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열사 영전에’라는 부제가 붙은 여러편의 추모시가 시집 한켠을 채우고 있었다. 그 시절의 시인을 만난 이라면 누구든 그를 밥집이나 술집으로 들여 잠시 쉬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시인은 쓰는 자로서의 무구한, 그리고 강건(剛健)한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으니. “내가 아직 질러보지 못한 절규의 시가 있다/그 길바닥의 시들이 사랑이다”(「가두의 시」)라는 노래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7년 만이다. 시인은 여전히 분투하고 또 분노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한층 단단해진 모습이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창비 2016)에서 내비친 삶의 결은 이전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태도는 당당하다. ‘물질’ ‘운동’ ‘몸’ 같은 시어는 도처에서 그 생동하는 얼굴을 내밀고 “부디 내가 더 많은 소환장과/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의 주인이 되기를/어떤 위대한 시보다/더 넓고 큰 죄 짓기를 마다하지 않기를”(「시인과 죄수」) 바란다고 그는 말한다.

시란 결국 사는 만큼 쓸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제 몸이 있는 곳에서 보게 되고 느끼게 되고, 그렇게 쓰는 게 시잖아요. 그동안 저는 어쩌다보니 절박한 삶의 현장에 계속 함께 있어야 했잖아요. 늘 그런 현장이었잖아요. 하다보니 아무래도 시들이 그런 삶의 이야기들을 많이 담게 된 것 같아요. 흔히 이야기하는 일반적인 서정시보다는 투쟁과 저항을 담은 시들이 많지요. 그런 제 시들이 부끄럽다거나 잘못됐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다만, 전선의 이야기들을 넘어 보편적인 삶의 이야기들을 좀더 쓸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긴 하죠.

 

지난 7년은 시인이 보다 적극적으로 삶의 현장에 밀착한 시간이었다. 2009년 용산참사 진상규명 투쟁 이후 동희오토 비정규직 투쟁, GM대우 비정규직 투쟁,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등에 잇따라 결합했다. 2011년에는 고공농성을 하다 다친 다리에 목발을 짚고서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이끌었고 그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보석으로 풀려난 2012년에는 쌍용차 정리해고 희생자들을 위한 대한문 분향소를 제안, ‘사회적 상주’를 자처하기도 했다. 노조탄압으로 악명 높은 유성기업 노동자들과도 함께 싸웠고, 세월호참사가 있었던 2014년부터는 ‘세월호 만민공동회’라는 네트워크를 꾸려 투쟁에 나섰다. 세월호 투쟁으로 일곱차례나 소환됐고, 소환과정에서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정부의 노동법 개악에 맞서는 ‘을들의 투표’를 진행하기도 했다. 때문에 “시 쓰는 일에는 게을렀다”라고 시인은 엄살 아닌 엄살을 부리지만, 그보다는 “시란 결국 사는 만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말을 되뇌어보게 된다. 이 오래된 말은 그의 입을 통해 참으로 오랜만에 생명력을 얻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아래와 같은 시에 이르렀다.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만나러 가리봉시장 공구점에 간 시인이 좌판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이 담긴 시다.

 

낱낱이 다르다고 느꼈던 우리가

사실은 한 리어카 거리밖에 안되는

저 착한 공구들 한묶음은 아니었을까

(…)

 

한참을 보고 있으니

좌판 사내가 어떤 게 필요하냐고 묻는다

예전엔 과학과 철학과 신념과 조직노선과 이론 등

필요한 게 참 많았던 것 같은데

이 서늘한 마음은

어떤 공구로 조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가리봉 공구점」 부분

 

그동안 시인의 시는 종종 ‘운동가’나 ‘투사’라는 무거운 그림자를 둘러멘 채 우리에게 닿곤 했다. 그의 시가 드러낸 사회적 모순과 변혁성에 우리는 더 많은 무게를 두었으며, 그 이상을 사유하는 데 조금 게을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령 이런 표현, “이 서늘한 마음은/어떤 공구로 조여야 하는지/잘 모르겠다”라는 문장 앞에서는 모든 것을 차치한 채 다만 선득해지고 마는 것이다. 마음을 다른 무엇도 아닌 공구로 조이려 하다니. 공구가 이토록 빼어난 수사로 눈뜰 수 있다니. 더욱이 이 문장이 손끝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삶의 현장으로부터 자연히 우러난 것이라면! 마음을 여러 매혹적인 관념으로 다스리고자 하는 시인은 많다. 그렇지만 그것을 공구로, 이처럼 옹골진 물질로 조여보고자 분투하는 믿음직한 선배 시인을 지금의 우리 시단에서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재밌는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시인은 언젠가 한 문예지에 “삶이 왠지 쓸쓸하거나, 기운이 빠질 때면 누구처럼 미술관 투어나 박물관 투어는 못하지만 공구점 골목 투어를 하곤 한다”*라고 쓴 일이 있다. 공구들에게 삶의 행로를 묻기도 한다고.

 

송경동 시인(왼쪽)과 이야기 나누고 있는 박소란 시인.

 

인간이 자기 몸으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니까. 수많은 연장과 도구를 활용해 그 삶을 일구어나가는 것이니까. 농부에게 괭이나 낫, 삽이 삶의 도구라면 저에게는 그라인더니 뭐니 하는 공구들이 그런 것이잖아요. 어려서부터 현장에서 노동자로 살면서 거의 제 몸의 일부처럼 달라붙어 있었던 공구들. 어찌 됐든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던 때, 좋은 꿈을 꾸어보려 했던 그때 그 시기가 공구들과 함께 다가오는 것 같아요. 지금도 기운이 없거나 하면 다른 어디보다 기계공구상가에 가요. 녹슬어 있는 그곳 공구들이 꼭 나를 보는 것 같지요. 나와 더불어 일했던, 늙어가고 낡아갔던 사람들, 기름때 묻은 사람들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약간은 서글프기도 하지만 마음의 위안이 돼요. 그때를 떠올리면서, 또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런 삶들을 잊지 말자는 다짐 같은 게 생기기도 하고요. 그런 다짐이 생기면 또 기운이 나잖아요. 그렇잖아요.

 

몸의 시학. 그의 시를 두고 많은 이들이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김수영)이라는 저 유명한 시론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첫 시집의 추천사를 쓰고 또 이번 세번째 시집에 재차 추천사를 쓴 정희성 시인도 이같은 명제를 거론하며 “육성이 잦아든 우리들의 시대에 송경동의 절규를 들을 수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이보다 앞서 첫 시집 발문을 쓴 김해자 시인은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 “송경동 시인은 ‘진정한 시인이란 시를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가 아니라면 깨끗이 시를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는 몸의 시학을 믿는 이다”라고. 이때 시를 버릴 수도 있다는 말은 도리어, 결코 시를 버리지 않겠다, 하는 고집과 기개로 읽히는 게 사실이지만.

어…… 버려야 한다면 버려야죠. (‘버려야’를 발음하기까지 그는 “어……”에 꽤 ‘긴 순간’을 할애했다.) 말이 부족해서, 시인이나 작가가 부족해서 세상이 이런 것은 아니잖아요. 중간에 잠깐 시 쓰는 일을 쉬어보기도 했는데, 아무 문제 없더라고요. 20대부터 제가 모토로 삼았던 말은 ‘시인, 소설가가 되는 건 급하지 않다. 먼저 철저한 민주주의자가 되어야 한다’였어요. 전위시인 유진오 선생이 하신 말씀이죠. 당신 시집에 자서 형식으로 쓰셨던 대목인데, 그걸 20대 초반부터 가지고 살았어요. 그러니까 문학도 마흔쯤 되어서, 인생을 민주주의자로 좀 살아보고 나서 그때 하자, 그랬던 거죠. 지금도 뭐 그런 생각이에요.

 

당시 김해자 시인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 “그동안 노동자문학은 미학적 상상력을 높이려는 노력에 게을렀다. 노동자들의 생활체험이야말로 상상적 수식을 가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진실된 감동을 전해준다는 발상 때문에 미학과 방법론에 불철저했다.” 그러고는 시인에게 “미적 현대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노력과 고투”를 당부하기도 했다. 이같은 당부는 그간 여러 방향 여러 각도에서,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시인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때로는 주문으로 때로는 비판으로 가닿았을 것이다. 그만큼 익숙한, 어쩌면 진부한 담론임에 분명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그 앞에 꺼내놓고 만다. 그런 한편, 나는 시인이 쓴 몇편의 시를 속으로 되짚고 있었다. 그는 “이런 민주주의가 판치는 세상을/어떻게 그럴듯하게 문학적으로 미학적으로 그려줄까 (…) 그러면 나의 시도 평론가들로부터 상찬받을 수 있을까 (…) 그 애매함으로, 그 모호함으로, 그 규정되지 않음으로/그 깊은 서정성으로, 그 새로운 해석과 역사성으로/어떤 문학사의 말석에나마 기록될 수 있을까”(「비시적인 삶들을 위한 편파적인 노래」)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내게서 더이상/묶인 나무를 빗댄 은유를 바라지 마라/그 자리에서 눈물로 뚝뚝 떨어져버리는/참혹한 꽃의 비유를 바라지 마라”(「오래 산 나무에 대한 은유를 베어버리라」, 이상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라는 선언도 서슴지 않았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에서 역시 “번지르르한 말을 경계하고/세상엔 말하지 못한 슬픔들이/아직 말할 수 없는 아픔들이/오지 않은 말들이 더 많다는 걸 배웠다”(「말더듬이」)며 스스로 기꺼이 ‘말더듬이’가 되어 살기를 택한 시인은 “늙은 노동자들을 보며/아무래도 우리에겐/다른 사랑 노래들이 있을 거라고/아직도 나는 거리를 헤”매고(「그 노래들이 잊히지 않는다」) 있음을 고백한다. 이는 현실의 실물감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동시에 자신만의 진정한 언어미학을 구축하고자 하는 맹렬한 몸부림에 다름 아닐 것이다.

시가 좀더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의 형상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과제는 언제나 있는 것이죠. 근데 역으로 그런 잣대를 늘 노동문학이나 현장문학에만 들이대려고 하는 것, 노동문학은 어딘지 모르게 미적으로 떨어진다거나 부족하다거나 딱딱하다거나 하는 식의 혐의를 붙이는 것은 사실 이데올로기적인 공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에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경계를 해야겠죠.

한국사회에서 민중·민족문학이 태동한 것은 70년대의 일이지만, 노동자적인 정체성, 노동자라는 말 자체가 사회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876월항쟁 이후예요.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많은 사람들이 노동문학에 대한 고민을 했지요. 좋은 작품도 많았지만 여러 부족함도 있었겠죠. 당시 노동문학은 노동자가 스스로 노동자성이라는 것을 각인하고, 활동과정에서 자본가와 적대적 관계에 서보고 하는 것을 반영하기에도 바빴던 게 사실이에요. 시대적 필요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나중에는 교조화되어 판에 박힌 전형성으로 흐른 면도 없지 않죠. 좀더 아름다울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너무 자기검열 같은 게 많았던 것 같아요. 우리네 모순 많은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신 전형들만 앞세우고. 일례로, 사랑시 한편이 없다니까요. 인간이 살면서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요소예요. 그런데도 제대로 된 사랑시 한편이 없다는 것…… 이렇게 노동자들의 특정 부분에만 집중한 측면이 없지 않았어요. 그런 면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우선은 노동자주의에서 좀 벗어나야죠. 노동자성을 강조하는 것이 실은 조합주의적 인간을 양산할 결과를 가져올 우려가 있어서. 노동자주의, 조합주의를 넘어서면 세계적 시야의 확보가 가능해질 거라 생각해요.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문학’ 앞에 붙은 ‘노동’이란 말이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글을 쓰는 자에게 더이상 명예도 자랑도 되지 못한다. ‘노동문학’이라는 말 자체가 문단은 물론 사회 전역에서 사어(死語)처럼 여겨지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 네 글자를 꺼내드는 일이 시인의 세계를 또다시 협소한 틀 안에 가두는 것은 아닐까 우려스러운 마음 또한 없지 않다. 그러나 ‘노동문학’ ‘노동시’를 사어가 되도록 내버려두는 일은, 아니 어쩌면 서둘러 사어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과연 합당한가. 무엇보다 나는 여전히 이를 통해 시인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 많았다. 이런 식의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노동문학을 다만 옷장 깊숙한 곳 유행 지난 옷가지로 치부하는가 하면, 또다른 한편에서는 과거 80년대 노동문학을 젖줄로 오늘날의 현장문학을 지탱, 재건하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노동자의 변화에 맞는 새로운 노동문학, 노동시가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요구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도 시인은 할 말이 꽤 많을 것 같았다.

어떤 게 달라진 것인지, 사실 저는 잘 모르겠고요. 80년대와 지금의 현실을 비교했을 때 과연 어떤 게 변했을까. 오히려 더 안 좋아진 게 많죠. 그때는 잠깐 한국사회의 경제도 좋아지고, 노동자들의 투쟁도 활발했죠. 90년대 초반까지요. 결집력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상황이 나았던 부분이 있어요. 민중운동의 폭발적 등장으로 지배계급도 일정부분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고요. 그런데 IMF 이후 급속도로 수탈이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비정규직 천만명 시대가 돼버렸어요. 비정규직이라는 말 자체가 개개인에게는 얼마나 절망적인 것인지. 자신이 비정규직의 삶을 산다는 것. 청년이든 중년이든 노년이든. 도대체 노동자들의 무엇이 달라져서 지금 노동문학이 그때와 다른 무엇을 고민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지…… 무슨 고민을 해야 할까요. 글쎄, 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요. 자꾸 새로운 상품을 기대하듯이 뭔가를 요구하기보다 사회구조적 문제, 그 모순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과 고투 이런 것들이 필요한 때인 것 같아요. 오히려 그렇게 변하지 않는 현실이 있는데도 어느 순간 역사에 대한 패배의식을 가지고 변혁에 대한 꿈을 접어버린, 순간적인 상황 호전에 눈이 팔려 근본적인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포기해버린 의식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실의 용납되지 않는 모순 앞에서 극복을 위한 어떤 일을 함께 해나가려는 정신이나 마음 같은 것들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시인은 강조했다. 이제 우리는 사회변혁에 대한 꿈을 잃고 개량화되어버린 현실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자본의 고도화된 전략에 의해 노노분열이 조장되면서 노동자들이 점차 본연의 집단성과 연대성을 상실해가는 현실. 그러므로 그 집단성과 연대성을 어떻게 복원해낼 것인가, 하는 것이 최근 시인의 화두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에는 이처럼 달라진 양상에 대한 고민과 응전의 의지가 담겨 있다. 외부 자본과 권력에 대한 것을 넘어 내부에 대한 비판과 성찰의 흔적이 역력하다. 이는 이번 시집에서 그가 이룬 성취이기도 하다.

 

오늘도 열심히 방망이를 두드리는 법 앞에서

속수무책 망연자실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정규직 자녀 우선채용에 합의하는

‘대공장 민주노조’를 위해

비정규직 확산과 우선해고에 눈감는

‘대공장 민주노조’를 위해

이젠 해외여행깨나 다니는

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 고용안정을 위해

한국 사회 중산층의 다수를 이루는

‘민주노총 정규직 조합원’들을 위해 힘써 살아온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5·18 광주 학살에 분개해 해마다 망월동을 찾는

해마다 전태일 열사 기일에 맞춰 전국노동자대회를 찾는

용산 철거민 학살을 오늘도 잊을 수 없는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1985년 구로동맹파업 기념사업일을 맡아 하고

가끔 구로공단 산업화 관련 인터뷰에 응하기도 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다시 이주노동자 밀집지역이 된 이곳에서

싼 전세 탓에 오도 가도 못하고 사는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부분

 

이번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는 스스로에 대한 반문 형식을 취함으로써, 매우 집요한 자세로, 자신은 물론 자신이 속한 곳 내부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꿰찌른다. 우리는 과연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얼마만큼 큰 꿈을 꾸고 있는가, 이쯤에서 한번쯤 되물어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선명하다. “노동문학이라고 해서 노동자의 형상을 무조건 옹호할 수만은 없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는 계량화·관료화로 오손된 면면을 좀더 적나라하게 꼬집기도 한다. “명민한 그는 터무니없이/꿈을 꾸는 사람들을 경계한다/선동적 발언을 경멸하고/매섭게 실사구시의 메스를 대는 현실주의자”(「관료」)라고 이르고 “모든 게 다 이해되고/모든 게 다 해석되는 당신에게/그 무엇도 모르겠는 이 답답함을/더는 상의하고 싶지 않”(「교조」)다고 일침을 가한다. 물론 이같은 서슬은 결국 스스로를 누구보다 먼저 “온몸 바쳐”(「학문이 열리던 날」) 가다듬어 “더 허기지고 간절하게”(「변혁을 위한 비빔밥」) 만들 것이다.

자신에 대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진영에 대한 날선 비판과 성찰을 바탕에 둔 까닭일까. 시인이 견지하는 낙관에는 특유의 믿음성이 있다. 쉽게 보아넘길 수 없는 위의(威儀)가 있다. 참혹을 말하면서도 이 세상은 참 아름다운 곳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제국주의가/포탄으로 이룬 세계화를/우린 사랑과 연민이라는/아주 오래된 재래식 무기로 이룰 것”(「나비효과」)이라고, “관념보다 귀한 게 물질”이라고, ‘노동이 사람을 사람답게’(「찌 예찬」) 한다고 기어코 쓸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는 스스로를 다독이는 주문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이를 귀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이유. 알다시피, 요즘의 시들은 좀처럼 낙관하지 않으니까. 하나같이 우수에 잠겨 있으니까.

제가 공부는 많이 하지 않았지만, 그나마 가지게 된 역사의식이 이런 것인 것 같아요. 과거 더 참혹한 시기, 더 비민주적인 사회도 있었죠. 그렇지만 인류는 조금씩 더 민주적인 상태, 더 평등하고 평화로운 상태를 지향하며 나아온 것 같아요. 이런 긴 인류의 역사가 어느 한 시기에 그만 멈춰질까? 저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생명의 본질 같은 것이 있다고 봐요. 때로는 사회적 계기를 거치면서 악독해진 사람들도 주변에 많지만 기본적으로는 좀더 평화롭고 평등하고 서로 유대하고 사랑하고 그런 것들을 지향하는 속성이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생명, 인류가 지금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이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든 조금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도록, 서로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작용하지 않을까요.

오늘날의 현실구조 안에서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어려우니까 자꾸 비관적이 되는 것이잖아요. 냉소적으로 변해가는 것이잖아요. 그렇지만 실상은 차츰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진실은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오히려 다보스포럼 같은, 세계적인 재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도 이대로의 자본주의는 문제 있다, 붕괴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세상이 되었잖아요. 자본가들 스스로 자본주의의 불합리를 인식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머지않은 어느 땐가 극복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요. 이 수많은 인류가 노력해서 만든 사회적 가치를 일퍼센트도 안되는 사람들이 독점하는 체제. 초등학교 산수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현실들. 계속 갈 수 있을까? 저는 못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나 자신이 인간이라면 당연히 이런 구조는 더이상 존속되어서도 안되고, 존속될 수도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들이 아무래도 저에게 낙관을 갖게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생명’과 ‘인류’,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그는 여전히 시에 어떤 힘이 있다고 믿는 것도 같았다.

네,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큰 힘이냐 작은 힘이냐 그런 것을 가릴 게 아니라, 인간의 어떤 생산활동이든 모두 조금씩의 이로움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농사꾼이 기르는 곡식 하나가 누군가에게 힘이 될 것인가 묻는다면, 당연히 힘이 되겠죠. 시인은 농부처럼 곡식과 작물 같은 생활수단을 생산치는 않지만 시라는 정신적 양식을 생산하는 사람이잖아요.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이 뭔가를 생산해내죠.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이 사회를 위해서. 그 모든 것들이 인류를 먹이는 힘이 되죠. 그렇듯이 저의 시도…… 좀더 영양가 있는, 많은 사람들을 풍요롭게 해주는 생산물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어찌 됐든 사회에 힘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까마득한 후배인 나는 순간 조금 안심이 되었던 것 같다. 시라는 것을 계속 써도 좋다, 하고 누군가 어깨를 토닥여주는 기분이었달까. 앞서 이야기한 등을, 그 너머의 풍경을 훤히 짐작하기란 여전히 어려운 일이지만, 다시 들여다본 등은 어쩐지 더 넓고 다부진 등인 것 같았다. 우리가 슬쩍 기대도 좋을 등 말이다. 내친김에 그는 후배 시인들에게 애정 어린 조언을 덧붙이기도 했다. “하나하나의 세계가 모두 비할 데 없이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늘 배우고 있죠. 노동시라는, 앞서 말한 대로 사랑시가 하나도 없는 이 재미없는 세계가 아닌 내가 가져보지 못한 세계들…… 다만,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개인의 아픔이나 상처 같은 것들을 넘어서서 우리 모두를 아프게 하고 소외시키는 큰 구조적 문제에 대한 분노나 예민함, 부정의 정신이 조금만 더 있으면 어떻겠나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을 가끔 해봐요”라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반대로 이 고단한 얼굴의 선배 시인께 연애시를 한편 ‘당부’하고 싶었다. 시인 역시 은연중에 연애시, 사랑시를 좀 써보고 싶다는 말을 여러번에 걸쳐 했으니. 시인이 쓰는 연애시는 분명 우리가 여태껏 쓰지 않은 “다른 사랑 노래들”이 될 것임을 안다. 시인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저도 연애시를 좀 써봐야겠어요.(웃음) 이번 시집에는 싣지 못했지만, 그런 작업을 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써보고 싶다는 생각. 제 시는 어쩌다보니 대부분 구체적인 현장이 들어가고 사연이 들어가는 시인데, 한번쯤은 현장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은, 보편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이야기를 담은 시를 좀 써보고 싶어요. 보편적 서정을 가지고 관계의 문제를 담아낸 시를 써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먼저 삶이 변해야 시가 변하겠는데……

 

“삶이 변해야 시가 변하겠는데……” 하는 말은 참으로 먹먹한 것이다. 내가 알기로, 시인은 여전히 그 재미없다는 ‘현장’에서 분투하고 있기 때문. 이 지면을 위해 만난 4월의 어느 평일 저녁도 시인은 어딘가에서 늦도록 회의를 하고 온 참이었다. 얼마 전 사측의 노조탄압에 못 이긴 유성기업 노동조합원 한명이 자결했고, 이후 시청 앞에서 분향소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으로부터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20142차 유성 희망버스를 계획대로 잘 진행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여러번 되뇌었다. 모르긴 몰라도 시인은 내일도 모레도 회의와 투쟁을 반복하며 이곳저곳을 분주히 오갈 것이다. 그러다 또 어딘가에 잠시 쪼그려앉겠지. 쪼그려앉지 않으면 쪼그라앉은 그 무엇도 결코 볼 수 없다고, 쓸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지금도 혼자 있을 때면

아름다운 말들을 연습하는

나를 본다 ‘안녕’이라는 인사를

가장 많이 해보고 싶었다

「말더듬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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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작 5m짜리, 짧은 상상」, 『문학사상』 2015년 5월호, 276면.

박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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