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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고성만 高成萬
1963년 전북 부안 출생. 199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올해 처음 본 나비』 『슬픔을 사육하다』가 있음. kobupoet@hanmail.net
구제역
가족과 함께 서래봉 오르기 위해
정읍시 내장동으로 들어가는 도중
길 가운데 놓인 방역분사기를 지나는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마스크 쓴 소들이
가축우리에 갇힌 축산농민을 끌고 나와
커다란 트럭의 짐칸에 아무렇게나 던져넣어
어디론가 사라지고
발굽이 심하게 갈라진 채
피가 질질 흐르는 돼지들이 꿀꿀거리면서
비쩍 마른 아이와 노인 들을
깊이 파놓은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자
살아도 죽은 목숨, 죽여라 죽여
동학농민군처럼 소리를 지르는 여자들
트랙터 몰고 나와 전봉준처럼 누런 보리밭을
갈아엎는 남자들
어둠이 검은 것은 슬픔 때문이다
탈레반 모자를 쓴 소년들이
부르카 입은 소녀들의 손을 끌어
이어달리기하듯 들어간 숲 속
축제 벌이듯
푸드득푸드득 날아다니는 닭과 오리들
당황한 관계당국에서는 휴교령을 내리고
방역을 더욱 강화했지만
먼 조상이 난생이었으며
초식동물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불출봉에서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내장산을 뒤돌아 내려오는 유월
아홉수 애인을 위한 시작(詩作) 메모
1
열아홉 애인은 초여름 숲 같아 보라색 브라를 하고 녹황색 카디건 차림으로 남프랑스를 방문해 일본식 판화 속 도개교가 올라가는 저녁 물결 위에 주먹만큼씩 빛나는 별을 우러르지 타히티로 고갱 보낸 후 홀로 노란 방에 앉은 고흐와 함께 압생뜨주 마시며 머리카락 푸른 아이 낳는 꿈을 꾼다 하지
2
스물아홉 애인은 는개 같아 물에 푹 젖은 이미지파일을 전송해오네 산 첩첩 물 겹겹 지리산 돌담 마을에 귀농자금을 받아 정착하였다는데 어쩌다 그녀의 친환경 무농약 채소 주문하러 블로그에 들어가면 비정규직 고령화 사교육비 남북문제 등등 지끈지끈 아픈 머리가 조금은 위로되는 것 같아 버찌 익고 모내기 끝나고 접시꽃 피고 후두둑 애기감 떨어지는 밤 훌쩍훌쩍 눈물 마르지 않는 노래 들려준다네
3
서른아홉 애인은 가무락조개 같아 하루에도 두번씩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는 뭍과 섬 사이 펜션 마을 짜장면 집 남자와 결혼한 후 종일 면발 뽑는 남편의 기다란 촉수 피해 알록달록 산호색 주름치마를 펄럭이지 그럴 땐 말미잘에 갇힌 흰동가리처럼 모두들 기절해도 혼자만 멀쩡한 척 살아왔으나 뜨거운 불에 얹히기 기다리는 소라 전복처럼 날로는 거무스름하게 익혀서는 노릇노릇하게 남의 식욕이나 돋우는 삶은 아닌지 새삼 반성하는 중
4
마흔아홉 애인은 바람개비 같아 남색 머리띠에 보라색 스카프를 하고 비발디의 홍방울새 듣기 위해 엠피스리 꽂으면 검은 유두처럼 포도알 둥글어지는 들판 고속열차를 타고 비바람 폭풍우 속으로 떠나간다네 달콤한 오크통 안으로 달려가 잘 익은 와인 한잔 건넨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