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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혜순 金惠順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또 다른 별에서』 『불쌍한 사랑기계』 『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 등이 있음. michaux@hanmail.net
바람의 장례
바람이 창문 아래서 두려움에 떤다.
바람은 침묵치료를 견디지 못한다.
가만히 있어, 소리치는 침묵은 어떤 나라 같다.
사정없이 내리쬐는 빛 아래 드넓은 운동장엔 아무도 없다.
다 치료받으러 갔다.
평평하고 광활한 운동장, 그러나 그 안은 스텐처럼 싸늘하다.
바람은 합창단에 가입했다 쫓겨난다.
바람의 목소리는 나무꼭대기에 붙은 나뭇잎 두개를 떨게 할 만큼 높이 올라갈 수 있지만
탁자의 잔들이 모조리 깨질 만큼 예리하지만
음정이 계속 틀리는 바람. 박자를 못 맞추는 바람. 악보를 못 읽는 바람.
두 옥타브 올라갔다가 세 옥타브 떨어지는 바람.
바람이 다리를 떤다. 바람이 창문을 떤다.
바람은 긴장을 못 견딘다.
바람은 기분이 잘 상한다.
바람의 불안이 극도로 커진다. 전등이 흔들린다.
바람이 미술치료 시간에 그려놓은 밤바다를 보라. 물결치는 수억만의 머리카락을 보라.
전봇대가 윙윙 운다.
입술 밖으로 전류가 흐른다.
싸늘한 운동장이 벌벌 떤다.
바람에게 누가 귓속말하나보다.
바람은 흰 이빨 블록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가지런한 문장들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이 어디선가 험한 메시지를 받아온 사람처럼 포효한다.
바람에게 최면을 걸어야겠다.
바람에게 수면치료를 해야겠다.
바람은 바람들과 파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바람이 집에 도착하니 바람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바람을 입관하고 있었다.
이제 바람은 더욱 심해진다.
펼쳐진 영혼처럼 울먹인다.
귓속말로 명령을 계속 받는가보다.
바람 속에 몇백의 아이가 들어 있다. 바람은 그 아이들하고만 얘기한다. 그 아이들 하고만 산다.
바람은 다중인격이다.
바람은 구강애호증이다.
바람에게 공갈젖꼭지를 물려야겠다.
바람에게 진정제를 놔줘야겠다.
바람의 두 팔을 결박해야겠다.
바람은 상담치료를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밖에만 있지 않다.
바람은 꿈 분석을 싫어한다.
바람은 빙 둘러앉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걸레 같은 가면 아래서
회오리치는 무의식의 대륙들과 만나는 걸 싫어한다.
거대한 풍선처럼 천천히 부풀어오르다가 의자 모서리에 찔려 터진다.
저물녘 붉은 물감을 칠한 바람이 폭발한다. 몇시간째 데굴데굴 구르며 회오리친다. 번개 친다.
바람에게서 바람이 뽑혀 나가며 지르는 비명.
바람은 자유연상을 못 견딘다.
연상의 끝에는 꼭 무시무시하게 일어서는 밤바다가 있다.
바람은 일인실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육인실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관에 못이 쳐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유골함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견디지 못한다.
올해는 고래가 유행이야
이제는 고래 하면 패션이야 진짜 올해는 고래가방 고래스커트 고래구두
악수하고 있는데
술 마시고 춤추고 있는데
고래가 왔어
이게 뭐야? 이게 왔어! 소리치는 전화를 받았어
사실은 고래의 눈과 마주쳤어 고래바지를 입고 봤어 고래안경을 쓰고 봤어
이제는 고래 하면 노래야 고래가 왔어 진짜 올해는 고래작곡 고래창법 고래가사
고래의 노래를 들으면
현기증 우울증 공포 불안 안압상승
고래가 왔어
바다의 고래가 몽땅 나왔다고 했어 고래천지라고 했어
혹등고래 백상아리 심지어 돌고래까지
다 나왔다고 했어
라스꼬, 알따미라 동굴보다 더 큰 고래가 왔어 땅이 푹푹 꺼지는 고래가 왔어
쥐들이 먼저 듣고 땅속으로 몽땅 숨은 다음 고래가 왔어
낮에는 낮새들이 떨어지고 고래가 왔어
밤에는 밤새들이 떨어지고 고래가 왔어
노래를 부르러 왔다고 했어
우리는 그런 노래를 들은 적이 없어
성층권 높이 치솟으려는 바람의 옷자락을 붙들던 노래
난파선을 악물고 물속 사막에 붙여놓던 그 노래
그렇지만 지금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점점 더 무서워지는 저주파의 노래
이 우주에서 가장 낮은 목소리의 노래라고 했어
내 청각은 들을 수 없지만
내 몸은 한개의 왼쪽 귀처럼 그 노래를 듣고 불안 공포 우울 무너진다고 했어
그 다음엔 내가 끔찍하게 울부짖을 차례라고 했어
이제는 고래 하면 질병이야 고래기침 고래열병 고래가래
처음엔 벌레에 물린 줄 알았는데
피부가 벗겨져 진물이 나더니
그 속에서 고래가 터져 나왔어
종기가 터지고 눈물이 흐르고 고래가 왔어
이제는 고래 하면 춤이야 진짜 올해는 고래스텝 고래박자 고래도약
몸에서 한없이 물이 빠지는 춤 그런 다음
고래등뼈 고래목뼈 고래머리뼈 뼈만 남는 춤
방에서나 거리에서나 바닷물에 발이 푹푹 빠지는 춤
땅밑이 춤추더니 고래가 왔어
빌딩이 쏟아지더니 고래가 왔어
고래가 온 다음엔 바다가 올 거라고 했어
바다가 공중에서 춤추며 올 거라고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