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논단과 현장

 

‘사회인문학하기’의 긴 여정

 

 

김민환 金玟煥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 공저 『경계의 섬, 오키나와』 『오키나와로 가는 길』 등이 있음. ursamajor@dreamwiz.com

 

 

1. 들어가며

 

대학 밖에서 인문학을 강의하는 곳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얼 쇼리스(Earl Shorris)의 『인문학은 자유다』 부록에 정리된 목록을 본 순간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방자치단체가 기획한 강의나 ‘자기계발서’ 전달용 강의가 빠져 있음에도 10여면이 인문학 강의 관련 단체들의 이름으로 채워져 있던 것이다. 대학 내에서는 오랫동안 ‘인문학의 위기’가 회자되는 반면 대학 밖에서는 인문학 강의가 융성한 현상에 대해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그 목록이 준 구체적인 충격은 꽤 강렬했다.

내가 새삼 우리의 인문학이 처해 있는 여러 상황과 그 상황을 돌파하려는 시도들에 대해 살펴볼 필요성을 느낀 것은 바로 이 충격 때문이었다. 인문학이 대학 밖으로 ‘내몰린’ 이 상황을 어떻게 성찰해야 할 것인가? 책 네권에 대한 논평을 통해 이 문제를 좀더 다층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의도다.1)

 

 

2. 인문학의 ‘내적 위기’와 대안적 인문학의 방향

 

백영서(白永瑞)와 오창은(吳昶銀)은 기존의 ‘제도권 인문학’에 대해 “‘인간됨’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을 분석하는 학문으로”(오창은, 35면)으로 변해버렸고 이 때문에 “삶과 앎의 분리”(백영서, 29면)를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세기 이래로 인문학은 각각의 분과학문으로 잘게 쪼개져 전문화되는 방향으로 제도화했기 때문에 “보편적 가치를 지향한다는 인문학도 자연과학처럼 자기 전공영역을 벗어나면 대화가 안되는 방언의 학문이”(오창은, 35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공통된 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제안하는 ‘대안적 인문학’의 방향도 큰 틀에서는 일치한다. 대안적 인문학은 인문학의 통합학문으로서의 성격을 되살려야 하며, 무엇보다도 “앎과 삶의 공동체”(백영서, 48면) 혹은 “앎과 삶의 연대”(오창은, 46면)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대안적 인문학을 백영서는 ‘사회인문학’이라 부르자고 제안한다. “사회인문학은 단순히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결합을 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인문학은, 학문의 분화가 심각한 현실에 맞서 파편적 지식을 종합하고 삶(또는 인간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감각을 길러주며 현재의 ‘삶에 대한 비평’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총체성 인문학, 곧 학문 그 자체”(백영서, 35면)인 것이다. 이 명칭 자체에 대해 오창은이 동의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백영서는 오창은의 작업을 틀림없이 ‘사회인문학’의 중요한 성과로 인정할 것이다. 특히 오창은이 제4부에서 하고 있는 여러 ‘비평’작업은 백영서가 “‘삶에 대한 비평’이자 ‘삶에 의한 비평’을 겸하는 ‘삶의 비평’”(백영서, 65면)이라 부른 것의 모범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창은의 책 4부에서 내가 흥미롭게 바라본 것은 그가 글을 쓸 때 기본적으로 ‘역사적 접근’을 취한다는 점이다. 오창은은 현재의 특징을 드러내기 위해 과거와의 차이에 주목한다. 가령 2000년대 이후 신문사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신진 문학평론가들의 인구학적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1990년대 이전의 그것과 비교를 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신진 문학평론가들의 절대 다수는 이전 시기와 비교했을 때 비교적 고학력자며 국어국문학 전공자고 고령이다. 이들의 이런 인구학적 특징에서 그는 “문학평론이 국어국문학 전공자의 영역으로 간주되고 있고, 더불어 평론적 글쓰기가 풍부한 인문학과 세계문학적 소양보다는 국문학사에 입각한 전통의 강화로 나아가는 현실”(오창은, 334면)을 보는 것이다. 물론 이 글에서 그는 1965년 백낙청(白樂晴)과 박경리(朴景利) 사이의 논쟁과, 2007년 평론가 김수이(金壽伊)와 시인 김선우(金宣佑) 사이에 발생한 충돌의 유사한 구조, 곧 평론가의 언어와 예술가의 언어의 보편적 차이에 약간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지만, 나는 문학평론이 국문학이라는 분과학문체계에 갇혀가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설명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곧 오창은은 역사적 접근을 통해 전문화되어 소통이 불가능한 현재 제도권 인문학의 문제점을 부각하는 전술을 취하고 있는 셈인데, 사실 이것은 백영서가 한국의 ‘동양사학’ 및 ‘중국학’에 대해 학술사적으로 접근하는 것과 동일한 전술이다. 백영서는 학술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를 “기존 학술제도와 이념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밝히면서, “이같은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현상은 각자가 수행하는 학술관행에 대해 크든 적든 어느정도 위기의식을 갖고 그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백영서, 199면)이라 주장한다. 요컨대 백영서와 오창은은 동일한 지평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백영서와 오창은은 역사적 접근 이외에도 대안적 인문학의 방법론과 관련해서도 공명하는 부분이 매우 많다. 오창은은 자신의 방법론을 따로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백영서가 새로운 인문학의 방법론으로 제시한 ‘공감과 비평’ 혹은 ‘소통적 보편성’, 그리고 ‘이중적 주변의 시각’ 등의 내용을 담은 문구들을 그의 책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백영서가 제시한 사회인문학의 새로운 방법론의 핵심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누군가의 고통은 결코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못하는 ‘고유’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전적으로 공유할 수 없는, 다른 고통을 가진 존재와 대면해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려는 ‘노력’ 자체가 사회인문학의 방법론인 것이다. 이는 인문학자가 자신의 존재를 걸고 인문학을 하는 것이며, 스스로 ‘약소자’가 되는 것이다.

 

 

3. 인문학과 대학이라는 제도의 안과 밖

 

백영서와 오창은이 출발점 혹은 문제의식, 지향점 등에서 유사한 부분이 많다고 했지만, 강조하는 부분에서 차이점 또한 적지 않다. 내가 발견한 차이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실천인문학’을 논하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실천인문학이란 대학 밖에서 교도소 수감자, 노숙인, 도시빈민 등 “소외계층을 비롯한 대중을 찾아 나선 대학강단 밖의 인문학 실험”(백영서, 30면)을 말한다. 백영서는 이런 실험에 대해 “그런 식의 대안적 인문학의 실천은 지식의 재생산이라는 면에서 불안정한 것도 사실이다. (…) 지식의 생산보다는 전파, 즉 사회교육에 치중하는 나머지, 시민과의 만남이 거꾸로 지식생산의 과정에 어떻게 작용해서 구체적 성과를 낼 수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라고 우려한다. 그는 “그러한 성취가 교육뿐만 아니라 연구영역에서도 조금씩 축적되어가는 동시에 그런 동력이 국지적 활동에 그치지 않고 대학 안의 인문학 혁신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백영서, 31면) 희망하는 것이다. 반면 오창은은 이러한 우려를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2) 대학 밖으로 나가는, 혹은 나갈 수밖에 없는 실천인문학의 의의를 되풀이해서 강조한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가 실천인문학적 실험에 동참하여 그것의 내용도 기록하고 있다. 결국 백영서는 주로 대학이라는 제도를 활용해서 인문학적 지식의 ‘새로운 생산’(사회인문학의 정립)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오창은은 그것이 대학이라는 제도 안에서 가능하기 힘들다는 점을 강조하는 셈이다.

백영서는 최근까지 연세대 국학연구원의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HK)사업단을 이끈 수장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이 사업은 “대학이라는 제도 안의 연구소 중심으로 추진되고 기존 학문체계의 혁신을 우선적으로 중시”(백영서, 32면)했다. 그는 사회인문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시도를 “운동으로서의 학문”의 하나로 규정한다. “이 표현은 그것이 근대적 제도학문에 의해 배제되고 억압당한 지식을 생산하고 전파한다는 점을 내포한다. (…) 거기에는 두개의 층위가 중첩되어 있다. 가장 넓은 의미의 ‘운동’이라면 탈제도, 즉 제도권 안에서든 밖에서든 제도권 학문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흐름을 모두 운동으로서의 학문으로 포괄할 수 있다”(백영서, 36면)는 것이다. 그는 ‘제도로서의 학문’과 ‘운동으로서의 학문’이 대립적이지 않고 통합된 것이기에 “운동 속에서 제도를 보고 제도 속에서 운동을 보는 형태로 제도와 운동의 관계를 한층 역동적으로 파악하자”(같은 면 각주17)고 제안한다. 그에게 대학이란 제도는, 그것이 가진 자원의 크기로 보아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탈제도적 제도’이다.

실천인문학에의 관여 자체가 대학 안에서 대안적 인문학을 하기 힘들다는 오창은의 문제의식을 드러내주고 있지만, 그것이 오창은에게서 더욱 구체적인 내용으로 드러나는 것은 “제도의 절망”(오창은, 제3부 제목)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특히 그는 한국연구재단에 의해 인문학연구가 ‘관리’됨으로써 발생한 여러 문제점을 강도높게 비판한다.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 제도의 도입이 어떻게 오랜 역사를 지닌 학술지들을 고사시켰는지, 또 그것이 학술지들의 ‘개성’을 잃게 하여 천편일률적인 논문 중심의 학술지가 기승을 부리게 됨으로써 대중과 인문학이 어떻게 유리되어갔는지 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여기에 더해 학문후속세대가 대면하게 되는 여러 절망적인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대학에서 인문학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가슴 아프게 제시한다. 그에게 대학과 한국연구재단이라는 제도는 ‘벽’이었던 것이다.

백영서는 분과학문화하지 않을 수 있는 사회인문학의 동력을 논하면서 “항심(恒心)을 지키는 데 적정한 양의 항산(恒産)에 대한 고민은 예부터 늘 있어왔”고, “그러나 그와 더불어 (…) 사회인문학 사업에 참여하는 인적 자원인 연구자의 연구태도의 변화, 곧 사회인문학적 전환과 그에 동조하는 개인이나 집단과의 가능한 한 폭넓은 연대에서 동력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하다”(백영서, 14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오창은은 ‘사회인문학적 전환과 그에 동조하는 개인이나 집단과의 폭넓은 연대’를 위한 제도적 기반 자체가 절망적일 정도로 낮은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대학이라는 제도를 규정하는 ‘상위의 제도’가 가져온 연대의 기반 황폐화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3) 사회인문학 정립을 위한 제도적 기반인 한국연구재단 사업이 ‘사회인문학하기’4)의 장애가 되는 역설적 상황을 면밀하게 성찰하는 일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된 것 같다. 어쩌면 이 과제는 그 자체로 사회인문학의 고유한 영역일지도 모른다. 사회인문학은 ‘운동으로서의 학문’을 원래부터 지향했기 때문이다.

 

 

4. 대학 밖 인문학의 대학적 기반

 

오창은의 글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실천인문학에 대한 어떤 연극비평가의 매서운 질책이다. 이 비평가는 “노숙인이나 교도소 재소자가 인문학 수업을 통해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제가 보기에 감동을 받은 사람은 노숙인과 재소자가 아니에요. 그 강의에 나선 인문학자들이 나르시시즘에 빠져 스스로 감동에 겨워하는 것 아닌가요?”(오창은, 19면)라고 비판했다. 오창은도 이 비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지만, 정작 나 스스로가 이 부분에서 괜히 마음이 찔렸다. 아마 실천인문학의 강연자에 대해서 내가 막연히 떠올린 이미지가 이와 유사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체험이 나에게,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프로그램인 ‘클레멘트 코스’(Clemente course)의 구체적인 모습이 소개되어 있는 얼 쇼리스의 글을 열심히 읽게 한 것 같다.

얼 쇼리스는 『인문학은 자유다』에서 뉴욕의 중범죄자 교도소에서 만난 비니스 워커라는 여성과의 대화에서 시작된 클레멘트 코스가 시카고, 위스콘신 주 매디슨, 오클라호마, 매사추세츠, 알래스카, 찰스턴, 쏠트레이크씨티, 워싱턴 주 제퍼슨 카운티 등 미국 곳곳과 수단, 멕시코, 부에노스아이레스, 호주 씨드니, 서울 등 전세계로 확산되어가는 모습을 따뜻하게 소개한다. 각지에서 열린 클레멘트 코스를 소개할 때에는 그 코스를 준비할 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 및 코스에 참여하면서 인문학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사람들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 모든 이야기가 감동적이어서 이 책은 그 자체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쇼리스의 ‘나르시시즘’적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클레멘트 코스가 진행되면서 스스로 변해가는, 강사로 참여했던 인문학자들을 발견하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우선 쇼리스 자신이 변화해나간다. 자신에게 익숙한 문화권, 즉 서양의 인문학적 고전 이외에 각 지역의 전통적인 고전 텍스트들을 커리큘럼으로 채택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장면이 이 책에는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 과정을 통해 쇼리스 자신의 인문학적 이해가 확장되는 것이다. 오클라호마의 ‘카이오와’족을 대상으로 하는 카이오와 코스에서 유럽문화를 가르치는 샌더스 교수가, 자신이 카이오와족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것은 그들이 유럽의 예술과 관념을 배우는 것에 대한 대응이라고 생각했다가 그 생각에 내포해 있는 ‘엘리트주의’ 및 ‘서구중심주의’를 깨닫고 “평등주의의 옹호자”(얼 쇼리스, 144~45면)가 된 일화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내가 쇼리스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클레멘트 코스의 ‘제도적 기반’이다. 쇼리스가 미국의 특정 지역에서 클레멘트 코스를 개설하고 싶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가는 곳이 그 주()의 ‘인문학위원회’였다. 해당 지역의 클레멘트 코스는 이 조직과 함께 혹은 이 조직의 도움을 받아서 재정 및 강사섭외, 커리큘럼 채택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책 ‘감사의 말’에는 ‘주 인문학위원회들’과 ‘미국국립인문학재단’이 중요하게 언급되어 있다. 또 바드 칼리지(Bard College)와 시카고 대학을 주축으로 많은 대학이 클레멘트 코스를 지원했다고 밝혀져 있다. 만약 우리가 클레멘트 코스의 내용과 함께 이들 기관과 대학 등이 클레멘트 코스와 맺는 관계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게 된다면, ‘사회인문학하기’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클레멘트 코스의 제도적 기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교수법’이다. 이 교수법은 “허친스 총장 시절 시카고 대학에서 실시된 토론수업을 모델로 삼았다. (…) 허친스는 ‘최고의 학생들을 위한 최상의 교육은 우리 모두에게도 최상의 교육이다’라고 말했고 실제로도 이렇게 믿었다. 그는 대학의 토론수업은 정교수가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얼 쇼리스, 61~62면). 쇼리스가 채택한 교수법은 흔히 소크라테스의 ‘대화법’과 ‘산파술’에 기반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자신의 삶을 통해 ‘대화’하는 방식”5)인 것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교수법이 시카고 대학에서 실시된 토론수업을 위해 개발된 모델이라는 사실이다. 인문학이 대학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라도 대학에서 진행되는 인문학교육을 소홀히할 수 없다는 점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 내외의 인문학 강좌는 대부분 강의 중심이다. 강사 한명이 수강생 수십명을 모아놓고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강의에 ‘참여한다’가 아니라 강의를 ‘듣는다’는 표현은 우리의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강의만 듣고도 많은 지식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강의를 통해서는 쇼리스의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존재가 바뀌는’ 체험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5. 인문학의 ‘외적 위기’와 대중대학에서의 인문학교육

 

‘사회인문학하기’에 적합한 교수법이 대학 안에서만 발전하라는 법은 없다. 클레멘트 코스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대학 밖의 인문학 강좌에서 교수법이 발전해서 대학 안으로 전파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사회인문학하기’와 관련된 또다른 중요한 층위는 바로 대학에서의 교육문제이다. 이것은 교수법의 문제를 넘어서는 지점이기도 하다.

인문학이 전공인 학생들을 제외하면 대학에서 인문학교육은 대개 ‘교양’교육의 형태로 진행된다. 출간된 지 좀 되긴 했지만, 이 교양교육의 문제를 전면에 내건 책이 서경식(徐京植)·노마 필드(Norma Field)·카또오 슈우이찌(加藤周一)의 『교양, 모든 것의 시작』이다. 이 책에서 카또오는 대학에서 인문교양을 사지로 내모는 이유 중 하나로 ‘고등교육의 확대’를 든다. 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전체 인구에서 소수일 때만 대학 내 교양주의가 힘을 발휘하고, 반대로 대학이 ‘대중교육’ 기관이 되면 “음풍농월하는 한가로운 인문교양보다는 구체적인 직업과 직결된 실용적 능력을 연마하려는 욕구가 강해”(서경식 외, 43면)진다는 것이다. 이 말은 반대로 대학에서 인문교양교육이 약해진 것은 대학 자체가 대중교육기관이 되어버린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또래 연령집단 중 대학생의 비중이 50%가 넘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인문학은 가령 문화콘텐츠학처럼 ‘응용인문학’으로 전화하기 시작했고, 인문대학 각 학과들의 통폐합을 가져온 학부제가 시행되었으며, 교양교육도 위축되기 시작했다. “대학 교양교육으로 필요할까 싶은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강좌(화장품학, 단전호흡, 건강한 피부, 바둑, 스노보드, 다이어트, 생활과 보험 등)가 인문학 강좌를 대체”(오창은, 17면)한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대학생들은 스스로를 ‘지식인’이라고 간주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필자 세대가 대학 새내기일 때 ‘지식인이면 이 정도는 읽어야지’ 하며 회자되던 책들을 더이상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분과학문으로 잘게 쪼개져 전문화되는 방향으로 제도화함으로써 ‘삶과 앎의 분리’가 초래된 데서 기인한 인문학의 ‘내적 논리’에 따른 위기 이외에, 대중대학으로의 변화에 따른 인문학의 ‘외적 위기’에도 ‘사회인문학하기’를 통해 대응해야 한다. 과거처럼 “인문학에서 얻을 수 있는 ‘감흥(感興)’”(백영서, 34면)을 다시 강조하는 ‘인문 엘리트주의’로 회귀할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바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인문학은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앞에서 살펴본 네권의 책 속 어딘가에 감동적인 문구로 각각 제시되어 있다. 그중 서경식의 말을 길게 살펴보자.

“이 책은 인간을 ‘기계화’시키고 ‘야만화’시키려는 모든 교육적 드라이브에 브레이크를 걸기 때문이다. 물론 이 브레이크가 어느 정도 제동을 걸지는 알 수 없다. 대학을 포함해서 대개 교육에는 근본적인 자기모순이 존재한다. 우리가 ‘기계화’와 ‘야만화’에 저항하는 보잘것없는 작은 시도를 진행하고 있는 바로 그 곁에서, 같은 대학 내에서조차 우리의 시도를 훨씬 능가하는 기세로 ‘기계화’와 ‘야만화’를 추진하는 교육이 동시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그런 시도는 승산 없는 무의미한 저항이 아닌가?’라는 물음이 제기될 것이다. 그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하자. 그런 질문 형식 자체가 이미 ‘기계화’, ‘야만화’된 것이라고 말이다. 인간은 ‘승산’이 있을 때만 저항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승산’ 없는 저항은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것도 아니다. ‘저항’이 목적이고 이 저항을 통해 스스로를 인간적으로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게 목적이라면 그 저항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리고 종국엔 그러한 저항을 거쳐야만 진정한 ‘승산’까지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아무 저항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애당초 ‘승산’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서경식 외, 12~13면). ‘사회인문학하기’는 이 ‘승산’을 만들어가는 체계적이고 끈질긴 긴 여정의 다른 말일 것이다.

 

 

--

1) 본고에서 다룰 책은, 인문학의 위기를 진단하고 대안적 인문학의 방향을 제시하는 백영서의 『사회인문학의 길: 제도로서의 학문, 운동으로서의 학문』(창비 2014)과 오창은의 『절망의 인문학: 반제도 비평가의 인문학 현장 보고서』(이매진 2013), 대학 밖의 인문학을 실천한 얼 쇼리스의 『인문학은 자유다: 삶의 가장자리에서 만난 희망의 인문학 수업』(박우정 옮김, 현암사 2013), 대학에서의 인문교양교육 문제를 논하는 서경식·노마 필드·카또오 슈우이찌의 『교양, 모든 것의 시작: 우리 시대에 인문교양은 왜 필요한가?』(이목 옮김, 노마드북스 2007)이다. 인용 출처는 저자와 면수만으로 표기했다.

2) 오창은은 “인문학 연구는 대학의 틀 안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대학 밖 인문학은 인문학의 대중적 향유이지 인문학 연구의 대중화로 볼 수 없다”라는 윤지관의 지적을 소개하면서, 이런 비판의 중요성을 인정한다.(오창은, 29~30면)

3) “한국연구재단이 국가 영역에서 학술지원 시스템을 장악하면서 오히려 대학 안의 학술지원 시스템은 약화됐다. 각 대학의 연구지원처는 한국연구재단 전담 부서를 편성했고,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연구 지원체계에 따라 지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학문후속세대를 지원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한국연구재단을 위주로 대학 학문지원 제도도 재편되면서, 각 대학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던 박사후과정은 폐지되거나 축소됐다”(오창은, 218면)라는 내용은 기억할 만하다.

4) ‘사회인문학하기’라는 표현은 백영서의 ‘역사하다’라는 어휘에서 차용한 것이다. 그는 이 용어를 통해 ‘공공성의 역사학’의 특징 중 하나를 표현하는데, 그것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역사연구 집단만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것임을 강조한다. 과거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누구나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위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역사하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사회인문학하기’라는 표현은, ‘사회인문학의 정립’ 등과 같은 표현에서 느껴지는 전문적인 인문학 지식의 생산뿐 아니라 그 지식에 기반한 소통 및 교육 등도 포함하는 동태적이고 역동적인 측면까지 강조하기 위함이다.

5) 고병헌 「함께 읽기: 당신만의 자유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며」, 얼 쇼리스 『인문학은 자유다』 3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