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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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원태 嚴源泰

1955년 대구 출생. 199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침엽수림에서』 『소읍에 대한 보고』 『물방울 무덤』이 있음. candooo@hanmail.net

 

 

 

대구선공원에서

 

 

철로가 이설되고 공원이 조성되자

그늘막 벤치들은 이내 동네 영감님들 차지가 되었다.

반야월 역사(驛舍)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공들여 이전 복원되었다지만,

뒤편에 문을 걸어잠근 채 창고처럼 버려져 있고

광장엔 가을 햇살만 갈 길 바쁜 승객들인 양 붐빈다.

 

늙어 힘 빠지도록 가면을 흔들어대야 하는 광대의 삶이

저 ‘살사리꽃’이라는 전래의 이름을 가진

길가 외래종 식물들의 것만은 아닐 게다.

산책하던 사람들 이따금 발이 꼬여 넘어질 뻔하니

따라나온 개들이 애꿎게 주춤거리며 꼬리를 감춘다.

 

시간은 어디서든 무심히 흘러간다.

아줌마들 모여앉아 깔깔거리며 웃고

노인들 심드렁하니 드러눕거나 쪼그리고 앉은,

길가 좌판에 시들어가는 푸성귀며 가지 오이들이

햇살을 견디고 있는, 그렇고 그런 날들이……

 

옮겨 심은 남천울타리 아랫도리가 횅댕그렁하고

술패랭이며 섬백리향은 그새 말라붙어 팻말만 쓸쓸한데,

히말라야시다 구붓한 씰루엣 위로 왈칵, 어둠 쏟아지자

가로등 하나 깜박, 뒤늦게야 눈을 뜬다.

 

 

 

가을산

 

 

조락의 계절 돌아오니 다람쥐들 가을농사가 한껏 바빠진다. 꿀밤전쟁이 시작되었다. 숲 그늘에 발밑만 묵묵히 내려다보며 어슬렁거리는 사색가들 자주 출몰하는 한 시절이다. 덩치 큰 아줌마가 머리통만한 돌로 옆구리를 내지르는 바람에, 상수리나무는 진저리치며 자식 같은 도토리를 우수수 내어준다.

 

갈걷이 끝난 자드락밭에 고춧대가 아직 이파리를 달고 있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가을배추와 무청의 무성한 잎들과는 생기부터 다르다. 초로의 사내가 휘적휘적 밭고랑을 지나가며 무를 솎아내고 있다. 오십대를 지나노라면 생을 다 산 느낌 문득 든다더니, 가을산도 힘겹게 중년을 넘기는 중이었다.

 

산길 입구 휴게식당엔 공작과 금계 한쌍이 철망 우리에 산다. 새들의 불우(不遇)란 시멘트바닥 탓에 흙목욕을 못하는 것만은 아닐 테다. 수공작이 한번씩 목관악기 소리로 크게 울며 제 처지를 한탄하는데, 금계는 그마저 기죽은 듯 구석으로 맴돌며 서성댄다. 기슭까지 단풍 들고 나면, 밤 추위 혹독한 겨울이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