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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연호 趙燕湖
1969년 충남 천안 출생.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암흑향』 『농경시』 『천문』 『저녁의 기원』 『죽음에 이르는 계절』 등이 있음. aleph2100@hanmail.net
나 역시 아르카디아에서 쓸모없음을 줍다
꿈꾸던 요벨의 해에
회문시(回文詩)로 의인화된 지저(地底) 동물이 꼬부라져 나와 있었다.
개껍데기 양탄자를 타고 수양아버지여 살붙이 나팔을 불어다오.
돌을 깨자 혹은 시간이어야 했던 사람의 자문자답이 무늬를 대신했다.
조형가가 되어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나는 더 많은 일그러짐을 선물받으리라.
태양이란 언제나 창틀로 으깨 뭉개진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한 사람은
죽어 빛으로 미화(美化)되어 있었다.
「오지 않은 것은 맞이할 수 없고, 외로운 사람을 다 팔지 않으면 바람도
방향이 비워지지 않는다.」 고대 만월(滿月) 속담에 기대어
이웃은 어두워지면 떠날 누구에게도 먹을거리를 꾸어주지 않았다.
석양에는 귀신에게 팔려 갈 방울이 많이 달려 있으니까
죽어 괴이(怪異)가 빠져나간 몸으로 대지도 이처럼 헛된 냉대를 견뎌야 했다.
「의롭고 성난 군대의 창에 꿴 악마의 눈도 제단에 모인 신들처럼 어둠이 시들어버린다오.」 예쁜 주름의 해에
종교로 의인화된 땅 밑 동물에겐 고루고루 소금이 발라져 있었다.
나 역시 아르카디아에서 쓸모없음을 줍다
부패조(腐敗槽)는 모기장처럼 구멍을 망가뜨리며 살을 위협했다.
인간은 아니지만 다만 인간의 흉내였던 눈부심에 남은 인격을 다 섞고
남녀 동체(同體)의 창조신은 여자 쪽 밑이 뜯겨 있었다.
생각하는 새를 먹었기 때문에 나는 이제 많은 빛깔의 과일을 외우고
신의 도둑질을 망보는 사람이 되었다.
날개를 얻으려면 어깨가 등 뒤로 여러겹 얇게 접혀야 하고
천사가 되려면 허공의 투명이 변질되어야 한다.
이 값싼 보형물은 오로지 날마다 작가를 파는 상인(商人)인 채로 견뎠다.
글을 아는 신은 차가운 방향타의 뱃머리에서 미성년으로 불어와 나를 슬프게 했다.
나 역시 아르카디아에서 쓸모없음을 주웠다.
도원향(桃源鄕)
음악은 그 자체가 완결된 즐거움이라는 것과 그러므로 그 음악은 기다릴 수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낭송자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초상학적으로 그들은 다정한 깃털이었다. 대개 시인들은 흥을 붙여 말하는지라 애석은 사실과 함께해서는 물에 이끌린 그늘이 되고, 현명은 미(美)와 함께해서는 물그늘의 품계가 되었다. 그들의 시는 특별히 여성을 나타내는 무기로 간주되어 아직은 남성의 은유 상태로 남아 있는 대천사를 거세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범하기 쉬운 것을 위한 기평(譏評)이 또한 무슨 결박일 수 있겠는가? 반취(半醉)적 일생은 객인의 미각이 주인이 쟁반을 두 손으로 받쳐 든 것과 같은 그러한 완결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운율의 빛을 가진 광물이 발아래 파묻혀 있어 우리를 춤추게 하여도 그것이 시의 배신이 아니라면 이 몸짓이 신의 엔진에 부어진 연료로 타오르는 편재론(遍在論) 모두의 음욕(淫慾)과 무엇이 다르랴.
나 역시 아르카디아에서 쓸모없음을 줍다
작은 흡혈 무리도 망연자실의 피를 마시는 여름밤에
허약한 종(種)이 주워 장신구 삼은 부끄러움의 조각은
값이 너무 자주 바뀌는 바람에 약을 끼얹을 기회조차 잃었다.
어느 방향에서도 고아이지 않았던 나 역시 아르카디아에서 쓸모없음을 주웠다.
굳어서는 곤란한 아교 혹은 분(糞)처럼
여름 첫 제자들은 무르고 신비로운 응시를 가지게 되었다.
뱀과 여자가 짜낸 과즙 안엔 유익한 사람들이 떠다녔지만
도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채로였다.
「투명이 없으면 그 자리에 채색을 줄 것이나
자리를 골라 비추는 투명은 채색의 어디에도 없으리.」
나는 그 말에 나의 사숙(私淑) 전부를 걸었다.
간략하게 접어놓은 감정선도 조금은 다감하게 뭉친 벙어리장갑 같아질 것이다.
가만히 들려오거니, 우선적으로 회피되어야 할 시에서의 멀쩡함 혹은 작가의 물방개적 고독이
만조와 간조 아닌 것을 토했다. 이 미천한 육식성이 시와 신의 결연 전반에 걸쳐 다행히 지켜진 것은
물 밖의 세상이 물 안에 되비쳐진 자신에 의해 가장 훌륭하게 벌거벗겨졌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아르카디아에서 산문의 남자가 운문의 매춘부에게 걸었던 육체적 기대를 대신해
쾌락의 신이 암소로 변해 목동 청년에게 범해지는 것을 기쁘게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