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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다시, 웅성거림의 문학

 

 

김요섭 金曜燮

문학평론가. 2015년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 최근 평론으로 「역사, 그리고 동원되는 기억과 이야기꾼」 등이 있음. old_postcard@naver.com

 

 

1. 보이는 것과 떠도는 말들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오늘의 문학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문학이 무엇을 목도하고 있는가를 묻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는 문학이 닫힌 세계의 자기반복이 아니라 세계로의 열림을 통해 그 형상과 효용을 가다듬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의 문학에 대한 물음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세계로 열린 문학의 본원적 성질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복되는 물음을 통해 생각해보건대 오늘날 문학이 마주한 것은 ‘세월호 이후’인가? 이 자명해 보이는 사실을 되짚어봐야 한다.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고 여기는 것들은 실상 경합하고 있는 말들 위를 떠다니며 다른 자리에 놓이곤 하기 때문이다.

세월호가 가라앉는 모습을 모든 이가 보았다. 활자와 영상을 가리지 않고 모든 매체가 어두운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배의 형상으로 가득 찼다. 그러므로 모든 이가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월호의 침몰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는 2년 넘게 흐른 지금까지도 온전히 합의되지 못했다. 세월호를 둘러싼 말들은 바다가 집어삼킨 배를 각각 다른 형상으로 만들어낸다. 박민규(朴玟奎)가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지적했듯이 세월호 침몰은 ‘사고’와 ‘사건’ 프레임의 경합 속에 있다. 사고의 프레임 속 세월호는 ‘뜻밖의 불행한 일’로 남을 테지만 사건의 프레임은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임을 포착한다.1) 사고의 프레임 속에서 세월호는 앞선 수많은 사고 목록의 뒷자리로 기입된다. 그것은 익숙히 보아왔고 반복되었던 사고로 남을 뿐이다.

사건들은 보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 사건의 형상에 대한 다층적인 ‘부인’(denial)의 언어들이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사건에서는 ‘세월호는 기본적으로 교통사고’라고 평가절하하는 ‘피해부인’을 비롯한 여러 부인의 언어가 교차하며 사건의 고유성을 지워갔다.2) 이러한 부인은 세월호사건에서만 예외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한국사회가 목도했던 여러 비극들, 가깝게는 강남역과 구의역의 슬픔부터 조금 멀게는 용산의 화마, 굴뚝 위로 내몰린 노동과 추락해 사라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생활들 모두가 겪은 상황이었다. 사회의 뒤틀린 구조에서 기인한 이 사건들은 우연하고 예외적이며 개인적인 사고로 격하됐다. 일상을 가득 채울 만큼 반복적으로 재생됐어도, 그 해석의 층위를 비롯해 다양한 부인의 언어 사이에 놓임으로써 ‘사건’으로 인식되지는 못했다. 인식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중간지대에 놓일 수 있으며 사실에 대한 지각과 그에 대한 부인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3) 따라서 매체가 이러한 정보를 아무리 실어나르더라도 그 고유한 비극성은 대부분 가라앉아버린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았다고 말해온 ‘세월호 이후’란 무엇이었나? 다시 박민규의 표현을 빌려, ‘사고’로 보는 현실 속에서 ‘사건’을 발견한 것인가? 많은 이들이 추적해간 진실을 통해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었음을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세월호 이후’의 전부가 아니다. 뒤를 이은 애도의 형식들, 강남역과 구의역의 슬픔을 나누는 글과 말의 범람은 한 사건 이상의 무엇을 보았음을 증명한다. 한국사회는 세월호를 통해 사건을 사고로 남겨두려는 국가의 말과, 사고가 사건임을 증명하려는 시민의 말 사이의 충돌을 보았다. 시민의 목소리는 새로운 애도의 공간인 광화문광장에서 아직도 잔존한 사고의 프레임을 계속 밀어내고 있다. 경합하는 말들이 보여준 애도와 기억의 형식은 또다른 애도로 재현되었다. 포스트잇으로 뒤덮인 강남역은 애도의 공간이자 페미니즘의 언어로 한국사회를 비판하는 담론의 장소였다. 구의역, 한 청년의 죽음은 위태로운 청년세대의 노동현실로 기억되었다. 반복되는 사고 기록 중 하나로 사라질 비극의 실체가 인식의 경계 위를 떠도는 말들을 통해서 시선 위로 부상한 것이다. 오래된 해석과 이해를 가르고 다른 형상들을 보이게 하는 애도와 기억의 목소리들이야말로 ‘세월호 이후’의 풍경이다.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는 말들의 경합은 현실의 병리를 고발하는 작업에 한정되지 않는다. 부인의 언어는 한 사회가 공적 기억을 만들고 유지하는 방식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사회는 고유한 질서를 통해 삶들의 경계를 나누고 배치하며 그 사회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역시 나누어놓는다.4) 이러한 사회의 경계선은 고유한 이해 방식으로 자리잡음으로써 부인의 언어로 기능하기도 한다. 즉 어떤 사회에서 어떤 비극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비극을 보이게 하려는 말들은 곧 사회의 나눔을 뒤흔들어놓는 것, 즉 ‘정치’를 실행한다.

랑씨에르( J. Rancière)는 권력의 통치행위인 ‘치안’(police)과 구분되는 ‘정치’(la politique) 개념을 제시한다.5) ‘정치’란 공동체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나누는 과정이다.6) 공동체의 시선 밖에 자리하고 있던 비극을 가시성의 영역 안에 배치하려는 말들은 공동체의 나눔을 새로이 하는 시도이며 곧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치의 실현은 말의 능력을 확보하는 ‘주체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7) 즉 정치를 실행하는 말들의 발생은 스스로 공동체의 질서에 개입할 수 있다고 여기는 정치적 주체들에 의한 것이다. 세월호 이후 일련의 정치의 작동은 주체화의 과정과 맞물려 있다. 세월호의 진실을 묻고 여성의 삶을 되물으며 청년의 노동을 애도하는 그 주체의 목소리들과.

이 떠도는 목소리들의 정체성은 분명하지 않다. 계급이나 젠더, 세대로 규정되지 않는다. 이 주체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없는 것은 주체화가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을 벗어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8)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에게 각자의 자리를 부여하여 정체성을 창출한다. 반면에 주체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공동체의 경계선을 뒤흔들어 새로운 경계와 자리로 나눈다. 이렇게 공동체의 나눔을 새롭게 하는 주체에게 정체성의 규정은 무의미하다. 정체성의 자리를 비워둔 채 말들로 확인되는 주체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이 주체에 근접한 것이 강경석(姜敬錫)의 논의다. 그는 “공동체를 통어하고 있던 규범이나 제도, 코드, 정체성의 동요로부터 가시화”되어 타자의 고통에 감응하는 연대의 주체로서의 ‘민중’ 개념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9) 이러한 민중 개념의 설정이 현실의 고통을 직시하기 위함이라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공동체가 은폐하는 고통의 실체가 드러날 때 다른 공동체에 대한 상상이 당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떠도는 말들의 ‘정치’와 마주칠 때 문학은 다시 다른 세계를 향해 열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체와 문학의 만남은 이루어지고 있을까? 이루어지고 있다면 어디서 시작되고 있단 말인가?

이 글에서는 세월호 이후 정치의 발현과 주체의 출현을 마주하는 문학들을 살피고자 한다. 오늘의 문학이 새로운 정치와 주체를 마주하고 있다면 이를 예비해온 과정들이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을 되짚어 문학이 정치를 가능케 하는 방식들을 살피고자 한다. 이는 세계를 마주하고 그것을 향해 열릴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여기서는 이기호(李起昊)와 황정은(黃貞殷)의 소설들10)을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오늘날의 ‘정치’에 화답하고 이를 예비해왔는가를 검토하고자 한다.

 

2. 이야기 속의 국가: 이기호의 소설들

 

이야기는 세계를 말한다. 인간은 인물로, 삶은 서사로 전환되어 한눈에 가늠할 수 있는 작은 세계가 이야기 속에 담긴다.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조망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 이야기에 의해서 세계는 더 보이지 않는 것이 되기도 한다. 이야기의 고유한 설명력에 실제 세계가 굴절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역설 위에 이기호의 소설들은 자리한다.

이기호의 근작 단편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이하 「권순찬」)은 세월호와 우리에 대한 우화다. “죽은 아이의 아빠가 단식을 시작했다는 기사”(208면)가 화자의 시선에 포착된 것을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세월호사건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고의 프레임 속에 굴절되었던 세월호처럼 이 소설 속 사건들은 이야기에 의해서 굴절되고 실제의 삶과 불일치하며 파열음을 낸다. 지방대 국문과 교수인 ‘이교수’의 아파트단지에 권순찬이라는 초라한 남자가 나타나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한다. 그는 사채에 손을 댄 어머니의 빚을 대신 갚았으나 그가 입금했을 때는 그의 어머니가 이미 무리해서 빚을 갚고 자살한 뒤였다. 사채업자의 주소지를 찾아낸 권순찬은 그를 만나 입금한 돈을 받아내겠다며 몇달에 걸쳐 노숙하며 시위를 한다. 주민들은 사채업자의 노모만이 살고 있다며 그를 설득하고 입금한 금액만큼 성금을 모아 전달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그가 그 선의를 무시하자 민원이 이어지다 끝내 그를 노숙인 쉼터로 보낸다. 귄순찬이 사라진 뒤 이교수는 노모의 집을 향해 걸어가는 사채업자를 목격하게 된다.

「권순찬」의 서사는 권순찬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인식과 실제의 엇갈림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권순찬이 그의 바람대로 사채업자를 만날 수 있었으리란 결말 외에도 많은 장면에서 이해의 틀과 실제가 어긋나는 상황이 반복된다. ‘착한’ 주민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권순찬의 문제를 해결해주려 한다. 매년 반복해온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불우한 그에게 전달하려 할 때 권순찬이 겪은 고유한 사건은 지워진다. 그는 단지 아파트 주민들이 적선해온 불우한 삶의 목록 뒷줄에 기입될 뿐이다. 화자인 이교수는 입금을 늦게 한 권순찬이 어머니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집착하고 있다 단정하지만 권순찬에게는 죄책감이 없다. 또 죽었다는 어머니조차 왕래가 없던 계모였다. 소설은 이처럼 권순찬의 구체성과 고유성을 ‘착한 사람들’의 관습적 시선이 포착하지 못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불일치는 “애꿎은 사람들 좀 괴롭히지 말라고!”(226면)라는 분노로 돌변한다.

자신들의 시선과 사건의 불일치가 폭력으로 돌변하는 「권순찬」의 서사는, 공동체와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인식하는 피해자가 어떻게 공동체에 위협받는가를 보여준다. 이는 ‘교통사고’라는 국가의 규정을 거부하고 진상규명을 외친 세월호 유가족들의 상황과 닮아 있다. 우연한 사고에서 보상금을 더 받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는 분노가 그들을 향했다. 이 분노는 「권순찬」이 그러하듯 ‘착한 사람들’의 분노다. 불운한 ‘사고’에 대해 슬퍼하고 성금을 모아 위로하고 슬픔을 묻은 채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한국사회가 오랜 시간 재난을 소화해온 형식을 따르지 않았다는 데서 온 분노다. 그 형식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불합리하다고 해도 오히려 희생된 자들이 소외된다. 이런 이해의 형식과 삶 사이의 불일치로 인한 긴장이 「권순찬」에서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기호의 소설 전반에서 오래도록 반복되었던 물음이다. 이기호는 ‘서사’ 혹은 ‘글쓰기의 형식’이라는 형태로서 이해의 형식과 삶의 불일치를 드러내왔다.

이기호의 소설에서는 규범으로서의 서사에 압도된 병리적 인물들이 여러차례 등장해왔다. 그의 초기 단편 「최순덕 성령충만기」의 최순덕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성경을 자기 삶의 준거로 하는 최순덕은 모든 것을 성경의 서사를 경유하여 이해한다. 그는 ‘아담’(바바리맨)인 남자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이 준 사명을 다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타락과 전도를 통한 죄 사함이라는 성경적 서사는 실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적 서사에 포섭되지 않는 삶의 고난이, 이미 심판받는 자들임에도 자신의 삶을 가지고자 하는 바람이 전면화된다.

‘죄와 죄 사함’의 성경적 서사는 장편 『사과는 잘해요』에서도 반복된다. 원생들을 학대하며 강제노역을 시키는 복지원에서 주인공 ‘나’와 이시봉은 복지사들에게 죄를 고백하라며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한다. 복지원의 비리가 폭로되고 이들은 풀려나지만 죄와 죄 사함은 이들 일상의 원리가 되어 파열을 일으킨다. 그들에게 죄의 고백이 죄보다 우선했기에 고백을 위한 죄가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한테 먼저 죄를 고백하세요.”/“죄를 말해야 우리가 대신 사과해줄 수 있거든요.” (…) 하지만 원생들 대부분은 자신의 죄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죄를 하나하나 가르쳐주고, 지어주는 일까지 해야만 했다.(82면)

 

고백과 죄 사함을 위한 전도된 죄의 원리는 ‘나’와 이시봉의 삶에서 도착적 형태로 반복되며 원생들을 향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복지원 밖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유발한다. 이 전도된 원리는 끝내 복지사들에게 붙잡힌 이시봉을 죽게 내버려둔다. ‘나’는 시봉에게 사과하기 위해 “시봉에게 꼭 죄를 지어야만 할 것 같”(200)았기 때문이다. ‘죄와 죄 사함’ 서사에 갇힌 병리적 인물들은 비극으로 종결된다.

현실에 불일치하는 규범으로서의 서사에 대응하는 또다른 형태는 글(책/문서)의 형식이다. 단편 「탄원의 문장」은 ‘탄원서’라는 제도의 형식과 불일치하는 또다른 ‘탄원’의 글쓰기를 다룬다. 교수인 ‘나’는 후배에게 과음을 강요했다가 과실치사로 재판을 받는 제자 P의 탄원서를 써달라고 부탁받는다. 그는 P의 애인이었던 최에게도 탄원서를 부탁한다. 그가 받아본 최의 탄원서는 재판이라는 제도가 기록하는 사실 밖의 것, P의 실수로 죽은 학생이 떠나고 남겨진 것들을 되짚어간다. 최의 탄원서는 법의 제도에서 입증할 수 없고 입증하기를 요구하지 않는 비애를 쌓아올린다. 제도의 시선이 보지 않는 “사실들의 세계에 가려질 수밖에 없는”(205면) 것들에 대한 최의 문장은 탄원서이면서 그 형식 바깥에 놓인 탄원의 문장이다.

현실과 불일치하는 글의 형식은 규범으로서의 서사와 동일하게 작용한다. 규범으로서의 서사가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나누듯이 글의 형식은 그 안에 기록되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을 제한한다. 규범으로서의 서사의 작용은 개인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하나의 서사가 사회와 문학에서 이해의 틀로 기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사를 H. 포터 애벗(Porter Abbott)은 ‘마스터 플롯’이라고 정의한다. 마스터 플롯은 그 사회가 공유하는 문화와 가치를 대표하면서 사실에 대한 강력한 설득과 도덕적 강제로 기능하기도 한다.11) 세월호를 ‘사고’로 규정하거나 유가족들을 비난했던 언어도 ‘외부세력’ ‘종북’ 같은 마스터 플롯을 동원했다. 그런데 마스터 플롯은 단일하지 않으며 때론 복수의 마스터 플롯이 경합함으로써 다른 시선을 형성한다. 이러한 서사의 경합은 이기호의 소설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는 규범으로서의 서사에 의해 가려진 곳을 드러내기 위해 새로운 서사를 쌓아올린다.

80년대 공안정국에 삶이 파괴된 남자 ‘나복만’을 다룬 장편 『차남들의 세계사』는 서사라는 외연을 전면으로 내세운 소설이다. 배경이 되는 5공화국은 진실이 이야기로 연출되는 시대다. 소설은 이 시대를 누아르의 주인공인 전두환이 지배하는 누아르 영화의 세계로 설명한다. 누아르 영화의 세계에서 개인의 죄는 권력에 의해 플롯으로 짜이고 연출된다. “잘 짜여진 각본처럼, 그것을 연기하는 노련한 배우들처럼, 판사들은 목소리를 잔뜩 낮춰 형을 선고하였고, 다시 언론들은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 적”(122면)어서 만들어낸 진실만을 사람들은 볼 수 있다. 권력, 누아르의 주인공은 거대한 연출자이고 권력의 수하들은 더 작은 서사의 플롯을 짠다. 주인공인 택시기사 나복만은 우연한 오해로 권력에 포착되어 ‘간첩’이라는 배역이 주어지면서 자기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길로 내몰린다.

『차남들의 세계사』의 누아르 영화 세계가 만든 서사의 틀은 현실을 굴절시키는 장치로 제시된다. 이 서사의 틀은 적극적인 연출을 통해서 존재한 적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거나 혹은 사건의 다른 요소들을 부각시켜 국가의 책임을 부인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누아르 주인공의 수사 기법이자, 통치 철학이었던 것이다.”(68면) 이 서사의 연출은 거짓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복만이 고아였다는 것, 아버지가 월북자이며 자신은 민주화운동에 연루되었다고 믿고 있다는 작은 사실들의 틈 사이로 안기부의 연출이 개입하여 진실로서 공표한다. 연출된 서사를 통한 현실인식은 국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나복만을 고문하는 안기부 요원 정남운은 ‘간첩이라는 알을 깨고 나와 국가라는 신에게 귀의’하는 뒤틀린 『데미안』의 서사를 준거로 행동한다. 개인에게 규범으로서의 서사는 ‘진실을 외면할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괴물’이다. 누아르 영화에 속한 이들은 “자신들이 괴물을 불러낸 것도 모른 채, 자신들의 눈앞에 진실이 나타난 것도 모른 채”(233면) 그 폭력에 동참한다.

서사의 틀 안에 갇힌 인간은 그것이 진실이라 믿기를 강요받는다. 그러나 사실과 사실 사이를 묶은 권력의 플롯이 포착 못한 사실이 돌출할 때 이야기는 균열이 가고 무너져내린다. 수차례의 고문 끝에 나복만은 만난 적 없는 아버지의 지령으로 간첩단을 결성했다는 주어진 서사를 믿게 된다. 그리고 모든 걸 자백하고 끝내야 하는 순간, 연출자들이 포착 못한 사실로 인해 그것이 거짓임을 인식하게 된다. 요원들은 진술서를 작성하라고 펜을 내밀지만 나복만은 글을 쓸 줄 모른다. “남쪽으로 잠입한 아버지한테 『김일성 사상 선집』과 『공산당 선언』과 『중국 혁명사』를 학습받은 사람”인 서사 속 인물과 글을 모르는 나복만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가 바뀌는 일은, 플롯이 수정되는 일은, 결코 없”다(276~77면). 누아르 영화 세계의 굴절된 렌즈는 한사람의 일생보다 견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맹이라서, 그래서 누아르 영화의 서사와 끝내 동일시하지 못했던 나복만은 부여된 배역을 피해서 도망친다. 연출자 정남운과 함께 자신의 택시로 가상의 간첩단과 민주화운동 세력을 묶을 편지를 들고 이동하던 나복만은 전봇대를 들이박고 탈출하여 누아르 영화가 끝날 때까지 도망친다. 아니, 여전히 도망치며 그 영화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차남들의 세계사』는 현실을 굴절시키는 서사의 위협을 응시한다. 그런데 그 서사의 세계 밖으로 도망친 나복만과 달리 이기호는 서사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또다른 서사, 그가 ‘차남들의 세계사’라 이름 붙인 서사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려 한다. 그는 일련의 사실을 묶은 플롯으로 정남운이 행하고 나복만이 겪은 사건이 한 개인의 책임일 수 없다고 “그것을 조장하는 세계”(179면)인 ‘차남들의 세계’에 갇혔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서사는 “결론이 한 개인의 연애 문제이자 성격 문제이자 가족 문제였다면, 공권력은 이제 안전해지는”(68면) 누아르 영화의 세계를 그 대척점에 서서 고발한다.

이기호의 작품들은 서사의 위협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서사에 맞서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는 것 역시 또다른 서사의 힘이다. 이 서사에 대한 인식은 이기호가 가진 이야기꾼으로서의 강한 자의식에서 비롯된다.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벗어나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황규관(黃圭官)이 지적했듯이 “재현(서사인용자)에는 죄가 없다. 도리어 재현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 어느 지점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므로 “재현을 통해 사실을 전복하고, 재현 불가능한 지점까지 사유를 침투시킬 역량을 펼쳐”12)내야 한다. 서사문학은 서사의 형식을 통해서 고통을 보지 못하게 하는 다른 서사들에 맞서야 한다. 다른 서사의 창출은 한차례 고발의 외침으로 끝내지 않고 그 고통을 바라보는 공동체의 형식, 삶의 형식이 된다. 세월호를 ‘사고’의 프레임이 아니라 ‘사건’의 프레임으로 보려 한 것 역시 사건의 ‘서사’로 구성된 다른 시선이지 않았던가. 서사의 굴절을 인식하면서도 가려진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서사를 말하는 주체, 이야기꾼이 되는 길을 이기호의 소설은 걷고 있다.

 

 

3. 말함에서 함께함으로: 황정은의 소설들

 

“앨리시어의 아버지도 고모리의 이웃들도 그것을 안다. 알기 때문에 모르고 싶어하고 모르고 싶기 때문에 결국은 모른다.”(『야만적인 앨리스씨』 40면) 이 소설 속 대사는 곧 다시 한번 반복된다. “모두가 다 알지만 모르는 척을 하고 있고 모르고 싶어 꾸준하게 몰라왔던 일들이 세월이라는 총합으로 벌어”13)졌기 때문이다. 황정은은 소설과 소설 밖의 현실에서 동일한 부인의 언어가 작동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보이는 것, 그래서 아는 것은 보지 않고 알지 않으려는 외면에 의해 사라진다. 이 부인의 언어 속에서 가려졌던 폭력은 앨리시어의 동생이 사고로 죽게 되면서 가시화된다. 그런데 사건을 포착하는 제도의 시선,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 (…) 가족의 무관심, 비정한 이웃, 우리사회의 단면, 기타 기타의 평가와 비난”(155면)들은 금방 떠나가고 소년의 삶은 망가진 채 남겨진다. 부인의 언어와 제도적 포착 사이에 남겨진 삶, 그 속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의 굴레는 “기성 식별체계의 산물인 동시에 새로운 식별체계를 요청”14)한다. 그렇다면 이 요청은 어떻게 답을 얻을 것인가? 이는 ‘세월호 이후’에 황정은이 어디까지 도달했는가를 확인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의 문학적 작업이 마주했던 질문이 사건 이후에 동일하게 던져졌기 때문이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반복되는 물음 위에 서 있다. 특칭되지 않는 타자 ‘그대’는 앨리시어의 고통에서 떨어져 있지만 그에게 시선이 닿는, 그래서 다가설 수 있는 존재로 상정된다. 앨리시어에게 다가설 수 있는 그대에 대한 호명은 그를 향하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소년을 향해 다가가는 일은 진정 그를 구할 수 있는가? 타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은 이 소설에 나타나지 않는다. 타자를 향한 호명의 이유는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확인된다.

삶의 고통을 향한 황정은의 시선에는 하나의 명확한 시작점이 있다. 거기서 출발한 시선은 여러 작품을 통과하며 더욱 선명해져갔다. 이 흐름을 따라갈 때 타자를 향한 호명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황정은의 첫 단편 「마더」에서 삶의 고통에 대한 규정이 발견된다.

 

이것은 가장 은밀한 형태의 암호다. 나쁜 기억을 품은 사람은 언젠가는 자멸한다고 이 암호는 말하고 있다. 배드 섹터를 품은 하드디스크처럼 공회전을 거듭하다가 망가지고 마는 거다.(227면)

 

나쁜 기억을 품은 자는 홀로 무너진다. 「마더」의 주인공 ‘오’는 미혼모인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나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버림받은 자신과 그를 버린 어머니의 병적인 이미지 속에 갇혀 공회전하던 그는 어머니(mother)라 이름 붙이고 보살피던 병든 개가 죽자 자신의 눈을 찌른다. 나쁜 기억에 사로잡혀 스스로 무너져가는 이 기억의 운명론은 황정은의 소설에서 수차례 반복된다.

나쁜 기억에 갇힌 인간의 형상은 황정은의 소설에서 유령이나 그림자 같은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서 제시되곤 한다. 유령의 이미지는 「문」(『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낙하하다」 「대니 드비토」(이상 『파씨의 입문』, 창비 2012) 같은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유령들은 영원히 반복되는 공간에 홀로 갇혀 고통스런 기억에 집착하다 자신을 잃고 흩어진다. 황정은의 이 유령들은 반복되는 나쁜 기억을 홀로 견뎌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차츰 무너져내린다는 점에서 ‘오’처럼 기억의 운명에 갇힌 자들이다. 장편 『백의 그림자』의 그림자가 들린 사람들도 기억의 운명에 갇힌 자들이다. 그림자가 도망치는 원인은 분명하게 규정되지는 않는다. 가족을 잃거나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등의 상처를 가진 자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점에서 나쁜 기억의 문제라 추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한번 달아났던 그림자는 결국엔 사라지고 그림자의 주인은 죽음을 맞이한다. 기억의 배드 섹터처럼 위기에 처한 이들은 끝내 무너진다.

기억의 운명론은 상처 입은 자들의 비극적 필연처럼 보인다. 그들은 결코 혼자 그 닫힌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닫힌 운명은 타자를 통해서 바뀔 수도 있다. 「문」에서 유령 두리안은 m에게 자신을 붙잡고 있던, 생의 마지막 날 느꼈던 슬픔을 이야기한다. 혼자만의 기억으로 반복되던 상처를 m과 나누자 그의 슬픔이 떨어져나간다. 두리안은 점차 사라져가지만 “이제 가장 무겁고 무서운 말들이 사라졌으니까, 얼마든지 흐릿해져도 괜찮”(「문」 33면)으므로 그는 편안해진다. 타자와의 관계는 나쁜 기억의 폐쇄회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백의 그림자』에서는 그림자가 들린 두 남녀, 은교와 무재의 사랑이 중심을 이룬다. 이 상처받은 자들은 언제 그림자가 사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이다. 그 위태로움 속에서 무재와 은교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상처받은 이웃들을 향하는 연대의 감수성을 키워간다. 그들이 도망친 그림자를 쫓다 길을 잃은 상황에서 시작하는 소설은 다시 길을 잃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대칭적인 상황이지만 전혀 다르다. 연인들의 작은 연대는 그림자를 잃는 불안에 떠는 대신 서로를 의지하며 걸어간다. 기억의 운명론과 나쁜 기억의 폐쇄회로에서 벗어날 유일한 가능성인 타자, 끝없이 타자를 불렀으나 끝내 홀로 망가진 앨리시어의 삶도 이 구도 안에 있다.

타자를 향한 부름은 반복되는 비극을 막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런데 타자와의 관계 맺기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인의 행동으로만 한정되지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타자에 대한 관심은 공동체의 나눔을 되묻고 그 나눔의 오래된 질서를 동요하게 한다. 무재는 자신의 생활공간을 향한 사회의 시선에 의문을 던진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백의 그림자』 115면)

 

이 시선은 그들을 향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들을 보지 않는다. 슬럼이라는, 가난한 삶들에 대한 낯선 명명은 오히려 그들을 지워낸다. 이는 소외의 시선이며 연대 없는 관계다. 텔레비전의 시선, 그 오래된 이해의 방식이 앨리시어의 비극을 향하지만 그를 구하지 못한 것처럼. 공동체의 나눔을 흔들지 않는 시선은 보지 않음의 방식일 뿐이다.

공동체의 나눔을 새롭게 하는 타자와의 관계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장편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 나타난다. 소설은 나나의 가족과, 나나소라 자매와 혈연 밖의 가족을 이루는 나기, 나기의 어머니인 순자, 그리고 나나의 연인인 모세의 가족 등 여러 가족을 통해서 전개된다. 나나의 가족과 나기의 가족은 모두 아버지를 잃은, 상처 입은 자들이다. 그중 나나와 소라의 어머니인 애자는 남편이 죽은 나쁜 기억으로 무너진 사람이다. “이미 죽었으므로 더는 죽으려 하지 않고 다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갖 활동을 시시때때로 정지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소라를 망가뜨리고 나나를 망가뜨리”(99면)는 애자로 인해 자매 역시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나나는 가족도, 사랑도 전심전력이 되지 않으려 경계한다.

가족에 대한 나나의 생각은 그녀의 임신으로 인해 흔들린다. 나나가 연인인 모세와 결혼하기로 하면서 모세의 가족과 만나게 된다. 모세의 가족은 ‘정상가족’이라 일컬어지는, 결손이 없는 가족이다. 그리고 나나는 그 결여 없는 가족의 맹점들을 발견한다. 모세의 아버지가 사용하는 요강을 치우는 그의 어머니, 일방적인 헌신이 이상하지 않으냐는 나나의 물음에 모세는 가족이지 않느냐 되묻는다. 가족, 모세에게 가족은 현재에 어떤 의문도 던지지 않게 하는 기제다. 그리고 이 가족의 틀 안에는 타자의 고통이 놓일 자리가 없다. “수술로, 날짜를 맞춰야죠./……그렇게 하면 아프잖아요?/그렇게 묻자 전화기 저편에서 무슨 말이냐는 듯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어차피 겪을 거잖아요?”(144면) 길일이라는 출산일을 받은 모세의 어머니는 나나에게 수술을 요구한다. 그에게 나나의 고통이란 당연하고 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나는 타자의 고통을 보지 못하는 가족에 속하기를 거부한다.

모세와 가족이 되길 거부한 나나는 그러나 다시 가족을 택한다. 그리고 그 가족은 모세가 바라는 가족과는 다르다. 나나가 향하는 가족은 애자로 인한 상처에서도, 모세의 잔인한 가족에서도 멀리 떨어진 소라, 나나, 나기와 순자가 만든 연대의 가족이다. 이들은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지만 상처 입은 서로를 보듬는다. 서로의 상처를 보임으로써 이 가족 안에서 타자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감수성을 나누어 갖는다.

 

내가 너를 때렸으니까 너는 아파. 그런데 나는 조금도 아프지 않아. 전혀 아프지 않은 채로 너를 보고 있어. 그럼 이렇게 되는 건가? 내가 아프지 않으니까 너도 아프지 않은 건가? (130면)

 

사랑하는 동성친구에게 폭행을 당한 나기는 홀로 남겨진 집에서 동물을 학대하던 어린 나나를 발견한다. 그는 나나에게 상처받은 이로서 호소한다. 느껴지지 않는 타인의 고통을 직시하라는 나기의 말은 나나가 자신을 버린 친척의 고통을 마주하는 순간에 선명해진다. 나나는 자식을 잃은 백모의 고통을 보며 “내 고통에 관해서만 맹렬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 저기 분명한 고통에 관한 것은 생각해보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142면) 깨닫는다. 이 고통의 감수성은 애자와의 가족관계에서도, 모세의 가족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다. 모세의 눈에 가족일 수 없는, 상처 입은 자들의 가족은 가족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가족이다.

가족 없이 아이를 낳을 것이냐 묻는 모세와 연대의 가족 속에서 아이를 키우리라 다짐하는 나나, 가족이라는 자명한 공동체의 형식은 두개의 말들로 경합한다. 또다른 가족을 만드는 것은 “공동 세계를 함께나누는 자로서 자신을 긍정하는”15) 주체화의 과정이다. 나쁜 기억의 폐쇄회로 밖으로 삶을 구하기 위한 연대는 고통을 가려온 오래된 식별체계를 갱신하려 한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나눔을 새롭게 하여 다른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삶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황정은의 문학이 가닿은 자리다.16) 고통의 보임과 공동체 만들기를 하나로 묶어내는 황정은에게서 현재의 고통을 직시하는 일과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상상이 마주칠 가능성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다른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열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세월호 이후 경합하는 말들 속에.

 

 

4. 다시, 웅성거리는 문학을 기다리며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오늘날의 세계가 ‘질서의 경색’ 상태에 도달했다고 진단한다. 개인을 사회적으로 묶는 힘이 감소하면서 하위체제들의 가변성은 증대되었지만 체제들을 종합하는 방식은 변하지 않게 된다.17) 질서의 경색으로 인해 세계는 더이상 변화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더는 볼 수 없는 세계다. 세계의 식별체계 바깥에 있는 삶들을 볼 수 있도록 공동체의 나눔을 새로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질서의 경색은 바우만의 표현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동구권의 몰락과 ‘역사의 종언’이라 불린, 변혁을 향한 상상력의 공백이 긴 시간 이어졌다.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 했던 민중이라는 집단적 주체와 그 운동들도 사라져갔다. 공동의 삶 대신 개인으로, 더 작은 개인들의 자유로 쪼개져갔다. 그러다 지금 변하지 않는 세계가 한계신호들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죽음들로써 공동의 삶을 무너뜨리는 비극이 반복된다. 그리고 공동체의 오래된 이해의 틀에 의해 비극이 지워지지 않게 하려는 목소리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이 웅성거림을 ‘세월호 이후’라 부르자.

‘세월호 이후’ 세계를 새롭게 하려는 말들이 떠돈다. 그리고 우리의 문학이 공동의 삶을 향해 말들을 띄우고 있다. 이기호와 황정은을 통해서 보았듯 문학이 던지는 말은 ‘세월호 이후’로 뒤늦게 따라간 것이 아니다. 변하지 않는 세계라는 종언의 상상 속에서도, 세계에서 어긋나고 외면당한 것들을 향해 눈감지 않고 되묻고 말 걸어온 시간의 축적으로 쌓아올린 말들이다. 그렇게 ‘세월호 이후’ 배회하는 말들의 틈 속으로 오늘의 문학도 발을 내디딘다.

‘세월호 이후’ 다른 공동체를 상상하는 말들과 오래된 공동체의 말들이 경합하고 있다. 세월호를 둘러싼 말들의 경합이 계속되고 있듯이 새로운 말의 출현만으로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고통의 형체를 지우고 때로는 조장하는 혐오의 말들이 새롭게 생겨나기도 한다. 그렇기에 더 많은 말들이 필요하다. 고통받는 삶들을 지워내지 않도록, 그래서 그 고통이 계속되지 않도록. 보지 못한 것을 보는 말들,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말들, 더 많은 가능성을 품은 시끄러운 말들을. 그리고 그 말들로 시끄러운 문학이어야 한다. 다시, 웅성거리는 문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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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민규 외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57면.

2) 김종엽 외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 그린비 2016, 38~40면.

3) 스탠리 코언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조효제 옮김, 창비 2009, 90면.

4) 자크 랑시에르 『불화』, 진태원 옮김, 길 2015, 63면.

5) 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61면.

6)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13, 225면.

7) 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76면.

8) 진태원 「용어해설」, 자크 랑시에르 『불화』 256~57면.

9) 강경석 「리얼리티 재장전」, 『창작과비평』 2016년 여름호 235면.

10) 이 글에서 분석하고 인용할 작품은 다음과 같다. 이기호의 작품은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2016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현대문학 2015), 『차남들의 세계사』(민음사 2014), 「탄원의 문장」(『김 박사는 누구인가?』, 문학동네 2013), 『사과는 잘해요』(현대문학 2009), 「최순덕 성령충만기」(『최순덕 성령충만기』, 문학과지성사 2004)이며, 황정은의 소설은 『계속해보겠습니다』(창비 2014), 『야만적인 앨리스씨』(문학동네 2013),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 「마더」(『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문학동네 2008)다. 각 작품을 인용할 때는 괄호 안에 제목과 면수만 표기한다.

11) H. 포터 애벗 『서사학 강의』, 우찬제 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0, 99~103면.

12) 황규관 「날갯짓과 쇠사슬 사이에서: 민중시의 현재와 미래」, 『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 131면.

13) 황정은 「가까스로 인간」, 『눈먼 자들의 국가』 89면.

14) 강경석, 앞의 글 242면.

15)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93면.

16) 황정은이 전개하는 다른 공동체에 대한 상상을 기존 공동체의 구조를 전면적으로 전환하는 방식이라 보기는 어렵다. 체감되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단계적 극복 과정에 가까운 편이다. 이러한 점진적 개선 시도로 기존 공동체의 논리에서 멀리 떨어진 인물들이 주변화될 위험성이 있다. 『계속해보겠습니다』의 연재분에서는 ‘소라나나나기’라는 제목을 통해 대등한 관계로 시도된 세 인물의 관계가, 단행본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는 나나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배열되는 변화가 이를 보여준다. 다른 ‘가족’이라는 상상이 ‘구성원의 재생산’(나나의 임신)이라는 오래된 가족의 논리를 통해서만 그 대안적 가능성을 인정받는 구조를 취한다. 이러한 전통적 가족 논리는 동성애자인 나기의 서사가 고통받는 자의 호소 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하도록 제약한다.

17) 지그문트 바우만 『액체근대』, 이수일 옮김, 강 2009,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