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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송제숙 『복지의 배신』, 이후 2016
이것이 푸꼬적인 통치성 분석인가?
진태원 陳泰元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jspinoza@empas.com
이 책은 저자의 2003년 일리노이주립대 박사학위논문을 수정·보완해 2009년 듀크대출판부에서 영어로 출판한 저작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책의 주제는 1997년 IMF외환위기를 통해 한국사회가 겪게 된 변화를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라는 관점 아래 서술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복지의 배신’이라는 제목은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1997년 IMF외환위기가 한국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첫째, 그것은 “사상 유례없는 대량 해고와 사회경제적 혼란을 초래한 ‘국가적’ 비극이었다.”(28면) 둘째, 그런데 IMF위기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와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문제는 진보적인 세력의 기대와 달리 김대중 대통령이 IMF외환위기를 진보적인 정책을 통해 극복하기보다는 IMF 및 국제금융세력의 압력과 조언에 따라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김대중정권은 “역사상 전례 없이 이루어진 대량 해고를 합법화”(63면)하고, ‘정보사회’ 및 ‘생산적 복지’의 기치 아래 “대한민국을 더 유연하고 자본 친화적인 탈개발국가로 이행”(62면)하는 데 앞장섰다. 따라서 김대중정권을 통해 “한국 최초의 보편적 복지국가”(6면) 또는 “대한민국에 최초로 성립된 복지국가”(256면)가 등장했지만, 그것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인 국가의 모습을 띠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다. “민주화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과정이 자본주의 시장의 확장과 신자유주의적 복지정책을 정당화시킨 과정”(83면)이었던 것이다.
저자가 더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착근시킨 주체에 민주화투쟁의 주역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중심에는 과거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사람들이 정부가 추진하는 (신)자유주의적 사회 통치의 대리인으로 변모했다는 분명한 모순이 자리잡고 있다.”(32면) 그리고 저자가 보기에 이러한 “지식인들의 딜레마”는 단지 한국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신)자유주의적 사회에 적용”(52면)되는 것이다.
저자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약 29개월 동안 진행한 현지조사에 입각해 이러한 과정을 분석한다. 그는 특히 노숙인 문제와 청년실업 문제를 구체적인 소재로 삼아 자신의 기본적인 주장을 입증하려고 한다. 노숙인 문제와 관련해 저자는 정부가 자활 가능한 일시적 노숙자와 장기적 노숙자를 선별하여 전자만을 집중 지원한 것을 문제삼으며(2장), 또한 ‘여성 노숙자’의 존재 자체를 집요하게 부인하는 정책 담당자들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남성중심적·가부장제적 복지정책의 편견을 지적한다(4장). 5장에서는 “‘자기 관리가 가능한’ 주체 및 ‘자기의 기업화가 가능한’ 주체”로서의 청년실업자들에 대한 사회적 통치를 분석한다.
번역되기 전부터 이 책의 좋은 평판을 소문으로 듣고 있었지만, 막상 책을 읽고 상당한 아쉬움을 느꼈다. 우선 김대중정권의 개혁정책이 신자유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주장이 그다지 새롭지 않았다. 이는 국내 인문사회과학계에서는 오히려 진부한 느낌마저 주는 주장이다. 게다가 이 책의 거시적인 이론적 주장이 설득력있는 자료나 구체적 논거를 통해 충실히 뒷받침되지도 못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분석은 김대중정권의 신자유주의적인 전환을 입증하기에는 너무 단조롭고 단편적이다. 우선 노숙자와 청년실업자에 대한 대책이 김대중정권의 복지정책을 대표할 만한 사례인지 의문이다. 또한 노숙자를 자활 가능한 노숙자와 그렇지 못한 노숙자로 구별했다는 것, 그리고 여성 노숙자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했다는 것은 김대중정권의 복지정책이 상당히 미흡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그 자체가 신자유주의적인 성격을 띠었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저자의 분석 중에 좀더 설득력있고 구체성을 띠는 것은 청년실업에 관한 논의다. 저자는 서울시 청년실업대책위원회에 고용된 모니터링팀 소속 젊은이들의 경험에 입각해 ‘신지식인’ 및 ‘닷컴기업’, ‘정보사회’에 관한 담론이 청년실업 및 그 대책에 관한 정책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비교적 구체적으로 드러내준다.
이 책에서 제일 아쉬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푸꼬(M. Foucault)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꽤 피상적이라는 점이다. 내가 역설적이라고 말한 이유는, 저자 자신이 “내가 한국 당시의 사회 통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채택한 주요 프레임의 하나인 푸꼬의 통치성 개념이, 한국사회에서 좀더 유용하게 쓰이길 바란다”(18면)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이해하는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푸꼬의 작업에 입각했다고 자처하면서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과연 무엇인지 의아했다. 가령 저자는 푸꼬의 통치 개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 책은 푸꼬의 이론에 의거해 (…)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국가 행정제도로서의 정부의 개념과 달리, ‘통치’라는 용어를 선택함으로써 주체 형성을 통해 인구 전체를 관리하는 자유주의적 정치권력의 작동방식을 ‘government’ 또는 ‘governing’으로 명명한다.”(34면) 이 인용문에서 놀라운 점은 통치에 관한 정의가 별로 푸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저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가령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주체 형성을 하지 않고 인구 관리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저자의 통치에 대한 정의는 너무 막연하고 허술한데, 푸꼬 자신은 ‘통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구를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정치경제학을 주된 지식의 형태로 삼으며, 안전장치를 주된 기술적 도구로 이용하는 지극히 복잡하지만 아주 특수한 형태의 권력을 행사케 해주는 제도·절차·분석·고찰·계측·전술의 총체”(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1, 163면).
또한 저자는 이 책에서 푸꼬적인 통치 개념에 입각해 신자유주의를 분석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계속해서 “(신)자유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두가지 뜻을 담고 있다. 하나는 자유주의 민주화 세력이었던 김대중정권이 신자유주의 개혁의 집행자였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든 신자유주의든 자본주의 통치양식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푸꼬적인 관점이라기보다는 맑스주의적인 관점이며, 더욱이 꽤나 고전적인, 더 정확히 말하면 교조적인 맑스주의적 관점이다. 반면 푸꼬는 고전 자유주의가 자연적 소여로서의 “교환”에 근거를 둔 반면 신자유주의는 인위적 관계로서의 “경쟁”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바로 이 때문에 결혼과 범죄, 아이 양육 등에 이르는 인간활동의 모든 부문을 경제적 관계로 간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에서 모든 개인이 “기업가, 자기 자신의 기업가”(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오트르망 외 옮김, 난장 2012, 319면)로 간주되는 것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저자의 관점은 푸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푸꼬와 상당히 충돌할 수밖에 없는 관점이다.
다음 대목을 보자. “신자유주의 국가가 잉여 인구를 비롯한 다양한 국민의 안전과 복리를 증진하는 권력기구로 작동하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 정규직이 줄어들고 노동시장이 더욱 불안정해진 후기 자본주의 정치경제 체제에서는 국가의 잉여 인구 관리 방식이 생명권력적 복리 증진의 형태를 더 확연히 띠게 된다.”(136면) 저자의 주장을 그대로 따른다면 자연히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다. 다양한 국민의 안전과 복리를 증진하고 생명권력적 복지 증진을 도모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국가라면, 그것에 반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엉뚱한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저자가 푸꼬의 생명권력 개념이나 통치 개념, 또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에 대한 논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가령 ‘생명권력〓신자유주의적 통치’ 같은 도식적 규정에만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지면의 한계상 더 상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이 책은 여러 문제점을 더 안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는 외국 독자들에게는 얼마간 쓸모있는 참고도서가 될 수 있겠지만, 푸꼬에 대한 인식과 활용에 관해서도,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역사적 경험을 분석하는 데도 한국의 연구자들은 저자에게 배울 만한 바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