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김시종 『조선과 일본에 살다』, 돌베개 2016

여전히 말할 수 없음을 끌어안고

 

 

곽형덕 郭炯德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연구교수 kwak202@gmail.com

 
 

173_545김시종(金時, 1929~ )은 재일조선인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부산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 생활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이른바 ‘황국 소년’이었던 그는 해방 이후 민족적 자각을 바탕으로 제주 4·3에 남로당의 일원으로 참가했다가 1949년 일본으로 밀항한 후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1953년 오오사까조선시인집단 기관지 『진달래(ヂ)』를 창간한 후 1950년대말부터 조선총련과 대립하며 남과 북의 정치노선에 포섭되지 않는 독자노선을 걸어왔다. 1986년 『‘재일’의 틈에서』로 제40회 마이니찌(每日)출판문화상, 1992년 『원야의 시』로 오구마 히데오 상(小熊秀雄賞) 특별상, 2011년 『잃어버린 계절』로 제41회 타까미 준 상(高見順賞)을 수상했다. 그리고 이 책 『조선과 일본에 살다: 재일시인 김시종 자서전』(윤여일 옮김)으로 지난해 오사라기 지로오 상(大佛次郎賞)을 받았다.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김시종 시인의 일제말 체험이 1장에서 2장, 해방 후 제주도에서의 체험이 3장에서 6장, 오오사까에서의 체험이 7장에서 종장까지다. 일제말부터 일본 밀항 전까지의 이야기가 책의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어 원저의 부제 ‘제주도에서 이까이노까지’는 책 내용을 정확히 짚어냈다. 이 책은 자전 형식이지만 자신의 이야기만을 중심에 놓지는 않았다. 저자는 일본어가 “다정한 노래와 함께” 다가오던 ‘황국 소년’ 무렵에 만났던 친구부터, 해방 이후 스승이 돼줬던 최현(崔賢) 선생님, 제주 4·3 당시에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 그리고 밀항 후 민족학교 재건에 힘썼던 한학수(韓鶴洙) 부부를 만난 일에 이르기까지 누군가의 삶을 자신과 관련짓는 것에 가두지 않고 그들의 삶 자체를 중심으로 쓰고 있다. 옮긴이 윤여일(尹汝)이 “이 자전은 누군가에게 들려주고자 썼지만, 누군가를 쓰기 위해서도 썼다. 이 자전은 타인의 기억까지 짊어지고 있다”(「옮긴이의 글」)라고 언급했듯이 이 책은 개인적 체험을 넘어서 타인의 체험까지를 기록하는 ‘공동성’을 획득한다.

김시종은 이미 일본어 서적 『‘재일’의 틈에서』와 『왜 계속 써왔는가 왜 침묵해 왔는가: 제주 4·3사건의 기억과 문학』(이하 『왜 계속』)에서 자신의 과거에 대해 썼으나 이 책 같은 형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재일’의 틈에서』가 ‘이다, 하다’체를 통해 비평적 관점으로 해방 전후를 썼다면, 『왜 계속』은 제주 4·3을 소설가 김석범(石範)과 대화체로 말한 것을 받아적은 흔치 않은 기록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입니다, 합니다’체는 『‘재일’의 틈에서』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치욕 많은 자신”(『왜 계속』 한국어판, 제주대출판부 2007, 290면)의 과거를 가상의 ‘독자/청중’을 앞에 놓고 고백하는 문체 형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체 변화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세권을 면밀히 분석한 후에야 결론 내릴 수 있겠으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번 책에서 김시종은 자신의 과거를 더욱 구체적으로 ‘고백’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너무나 큰 비극과 절망 앞에서 말/언어를 상실할 정도로 고통에 시달렸던 저자의 과거로만 남을 수 없는 시간은 여전히 ‘말할 수 없음’을 끌어안고 있다. 그것은 ‘회상기’라는 형식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와 있는 기록된 과거 외에 여전히 기록할 수 없는 무엇이 남겨져 있음을 말해준다. 오세종의 분석처럼 이 책이 일본사회 내 마이너리티의 자전으로 “역사와 함께 자기가 파괴”되는 전후의 상황을 그리고 있기에 한편의 자전을 둘러싸고 “쓰여지는 자기와 쓰는 자기”가 분열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것과도 관련된다.* 이른바 “쓰여지는 자기”는 현재 상황에서 허용된 범위 안에서의 이야기를 구성하지만, “쓰는 자기”는 식민지해방 후밀항 후로 이어지는 단절 속에서 여전히 말할 수 없는 금기를 선명히 인식하고 있다.

김시종이 “구체적으로는 아직도 밝힐 수 없는 것을 품고 있는 나입니다만”(「후서」)이라고 이 책에 애써 남겨놓은 기록은 그런 의미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다. ‘재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이 분단 상황으로 인해 여전히 냉전 구도에 영향받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히 제주 4·3과 관련된 것으로, ‘산부대’(무장대)와 관련된 체험이 상당부분 축약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4·3을 둘러싼 타인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살육자는 정의이며 폭도는 살육되어 당연”(『왜 계속』 148면)한 것인지, ‘혁명’을 일으킨 산부대 측이 추구했던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되물어야 한다며 한국의 반공주의적 역사 기술에 이의를 제기해왔다. 이는 지난해 한국어로 완역돼 나온 『화산도(火山島)(전12권, 보고사 2015)의 작가 김석범이 올해 4·3평화상을 수상하면서 “제주도민의 저항은 내외 침공자에 대한 방어항쟁이며 조선시대의 제주민란과 일제통치하의 민족독립·해방 투쟁의 정신에 이어지는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투쟁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밝힌 소감과도 이어지는 문제의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시종이 제주 4·3에 참여한 산부대의 이야기를 자전에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는 시대는 여전히 금기와 억압이 국경을 억누르는 시대나 다름없을 것이다.

내가 이 서평을 쓰게 된 것은 김시종의 장편시집 『니이가타』(글누림 2014)를 옮긴 일이 발단일 것이다. 김시종의 번역자 중 한사람이 관련 번역서의 서평을 쓰고 있는 것이다. 윤여일은 김시종의 일본어를 옮기면서 그 일본어가 지니는 비균질적 성격에 대단히 자각적이다. “유려한 일본어가 될까봐 불안해하는”(「옮긴이의 글」) 김시종의 일본어를 명확히 인지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옮기는 자신의 언어가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의 언어공동체의 매끄러움만을 드러낼까봐 유려함을 거부하는 것에 공감을 표하고 싶다. 그저 유려한 한국어가 될까봐 불안해하는 것, 그리고 그로부터 김시종의 기억을 ‘조선어’적 지평으로 끄집어내 ‘한국어’로 전개하는 것에서 번역이 지닌 가능성의 일단을 엿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세종 「김시종의 시와 ‘자서전’ : 『조선과 일본을 살아가다—제주도에서 이카이노(猪飼野)로』를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39,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2015, 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