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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황동규 黃東奎
1938년 서울 출생. 195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어떤 개인 날』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풍장』 『꽃의 고요』 『겨울밤 0시 5분』 등이 있음.
하루살이
호기심에 홀려 머뭇대다
지도에 채 오르지 않은 산길로 들어섰다.
투덜대는 차 달래며 풀 듬성듬성 난 돌길을 천천히 달려
벼랑가를 돌자 무덤이 한채,
지난 비에 쓰러진 나무가 길을 막고 있었다.
차 돌리려 뒷걸음치다 후미등 하나 깨뜨리고
앞으로 빼다 나무그루터기에 범퍼를 대고
헛바퀴를 돌렸다.
시동 끄고 차에서 내리자
무엇엔가 막 씻긴 듯한 고요
수평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날개 쫑긋 단 단풍나무 씨들이
무얼 하러 오셨냐는 듯 각기 제 곡선을 그리며
가볍게 주위를 맴돌았다.
눈어림으로 차 돌릴 자리를
재보고 다시 재보았다.
바퀴를 껴안고 짓이겨진 쑥부쟁이들,
걱정스레 해가 지고 있었다.
다시 한번 바퀴 꺾임 살펴보고 차에 오르려는 손등에
가벼움 하나가 내려앉았다.
인간의 입김을 타보려는 씨도 다 있네.
후 부니 의외로 위로 날았다.
아 하루살이, 자신을 우습게보며 즐길 내일이 따로 없는!
혼
지금 내 삶의 좌표를 그린다면 고교 수학시간에 익힌
곡사포탄 낙하지점 상공의 포물선 기울기일 것이다.
읽어내던 분량보다 몇장만 더 넘겨도
망막이 뿌얘지는 막막한 하강…
하강하는 건 나, 그럼 상공은 어디 있나?
누군가 발을 구르고 있는 9층, 아니면 10층, 15층, 옥상?
찬찬히 살펴본다.
나와 가족이 오르다 말고 20년간 머물고 있는 이 아파트 8층,
책 책장 장롱 침대 오디오기기들
노래하고 있는 비엔나의 젖빛 하늘 구스타프 말러의 가곡
나이 먹은 컴퓨터와 더 늙어버린 사전, 메모지
그리고 프린터가 자리잡고 있는 책상,
거실에는 스프링 눅어진 쏘파와 텔레비전
가둬둘 값어치 없는 것들이 주로 갇혀 있는 장식장
꽃이 줄기째 마른 화병, 흔들어도 소리내지 않는 정다움,
있는 것은 다 있다.
베란다를 내다본다. 화분들은
노랗게 익은 파프리카 두개 달고 뻐기는 놈까지
다들 잘 있다. 말을 걸면 모두
왜 그러시느냐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베란다 오른쪽 끝 창밖에 달려 있는 저건?
하늘 한곳을 향해 꼼짝 않고 매달려 있는
위성방송 안테나,
무엇인가 계속 담지만 담겨지지 않는 접시.
가만, 인간에게 혼이 있다면 혹 저 형상을 띠지는 않을까?
찾기 전에는 있는 줄 모르고,
혼 같은 건 없다!고 대놓고 말해도 흔들림 없이
꼿꼿한 자세로 하늘 한곳을 향해 매달려 있을.
혼의 조련사 단테가 상처 난 혼도 고칠 수 있다고 했으니
깨지면 흔쾌히 버려질 수 있는 접시보다는
옆에 물이 있어도 목마르게 하는 뜨거운 바램이거나
제때 몸을 빼기 힘든 거대한 음모에 더 가깝지 않을까?
화단에서 시드는 꽃들을 만져주고
이웃과 인사를 나누는 몸을 천천히 떼어내
생각에 잠겨 층계를 걸어 올라갈 때
불현듯 층계 위가 온통 환해지고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에 휩싸이는
저세상 같은 현기증일까?
아니면, 정신 차리고 계단을 내려와
아파트 후문,
건너편에 어깨동무하고 있는 중계소 안경점 호프집 약방
후문 편 손님 별로 들지 않는 꽃가게와 구둣방
바삐 오가는 사람들과 뭣 빠지게 달리는 오토바이들
아슬아슬 U턴하는 차
그들이 들이쉬고 내뱉는 검은 숨과 관절 부비는 소리
쇳가루 태우는 기름 냄새를
다 함께 숨쉬며 거듭 보고 듣고 맡으라는 삶의 본때일까?
유모차에 탄 아기가 우연인 듯 혼불인 듯
어둑한 공기 속에 소리없이 다가와 방긋 웃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