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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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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동규 廉東奎

고려대 국문과 4학년. 1992년생.

critics_eye@hanmail.net

 

 

 

고통을 지키는 방패

황정은 장편 『야만적인 앨리스씨』

 

 

내게 종교적 진리에 대해 말해주면 기쁘게 경청하겠다.

종교적 의미에 대해 말해 주면 순종하여 듣겠다. 그러나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

C. S. 루이스 『헤아려 본 슬픔』에서

 

 

1. 인정

 

295명이 죽고 9명이 실종됐다.(201412월 기준) 가정은 무의미하겠지만, 가만히 있으라고만 하지 않았더라면 295명과 9명은, 아니, 그 배에 있었던 사람 전부는 생존의 경험에 대한 과장 섞인 영웅담을 나누며 이 일을 추억거리쯤으로 여길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항구의 앞은 비탄의 공간이 되었고 비탄은 항구만이 아니라 온 나라를 둘러쌌다. ‘어른’들은 애도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망자의 터를 배회하며 사진을 찍고 돌아갔고, 또 어떤 이들은 ‘그들만 죽었느냐’며 ‘이기주의’라는 잣대를 들이대었다. 그것은 고통에 대한 모욕이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가닿을 수 없는 초혼의 제스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 나름의 할 일을 찾아 나섰다. 작가들 역시 그중 한 부류를 차지했다. 특히 김애란(金愛爛)의 산문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문학동네』 2014년 여름호)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일종의 ‘불가능성’을 전제로 해야 함을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어서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책망, 반복해서 들려오는 ‘가만히 있으라’의 음성 사이에서 김애란의 이 글은, 거대하고 외상적인 사건 앞에서 인문정신이 어떤 생각과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지를 환기시켜준, 소중한 글이었다.

모욕과 애도의 사이 어디쯤에서 삶의 이면이나 고통에 대해 ‘이해’한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의 문제에 관한 것이든, 사회의 문제에 관한 것이든 그 어떤 말이나 생각도 삶의 암면과 고통에 대해 감히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늘 있는 일이지만 대체로 ‘안다’는 것은 고상한 엘리트의식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 암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려 할 때 우리는 일단 ‘모른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 모르는 것들 앞에서는 지켜야 할 예의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인정해야 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모든 말이 무력했고 또 죄스러웠다.

배에서도, 육지에서도, 공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 속에서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가령 고통과, 고통을 대하는 시선이며 목소리며 하는 것들. 그리고 고통의 편에 서는 일에 과연 유력한 가능성 같은 게 있을지 생각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작가 황정은(黃貞殷) 스스로가 고통에 대한 천착을 통해 길어 올렸다던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펴든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고통의 날것. 지금 문학과 관계되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 이 글 역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겠다는 무력감을 동반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면하고 싶었다.

 

 

2. 응시

 

작품 속에 고통은 즐비하다. 풍경의 차원에서나 서사의 차원에서나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로하다. 소설이므로 당연하게도 여기엔 이야기가 있으나 뚜렷이 급변하는 전개는 없다. 앨리시어의 동생이 죽는다는 사건을 제외하고 달리 급변하는 사태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재개발 문제로 마을은 시끄럽고, 엄마는 늘 소년들을 구타하며, 또래들 사이에서도 이러저러한 모욕을 당하는 그들의 이야기만이 지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어제나 오늘이나 그들은 둔탁하게 맞고, 또 맞는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권의 이야기책을 읽는 것보다는 한편의 그림을 보는 것과 더 가까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 같지 않다. 끔찍한 그림이다, 이것은.

고통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 담긴 이 책에서 고통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양상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첫째, 고통은 폭력의 주체로 드러난다. 둘째, 고통은 합리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을 집어삼키는 ‘상태’로 표현된다. 셋째, 고통은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있다. 이 세가지 차원은 서로 떨어진 독립적인 차원이라기보다는 서로 얽혀 있는 것에 가까운데, 일단 첫째 차원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이 작품에서 고통은 폭력의 주체로 나타나고 있다. 폭력으로 인해 고통이 일어난다기보다는 오히려 고통이 폭력을 낳는 측면이 더 본질적인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할 법한 정황은 일단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발견된다.

 

추웠을 것이다.

눈 속에 알몸으로 서 있어야 했던 밤에 그녀는 추웠을 것이다.

(…) 그녀는 혹시나 있을지 모를 행인을 피해 집 뒤쪽으로 돌아가서 굴뚝에 몸을 붙인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생각을 정지하고 머리를 비운 채로 차가운 밤에 박힌 별과 달을 본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몇시간을 버티다가 몰래 집으로 들어간다. 그녀의 형제자매들과 아버지는 잠들었다. 그녀는 이불 밖으로 조그맣게 빠져나온 어머니의 머리통을 본다. 누구보다도 그녀를 골똘하게 내려다본다. 아버지의 매질은 상시적이고 일상적이라 더는 새롭거나 궁금할 것도 없다. 그는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이고 그렇게 하고 싶을 때 그렇게 하며 살다가 언제고 죽을 것이다. 그녀는 그보다 어머니가 궁금하다. 어머니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왜 내다보지도 않았을까. 왜 나를 들여보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죽고 싶을 정도로 나는 씨발 추웠는데 왜 나를 궁금해하지도 않는 얼굴로 자고 있나. 식구들이 저녁으로 먹고 남긴 수제비 냄새와 낡은 이불깃과 잠든 인간들의 냄새가 섞인 따뜻한 공기 속에서 아주 조용하게 씨발 년이 발아한다. 씨발 년은 아버지 곁에서 편안하게 잠든 어머니를 내려다본다. (…) 그녀는 배부르고 평온하다. 포스트 씨발 년을 탄생시킨 씨발 년이다.1)(강조는 인용자)

 

 

작품을 다 읽은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이렇게나 고통이 즐비한데 이야기엔 이렇다 할 가해자가 없다. 폭력을 행사한다는 “씨발 년”, 앨리시어의 엄마는 가해자이기 전에 피해자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도 피해자라는 주장은 여러 영역에서 누차 반복되어온 지적인 만큼, 그 자체로 새로운 시사점을 지니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작품 안에 그러한 주장의 눈여겨볼 만한 메커니즘은 드러나 있다. 위의 인용문에 드러난 “씨발 년”의 탄생은 폭력을 행사한 아버지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 확인할 수 있다시피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매질은 상시적이고 일상적이라 더는 새롭거나 궁금할 것도 없다. 그는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이고 그렇게 하고 싶을 때 그렇게 하며 살다가 언제고 죽을 것이다”라는 정도로만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아버지의 폭력은 “씨발”을 발아시키는 결정적 원인이라 보기 어렵다.

적어도 인용문 내에서, “씨발”을 발아시킨 쪽은 어머니에 가깝다. 앨리시어의 어머니의 어머니. 이 인물은 아버지의 폭력이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도 붙잡아 말릴 생각도, 잠을 뒤척이지도 않았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마치 고통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듯이. 정당화하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행동했다. 그리고 그러한 무관심이, 아니 폭력적인 일상에의 동화(同化)가 “씨발”을 낳았다고 여기에는 적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관심이야말로 고통을 배태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이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만이, 오직 인간만이 고통과 관계할 수 있지만 고통의 창조자를 인간이라고 볼 수는 없다. 만약 고통을,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거나 그렇지 않은 무엇으로 여길 수만 있다면 고통을 상대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고통을 만든 쪽을 배제해버리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그런 배제가 고통을 감소시키지는 않으며, 더이상의 고통을 사라지게 하지도 않는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작품 속에서 고통 그리고 “씨발”이라는 상태는 인간이 주인공인 폭력으로 환원되거나 소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고통은 언제나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앨리시어 형제를 상습적으로 구타하는 앨리시어의 어머니의 형상이 그렇고, 작품 속에서 앨리시어가 동생에게 말해주는 여우의 이야기에서도 그러하며, 동생을 잃고 여장한 부랑자의 모습으로 거리를 떠도는 모습 역시 그렇다. 앨리시어의 어머니의 행동이 절대적인 잘못인 양 비치지 않는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앨리시어의 어머니가 휘두르는 폭력은 그가 고통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발생한다. 쉽게 말해, 앨리시어의 어머니가 고통을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고통이 그녀를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비평적 진술 속에서만 그렇게 여겨질 수 있다.

 

앨리시어가 그녀의 씨발됨을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나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반영해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너무너무 배우기를 원했으나 배우지 못했고 그녀 자신도 가장으로부터 누구 못지않게 맞으며 자란 뒤엔 요릿집 주방으로 보내졌으며 월급을 매달 아버지에게 빼앗겼고 참다못해 벌인 첫번째 월급 투쟁에서 발가벗겨져 집밖으로 쫓겨나 눈 속에 서 있어야 했다. 그녀는 그걸 잊지 못해 괴로운 것이다.

웃기시네.

그렇게 말하고 싶은 앨리시어는 꺼져라.

그렇게 할 때 그녀는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거라니까. 그런 순간에 그녀는 한점 빗방울처럼 투명하고 단순하다. 때리고 싶어서 때리는 거야.(40~41면)

 

 

개념적으로는 고통이 폭력을 낳는다는 설명이, 따라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다만 고통스러운 사람일 뿐이라는 설명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고통이라는 외상적 사건 앞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부터가 오류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그렇게 단순히 받아들일 수 없다. 고통이 낳은 폭력이 쌓이고 또 쌓여, 그에 대한 방관과 무관심 속에서 매일 같은 나날을 견뎌야 했던, 그래서 결국엔 고통에 사로잡히게 된 입장에서라면, 대체로 이런 설명은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법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앨리시어는 꺼져라.” 고통은 폭력의 이유나 원인을 통해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것이므로, 그리고 고통은 언어로 포섭되지 않는 어떤 영역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고통에 대해 아무런 논리적 설명도 할 수 없다. 모든 언어적 설명이 고통 앞에서 무력하다.

이 작품 속에 빈번히 등장하는 “씨발”이라는 말이 비속어가 아닌 어떤 상태인 것처럼 묘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력한 힘으로, 고통은 인간을 집어삼킨다. 고통에 집어삼켜진 인간을 이 작품에서는 “씨발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고 표현하는데, 어김없이 이 상태는 구타를 야기한다. 재차 말하지만 고통은 인간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조율하거나 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고통에 휩싸인 사람들을 두고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해 천박하다거나 수준이 낮다고 말하는 것은 무언가를 크게 착각하고 있는 말이다. 고통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거나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상태’이다. 그것은 결코 이기적인 자아의 무기로 취급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고통의 강력함은 그것이 자기동일성을 갖추고 있는 지점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고통은 자기동일적이다. 그것은 이른바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리는 사조가 말하는 것처럼 해체될 수는 없는 자장에 놓여 있다. 해체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라 해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고통은 강력하다. 상징계적 동일시 같은 판타지들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앨리시어는 이 거리에 있다. (…) 거리의 딱딱하고 차가운 모서리들에 닿아 골격은 비틀어졌고 아무렇게나 옷을 주워입고 무감한 얼굴로 거리를 떠돈다. 그는 어느 날 우연하게 유리진열장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여성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진열장에 비친 그 얼굴은 누구보다도 오래전 그의 어머니와 닮았다. 비딱한 골격 위에 솟은 조그만 얼굴이 말이다. 웃음이 터질 정도로 닮았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그 얼굴을 들여다본다. 앨리시어는 씨발 년이다.(159면)

 

 

고통에 휩싸인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 할 앨리시어 모자가 서로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것은 작품 전체에서 고루 나타나고 있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부분만을 인용했다. 앨리시어는 종국에, 자신의 어머니에게 복수하는 게 아니라 “여장”한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씨발 년”이라 지칭한다. 이것은 고통의 자기동일성이 지닌 형상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고통은 고통끼리 서로를 알아본다. 거기엔 차이가 없다.

고통의 자기동일성이 분명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앨리시어의 어머니와 앨리시어 사이의 적대는 더이상 통용될 수 없다. 앨리시어의 어머니를 상대로 한 복수심은 동생이 죽은 뒤로부터는 아예 자취를 감춘다. 그것은 고통의 자기동일성이라는 맥락하에 동등하게 포섭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결코 해체 가능한 판타지로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 앨리스의 말을 들어보라. “지금 그녀는 가장 그녀답다./그리고 그녀는 고통스러워 보인다. 그 고통은 가짜일까. 가짜라고 말할 수 있나.” 고통 아래 하나 된다는 것은 결코 가짜가 아니다. 그것은 가장 전면적인 진짜이며 절대적인 동일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은 끝나거나 해소되거나 봉합되지 않을 만한 것으로서 다루어진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작품 속 이야기는 상징화되지 않는 고통의 집요한 실재성을 정면으로 묘사하고 있다.

 

토끼를 쫓아 달리고 달려서, 마침내 토끼굴로 미끄러졌다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너 토끼굴이 얼마나 길고 깊은지 아냐? 그건 진정 긴 굴이었다. 앨리스 소년은 떨어지면서 다시 기다렸다.

(…)

아직도 떨어지고, 여태 떨어지고 있는 거다. 상당히 어둡고 긴 굴속을 떨어지면서 앨리스 소년이 생각하기를,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상당히 오래전에 토끼 한마리를 쫓다가 굴속으로 떨어졌는데… 아무리 떨어져도 바닥에 닿지를 않고 있네… 나는 다만, 떨어지고 있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고… 계속, 계속… 더는 토끼도 보이지 않는데 줄곧… 하고 생각하며 떨어지고 있던 거다. 언제고 바닥에 닿겠지, 이제 끝나겠지, 생각하는데도 끝나지 않아서 이게 안 끝나네, 골똘하게 생각하며 떨어지고 있었던 거다.(131~32면)

 

3. 모욕, 대응 불가능

 

배가 침몰한 뒤 여러가지 말들이 오갔다. 그중 어떤 말들은 분노를 넘어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멍하니 서서 TV만 바라보았다. 무력감마저 느끼게 했던 말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 것은 ‘이 문제에 너무 휩쓸리지 말라’는 어떤 정신과 전문의의 말이었다. 겉으로는 예의바른 말이었지만, 그 말은 유가족에게도, 침몰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도 요상한 말처럼 들렸을 뿐 아니라 모욕적이기까지 했다. 자식을 잃은 사람들에게 일단은 잊고 기다리라고 한 것이었을까? 그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봤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니 ‘효율적인’ 관점에서 괜한 감정을 소모하지 말라는 말이었을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었을까? 배가 침몰하는 장면과 정신과의사의 소견을 함께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 일이 무슨 해악적인 질병인 것 마냥 느껴졌던 것일까?

여러번 힘주어 말하겠다. 고통에 합리적으로 대응한다는 생각은 틀렸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은 고통 앞에서 쓸데없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도, 재발 방지책을 확고히 마련하겠다는 것도, 거기에 얽힌 정쟁이나 말다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죽음과 비탄, 고통의 자리와 일상의 자리는 너무나도 멀어서, 이 앞에서 ‘유력한 것들이나 가능한 것들’을 이야기하는 일은 삶과 삶 아닌 것의 거리를 도저히 헤아리지 못하는 일이 되고 만다.

어떤 의미에서 고통을 다룬다는 것은 고통에 대한 대표적인 반응을 다뤄보는 일과도 무관치 않다. 다음의 인용문은 작품 내에서 “상담사”가 하는 말이다.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고통에 대한 대표적인 반응으로, 위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인식론고통에 대한 합리적 대응이 가능하다고 여기는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론적 오류는, 고통받은 자에게 모욕으로 다가온다.

 

그래요…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부모님에 대해서 상당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고, 가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나는 판단해요. 그렇지만 이런 경우 부모님 각각이 지니고 있는 상처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거거든요. 어머님에게나 아버님에게나 우리 학생이 미처 알지 못하는 내밀한 상처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어요. 이런 상처들을 제때 제대로 치료받거나 위로받지 못하고, 관심도 받지 못하고, 사랑받았다는 경험도 부족하고요. 보호받아야 했을 때 자신은 보호받지 못했다는 상처… 외로움… 이런 것들이 안에서부터 곪아서 모든 일들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거거든요. 이런 이야기들은 학생의 이야기만 들어서는 알 수 없고, 우리가 같이 들어봐야 하는 거거든요. 그런 경험을 통해서 부모님도 자기 감정을 정화하고. 자기 트라우마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고, 우리 피상담자들도, 이쪽은 동생인가요? 아니라고요? 상담은 본래 직계가족 말고는 동석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학생도, 부모님의 행동에 관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고요. 우리 학생이 몇살이라고요? 아니 그렇게나 됐나요? 어려 보이네… 우리 학생은 가족에 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테지만, 만사의 근원은 가족인 거예요. 가족이 붕괴되면 사회가 붕괴되고 사회가 붕괴되면 나라가 아주 망조가 드는 거거든. 그래서 우리 센터의 활동 목적이 붕괴된 가족을 복구해보자… 물론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에요. 우리 학생보다 더한 케이스였지만 결국 조금씩, 이겨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렇게 되려면 부모님과 학생, 혹은 아버님과 어머님, 양방 간의 끈질긴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인내심이 필요한 거거든요. 쉽지는 않을 테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 서로서로 가진 상처를 이해하고 화해하고…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어머니를 가지고 씨발 년이라고, 음? 아주 안 좋은 욕을 한다거나 그런, 과거의 자신에 대해 거리를 두고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올 수도 있는 거고요…

(…)

우리 학생 질문이 뭐였죠? 어머니를 때려도 되느냐 아니냐… 아니라고요? 강해지는 법? 계속 이기는 법? 대답하기가 곤란한 질문이네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피상담자더러 무엇을 해라, 하지 마라,라고 행동적인 지침으로 조언을 해줄 수는 없는 거거든요. 본분이 상담이니까요. 다음에 부모님을 모셔오세요. 예약을 하고, 아 오늘은 특별한 경우라서 그냥 진행했지만 본래는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합니다. 전화로 연락을 하고 오세요. 부모님과 함께, 가능하다면 두분을 모두 모셔오고, 사정이 안된다면 어머님만이라도 꼭, 모셔오세요.(107~109면, 강조는 인용자)

 

여기에는 고통을 다루는 속물적인 반응이 거의 다 나와 있다. 양상은 크게 네가지이다. 가장 핵심적인 첫째 양상은, ‘희석’이다. 가해한 쪽이나 피해를 입은 쪽이나 다 같은 ‘피해자’이므로 한쪽 말만을 들어서는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는 식으로 사태를 희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양쪽의 말을 고루 들어서 공평한 ‘중재’를 이끌어내겠다는 것이 이 사고방식이 가지고 있는 함의인 셈이다.2) 위 인용문에서 “상담사”는 “학생의 이야기만을 들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하면서 판단을 철회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부모님도 자기 감정을 정화하고 자기 트라우마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다는 식으로 이미 ‘합리적 중재’의 차원에서 고통에 대한 결론을 모조리 정해놓고 있다(게다가 “예약”이라는 철저하리만치 합리적인 시스템을 들이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고통에 대한 겸허라기보다는 오만이다. 마치 고통을 인간이 알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무엇처럼 여기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주지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고통에 휩싸인 인간의 편이 되어준다기보다는 상담사나 이데올로기 자신의 나르시시즘으로 소급되고 만다.(이 측면은 뒤에 나타난다.)

둘째 양상은 고통에 대한 연대를 저지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앨리시어와 동석한 “고미”는 “직계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원칙적으로는 ‘동석할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왜 고통에 대한 연대를 저지해야 하는가? 어째서 직계가족이 아니면 고통에 빠진 사람과의 연대가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내담자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쩌면 고통에 대한 연대 그 자체가 몰고 오는 급진적인 효과를 저지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셋째 양상은 고통을 대하는 ‘이유’에 있다. 인용문에서 고통은 그 자체로 대면되어야 하는 무엇으로 여겨지기보다는 “사회”와 “나라”의 안녕이 유지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고통을 대하는 속물적 양상의 첫째로 거론한 것과도 얼마간 연결되는 지점이 있지 않은가? 고통을 길들이고 싶어하는 태도 말이다. 이데올로기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언급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넷째 양상은 고통이 가진 폭력적인 양상을 거세하고 싶은 욕망이다. 고통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는 고통이 가진 폭력성을 훈계하고 있다. “어머니를 가지고 씨발 년이라고, 음? 아주 안 좋은 욕을 한다거나”라는 식으로 말이다. 상담사의 말이 죄다 고통에 대한 오만과 오인과 오판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 여기에 들어서면 분명해진다.

나는 이 네가지 양상이 다만 작품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배가 침몰한 뒤에 이 나라를 떠도는 말과 글들은 상당부분 위에서 말한 속물적 대응의 네가지 양상에 포섭되고 있다. 우리가 의식적인 차원에서 고통을 애도했다3)고 생각하더라도 고통에 합리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여긴다면, 우리의 애도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고모리는 이제 없다. 더는 그것에 관해 말하는 사람도 없고 그곳의 구덩이에 묻혀 죽은 소년에 관해 말하는 사람도 없다. 오래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대는 앨리시어가 걷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불시에 앨리시어의 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담배를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떨어진 동전을 주우려고 허리를 굽히다가 펼쳤던 우산을 접다가 누군가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다가 연인의 팔에 다정하게 팔을 걸다가 비를 피하려고 차양 아래로 들어섰다가 방금 산 복권 한장을 지갑에 넣다가 이제 막 지나가려는 버스를 향해 뛰다가 앨리시어의 체취를 맡을 것이다.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달라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대가 먹고 잠드는 이 거리에 이제 앨리시어도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할까. (…) 앨리시어도 그의 이야기도, 결국은 다른 모든 것들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말할까.(160면)

 

 

배가 침몰했다는 사실은 희미해질 것이다. 우리는 더이상 그것을 기억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결코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부랑자의 형태로든 혹은 다른 형태로든 외상을 귀환시키는 형태로서, 그것은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앨리시어도 그의 이야기도 결국은 다른 모든 것들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말할까”라는 문장은, 그래서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하더라도 결코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는 집요한 외상의 흔적을 상기시키는 진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외상의 흔적에 의해 우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감”을 드러낼 것이다. 한때는 애도한다고 했으나 결국은. 이것은 감상적인 무력감이 아니라 냉엄한 사실이다. 배가 침몰한 뒤에 많은 이들이 노란 리본을 달고 애도했으나 몇개월이 지난 지금, 배와 관련된 일이 아직도 광장을 점유하고 있다는 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가. 잊으려 해도 존속하는 것들에 대한 불쾌감은 감상적인 전망이 아니라 바로 현실이다.

 

 

4. 방패

 

위의 인용문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여기에서 우리는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달라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라는 진술을 발견한다. 이 부분에는 불쾌하다고 생각할 만한 측면이 있다. 이 문장은 다름 아닌 고통의 폭력적인 전염성에 대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고통은 어떠한 일상의 언어들을 통해서도 희석될 수 없는 집요한 실재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그것은 끝나지 않는다고 앞에 적었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이 고통을 있는 그대로 승인할 수 없다는 사실에, 다시 말해 고통 그 자체에 우리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스스로 고통이 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고통이 되려 한다면 고통은 우리를 폭력적으로 지배하고 말 것이다.

안타깝게도 고통, 즉 실재와의 동일시는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다. 고통에 휩싸인 입장에서 세계는 분명 거짓의 형상을 갖고 있을 테지만,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 역시도 고통에 비한다면 일상적 언어는 거짓이라고 생각하게 될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재’를 표현하는 언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어떤 철학자들은 실재와의 동일시를 가능한 것으로 상정하는 행위를 ‘실재에의 열망’이라고 표현했으며, 이것이 ‘테러리즘’이 요하는 스펙터클과도 궤를 같이한다고 설명한다.4) 그렇다면 실재/고통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고통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이것은 오늘날의 좌파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이다. 좌파는 모든 역사적 외상과 꿈, 그리고 참사의 흔적들을 보존해야 한다. “역사의 종말” 같은, 지배이데올로기가 지워버리려고 애쓰는 흔적들 말이다. 좌파는 좌파가 존재하는 한, 이 외상들은 결코 지워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살아 있는 유물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과거에 대한 향수 어린 도취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현재와의 거리, 새로움의 징후를 발견하기 위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5)(강조는 인용자)

 

지젝은 좌파 스스로가 외상의 국면들을 증명하는 유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기저에 놓인 생각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묘사한 ‘표현’에는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 “유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실재에의 열망을 비판하는 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외상의 국면들을 증명하는 유물—주체는 결국 그 외상을 ‘실제로 겪었는지의 여부’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칫하면 고통에 연대하려는 모든 선의의 시도들을 ‘위선’으로 낙인찍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지젝이 이런 처참한 상황을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지젝의 말이 이런 식으로도 읽히는 이유는 “유물”이라는 지젝의 비유가 ‘외상’ 그 자체에 주체성을 부여하는 데 그치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외상, 즉 고통은 결코 주체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되면 고통은 특권화되어 자기 자신과 다른 종류의 것들을 배타적으로 포섭할 것이다. 즉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고통의 아래에 두되, 그것들이 오직 고통만의 편을 들게끔 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결국 고통을 지켜주기는커녕 아주 극단적인 방식으로 없애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 고통이라는 말에 더이상 ‘복수(復)’라는 말이 따라붙지 않게 해야 함은 이 때문이다. 좀 상투적인 이야기이지만 복수는 아무것도 바로잡을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복수는 고통이 다른 고통으로 향하게 하는, 고통의 이동 수단이다.

 

내일은 어제와 같지만 어제와는 다를 것이다. 세계의 귀퉁이가 약간 뒤집혔고 점차로 더 뒤집힐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제 그것을 안다.(149면)

 

 

앨리시어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복수하려고 마음먹었을 때쯤 나타나는 문장이다. 결국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앨리시어나 어머니나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는 달라지지만, 이 문장은 위험하다. 세계를 뒤집는다는 것. 고통의 차원에서는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게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복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위의 문장이 묘하게 ‘얌, 네꼬, 갤럭시의 이야기’(55~63면)와도 겹친다는 점 역시도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한다. 고통에 얽힌 각성이 창()이 될 때, 그것은 파국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고통에게 창을 쥐어주면, “불쾌함”을 사랑하는 고통은 결국 세계 자체를 우리가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따라서 고통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도 않고, 그것이 아주 극단적인 폭력의 양상을 띠게 방조하지도 않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자신이 영원한 고통의 방패가 되는 일이다. 아무도 그 고통을 ‘곧 잊혀질’ 무엇인가로 여기지 못하게 고통을 외부의 온갖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고, 반대로 그 고통이 우리 모두를 해하지는 못하게 내적으로 막으면서 방패의 크기를 점점 부풀려 세계의 모든 곳에 죽음이 있음을 알려야 한다. 냉소도, 위선도 없이 말이다. 그리하여 고통과 참사의 자리를 어떤 특권적 기의도 담기지 않은 텅 빈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오직 새로운 연대만이 자리하는 공간으로.

이것은 단순히 ‘너무 폭력적이어서는 안된다’는 온건한 생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오히려 가장 급진적인 ‘신적 폭력’(벤야민)이 가질 모습을 상상해보는 일에 속한다. 신적 폭력은, 아마 창이 아닌 방패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감히 전망한다.6)

 

 

5. 맨발

 

얼마 전 서촌에 있는 한 갤러리에 다녀왔다. 배에서 죽은 사람의 전시회였다. 그가 한 것들과, 하려 하였으나 하지 못한 것들, 그리고 하지 못했으나 누군가가 대신해준 것들이 조그마한 방에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숙연해졌고 안절부절못했다. 손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방 안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뒤 나가려고 할 때 나는 어떤 발을 보았다. 전시공간 뒤편의 작고 어두운 공간에 누군가 맨발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사위가 어두워서 발의 주인을 보지는 못했으나 맨발의 모습이 많이 지친 듯 보였다. 그 발은 이 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고통에 연대하고, 그것을 지켜준다는 것은 자기 얼굴을 버리는 일과도 궤를 같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 맨발처럼 말이다. 만약 누군가가 고통의 앞에서 문학을 통해 그 고통을 ‘위로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 말을 믿지 않겠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제 얼굴을 가지고서, 제가 마치 무엇을 베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모든 말들을 나는 믿을 수 없다. 그것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문학이 더이상 도덕적인 가치를 설파하지 못한다는 “근대문학의 종언” 이후, 우리가 새로이 “윤리”를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재차 강조하건대, 문학은 제 자신의 주체적 역량을 가지고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겠다. 문학은 언제나 참사와 고통, 부조화의 순간과 함께한다. 그것들을 수호하는 방패로서. 다만 그것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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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문학동네 2013, 41~43면. 이하 이 작품을 인용할 때는 면수만 표기한다.

2) 물론 이러한 사고방식은 앞에서 말한 ‘고통 그 자체의 주체성’과 ‘거기에 사로잡힌 인간’이라는 생각과도 만나는 지점이 있지만 그 인식론적 기반은 전혀 다르다. 고통에 대한 속물적인 반응이 합리적 중재로 이어지는 반면, 앞서 말한 고통의 주체성은 인간의 일상과 고통의 통약 불가능한 차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여기서 과거시제는 중요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고통에 대해 애도‘했다’는 말은 애도가 이미 완료되었음을 전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글의 관점은 ‘애도’가 결코 완료될 수 없음을 내포한다.

4) 슬라보예 지젝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박정수 옮김, 인간사랑 2004, 93~99면; 알랭 바디우 『윤리학』, 이종영 옮김, 동문선 2001, 88~95면 참조.

5) 지젝, 앞의 책 513~14면.

6) 좀 불경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째서 창을 든 시위대보다 방패를 든 경찰이 늘 강한 것일까? 한번 생각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그래서 다소 모호한 비유적 표현을 들어 제안하겠다. 앞으로의 투쟁은 스크럼을 짜서 뒤돌아보는 방식이 돼야 한다. 스크럼을 짜서 경찰의 저지선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공격해 나아가던 투쟁 방식에서 벗어나서 경찰을 향해 우리의 뒤통수를 보여야 한다. 그때 우리의 눈과 손은 고통의 텅 빈 자리를 향해 뻗어야 할 것이다.

 

 

 

평론 | 심사평

 

총 투고작 11편을 통독하고 1차로 4편을 골라냈다.

김경주의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꼼꼼히 읽은 「불가능한 꿈을 꾸다」는 단순한 작품론이 아니다. 세월호사건이 한국사회에 던진 충격을 집합적 단계 이후, 개인이라는 심층 차원에서 다시 성찰한 이 글은 화두가 살아 있다. 그런데 정작 본론은 성글다. 우선 2006년에 출간된 김경주의 첫 시집을 왜 지금 세월호와 연관하여 문제삼는지가 분명하질 않고 해석들도 맞춤하지 않은 데가 더러더러 보이기 때문이다.

최제훈의 근작 장편 『나비잠』(2013)을 중심으로 그의 소설세계 전반을 미장아빔(mise en abyme)이라는 열쇠말로 분석한 「미장아빔의 서사」는 우선 일관된 탐구력이 돋보인다. 그런데 좀 즉물적이다. 왜 지금 최제훈의 소설이 문제인지를 드는 서론다운 서론이 부재한데다가, 최제훈 안에만 갇혀 있다. 인간세상은 상대적이어서 다루는 대상의 앞과 뒤 그리고 옆을 살펴야 그 특성이 더 잘 드러난다는 점에 유의했으면 싶다.

박솔뫼의 첫 단편집 『그럼 무얼 부르지』(2014)와 김사과의 장편 『천국에서』(2013)를 묶어 분석한 「이것이 이야기다」는 양극화의 덫에 치인 한국의 20대에 초점을 둔다. 화두를 꺼내 걸맞게 문제를 설정하고 다룰 대상들을 고르는 서론이 그럴듯하다. 그런데 분석의 과정을 드러낸 본론이나 그 결과를 도출한 결론은 기시감이다. 문제나 방법이나 대상이나, 어느 대목인가에는 더 새로운 점이 눈에 띄어야 할 터이다.

「고통을 지키는 방패」 역시 세월호로부터 부풀어오른 글이다. 이 사태를 우려하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전망한 글과 말 들이 사태(沙汰)인지라 좀체 지나칠 법한데 이 글은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남의 기쁨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남의 슬픔에 진심으로 슬퍼하기만큼 쉽고도 어려운 일이 없거니와, 이 글은 성찰적이다. 외국 이론들을 조자룡 헌 창 쓰듯 휘두르는 요즘 평론들과 달리 수행(修行)하듯 그 고통의 행로를 따라가면서 그 사이에 흩어지는 말들을 겨우겨우 수습하는 모양새가 미쁘다. 다만 대상 작품인 황정은의 장편 『야만적인 엘리스씨』(2014)가 성찰의 먹이로만 드러난 점이 걸린다. 문학비평이란 어디까지나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란 점을 망각해서는 아니된다.

4편을 다시 읽으며, 화두와 자세 그리고 안정된 문장력 등이 돋보이는 「고통을 지키는 방패」를 당선작으로 삼았다. 축하한다. 대성하기 바란다. 

최원식

 

 

 

평론 | 당선소감

 

당선소감에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잘은 모르겠다. 다만 이 글을 쓰고, 다시 읽고, 고치고, 보내고 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나와 나의 글이 겪었던 이런저런 갈등과 모순, 무력의 깊이가 이 기쁜 소식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기뻐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나는 비평과 글쓰기를 위해 지난 몇년간 굉장히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 노력의 끝에서 나는 글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으리라는 사실에 직면하는 일이 잦았고, 글은 결국 세계와의 투쟁 속에서 늘 패배하고야 마는 것은 아니냐는 절박한 물음에 시달렸다. 아마 비평가로서의 내 자격은 책상 앞에 붙어 있던 시간들보다는 그 시달림의 시간들 속에 있을 것이다. 나의 자격이 오직 글쓰기에 관한 시달림 속에 있다는 이 사실을, 잊지 않겠다.

나는 나의 수상이 단순히 영광스럽기만 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기쁘고 자랑스럽지만 여기엔 어떤 막중한 책임감이나 사명감이 덧붙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을 나의 영광으로서가 아니라 사명으로서 받겠다. 나는 잘할 수 있을 것이며 잘해야만 할 것이다. 반드시 좋은 글을 쓰겠다.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지금부터 쓸 것은 이제까지의 내 삶을 지탱해주신 소중한 선생님과 벗 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인사이자, 애정과 응원의 글이다. 우선 이찬 선생님께. 선생님께서는 문학비평을 해보라고 권해주신 스승님이시다. 선생님의 권유 덕택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함돈균 선생님께서는 비평가가 가질 수 있는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고민들에 대한 실마리를 던져주셨다. 나는 그 말들이 나의 실천과 잇닿을 수 있게 노력했다. 마찬가지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은혜를 입은 스승님들이 적지 않다. 모두 언급할 수는 없지만 감사드린다.

그리고 나의 여자친구인 김빛나에게. 빛나 덕에 세상에 빛과 사랑이 있음을 진실로 믿을 수 있었다. 늘 고맙고 사랑한다. 그리고 빛나 역시 곧 원하는 일에서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올겨울에는 같이 열심히 공부하자.

다음으론 나의 절친한 벗들인 안혜민, 박서현, 김현아에게. 너희는 언제나 나의 절친한 벗이었다. 너희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쓰고 싶은 말이 한아름이나, 지면의 한계가 있으니 대단히 고맙다는 말만을 남긴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절친했던 장희영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내게 있어서 너는 늘 훌륭한 선생님이자, 동료, 그리고 좋은 학자이다. 연구실 생활이 고되겠지만 힘냈으면 좋겠다. 유종훈과 최원준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고등학생 때는 내 성질이 대단히 괴팍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럼에도 우리가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너희의 밝고 유쾌한 마음씨와 따뜻함 덕분이리라고 믿는다.

정화연 선배와 이수빈, 그리고 손진원 선배에게도 고마움의 인사를 전한다. 우리는 서로 처한 상황과 나아갈 길이 각기 다르지만 당신들과의 우정 속에서 나는 늘 예술에 대해 새로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든 이 세 사람은 나의 예술적 동지로서 남을 것이다.

다음으론 오귀나 선배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선배는 우리 모두가 기댈 수 있을 만큼 넓은 마음씨와 따뜻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었다. 선배가 앞으로도 아름다운 길을 가게 되리라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감사의 말을 전한다. 또한 이따금씩 오귀나 선배와 함께 나를 만나주었던 고송희 선배나 박보영 선배, 장석환 선배 등의 몇몇 선배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더불어 전한다.

다음으로는 김위정 선배, 황수연 선배, 유도영 누나와 최하영, 나송현, 그리고 박수엽에게. 당신들은 내 소중한 정치적/인간적 동료였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과 그 속에서 던져댔던 고민과 물음 들이 그 자체로서 우리 삶에 계속 남아 있기를 바라며, 고마움을 전한다. 다만 김위정 선배는 술과 담배를 좀 줄였으면 한다. 건강이 염려된다.

이종식 형에게도. 형은 좋은 역사학도로서, 그 존재만으로도 내가 이따금씩 빠지곤 했던 공허한 형이상학적 물음들 속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었고, 역사적 현장에의 참여를 독려해주기도 했다. 늘 많이 배우고 있다. 고맙다.

오주희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가끔씩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조승아 누나에게도. 누나는 명민한 지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한때의 나에게 큰 존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못 믿을까봐 하는 말인데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고맙다.

박주현 선배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선배는 늘 든든한 사람이었고, 적지 않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늘 나를 존중해주셨다. 생활인으로서의 관성과 글쓰기의 욕망 사이에서 선배가 반드시 옳은 길을 찾으리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론 나의 가족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엄마인 신선화에게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늘 엄마의 조력자로서 남겠다는 사실을 약속한다. 동생인 염창규는 앞으로도 착한 사람으로 살되 좀더 강인해졌으면 한다는 말을 남긴다.

염동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