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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리얼리티 탐구의 문학적 형식
분열하는 감각 너머의 리얼리티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평론 「텅 빈 자리의 주위에서」 「21세기 오감도(烏瞰圖), 21세기 소년 탄생기(誕生記)」 등이 있음. renton13@daum.net
1. 시라는 형식과 리얼리티
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일은 왜 쉽지 않을까. 시에는 늘 예상보다 복잡한 것이 들어 있고, 그것들은 쉽게 말이 되기를 거부하는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입장에서도 그리고 시를 읽는 입장에서도 시의 저와 같은 성향은 난감한 상황을 마주하게 한다. 우리는 종종 독자가 시인에게 작품을 개념적이고 설명적인 언어로 풀어 말해주기를 요구하는 상황을 목격하는데, 이러한 요구에 딱 떨어지게 응답해주는 시인의 언어를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 설명보다 침묵이 시의 고유성을 지키는 방법임을 직관적으로 아는 시인에게서 자세한 설명을 듣기란 어렵다. 더욱이 시에는 분명 시인이 쓰는 몫 이상의 것이 자리하기도 한다. 시인의 의도까지도 용해하는 거대한 용광로가 바로 시이기 때문이다.
시를 가지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현상의 바탕에는 시의 언어가 일상의 언어와 달리 지시적 기능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시는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데 무심하다. 현대시의 형성과정 자체가 상징적 언어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걸었다는 점, 또 현대로 올수록 시의 언어가 언어의 매개성을 반성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의 언어가 두터워지고 복잡해진 이유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의 활동은 여전히 쉽게 시 외부의 사실과 시 내부의 언어를 등치시키려고 애쓴다. 시를 역사주의적 방식으로 바라보며 그것을 구체적 사료의 하나로 취급하는 방식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를 여타의 문건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자료로 취급할 수 있는 독특한 방법이 발명되지 않는 한, 그러한 방식은 시 외부의 담론들에 시를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그렇다면 시 내부에는 무엇이 있고 그것을 시의 외부와 어떻게 연관 지을 수 있을 것인가. 너무 큰 질문 같지만 그동안 축적된 시에 관한 연구들은 이에 대한 답을 이미 준비하고 있다. 시는 비유를 통해 경험적 세계와 연관하는 사실들을 압축하거나 전이된 형태로 담고 있으며, 율동하는 언어1)들을 통해 현실에서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관계성과 그것의 유동성을 표출한다. 시는 경화된 언어들이 압축과 전이, 반복과 변주의 과정을 거쳐 현실 속에 잠재된 공속(共屬)되고 연루된 관계들의 관계항들을 새롭게 발견하도록 이끈다. 비유든 율동이든 시의 이같은 형식적 특질들은 단지 시의 내용을 세련되게 담아내는 방법의 차원이라기보다 현실세계의 사실과 관계들을 변형하고 변화시키는 시의 내재적 힘인 셈이다. 달리 말하면 이 둘의 양상을 살피는 일이 바로 현실과 연관하는 시의 리얼리티를 발견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두권의 시집2)을 읽으려 한다. 두 시집의 저자들은 일찍부터 형식상의 독특함으로 주목받아왔다. 김수영문학상을 받으며 첫 시집을 낸 황인찬(黃仁燦) 시의 미적 형식은 타자를 수용하는 윤리적 방법으로 자주 평가받았다. 또한 김정환(金正煥)의 시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장르와 내용을 포괄하는 독특한 시적 형식으로 알려졌다. 두 시인의 최근 시집에서 이들이 어떤 형식을 통해 어떤 전망 내지 리얼리티에 도달했는가를 살펴보자.
2. 비유할 수 없는 생, “희지는 혼자 산다”
『희지의 세계』는 메아리처럼 울리는 누군가의 말에 관한 시집이다. 거의 모든 시편에서 ‘~말한다’라는 표현으로 누군가의 말을 간접인용할 뿐 아니라, 큰따옴표 안에 직접 인용된 구절도 자주 발견된다. 그런데 이 인용이 좀 특이하다. 인용하는 자가 자신의 의도에 맞게 인용구절을 끌어다 쓰는 것이 보통의 인용방식이라면 황인찬 시에서는 끌어다 쓰는 자가 그 말의 울림에 끌려가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힘이 센 것은 인용한 자가 아니라 인용한 구절이고, 그 구절은 작품 속에서 처음 발화된 맥락의 내용을 반복한다기보다 의미를 확정하기 힘든 상황을 빚어 시 전체를 이상한 의구심으로 둘러싸이게 만든다. 아마도 이와 같은 느낌은 인용한 말들이 시 속에 용해되어 있기보다는 독립성을 유지한 상태로 남아서 발생하는 듯하다.3) 『구관조 씻기기』(민음사 2012)에서 주목받던 사물 또는 타자의 고유성을 보존하는 방식이 두번째 시집에 와서는 타인의 말에까지 확장된 것일까.
“미안, 늦을 것 같아 어디 따뜻한 데 들어가 있어”(「새로운 경험」)
“이곳은 누가 선이라도 그어 놓은 것처럼/캄캄한 것과 환한 것이 나뉘어 있구나”(「서정」)
“상황이 좀 나아지면 깨워 주세요”(「비의 나라」)
“마음에 병이 나서 잎이 나서 나무가 되었습니다”(「번성」)
이외에도 인용 가능한 구절은 많다. 그리고 그 말들의 성향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한쪽에는 황폐한 세계를 환기하는 말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다정하고 따뜻한 시선의 말들이 자리한다. 이 말들이 시를 촉발했던 순간의 비밀과 관련이 있으리라 추정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아마도 시인은 저 말들을 뚜렷한 의미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어떤 충격처럼 받아들였을 것이고, 그것에 포획되었기 때문에 발화된 맥락에서 저 말들을 도려내 시로 올렸을 것이다.4) 말들을 맥락에서 도려내고 재배치하는 과정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말들을 일순간 특별한 시적 느낌을 자아내는 상황으로 이끈다. 황폐한 세계와 따뜻한 시선을 환기하는 파편적 구절들에 남다른 무게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독특한 시적 발화는 비유라는 시의 동적 체계에 무관심한 태도와도 무관하지 않다. 비유는 보통 두개 이상의 사실들이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발생한다.5) 그것은 상이하거나 이질적인 것들을 포개어 하나의 맥락으로 통합하는 정신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황인찬의 인용법은 이러한 통합을 거부하고 분리를 택하는 방식에 가깝다. 큰따옴표 속에 밀폐된 사실은 그것대로 남고, 그것을 둘러싼 언어들은 또 그것대로 남는다. 둘 사이에 분위기를 주고받는 차원의 교류는 있지만, 새로운 문맥을 만들어내는 생산적 접맥의 양상은 흐릿하다.
황인찬 시의 형식이 지닌 분리의 긴장감은 자주 타자의 고유성을 환기하는 윤리적 태도로 해석되었다. 동일성의 시학을 문제화하며 차이의 가치를 향해 질주하던 2000년대 이후 한국시단의 지형도를 고려하면 그의 자리는 저 지형도의 한 극단에 위치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 극단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변화와는 또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 이를 황인찬 시의 구체적인 모습과 관련해서 말한다면, 분리와 반(反)통합성에 집중하는 말의 형식과 그 형식이 환기하는 황폐함의 세계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라는 물음으로 바꿀 수도 있겠다. 시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헬조선이니 희망 없는 세대니 하는 말이 저 황폐함의 세계를 보증해줄 것만 같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시의 외부 담론을 시의 언어와 등치시키는 방식과 큰 차이가 없게 느껴진다.
우리 삶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서서히 고조되거나 혹은 가라앉으며
우리에게 약간의 침울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다 갑작스레 무엇인가의 파열음이 들리게 되고, 그러면 깜짝 놀라게 되고, 둘러보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더라는 식의
이야기가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 이야기는 빈 공간을 구성하고 싶어하고,
두 사람이 멍청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채로
이 이야기는 순진하게 시작된다
거실에서, 항상 거실에서
—「실내악이 죽는 꿈」 부분
이 실내악 혹은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어떤 부류의 작품에 대한 비평문처럼 읽힌다. ‘가라앉힘’, “약간의 침울함” 그리고 “파열음”, 거기에 따라붙는 ‘변화 없음’은 황인찬의 시가 자주 전개하는 시상의 흐름과 무관하다고 보기 힘들다. 여기에 더해 이야기 속의 “빈 공간”을 구사하고 이야기에 “순진”성을 가미하는 방식 또한 시인이 자신의 창작기술을 자조적으로 읊조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실내악이 연주자가 자신의 음악에 집중하기 위한 형식을 모색하는 와중에 탄생했다는 설까지 고려하면, 이 시가 시인이 자기 작품을 들여다보는 시도라는 말이 좀더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렇다면 이 자기비평적 언사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실내악이 죽는 꿈’이라는 제목에는 이 시간을 얼른 통과하고 싶다는 욕망 같은 것이 투영돼 있다. 이를 자신의 말이 다른 시간 내지 다른 역사와 만나기를 바라는 욕망이라고 말하면 과할까. 실제로 이 시집에는 죽음의 이미지와 죄책감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와 감정의 기원은 늘 비밀스럽게 가려져 있다. 아니, 가려져 있다기보다는 살짝 뒤집혀 있다는 말이 정확할 수도 있겠다. 프로이트(S. Freud)가 우울증을 설명한 언어처럼, 황인찬 시에서의 죄책감은 바뀌지 않는 세계에 대한 분노를 내사한 형태의 감정으로 읽힌다. 다시 말해 황인찬 시에서 ‘잘못했어요’라는 말은 ‘잘못되었어요’로 바꿔 읽어볼 여지가 풍부하다. 또한 자신의 죽음을 이미지화하는 언어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황인찬 시의 형식 속에 잠재하는 분노와 갈망은 어쩌면 그의 시가 환기하는 황폐한 세계의 분위기보다 더 리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시는 그 리얼리티를 새로운 시언어의 관계망에 펼쳐내기보다 묻어두고 있는 형국에 가깝다. 왜일까. 김남주(金南柱) 시인 20주기에 황인찬은 김남주 시 「근황」을 읽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그의 후기작에 속하는 이 시에서 그는 “어둡고 괴로운 시절”보다 “춥고 배고픈 시절”보다 더욱 나쁜 시절이 찾아왔노라 말하고 있다. 마지막 두 구절을 계속 곱씹게 된다. 대낮처럼 발가벗은 밤과 배가 터지도록 부어오른 거리, 그가 진단한 뒤로 20여년이 흘렀으나 여전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바로 거기다. 육박하는 고통의 시절이 아니라, 풍요로운 불가능의 시절, 그래서 더욱 끔찍한 시절, 그의 ‘근황’은 근황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전망이 된 것이다.6)
황인찬은 ‘그’의 ‘근황’이 우리의 ‘전망’이 되었다고 적었다. 그의 근황이 우리의 ‘근황’이 아니라 ‘전망’이라고 적은 데는 아무래도 전망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개입하고 있을 것이다. 저 표현에 개입된 생각은 『희지의 세계』에도 그대로 묻어난다. 거기에는 전망을 담을 만한 시간적 지평이 펼쳐져 있지 않다. 간혹 유년의 시간대가 시의 자리로 불려올 때가 있지만, 그 시간대는 세계가 잘못된 것임을 파악하고 경험하는 시작점의 이야기를 소환할 뿐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시 속의 “나”는 “세계”와 함께 늙어갈 뿐이다(「은유」). 하지만 간혹 예기치 않던 자리에서 충격처럼 다정하고도 따듯한 말을 듣는 순간들이 있기는 하다. 이처럼 간혹 들려오는 말들 속에 희미한 전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것을 가지고 전망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쉽게 전망 불가능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정직하지 못한 태도일 것이다.
황인찬의 시에서 화자가 어떤 말들을 특별하게 듣고 그것이 인용의 형식으로 시에 들어올 때, 이 특별한 듣기 능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누구의 소유로 한정할 수 없는 결과물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소통의 결여를 떠올리게 한다. 말을 듣는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말을 하는 차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말이 접속하고 있는 세계의 큰 그림 같은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위축된 정신은 소환하거나 접속시킬 큰 그림의 서사를 가지지 못한 채 혼자 고립된 상황에 빠지거나, 새로운 형식의 사회적 행위를 수행하지 못한다. 단지 증발할 것 같은 일상의 삶 속에서 최소한의 사적 관계를 맺고 사랑을 나누고 대기 중에 흩어지기 쉬운 파편적 대화를 나눌 뿐이다. 표제작인 「희지의 세계」가 그리고 있는 세계에 그런 징후가 없다고 말하기 힘들다. 『희지의 세계』 속에서 “희지는 혼자 산다”(「희지의 세계」). 아마도 저 말의 속내에는 거꾸로 된 심정이 투영되어 있을 것이다. 너무 말끔해서 불안해 보이는 저 표현 속에는 고독의 평화가 아니라 여럿의 혼돈이 잠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잠재의 형태가 아니라 표출의 형태로 다양한 사건들과 만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이 접속할 사건도, 큰 그림의 서사도 시인이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시인은 그것을 사회의 창조적 전개과정인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이때의 역사는 자신의 경험으로 환원할 수 없는 부분까지 포함할 것이다. 어쩌면 그 부분을 짊어지는 몫은 전적으로 시인에게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3. 율동하는 언어, “희망의 입을 어떻게 여는가”
김정환의 이번 시집을 읽는 일은 수월하지 않다.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그중에서도 김정환의 시가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언제나처럼 적극적으로 말하려는 태도를 일관한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구체적 정황을 묘사하는 도중 갑자기 추상적 진술이 난입하는 일도 잦다. 보통의 시에서라면 추상적 진술이 시를 관념의 차원으로 주저앉힐 가능성이 크지만, 김정환의 시에서는 추상이 시에 사상적 탄력성을 더하는 식으로 작동한다. 더욱이 그 사상적 진술은 독특한 가락을 동반한 말의 형식으로 시에 자리한다. 가령 시상의 우연적 계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반복되는 음향을 사용하여 앞서 진행된 시상의 경로를 비틀고 꼼으로써 새롭게 시상의 두터운 경로를 만드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점7)이 그렇다.
‘양행걸침’도 그렇다. 양행걸침이 김정환만 쓰는 행갈이 방식은 아니지만, 김정환만큼 날렵하게 사용하는 시인도 드물다. 그의 양행걸침은 문법의 환상을 비틀어 새로운 현실감을 발생시키는 데 매우 적절히 활용된다. 문장성분들은 자기가 놓인 자리에 귀속된 부분적 역할과 의미에 한정되지 않고, 어긋나며 이어지는 행갈이의 진행 속에서 부분이 전체를 뒤엎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이것은 김정환의 시가 자신의 의도성을 적절히 드러내기 위한 스타일이라기보다 그에게 특별한 시적 사고를 강제하는 사상적 형식에 가깝다. 한 예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 역시 이와 같은 양행걸침의 형식처럼 사고되고 움직인다. 그는 마치 어긋나면서 이어지는 것들만이 진실이라는 듯이 집요하고 난폭하게 어긋남에 몰두한다.
자세히 보면 끊어진 것을 잇는 것은 끊어짐이고
더 자세히 봐야 그것이 당연하다. 생애 속으로
달아나는 생애와 생애 밖으로 응집하는 생애
사이 혹은 표리.
—「보유(補遺): 발굴 바벨탑 토대」 부분
“생애”라는 시간적 분절 또한 어긋나면서 이어진다. 시인은 한 생애의 안과 밖을 분리하지 않고 공속된 것으로 본다. 김정환 시에서 특별한 시간대로 함몰하는 분리를 관찰하기란 쉽지 않다. 감성을 자극하는 서정시가 보통 분리를 통해 마지막이라는 시간대를 선호하는 점을 고려하면 김정환의 시가 분리 너머 통합으로의 지난한 과정에 주목하는 면은 확실히 독특하다. 분리를 극대화한 파국의 순간은 감정의 증폭을 이룰 만한 시적 도약대로 쉽게 기능하지만 김정환은 저 도약대를 활용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 시인의 발언들을 살펴보면 이는 꽤 오래전부터 지속된 일이다. 20여년 전 시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가 있다.
누구나, 자기가 사는 시대를 낭떠러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누구나, 자기가 벼랑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세상을 변혁하려 한다면 더욱, 스스로 벼랑이 되어야 한다.8)
김정환에게 ‘끝’이라는 생각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끝’이 항상 ‘끝난 이후’를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스스로 벼랑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는 ‘끝’이라는 생각이 빠뜨린 ‘끝의 이후’를 감당해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고 보면 「ps.」로 시작해서 「보유(補遺): 발굴 바벨탑 토대」로 끝나는 이번 시집이 일종의 남은 혹은 빠진 말들의 집합체가 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 뜻밖에서 다른 호의가 시작될밖에 없다는 것을 죽음이/오랜 세월 걸쳐 형언하고 있다”(「지명의 호의(好意)」)고 말하거나 “모든 출현이 견고한 놀람이고 마감 직전 출현이고/마감의 출현이다”(「액체 황홀」)라고 읊조린다. 아마도 시인은 ‘끝’이라는 말이 가장 큰 관념이고 가상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김정환이 보기에 대상과 사실에 대한 언어는 늘 형성과정 속의 특정 계기에 해당할 뿐이다.
중도의 Sozialformation
은 형식은 물론 형상화의
‘화’하고도 또 다르지.
남은 것들이 남은 자체
형벌과도 무관하다.
—「각도」 부분
‘미’완의 형식, 생성 중의 ‘변’화. 시인이 보기에 사회의 구성 역시 미완적이고 생성 중이다. 그 과정에서 누락되거나 소외된 것들은 당연히 형벌도 아니고 화(禍)도 아니다. 어찌 보면 그것들은 반대로 행운이고 선물이다.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망외(望外)의 소득”(「고립의 역정」)이 거기 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은 것들은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재배열하는 순간에 재생한다. 그래서 그는 자주 시간의 지평을 펼쳐놓는 시적 전략을 택한다. 평평해진 일상을 늘어놓는 대신에, 들쑥날쑥한 운동이자 형태인 기억을 시 속에 부려놓는다. 그리고 많은 시편들에서 ‘~이전’과 ‘~이후’ 식의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시인은 현재의 상황이, 전후(前後)와 함께 협연하도록 유도한다. 왜냐하면 시간적 지평을 개방하지 못할 때 시는 고립을 말하게 되고, 고독을 읊조리게 되며, ‘음풍농월’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희망의 입을 여는 일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다. 김정환은 이 생각들을 이렇게 썼다.
고립이 고립의 숫자를 센다.
둘에서 여덟까지다. 그 이상은 고립 아니다. 그 이상을
세는 것은 더더욱. 고독이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음풍농월은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물오른 생의 자칫, 표절 말이다.
희망의 입을 어떻게 여는가.
—「고립의 역정」 부분
시가 희망의 입과 관련한다면 그것이 주체에게 시간-공간적 지평을 열어젖히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고 그 과정에서 세계의 변화와 관련한 새로운 관계들이 발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시가 그런 것은 아니다. 주체가 개방을 부인하거나 거절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기대가 심하게 어긋나 과거와 미래의 협연이 불가능해진 상황처럼 느껴질 때 시의 시간적 지평은 개시되기보다 사라진다. 고립감과 고독감은 바로 그 순간에 고양된다. 벌어진 일들과 벌어질 일들을 질료 삼아 새로운 전망으로 나아가기보다 벌어진 일들을 그대로 베껴쓰는 일을 문학으로 착각하는 순간도 바로 그때다.
시간의 협연과 함께 공간적 지평을 열기 위해 시인이 중시하는 것은 또 있다. 김정환은 그것을 “지명”이라고 부른다. 시집의 ‘서(序)’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장소 자신의 장소 기억은, 미래일까.” “장소 자신의 장소 기억”이라는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장소와 관련한 개별적 주체의 기억이 아니라 개별적 주체들의 기억이 들끓는 공동의 장소로서의 기억을 의미하는 걸까.
생이 각자 안식에 드는 식으로 지명의 투명한
두께를 이루고 지명이 생의 가명과 재혼을
지우는 식으로 생을 받아들인다. 지명이 저 혼자
지명의 안식에 들지 않는다. 그 속의 모든 생이
친절한 안주인처럼 깔아준 이부자리와 함께 든다.
그렇다. 죽고 보니 생이 대양을 넘나들었을망정
결국 약간의 수줍음만 남았던 거다. 조촐하게
각자가 주인공인 출판기념회였던 거다, 조촐해야
하거나 조촐할밖에 없어서 아니라 조촐해서
가까스로 모임에 달했던. 사라졌다, 지금은……
—「지명의 안식(安息)」 부분
지명은 당연히 지리적 명명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이라는 시집 제목이 암시하듯 이 공간은 뚜렷이 확정된 영역이 아니라 개별적 주체들의 몸과 관계 맺는 과정 속에서 확보되는 공간이다. 또한 그곳은 복수(複數)의 생이 모여드는 장소이고, 생들이 다양한 관계를 맺고 또 그 관계를 갱신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 과정 중에 작은 역사들이 누적되고, 소소한 꿈들이 쌓여가기도 한다. 생이 아무리 거창했다 한들 지명에 누적된 것에 비하면 ‘조촐한 출판기념회’로 비유될 수 있다. 그렇다고 생이 하찮아질 리는 만무하며 지명이 초월적인 공간이 되는 것도 아니다. 지명은 조촐한 생들이 있기에 가능한 장소의 이름이며, 그것들이 없으면 사라진다. 우리는 이 지명의 또다른 모습을 언젠가 김정환이 인용했던 한 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 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조태일 「國土序詩」9) 전문
고지도를 통해 독도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독도에 관한 현재적이고도 미래적인 전망을 확보했을 때 그 장소는 비로소 우리의 영토가 된다는 논지의 산문10)에서 김정환은 저 시를 인용했다. 조태일(趙泰一)의 시에서 ‘국토’는 특정 정치체제가 위로부터 부여한 영역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관계맺은 땅이다. ‘국토’라는 ‘지명’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뜨겁게 살아가는 동안은 물론이고 우리의 죽음이 결국 그곳에 묻히는 순간까지를 통틀어 형성되는 공간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그곳에서 생을 보냈다고 해서 ‘국토’라는 ‘지명’이 내 몸에 내려앉는 것도 아니다. 지명과 나 사이에 정서적 교류가 얼마나 활기찼는지 또한 중요하다. ‘지명’은 우리의 감정과 그것을 해소할 우리의 가락이 만들어지는 곳이기도 하고 또한 그 지명 안의 무명(無名)적 존재들과 교감하는 과정까지도 필요로 한다.
그러니까 그 장소는 한순간에 도달할 수 없으며, 발바닥이 닳아 새 살이 돋고, 숨결이 다 타올라 새숨결이 열리기까지의 지속적이고도 열도 높은 관계 속에서 가닿게 되는 공간이다. 또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서 온 감각과 교류하며 내 몸에 자연스럽게 내려앉는 공간인 셈이다. 조태일의 ‘국토’는 김정환의 ‘지명’의 다른 이름에 가깝다.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에서 이 땅의 현대사를 시화한 장시 하나가 이를 증명한다.
8
구상의 구상은 중력의 수평……그렇게 생이 치솟으며 생애 속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한국 현대사가 생이고 이야기고 생애고 형상인 모종의 아가리를 한번 더 꿰뚫고 나오는 원색 형상 덩어리 연속의 생의 단속 없는 음표의 비극 없는, 화음의 중산층 없는 가설 습작의 순환도 부활도 우리가 지나온 생인 형상의 직접과 단독으로 있는 이제는 타는 목마름뿐, 아니라 반체제 항쟁 가투와 불길과 이 한몸 죽어서라도 막걸리 소주병 광주 끝나지 않았다 통일 밭 씨 뿌리는 여인 일어서는 풀 마지막 농부 땅버러지 역사의 용광로뿐 아니라 티끌 하나보다 더 가벼운 죽음의 눈꺼풀 들어올려 낯선 눈동자의 낯선 눈동자 낯선 아름다움의 낯선 아름다움, 배웅 연습을 위하여.
—「構想의 具象, 혹은 중력의 수평: 신학철(1944~) 작, <한국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2002, oil on canvas, 130×200㎝, 8pieces/122×200㎝, 8pieces), 좌에서 우로도 읽음.」 부분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장시는 민중미술화가 신학철(申鶴澈)의 그림 「한국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에 영향을 받아 쓴 작품이다. 인용한 부분은 8장으로 나뉜 그림 중에 마지막 여덟번째 장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을 담고 있다. 8장으로 압축된 그림에는 한국현대사가 거쳐온 역사의 표정들이 밀도 높게 그려지는데, 특이한 점은 1~7장까지의 그림이 그 형상을 금방 알아볼 수 있는 반면 시간의 흐름상 마지막인 8번째 그림에는 형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원색 형상 덩어리”가 한국현대사가 산출한 결과물처럼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이라는 ‘지명’ 위의 현대사가 남긴 그 모호한 결과물을 통해 시인은 한국현대사를 재배열하여, ‘지명’에 잠들어 있던 생에 이르도록 치솟아오르는 열기까지 담아 한국현대사를 하나의 율동적인 이야기로 재탄생시킨다. “연속의 생의 단속 없는 음표의 비극 없는, 화음의 중산층 없는 가설 습작의 순환도 부활도 우리가 지나온 생인 형상의 직접과 단독으로 있는 이제는 타는 목마름뿐”이라는 구절은 이 이야기가 연속성이 뚜렷한 선조적(線條的) 서사로 쓰인 게 아니라 율동적 언어로 쓰였음을 드러낸다. 중간에 쉼표가 한번 등장하긴 하지만 연쇄하며 움직이는 이 언어들을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도 불분명하다. 이 난해함 자체가 어쩌면 한국현대사의 형국이 아닐까. 쉼없이 격렬하게 이어져온 사이에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부재, “가설”이나 “습작”이라는 단어가 환기하듯 예비된 시간을 갖추지 못한 채 맞닥뜨려야 했던 어떤 사건들이 긴박한 호흡 속에 실려 있다. 저 구절을 읽으면 구체적으로 어떤 부재이고 어떤 사건인지 지목하지 않더라도 분명하게 우리 몸에 내려앉아 있는 피로와 목마름 같은 것이 전해진다.
시는 한국현대사가 산출한 모호한 형상에서 결핍된 것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의 현대사가 미완의 상태로 품고 있는, 완수해야 할 전망까지도 같이 말한다. “타는 목마름”이라는 구절이 불러오는 민주주의를 위한 갈망과, “끝나지 않았다”라는 표현과 밀착되어 있는 “광주”, 그리고 “통일”까지. 이 시는 그것들을 다시 “낯선 눈동자”로 바라보고 우리와 새롭게 관계 맺어야 할 역사의 이름으로 드러낸다. 율동하는 언어가 우리와 새롭게 마주함으로써 주체성을 조정할 만한 사실들을 들어올리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현대사를 다룬 스케일 큰 미술작품에 기대어 쓴 시이기는 하지만 김정환의 시가 시공간적 지평을 넓혀 사유하는 방식의 시쓰기로부터 멀리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광주’나 ‘통일’이라는 단어를 아무리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몸에 내려앉아 무게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형식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일은 시인이 시를 통해 늘 “세월의 주름을 다시 잡는”(「좋은 여자 후배 시집」) 일을 시도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4. 분열하는 감각과 통합하는 정신
시쓰기를 시작하는 지점에는 확실히 분리의 감각이 자리한다. 기존 체계의 관계와 감각 들을 문제없이 받아들이는 주체라면 시를 발생시킬 여지가 적다. 그렇게 보면 황인찬의 분열하는 감각은 확실히 시의 생산처라는 가능성을 풍부히 내장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희지의 세계』는 고유성과 분열하는 감각에는 특히 예민했지만 이질적인 것들을 통합하는 정신을 다루는 면모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말의 공백을 조형하고 분열지향적 감각을 극대화하는 방법 너머로 나아갈 때 이 시인의 시에 잠재한 폭발적 힘이 분출될 가능성이 열릴 것을 본다. 말의 무게를 예민하게 다룰 줄 아는 황인찬이 도달할 시의 전망은 ‘윤리’나 ‘타자’의 말이 담긴 담론보다 더 너른 곳일 것이다.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에서 느껴지는 힘은 말을 다루는 힘이면서 역사의 무게를 피하지 않고 대면하는 사상의 힘이기도 하다. 김정환의 시는 느낌의 차원을 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늘 적극적으로 말을 하려는 차원까지 나아간다. 말보다 침묵이 우세한 장르인 시에서 적극적으로 말하는 일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말을 거느리고 있는 커다란 사실적 맥락을 필요로 한다. 김정환은 역사 속에서 그 맥락들을 발굴해나가고 있다. 시공간적 지평을 확장함과 동시에 뚜렷하게 만드는 그의 시적 실험이 지향하던 바 또한 역사와 만나기 위한 시도였던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협연을 통해 현재의 주체성을 강인하게 만드는 언어의 율동, 독자인 우리가 그의 새로운 시편들을 늘 기다리게 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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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유와 함께 시의 중요한 형식으로 이야기되는 건 운율이지만, 이 글에서는 운율 대신에 ‘율동하는 언어’라는 표현을 사용하려고 한다. 운율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압운이나 음보 같은 오래된 개념과 설명들이 따라붙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한 개념들이 시의 작은 차원의 움직임과 말의 조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유용하기는 하나, 좀더 큰 차원에서 시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시에는 말의 반복과 문장의 독특한 분절을 통해 현실의 관계를 재발견하고 변형하고 변화시키는 힘이 내재하는데, 이 힘의 형식성을 율동하는 언어라는 표현으로 담고자 한다.
2) 김정환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 문학동네 2016; 황인찬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
3) 『희지의 세계』의 해설을 쓴 장이지 또한 이 면모를 언급한 바 있다. “이번 시집은 ‘생각하다-말하다’가 만들어내는 개인적이고 폐쇄적인 시트 위에 ‘일상’의 이런저런 패턴들을 수놓은 것이 되지 않을까 예측해볼 수 있다.”(장이지 「폐쇄회로의 시니시즘」, 『희지의 세계』 130~31면)
4) 어떤 말들을 맥락으로부터 도려내 다른 세계를 개시하는 방식은 시에서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관습화된 의식의 흐름을 중단하면서 사물의 본질을 이끌어내려는 현상학의 방법을 응용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5) 비유에 대한 이해는 김인환의 설명에 따랐다. “비유들은 보통 둘 이상의 사실들이 관련되는데, 그것들은 대개의 경우에 폭과 깊이, 부피와 운동을 지니고 있는 문맥들이다. 이러한 둘 이상의 문맥들이 서로 연결되고 대립되며, 화합하고 투쟁함으로써 보통의 독자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의 문맥을 형성하는 것이다.”(김인환 「음악과 시」, 『비평의 원리』, 나남 1994, 123면)
6) 황인찬 「모두 예쁜 시대에 나쁘게 쓰기」, 『실천문학』 2014년 봄호 209면. 황인찬이 인용한 「근황」의 부분은 다음과 같다. “차라리 어둡고 괴로운 시절이라면/가시덤불 속에서 깜박깜박 어둠을 좇는 시늉이나 하다가/날이 새면 스러지고 마는 개똥벌레라도 될 것을/차라리 춥고 배고픈 시절이라면/바람 찬 언덕에서 낡은 상수리나무쯤으로 떨다가/나무꾼의 도끼에 찍혀 땔감으로라도 쓰여질 것을//이제 나는 아무짝에도 쓰잘 데 없는 사람이다/밤이 대낮처럼 발가벗은 이 세상에서는/배가 터지도록 부어오른 이 거리에서는”
7)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렇다. “그림은 언제 스스로 그림인 것도 잊고/잊는 모양을 잊는 모양을 잊는 모양도 잊고는/운명에게 운명처럼/직진(直進)을 좌지우지하지?”(「좋은 여자 후배 시집」)
8) 김정환 『순금의 기억』 제10부 ‘세기말의 절벽’ 제사(題詞), 창작과비평사 1996.
9) 『조태일 전집: 시 1』, 창비 2009, 166면.
10) 김정환 「안용복은 이용복이 아니다」, 『문학동네』 2005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