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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장욱 李章旭
1968년 서울 출생. 2005년 문학수첩작가상으로 등단. 소설집 『고백의 제왕』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장편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천국보다 낯선』 등이 있음. oblako@hanmail.net
스텔라를 타는 구남과 여
1
썅.
구남씨가 그렇게 뇌까렸을 때 나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보고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시선을 두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구남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낮게 코를 골다가,
니미,
다시 욕을 했다. 잠꼬대였다. 구남씨는 두어번 더 그런 말을 내뱉다가 새근새근 숨을 내쉬었다. 밤이니까 천장 쪽은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거기 뭐가 있는 것 같았다. 어둠은 늘 이런 식으로 사람을 유혹하지, 재수 없어. 나는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람 마음도 마찬가지인가. 자꾸 캄캄해져서 손을 넣어보게 되잖아. 거기서 뭐가 잡히나.
구남씨의 잠꼬대가 처음은 아니었다. 익숙하다고 해도 좋았다. 일주일에 한두번씩은 구남씨의 잠꼬대 때문에 깨곤 했으니까. 잠꼬대라는 건 구남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나는 별다른 불만이 없다. 잠깐 갸우뚱해지거나 잠을 좀 설치는 것 외에는 문제 될 것도 없었고.
게다가…라고 말하면 이상하지만 구남씨에게는 구남씨의 버릇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버릇이 있다. 나의 버릇으로 말하자면 구남씨처럼 자면서 욕을 한다든가 하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 기묘하다면 기묘하달 수 있는데, 나는 눈을 뜨고 잔다. 그런 걸 버릇이라고 하기에는 좀 뭣하지 않을까. 버릇이라는 건 안 하려고 하면 잠시라도 안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게 안 되는걸.
일단 눈을 감는다. 자려고 한다. 잠이란 건 역시 편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편안하다고 생각하니 정말 편안한 느낌이 든다. 양 한마리도 지나가고 양 두마리도 지나가고 양 세마리도 지나가고… 양들이 오백마리쯤 지나가면… 잠이 든다. 그런데 이상하지. 잠이 들면 스르르,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원래 크기보다도 더 크게, 눈을 부릅뜨게 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눈을 뜬다고 한다. 나야 잠이 들었으니 알 턱이 없지. 어렸을 때부터 그래왔다고 엄마가 그랬으니 그런가 할 뿐이다.
처음에는 나도 믿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더니 엄마는 잠든 나를 캠코더로 찍어서 보여주었다. 이것 봐. 눈을 뜨고 자잖아. 엄마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작은 화면을 가리켰다. 화면 속의 나는 확실히 눈을 뜬 채 잠들어 있었다. 눈이 완전히 감기지 않는다거나 실눈을 뜬 정도가 아니었다. 내 눈이 이렇게 클 리가 하고 깜짝 놀랄 만큼이었다. 그것도 캠코더 쪽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초점이 애매했기 때문에 그걸 ‘바라본다’고 해야 하는지는 좀 헷갈렸지만.
도리 없이 병원에를 갔다. 무슨 병에 걸린 게 틀림없다고들 말했기 때문이다. 의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목에서 쇳소리가 나는 할아버지였는데, 에, 눈 뜨고 자는 건 두가지 경우가 있어요. 하나는 눈꺼풀이 너무 짧은 경우. 안구를 충분히 덮어주지 못하는 거지. 또 하나는 안구가 지나치게 돌출된 경우. 눈꺼풀은 정상인데 튀어나온 눈알 면적이 넓은 거야. 엎어치나 메치나 비슷한 얘기 같지만 치료 방법이 달라요. 근데… 아가씨는 이상하네? 눈꺼풀 길이가 정상인데? 눈두덩도 움푹 들어가 있고. 그런데 눈을 뜨고 잔다?
의사는 왠지 화가 난다는 표정을 짓더니 결론을 내리듯 덧붙였다.
이런 경우는 드문데. 일단 대학병원을 가보세요. 수면검사도 해보고. 무엇보다 일단 신경정신과 진료를…
그래서 대학병원에를 갔다. 수면검사란 것도 받았다. 진단은 같았는데, 아주 드문 케이스로 아마도 스트레스 탓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그럼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스트레스를 받은 게 틀림없구나 생각하고는 우울해졌다. 어쨌든 눈을 뜨고 자면 안구건조증이라든가 각막염증 같은 게 있을 수 있다고 해서 눈에 안약을 넣은 게 치료의 전부.
열심히 안약을 넣은 덕분에 안구건조증이라든가 각막염증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다. 생활에도 별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있을 턱이 없는 게,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잤고 친구네서 외박 같은 걸 하지도 않았으며 버스나 지하철 같은 데서 잠이 들지도 않았으니까. 중학교 때인가 수업 중에 졸았던 적이 있긴 한데 수학선생에게서 ‘너, 수업시간에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지적을 들은 뒤로는 자동으로 졸지 않게 되었다. 수학선생이 말한 이상한 표정이라는 것을 상상해보았는데, 고개를 외로 꼬고… 두 눈을 부릅뜬 채… 깜빡이지도 않고… 조금씩 흔들흔들… 입가에 침이 고이고… 그런 모습이 그려졌다. 확실히 남에게 보여줄 만한 표정은 아니니까 그후로는 수업시간마다 말짱하게 깨어 있었다. 수학여행처럼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머리 뒤로 띠를 빙 둘러서 착용하는 안대를 지참했다. 숙소에서도 구석자리를 잡아서 재빨리 자고 재빨리 일어난 건 물론이고.
그럭저럭 학창시절은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른이 되어 있었다고 해야 하나. 연애를 하고 동거를 시작하면서 뭔가 꼬이는 느낌이었다. 인생이 원래 이런 건가.
2
구남씨와 나는 이십대의 끝물이었고 반년째 함께 살고 있었다. 결혼식은 하지 않았고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다. 나도 구남씨도 특별히 그런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남씨는 ‘예식이라는 거, 매우 귀찮다’는 게 이유였고 나로 말하자면 ‘미쳤냐 결혼 따위를 하게. 하녀 될 일 있냐’라고 반문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결혼을 굳이 왜?’라고는 확실히 생각하고 있었다.
결혼식은 안 했지만 친구 몇을 모아 동거를 알리는 모임은 조촐하게 했다. 아무래도 결혼식을 대신하는 모임이어서 큰맘 먹고 한강변의 선상 까페 ‘리버사이드 FC’를 예약했는데, FC? 풋볼클럽인가? 팬클럽인가? 설마 피트니스클럽? 그렇게 썰렁한 농담을 하면서도 그때는 즐거웠지. 모인 사람은 일곱. 나와 구남씨, 그리고 친구 다섯. 친구 다섯은 모두 인디밴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팬클럽 회원이었다. 이건 당연한 일, 구남씨와 나는 바로 그 팬클럽에서 만났으니까.
모인 이들 중에는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리더 조웅의 팬도 있었고 베이스 임병학의 팬도 있었으며 드럼 박태식의 팬도 있었다. 전원 예외 없이 키보드 김나언의 팬인 건 물론이고.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는 라이브에 강해서 그들 특유의 다이내믹한 무대 리듬에 빠지면 웬만해서는 빠져나올 수 없다! 록인 듯 아닌 듯 구성진 보컬에 탁월한 그루브라면 인디 씬에 따라올 자가 없다! 그게 우리가 공유한 믿음이었다.
나는 새로 입양한 반려견 이름을 스텔라라고 지음으로써 팬심을 증명했다. 우리 멤버 중 하나는 실제로 91년형 스텔라 1.8i를 구입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뿐인가. 바로 그 스텔라에 구남씨와 내가 탑승함으로써 우리는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를 현실 속에서 완성한 적도 있는걸. 「우리는 깨끗하다」와 「우정모텔」을 틀어놓고 볼륨을 맥시멈으로 높인 채 양수리 지나 청평 지나 남이섬까지 드라이브를 했으니, 말하자면 우리 청춘의 하이라이트라고 해야 하나.
구남씨로 말하자면 원래부터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팬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이름이 우연찮게도 박구남이며, 멜론을 돌아다니다가 또 우연찮게도 제 이름이 들어간 밴드를 발견했기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됐을 뿐이라고 말해서 우리를 실망시켰다. 하지만 덧붙이기를,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라이브를 한번 보고는 진짜 팬이 되었으며, 진짜 팬일 뿐만 아니라 열혈 팬이 되었으며, 어느 정도인가 하면 구남이라는 이름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남씨는 큰 덩치에 맞지 않게 수줍은 표정으로 고백했고 그 고백은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기대대로 모임은 별 탈 없이 진행되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한강변도 나름 운치가 있었고 모두들 적절한 예의를 갖출 줄 알았다. 아무도 구남씨와 나에게 프렌치 키스를 강제하지 않았고 음담패설을 하지도 않았으며 술에 취해 싸움을 벌이지도 않았다. 물론 메이저리거들의 OPS라든가 FC바르셀로나의 최근 성적이라든가 테란과 저그의 전략 전술 쪽으로 얘기가 진행되는 바람에 좀 지루하기는 했다. 결국 군대에서 라면 끓이는 법까지 등장했을 때 아아, 이제 군대에서 축구만 하면 되나? 하고 다른 누군가 하품을 했다.
묘한 이야기가 있다…며 멤버 중 누군가 입을 연 것은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던 때였다. 내내 별말이 없던 친구여서 뭔데? 뭐야? 모두들 관심을 보였다. 얘기인즉슨, 자기네 동네에서는 고양이와 개가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응? 그게 무슨 헛소리야? 냥이랑 강아지가 비야 눈이야? 좌중의 가벼운 항의에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어느 밤에 술에 잔뜩 취한 아저씨 하나가 길을 가다가 아무 이유 없이 강아지를 발로 찼다고 한다. 강아지 주인의 신고로 그 장면이 녹화된 영상이 텔레비전에 나온 뒤 여론의 비난이 쏟아지고 범인이 잡히고 사과를 하고… 여기까지는 자연스러웠는데, 그후 동네에 이상한 사람들이 출몰한다는 것이었다. 길 잃은 개나 길고양이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불특정 다수인데, 심지어 아파트 고층이라든가 옥상 같은 데서 던지기까지 한다는 얘기였다.
한강변이 보이는 창밖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빗방울 사이로 개나 고양이가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구남씨가 우리 모두의 관심사인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자리는 금방 파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어느 때였나. KT&G 상상마당은 물론이고 광주 뮤페 네버마인드부터 부산 바이닐 언더그라운드까지 한마음 한뜻으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라이브를 따라 전국을 일주하던 시절이었는걸. 여행도 하고 음악도 듣고, 음악도 듣고 여행도 하고.
리버사이드 FC에서의 모임을 마친 뒤 구남씨와 나는 그날로 동거를 시작했다. 만인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끝낸 신혼부부처럼.
3
구남씨는 눈이 맑고 큰 사람으로 허우대가 좋았다. 얼굴선이 선명하고 둥글둥글한 편이어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외모나 몸집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구남씨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적절한 멘트와 적절한 행동을 할 줄 알았다. 가볍고 흥미로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고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고 느낄 만큼만 상대를 칭찬할 줄도 알았다. 잘난 체를 하는 편도 아니었고 나처럼 자신을 비하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뭔가 나이스하다… 구남씨를 보고 있으면 절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건 마치 무덥고 습한 열대우림 같은 데서 살다가 가을 아침 호주의 해변도로를 드라이브하는 기분이랄까. 내게는 그런 것이 신비롭게 느껴졌는데, 구남씨의 고객들도 그런 느낌이었겠지. 아 이 사람에게 맡기면 일이 잘되겠구나, 가령 인테리어 같은 일이.
구남씨는 인테리어 업자였다. 목공기술자라든가 도배전문가 같은 사람들을 모아서 인테리어 작업을 진행하는 일이었다. 구남씨 자신만 놓고 보면, 사실 아무런 기술도 없었다. 디자인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건축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미장일을 배운 것도 아니고 전기배선에 정통한 것도 아니고… 오늘날은 네트워킹이 생명이야. 전문가가 되기보다 전문가들을 적절히 배치하고 활용하는 게 핵심이지. 구남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 자신 있는 어조는 아니었지만.
구남씨는 제법 큰 인테리어 회사의 매장 담당으로 일하다가 말로만 듣던 구조조정 대상이 되고 은근히 사람 골병들게 만드는 과정을 거쳐 결국 정리해고를 당했다. 한동안 방황기를 거친 구남씨는 같이 잘린 동료와 동업으로 인테리어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게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첫번째 두번째 발주한 집은 이래저래 시행착오가 있어서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 미장팀과 도배팀의 손발이 맞지 않아 일정도 예상보다 늘어난데다, 반복되는 시공상의 오류 및 클라이언트들의 변심과 억지 요구 때문에 이문을 남기지 못했다. 초기비용으로 대출한 돈을 메우기는커녕 되레 더 많은 빚을 졌다. 아직 독립할 때가 아니었던 건가. 구남씨는 그렇게 중얼거렸는데, 날이 갈수록 표정이 어두워지다가 나중에는 표정 자체가 사라져버릴 지경이었다.
나로 말하자면 구남씨와 살림을 합칠 즈음 출판사를 나와 프리랜서가 되었다. 살림을 합친다고는 했지만 내가 사는 소형 아파트로 구남씨가 짐을 옮긴 것뿐이어서 별다른 변화는 느끼지 못했다. 몇몇 출판사에서 외주를 받고 동네 아이들을 가르쳐서 그럭저럭 생계를 꾸렸는데, 사실 그때 내 관심은 한창 쓰고 있던 동화 쪽에 가 있었다. 강아지 키우는 이야기를 잔잔하게 담은 작품으로, 한 웹사이트에 매일 연재를 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그저 스텔라에 대한 애정을 기록해두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 스텔라. 나의 작은 사랑, 나의 작은 비글 말이다.
처음에 구남씨는 스텔라에게 애정을 보이다가 곧 시들해졌다. 스텔라가 힝힝거려도 눈길을 주지 않았고 발치에 와서 목덜미를 비벼도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생각했다. 뭐 애정을 강제할 수는 없는 거니까.
어쨌든 우리는 동거를 시작했으므로 같이 잠을 자고 같이 깨어나고 같이 잠을 자고 또 같이 깨어났다. 그런 것이 인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것이 인생이었기 때문에, 나는 눈을 뜨고 잤고 구남씨는 잠꼬대를 했다. 그런 것이 인생이었기 때문에, 나는 안대를 하고 잤고 구남씨는 며칠에 한번씩 심하게 잠꼬대를 했다.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하기도 하고 제법 긴 문장을 읊기도 했다. 예컨대,
그러니까 그게, 새도 새장 속에서 새장하고 같이 떨어지면 죽나? 죽을까? 죽겠지? 죽을 거야. 하지만 인테리어는 인테리어를 못해요. 옷을 다 벗고 장갑을 끼고 저는 춤을 춥니다. 아아, 인생 여러분, 인생 여러분, 탱크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하하.
대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 건지. 나는 속으로 웃었다. 잠꼬대를 이렇게 유쾌하게 하면 꿈속에서는 얼마나 즐겁다는 걸까? 즐겁기는 한 걸까 정말?
물론 그렇게 맥락 없이 엉뚱한 잠꼬대만 하는 건 아니었다. 아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고 니가 거기 있고 그러면 니가 그걸 하는 거고 나는 돈을 벌어오면 되잖아 안 그래 이 미친년아? 이런 식으로 뭔가 의미가 통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는 애국가를 「올드 랭 싸인」 음정으로 부르기도 하고,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노래에 말이 안 되는 가사를 붙여 아무렇게나 흥얼거리는 재주까지 있었다.
야 버라이어티하다 대단한걸. 나야 그렇게 생각했지. 정작 구남씨 자신은 자신이 잠을 자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전혀 몰랐다. 아무래도 잠꼬대니까 당연한지도.
자면서 당신이 이러저러하다고 구남씨에게 알려준 적이 있는데 반응이 별반 없었다. ‘당신, 잠꼬대를 한다’고 말해주었지만 ‘그런가’ 하고는 그만이었다. ‘당신, 잠꼬대로 노래를 한다’고 알려주어도 ‘그런가’ 하고는 또 그만이었다. ‘당신, 잠꼬대로 욕을 한다 하하’ 하고 짐짓 웃으며 놀려보았더니 ‘아하하 그런가?’ 하고는 또 별 반응이 없었다. ‘자면서 하는 욕이 아주 잔인하고 끔찍할 때가 있다’고는 말해주지 않았다. 말해주어도 그냥 그런가 했을 테지만 구남씨가 그런가 하고 끝내버리면 어쩐지 내가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무슨 욕인데? 하고 구남씨가 물어보면 나는 그걸 그대로 전하겠지. 뭘 찢어발기고 누굴 찢어죽이고 하는 욕을. 그리고 마음이 무거워졌을 것이다. 납덩이가 달린 종이배처럼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어쩐지 몸이 아파졌다. 꿈은 무의식이라는데… 무의식은 통제가 불가능하니까… 누구나 아이가 되는 거야… 아이 같으니까 순진무구하고… 순진무구하니까 잔인하고… 아아 꿈은 꿈일 뿐인데…라고 나는 생각했다.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안대로 입을 막고 재울 수도 없고. 그렇게 덧붙여 생각하고는 조금 웃었을 뿐.
4
저녁에 구남씨와 멍하니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는데, 뜻밖에도 선상 까페 리버사이드 FC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뉴스로 나왔다. 밤이나 새벽 시간에 아파트 고층에서 정말로 동물들이 떨어진다는 얘기였다. 처음에는 상계동에 있다는 대규모 아파트단지에서 일어난 일회성 사건이었다고 했다. 범인은 곧 잡혔는데 그 아파트 18층에 사는 대기업 과장이었다. 만취 상태로 귀가한 밤에 딸이 키우던 고양이가 손에 걸렸고, 뭉클거리는 그 질감이 갑자기 역겹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경찰이 찾아오자 그는 자기 고양이를 자기가 처리한 것뿐인데 무슨 죄냐고 항변했다. 비난 여론이 커지고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 쪽에서 압력이 들어오고 나서야 그는 고개를 숙였다.
사건은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서울에서만 여러 아파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유사한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 없이 발로 차고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는 사건이 빈발했다. 대체 누가? 왜? 나는 경악해서 외쳤지만 대체 누가, 왜 그러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리포터는 밝혔다. 희생된 동물들 가운데는 길고양이나 유기견부터 멀쩡히 집에서 키우던 개라든가 고양이라든가 햄스터라든가 심지어는 새 같은 종류까지 있다고 했다. 개와 고양이가 길에서 테러를 당하고, 새가 새장 안에 갇힌 채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고 했다. 밤에 자고 있는데 자꾸 무슨 소리가 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동물들이 떨어지는 소리였던 거예요.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한 고등학생이 인터뷰를 하는 영상도 나왔다. 밤에 순찰을 도는데 1미터 앞에 뭐가 꿈틀거리고 있더라고. 뭔가 보니 개 한마리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는 거야. 그건 아파트 경비원의 진술이었다. 경찰은 주변 CCTV를 탐문하며 용의자들을 찾고 있지만 주로 밤과 새벽에 사건이 발생한 관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게다가 범인이 불특정 다수이기 때문에 수사에 난항이 예상된다… 리포터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런 내용을 전했다.
나는 스텔라를 품에 안고 덜덜 떨면서 뉴스를 보았다. 캄캄한 밤에 개나 고양이가 해를 당하고 심지어 높은 데서 떨어진다면 진심으로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해서 스텔라와 함께 산책도 나가지 않았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공포가 가시지 않아서 구남씨에게 그 얘기를 꺼냈다. 구남씨, 집에서 키우던 개라든가 고양이라든가 햄스터라든가 심지어는 새장 같은 게 높은 데서 떨어진대.
내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구남씨가 누운 채 대꾸했다.
응.
그것뿐인가 싶어 구남씨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구남씨가 무심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어떤 미친놈들이 그런 짓을…
그러다 문득 표정을 바꾸며 구남씨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정말 궁금한 게 생긴 듯 호기심이 담긴 표정이었다.
새도 새장 속에서 새장하고 같이 떨어지면 죽나? 죽을까?
그러고는 동의를 구하듯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죽겠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확신에 찬 목소리로,
죽을 거야.
하고는 고개를 돌리며 입을 닫았다. 나는 뜨거운 물에 덴 느낌이 들어서 화들짝 구남씨에게 말했다.
근데 구남씨, 자면서 그 얘기 했는데.
무슨 얘기?
새도 새장 속에 갇힌 채 떨어지면 죽나 하는 얘기.
내가?
응.
언제?
어제. 아니 그제인가. 잠꼬대로.
그게 뭔 소리야. 정확하지 않은 말은 하지 마.
구남씨는 샐쭉하더니 몸을 돌려 누워버렸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둘이 나란히 누워서 한동안 침묵했다. 나는 캄캄한 천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 쪽은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거기 뭐가 있는 것 같았다. 사람 마음도 마찬가지인가. 자꾸 캄캄해져서 손을 넣어보게 되잖아. 거기서 뭐가 잡히나. 나는 어쩐지 슬픈 기분에 빠진 채 결론을 내렸다. 어둠은 뭐 그냥 어둠이지. 거기 뭐가 없지.
그 순간 구남씨가 문득 내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항의했다. 정색을 한 얼굴이었다. 잠꼬대 같은 걸로 날 재단하지 마. 나는 가만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나는 사실이 그랬다고 말한 거야 구남씨. 구남씨는 그게 그거지, 하고 대꾸하더니, 사실이라고 해서 다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덧붙였다. 그러고는 문득 몸을 일으키더니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달변의 구남씨가 되어 있었다.
당신, 당신이 얼마나 무서운 여잔지 알아? 언젠가 밤에 뒤척이다가 깼어. 몸을 돌려 누웠지. 방향을 바꿔 누운 거야. 그런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떴어. 당신이 보였어.
구남씨는 잠시 숨을 골랐다.
안대가 벗겨져 있더라고. 이렇게.
구남씨는 빈손으로 얼굴에서 뭘 젖히는 포즈를 취하더니 말을 이었다.
안대는 왜 안대 같은 걸 하나 생각했는데, 그냥 빛이 환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야. 눈을 뜨고 자고 있더라고 당신. 눈을 부릅뜨고 자고 있더라고 당신. 게다가 눈동자에 초점이 있더라고 초점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거야. 하도 이상해서 이봐 미선씨. 그렇게 부르니까 반응이 없어. 다른 세상에 있는 게 틀림없다. 다른 세상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 분명 깊이 잠든 것 같은데. 당신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아? 비명을 지를 뻔했다고. 당신이 무슨 귀신이야 응?
그럴 것이다. 밤에 뒤척이고 있는데 옆에 자고 있는 사람이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면. 어쩌면 그건 죽어가는 사람이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과 비슷하겠지. 아니, 영원히 죽지 않고 우리와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죽어가는 사람도 아니고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도 아니다. 사람이라서 귀신이 아니라서 영원이 아니라서, 나는 눈을 뜨고 잔다.
5
스텔라는 비글답지 않게 우울하고 어두운 녀석이었다. 제 유전자를 거부하다니 너무해. 나는 자주 그렇게 생각했다. 녀석은 내가 연재하던 동화 『스텔라를 타는 구남과 여』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원래는 환하고 귀여운 파스텔 톤의 이야기였는데 나도 모르게 어두운 에피소드가 섞여들곤 했다. 동화 속에서 자꾸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는데, 어떨 때는 스텔라가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어떨 때는 로드킬 사고를 당할 뻔하고, 어떨 때는 나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내가 왜 이런 걸 쓰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시간이 갈수록 나의 이야기는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몇 안 되는 독자들마저 떠나갔다. 그나마 남은 소수의 독자들은 명랑호러트래직테일이라는 애칭으로 불러주었지만 정작 나는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러지 조금씩 미쳐가는 것처럼 그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아무래도 그날을 기억해보자. 불안하고 긴 꿈을 꾼 뒤 깨어난 아침. 꿈이 불안해서 꿈속의 내가 비명을 질렀던 것 같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비명을. 대체 어떤 꿈이길래. 무슨 종류의 악몽이길래. 나는 꿈속에서도 그렇게 생각했지. 이건 꿈이니까 꿈에서 깨어나면 되는 거라고. 그렇게 나 자신을 달랬던 기억. 깨고 나서도 오래 고개를 흔들었지. 악몽을 털어내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지.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는데 뭔가 허전했다. 돌아보니 스텔라가 보이지 않았다. 하우스에 샐쭉한 표정으로 앉아 있나. 세탁실에 들어가 있나. 아니면 베란다 구석에서 하염없이 바깥을 보고 있나. 나는 집 안을 뒤졌다. 이곳저곳을 빠짐없이 뒤졌다. 예전엔 책상과 벽 틈에 들어가 잠든 적도 있잖아. 쌀통에는 대체 어떻게 들어간 거람. 침대 밑은 그렇게 편한가. 자기가 무슨 고양이인 줄 아는 녀석이야. 정말 웃겨. 웃긴다고. 나는 웃으며 스텔라를 불렀다. 나는 웃으며 스텔라를 찾아 헤맸다. 나는 웃으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생각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곧바로 신고를 했다. 개가 사라졌다고 경찰에 신고를 하면 도와주나. 아니겠지. 하지만 최근 반려동물을 둘러싼 사건이 빈발하면서 여론이 악화된 탓에 상황이 달라졌다. 경찰청장이 적극적 수사의지를 밝힌 것도 큰 몫을 했다.
공무원 스타일의 중년 경관과 공익근무요원이 집으로 찾아왔다. 방송사에서까지 관심을 갖는 사안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소 지루한 표정들이었다. 개를 마지막으로 본 게 밤 시간이었고, 실종 사실을 인지한 게 아침이었다고요? 경관은 베란다에 서서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물었다.
개가 사라지던 밤에 뭐 하고 계셨느냐고, 경관이 구남씨에게 물었다. 구남씨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반문했다. 뭐라고요?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가 왜 중요합니까? 경관은 익숙한 상황이라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경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구남씨는 이 경관이 어떤 동물을 닮았는데 어떤 동물인지는 도무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경관이 침묵을 지키자 침묵에 압도당한 구남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연, 자고 있었죠. 경관이 나를 바라보며 맞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 있었어요.
나와 같이.
경찰이 돌아간 뒤, 같이 앉아서 밥을 먹다가 구남씨가 숟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내뱉었다.
썅.
나는 카레를 해서 식탁에 올려놓았는데, 그 서슬에 식탁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구남씨는 눈을 무섭게 뜬 채 식탁 위의 카레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니미,
하고 말했다. 눈을 아래로 깐 채였고 분명한 발음이었다. 그냥 말을 내뱉었을 뿐인데도 카레의 표면이 무겁게 흔들렸다. 그러니까 이건 잠꼬대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이것은 잠꼬대가 아니다… 이것은 무의식이 아니다… 나는 천천히 입을 벌려 구남씨에게 말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지도 않았다.
근데 구남씨, 자면서 그런 욕 했는데.
구남씨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구남씨를 바라보았다. 나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지만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게 아니었고, 구남씨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지만 그냥 일그러진 게 아니라 무언가 깊이 상한 사람 같았다. 구남씨, 밤에 자면서 그런 욕 했는데… 분명한 발음으로… 잠결이라든가 어둠이라든가 무의식이라든가 그런 게 없는… 아주 투명한…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나는 무언가 내 머릿속에 떠오르려 하는 것을 깨달았다. 뇌에서 간지러운 무엇인가가 자꾸 올록볼록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게 무언지 잘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문득, 나는 무언가에 도착한 것 같았다.
6
잊고 있던 무엇이 전기 자극을 받은 것처럼 떠오를 때가 있잖아. 뇌에 전류를 흘려 넣어서 시냅스 세포들이 갑자기 연결되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겠지. 무수한 전류가 몸에 흘러. 그래서 이제 막 무언가가 시작되었는지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구남씨는 식탁에 앉아 조금씩 표면이 흔들리는 카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보았으나 보지 못한 것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밤에 눈을 부릅뜬 채 바라보았으나 낮에 깨어나 기억하지 못한 것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뜬 채 잠이 든 사람이었다. 잠 속에서도 바로 그것을 바라본 사람이었다.
그 밤에 구남씨는 단잠에 빠져 있었고 무슨 꿈을 꾸는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딘지 차가운 웃음이어서 나는 옆에 누워 구남씨의 잠든 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고 재미있는 표정이라고 꿈속에서도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구남씨는 잠을 자면서 말을 하는데… 잠꼬대를 하는데… 잠꼬대는 길고 또 이야기가 있잖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잠든 나는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구남씨가 자면서 중얼거리는 문장을 들었을 것이다. 천장의 어둠 속에서 빨간 피가 톡톡 떨어지듯 선명한 문장을 들었을 것이다. 아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고 니가 거기 있고 그러면 니가 그걸 하는 거고 나는 돈을 벌어오면 되잖아 안 그래 이 미친년아?
그렇게 한참을 중얼중얼하더니 구남씨가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잠을 자면서 몸을 일으킨 건지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킨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그때는 그게 중요한 건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잠을 자고 있었고… 나는 눈을 뜨고 있었다.
구남씨는 잠결인 듯 아닌 듯 몸을 일으키더니 베란다 쪽으로 걸어갔다. 베란다에 나가서 담배라도 피워 물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보았을 것이다. 깨어나서는 기억하지 못할 밤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새겨 넣은 채. 아아, 저기는 스텔라가 잠들어 있는 곳인데… 스텔라가 저기 잠들어 있는데…라고 맹렬하게 생각하면서. 이것은 악몽이구나 생각하면서.
아주 짧은 순간에, 구남씨는 잠든 스텔라를 한 손으로 슥 들어올리더니, 스텔라가 위험을 깨닫고 몸을 꿈틀거리기도 전에, 창밖으로 휙 던져버렸다. 작고 연약한 소리가 저 아래서 아득하고 짧게 울린 것 같았다. 머리를 창밖으로 내밀어서 까마득하고 캄캄한 아래쪽을 확인한 구남씨가 다시 침대로 돌아와 내 옆에 누웠다.
악몽이라고 생각했지. 가위에 눌렸을 뿐이라고 생각했지. 가위였기 때문에 스르르 기억에서 지워졌지. 그러고는 떠오르지 않았네. 이상한 이미지 몇개가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그뿐. 스텔라가 하늘을 날았던가. 두 눈이 순식간에 커졌던가. 허공이 텅 비어 있다고 느꼈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가.
그 밤, 나는 옆자리에 누운 구남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잠 속에서. 꿈을 꾸면서. 눈을 뜨고. 눈을 크게 부릅뜨고… 구남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원히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이제 시작되고 있었다. 꿈속의 어디 먼 곳에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노래가 들려왔다. 끊어졌다 이어지고 이어졌다가 끊어지며 희미하게 들려왔다.
저수지엔 개들이 있구요 달에는 사람이 있어요… 마음에는 노래가 있구요 밤에는 그리움이 있어요… 나에겐 아직 시간이 많아요 내 시계는 방수가 안 되구요 내 기타는 락앤롤… 저수지엔 개들이 있구요 달에는 사람이 있어요… 밤에는 그리움이 있구요 나에겐 아직 시간이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