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단절을 넘어서는 지혜의 연륜
염무웅 비평집 『문학과 시대현실』
박수연 朴秀淵
문학평론가. 평론집 『문학들』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해야만 하는 것』 등이 있음. qkrtk@chol.com
염무웅(廉武雄) 비평집 『문학과 시대현실』(창비 2010)은 그와 동시대를 살아온 시인과 소설가 들에 대한 헌사로 읽힐 만하다. 이 책은 한국문학에서 지속되는 것, 지속되어야 할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는 단절과 새로움의 담론이 도드라지고 문학의 사회적 책무가 소홀해지는 시대에는 더욱 주목되어야 할 사항이다. 서론에서 그가 첫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을 떠올리고,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문학과 시대현실’이라는 제목을 택한 연유를 밝힌 것은 나날이 달라지는 문학적 감각의 경향들에 그의 비평 경로가 보이는 최대치의 반발일 수도 있겠다. 그가 “기계적 반영론의 지지자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는 대목에서는 오히려 제대로 된 문학적 반영의 필요성에 대한 요청을 읽어내는 일도 가능하다. 1990년대를 맞으면서 일군의 문인들은 단절을 통한 미학적 성취의 길로 나아갔지만, 이 노비평가는 이전과 이후의 문학적 핵심을 연결하여 논의하고 성찰하는 길로 나아간 것이다. 단절을 통한 새로움이 아니라 지속을 통한 변모가 그에게는 더 중요한 셈이다.
물론 염무웅의 문학관이나 심미적 지침이 옛것 그대로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는 문학적 성취를 “그것 자체의 미학적 질서 속에서 해명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미학 중심의 시대를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변모를 수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문학적인 비약과 그것의 시대적 배경을 공시적인 완결태로 다루기보다는 문학적인 시대들 사이의 연결점을 찾아내는 데 더 많은 공력을 기울인다. 비평집 서론에서 제기된 화두가 예사롭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변했으되 이면적으로 연속되는 핵심, 다시 말해 한명의 문인이 전후의 시간적 순서를 거쳐 여전히 동일한 문학자로 호명되어야 하는 이유를 그는 작품과 시대의 정면으로 육박해 들어가 밝혀내는 것이다. 연속되는 세계에 대한 미학적 탐구가 그의 글에 있어서도 유효하다고 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번 비평집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되는 임화(林和)에 대해서도 그렇다. 당대의 모던보이로 출발해 시대의 혁명가로 거듭났던 임화를 향한 그의 지극한 애정이 도달하는 곳 역시 새로운 모험적 시도 속에서 여전히 지속되는, 문학들의 외면되지 말아야 할 핵심이다. 그런데 독문학자로서의 그의 평생이 한국문학에 대한 외국 미학이론의 일방적 적용 같은 일종의 폭력과 무관하다는 사실이야말로 최근의 젊은 비평세대가 눈여겨볼 대목일 것이다. 염무웅은 한국문학을 오롯이 한국문학의 목소리로 이해하려고 한다. 한국문학의 근대적 기원이 일본문학이었고 일본의 근대가 독일의 그것과 밀접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임화의 문학사론을 비롯한 한국근대문학에 관심있는 독문학자라면 한국문학의 원형적 면모를 독일에서 찾는 일을 수행했음직하다. 그러나 염무웅에게는 그런 지적 현학의 소모주의를 찾아볼 수 없다.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이 일본문학의 기원을 서구문학의 전도로 파악할 때, 여기에는 꼬제브(A. Kojeve)와 바르뜨(R. Barthes) 등의 일본론을 수용한 결과 최근의 아즈마 히로끼(東浩紀)에 이르기까지 일본 지식인들이 밑바탕에 두고 열광하는 ‘기묘한’ 오리엔탈리즘이 작동한다. 이것은 이론적 노동이 동시대 민중이나 다중에 가하는 무한한 폭력에 해당할 것이다. 염무웅이 임화에게서 읽어내려 한 문학적 핵심은 그런 폭력과는 거리가 멀다. 아직도 임화의 이식문학사론에 대한 세간의 오해가 여전하지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임화가 정립하려 한 조선문학의 내재적 면모다. 그 내재적 면모를 고려할 때, 한 문학가의 지속적 핵심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학과 시대현실』은 한국문학의 주체적 지속성을 개별 문인들의 통시적 면모에서 찾아보려 한 구체적 시도다. 이것은 단절을 하나의 시대적 인식론으로 밀어올린 결과 자유주의적 개인의 추구가 만능이 되다시피 한 오늘날의 지적 조류에서 한국문학에 대한 대항인식으로 새겨둘 만하다. 경험적 회상이 녹아 있기도 하고, 그래서 팔봉 김기진(金基鎭)에 대한 논의처럼 종종 지나친 애정의 감상이 발견되지 않는 바도 아니나, 이 또한 한국문학의 생생한 육성으로 기록되기에 충분하다. 비평이, 때로는 객관적 거리를 확보하고 때로는 문학적 자기 삶의 육화에 이를 때 제법 읽을 만한 글쓰기가 된다는 사실을 독자들은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절 담론에 지핀 한국문학의 유행에 거스르면서 지속이라는 관점을, 그런 의미에서 진실로 여전히 젊은 패기를, 노비평가의 글에서 확인한다는 것은 한국문학에 대한 축복인가 비판인가. 비평가인 내가 스스로 되물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