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저기 무서운 아해가 거울을 본다
김사과 소설집 『02』
강지희 姜知希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동물성을 가진 ‘식물-되기’」가 있음. iskyyou@hanmail.net
아니, 골목마다커피향이스며들고눈깜빡할때마다무엇인가사라지고새건물이들어서는이세련미넘치는21세기서울한복판에낭자한 ‘피의 바다’라니. 김사과의 첫 소설집 『02』(창비 2010)의 어느 곳을 펼쳐도 죽고 싶다거나 죽어버릴 거라거나 “개새끼! 쑤셔버릴 거야 찔러넣을 거야” 새된 비명을 건조하게 내지르는 인물들이 쉽게 발견된다. 최근 이렇게 많은 욕설과 폭력과 살인이 횡행하거나 기교 없는 정념으로 몰아붙여진 소설이 드물었기에 이 책은 독자의 권태와 무기력을 찢으며 호기심을 유발한다. 이를 선량하고 유약한 개인이 견고하고 완악한 체계 속에서 분투하는 것으로, 신경향파의 귀환으로, 권력에 대한 분열증적 저항으로 바라본다면 이 소설을 읽는 정확한 독법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읽는 데 그친다면 김사과의 낯섦은 낯익은 것으로 자리이동하며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고무공 같은 탄력성을 잃게 되지 않을까. 『02』에는 이를 초과하는 비인간적 과잉이 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에서 국밥집 주인을 죽이며 폭주하기 시작한 주인공은 아이에게 밑도끝도없이 말한다. “왜 몰랐는지 알아? 무서워서 그랬어. 뭐가 무서운데? 나도 몰라. 아무튼 그냥 무서웠어. 난 무서워서 내가 회사원을 하기 싫다는 것도 몰랐어. 공포가 무슨 뜻인지 알아? 무섭다는 거야. 프랑스어로 공포가 뭔지 아니? 난 알아.”(206면) 여기서 무섭다는 말은 오로지 연쇄적으로 무섭다는 기표를 생산하기 위해서만 발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더듬어가려는 독자의 노력은 김사과의 인물들 앞에서 철저하게 차단되고 거부당한다. 미셸 푸꼬(M. Foucault)는 결국 광기만이 유일한 출구라고 말했다. 이성이 미쳤다는 것을 알았을 때, 증오와 공포, 공격욕 같은 비합리적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합리적으로 왜곡된 외부세계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하나의 전략이 된다. 김사과에 이르러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생각을 중지해야만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주위의 모든 것이 내 분노의 원인”(191면)이기에, 쉴새없이 인물의 내부로 틈입하는 공포는 거름망 없이 분노로 전환되어 대상 없이 외부로 발산되며 피비린내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원인과 대상이 소거된 움직임은 이상(李箱)의 「오감도 시 제1호」에서 오로지 질주할 뿐인 13인의 아해를 상기시킨다. 1인부터 13인까지 악마처럼 증식하며 나타나 무섭다는 말만 반복하며 뚫린/막다른 골목을 질주하던 아해들에게서 어떤 목적도 찾을 수 없듯이, 김사과의 인물들의 움직임에는 규명할 수 없는 충동만이 존재하며, 무서워하는 아해와 무서운 아해 사이의 구분이 지워진다. 그래서 김사과의 인물들이 타인을 향해 욕설을 내뱉고 목을 조르고 칼을 휘두를 때, 세상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으로 자기 자신이 무너지는 듯 보이는 것은 필연적이다. 부수려는/부서지는 무서운/무서워하는 아해는 구별 불가능하게 분열된 하나의 자아이기 때문이다. 「영이」에서 아직 어린 영이가 술에 취한 아빠의 폭력을 바라보며 미치거나 죽지 않기 위해 ‘영이의 영이’를 만들어내듯이, 김사과의 소설에서는 폭력으로부터 상처받는 자아를 방어하기 위해 ‘증오하는 자아’가 창출된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분열된 자아는 차이들이 무화되고 일인칭으로서의 존재 가능성을 빼앗기에 견딜 수 없는 것, 살해돼야만 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모든 폭력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수렴되고, 소설 곳곳의 영이들은 자기말소(0)와 자기분열(2)의 충동 사이에서 고투한다.
그러니 “다시 부딪치고, 다시 튕겨나와, 결국 끝이 날 때까지, 남지 않을 때까지, 사라질 때까지, 죽음에 아니 암흑에 이를 때까지, 그 자기파괴적인 움직임은 계속되는”(211면) 이곳은, 끝없이 서로를 반사하는 영상만이 남아 있는 거울의 지옥도다. 무서운 아해가 바라보는 이 거울에는 추처럼 수치와 절망을 오가는 기계적인 움직임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다. 이를 두고 자아의 분열과 소거의 악무한(惡無限)에 빠져드는 폐쇄성을 우려할 수도, 나르씨시즘의 혐의를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합법적인 틀에 의해 보호받는 체계 내부에서의 개인들의 투쟁은, 체계를 내파하기보다 내적 동력으로 흡수되어 소진되거나 쉽게 허무주의로 빠질 위험을 언제나 안고 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개새끼가 정말로 개가” 될 때까지 밀어붙이며 자기 자신마저 파괴해버리는 이 맹목성일 것이다. 사회의 상층부터 하층까지 모든 사람들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발버둥치고 지위를 박탈당할까 불안해하는 21세기 서울에서, 오직 충동만을 동반하는 김사과의 글쓰기는 ‘퓨즈’에 다름아니다. 부디 그녀가 더 강박적으로 더 비윤리적으로 더 반문화적으로 계속해서 나아가길 바란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본드를 불면 나타나는 이천원짜리 천국보다 끔찍한 것임을 알게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