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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기인 李起仁
1967년 인천 출생.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가 있음.
leegiin@hanmail.net
오발탄
아직 어린데 담배에 인이 박이듯 피묻은 손의 인이 박인 거야
처음에는 날아가는 기분을 이해하고 싶었을 거야
엎드려서 다리를 벌리고 방아쇠를 당기며 눈을 감았을 거야
총알은 과녁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인이 박인 거야
처음부터 총알들의 목록에는 혈육이 없었던 거야
과녁 뒤에 숨은 울음이 멈추지 않아서 가슴이 뛰었을 거야
오줌이 흘러내리는 무릎에 십자가를 묻었을 거야
절그럭거리는 십자가 때문에 십자가의 이름으로 발각된 방탄모는 무거웠을 거야
책에서 본 피라미드처럼 꼭짓점이 망가졌을 거야
햇빛은 잔인한 용사의 썩은 발가락 표정을 치료하지 않아
포로의 얼굴에 침을 뱉지 않아 비명의 강가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아
훼손된 묘비명을 읽지도 않아 연합군이 걸어준 훈장도 씻지 않아
산토끼처럼 숲으로 달아나버릴 거야
불투명한 곳에서 잡힌 영혼들은 종이학을 접어서 삼킬 거야
피묻은 손의 인이 다섯손가락으로 끊어질 때 달걀만한 수류탄을 놓칠 거야
수첩 속의 사진을 보면서 엄마의 자유를 놓칠 거야
건빵을 먹은 아이들이 자라서 분해한 총의 부품을 잃어버릴 거야
별사탕 같은 총알은 감옥을 일찍 상상하지 않아서 좋을 거야
포승줄에 묶인 아이들을 믿지 않을 거야 간지러운 고문이 있는 줄도 모를 거야
외우고 있던 계급을 뒤죽박죽 말하다 군복을 잃어버릴 거야
최후의 명령을 받아서 빛나는 소문으로 파묻힐 거야 단추보다 더 작은 무덤에
어쩌면 두 손을 들고 나오는 이들에게 근친의 표정을 붙여줄 수 있을 거야
총과 총알의 다시 총알과 총의 혈육은 총구만 뜨겁게 만들어놓을 거야
기다란 총열의 집합으로 걸어나오는 깃발도 싸움에 인이 박인 거야
무기들의 협연에서 악보를 뺏긴 이들은 깃발을 따라서 가지 않을 거야
뿌리깊은 종갓집을 찾아다니는 인이 박인 거야
숲에서 혼자 숨어 있는 시간은 정말 괴로웠을 거야
썩은 어금니를 뽑아낸 지뢰의 이명(耳鳴)은 휴전을 깨뜨리는 암호로 사용될 거야
숲의 삐라들은 우음(羽音)의 새들에게도 버려질 거야
처음에도 그랬듯 방아쇠를 잡아당기며 눈을 감을 때가 좋을 거야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동물원 울타리를 상상할 거야
총구의 방향으로 뛰는 놈이 포유류의 울음을 닮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잘못 맞으면 미치거나 울음의 반쪽으로 살거나 둘 중 하나일 거야
일년에 한잔 마시는 슬픔을 총구에 붓는 기념일은 계속 있을 거야
이름의 묘지가 종합운동장 옆에서 깨지지 않도록 해야 할 거야
국적을 모르는 비둘기들이 화창한 운동장으로도 날아올 거야
그들이 파편처럼 번지면 두리번거려야 하는 이유를 어서 상상해
홍시증(紅視症)
눈사람은 소리없이 죽지 않아
지나간 사람들을 밀고하여 그들만의 국수를 삶아먹지
붙잡혀온 자의 혀를 뽑아먹지 그리고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하지
아이스크림처럼 녹은 몸에서 증발한 혀를 찾아 공터의 흔적을 뒤졌지
겨울에 채워진 차가운 수갑의 집착이지
달빛은 총구를 뚫어 공터와 내통하는 골목을 가로막았지
골목에서 끌려온 개의 눈알은 충혈되고 주검은 불에 그을려 산을 넘었지
그 광경을 지켜본 아이의 꼬리연이 나뭇가지에 목을 맸지
굵어지기 싫은 나무가 번개에 푸석한 내장을 쏟았지
지난 눈사람의 파행을 잊자고
지나간 사람들의 고초를 잊어버리자고 눈이 펑펑 오지
첫 시집의 날개처럼 하얀 면죄부가 떨어지지
눈이 더 쌓일까 흥분해서 싸버린 오줌의 이름들을 덮어버리지
다리 없는 뱀처럼 살아온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지
아직 아무것도 밀고하지 않은 서류가 나무 위에 걸쳐 있었지
혀를 맛보지 못한 사람이 눈뭉치를 하나 손에 넣었지
이 빛깔을 깨뜨리면 나무에서 따지 않은 홍시만한 눈을 뜰 거야
하얀 망또를 기다렸지 아직 아무것도 밀고하지 않은 길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