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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권여선 權汝宣
소설가.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 『레가토』 『토우의 집』,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숲』이 있음. puruntm@empas.com
신용목 愼鏞穆
시인.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가 있음. 97889788@hanmail.net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 『소설의 고독』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이 있음. myosu02@hanmail.net
정홍수(사회) 올해 두번째 좌담이군요. 오늘의 초대손님은 소설가 권여선씨입니다. 소설도 맵고 예리하지만, 평소 날카롭고 솔직한 의견 표명으로도 유명하지요. 주로 술자리 선배들이 그 희생양이 되긴 하지만요.(웃음) 기대가 많이 됩니다. 오늘 이야기를 나눌 대상작은 김채원(金采原) 소설집 『쪽배의 노래』(문학동네 2015), 전성태(全成太) 소설집 『두번의 자화상』(창비 2015), 김성중(金成重) 소설집 『국경시장』(문학동네 2015), 문인수(文仁洙) 시집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창비 2015), 최정례(崔正禮) 시집 『개천은 용의 홈타운』(창비 2015), 송승언(宋昇彦) 시집 『철과 오크』(문학과지성사 2015)입니다. 먼저 권여선씨의 간단한 인사말씀을 듣고 시작하죠.
권여선 반겨주시는 인사가 겉으로는 치켜세우는 말로 들리지만 속으로는 뭔가 추문을 만들어내려는 욕망으로 가득해 보이네요. 하필 이런 화창한 봄날, 좋아하는 신용목 시인과 만만한 선배를 만나 반갑습니다.(웃음)
김채원 『쪽배의 노래』
정홍수 김채원 선생의 소설을 오랜만에 읽었습니다. 김채원 소설은 실존적 자기 상처와 불안의 응시, 허무와의 싸움 등을 통해 전개되는 자기탐구의 문학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이즈음의 한국소설에서는 잘 찾아보기 힘든 지점이 아닌가 싶어요. 자기대면, 자기탐구야 문학의 영원한 주제겠지만, 한국문학의 진폭이 커지고 방법적으로 다양해지면서 김채원 소설 식의 정면대결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런 방식은 뭔가 구투(舊套)가 된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를테면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생의 한가운데』 같은 작품이라든지 ‘전혜린(田惠麟)’ 같은 이름으로 환기되는 실존적 질문의 자리가 한국 근현대소설의 한 주류였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김채원의 소설을 읽으면서 새삼 느꼈던 점인데, 거기엔 여전히 바래지 않은 문학적 울림이나 광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들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권여선 전체적으로 거리를 확보한 시선이 갖는 격조와 비애감이 좋아서 몰입해 읽었습니다. 시적이면서 산문적이고, 꼭 소설의 형식이 아니어도 좋은, 자기 문장과 시선과 정념으로 이뤄진 세계였어요. 그러면서도 「소묘 두 점」의 스타벅스 장면을 보면 세태도 깔끔하게 잘 다룬다는 느낌을 받았고요. 「누가 빨강 파랑 노랑을 두려워하는가」에서 여성의 불길하고 위태로운 순간을 세밀하게 잡아채는 긴장감이, 오정희(吳貞姬) 이후로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김채원이 하고 있더군요. 「쪽배의 노래」가 참 좋았는데, 소설의 완성도를 떠나 제가 요즘 이런 글을 몹시 읽고 싶어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유년의 이야기라는 게 사실 빤할 수 있는데, 장면들이 갖는 광채가 대단했어요. 어머니가 화장하는 장면, 굴비 살 뜯는 장면, 머리 질끈 동여매고 쇠골을 먹는 장면, 도둑 때문에 대못을 박았다 뺐다 하는 장면, 그 사이로 애틋하게 울려 퍼지는 ‘셰인, 돌아오라고 말이야!’ 하는 오빠의 목소리 등이, 이른바 소설에 구속되지 않고 보석 같은 산문의 형태로 결정(結晶)된 게 아름다웠습니다.
신용목 저도 읽는 내내 김채원이란 작가와 마주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가파른 시간을 견딘 자가 읊조리듯 이야기하는 어조가 참 좋았어요.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사회·역사적 사건들을 처리하는 방식인데요. 이를테면 전쟁이나 9·11테러 같은 엄청난 일들을 다루면서도 철저히 자신의 경험과 시선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더라고요. 우리는 으레 이런 주제에 사회학적 시각이나 특정 담론이 끼어드는 데 익숙해져 있는데, 이 작품에선 사회·역사적 구조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전제된 의도가 최대한 배제된 방식으로, 지극히 개인화된 시각으로만 처리해요. 요즘 시나 소설은 세계에 질문하고 응답하고 다음 세계를 그리는 것까지 한꺼번에 하려고 하거나 최소한 작가의 의도 속에 전 과정을 기획한 뒤에 씌어지고 있는 인상을 주는데, 김채원 소설은 애초에 세계를 정직하게 마주한 다음 어쩔 수 없이 환기되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멈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령 「서산 너머에는」에서 “전쟁이란 다른 무엇이 아니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다. (…) 왜 공포인가 살펴보면 죽음 때문이었다. (…) 삶은 개인의 몫이 아니었다. 자기 인생의 주인은 자기라는, 내가 믿던 그 말이 허수아비처럼 무너져내리고 있었다”(31~32면)라고 개인적 차원에서 소박하다면 소박하게 처리하고 있는데, 그 정직한 힘이 오히려 감동적이고 깊이있게 느껴졌습니다.
정홍수 김채원 소설은 거의 모든 작품이 하나의 작품으로 수렴될 수 있을 듯싶게 비슷한 지점을 파고 또 팝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그리는 문학적 파문은 단순한 반복을 넘어섭니다. 실존적 불안이라는 게 있고, 그건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여성적 경험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거기 독특한 울림이 있습니다. 이번 소설집의 「조금 더 가까이」에 60년대로 추정되는 당시 젊은 세대의 풍경이 나옵니다. 무언가 모호하고 혼돈스러운 가운데 자유를 갈구하는 청춘들의 흔한 초상일 수도 있죠. 그러나 김채원 소설은 거기에서 자기 정직성, 자기 절실성을 통해 자기만의 길을 찾아내고 있는데, 그것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란 사실이 놀랍습니다. 작가의 문장은 유려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굉장히 소박해요. 어떤 곳은 어눌한 느낌마저 줍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사물이나 세계를 처음 대면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느낌이나 생각을 어떤 틀에 넣거나 무언가에 기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려는 안간힘, 절실함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상투적이고 일반적인 자기이해, 세계이해의 지평이 교정되고 심화되는 지점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가령 작가의 대표작 「겨울의 환」(1989)은 한 여성의 이야기가 어머니, 외할머니로 이어지는 이전 세대 여성들의 경험의 역사와 만나고 분단의 상처, 이산과 실향의 아픔을 품는 데까지 나아가는데 그 과정이 너무도 절실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인 「쪽배의 노래」는 어떤 면에서 「겨울의 환」 다시 쓰기 같은 느낌을 주는데, 한국전쟁 전후의 아프고 고단하고 애틋한 역사와 개인의 시간을 담담하게 추억하면서도 그것을 인간존재의 어쩔 수 없는 슬픔이나 우수로 감싸안는 필치는 훨씬 깊어진 울림과 감동을 줍니다. 집이 쪽배가 되어 밤을 건넌다는 환상적이고 시적인 이미지가 소설 전체에 부여하는 기품도 인상적인데, 이 소설을 지탱하고 있는 두 시선이랄 수 있는 유년기 소녀와 황혼기 여성의 자리를 하나로 모아내고 환기하는 절실하고 적절한 문학적 장치로 보였습니다. 전쟁 귀향자인 오빠의 죽음이 소설의 한가운데 있고, 그 오빠의 몫을 대신 살겠다는 다짐, 그러나 돌아보니 자신의 삶조차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이제 고독 하나만을 확보한 채 세상과 마주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어린 날 방바닥에 누워 들었던 ‘바보, 패기’라는 단어를 통해 생생하게 소설을 떠받치잖아요. 오빠가 창호지 문을 등지고 서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방 안은 어스름에 잠겨 있는 가운데 어머니와 아이들은 방바닥에 누워 이야기를 듣는다는 구도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신용목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이, 보통 이 정도 연륜이 되면 ‘꼰대’가 되거나, ‘내가 다 알고 있어’라는 태도가 나올 법도 한데 그런 게 전혀 안 보였어요. 젊은 작가들의 작품만 봐도 전지적 시점뿐 아니라 전지적 인식까지도 이미 작품 속에 다 침투시켜놓는 편인데, 그것이 꼭 잘못이라는 건 아니지만, 김채원 작가는 자신의 인식을 소설세계 속에 확정적으로 안착시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풀어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남다르게 느껴졌어요.
권여선 그런 자연스러운 품격이야말로 정홍수씨 말처럼 문학적으로 자기 테두리를 짓지 않고 매번 새롭게 세계를 대면하고 차분하게 언어한테 물어가면서 글을 써왔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요. 글을 쓰다 어느 시기쯤 되면 스스로 일종의 반열에 올라선 듯 자기만의 문학적 시선과 언어를 갖게 되기 쉬워요. 이런 상황은 이렇게 버무리고 저런 대목은 저렇게 표현하겠다는 식의, 세계와 언어에 대한 장악과 압도, 반복과 복제의 포즈가 나오기 마련인데, 김채원은 그런 면이 적은 작가 같아요. 작가의 연륜에 비추어볼 때 대단하죠. 「누가 빨강 파랑 노랑을 두려워하는가」에 보면, 부엌 찬장 유리문에 바깥 풍경이 비치는데 그 쪽진 풍경이 이상하게 이 세상 풍경이 아닌 것 같고, 유리문이 조금 열리면 또 낯선 세상이 비치는데 그게 진짜 세상 같고, 그런 식으로 유리문에 걸린 세상을 담담하게 관조하는 장면이 있는데, 작가는 그걸 응축시키기보다 느슨하게 이완시켜요. 읽으면 짜릿하기보다 느릿한데, 그 때문에 오히려 그 장면이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더라고요. 그 느린 속도감까지 각인된 채로요.
정홍수 얼핏 별다른 문학적 장치 없이 씌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야기를 떠받치는 섬세한 미학적 구도가 있어요. 그 위에서 마음의 흐름을 받아적듯 써나가는 자연스러움이 묘한 균형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신용목 어떤 대목에선 정말 젊은 작가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도 많은데요. 아주 뜨거운 현재형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구절들이 있어요. “사랑할 때는 누구도 그 순간이 절대이며 절실하지만 무한한 사랑의 심연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192면)다는 구절만 보더라도, 사랑의 상실감을 이미 다 극복하고 그것을 추억으로 관리하며 나름의 교훈이나 이치를 찾으려는 사람은 쓸 수 없는 구절이 아닐까 해요.
정홍수 「물의 희롱」을 보면 여성이라는 존재, 그리고 성(性)에 대한 질문들을 계속합니다. 그게 소설화자 자신의 것으로 짐작되는 삼십여년 전 어느 여성의 독특한 일기, 사랑의 방식과 공명하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일기 속 여성 인물도 김채원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게 매력적인 존재로 다가왔고요. 그런데 나름대로는 파격적인 측면도 있고 기존의 의식을 깨보려고도 하는 것 같은데, 여성의 자기인식이 확장되고 발전된 지금의 눈으로 보면 조금 답답하게 느껴지는 측면도 없지 않은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딱히 이 작품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닐 수도 있고요.
권여선 저는 그렇게 답답하게 느끼진 않았어요. 어느 시대에나 여성에 대한 인식의 틀이 있는데, 그 틀 역시 리얼리티를 갖고 있거든요. 60년대를 다루면서 오늘의 잣대를 적용하거나, 전혀 다른 개성의 인물에게 작가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는 게 더 문제지요. 아무리 전투적인 페미니스트라도 자기 어머니를 오로지 답답하다는 식으로만 대할 수는 없죠. 사실 저는 지금도 여성문제가 답을 찾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항상 착종되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김채원의 작품에 등장하는, 작가와 비슷한 세대의 여성들은 다짜고짜 단도직입하지 않고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기 때문에 애틋한 연민을 자아내요. 그들은 나이가 많은데도 계속 자신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질문을 해요. 김채원처럼요. 그런 진정성이 좋아요. 여성문제는 점점 풍요로워지는 여성의 몸과 같아서, 초크로 딱 재단해버리고 끝낼 문제가 아니죠.
신용목 오늘날의 젊은 세대도 성 문제에 있어서 기본적으로는 진보적으로 접근하고 있고 페미니즘 논의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만, 그것이 절박한 자신의 문제가 되었을 때는 여기 작중인물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이론과 실제의 괴리랄까요. 그게 사회문제로 부각되는 사례도 종종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래서 저는 정홍수 선생님의 말씀을 다른 식으로 이해했어요. 정말 몰라서 답답할 수도 있지만, 알고도 그러는, 그럴 수밖에 없는 데서 오는 답답함?
정홍수 「등뒤의 세상」을 보면, 여성 화자가 자신의 집을 ‘살아 있는 무덤’이라고 부르는 대목이 나옵니다. 무덤이긴 하나, 살아 있는 곳. 이 양가적인 느낌 속에 김채원 소설의 중심인물들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과 직접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세상 속으로 한발짝 내미는 것을 어려워하지만 자폐적으로 스스로를 가두고 거기 안주하지는 않죠. 그 속에서 조용히 세상과의 교섭을 갈망하고, 어떻게든 삶을 긍정하고 의미화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지금 여자에게 낯설고 생소하다”(51면)라는 발언에 담긴 위태롭지만 절실한 존재 회복의 열망, 그런 감각을 이토록 지속적으로 신선하게 내보일 수 있다는 게 놀랍네요.
권여선 자폐와 교섭 사이의 긴장이 공간에 대한 빛나는 감각을 낳는 것 같아요.
정홍수 『쪽배의 노래』는 시대의 증언, 풍속사 측면에서도 이야기할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만, 이쯤에서 정리해야겠습니다. 이번 소설집을 계기로 김채원 선생의 작품활동이 좀더 활발해지기를 기대해봅니다.
전성태 『두번의 자화상』
정홍수 전성태 소설집 이야기로 넘어가볼까요. 작가의 말을 보니 등단 20년이더군요. 소설집을 읽으면서 ‘무르익었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삶의 구석구석을 고르게 살피고 헤아리면서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는 느낌이었어요. 일본 바둑계에 타까카와 카꾸(高川格)라는 기사(棋士)가 있었는데, 중앙으로 한칸 뛰는 평범한 행마(行馬)로 한 세대를 풍미해 평명류(平明流)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 ‘평명’이란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냥 툭툭 평이하고 평범하게 이야기를 이끌면서 소설을 짜나간다 싶은데, 읽고 나면 울림도 크고, 다루고 있는 주제의 무게도 새삼 돌아보게 되더군요.
권여선 읽고 나서 우리에게 전성태가 없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통 리얼리즘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도 좋았고, 거기에서 은근슬쩍 빠져나와 다른 세계를 기웃거리는 작품도 좋았습니다. 전성태가 갖고 있는 미덕이 이전에는 넓이였다면 이젠 거기에 겹까지 더한 것 같아요. 작품 하나하나가 다 좋았지만 특히 「국화를 안고」 「성묘」 「소풍」 세 작품이 가장 좋았어요.
정홍수 동의합니다. 가령 「성묘」의 경우 묵직한 주제인데도 그 주제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인물 하나하나에 고르게 시선을 주고 챙겨나가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막 자대배치를 받아 군기가 잔뜩 든 신참병사의 모습이 박노인의 시선을 통해 애틋하게 그려지는데, 부인 심씨와의 해학적인 실랑이와 함께 그런 것들이 결국 ‘적군묘지’라는 원경(遠景)의 역사적 비극을 굳이 정면으로 따지지 않으면서도 지금 이곳의 이야기 속으로 서서히 안착시킵니다. 그런 자연스런 흐름 위에서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박노인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데, 그 성찰의 무게가 정말 만만치 않습니다. “적군의 묘지에 제물을 올리는 아주 생경하고 특이한 경험들에 대해 그는 생각했다. 군인으로서, 시민으로서 왠지 감당이 안되지만, 그러나 은밀하게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이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이게 인간적인가? 그래서 나는 사람인가?”(195면) 그냥 자연스러운 인간적 감정의 발로조차 이런 자기검열에 시달려야 한다는 사실이 정확히 분단의 상처나 이데올로기적 적대가 오늘의 우리 삶을 억누르는 지점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박노인이 버스에서 본 어떤 여성을 두고, 적군묘지에 국화를 두고 간 사람인가 상상하다가 “기억에는 오래 남지만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는 한나절의 여행을 처녀는 다녀오는지도 모른다”(196면) 하고 생각을 고쳐 잡는 대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분단의 문제’를 우리(혹은 젊은 세대)가 어떻게 인식하고 겪어내고 있는지에 대한 유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실제로는 막중한 현실의 문제로 존재함에도, 일상에서 분단현실에 대해 갖고 있는 이상한 거리감 같은 것 말입니다.
권여선 「망향의 집」에서도 성묘가 중요한데, 요즘 우리에겐 성묘나 제의 같은 게 예전처럼 큰 의미는 없잖아요. 그런데 그런 회고적 의식에 인간의 원초적인 질문을 얹어서 짚어주니까 그게 참 묵직하게 다가오더라고요. 북한에서 성묘 한번 갔던 일 때문에 평생 큰 고초를 겪고 인생이 끝장난 인물에 대해, 주변의 실향민 노인들의 반응이 “참 복 받은 양반일세, 고향을 다 다녀오고”(223면) 하는 식인데, 이게 굉장히 슬픈데도 이상하게 웃겨요. 이렇게 비극적인 상황에 유머가 작동하면서 절묘한 균형감각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신용목 미는 힘과 당기는 힘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요. 웃을 찰나에 울게 하고 울 찰나에 웃게 만드는 미묘한 순간을 잘 빚어내는데, 그것이 극적인 장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필연성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는 점이 놀라웠어요. 저는 ‘로동신문’ ‘망향의 집’ 등의 제목을 본 젊은 독자들이 어떤 생각을 할까 상상해봤어요. 두 부류가 있을 텐데, 하나는 고루하거나 낡았다고 여기는 부류겠지요. 대체로 ‘분단’이라는 소재가 주로 교과서나 필독서를 통해 다뤄지던 방식에 익숙한 독자들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삶과 너무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거기서 판타지적 요소를 읽어내는 사람들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몇 페이지만 넘기면 그 둘의 예측이 모두 빗나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예요. 판타지가 아니라 실재를 다루면서 고루하지 않은. 지금까지 두분 말씀이 바로 그 힘을 이야기하신 것 같은데요, 한 장면 한 장면을 놓칠 수 없게 만드는 뭔가가 있어요. 한 사람의 삶이나 한순간의 상황을 소설 문장으로 옮겼을 때, 사진이나 영상, 어떤 특수효과로도 도무지 대체할 수 없는 세계가 탄생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를 느꼈습니다. 그만큼 문장이 하나하나 섬세하다는 뜻이겠죠?
권여선 보통 남성작가가 여성화자를 내세워서 쓰면 사소하게라도 뭔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기 마련인데, 「국화를 안고」의 여성화자는 그 캐릭터의 뼈가 보인달까요, 여성작가가 쓴 것만큼 자연스럽게 이입이 돼서 놀라웠어요. 사실 그 소설에는 애틋하고 정겹다고 할 만한 인물이 거의 없고, 서로의 관계도 무뚝뚝하게 그려지는데,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속으로는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분위기이고, 서사로만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서술의 갈피갈피에 깃들어 있어요. 거칠게 말하면 어떤 여자가 늘 돌던 산책코스를 한바퀴 도는 이야기에 불과한데도 그 행로에 장편에 육박하는 내용이 들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껴 읽게 됐고, 읽고 나서도 여운이 길게 남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설정이 너무 작위적이라 할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게 전성태에게는 인위적 설정마저도 흔적 없이 녹여내는 힘이 있어요. 그의 글은 무한히 허용하고 기꺼이 한통속이 되고 싶은 자발적 에너지를 가져다줘요.
신용목 등장인물이 소설을 수행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인물들만 세워놓았는데 그들로 인해 이야기가 자동적으로 이어지는 거죠. 기획된 상황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그래서인지 독자인 내가 그 캐릭터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그들에게 감정이입이 되고 자연스럽게 객관적 거리가 허물어지더라고요. 그때부터 분단이든 광주든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거나 일부러 멀리 돌려세워놓은 이야기들이 내 관심의 중심으로 쑥 들어오는 거죠. 왜, 군인이 되기 전에는 서울역에 군인이 그렇게 많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요. 이번 소설집에서 다룬 소재들이 각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홍수 인물을 향한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게 가능하지 않나 싶어요. 어떤 인물이라도 그 자리에 있는 삶으로 존중해주는 느낌이 있습니다. 「로동신문」의 경비원들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 있잖아요. 아까 ‘성묘’ 모티브가 반복된다는 이야기를 권여선씨가 했는데, 「망향의 집」에서 납북되었던 기로성 노인이 금강산 온정리 여관에서 머물다가 그곳이 고향집 앞이란 걸 알게 되고, 북쪽 안내원이 딱하게 여겨 몰래 성묘길을 안내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삽화를 소설에 들일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체제의 벽 아래에서 사람들끼리 돌파해버리는 어떤 지점이 있는데, 전성태 소설이 품고 있는 인간에 대한 시선, 태도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단순한 온정주의만은 아니지요. 「국화를 안고」의 성묘길에서 여교사의 애도는 여러겹의 욕망을 두르고 펼쳐지잖아요.
권여선 그래서 우리도 이상한 온기를 전달받는 것 같아요. 두고 보자, 무엇 하나라도 매의 눈으로 잡아내겠다, 이를 악물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슬그머니 무장해제 되고 만다고 할까요. 작가에게는 온정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희미한 존재들을 연대시키고 독자까지 거기에 덩달아 연대시키는 인력(引力)이 있습니다.
신용목 정말 삶이 아니고서는 안되는 서사, 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뻔히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더 알고 싶지 않았던, 고루하게 여겼던 것들이 생동감을 얻는 이유도 그것이겠지요? 솔직히 저도 시를 쓸 때, 가난한 노동자나 노숙자 이야기는 안 쓰거든요. 너무 뻔하게 여겨져서. 그런 소재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미학적 성취를 보여주기도 힘들고 자연히 비평적 조명으로부터도 멀어지고, 그래서 그런 고된 삶이 시적으로 환기되는 사례를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게 사실이에요. 소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장편이라면 또 다르겠지만, 단편에서 지금 ‘분단’ 문제를 연작처럼 다룬다는 사실 자체부터가 남다르게 느껴졌어요. 그건 소설을 대하는 태도의 진지함에서 오는 거겠죠.
정홍수 전체적으로 미세한 삶의 결들을 붙잡아 소설 안에 살려놓는 능력이 정말 뛰어납니다. 동료 작가들도 부러워할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집 마지막에 실린 「이야기를 돌려드리다」는 어머니에게 바치는 소설이자 전성태의 소설론으로도 읽혔는데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설화나 신화와 어느만큼은 공존하면서 거기서 위로를 얻고 때로는 삶을 경계하기도 했던 앞세대의 삶을 복원하고 추억하는 이야기인데, 어머니가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을 거꾸로 아들의 기억, 여기서는 소설을 통해 복원해간다는 구도는 그 자체로 기억의 형식인 소설의 자리를 감동적으로 환기해냅니다. 서두에 “내 소설에 조금의 과장이 있었더라도 그것은 삶을 포위한 현실을 명확히 그리기 위해서였다”(306면)라는 진술이 있는데, 끝내 자신의 그 진술을 풍성하게 증명해내죠. 그러면서 앞으로 그 과장, 환상에 전성태 소설이 조금 더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수도 있겠다는 예감도 들더군요.
권여선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를 돌려드리다」와 「소풍」이 연결될 수도 있겠네요. 전 「소풍」의 유연함과 개방성이 긍정적으로 느껴졌어요.
정홍수 「소풍」은 가장 최근의 작품인데 스타일에서 변화도 느껴집니다. 묘사를 간결하게 가져가면서 소설의 울림을 증폭시키는 방향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이 소설에서 할머니의 치매를 드러내는 방식 못지않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위인 세호가 알코올중독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점이었는데, 이 두가지 모티브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제시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우리 시대 평균적인 가족의 초상, 그 환부와 고통을 잘 그려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용목 화소(畵素)만 조금 조정했는데도 우리가 보지 못했던 색깔들이 또렷하게 화면 위로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 쉽게 스쳐가야 할 법한 문제를 쉽게 스쳐가듯이 다루고 있는데도 오히려 그 무미건조함이 되레 소소한 장면들을 자꾸 되돌아보고 신경 쓰게 만드는 작품이었어요.
권여선 평범한 가족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사막 같은 느낌을 주기가 쉽지 않죠. 차라리 가족 문제를 명백히 부각하는 게 편하지요.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묘한 딜레마를 느꼈는데, 한편으론 이 가족의 장래를 떠올리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다가도, 다른 한편으론 그래 아직은 괜찮아, 그다지 심각하지 않아, 하면서 자꾸 위안을 하려드는 이중의 정서를 갖게 만드는 설정이 참 절묘했어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전성태는 과소평가된 작가입니다. 여태껏 그에게는 리얼리즘 작가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죠. 리얼리즘이 끝났으니 리얼리즘 작가도 모개로 끝났다는 식의 섣부른 판정이 있었는데, 저는 오히려 전성태 때문에 이 시대 리얼리티가 빛과 생기를 얻고 그 유효성을 다시 물을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김성중 『국경시장』
정홍수 이야기의 창안과 개발, 환상의 직조 등에서 김성중이 보여준 특별한 능력은 이미 첫 소설집 『개그맨』(문학과지성사 2011)에서 확인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나 환상이 현실과의 적절한 긴장, 아이러니 속에서 표현, 통어되면서 소설이 전체적으로 밀어붙이는 질문 또한 신선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소설집 『국경시장』 역시 작가의 그런 재능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물들의 욕망이나 정념이 좀더 전면화되면서 이야기나 환상에 어떤 관능성까지 담기게 된 것 같은데, 탐미적이라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욕망의 극한으로 치닫는 인물들의 자기탐닉이 환상이나 이야기의 탐닉과 뒤섞이는 지점은 매혹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종의 자기파멸이라는 테마로 귀결되는데, 소설에서 가장 풍성한 이미지로 제시되는 지점도 그런 대목입니다. 그런데 그 탐닉의 환상이 만들어내는 소설적 질문은 어딘지 익숙한 알레고리나 선행 관념의 세계를 넘어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소설적 문제의식은 조금 약화되었다고 할까요, 뭔가 과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권여선 저는 「국경시장」 「동족」 「에바와 아그네스」 세 작품이 문제적이라고 봤고, 「쿠문」이나 「관념 잼」 「필멸」 같은 작품은 구성이 먼저 있고 그 속을 채워 넣는 데 급급한 것 같아서 다소 얕고 동화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김성중만의 득의의 영역과 독특한 위상이 있지만 그 스타일에 대한 강박이 과도해 새로운 지평을 못 열어젖히는 게 아닌가 싶었고요. 「국경시장」 「동족」처럼 환상적인 방향으로 가든 「에바와 아그네스」처럼 현실적인 방향으로 가든, 방향이 분명한 쪽이 좋은데, 후자의 작품들은 좀 어정쩡해서 안타까웠어요. 물론 어느 쪽 작품이나 김성중 특유의 문체의 반짝임과 귀여움은 매력적이었어요. 하지만 그걸로만 승부를 걸 수는 없고, 어쨌거나 후자 같은 소설에서도 현실의 심연을 엿보는 ‘최후의 한방’ 같은 게 확보되면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신용목 전체적으로는 두분과 비슷한 독후감이지만, 저는 유려하게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며 특정한 장소나 상황의 이미지를 잡아내는 재능이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문장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 상황을 감싸는 듯한데, 가령 「국경시장」에서 시장을 가득 채운 이국적인 불빛이라든가, 「쿠문」에서 쿰쿰한 지하실에 꽉 찬 화려한 벌레들을 묘사하는 부분은 아주 뛰어나더라고요. 그런 장면들에 홀려서 소설을 읽어나가게 됐어요. 그런데, 책을 덮고 나면, 허전해지죠. 그 매혹이 지면 바깥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것인데, 말씀하신 것처럼 흥미로운 구조와 이미지를 떠받치고 있는 사유나 인식의 깊이가 의심되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에바와 아그네스」가 좋았어요. 둘의 우정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면서도 국제화시대의 각별한 성장담처럼도 보이는데요. 세계의 사건 속에 던져진 생의 우연을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세계와 관계와 삶의 순간순간에 그 이유를 묻는 듯한 인상이 있었거든요. 비슷한 이유로 저는 「쿠문」도 흥미로웠어요. 짧게나마 예술적 천재성이 세계를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고민을 던지는 부분이 눈에 띄었어요. 욕망을 개인의 차원에서 소비하지 않고 사회적 과정 속에 녹여내려는 기미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 고민이 진척되어 제대로 살아났더라면 더 흥미로웠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정홍수 「국경시장」에서 기억이 화폐인 물고기 비늘과 교환된다는 테마는 기발하고 흥미롭긴 한데, 아이디어 차원에서 그친 느낌이 있습니다. 달밤에 질주하듯 펼쳐지는 이미지의 압도적인 힘이 주제적 차원과 잘 맞물리지 못한 거죠. 근사한 이야기를 읽었다는 느낌은 있는데 이를 통해 다가오는 소설적 질문은 그다지 크지 못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현실과의 긴장력을 확보하는 문제에서 좀더 밀어붙여야 할 지점이 있는데 그걸 찾아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신용목 한편으로는, 욕망의 문제를 정신분석이론 같은 데 맞춰서, 이를테면 「필멸」처럼 특정한 배경이나 원인을 구조적으로 마련한 뒤, 인물들 속에 들끓는 욕망을 다루는 방식은 흔하잖아요. 그런데 김성중은 대체로 그런 방식을 뒤로 물린 채 순전히 인물들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자신 속에 내재된 욕망을 발견하게 하고 그것을 하나씩 끄집어내게 만들어요. 일종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힘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할 텐데, 이렇듯 미처 다 표현되지 못한 흥미로운 요소가 많은 것 같아요.
권여선 그렇기도 하지만 「국경시장」에서 다루는 기억, 욕망, 탐닉, 파멸의 과정이 보편적 인간의 문제와 더 잘 겹치려면 최소한의 문제성이 소설 내부에 장착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표면의 산개하는 이미지들로만 소비했다는 생각이에요. 이미지 자체만으로도 어떤 광휘가 있을 순 있지만 그게 김성중 식의 귀여운 우주에서만 빛나는 게 문제죠. 김성중에게는 놀라울 만큼 재빠르고 산뜻하고 무언가를 탁 포착해내는 찰나의 탄력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게 단단하고 질긴, 끝끝내 이어지는 어떤 소설적 힘줄로 연결되지 못하고 그저 반짝반짝 명멸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정홍수 그런 가운데 「관념 잼」은 작가 스스로 자신의 소설 쓰기가 처해 있는 곤경을 의식하고 드러내는 메타소설의 측면도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카프카(F. Kafka)의 「변신」, 가까이는 최인호(崔仁浩)의 「타인의 방」을 선행 텍스트로 두고 일종의 환상우화처럼 전개되는 소설이죠. 그런데 생생하고 파토스도 살아 있습니다. 소심하고 무능한 낙경씨란 인물이 주인공인데, 부인과도 이혼하고 회사에서도 쫓겨납니다. 퇴직금의 절반은 친구에게 떼이고요. 지방 소도시로 내려가 가진 것, 먹는 것, 생활반경 모두를 최소화하는 생활에 돌입합니다. 자기소외를 극복하는 나름의 처방인 셈인데, 그 하나하나의 수순이 그 자체로 리얼하고 낙경씨 나름의 논리 위에서 진행됩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만의 평화를 구축하죠. 그런데 그때부터 사물들의 반란이 시작되고 주인공도 결국 사물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앞의 평화야말로 자기 환상이었던 거죠. 곰 모양의 유리병 안에 담긴 채 의식만 남게 된 주인공이 ‘생각을 하자’고 외치며 이중화된 환상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장면은 곡진한 느낌을 줍니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주인공이 또다른 세계의 문을 열려는 대목에서는 열쇠에 닿는 빛, 소설에서는 달빛으로 표현된 그 존재의 가능여부와 상관없이 소설을 읽는 우리 역시 그걸 갈구하게 됩니다. 소설이든 삶이든 환상의 존재방식이란 결국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핍진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이 소설에선 현실 긴장력이 시종 작동하고 있었던 거죠. 뛰어난 성장소설인 「한 방울의 죄」만 보더라도 작가가 자꾸 너무 먼 데서 이야기를 구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신용목 「국경시장」을 포함해서, 소설을 끝내면서 모호하면서도 묘한 여운을 남기려는 것 같았어요. 미스터리 효과라고 해야 할까요? 영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마무리 기법과 비슷한데, 많은 고민 끝에 공들여서 처리한 느낌은 주지만 그것이 현실에 가하는 유효한 질문으로 이어졌다면 소설 전체가 새롭게 환기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권여선 요즘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그렇게 끝을 놓아주거나 열어놓으면서 모호하게 결말을 맺는 게 일종의 트렌드까지 되어버린 듯한데, 그것이 작품 전체를 ‘거슬러 솔질하는’ 가능성으로 작용하기보다는 애매한 의혹에 그치거나 결말 맺기의 무능을 은폐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요. 환상이든 관념이든 현실과의 팽팽한 대면이 없으면 안되는데, 그 대면을 끝까지 못 밀고 나갈 때의 난관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정홍수 이즈음의 문학에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체험의 결핍은 어느 면 불가피한 거라고 봐야 할 텐데, 말하자면 체험의 방식이나 질이 많이 달라진 거겠죠. 그럴 때 소설 속에 현실을 들여놓는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겠죠. 김성중은 그 방식을 환상의 창안이나 선행 텍스트의 혼성적 변형에서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용목 시대의 중심부와 직접 부딪치는 측면에서라면 사회·역사적 경험의 결핍을 가졌겠지만, 정치성의 측면에서 젊은 세대에겐 스스로의 경험이 있을 텐데요. 말씀하신 결핍은, 실제로 그렇다기보다는 젊은 세대 스스로가 자신들의 정치적 경험을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상대적 결핍감이겠죠. 환상 같은 여러 장치를 많이 사용하는 것도 그 때문은 아닌지. 하지만 그 결핍감도 경험의 일부라는 측면에서, 요즘 시나 소설에 많이 배어 있는 하위문화도 이제 다른 장르와의 통섭으로 구분하기보다는 젊은 세대의 경험치 안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될 필요도 있겠고요. 그래서 말씀하신 현실과의 결합이 사실은 자신의 정직한 경험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해요.
권여선 「에바와 아그네스」 같은 경우 시간적으로 역행의 구성을 취하면서 현실의 어떤 다른 가능성들, 현실을 거꾸로 볼 때의 색다른 미적 차원들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걸 보면 김성중은 환상이 아니어도 충분히 가능한 새로운 지점을 찾아낸 것인데 말이죠.
정홍수 환상에 대해 젊은 작가들이 강박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환상을 대하는 태도도 좀더 실질적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리얼리즘과 환상이 꼭 배치(背馳)될 이유도 없지요. 환상이 도입돼서 그 힘으로 작품이 풍성해진다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고요.
신용목 네, 리얼리즘이라고 하면 왠지 딱딱하고 고루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문제인 것 같아요. 어쩌면 서구든 우리든 지난 시기에 리얼리스트 논객들이 부르주아 문학을 비판할 때 사용했던 논리가 오히려 리얼리즘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현실의 리얼리티는 말씀처럼 오히려 환상과 자유분방한 상상까지 다 포함하고 있는데 말이죠. 한편으로는 군데군데 통찰이 빛을 발하는 대목들이 많아요. 「에바와 아그네스」에서 “절망은 절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이 예전처럼 싱싱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109면)라는 부분처럼요. 그것을 전체적인 구도로 확장하면 좋겠어요.
권여선 김성중 소설에서 중요한 키워드가 욕망인데, 결국 어떤 욕망인지가 중요합니다. 낭만주의적인 정념에 의해 추동되는 상투적인 욕망을 이 시대의 욕망과 등치해선 안되죠. 이 시대에 산재한 정말 이상한 욕망들을 잡아낼 수 있어야 해요. 시대에 대한 인식이 빠지니까 욕망이 너무 낭만화된 측면이 있어요. 그래서 아름답고 매력적인 진열장 안에 낡고 바랜 욕망들이 전시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문인수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정홍수 문인수 시인의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풍경을 마음으로 옮겨내서 붙잡는 힘이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적 풍경에는 시인이 그 안을 통과하고 있는 현재와 지나온 시간의 역사가 동시에 새겨져 있어서 감흥을 높입니다. 서시인 「굵직굵직한 골목들」에서 바닷가 산동네가 복잡하게 얽힌 골목들의 질긴 팔심(넝쿨, 동아줄)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시적 직관 같은 게 대표적인 예일 텐데요. 그 산비탈 골목들을 단지 한쪽에서 쳐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꾸불꾸불한 골목을 하나하나 밟아본 시간의 힘이 느껴집니다. 「감나무」에서도 고향집 감을 딸 때 매년 “골라 딛는 순서가 있다”고 한 뒤, 바로 다음에 “지금은 진토가 되었을 아버지의 등뼈,/허리 휜 그 몸 냄새를 군데군데 묻혀둔 바이지만/타관 길엔 도통 어두운 이 말씀”으로 이어지는데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과 시간이 그대로 전경화됩니다. 특히 “타관 길엔 도통 어두운 이 말씀”이 환기하는 시적 울림은 유적처럼 고향집을 지키고 있는 감나무의 자리를 아버지의 삶에 자연스럽게 겹쳐냅니다.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 시대 서정시가 도달할 수 있는 한 정점이 아닌가 생각됐습니다.
권여선 그 시 마지막에 감나무의 검은 골조와 저녁노을을 그린 대목에서는, 이전의 동선이 마무리되면서 탁 정지된 풍경이 도장처럼 찍혔다고나 할까요.
신용목 움직이는 사물이나 서사적인 시를 쓸 때조차도 왠지 사위를 고요하게 처리하는 듯한 느낌이 들죠. 세계의 기구한 구석을 그것만의 고유한 무대로 올려놓는 장기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데 제 생각에 문인수 시의 가장 큰 특장은, 육성을 통해 문장을 짧게 끊어치면서 대상을 찍어낸다는 거예요. 문인수의 화풍이죠. 문인수 시인이 우리 문학사에서 평가받아야 할 지점이 하나 더 첨부되어야 한다면, 이렇게 단문을 통해서 묘사를 분할하면서 풍경들이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시인만의 육성이 들리죠. 이를 통해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기법은, 우리말 운용의 한 전범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홍수 정말 그렇습니다. 「죽도시장 비린내」의 마지막에 “여긴 비린내 아닌 시간이 없어,/그것이 참 깨끗하다”라고 끊어버리는 시적 호흡은 절묘하더군요. 그런데 조금은 사변적인 시처럼 보이는 「중력」에서 ‘중력’을 ‘세월이 올라탄 이름’ ‘내리누르는 이름’으로 바꾸어 호명하면서 삶의 어떠함을 환기해내는 시적 전개에서는 뭔가 장엄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적이고 고요한 세계 안에 우주적 역동을 품어내는 힘 같은 거 말이죠. “어둠을 쪼아 먹고 살찌는 별들”에서 시작해서 “오, 여명이 녹여 먹는, 여위는 별들……”로 끝나는 하룻밤의 시간을 통해서 그런 시적 그림을 그려낸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조묵단전(傳)」 연작은 돌아가신 노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요. 첫번째 시의 “참, 너무 가벼워서 무겁다. 등에,/나비 자국이 싹 트며 아픈 것 같다”나 두번째 시 마지막 연 “환갑 지난 내 몸무게가 방금, 저/창밖/목련 피는 환한 시늉을 겪었다” 같은 대목은 할 말을 잃게 만들더군요. 하지만 「명랑한 거리」 같은 경우, 시인으로선 시적인 것을 포착했다고 생각한 거겠지만, 정말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스스로를 과신한다고 할까, 사적인 경험의 진술에 그쳤다 싶은 시들이 꽤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신용목 시인들이 지극히 사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시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요, 중요한 것은 사적인 순간이 사적이지 않은 순간으로 갈 수 있게 만드는 일이겠지요. 문인수 시인에게는 기구한 것을 기구하게 보여주지만, 그것을 표구해서 벽에 걸어놓는 느낌이랄까요? 그럴 때 오는, 구질구질하거나 질척거리지 않는 담백함이 있는 것도 같아요. 문제는 그 풍경이 구체적인 경험을 통과하는 것이라면, 그 경험에 대한 인식적 차원의 개입이, 꼭 의미화되어 드러나지 않더라도, 시의 어조나 행간의 배치, 분위기를 통해서라도 특수화되어야 하는데, 표현방식의 패턴이라든가 호흡의 간격이 평소와 다름없이 일정하게 유지되면서 긴장감이 흐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아요.
권여선 제가 보기에 문인수 시의 미적 핵심은 삶을 박막(薄膜)화하는 데 있는 것 같아요. 거기에는 수평면도 있고 수직면도 있죠. 「물빛, 크다」에는 기울이는 대로 흐르는 수평면이 있고, 「감나무」 같은 경우엔 수직면이 있어요. 그렇게 평면으로 납작해진 세상, 깊이를 결여한 풍경이 주는 인상이 참 묘했어요. 깊이라는 것은 그 안에 공간을 포함하고 있어서 거기 곡진함이나 절박함이 담기고, 그 속에서 뭉개지는 존재가 있는 법인데, 문인수의 시는 그런 것 없이 곧바로 ‘나는 내뺀다’로 요약돼요. 내가 사는 세상이 나와 별개로 저기 걸려 있다는 느낌, 그래서 세상과 나 사이에 결코 좁혀지지 않은 미적인 간격이 있어요. 그런 거리와 평면화가 어떤 의미에선 좀 서운할 수도 있지만, 그 평면이란 게 또 막 부친 부침개처럼 온기가 있거든요. 납작하지만 바삭하고, 보기도 좋고 맛도 있고, 따뜻하면서 명랑해요. 아주 담백한 시적 차원이죠. 축축하게 감겨들지 않고 ‘저기’라는 그 적절한 거리를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는 게요. 그래서 좀 서운해도 서운해하지 않고 싶어져요.
정홍수 「봄날은 간다, 가」를 보면 본디 노래 「봄날은 간다」에는 없는 ‘제4절’을 시인이 씁니다. 그런데 그 4절이 시적인 전환을 만들어낸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권여선 거기서 적절한 거리가 무너진 것 같아요. 그 시의 상황은 문인수의 시세계에서는 다소 예외적으로, 시인이 자기와 어떤 교섭이 있는 현실 속에서 내빼지 않고 눌러앉아 흥을 공유하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거리가 확보되어야만 가능한 어떤 차원에 이르지 못하고 심심한 시가 되고 말았다는 느낌이에요. 거리가 너무 좁혀지면 심심하고, 너무 멀어지면 서운하고 그러네요. 그래도 저는 워낙 문인수의 탁월한 언어감각과, 유사성에 대한 놀랍도록 예민한 촉수에 감탄했습니다.
정홍수 사실 그 과정에서 댓가로 희생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시가 풍경으로 안착하려고 할 때 그걸 거부하는 또다른 힘이 개입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신용목 아까 말씀하신 ‘내뺀다’라는 부랑자 이미지가 그런 특성을 만드는 핵심이라 생각해요. 짧은 시에서도 많이 나타나는데, 그 자리로 가서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을 찍고 돌아서는 거죠.
권여선 시적인 자아가 마모되고 으깨질 공간의 깊이가 결여돼 있으니까요.
신용목 같은 맥락에서, 세계를 자아의 순간적인 정념으로 포착하면서도 결국 풍경 자체로 되돌려놓는다는 것은, 그 방법 면에서나 효과 면에서나 선시(禪詩)적인 특성이 느껴지게도 하는 것 같아요.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라는 시집의 표제부터 삶이나 역사의 질곡, 세계의 고통에 정념을 안착시키지 않으려는 태도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내뺀다’는 표현은 삶에 대한 태도뿐 아니라 시에 대한 태도까지 포함한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자신에게 다가온 사건들을 시로 쓰면서, 미학적 계몽도 삶의 구원도 아닌 풍경 자체로 바라보는 시선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요. ‘아프다’고 써도 통증에 앞서 그것을 관조하는 시선이 느껴지는 이 지독한 타자성이 오히려 세계로부터 소외된, 그리고 자신의 시로부터도 소외된 시인의 형상을 떠올리게도 만드는 것 같아요. 자신의 육성을 들려주면서도 그 육성이 만들어낸 세계의 바깥을 맴도는 운명을 지녔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시에 대한 어떤 결벽증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요? 정념의 개입을 적절히 통제하다보니 오히려 시인의 또렷한 시선만 드러나는 것은 아닐지……
정홍수 뒤에 다룰 송승언의 시와는 정반대인 것이, 송승언 시는 그렇게 바라보는 시점 자체를 폐기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문인수의 시는 그것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는 자리와 풍경 속으로 시선을 돌려주는 지점 사이에서 어떻게 긴장을 만들어내는가, 거기에 시적 성패가 달려 있다는 느낌입니다.
신용목 정말 말하듯 써요. 그냥 이렇게 쓰면 시가 안될 것 같은데, 문인수 시인이 끊어놓으면 시가 되죠.
권여선 시인은 “나는 지금 텅 빈 비밀”(「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이라고 말하는데, 텅 비어 있는 존재가 납작해진 세상을 미학적으로 깁고 누비는 능력이 놀라워요.
신용목 한편으로는 어떤 욕망 자체가 없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시적 욕망도 그렇고 삶도 그렇고 그래서 특유의 담백함이 가능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최정례 『개천은 용의 홈타운』
정홍수 최정례 시인의 이번 시집을 정말 좋게 읽었습니다. 일상, 생활이 단단히 받쳐주는 가운데, 그 생활의 조각들이 어떤 시적 연상, 전환의 순간을 통해 삶의 절실한 환유로 바뀌는 지점이 좋았습니다. 시의 중심을 비워놓은 채 미지의 상태로 걸어가다가 어떤 연상이 틈입해오고, 그것이 일상의 어떤 대목을 다시 끌고 나가고, 그러다 다시 되돌아오는 진퇴의 운동 속에서 시의 중심을 형성해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치밀한 설계라기보다는 뭔가 우연에 맡겨둔다는 느낌이 강했다는 겁니다. 연상이나 시적 전환의 순간이 무언가 미루고 미루다 돌연 이루어지는 것 같은데 그 리듬이 정말 신선했어요. 이를테면 「그 시간표 위로」에서 “몇 계절이 지나도록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처럼,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모르겠다”고 한 뒤, 갑자기 “언젠가는 이 말을 하리라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때가 올 것이라고”라고 전환되는데, 시를 읽다보면 그 ‘때’의 시제가 저 과거 속 어딘가부터 바로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언젠가’의 미래 모두를 품으면서 존재하는 ‘기다림’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되면서 이 시 앞쪽의 ‘장롱 문 안쪽에 손바닥 반만 하게 붙여둔 전철 시간표’로 환기되는 아픈 시간들과, 뒤쪽의 ‘결국 하지 못하게 되고 말 것 같은 말들’이 그 기다림 안으로 수렴되고, 일상의 서러운 지평으로부터 상승해서 숭고한 무엇이 됩니다. 시집의 ‘짜장면 배달부’ ‘딸기’ ‘잃어버린 장갑 한짝’ 등이 이렇게 해서 처음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말을 걸어옵니다. 특히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에서 ‘짜장면 배달부’라는 말이 “부르기 전에 도착할 수도 없고, 부름을 받고 달려가면 이미 늦었다. 나는 서성일 수밖에 없다”는 삶의 절절한 환유로 바뀌는 순간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시의 마법이란 게 이런 걸까 싶으면서 말입니다.
신용목 최정례 시인이 이전에는 순간을 절단해내면서 그 단면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나 정념을 드러냈다면, 이제는 맞닥뜨린 순간을 편한 어조로 풀어놓는데도 자연스럽게 시가 되는 지점에 이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컨대 시를 쓰는 자가 아니라 시가 되는 자가 된 것은 아닌가. 전혀 다른 장면일 수밖에 없다고 여겼던 이야기가 느닷없이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지는 이유도 그렇고, 예로 드신 대목에서도 보이듯이 거시적이거나 큰 형상을 그리지 않고, 삶의 표피나 작은 부분에서 시작하는데도 읽다보면 모르는 사이에 생의 핵을 통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요.
권여선 두분과 달리 저는 처음엔 다소 진입장벽이 있었어요. 처음부터 좋진 않았다는 뜻이죠. 제목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무섭게 빠져들었고 퍽 실천적인 독서를 하게 만들었어요. 시 안에 제가 참여할 수 있는 극적인 공간이 마련되어 있더라고요. 어느 순간엔 긴장시키고 어느 순간엔 휘몰아치고, 미처 모르고 읽어가다보면 돌연 이미지와 사유와 일상이 뜬금없는 합을 이루면서 딱 아귀가 맞아버리는 기적이 오고…… 그럴 때의 섬뜩함과 고양(高揚)의 감정은 소름 돋는 경험이었어요. 오랫동안 한 종류의 작업에 골몰해온 사람이 무엇을 만들어낼 때, 무서운 인연이 길을 트면서 결코 만난 적 없는 것들이 만나 미증유의 우주를 구축해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의 저라면 이런 시들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지금의 저는 거의 사로잡혔어요. 시집 전체에서 섬뜩함을 많이 느꼈는데, 또 이상한 장난기와 불길함도 느꼈어요.
정홍수 전 섬뜩함보다는 시적 화자의 분노 같은 게 느껴졌어요. 세상에 대해, 자기 삶에 대해 그동안 꾹꾹 쟁여놓았던 분노를 조금씩 끄집어내는 지점이 있어요. 그래서 강렬한 시가 많아요.
신용목 저도 비슷한 걸 느꼈는데요.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억울함이랄까, 정작 화자 자신은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세계에 대한 것이든 자신에 대한 것이든, 바깥을 향한 것이든 안을 향한 것이든, 무언가 문맥을 비집고 나오는 감정이 감지돼요. 이미지들이 연쇄적으로 맞물려서 이끌려 나오는데, 완전히 이질적이다 싶은 현실과 환시가 뒤엉켜요. 그 사이에 미끄러짐도 아니고 마찰도 아닌, 묘하게 파열되고 있는 분위기가 있는데, 뭐랄까,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미세한 불편 또는 불쾌의 분말 같은 게 피어오른다고 할까요? 기계적인 시각일지 모르지만 그 세대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것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어요. 노골적이진 않지만 분명한 실체로 깔려 있는 세상의 편견이나 닫힘을 경험한 세대 말이에요. 그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폭력이 바스라져 있다고 해야 할까요?
정홍수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를 보면 마지막에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건 버티겠다는 이야기인 동시에 짜장면 배달부라는 자리, ‘서성이는’ 자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인정이기도 하죠. 시인은 자기 삶의 시간표를 돌아보면서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나, 어디로 갈 수 있나, 하는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솔직하고 치열한 자기고백과 자기점검이 시를 충전하고 있어서인지 읽는 쪽에서도 뭔가 치열해지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 그러니까 혼신을 다해 읽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권여선 정념도 그렇지만, 사유에 관한 한 오늘 다루는 세 시집 중에 가장 탁월했어요. 그런데 사유의 진행이 말끔하고 유기적이기보다는, 어딘가에서 인식의 뼈마디를 분질러가면서 조립해나가는 난폭함이 있어요. 우리가 작품의 사유에 참여하려면, 리드미컬하게 시인의 사유를 따라가기를 바라선 안되고, 우리 스스로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 A와 B의 어딘가를 각각 힘겹게 분질러서 둘을 맞아떨어지게 만들도록 강제되는 방식이에요. 시 속의 대화도 우리를 호명하는데, 어떤 지적이고 단아한 환상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폐허 같은 공간에서 현실과 환시 사이를 미묘하게 반씩 꺾어 보여주는 식이더라고요. 이쪽에 일상의 팔이 꺾여 나오면 다른 쪽에 환상의 발목이 꺾여 나와 둘이 어떤 불길한 신체를 구성하는 식이죠. 이렇게 쓴다는 게, 어휴…… 앞서 두분이 말씀하신 분노나 억울함이 어느 디위여야 이렇게 시를 파괴적으로 비우고 채우고 하겠나 싶어요.
정홍수 그런데 또 어떤 시편은 아주 유머러스하기도 합니다. 물론 만만찮은 비애를 품은 유머이긴 하지만요. 「쥐들도 할 말은 있다」나 「담쟁이네 집」 같은 경우요. 특히 「담쟁이네 집」에서 “빚에 몰려 급히 팔아버”려, “다시는 안 보려고 멀리 돌아 지나다니던 집”에 대해 그 소유권을 ‘담쟁이’한테 주어버리는 “담쟁이네 집”이라는 구절이 딱 그렇더군요.
신용목 그래서 시의 전체적인 맥락과는 상관없이 「인터뷰」의 마지막 대목이 이 시인이 통과하고 있는 특징적인 지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꿈속에서 지나친 것과 지금 지나치고 있는 것/두려운 것은 딴 세상과 이 세상 사이에 아무것도 없고/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시집이 일상에서 환시를 이끌어내고, 과거와 현재를 계속 섞어놓으면서, 또 그것들을 끝없이 마찰시키고 부딪히게 만들면서 결국에는 아무것도 없는 지점까지 열어놓고 있는 것이죠. 그게 파괴 또는 분노를 통해서일 수도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삶과 생명’에 대한 천착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란 추측도 해봤어요. 3부의 장시(長詩)뿐 아니라, 「고슴도치와 헬리콥터」 등 곳곳에서 생명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이어가는 시편들이 눈에 띄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정홍수 마지막 시 「해삼내장젓갈」에서 “바위틈으로 기어들어 부풀리고 굳어져서 아무도 꺼내지 못하게 할 테다”라는 결의는 정말 무섭고 섬뜩할 정도잖아요. 시인의 시론으로도 읽을 수 있는 작품인데, 후반부의 “간이고 창자고 쏟아놓고 기다려주마. 이 내장 삭아 젓갈 되면 그 아득한 맛에 헤어나지 못할까”라는 구절에서 이 시집 전체를 시인 스스로 요약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권여선 속내를 얘기도 안해주고, 「동쪽 창에서 서쪽 창까지」에서 “이런 식으로 살기를 선택한 것은 바로 너야/그러나 이런 식으로 살게 될 줄은 몰랐지”라거나 「거처」에서 “매미처럼 급하게 왔다 가고 싶을 때” 하는 식의 툭툭 던지는 잽의 매서움과 서늘한 여유도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신용목 약간 풀어진 듯한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각기 다른 크기를 가진 과거와 현재, 심연과 현상이 다름 아닌 삶을 통해 평등해지는 순간을 만드는 데까지 이른 것이겠죠.
권여선 한편으로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받게 돼요. 속으로는 사막이고 폐허일지언정 쓰는 데에 있어선 자유자재하달까. 너의 형식 따위에 더이상 나의 내용을 쏙 끼워맞추지 않겠다는 그런, 넝마 같은 자유.
정홍수 매 시간들을 아프게 보낸 흔적이 곳곳에 박혀 있는데, 그런 시간의 누적 위에서 뭔가 시적인 것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 같습니다. 버려졌던 일상을 기워낸 시적인 힘은 시의 기술(技術) 이전에 고통의 응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송승언 『철과 오크』
정홍수 송승언의 시를 읽으면서 ‘현상학적 괄호’라는 말이 떠올랐는데, 기존의 맥락들을 제거하고 세계나 사물을 비인칭적 풍경으로 포착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체와 사물의 낯설고 새로운 연루의 지점을 생성하려는 시적인 야심이 돋보입니다. 「유리해골」을 보면 “텅 빈 눈으로/텅 빈 눈을 쳐다보았다”라고 하는데 딱 이 자세, 시선이 아닌가 합니다. 주체 쪽만 비우는 게 아니라, 사물 쪽에서의 응시도 뭔가 조정하거나 지우겠다는 태도 말이죠. 그런데 이건 서정적 자아의 권위를 해체하고자 한 이른바 ‘미래파’ 이후 젊은 시인들의 시작 흐름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데, 송승언 시집은 전체가 자신의 시론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방법적 자각이 뚜렷한 것 같습니다.
권여선 저는 현실적 정박점이 있는 시들이 좋더라고요.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같은 작품들이죠. 표제작 「철과 오크」는 매력적이긴 한데, 어떤 원형적인 찬란함만 즐기고 끝난 듯해요.
정홍수 저도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같은 시가 더 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는 아주 평이하게 씌어진 듯하지만 그 자체로 시적 울림도 뛰어나고, 또 강동호(康棟晧)가 해설에서 적절히 언급했듯 시인 자신의 시론을 드러내는 중의적 차원에서도 썩 매력적입니다. 「돌의 감정」도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다만 이 시는 “너에게 호명되지 않는 위치에서 너를 호명하지 않기로 한다”처럼 시론을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낸 듯 보이는 지점이 시 자체의 활력을 제한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제3의 시적 공간을 찾아내려는 점, 상투화된 감각이나 의식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사물의 풍경이 주는 신선함은 분명 매력적인데, 그조차도 어느 수준에서는 하나의 시선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태도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신용목 우선 「철과 오크」부터 상당히 좋게 읽었어요. 책상에서 무언가를 쓰고 읽는 순간에 펼치는 새로운 세계를 환유적 형식을 빌려 유장하게 풀어놓는 재능은 놀라웠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거의 모든 시편을 메타시로 읽어내도 무방할 정도로 글쓰기에 대한 자문이 강합니다. 자신의 시작(詩作) 태도와 방법을 지속적으로 표명하는 것이겠죠. 그만큼 시의 내적 동기, 이를테면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삶이나 생명, 세계에 대한 바탕은 상대적으로 약한 반면, 언어 자체에 대한 고민이 승해서 기술적으로 시를 완성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요. 행간의 틈을 최대한 벌려서 세계와 사물이 가진 순간의 이미지를 살리거나 몽환적인 느낌을 만드는 데 집중하다보니, 세계와 운명적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시적 고민의 빈곤이 의심된다는 지적에는 공감되는 면이 있습니다.
권여선 제 취향은 이렇습니다. 이 시인의 감각이 저에게도 새로운 감각, 즉 현실을 오히려 더 현실적이게 만드는, 기존의 감각으로는 접근이 안되는 세계의 속살을 만지는 감각으로 다가오면 좋겠는데, 별로 그렇지 않았어요. 저는 작품집 내에서 최소한의 의미 연관과 현실 연관이 있는 시들이 더 좋았으니까요. 그래서 그렇지 않은 시들이 유희적 재능의 소산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더라고요. 물론 유희의 재능은 소중하지만, 그게 새롭지는 않죠.
정홍수 그런 감각의 차원에서 생각해볼 만한 시가 「커브」가 아닌가 싶은데요. ‘커브’라는 제목과도 호응하는 “휘어진 그늘”이라는 이미지는 송승언의 시가 스스로를 가리키는 지점이다 싶은데, 2연의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입을 벌린다 그것은 내게 없는 표정/어쩜 저렇게 환할까 치아 사이로 펼쳐진 복도를 따라서 하나 둘 둘 하나” 같은 대목은 그냥 그 자체로 너무 상큼하달까, 별달리 어려운 시어를 쓰지 않고도 풍경을 낯설게 감각하게 하는 송승언 시의 힘이 잘 살아나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 둘 둘 하나”가 “둘 하나 하나 둘” “둘 하나 하나 하나”로 변주되는 지점도 그냥 좋고요. 딱히 어떤 현실 연관이 짚이지 않더라도 이런 시는 그 자체로 충분히 즐길 만했어요. 짧은 시 「망원」을 보면, 마지막에 “이미지가 지루해지면 집으로 왔다”고 되어 있는데, 송승언의 시야말로 스스로 이런 부담 앞에 많이 노출되어 있는지도 모르죠.
신용목 사유나 인식으로부터 무관해지려 하고, 그런 노력을 통해서 현상을 최대한 객관화하려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보입니다. 의미 없음을 통해서만 자기 시의 의미를 계속 만들어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요. 이를테면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의 마지막 대목에서 “배후에서 갈라지는 길이 보이지 않은” 것처럼 심연이나 깊이 따위를 상정하지 않는 것이죠. 「위법」에 나오는 “간격을 허물”고, “말이 되지 않으려는 저 빛들” 같은 표현도 마찬가지인데요. 대상에 어른거리는 자신의 감각을 이미지화한 다음 그 이미지의 연쇄를 통해서 환기되는 미지의 효과를 노리는 것은, 이미 젊은 시인들에게 패턴화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만만치 않은 재능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우연한 효과라면 송승언은 비교적 그 우연성을 성공적으로 직조할 줄 아는 시인인 거죠.
정홍수 「드론」 같은 시는 이미지들이 조금 낯설긴 하지만 잘 구축된, 전통적인 시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백조공원」도 그렇고요. 그러니까 송승언 시는 의외로 전통적인 시법과도 접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가령 시집 전체적으로 ‘빛’이라는 시어가 반복되는데, 이 경우 기왕에 있는 이미지의 자장을 낯설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물’이나 ‘돌’의 경우도 그렇고요. 첫 시집인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추후가 많이 궁금해지는 시인입니다.
신용목 시가 만들어낸 이미지로부터 시가 튕겨져 나가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선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점으로 이뤄진 시 쓰기를 하고 있어서 다채로운 접근이 가능한 것은 아닐까 합니다. 「드론」은 어떤 원형의 에너지가 구축하는 세계와 그 희박한 근원을 이미지화한 것이고, 「백조공원」의 경우도 흩어졌다 모이고 모였다 흩어지는 공원의 흐름을 잡아내면서 거기서 솟아오르는 가상의 이미지를 통해 현실로부터 유리된 구원을 그리는 것이라고 읽었는데요. 정홍수 선생님 말씀처럼 그 해석에 있어서 전통적인 독법과 일치하는 지점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지만, 그 성공여부와 별개로, 이미지를 통해 해석의 가능성을 여러 방향으로 펼쳐놓는 것이 그와는 다른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권여선 그래도 전체적으로 난해시라거나 전통적인 독법으로 읽기가 불가능한 시라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해요. 「죽은 시들의 성찬」 같은 경우는 매우 소박한 시거든요. 제가 볼 땐 이 시집에 요령부득의 난해시와 전통적인 이미지로 구축된 시, 현실과 연관된 시 들이 섞여 있는데, 난해한 쪽을 시인의 대표시로 내세우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반대로 현실 연관과 긴장이 있는 시를 이 시인의 대표작으로 읽고 싶어요.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도 그랬지만, 젊은 날 친구들과 보낸 한 시절에 대해 말하는 「밝은 성」도 마치 80년대 초반 시처럼 그윽했고, 「눈 속의 잠」에서 아들과 아버지의 구도 자체도 고전적인 반열이라 언뜻 이성복(李晟馥)의 느낌도 들었어요. 아무튼 저로서는 이런 시들과 요령부득의 난해시들 사이의 고리나 접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정홍수 현실을 어떻게 규정하든 현실과의 긴장력을 확보하는 문제는 어떤 문학에서도 피해갈 수 없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방법적으로는 주체의 자리를 조정한다든지, 현실의 맥락을 삭제하거나 변형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돌아와야 하는 지점이 있는 거겠죠. 딱히 송승언의 경우만이 아니라, 오늘 논의했던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신용목 방법적으로 주체와 현실을 분리시키고자 한다기보다는, 주체가 대상을 장악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러다보니 주체의 감각이 대상 앞에서 여러 갈래로 어른거릴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들로 인해 우리가 사는 세계가 새롭게 환기되고 또 흔들리는 사례를 만든다면, 거기에 현실이 부재한다 하더라도 궁극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문제는 이제 그런 방법에도 어느정도 내성이 생긴 것은 아닐까, 아니 이제 그런 방법이 패턴화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이지요.
권여선 앞서 김성중에 대해 했던 생각과 비슷한데, 이 시인도 재능이 있고, 기존의 인식과 거리를 두고 뭔가 새롭게 조직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새로움이란 게 새로우려는 의지만으로는 안된다는 게 안타깝죠. 기존의 틀과 거리를 두기 위해 있는 힘껏 달아난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뭔가 인식의 충격과 동요가 나타나야죠. 그에 따른 미적 효과가 폭발해야 하고요. 그런데 단절의 포즈를 취하고는 있지만 그게 단지 기시적인 새로움에 불과하다면, 기시감을 꽃단장하는 기예에 불과하다면…… 저는 이 시인을 조금 더 기다려보고 싶어요.
신용목 저는 송승언뿐 아니라 많은 시인들이 시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시를 썼는데, 그 작품들이 이른바 문청이나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흥행하는 이유가 궁금하더라고요. 시에 대한 환상이랄까요? 이 세계에서 시가 무엇이고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이라는, 시라는 장르 자체의 상징성을 그들이 소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느 시대에서건 시를 쓰고 읽고 있다는 건 분명 상징적인 면이 있고 그것이 환기된다는 건 여전히 시와 세계에 대한 건강한 고민이 있다는 거지만, 역설적이게도 시작방법과 존재양태에 대한 그런 식의 상징화는 시의 몸,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 있는 시의 육체에 접근하는 길을 한정하거나 흐려놓기도 하거든요. 여기에는 시 독자들이 가진 묘한 역설이 있는 것 같아요. 시 자체보다는 시인이 지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달까요. SNS 등을 통해 시인들이 자신의 시론을 적극적으로 변론하는 상황이 만든 묘한 역설이 없지는 않은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시로 잘 씌어진 순간보다는 시로 씌어질 수밖에 없는 순간에 좀더 집중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정홍수 이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권여선씨 오늘 좌담 어떠셨나요?
권여선 좋은 소설과 시를 읽고 두분과 얘기를 나누니 여러모로 공부가 되는 기회였는데, 사실 좀 힘에 부치네요. 혼자 읽고 끄덕끄덕 넘어가는 게 아니라 자꾸 제 느낌을 되짚어 생각하고 분석해야 했으니까요. 저 역시 매번 소설 쓸 때마다 고통을 겪는 위기의 작가라 괜히 입찬소리 했다 부메랑으로 돌려받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됐고요. 혼자라면 엄두가 안 났을 일인데 두분과 함께여서 해낼 수 있었다는 입에 발린 말씀을 드리면서, 이건 진심인데, 저야 한번으로 끝이지만 두분은 어떻게 매번 이렇게 하시는지 놀랍습니다.
정홍수 시·소설 모두 세대별 특징과 함께 그것들이 모여 이루는 한국문학의 힘을 풍성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나 합니다. 두분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